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질에 관한 일곱 가지 이론 - 레즐리 스티븐스
제3장 플라토 : 철인의 통치
사상 체계에서 필자가 지적했던 구조상의 공통된 네 가지 구성 요소 - 우주론과 인간론, 그리고 인간의 잘못에 대한 진단과 그 처방 - 의 일례인 플라토(427-347, BC)의 이론을 검토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경쟁적인 이론들의 고찰을 시작해 보기로 하겠다. 플라토의 이론은 아주 오래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과도 여전히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것이 최선인가를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통치할 때만이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다는 오늘날 여러 삶들의 주장은 바로 플라토 이론의 정수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 철학자의 배경을 잠깐 살펴보면, 플라토의 심상의 근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는 그리스 도시 국가인 아테네에서 태어났으며, 이 때의 아테네는 무역을 통해서 한동안 경제적 부를 누렸고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민주주의 통치를 누렸는가 하면, 학문적으로는 위대한 도덕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에서 그 전성의 극에 달하는 전례 없는 번성을 했던 때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테네를 패망시키고 잠시 동안의 폭정의 시대를 초래했던 전쟁 기간 중에 플라토 자신은 성장했다. 민주 정치가 회복되었을 때 소크라테스는 신에 대한 불경과 젊은이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소피스트들과 유사했으며, 그 당시의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의 민주 정치에 특히 쓸모가 있었던 일종의 학예인 수사학 또는 화술을 가르치기를 주장했다. 또한 그들의 의견 가운데는 도덕적-정치적 규범들이라는 것이, 다른 국가의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딴 관습들(무역을 통해 아테네에 알려진)을 고려해 볼 때, 독자적인 관습을 벗어나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있겠느냐에 대한 회의론이 공통적으로 표명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주된 관심은 우리가 옳게 사는 방법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관심은 플라토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플라토는 사람들이 익혀 온 인습적인 견해를 의문시하여 그것을 타파하고자 했다는 죄목으로 자기 스승을 처형한 데 대해 깊은 충격을 받았다. 당시의 정치와 철학에 환멸을 느낀 플라토는 우주에 대한 진리뿐만 아니라 사회의 병폐를 고칠 수 있는 치유책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쓴 많은 철학적 대화 속에 스스로 도달한 결론들을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말하면서, 사실상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창설한 아카데미에서 그것들을 가르쳤다.
플라토의 대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히 '국가론'으로, 이 책 속에서는 이상적인 인간 사회에 대한 플라토의 개념이 개략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여기서 철학과 도덕과 정치와 교육, 그리고 예술을 포함한 많은 주제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필자는 이곳에서 이 대화를 중심으로 플라토의 이론을 고찰하고자 하며, 텍스트 참조를 위해서 전통적인 수자 표기 방법(이 방법은 거의 모든 편집 또는 번역물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우선 주요한 이론들을 설명하고 나서 차례로 그것들을 비판해 보기로 하자.
우주론
비록 플라토가 여러 곳에서 유일신(God)이나 여러 신들(the gods)에 대해서 언급은 하지만, 단일신이든 다신이든지 간에 그가 신들의 존재를 얼마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가 유일신에 대해 얘기할 때도, 기독교의 인격적인 하나님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음은 비교적 뚜렷하다. 그리고 비인격적인 신에 대한 개념조차도 '국가론'의 요지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플라토의 우주의 개념에 중심이 되는 것은 그의 형상(Forms)론이다. 이 이론은 논리적인 측면, 형이상학적 측면(구극적 실재가 무엇인가를 다루는 것), 인식론적 측면(인식의 대상을 다루는 것), 그리고 도덕적 측면하에 요약될 수 있다. 한 낱말이, 예를 들어 "고양이"라는 낱말이 사실상 많은 다른 개별적인 것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플라토의 대답은 이러한 일반적 낱말이 각각 대응하는 하나의 형상, 예컨대 고양이라는 형상(the Form Cat)이 있으며, 이 형상은 모든 개별적인 고양이와는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다(596). 이 개별적인 동물들이 고양이들로 되는 것은 그들이 고양이라는 형상과 닮고 있다든가, 그 형상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형상론의 논리적 측면-일반적인 낱말의 의미의 문제, 즉 이른바 "일반 개념의 문제(problem of universals)"에 대한 해답-이다. 이 형상들은 변하거나 썩지 않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들(질료)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 형이상학적 측면이다. 형상들은 시-공에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어느 감각에 의해서도 지각될 수 없다(485, 507, 526-7). 플라토는 변할 수 있고 파괴될 수 있는 물질 세계를 초월해서 또 다른 영구 불변의 형상의 세계가 있다고 통찰하고 있다. 플라토가 그의 유명한 비유에서, 즉 인간의 조건을, 사슬에 묶인 채 동굴의 안쪽 벽을 마주하고 앉아 있기 때문에 바깥 세상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동굴 벽에 비친 사물들의 그림자만을 실체로서 알고 있는 죄수들의 조건으로 비유한 데에서 암시되고 있듯이(515),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물들은 이 구극적인 실체들과는 아주 먼 거리에서 연관을 맺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플라토는 교육 과정을 통해서 인간들이 구극적인 실체인 형상들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존재하는 것만이 완전히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형상에 대한 이와 같은 지적인 인식만이 참 지식이라는 것이 형상론의 인식론적 측면이다. 영원하지 못한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각은 지식이 아닌 한갓 믿음이나 의견에 불과한 것이다(476-80). 형상론의 이 세 가지 측면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예증은 플라토가 정통해 있었던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어떤 물리적 대상도 완전히 곧거나 둥글거나 네모나지 않고 항상 어떤 불규칙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하학이 선과 원 혹은 사각형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이상적인 대상들-두께가 없는 곧은 선이라든지 완벽하게 둥근 원 등-에 관한 정리가 논리적인 이론에 의해서 아주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예에서, 우리는 물질적인 대상들이 불완전하게 모방하는 초시간적 대상, 곧 형상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플라토의 인간의 본질과 사회에 대한 이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형상론의 도덕적 측면이다. 가령 "용기"와 "정의" 같은 도덕적인 낱말들을 생각해 보라. 일반적인 모든 용어에서 그랬듯이 플라토는, 용감한 행동, 의로운 행동, 용감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라 되어 있는 여러 개별적인 행동과 삶들을, 그 형상인 용기, 정의와는 구별하였다. 일반적인 낱말은 어느 면으로 그 대응되는 형상을 귀감으로 모방하는 그 행동들과 사람들에게도 바로 적용된다. 그러나 오히려 유클리드 기하학의 예들에서처럼, 어떠한 행동이나 사람도 절대적으로 용기나 정의의 완전한 모델이 못된다. 왜냐하면 누구도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다는 자명한 이치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적 형상들은 객관적인 도덕 기준들을 설정하여 그 기준들에 의하여 인간 행위와 성격을 판단한다. "선"이라는 낱말은 도덕에 관계되는 낱말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낱말이기 때문에, 선이라는 형상은 형상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며, 거의 신과 같은 역할을 하여 모든 실재와 진리와 선함의 근원이 된다(505-9). 형상이 우리에게 설정해 준 절대적 기준들은 단지 개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정치 생활의 전반을 위한 것이므로, 그들은 이상적 형태의 인간 사회가 어떤 것인가를 규정해 준다(472-3). 따라서 형상론은 플라토 시대에 만연되었던 지적 도덕적 회의주의에 대해 이 철학자가 제시한 하나의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론은 우주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삶의 목표와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의 목표에 대한 참다운 지식을 얻기 위하여 지성의 힘을 발휘한 가장 설득력 있는 진술 가운데 하나이다. 또 그것은 지성에 대한, 그리고 윤리학에 대한 소크라테스적인 관심에 대한 그리스도적인 신뢰의 정점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론
플라토는 인간을 이원적으로 보는 견해를 마련해 준 주요 원천 중의 하나다. 이 이원론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은 육체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비물질적인 실체다. 플라토는 인간의 영혼이 파괴될 수 없다. 즉, 영혼은 인간이 탄생하기 전에도 계속 존재해 있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론들이 '국가론'에서 언급되고 있지만(608-11), 이들에 대한 그의 주요한 논의는 다른 대화들, 특히 '메노'와 '파에도'에서 나타나고 있다. 영혼의 비물질론과 불멸론은 '국가론'에서 중심적인 주제로 다루어지지는 않지만, 형상의 세계와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물질의 세계라는 플라토의 대비와 자연히 관련되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형상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도덕의 관심이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국가론'에서 보다 중점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눈 이론이다(435-41). 가령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나, 물에 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손에 넣을 수 있는 물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 갈등을 생각해 보라. 플라토는 그 사람의 마음에 그 물을 마시도록 유혹하는 첫 번째 요소와 그것을 금하는 두 번째 요소가 있다고 논한다. 그 첫 번째 요소를 욕망 혹은 정욕(배고픔, 갈증 혹은 성욕 같은 모든 육체적 욕망을 뜻함)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 요소를 이성이라고 부른다. 플라토는 인간의 마음에는 이 외에도 세 번째 요소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바, 즉 시체 더미를 보고자 하는 불같은 욕망을 느끼나, 그것을 보고자 하는 자신에게 증오를 느끼는 사람의 이야기에서 예를 들고 있듯이, 스스로에 대한 화나 분개의 감정이 느껴질 때 생기는 정신적 갈등의 경유가 그것이다. 그는 여기서 욕망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분개나 화 또는 혈기(Spirit)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세 번째 요소라고 주장한다. 플라토는 어린아이들이 이성을 갖추기 훨씬 전에 혈기를 보여 준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 혈기는 일종의 자기 주장 혹은 이기심 같은 것으로서 내면적 갈등이 생길 때는 보통 이성의 편에 선다는 것이다. 이성, 혈기, 욕망은 어느 인간에게서나 나타나지만, 어떤 요소가 우세한가에 따라 각각 지식욕, 성공욕, 소유욕 등의 주된 욕망을 가진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이 나타나는 것이다(581).
플라토는 이 세 요소 중 어느 하나가 지배적인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데 분명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형상들을 지적인 사유에 의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궁극적인 실재로 보는 그의 관점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플라토는 이성이 혈기와 욕망의 두 요소를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혼의 세 요소는 각기 따로따로 적당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 인간에게 이상적인 조건은 이 영혼의 세 요소가 이성에 의해 통제되면서 서로 조화로운 화합을 이루는 데에 있다(441-2). 플라토는 이와 같은 이상적인 조건을 그리스 말로 디카이오시네(dikaiosune)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이 말은 "정의"라는 말로 보통 번역되고 있으나 정확한 영어 번역은 있을 수가 없다. 이 말을 개인에게 적용시켜 볼 때, 개인의 "행복" 혹은 "정신 건강"이라는 뜻이 플라토가 사용한 개념을 좀더 잘 전달해 줄 것이다.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그 이후의 많은 그리스 철학과 마찬가지로, 플라토는 지적인 사유 곧 지식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이와 같은 강조는 동시에 바로 도덕에 대한 강조가 된다. 왜냐하면 이는 철학자는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덕의 문제가, 지식과 도덕이 각기 달리 의견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문제라기보다 곧바로 인간 지식에 대한 문제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를 말해 줄 수 있는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 진리는 우리의 지적 사유에 의해서 변하지 않는 완전 무결한 비물질적인 형상들을 알게 될 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토의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론에 있어서 마지막 주요 특징은 우리 인간이 근원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라는 지적이다. 각 개인은 자급 자족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각 개인은 혼자 힘으로는 마련할 수 없는 필요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의식주와 같은 물질적인 필수품의 경우만 보더라도, 인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서 이러한 모든 것을 마련할 수는 거의 없다. 이러한 인간이 대부분의 시간을 생존하기 위한 싸움에 소비해 버리고 만다면 친교나 놀이나 학문과 같은 특수한 인간적인 활동을 할 여지는 거의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개개인은 각각 다른 적성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농부와 기능공과 군인과 행정가들이 있게 되는데, 그들은 각각 한 종류의 일에 전문가가 되게끔 천성과 교육과 경험에 의해서 적합한 직업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업은 직업을 택하는 데 있어서 다소 비현실주의적인 양자 택일보다 더욱더 효과적이다(369-70). 플라토에 의하면-물론 전형적인 그리스 인의 관점이기도 하다-사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서, 인간 이외 어떤 것도 인간보다 더 자연스럽게 사회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것이다.
진단
형상(들)은 인간과 인간 사회를 위한 플라토의 이상을 규정하고 있지만 철학자가 실제의 일들을 직시할 때, 이와 같은 일들은 이상과는 너무 유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정의"로서 일컫고 있는 영혼의 세 요소간의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인간 사회도 그가 역시 "정의"로서 일컫고 있는 조화와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플라토는 '국가론'의 한 부분(543-76)을 여러 형태의 불완전한 사회와 이 불완전한 사회에 대응되는 여러 형의 불완전한 개인들에 대한 진단에 할애하고 있다. 스파르타 사회와 같은 "금권 정치(timarchic)"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야심 만만하고, 경쟁심이 강하고, 군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며, 지성을 가진 사람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과두 정치"에 있어서, 정치적 힘은 재력가의 손에 달려 있고, 이 재력가를 움켜쥐는 자가 성공적인 사람이 된다. 플라토는 틀림없이 아테네 정치에서 얻은 자신의 경험으로 인해서, 민주주의에 대한 대단한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개인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 무엇인가를 다 똑같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동등한 발언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플라토는 생각했다. 그는 민주 사회의 전형적 개인은 훈련이 부족하며, 오직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존재라고 비난했다. 또 전제 정치로 말한다면, 민주주의 자유 방임이 낳는 바로 그 무정부 상태와 무질서를 초래하는 전형적인 정치 체제라고 플라토는 생각하고 있다. 한 지도자가 절대 권력을 얻게 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파렴치한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게 되므로, 그렇게 되면 인간의 본성에 있는 가장 범죄적인 요소들이 사회에 나타나 그 사회를 폭력 사회로 만들게 되는 것이다. 플라토는 각각 이런 유형의 개인과 사회는 이상으로부터 한층 유리되어 더욱더 불행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결론짓고 있다(576-87).
플라토가 진단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나타나는 결합들은 그가 인간 사회에서 발견하고 있는 결함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누구도 이 철학자에게 인간의 잘못이 개인의 책임이냐 혹은 사회의 책임이냐 하는 단순한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그는 오히려 이 두 요소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사회는 불완전한 개인을 낳고, 이 불완전한 개인은 불완전한 사회를 낳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각 개인에게 정의가 없는 한, 국가에도 정의가 있을 수 없고, 국가에 정의가 없는 한, 각 개인에게도 정의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의는 이 양 경우에 있어서 동일한 것으로, 각자가 각자의 직분을 행하는 자연적인 구성 요소 사이의 조화이며(435), 그 반대인 불의는 부조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과 국가 사이에 어떻게 조화를 확립시키는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처방
"철학자들이 이 세상의 왕이 되거나 혹은 왕과 통치자들로 불리우는 사람들이 실제로 철학자들이 되어, 정치 권력과 철학이 똑 같은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국가나 인간이 안고 있는 어려움들은 끝날 날이 없을 것이다(473)." 이것이 플라토가 내리고 있는 처방의 본질이다. 그 스스로도 이 처방이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것을 의식하고 있지만, 그의 형상론과 인간의 본질론을 고려해 본다면 그 속에 이론적인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만 하는가를 밝혀 줄 수 있는 진리가 있고, 이 진리가 배울 능력과 뜻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되어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와 같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야말로 당연히 인간 사회의 발전의 방향을 잡아 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들이다. 철학자들은 형상들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지식을 얻게 되는 자들이다. 따라서 만일 사회가 철학자들에 의해서 통치된다면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국가는 완전한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로서, 여기서 완전이라는 개념은 지적, 정치적, 도덕적인 것이 하나로 합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국가론'은 완전한 국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철학의 본질, 즉 플라토가 인간을 완전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그 도덕적, 지적인 인식을 분석하고 있다.
이런 완전한 개인을 내놓기 위해서는 정밀한 교육 제도가 필수적이다(376-412, 521-41). 이런 주장에서 플라토는 교육을,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는 주요한 요소로서 인식한 최초의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교육의 여러 단계를 구상하고 고등 교육은 이 고등 교육을 떠맡을 자격 있는 사람들, 즉 장차 사회의 통치자가 될 엘리트에게만 개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등 교육에서는 수학과 철학, 말하자면 형상에 대한 지식과, 진리 그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인간의 마음을 인도하는 학문이 강조되고 있다. 이리하여 엘리트는 그 어느 무엇보다도 철학을 사랑하게 될 것이나, 항상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 자기가 배운 지식을 사회의 발전에 적용할 것이다. 하위직에서 경험을 얻은 후 그들은 최고의 권력을 지닐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이와 같은 자들만이 사리 사욕을 위해 자신의 권력을 오용하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질적인 부보다는 올바르고 이치에 맞는 생활에서 오는 행복을 더 귀하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521).
그렇다면 사회의 나머지 계층, 즉 비엘리트는 어떤가? 인간 사회에는 인간들이 이행할 다양한 기능들이 있기 마련인데, 분업은 이 기능을 자연스럽고도 효율적으로 조직화하는 방법이다. 플라토는 그의 이상적인 사회를 근본적으로 세 계급으로 나누고 있다(412-27). 철인 통치자들을 제외하고, 전통적으로 보조자라 일컬어지는 계급이 있는데, 그들은 군인과 경찰, 그리고 공무원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통치자들이 지시한 것을 실행하는 계급이다. 세 번째 계급은 특정한 이름을 갖지 않은, 모든 종류의 일꾼을 총망라한 기능공과 상인 등을 포함하고 있다. 세 계급간의 구분은 엄격히 지켜진다. 플라토는 사실상 "정의", 즉 사회 복지는 각 계급이 서로 대립됨이 없이 자신의 본연의 직분을 수행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432-4). 그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바로 다음에 다루고 있는 개인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건강도 역시 이 세 구성원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일하는 데 있다. 플라토는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자신의 목적은 한 계급에 한정된 행복이 아니라, 가능한 한 전사회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420). 그의 생각으로는, 이 세계급의 구분이 엄격히 지켜져야만 국가가 화평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따라서 각 계급은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일이며, 사회에서 자신의 직분에 알맞는 정도 만큼의 행복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421).
플라토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 논의
'국가론'은 모든 시대를 통해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간략한 내용들은 이 책이 지닌 풍부하고도 다양한 사상 중 일례에 불과할 뿐 이 책 자체를 읽는 데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필자는 독자가 비평적 안목을 가지고 사고할 수 있도록 플라토의 이론과 진단, 그리고 처방에 관계되는 몇 가지 의문점을 대충이나마 계속 검토하고자 한다. 형상론의 많은 논리적, 인식론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여전히 전문 철학가들에게 특별한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문제들을 재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형상의 도덕적 측면은 이 글의 중점적인 목표가 된다.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만 하는가를 밝혀 주는 진리가 있다는 그의 이론은 그가 인간의 본질에 관계되는 문제들을 다루는 근본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거의 말할 필요조차 없다. 여러 세대를 걸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은 윤리학과 정치학에 나타나 있는 문제들의 다수가-비록 그 전부는 아닐지라도-보편적인 "진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무엇이 옳은가는 각 사회마다 그 답이 다르고, 일정한 한 사회 안에서까지도 단 하나의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두 사람이 도덕적 문제에 대해 서로 상반된 해답을 제시한다면, 그 대답은 진위의 문제라기보다 마치 어떤 이는 맥주를, 어떤 이는 과일주를 더 좋아하는 것과 같은, 취향의 문제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가치 판단의 객관성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는 도덕 철학에서 기본적인 것으로, 끊임없는 논란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플라토가 도덕과 정치에 객관적 기준들이 있다는 것을 믿게 할 만한 정확한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는 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이 철학자는 이러한 결론적 문제에 대해 아무런 직접적인 논의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는 그의 이론에 관계되는 의문점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남고 있음에 틀림없다.
객관적인 기준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플라토의 이론에는 그 객관적인 기준들이 무엇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합당한 방법 역시 없다(철인 통치자들은 이러한 방법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지만).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만일 교육받은 사람들이 무엇이 도덕과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들인가에 대해 진정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는가? 어떤 것이 옳은 관점인가를 보여 줄 만한 합당한 방법이 있는가? 플라토는 대립되는 의견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거의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플라토가 철학자들은 마치 태양의 현란한 빛처럼 그들을 비추고 있는 선 그 자체인 형상에 대한 비젼을 사실상 얻을 수 있다고 주장을 펼 때(508-9), 그 자신도 몇몇 군데에서는 합리적인 사고에서 거의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508-9). 그런데 만일 그러한 "비젼"에서 철학가들마다 제각기 다른 것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면 어찌하겠는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대립적인 주장의 갈등만이 존재할 것인가? 누군가가 자기는 어떤 중요한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그 사람에게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쉽게 생각을 한다(종교의 논쟁사가 입증하고 있듯이). 플라토는 철학가들이 사회를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가를 밝혀 주는 절대적인 진리를 알 수 있으니까, 그들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플라토의 이와 같은 관점은 소크라테스의 관점과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그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오로지 자신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개개인의 인간의 본질에 대한 플라토의 이론에는 많은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다.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인가?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며 파괴될 수 없는 것인가? 영혼이 존재한다 손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 각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가? 또한 이성, 혈기, 그리고 욕망으로 구분하는 것은 적절한 것인가? 이 마지막 문제에 대해서만 좀더 언급하기로 하자. 이 세 가지 구분은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여러 학설에서도 보편화되어 왔지만, 아마도 플라토의 이론은 인간 본성에서 서로 갈등을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최초로 그럴 듯하게 구분한 이론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혼의 각 부분에 현대적 용어로, 지성이니, 개성이니, 그리고 육체니 하는 명칭을 다시 붙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정밀하게 혹은 속속들이 나뉘어질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예를 들어, 감정이란 것도 이 세 부분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토가 그의 이상 국가를 위해 제시한 청사진에 대해 두 가지 주요한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첫째는 완전 무결한 사람들-철인 통치자들-이 절대 정치 권력을 가져야만 한다는 플라토의 요구에 관해서이다. 그러나 아무리 교육 과정이 잘 계획되고, 잘 실행된다 할지라도 아주 완전한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어떤 보장이 사실상 있을 수 있나? 철학자들은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결코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다는 플라토의 견해는 고지식한 낙관론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에게는 권력의 남용의 가능성에 대비할 어떤 정치 제도를 세울 필요가 없겠는가? 모든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가정한다면, 완전한 인간들이 있을 수 있다는 이성적인 생각에다 청사진의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비현실적인 태도가 아닌가? 현실에 입각한 정치 제도라면 이상적인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사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게 관심을 두어야 마땅하다. 플라토는 "누가 절대 권력을 휘두를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자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누구도 절대 권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해야 되지 않겠는가? 플라토는 민주주의를 너무 성급하게 그리고 부당하게 무시해 버린다. 아마도 그는 모든 시민이 빠짐없이 모든 결정 사항에 투표권을 행사하던 아테네식 민주주의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은데, 이러한 민주주의 제도는 적정 규모의 국가에서는 불가능한 제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성가신 제도가 될 수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의회 민주주의의 기본 사상-정부는 일정 기간 내에 재선거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상은 통치자들을 면직할 수 있는 제도적인 안전 장치를 마련해 주고 있는데, 이런 것은 플라토의 '국가론'에서는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의회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효율적이고 불완전할지는 모르나, 권력의 최악의 남용을 방지할 만한 보장이 없는 절대 권력의 정치 체제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두 번째 비판은 플라토가 국가의 구성원인 개개인의 행복보다는 국가 전체의 질서와 안전에 더 관심을 쏟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가 그의 '국가론'의 한 곳에서 이와 같은 관심을 말하고 있는 것을 이미 주목하던 바(420), 519-20에서 플라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법의 목적은 어떤 특정한 계급의 복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 사회 전체의 복지를 위한 것이다. 법은 모든 시민을 결속시키고, 그리고 시민들로 하여금 각각 개인적으로 공동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혜택을 골고루 갖도록 하기 위해 희유책이나 강경책을 사용한다. 이러한 태도를 조장하는 그 목적은 개개인으로 하여금 자신만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라는 통일체 속에서 서로 유대 관계를 맺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긍정적으로도 그리고 부정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각 개인이 사회 전체의 복지에 무엇인가 기여하고, 또한 특정한 법들(가령 살인과 도둑을 금하는)이 모든 사람에게 시행되고 있는 이른바 "공동체 정신"에 대해 일반적으로 호의를 갖고 있다. 이런 면에서 플라토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그러나 플라토의 청사진은 그의 세 계급의 엄격한 구분과, 국가의 질서와 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각 개인이 묵묵히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미루어 보아, 위의 공동체 정신이 의미하는 것 이상을 구상하고 있는 것 같다. 실상 원치 않더라도 통치자는 통치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보조 계급은 보조해야 하고, 일꾼들은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것이 플라토가 일컫는 국가의 "정의"라는 것인데, 이 정의라는 말은 우리가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공정하게 분배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만일 일꾼이 일꾼으로서 만족하지 않고 하등 정치에 공헌도 하지 못한다면 플라토는 아마 그를 일꾼으로 남아 있도록 강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통치자나 보조 계급 그 어느 쪽에도 유리한 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사유 재산(416)이나 가정 생활(457) 중 그 어느 것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라토는 자신의 이상에 합당한 안정된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개인의 행복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고 널리 생각되어 온 많은 것들을 기꺼이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사회가 그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의 이익에 이바지하지 않는다면 안정된 사회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안정과 효율은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것들은 분명코 사회 복지를 위한 유일한 기준이 아니요 더우기 가장 중요한 기준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현명한 엘리트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하는 플라토의 정치 강령은 혹독한 비판을 받아도 마땅하다. 그리고 그의 철학적 형상론은 많은 철학적 반론에 부딪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은 교육을 통해서 지식을 달성할 수 있고, 이 지식은 그 자체에 있어서도 가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명한 정부를 세우고 사회를 개혁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는 플라토의 일반적인 사상은 오늘날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러한 사상에 한해서는 다른 어떤 철학가들보다 플라토에게 은혜 입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보충 참고 문헌
기초 텍스트:'국가론(Republic)'(많은 번역과 편집이 있다). 펭귄 고전 시리즈에 있는 H.D.P.Lee의 번역(Penguin, London, 1955)은 주제에 의해서 텍스트를 구분해서 도움을 주고 있다. 같은 시리즈에 있는 다른 플라토의 대화편들도 유용하다. 미국 내에서는 F.M.Cornford의 해설과 주석이 붙은 번역(Oxford University Press 문고, New York)을 볼 것.
플라토의 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안내로서는, G.C.Field의 '플라토의 철학(The Philosophy of Plato)'(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2nd edn. 1969)을 볼 것. 이 책은 또한 참조 목록을 싣고 있다.
플라토의 정치학적인 설계에 대한 적대적인 공격으로서는, K.R.Popper의 '열린 사회와 그의 적(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ume 1)'(Routledge & Paul, London, 4th revd. edn. 1962; Princeton University Press 문고, Princeton, N.J.)을 볼 것.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나의 플라토에 대한 비판 중 많은 근거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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