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을 늘어놓다
본뜻 : 노래나 연극 따위의 사이사이에 엮어서 늘어놓는 이야기를 사설이라 한다.
바뀐 뜻 : 오늘날에 와서는 길게 늘어 놓는 잔소리나 푸념 섞인 말을 가리킨다.
"보기글" -바쁜 일을 놔두고 웬 사설을 그렇게 늘어놓냐? -옆집 옥이 할머니가 와서는 한바탕 사설을 늘어놓고 가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려
살아 진천 죽어 용인
본뜻 : 나이도 같고 이름도 같은 진천 사람하고 용인 사람이 한날 한시에 죽었다. 두 사람이저승에 가니 저승 사자가 아직 때가 안되었다고 하며 용인 사람을 내보냈다. 용인 사람이 나와 보니 자기 시신은 이미 매장이 되어 있기에 진천으로 가보니 시신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다짜고짜 그 몸에 혼령이 들어가 살아났는데, 몸은 진천 사람에 혼은 용인 사람인지라, 진천 식구들을 통 모르겠는 거였다. 그래서 이 사람이 용인 자기 집으로 찾아가니 용인 사람들은 몸이 바뀐 그를 몰라보고 식구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자기 신세가 하도 기막히고 원통한 이 사람이 원님에게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말하니, 원님이 판결을 내렸다 '자네는 분명 용인 사람인데 진천에서 살아났으니 살아 있을 때는 진천 사람으로 알고, 죽거든 용인 사람이 시체를 찾아가거라'했다 한다.
바뀐 뜻 : 살아 진천, 죽어 용인이란 이 말이 오늘날에는 풍수적인 의미로 와전되어 쓰이고있다 살기에는 충청도 진천 땅이 제일이고, 죽어서 묻히기는 경기도 용인이 제일 좋은 땅이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본래의 의미는 위와 같은 옛날 얘기에서 비롯된 것이니 풍수적으로 인용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보기글" -살아 진천, 죽어 용인이란 말이 있듯이 여기 용인 땅이 묘자리 쓰기엔 최고로 좋은 땅이란 말이지? -이보게, 그 말은 땅을 가지고 한 얘기가 아니고 죽은 사람이 뒤바뀐 옛날 얘기에서 비롯된얘길세
쓸어올리다
‘머리’와 ‘머리털’과 ‘머리카락’은 본디 뜻이 다르다. ‘머리’는 사람이나 동물의 목 위 부분을 가리키는 말로, 얼굴과 머리털이 있는 부분을 아울러 이른다. ‘머리털’은 ‘머리에 난 털’, ‘머리카락’은 ‘머리털의 낱개’를 이른다. 현대어에서 이런 구분이 넘나들면서 ‘머리털’을 가리키는 말로 ‘머리’와 ‘머리카락’도 함께 쓰인다. 최근에는 ‘머리털’보다 ‘머리’와 ‘머리카락’을 더 많이 쓰는 추세다. 곧 ‘머리털 자른다’가 아닌 ‘머리 자른다’, ‘머리카락 자른다’로 쓰는 것이다. ‘머리털’과 더불어 쓰이면서 큰사전에 오르지 않은 낱말로 ‘쓸어올리다’가 있다.
“두 사람의 근본적인 사랑을 헤살 놓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윤태는 남희의 이마를 가리고 있는 머리털을 쓸어올려 주었다.”(유주현 〈하오의 연가〉) “습관적인 몸짓인 듯 정하섭은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조정래 〈태백산맥〉) “묘옥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억지로 웃어 보였다.”(황석영 〈장길산〉)
‘쓸어올리다’는 머리털 따위를 위로 쓸면서 만진다는 뜻으로 쓰인다. 용례를 살펴보면 ‘머리털을 쓸어올리다’보다 ‘머리를 쓸어올리다, 머리카락(머리칼)을 쓸어올리다’라는 표현이 훨씬 많이 나타난다. ‘털’이 비속하게 느껴지는 까닭, 머리카락이 털이 지닌 작은 크기·길이를 벗어난 것으로 여기는 까닭일 수도 있겠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그치다와 마치다
‘그치다’나 ‘마치다’나 모두 이어져 오던 무엇이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어져 오던 것이므로 시간의 흐름에 얽혔고, 사람의 일이거나 자연의 움직임에 두루 걸쳐 있다. 그러나 이들 두 낱말은 서로 넘나들 수 없는 저마다의 뜻을 지니고 있으니, 서로 넘나들 수 없게 하는 잣대는 과녁이다.
과녁을 세워놓고 이어지던 무엇이 과녁을 맞춰서 이어지지 않으면 ‘마치다’를 쓴다. 과녁 없이 저절로 이어지던 무엇은 언제나 이어지기를 멈출 수 있고, 이럴 적에는 ‘그치다’를 쓴다. 자연은 엄청난 일을 쉬지 않고 이루지만 과녁 같은 것은 세우지 않으므로 자연의 모든 일과 흐름에는 ‘그치다’는 있어도 ‘마치다’는 없다. 비도 그치고 바람도 그치고 태풍도 그치고 지진도 그친다. 과녁을 세워놓고 이어지는 무엇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나, 사람 일이라고 모두 과녁을 세우는 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의 일이나 움직임에는 ‘그치다’도 있고 ‘마치다’도 있다. 울던 울음을, 웃던 웃음도, 하던 싸움도 그치지만, 학교 수업을, 군대 복무도 마치고, 가을걷이를 다하면 한 해 농사도 마친다.
이어져 오던 무엇이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끝나다’와 ‘끝내다’도 쓴다. 물론 저절로 이어지지 않으면 ‘끝나다’고, 사람이 마음을 먹고 이어지지 않도록 하면 ‘끝내다’다. 이들 두 낱말은 과녁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뜻을 지니고 마음을 먹었느냐 아니냐를 가려서 쓰는 것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쇠뜨기
어렸을 적 시골 들판에 지천으로 깔린 것에 ‘쇠뜨기’라는 풀이 있었다. 뿌리가 너무 깊어 계속 뽑다 보니 새벽닭이 울더라고 농담을 하는 이도, 소꿉놀이 할 때 사금파리에 모래로 밥하고 쇠뜨기를 반찬 삼았다는 이도 있다.‘뱀밥’이라고도 한다. 특히 햇빛이 잘 드는 풀밭이나 둑에서 잘 자라는데, 그런 곳에서 소가 주로 뜯어먹기에 ‘쇠뜨기’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과식은 금물로, 아무리 쇠뜨기라지만 소도 쇠뜨기를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난다는데, 이는 쇠뜨기에 센 이뇨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쇠뜨기의 영어이름이 ‘말꼬리’(horsetail)인 것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풀이름 하나가 문화를 이렇게 잘 반영할 수가! 우리나라 들판에는 소가 있고, 서양 들판에는 말이 많구나. 그래서 들판에 자라는 같은 풀을 두고서도 한쪽은 ‘소’를, 서양 쪽에서는 ‘말’을 기준으로 이름을 붙인 것 아닌가. 한자말에도 말풀, 곧 ‘마초’(馬草)가 있긴 하나, 실제 영어 쪽에 말과 관련된 말이 많다.
이는 바로 ‘농경’(또는 牛耕) 문화와 ‘유목’ 문화를 대비하기도 한다. 우리 겨레는 본디 유목민이었다고 하나, 원시시대에 유목민 아니었던 겨레가 어디 있으랴. 다만 우리는 일찍 터 잡아 소로 논밭 갈아 농사를 지은 까닭에 소와 관련된 말이 많아진 듯하다. 심지어 소에서 나오는 온갖 부산물도 버리지 않는다. 소와 관련된 나무도 있지만 풀이름으로 소귀나물, 쇠무릎지기, 쇠치기풀 …들이 있다.
임소영/한성대 한국어교육원·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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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곽탁타전(種樹郭?駝傳)-유종원(柳宗元)
郭?駝(곽탁타)는 : 곽탁타는 不知始何名(불지시하명)이라 : 원래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疾?(질루)하여 : 곱사병을 앓아 隆然伏行(륭연복행)하여 : 등이 우뚝하여 구부리고 다니기에 有類?駝者(유류탁타자)라 : 낙타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故(고)로 : 그러므로 鄕人號之曰駝(향인호지왈타)라 : 마을 사람들은 그를 타라고 불렀다 駝聞之曰甚善(타문지왈심선)타 : 타는 그것을 듣고 “참 좋구나 名我固當(명아고당)이로다 : 나를 이름지음이 정말 꼭 맞아”고 했다 因捨其名(인사기명)하고 : 그리하여 원래의 이름을 버리고 亦自謂?駝云(역자위탁타운)이라 : 또한 자신도 탁타라고 했다고 한다 其鄕曰豊樂(기향왈풍악)이니 : 그 마을은 풍악향이라 하는데 鄕在長安西(향재장안서)라 : 장안 서쪽에 있다
駝業種樹(타업종수)라 : 타는 나무 심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凡長安豪家富人(범장안호가부인)과 : 모든 장안의 세도가와 부자들 爲觀遊及賣果者(위관유급매과자)가 : 및 정원을 관상하며 노는 사람들과 과실을 파는 사람들이 皆爭迎取養(개쟁영취양)이라 : 모두 다투어 그를 맞이하여 나무를 키우고 돌보게 하려 했다 視駝所種樹(시타소종수)면 : 타가 심은 나무를 보면 或移t徙(혹이사)라도 : 간혹 옮겨 심어도 無不活(무불활)이오 : 살지 않는 것이 없었고 且碩茂(차석무)하고 : 무성히 잘 자라서 蚤實以蕃(조실이번)이라 : 빨리 열매가 많이 열렸다 他植者(타식자)가 : 다른 나무 심는 자들이 雖窺伺?慕(수규사효모)나 : 비록 몰래 엿보고 모방하여도 莫能如也(막능여야)러라 : 같게할 수 가 없었다
有問之(유문지)하니 :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對曰?駝非能使木壽且?也(대왈탁타비능사목수차자야)요 : 대답하기를 “나 탁타가 나무를 오래 살게 하고 잘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以能順木之天(이능순목지천)하여 : 나무의 천성을 잘 따르고 以致其性焉爾(이치기성언이)이라 : 그 본성을 다하게 하기 때문이죠 凡植木之性(범식목지성)이 : 무릇 나무의 본성은 其本欲舒(기본욕서)하고 : 그 뿌리는 뻗어나가기를 바라고 其培欲平(기배욕평)하고 : 그 북돋움은 고르기를 바라며 其土欲故(기토욕고)하고 : 그 흙은 본래의 것이기를 바라고 其築欲密(기축욕밀)이라 : 그 다짐에는 빈틈이 없기를 바랍니다 旣然已(기연이)어든 : 이미 그렇게 하고 나면 勿動勿慮(물동물려)하고 : 건드려도 안 되며 걱정하서도 안 되고 去不復顧(거불복고)라 : 떠나가서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합니다 其蒔也若子(기시야약자)하고 : 처음에 심을 때는 자식을 돌보듯 하고 其置也若棄(기치야약기)면 : 심고나서는 내버린 듯이 하면 則其天者全而其性得矣(칙기천자전이기성득의)라 : 그 천성이 온전해지고 그 본성이 얻어지게 됩니다 故(고)로 : 그러므로 吾不害其長而已(오불해기장이이)요 : 나는 나무의 자람을 방해하지 않을 따름이지 非有能碩而茂之也(비유능석이무지야)라 : 나무를 크고 무성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不抑耗其實而已(불억모기실이이)이오 : 나무의 열매맺음을 억제하고 非有能蚤而蕃之也(비유능조이번지야)라 : 감소시키지 않을 따름이지 열매를 일찍 많이 열리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他植者則不然(타식자칙불연)하니 : 다른 나무 심는 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根拳而土易(근권이토역)하고 : 뿌리는 구부러지고 흙은 다른 것으로 바꾸며 其培之也若不過焉(기배지야약불과언)이면 : 그것을 북돋음에는 지나치지 않으면 則不及焉(칙불급언)이오 : 모자랍니다 苟有能反是者(구유능반시자)인댄 : 또한 이와 반대로 할 수 있는 자도 있으니 則又愛之太恩(칙우애지태은)하고 : 또 그것을 사랑함에 지나치게 은혜롭고 憂之太勤(우지태근)하여 : 그것을 걱정함에 지니치게 부지런합니다 旦視而暮撫(단시이모무)하며 : 아침에 보고 저녁에 어루만지며 已去而復顧(이거이복고)라 : 이미 떠난 후에 다시 와서 돌보지요 甚者(심자)는 : 심한자는 爪其膚(조기부)하여 : 그 껍질을 긁어서 以驗其生枯(이험기생고)하며 : 그것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시험해보고 搖其本(요기본)하여 : 그 근간을 흔들어서 以觀其疎密(이관기소밀)하니 : 심어진 상태가 성긴지 빽빽한지를 봅니다 而木之性(이목지성)이 : 그래서 나무의 본성이 日以離矣(일이리의)라 : 날로 멀어지는 것이지요 雖曰愛之(수왈애지)나 : 비록 그것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其實害之(기실해지)요 : 사실은 그것을 해치는 것이요 雖曰憂之(수왈우지)나 : 비록 그것을 걱정한다 하지만 其實讐之(기실수지)라 : 사실은 나무와 원수가 되는 것이지요 故(고)로 : 그러므로 不我若也(불아약야)라 : 나와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吾又何能爲矣哉(오우하능위의재)리오 : 내가 그밖에 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고 했다
問者曰以子之道(문자왈이자지도)로 : 묻는 자가 말하기를 “그대의 도를 移之官理可乎(이지관리가호)아 : 관청의 일을 다루는 것에 옮겨보면 괜찮겠소”하니 駝曰我知種樹而已(타왈아지종수이이)요 : 타가 말하기를 “나는 나무 심는 것만을 알뿐이지 理非吾業也(리비오업야)라 : 다스리는 것은 나의 본업이 아닙니다 然吾居鄕(연오거향)하여 : 그러나 내가 마을에 살면서 見長人者好煩其令(견장인자호번기영)하여 : 고을 관청의 어른 되는 분이 명령을 번거롭게 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니 若甚憐焉(약심련언)이로되 : 백성을 심히 사랑하는 듯하되 而卒以禍(이졸이화)라 : 화로서 마칩니다 旦暮吏來而呼曰官命促爾耕(단모리래이호왈관명촉이경)하고 : 아침 저녁으로 관리가 와서 소리쳐 부르기를, “관의 명령으로 너희들이 밭가는 것을 재촉하고 勖爾植(욱이식)하며 : 너희들이 심는 것을 열심히 하게 하며 督爾穫(독이확)하며 : 너희들이 거두는 것을 감독하게 하며 蚤繰而緖(조조이서)하며 : 빨리 고치를에서 실을 뽑게 하고 蚤織而縷(조직이루)하며 : 빨리 짜서 옷감을 내게 하며 字而幼孩(자이유해)하며 : 자식을 낳아 잘 키우게 하고 遂而鷄豚(수이계돈)이라하여 : 그렇게 되었으면 닭이나 돼지도 잘 길러라 한다 鳴鼓而聚之(명고이취지)하고 : 북을 울려 백성을 모으고 擊木而召之(격목이소지)라 : 딱따기를 두드려 그들을 소집합니다 吾小人(오소인)은 : 우리 소인배는 具饔?以勞吏者(구옹손이로리자)라도 :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갖추어 관리들을 위로 하기에도 且不得暇(차부득가)어늘 : 겨를이 없습니다 又何以蕃吾生而安吾性邪(우하이번오생이안오성사)아 : 또 어떻게 우리들의 삶을 번성케 하고 우리들의 본성을 편하게 하겠습니까 故(고)로 : 그래서 昞且怠(병차태)하니 : 병들고 게을러집니다 若是卽與吾業者(약시즉여오업자)로 : 이와 같으니 나의 직업과 其亦有類乎(기역유류호)아 : 또한 비슷한 점이 있을까요”하니 問者喜曰不亦善夫(문자희왈부역선부)아 : 묻는 자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매우 훌륭하지 않은가 吾問養樹(오문양수)라가 : 나는 나무 키우은 것을 물었다가 得養人術(득양인술)이로다 : 사람 돌보는 방법까지 터득하였습니다 傳其事(전기사)하여 : 그 일을 전하여 以爲官戒也(이위관계야)하노라 : 관의 경계로 삼도록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종수곽탁타전
곽탁타란 사람이름으로 그가 나무를 잘 심었으므로 나무를 심은, 곧 종수 곽탁타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 탁은 긴 헝겊자루요 타는 낙타이니, 낙타 등은 살이 자루처럼 불쑥 내밀어 있으므로 낙타를 탁타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여기 곽이란 사람이 곱사등이기 때문에 그렇게 별명이 붙여진 것이다. 모든 물건은 다 각각의 주어진 하나의 자연의 성이 있다. 나무는 나무로서 의 본성이 있고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본성이 있다. 일이란 무슨 일이든 그 물건이 지닌 본성을 거스리고는 잘 진행될 수 없다. 한그루의 나무를 심는 데에도 그 나무의 생육의 성을 따라, 그 본성을 극진하게 할 수 잇도록 손 봐 주면 그 나머지는 저절로 잘 자라게 되는 것이다. 그 본성을 어기고 억지로 조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이치는 사람을 다스리는 데에도 마안가지다. 본래 고요하고 편안하고자 하는 사람의 본성 을 어기고서 잘 다스려 보겠다고 억지로 닫게 하고 쉴 새 없어 몰아친다면 도리어 그것이 사람들에게 병이 되는 것이다. 곧, 나무 심는 이치를 들어 정치의 요도를 말하며 치자들의 반성을 촉구한 것이 이글의 요지이다. 작자 유종원에 대하여는 위의 '송실존의서'에 소개한 바 있다. 곽탁타라는 사람의 본이름은 무엇인었는지 잘 모르겠다. 불행하게도 곱사병 이 들어 등이 자루처럼 불쑥 내밀어 구부리고 다니는 것이 마치 낙타 곧 탁 타와 비슷한 데가 있기 때문에 그로 하여 마을 사람들이 곽씨에게 별명을 붙여 탁타라고 한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탁타라는 별명을 듣고서, 참 좋 은 이름이라며, 내게 꼭 알맞는 이름이라며, 그로부터는 그 사람 자신이 자기의 본 이름을 버리고 이 이름을 즐겨 쓰게 되었다. 탁타가 사는 마을 이름은 풍악이라고 하니 그 곳은 장안의 서쪽에 있다.
곽탁타는 나무심는 것을 자기의 본업으로 하고있다. 탁타의 나무심는 솜씨 가 널리 알려져 장안에 이렇다 하는 돈 많고 권세높은 양반들이나 재벌들이 구경삼아 들락거렸고, 또 장안에 과일을 파는 과일 장사란 모두가 서로 다투어 탁타를 자기 집에 맞아들여 나무를 기르고 돌보게 하며 나무 심기에 열을 올렸다. 탁타가 심은 나무는 때로 옮겨 심는다 해도 죽는 일이 없으며 싱싱하고 크고 무성하게 자라서 열매 맺는 것도 다른 것 보다 훨신 빨리 맺고 또 그 열매의 수량도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다른 식목하는 사람들이 탁타의 나무 심는 법을 가만히 엿보며 배워두었다가 그대로 모방해 보지만은 역시 나무 심는데는 탁타와 같을 수가 없다. 호가탁타에게 나무 심는 법을 물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탁타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 탁타가 별 다른 재주가 있어 나무를 오래 살게 하고, 또 번식하게 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나무의 자연의 성을 거스리지 않고 그대로 따라 그 생장 하는 본성을 다할 수 있도록 손봐주는 것 밖에 다른 것은 없소, 대개 나무의 자연의 성이란 이러하오, 나무의 뿌리는 구부러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쭉 뻗어 나가기를 좋아하고, 나무 밑둥에 흙을 돋우어 북을 줄때는 편편하게 해주기를 바라고, 흙은 그 나무가 처음 심어 졌던 본래의 흙을 좋아 하고, 또 뿌리를 다져줄때는 꼭꼭 다져서 빈 틈이 없도록 해주기를 바라오, 이것이 나무가 지닌 자연의 성인 것이요, 이제 나무의 본성에 따라 이대로 또 해주었거든 그 다음에는 그 나무를 움직이지도 말고 행여 죽었지 않을까 염려할 것도 없소. 그런 뒤에는 돌아가서 다시금 돌아도 보지 않는 것이 좋소 처음 나무를 심을 때는 내 자식을 기르듯 그렇게 정성을 들이고 다 심은 뒤 나무를 버려두기는 아주 내버린 것 처럼 하는 것이오. 그렇게 하면, 그 나무는 타고 난 본성을 다치 아니하고 자연의 성을 따라 멋대로 쭉쭉 뻗어나가 한껏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오, 그러므로, 나는 나무의 성장을 해치지 아니할 뿐이요, 내게 무슨 나무를 크고 무성하게 자라게 하는 별 다른 재주가 있는 것이 아니오. 또, 나는 열매 맺는 것을 일부러 억눌러 덜게 하지 아니할 쁀이요, 내게 무슨 열매를 빨리 맺게 하고 그리고 많은 열매가 달리게 하는 재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오. 그런데, 다른 식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를 않소. 뿌리는 주먹처럼 구부리고 흙은 본래의 흙이 아닌 다른 흙으로 바꾸어 주오. 나무에 북을 주는 데도 흙을 너무 지나치게 돋우어 주거나 아니면 모자라게하고, 참말로 나무가 지닌 자연의 성을 그와 같이 거스르는 사람은 나무를 또 지나치게 사랑하고 근심한 나머지 너무 부지런하여 아침에 나가 돌보아 주고 저녁에 가서 어루만져 주며, 그리고 돌아욌다가는 또 다시 돌아보오. 그 가운데 심한 사람은 나무 껍질에 손톱자국을 내어 나무가 살았는가 죽었는가를 심험해 보기도 하고, 또 나무 뿌리를 흔들어서 뿌리와 흙 사이가 엉성하여 틈이 있는가, 빈 틈 없이 단단하게 꽉차 있는가를 알아보기도 하오. 그러니, 나무는 날이 갈수록 한없이 생장할 수 있는 그 자연의 성을 잃어 버리고 오그라 들기 시작하는 것이오. 이런 사람들은 나무를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도리어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요, 또 나무가 마를까 걱정한다지만 사실은 그것이 도리어 나무에 해악을 주는 것이오. 다른 사람의 나무 심는 것이 이 탁타의 나무 심는 것과 끝내 같을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여기에 연유한 것이오, 이 탁타에게 달리 나무를 심는 그 무슨 신통한 재주가 있겠소!"
"그대의 나무 심는 법을 빌어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에 옮겨 쓰면 어떨까? 좋지 않겟는가?"
나무 심는 일을 물었던 사람이 이렇게 다시 물으니 탁타는 대답하였다.
"나는 나무를 심은 사람으로 나무 심는 일만 알 뿐이요. 정치하는 일은 나의 임무가 아니라 잘 모르오, 그러나, 내가 고향 마을에 있을 때 그 고을의 수령이 말마다 번거로이 명령을 내리며 백성을 다스리느라 분주히 돌아가는 모양을 보았지요. 그 수령은 백성들을 몹시 위하는 듯 잘 살게 해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결국 그것이 도리어 화를 불러오게 되었지요. 아침 저녁으로 관리가 와서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내어 나라의 명령이라며 눈 코 뜰 사이 없이 다그치는 것이 아니겠소. 빨리 물레를 돌려 실을 자아라, 빨리 베를 짜라, 어린 아이들을 잘 거두어 길러라, 닭과 돼지를 쳐라, 등등... 그리하여 북을 둥둥 울려 백성들을 모으고 딱딱이를 쳐서 백성들을 불러내었소. 그러니, 우리네들은 남의 백성이 된 처지라, 서둘러 아침밥 저녁밥을 준비 하여 관리들을 대접하느라 여념이 없었소. 그런데 또, 무슨 여가에 우리들의 생육을 풍성하게 하며 우리들의 성정을 편안하게 할 수 있었겠소! 여기서 결국 우리 백성들은 지쳐서 병이 들고 따라서 자기의 일에 게을러지니, 이러고 보면, 이 탁타의 나무 심는 일이 정치하는 일과 비슷한 데가 있다고나 할까요?"
나무 심는 법을 물었던 사람이 탁탁의 이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며 말하였다.
"그대의 그 말 또한 참 좋은 말이요! 내 오늘 나무 기르는 법을 물었다가 뜻밖에도 사람을 기르는 법을 얻었구료! 이일을 써서 후세에 전하여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의 계칙으로 삼고저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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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우리 모두는 매일 조금씩 미쳐가고 있다. 무엇에 미치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가 서로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 자신도 편집증과 정신 분열에 사로잡혀 있음을 느낀다. 게다가 나는 너무나 민감해서 현실을 잘못 이해할 때가 많다. 나는 그 점을 알고 있기에 그 광기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내가 하는 모든 일의 동력으로 삼으려고 노력한다. 성공하면 성공할 수록 나는 더 미쳐가고 미치면 미칠수록 내가 설정한 목표를 더 잘 달성하게 된다. 광기는 각자의 머릿속에 숨어있는 사나운 사자이다. 그 사자를 죽이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의 정체를 알고 그것을 길들여 마차에 매달리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순치된 사자는 어떤 선생, 어떤 학교, 어떤 마약, 어떤 종교보다도 우리 삶을 훨씬 더 높이 끌어올릴 것이다. 그러나 광기가 힘의 원천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위험하다. 때때로 가속도 붙은 마차가 모든 것을 박살낼 수도 있고 극도로 흥분한 사자가 자기를 조종하려는 사람에게 덤벼드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구
무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무한소에서도 우리는 구와 마주치게 된다. 행성이 구이고 원자, 소립자, 쿼크도 모두 구이다. 이 구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본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다.
1) 만유 인력 : 우리를 땅에 붙어 있게 하고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달이 지구의 둘레를 돌게 하는 힘. 2) 전자 기력 : 전자가 원자핵 둘레를 돌게하는 힘. 3) 강한 상호 작용 : 그 원자핵을 구성하는 소립자들을 결합하는 힘. 4) 약한 상호 작용 : 그 소립자를 구성하는 쿼크들을 결합하는 힘.
무한소와 무한대는 그 기본적인 힘들로 결합된 구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 네 가지 힘이 합쳐져 단 하나의 힘을 형성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죽는 날까지 그 힘들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대통일의 법칙>을 찾아내고 싶어했다.
노인
아프리카에서는 갓난아이의 죽음보다 노인의 죽음을 더 슬퍼한다. 노인은 많은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부족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갓난아이는 세상을 경험해 보지 않아서 자기의 죽음조차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갓난아이의 죽음을 슬퍼한다. 살았더라면 아주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었을 아기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노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노인은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향
인류의 위대한 모험은 대부분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루어졌다.
옛부터 사람들은 불덩어리가 잠기는 곳이 어디인가 궁금해 하면서 태양의 운행을 쫓았다. 율리시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아틸라 등 모두가 서쪽에 그 답이 있다고 믿었다. 서쪽으로 떠나는 것, 그것은 미래를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태양이 <어디로 가는지>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그것이 <어디로 부터>오는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르코폴로, 나폴레옹, 밀보 르 오비(톨킨의 “반지의 주인”에 나오는 주인공 가운데 하나) 등은 동쪽으로 갔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시작되는 동방이야말로 발견할 거리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모험가들의 상징 체계에는 아직 두 개의 방향이 남아 있다. 그 방향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북쪽으로 가는 것은 자신의 힘을 시험하기 위한 장애물을 찾아가는 것이다. 남쪽으로 가는 것은 휴식과 평온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발가락
아메리카 인디언과 중국인들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20진법의 수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스물을 한 단위로 해서 수를 센다. 손가락과 발가락의 개수를 합하여 셈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셈법이 나왔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10진법을 셈법으로 삼았다. 발가락을 무시하고 오로지 손가락만을 세었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
우주 공간은 캄캄하다. 별빛은 반사시킬 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선은 무한한 공간 속에서 소진되고 만다. 언젠가 우리가 우주의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주의 경계가 되는 한 모퉁이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삼각형
평범하기가 때로는 비범하기보다 어렵다. 삼각형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삼각형에는 대개 이등변 삼각형, 직각 삼각형, 정삼각형 따위의 이름이 붙어있다.
정의된 삼각형의 종류가 하도 많아서 특별하지 않은 삼각형을 그리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특별하지 않은 삼각형을 그리자면, 가능한 한 길이가 같은 변이 생기지 않도록 그려야 할 터인데 그 방법은 확실치 않다. 평범한 삼각형은 직작이나 둔각을 가져도 안 되고, 크기가 같은 각이 있어도 안 된다. 자크 루브찬스키라는 학자가 진짜 <평범한 삼각형>을 그리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 방법에 따라 우리는 평범한 삼각형을 생각해 냈다. 그 방법에 따라 우리는 평범한 삼각형을 아주 정확하게 그릴 수 있다. 정사각형을 대각선 방향으로 잘라 삼각형 두 개를 만들고, 정삼각형을 높이 방향으로 잘라 역시 두 개를 만든다. 정사각형을 잘라 만든 삼각형과 정삼각형을 잘라 만든 삼각형을 나란히 붙여 놓으면 평범한 삼각형의 한 표본을 얻게 된다.
승리
승리 뒤에는 언제나 견딜 수 없는 허망함이 찾아오고 패배 뒤에는 언제나 새로운 열정이 솟아나면서 위안이 찾아온다. 그것은 왜 그런가? 아마도 승리가 우리로 하여금 똑같은 행동을 지속하도록 부추기는 반면, 패배는 방향 전환의 전주곡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패배는 개혁적이고 승리는 보수적이다.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다. 영리한 사람들은 가장 멋진 승리를 거두려고 하지 않고 가장 멋진 패배를 당하려고 노력했다. 한니발은 로마를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고, 케사르는 로마력 3월 15일 원로원 회의에 나갈 것을 고집하다가 브루투스의 단검을 맞고 죽었다. 이런 경험들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실패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고, 우리를 물이 없는 수영장에 뛰어들게 해줄 다이빙 대는 높으면 높을 수록 좋다. 명철한 사람의 삶의 목표는 동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을 줄 만한 참패에 도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승리로부터는 결코 배울 게 없고, 실패를 통해서만 배우기 때문이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中 - 베르나르 베르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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