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질에 관한 일곱 가지 이론 - 저자:레즐리 스티븐스
제1장 대립적인 이론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 물음은 모든 물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그 밖의 많은 문제들은 우리가 인간의 본질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해결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와 목적, 우리의 의무와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희망 - 이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거짓 없는" 혹은 진정한 본질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런, 실제로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대립적인 견해들이 있다. 구약성서 시편 8장의 저자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우리의 삶에 대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로 보고 있다. 마르크스는 1845년,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논문에서 "인간의 진정한 본질은 사회 관계의 총체성이다"라고 말하였다. 마르크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각 개인은 그가 살고 있는 인간 사회의 소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사르트르는 1940년대에 프랑스에서 쓴 글에서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이다"라고 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나 그 밖의 어떤 것에 의해 결정되어 진다는 것도 부정하였다. 사르트르는 개개인 모두가 그가 원하는 존재와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본질에 관한 견해들이 서로 상치되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야 하며, 그리고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도 상치되는 결론들이 나오게 된다. 만일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그의 뜻이 우리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를 정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의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사회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의 삶이 어쩐지 불만족스럽다고 느껴진다면, 그 사회가 변혁될 때까지는 진정한 구제책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서 개인적인 선택의 필요성을 피할 수 없다면, 현실주의적인 단 하나의 태도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취하는 행동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선택하는 길뿐이다.
삶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상치되는 신념들은 흔히 다양한 생활 방식, 정치, 경제 체제, 교육론 및 그 교육 실천 등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공식적인 해석이 공산주의 국가들의 일반적인 삶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직장이나 자유에 대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그 해석에 공개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가 없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생활하는 어린아이들은 그 해석을 귀가 아프도록 되풀이하여 들음으로써 그 진실성을 굳게 믿게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영원히 그것이 명백한 진실인양 여기게 된다. 이른바 "자유 국가" 혹은 "민주주의 국가"로 불리어지는 곳에서, 기독교가 마르크스주의와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 지가 3세기도 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사리 잊고 있다. 공개적으로 기독교의 정통파의 교리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차별과 박해, 심지어 죽음까지도 맛보았다. 몇몇 국가에서는 아직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학교에서 배우도록 하고 있고, 이혼이나 피임과 같은 사회 문제들을 법령으로 규제해 달라는 가톨릭교의 요구를 정부가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날의 영국과 같은 이른바 "세속적"인 사회에서조차도 기독교는 교육 제도에 영향을 행사하는 공식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영국 성공회는 국교로서 인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의 사상은 성직 기관에서는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는 인간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밖의 존재, 즉 하느님으로부터 부과된 것이며,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에 자유의 진정한 본질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정통적인 기독교의 논리에서 보면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 사상은 분명히 이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와 같은 사상은, 우리가 가능한 한 최대로 개인의 자유를 허용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이단이라고 규정될 수 없을 만큼 사회와 교육에 관한 정책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에 관한 두 개의 상반되는 이론으로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내용 면에서 보면 이 두 이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할지라도, 이 두 이론의 각 부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생활 방식의 근원이 되고 있는 그 구조적인 방식에 있어서는 몇 가지 상당한 유사점이 있는 것이다.
첫째로 이 두 이론은 우주 전체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물론 모든 존재를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전지, 전능, 전선하신 인격체 곧 하느님을 믿지만, 마르크스는 이 믿음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종교란 현실적인 사회 문제로부터 관심을 딴 데로 돌리게 하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정죄했다. 우주의 그 어느 곳에서도 신은 존재하지 않고, 우주는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며, 그리고 모든 것이 물질의 과학적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어지기 때문에 우주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물질적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다같이 우주 개념의 일부로서, 역사의 본질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에 있어서 역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그 의미를 갖게 된다.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스스로의 뜻을 나타내신 것처럼, 자신의 뜻을 역사하기 위해 역사상의 사건들을 이용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에는 이 역사 자체에 발전적인 진보의 패턴이 전적으로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 경제적 단계에서 다른 경제적 단계로 이어지는 발전이 불가피하므로,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에로 발전했듯이,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은 그 본질과 방향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역사를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힘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가 일치하고 있다.
두 번째로, 우주에 대한 상반된 주장으로 인해 개개의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한 기술도 응당 상치되고 있다. 기독교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있고, 그의 운명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따라 좌우된다. 개개인은 자유롭게 하느님이 뜻하신 바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선택의 자유를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서 각기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심판은 이승의 삶에 국한되지 않는 것으로, 개개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육체의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이다. 그런, 마르크스주의는 사후의 부활과 심판을 부정하며, 기독교의 핵심이 되고 있는 개인의 도덕적 자유의 중요성도 부정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우리의 도덕 관념과 그 태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유형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이 두 이론은 인간의 잘못이 근본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진단을 내리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은 하느님의 뜻하신 바와 부합되지 않고 있으며,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끊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오용하고 하느님을 거부함으로써 죄에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죄의 개념을 "소외"의 개념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이 개념은, 기독교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삶이 요구하는 어떤 기준이 현실 생활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이 이상적인 삶의 조건을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은 가지고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 조건으로 인해 그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소외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문제에 대한 처방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어떻게 진단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하여, 네 번째로, 이 두 이론을 비교하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인간 생활의 잘못에 대해서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전능만이 우리 인간을 죄의 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정한 역사적 인물인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은 이 세계를 구원하고, 자신과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각 개인은 하느님의 이와 같은 죄의 사함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새로 거듭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인간 사회는 각 개인이 이처럼 거듭나도록 변화되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와 반대로, 각각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진정한 변화는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 있을 때만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 경제 체제는 공산주의 체제로 대치되어야 하며, 역사 발전의 법칙에 의해서 이러한 혁명적 변화는 불가피하기 때문에, 각 개인은 혁명에 불타는 정당에 가담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진통을 감소시키는 데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적인 처방에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미래에 대한 인간의 비젼도 서로가 상치되고 있음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적 비젼은 창조자를 아낌없이 사랑하고 순종하는 인간을 하느님께서 자신이 뜻하시는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참여하자마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삶의 완성은, 인간과 사회, 이 모두가 여전히 불완전하고 세속적인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속적인 삶을 초월함으로써만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비젼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될 수 있고, 더 이상 경제적인 조건에 의해 소외됨이 없이, 다른 사람들과 자유로이 서로 협조할 수 있는 미래의 완벽한 사회를 이 현실 세계에서 이룩하는 데 있다. 공산주의 사회의 보다 고차원적인 단계가 도래하기 전에 과도기적인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비록 혁명 후 곧바로 그와 같은 완벽한 사회가 올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되지만, 이러한 사회가 바로 역사의 목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믿음의 체계(belief system)가 그 범위에 있어서 전반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 양쪽 모두가 인간의 삶 전체를 밝혀 주는 본질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들의 이론은 시공을 초월하여 정당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리하여 그들 각각의 세계관은 그 세계관에 동의할 것뿐만 아니라 그에 부합되는 행동까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 이론 중 어느 한쪽의 이론을 믿게 된다면, 우리는 그 이론이 우리의 삶의 방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비교해 보면, 그들은 각각 인간 조직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조직체는 신봉자들의 충성을 요구하고, 교리뿐만 아니라, 교리의 실천에 대해서도 일정한 권위를 주장한다. 기독교에는 교회가 있고, 마르크스주의에는 공산당이 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그들 교회들끼리, 그리고 공산당들은 그들 공산당끼리, 자기들만이 창시자의 진정한 교리(혹은 사상)를 따르고 있다고 다투어 주장하고, 교리(혹은 사상)의 해석은 자기들의 것만이 정통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서로 다른 실천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종파 형성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양쪽 다의 전형적인 특징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이와 같은 구조상의 유사성을 주목해 왔으며, 마르크스주의도 기독교 못지 않게 하나의 종교라고 시사한 사람들도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에 이 두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같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 이 두 이론이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대해 이와 같이 아주 상반된 설명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구조를 띠게 되는 것인가? 기독교적 공산주의자들로 지칭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이 두 사상은 어느 정도까지 그 차이가 조정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인 해석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 사이에는 신의 존재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매우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이미 사르트르의 말을 등장시킴으로써 암시하였듯이, 인간에 관한 이론들은 더 많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 특히 플라토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의 이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더우기 근래에 들어서는 다윈의 진화론과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이론이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을 계속 바꾸어 놓고 있는가 하면, 또한 현대의 철학, 심리학, 그리고 사회학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한층 나아간 이론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서양의 지적 전통 밖으로 눈을 돌리면, 다른 많은 이론들 가운데 고대 중국과 인도의 인간론이 관심을 끌고 있다.
앞에서 말한 이론들 가운데 어떤 것은 기독교나 공산주의에서처럼, 사회 집단과 제도, 그리고 생활 방식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이론들은 단순히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 변화, 발전, 그리고 쇠퇴의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에 관한 신념의 체계가 어떤 집단에 의하여 생활 방식의 근원으로 여겨질 때, 그 체계는 보통 "이데올로기"라고 불리워진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의미에서 확실히 이데올로기이기는 하지만, 실존주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실존주의는 생활 방식을 규정해 줄 대상으로서의 뚜렷한 사회적 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이론 그 이상이기는 하지만, 아뭏든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론에 의거해서 행동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필자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바는, 신념을 표방할 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지시하고 있는 특정한 영향력 있는 여러 이론들을 검토하는 데 있다. 그 이론들 모두가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론들이 그것을 생활 방식의 근원으로 삼는 대응 집단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논의하고자 선택한 이론들은 모두가 다 우리가 기독교와 공산주의에서 보아 왔던 그 공통적인 구조의 주요 요소들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그 구조의 주요 요소들은 (1) 우주의 본질에 관한 배경적 이론 (2) 인간의 본질에 대한 기본 이론 (3) 인간의 잘못에 대한 진단, 그리고 (4)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처방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 네 가지 요소들을 결합하고 있는 이론들만이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을 우리에게 안겨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이다라는 주장은, 비록 간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개의 진단일 뿐, 우리가 왜 이기적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라든가, 어떻게 하면 그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암시를 전혀 주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처방도, 또 왜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하기가 어려운가에 대한 설명도 해주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 또한 우주 속에 존재하는 인간과 인간의 위치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지만, 그 자체로서 어떠한 진단이나 처방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필자가 검토하고자 하는 이론들에는 기독교, 마르크스, 그리고 사르트르의 이론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이론들에다, 필자는 '국가론'(이 책은 고금을 통해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서, 그리스 철학서 중 가장 읽기 쉬운 책 중의 하나다)에 나타나 있는 플라톤의 이론, 프로이트의 이론(그의 정신 분석 이론은 금세기의 많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B.F.스키너의 이론(인간 행위의 문제에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미국의 심리학 교수), 그리고 콘라드 로렌쯔의 이론(동물의 행위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원숭이와 기타 동물과의 유추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최신 유행을 주도했던 오스트리아의 노벨상 수상자)을 첨가하고 있다. 이들의 이론들을 각각 검토할 때 필자는 이 이론들이 나오게 된 본질적인 배경은 간단하게 설명하겠지만, 그들의 이론적인 관점에 부합되는 많은 선례들을 찾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 마르크스주의, 실존주의, 그리고 정신 분석 이론들이 내포하고 있는 많은 다양한 문제들을 조망하기보다는, 단지 위에서 약술한 네 부분의 구조를 통해 각 이론을 설명함으로써 그 이론의 핵심적인 사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각 이론을 설명할 때마다, 필자는 독자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책 하나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서, 독자들이 필자의 주장을 점검하고, 독자 스스로 더 많은 것을 헤아려 볼 수 있게끔 그 텍스트에 참고 페이지를 밝히겠다. 그리고, 각 이론에 관계되는 보충 참고서들도 제시해 줄 것이다. 독자들 가운데는 필자가 동양의 관점을 논의하지 않는 데에 실망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본다. 그런 독자들에게 필자는 필자 자신의 무지와 시간의 부족을 변명으로 내세우면서, 아래 적은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사상들을 해설하는 것 이외에 이 기본적인 사상들이 마주치게 되는 몇 가지 주요한 반론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따라서, 각 이론마다 비판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겠는데, 필자는 이러한 논의에 고무되어서 독자들이 스스로 더 깊이 사고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본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론들을 비판할 때, 어떤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는가를 살피기 위해 예비적인 고찰로서 다시 한 번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거론해 보자.
보충 참고 문헌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이 책에서 나중에 더 상세히 논의될 것이고 각각에 대한 참고 문헌이 제시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체계로서의 양자 사이의 비교를 위해서는 다음의 책들이 추천될 수 있다. Robert C. Tucker의 '칼 마르크스에 있어서의 철학과 신화(Philosophy and Myth in Karl Marx)'(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st den. 1961, 2nd edn. 1973), 특히 서문을 볼 것. Alasdair MacIntyre의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Marzism and Christianity)'(Penguin Books, Harmondsworth, 1971;Schocken Books, New York, 1969).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더 알기 위해서는 John Plamenatz의 '이데올로기(Ideology)'(Macmillan, London, 1971;Praeger, New York, 1970)를 볼 것.
인간의 본질에 관한 유대교와 중국, 인도, 그리고 이슬람교적인 이론들에 대한 입문으로서는 S.Radhakrishnan과 P.T.Raju가 편집한 '인간의 개념(The Concept of Nan)'(George Allen & Unwin, London, 2nd edn. 1966;Johnsen Publishing Co. Lincoln, Nebr, 1966)을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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