백두산족에게 고함 - 봉우 권태훈
1. 나에게서 구하라
소아와 대아의 한계
세상사람들은 걸핏하면 소아니 대아니 하는 말들을 잘한다. 그러나 나는 이 한계를 잘 알수가 없다. 소아나 대아나 공통된 점이 많은 것 같고 그 차이점이 얼른 눈에 안 띄는 것이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소아요, 어디까지가 대아인가 하는 의문이 없지 않다. 사람으로 테어나서 소아도 될 수 있고, 대아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닭이 울면 일어나서 늘 선을 행하는 자는 순임금의 무리이고, 닭이 울면 일어나서 항상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는 도척의 무리다' 라고 소아와 대아를 구분했는데 이는 자기 양심에 비추어 판단할 일이요, 밖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는 알 수 없다. 무심으로 악을 행하면 비록 악행이라도 벌하지 않고, 무심으로 선을 행하면 비록 선행이나 상을 주지 않는다고 평한 곳도 있는데 이것은 자기 내면의 양심상의 비판이요, 현실적으로는 밖으로 드러나게 선을 행해야 선한 사람이 되고, 악한 행위를 드러내야 악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 가운데 소아가 있고 악한 사람 가운데도 대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선인이나 악인이라는 것은 세상사람들의 안목에 의한 일시적 평가가 대부분이다. 주공의 유언과 왕망의 근신을 세상 사람이 현세에서 관측하면 그 한계를 잘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성인과 대악인의 엄청난 차이로도 일시적으로는 그가 소아인지 대아인지를 구분하기 곤란하거든 하물며 세인들이 소아니 대아니 평하는 것을 가지고 어디까지 진실에 부합되는지를 알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자기 자신도 목적을 확립한 사람이 아니면 주위환경으로 인해 혹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으니 그 소아성과 대아성을 어느 여가에 평할 것인가. 예를 들어 만리 길을 두 사람이 같이 가는데 한 사람은 소아를 위해서 목적지에 가고, 다른 한 사람은 같은 목적지를 가되 대아를 위해서 가는 것이라면, 만 리 동행 중에야 그 동행인의 목적이 다른 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목적지에 가서도 두 사람의 실행한 일이 완전히 성공한 뒤에야 갑은 대아를 위해서 간 사람이고 을은 소아를 위해서 간 사람인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목적지까지 갔더라도 성공을 못하면 누가 그의 실행했던 일이 소아를 위한 것인지 대아를 위한 것인지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길을 가는 도중에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아무런 흔적도 없을 것이니 이런 구분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옛사람들은 평생의 큰 계획을 가슴속에 품고도 밖으로는 성공을 못하게 될 경우에 대비하여, 문장명필이나, 형정지학이니, 의약복서니, 은둔이니 하며 목적지에 가기 전에라도 부수적으로 이런 것으로라도 자기를 대표할 유업을 남기려고 고심하였던 것 같다. 군자라고 대아만 되라는 것도 아니요, 호걸이라고 소아만 되라는 것도 아니다. 자기의 습성이 좌우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같은 이 세상 백년을 지낼진대 소아도 될 수 있고, 대아도 될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으므로 될 수 있으면 대아를 목표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대아와 소아의 한계가 아주 분명해서 보통사람은 절대로 대아라는 선을 넘지 못한다 해도 무슨 짓을 해서든지 넘어 보고자 할 것인데, 그 한계가 아주 모호하므로 마음만 먹으면 바로 먹고 실행만 올바르게 한다면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왜 소아에서 방황하며 대아를 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소아와 대아의 한계는 일을 행하기 전에는 타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점으로 보면 대아인 소아도 있고 소아인 대아도 있다. 여기서 구분이 곤란하다는 말이다. 말로는 쉽게 구분을 하나 그 한계는 알기가 곤란해서 소아도 될 수 있고 대아도 될 수 있는 관계로, 될 수 있으면 그 한계를 초월하여 대아로 가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화를 받는다
어떠한 일이든지 일한 사람이 상이나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일하지 않은 사람이 남의 상이나 벌을 받는다면 이것은 공평치 못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의 세상에서는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법률도 이 불공평함을 범하곤 한다. 어떠한 특수 계층의 이익을 위해서 법률이 조직화된 불법행동에 이용되기도 한다. 현 사회에서 밖으로 드러나는 증거 문제로 아무 죄없는 말단에서 처벌을 받는 사례가 많은 것은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그러나 이 처벌받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처벌받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한 편 여러사람이 처벌되는 문제를 내고도 이익을 혼자 차지하고 편안히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악이 누적되어, 법에서는 용서할지라도 하늘의 벌이나 신의 벌을 받게되고 그 다음 사람의 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증명할 뿐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선한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하고 악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 라는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시기의 이르고 늦음은 있으나 착한 사람이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이 재앙을 받는 것은 조물주의 대공식이다. 그저 양심에 비추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내려다보아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들의 일시적 재앙이나 복을 받음에 상관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 변화해 가는 세상사의 흐름에 같이 흐리지 말고 변함없는 공정한 마음으로 하늘의 원칙대로 대아를 위해 걸어나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비판해 보았을 때 사람으로서의 할 일은 다 했다고 한다면 만점이다. 일마다 모두 잘못했다 하더라도 대공식으로 계산해보면 정확한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 답으로 만족하지 말고 한 걸음 전진해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이나 또는 이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영원히 잊지 못할 선과를 심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현군자들이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선을 권하심이며 또한 각 종교에서 복선화음론(착한 사람에게 복이 오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이 온다)을 제창함이라고 본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사람들이 일시적 현상을 보고 그것을 그 사람의 최종답안으로 잘못 아는 것을 시정하기 위해서이고, 또다른 이유는 나 자신도 비판해서 쉬지 않는 노력과 성의로 처음의 뜻을 이루려는 자경의 심정에서이다. 우주의 대공전은 휴식함이 없고 우리의 심신도 이 공전을 따라서 구르고 구른다. 일음일양의 도는 변함이 없고, 우리는 그 가운데 생로병사의 궤도를 걷는다. 이 우주는 멸함이 없고 우리의 인류도 그와 같을 것이다.
일흔 살에 생각한 내 인생의 잘못
지난 일에서 기억이 새로운 것은 인생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좋은 기회를 만나고도 놓쳐 버린 일이다.
첫째, 아주 어렸을 때 무정 선생 밑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했으나 그것을 계속하지 못한 일. 둘째, 여섯 살에 신식학교에 입학했으나 역시 길게 수업하지 못한 일. 셋째, 서울 정동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통학 중지한 일. 넷째, 충북 영동에서 한학자 박창화선생의 지도를 일시적으로 받다가 중단한 일. 다섯째, 소학교 졸업후 다시 우등생으로 서울 고등보통학교에 선발생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일. 여섯째, 일본서 정신수련을하여 약간의 얻은 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한 일. 일곱째, 충남 공주로 내려가기 전까지에 하릴없이 공백기를 가진 일과, 공주로 가서 우연히 상봉한 산주 박양래를 20년 가까이 상종하면서 그 절세의 무예를 눈으로만 보고 학습하지 않은 일. 이것은 내 자신보다도 후배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다. 여덟째, 그러던 중에 내가 유불선 삼교와 제반 학설을 두루 공부했으나 깊이 정진하지 못한 일. 수십 년간 정신수련 행각을 하면서도 깊은 정열을 내지 못한 것이 내가 대성하지 못한 주된 원인이다. 아홉째, 만주와 몽고와 중국 등지에서 정신계의 여러 스승들을 만나고도 그들 밑에서 몇 년씩 수행하지 못한 일. 약간의 견문으로 눈만 높아지고 자만심만 커져서 늙은이가 되도록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낸 것이 가장 후회되는 일이다. 열째, 후배 양성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고 겨우 형식만 지도한 일은 내 책임이다. 내가 지도한 분 중에서 약간의 효과를 본 분으로는, 정상삼화까지 발현한 분이 설초 한 분이요, 그 다음 권오훈군을 비록 삼화까지는 못갔으나 간간히 드러나는 바가 초급자 이상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 다음이 송사이다. 이 사람은 비록 정신적 경지의 폭은 좁으나 그 혜안만은 초계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 다음이 구영직군인데, 구군은 비록 수련기간은 짧으나 그 정신적 발효는 매우 뛰어났다. 이는 전생의 흔적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다음이 주형식군이다. 이 사람도 단기적 수련으로 어느 경지까지 올랐었다. 역시 전생의 흔적이 있는 듯하나, 6·25때 희생되어서 유감이다. 그밖에도 여러 수련생이 있으나 계속성이 없으니 말할 수 없다. 모두 내가 전력 지도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며, 수련생들도 전심전력했다면 그 이상의 경지에 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내가 아주 늙기 전에, 비록 바탕이 없으나 이 방면에 버리지 못할 우리 동지들을 규합해서 후배 육성에 노력을 다할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