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족에게 고함 - 봉우 권태훈
1. 나에게서 구하라
나에게서 구하라
옛부터 지금까지 정신을 수련하느니, 무슨 비법을 배우느니 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 비법이 스승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무에서 유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승이라는 것은 제자에게 어디서 어디까지 가야하며, 또 이런 산을 넘어 저런 물을 건너가야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 주는 것에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도중에 거쳐가야 하는 멀고 험난한 길을 자세히 지도해 주는 것이 스승이요, 잘 가고 못가는 것은 스승의 책임이 아니다. 항상 내 자신이 잘 가야 하는 것이니, 비록 스승의 도움은 바랄 지언정 목적지까지 잘 가고 못 가는 것은 자신에게서 구해야 한다. 나에게서 구하라. 하늘을 놀라게하고 땅을 진동시킬 비법도 모두 나 자신의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러한 마음 하나가 그 이루고 못 이룸을 좌우하는 것이다. 물론 스승이 가르쳐 주는 길이 옳지 않다면 이는 그 스승된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공부의 이루고 못 이룸은 자기의 정성된 노력 여하에 있으며 나 자신밖에 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만고불변의 법칙이요, 진리다.
세상의 일반학문은 스승이나 친구의 도움만 가지고도 아주 어리석지만 않으면 상식선까지는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수련에는 비록 신선과 부처가 지도하더라도 본인인 내가 성의가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안에서 나를 구하라. 내 안에서 나를 구하면 신선도 될 수 있고, 부처도 될 수 있는 법이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수운 선생의 말씀에 '인내천'이라는 내용이 있다. 사람이곧 하늘이라, 사람의 마음이 곧 천심이요, 사람의 움직임이 곧 하늘의 뜻이다. 이것을 알라. 천지인, 곧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한 몸이니 하늘을 알고자 할진대 가장 가까운 곳인 나에게서부터 연구해 나가면 하늘도 알 수 있고 땅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근본 원리다. 사람의 사람됨과 천지의 천지 됨이 동일한 원리에서 이루어지며, 만물의 나고 자라고 거두고 돌아가고 하는 일도 바로 그 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높은 것이 하늘이요, 낮은 것이 땅이며, 높고 낮은 것을 동시에 갖춘 것이 바로 사람이다. 여기서 갖추었다 함은 하늘과 땅의 중간자적 존재인 사람으로서 자신의 지혜를 키워 나가면 하늘도, 땅도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갖추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산천하지, 즉 위로는 하늘에 통하고 밑으로 땅에 이어지려면 내 안에서 진정한 나를 구해야 한다. 내 밖에서 나를 구한다면 그것은 나 아닌 다른 것은 구한 것이다.
현대의 고도화된 물질 문명 사회에서 과학만능을 자랑하지만, 눈 있는 자가 본다면 벼룩이 장판 위에서 뜀뛰기를 하며 자기의 용맹스러움을 자랑하나, 사람이 주위에서 이를 지켜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우리의 정신수련도 역시 그 한계가 없다. 누구나 자기의 간 것만큼 갔을뿐,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았다. 누구나 자기의 간 것만큼 갔고 그 이상은 억천겁을 갈수록 더 닦아야 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우주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시간적으로는 돌을 맞부딪칠 때 반짝 일어나는 불꽃처럼 짧고, 공간으로 보면 가이없는 바닷물 위에 떠있는 좁쌀 알만큼 미미한 존재라고 하였다. 이런 가운데 무엇을 하겠는가?
그렇다고 비바람 부는 대로 세월을 허송할 수 없으니, 전광석화 중에서라도 만년불변의 자세를 지니고 나를 내 안에서 구하면 이것이 바로 '순리에 따라 살며 일체를 받아들이면서 쉼없이 정진하는' 배우는 사람의 길이 될 것이다. 천 가지, 만 가지 말과 글이 모두 다 먼저 행함보다 못할 것이다. 나에게서 구하라. 나밖에 내가 없다. 나를 내 안에서 구해 얻음이 있어야 비로소 나 아닌 다른 남도 미루어 알 수 있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고 나 아닌 남을 안다는 것은 내가 나에게 죄인이 되고 남에게도 죄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는 모르되 나 아닌 남을 잘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늘이 못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그대로 사람의 상태에만 머물러 있다. 내가 내 마음의 일부마저도 거느리지 못하면서 감히 남을 거느리려고 생각한다는 것, 그것을 죄라 하지 않고 무엇을 죄라 하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덕이나 공은 세우지 못할지라도 죄인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서 구하라. 나에게서 나를 구하라.
나의 한계
세상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나는 어떠하다느니, 나는 무슨 일을 하겠다느니, 나의 장래일을 위하여 내 과거일은 이랬어야 하느니, 나와 남을 비교하느니 하는데 대체, '나' 라는 것의 한계를 잘 알 수 없다. '나'의 한계는 무엇인가? 세상에 나온 후부터 나라고 이름붙여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일생을 통해 더불어 사는 이 육체를 바로 '나'라고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어디까지가 '나' 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만약 세상에 나온 이 육체를 나라고 한다면, 이 육체가 나오기 전에는 나라는 것이 없었을 것이요, 또 이 몸이 죽어지면 나라는 것이 자연 소멸될 것인가? 세상의 해석은 이 방면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야 알 수 없고 또한 죽어지면 그 이후의 세계도 알 수 없는 것이니 '나' 라는 것은 한계가 아마 이 정도인가?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렇다. 이 육체가 생기기 전에는 나라는 것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 육신이 온 후에 내가 생겼다고 한다면, 또 그래서 이 육신을 '나' 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육신이 죽었더라도 그 육신이 나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호흡이 정지되고 이 몸에 열이 식어서 시체가 되면 그때까지 나를 대표하던 이름으로 그 시체를 부르지 않고 다만 누구의 시체라고 하는 일개 송장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나에게 가장 가깝던 사람도 모두 나를 피한다. 따라서 이 육체가 나를 대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불변하는 '나'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육체가 내가 아니라면 무엇이 나란 말인가? 어떤 이는 정신이 곧 나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이 육체는 무엇인가? 또는 정신과 육체를 합한 것이 곧 나라고 하나, 그렇게 되면 정신이 육체를 떠나는 찰라에 나라는 것도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속에서 볼 때 이 정신, 이 육체를 다 떠나서도 나라는 존재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자주 체험하게 된다. 즉, 내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후에도 여전히 나를 대표한 이름이, 아무개라는 명칭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름이 곧 나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또는 내가 출생하기 전의 몸도 나요, 현재의 몸도 나요, 미래의 몸도 불변하는 나라고 하니 무엇이 진정한 나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각자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자기 주장이 옳다고 하나 어느 '나'가 진정한 나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 이러한 주제는 애초부터 아주 한계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것 같다. 먼저 '나' 라는 것을 잘 찾아야 이 한계를 알 수 있다. 저마다의 주장이 다르니 지금 말을 하고 있는 나도 이 한계가 의심이 나서 매듭을 짖지 못하는 것인지, 또는 나 자신의 결론이 있으나 말을 안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그대에게 맡긴다. 그저 나의 한계를 알 수 없다는 의문을 남겨두고 뒷날의 누군가에게 답을 구하는 것이다. 나의 한계는 무엇인가?
내가 있다 없다 함도 모두 나요 과거도 미래도 현재의 '나'라 없고 또 없고, 비고 또 비어도 나 아님이 아니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 또한 나로 말미암으니 세상 사람들이여, 삶과 죽음의 길을 찾고자 한다면 빈 산 밝은 달에 '참나'를 깨달으라
공자의 제자 자로가 죽음에 대하여 공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생을 모르는데 어찌 사를 알리요?' 라고 반문하였다. 공자가 삶을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질문을 한 자로가 삶을모르면서 죽음에 대하여 알려고하니 이를 지적한 것이다. 말하자면 비교할 근거가 되는 생을 알지도 못하면서 죽음을 무엇하러 묻는가 하신 것이다. 나의 생부터 깨달으면 자연히 죽음은 알 일이라는 뜻이다. 자로가 생을 모르면서 사를 묻다가 반문을 당하긴 했지만, 자로 역시 '나의 한계'에 의문을 가졌던 듯 하다. 역시 공자의 제자인 안자는 온종일 어리석은 사람처럼 앉아있기만 하였으나, 공자는 그를 두고 '힘써 배우는 사람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다. 더불어 안자는 '가장 높은 도의 경지에 올랐다는 순임금은 누구이며, 나는 또 누구인가' 라고 하였다. 공자와 안자는 생을 깨닫지만 한 것이 아니라 천년 만년 이전까지 나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석가모니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나를 해석하였다. '나'라는 것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니 유아독존하라는 말씀이다. 이 정도로써 그대의 후일 공부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나의 한계는 무엇인가?'
나만 깨달으면 나의 한계도 알 수 있고, 내 주변의 물질의 이치도 알 수 있다.
나를 안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자기가 자기를 아는 일이다. 자기가 자기를 알지 못하고 남이나 남의 일을 안다면 이보다 더 곤란한 일은 없을 것이다. 자기의 과거 현재의 경력이나 실력이나 또는 업적으로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가 잘알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기의 학력도 알 수 있고, 자기의 업적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자기의 성품이나 일을 꾀하는 힘이 얼마만큼 되느냐 하는 것도 자기 이외에 누가 알 것인가? 그러니 냉정히 자기를 살펴서 자기의 힘에 맞는 일을 하면 일에 실패가 없을 것이다. 먼저 내가 나를 알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으로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스스로를 평가해 보아야한다. 내가 나를 바르게 평가할 때 비로소 남을 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남을 알고 나를 알면 만사에 무리가 없다고 했다. 즉 무슨 일이든지 조화롭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난 일을 보면 남을 알기를 잘하는 사람도 자기를 알지 못해서 일에 실패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모든 일이 순리에 따르지 못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자기가 자기를 알더라도 왜곡된 평가를 내려서는 안된다. 용서없이 바른 평가를 내려야 한다. 무슨 일을 할 때나 남을 아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나를 아는 것 역시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부분적으로는 자기를 아는 것이 쉬울지 모르나 전체적으로 자신의 위치와 본질을 알기는 어렵다. 세상에는 먼저 자기 자신을 평가해 보고 나서 일을 시작하기보다 맹목적으로 하는 사람이 더 많은 듯하다. 이 맹목적인 무리가 세상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어떤일을 하기전에 먼저 내가 나를 알 수 있는 길을 찾으라. 맹목적으로 세상의 여러 길을 활보하지 말고, 나는 누구 인가에 대한 해답을 먼저 찾으라. 그 외에 다른 길이 있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