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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31 호
단기 4341. 1. 14 (음력 12. 7)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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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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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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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변화시킬 만큼 큰 인물이 아니거든 시대를따라 변하라. /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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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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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2. 행동의 방향을 밝히는 충고
말을 바꿔 타기
1864년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의 일이다. 링컨 대통령의 전쟁 수행 방법에 불만이 많던 인사들이 그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링컨은 스스로도 자신이 대통령직에 적합한 인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공개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반대파의 입을 막았다고 한다.
“저는 여러분께 어느 네덜란드인 농부가 그의 동료에게 충고해준 대로, ‘강을 건너는 도중에는 말을 바꾸어 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대형사고가 나면 관련 부서의 장관이나 실무자에게 책임을 묻고 새 사람으로 바꾸어 버린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책임이 있는 현직 장관이 사고 뒷처리를 하여 수습하게 하고 일이 정상화된 후 장관을 바꾼다. 강 가운데서 말을 바꾸어 타는 것이 불리하다.
강 가운데서는 말을 바꾸어 타지 말라. (Don't change horses in midstream.)
말을 타고 가다 다른 말로 바꿔 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과 말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 가운데서 타고 가던 말을 버리고 다른 말로 갈아탄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러므로 변화가 필요할 때 조금 힘이 들더라도 일을 그대로 진행시킨 후 적당한 시간을 택해 그 일을 시행하는 것이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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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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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김재은
제13장 - 이해했으면 비판하라 2/2
사고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IV)
3. 사물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데카르트나 쇼펜하우어(1788-1860, 고뇌와 허무의 예언자라 불린 독일의 철학자)에 의하면 판단=비판에서 걸리지 않은 '기정의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체스터턴(1874-1936, 영국의 소설가, 평론가)은 "흔해빠진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다른 것으로 보여질 때까지 계속 노려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실제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내용을 갖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이다. 이것은 체스터턴의 이야기인데 대체로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 넘어선 어떤 종류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명언을 말할 수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것으로 보인' 놀라움은 누구 나가 경험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교교하게 달빛 아래 경치에 도취해 있으면서 차를 타고 흔들리면서 가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꿈을 꾸는 듯한 경지에서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여기는 어딘가?..." 하면서 놀라서 밖을 내다보고는 안도의 숨을 쉬는 순간이 있다. 멀리서 보아서는 마치 낯선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어느덧 낯이 익은 장소에까지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언덕도 나무도 집도 꿈같이 먼 곳에서 한순간에 현실 세계에로 되돌아와서는 움츠려 들고 또 퇴색해 버리는 일도 있다. '유령의 정체가 드러났네. 마른 억새풀'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들의 이미지에는 두 가지 면이 있으며 따라서 인상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른바 기성개념이란 것은, 생활, 사상을 뭉뚱그려서, 이런 식으로 왜곡시키지 않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다시 되풀이하지만, 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진실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교훈이 여기에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모양'의 뒤에 숨은 '진짜 모습, 모양'을 찾아내서 분간하려면 말로만 해치울 수 있는 만큼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나 수고를 아끼고 있다가는 우리들의 실체의 표면을 언제까지나 그냥 지나쳐 버리기가 쉬운 것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할 때 다름 아닌 우리들의 판단하는 능력이 그만큼 유능하냐 어떠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4. 비판 없이 이해 없다
당신이 아직 읽은 일이 없는 외국작가의 이름을 친구가 들먹였다고 하자. 가령 그 이름이 고리키(1861-1936, 러시아의 소설가)였다고 하자. 당신은 당연히 흥미가 생길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들춰본 잡지에 이 작가의 일기가 실려 있었다. 당신의 눈은 그 부분에 쏠렸다. 여기서 감동과 흥미를 느낀 당신의 욕구는 한층 부풀어올라서 그 후로는 고리키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게 된다. 이윽고 당신은 고리키를 읽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하여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다. "고리키를 이런 식으로 파악한 것은 나 혼자야"라고. 비평이란 것을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하라. 왜냐하면 우리들의 심미안은 한쪽에서는 머리를 숙이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을 하고 든다. 이 두 가지의 충동의 균형을 잡는 것이 비평의 의의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평의 원리로 일류 작가나 철학자의 노작을 당신 자신이 직접 심사를 해보라.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명예가 결코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정말 훌륭한' 그림을 그린 화가가 화랑에서 친구의 걸작을 정신없이 보고 있는 광경을 본 일은 없는가? 그들의 눈은 그 그림을 여기저기 샅샅이 살펴보면서 차츰 열을 띠게 된다. 화가만이 지닐 수 있는 예리한 눈의 표정이 극점에 도달했는가 생각되는 순간, 그는 갑자기 눈을 감아 버린다. 뛰어난 작품 앞에서 자기를 대상 속에 투입하려고 시도하는 예술가의 모습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행위는 비평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비평도 판단도 결국은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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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글터 → 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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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망산 가다
본뜻 : 북망산은 중국 하남성 낙양 땅에 있는 산이름이다. 후한 시대 이래 이곳에 무덤이 많았기 때문에 '북망산 간다'는 말이 곧 죽는 것을 대신하게 되었다.
바뀐 뜻 : '죽는다'는 말의 은유적 표현이다.
"보기글" -어허야, 디이야, 북망산천 가자 하니 발걸음이 무겁구나 -저기 김 진사댁 큰 어른 북망산을 가셨나? 요즘 통 안보이시네
비위맞추다
본뜻 : 소화액을 분비하는 비장과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위장을 합쳐서 비위라고 한다. 비위를 맞춘다는 것은 곧 속에서 어떤 음식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바뀐 뜻 : 어떤 일이나 상황을 남의 마음에 들게 해주는 것을 가리킨다.
"보기글" -유별난 그 사람 비위를 누가 맞출 수 있을까? -회장 비위를 맞추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내 비위가 뒤틀리기 시작하는데 그땐 정말 못 참겠더라구
열쇠
호주머니 안에 늘 가지고 다니는 물건의 하나가 열쇠다. 사람 따라 대문·차·장롱·서랍 열쇠들이 한 움큼이나 된다. ‘열쇠’는 복합어로 ‘자물쇠를 잠그거나 여는 데 쓰는 물건’으로, ‘여는 쇠’를 말한다. ‘자물쇠’는 ‘자물통’이라고도 하며, ‘여닫게 되어 있는 물건을 잠그는 장치’로 ‘잠그는 쇠’를 말한다. 실제 언어 현장에서는 ‘열쇠’와 ‘자물쇠’를 구별하지 않고 쓰는 경우도 많다.
열쇠는 지역 따라 유형을 달리하는데, 크게 ‘열쇠, 쇳대, 열대, 개철’로 나눌 수 있다. ‘열쇠’는 15세기 국어에서부터 ‘열쇠’로 쓰는데, 경기와 강원을 중심으로 많이 사용하고 충청과 경상도에서도 사용한다. 충청도에서는 ‘이을쇠’로 발음하고, 제주에서는 ‘얄쇠’로 소리낸다. ‘열대’는 ‘여는 막대’의 뜻으로 북쪽에서 주로 사용하고 강원, 경기에서도 보인다. ‘쇳대’는 ‘쇠로 된 막대’란 뜻으로 ‘쇠때, 세때, 시때, 쌔때’ 등으로 발음하면서 주로 충북 이남 지역에서 사용한다. 강원도에서는 ‘늘대’가 보이는데, 이는 ‘넣을 대’의 발음인 것 같다. 제주도에서 사용하는 ‘개철’은 열쇠의 한자어에 ‘개금’(開金)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밑이 ‘개철’(開鐵)이 아닌가 생각한다.
흔히 어떤 뒤얽힌 문제가 있을 때 ‘열쇠를 쥐고 있다’는 표현을 쓴다.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말할 때 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병적 현상을 고칠 열쇠는 도대체 누가 쥐고 있는가?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예천과 물맛
땅이름은 특정 지역의 환경을 반영하여 만들어질 때가 많다. 그 가운데는 술과 관련된 것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경북에 가면 ‘예천’(醴泉)이란 곳이 있다. 예천의 ‘예’(醴)는 단술을 뜻한다. 예천은 본디 신라의 수주현(水酒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예천군으로 고쳤다. ‘수주현’이나 ‘예천’은 둘 다 ‘술’과 관련이 있다. 땅이름에 ‘술’이 들어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땅이름을 연구했던 김윤학 교수는 이러한 원리를 ‘유연성’에서 찾는다. 유연성을 고려한다면, 술과 관련된 땅이름은 대체로 물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예천이라는 땅이름에 단술을 뜻하는 한자 ‘예’를 쓴 것은 이 지역의 물맛이 단술 맛과 같다는 뜻이었다. 흥미로운 점은〈산해경〉에 나오는 ‘봉황 설화’다. 이를 보면 발해 북쪽 땅 한곳에 붉은 동굴이 뚫린 산이 있는데, 그 산 꼭대기에는 금과 옥이 많고 붉은 물이 흘러나오는 곳이 있다. 이 물은 남쪽 발해로 흘러드는데 그곳에 큰 새가 있으니, 모양은 닭과 같고 오색찬란한 새로, 그 이름을 봉황이라 한다고 했다. “봉황은 신령스러운 새이니 수컷을 봉이라 하고, 암컷을 황이라 한다. 봉황의 성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으며,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시경〉기록에, 봉황은 예천의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하였다. 술맛 같은 예천의 물. 그러나 오늘날은 예천만이 아니라 전국 어디를 가든 봉황이 마시는 물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 됐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국어학
과거시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현재·과거·미래를 구분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늘 현재를 살면서 지난날을 되살피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생각한다. 문법에도 이런 시간 흐름이 반영된다. 말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지나간 시점의 일을 표현하는 것을 과거시제, 다가올 시점의 일을 표현하는 것을 미래시제, 말하는 시점과 일의 시점이 같은 때는 현재시제라 한다. 언어마다 현재·미래보다 과거를 표시하는 문법적인 방법이 뚜렷하다. 우리말에서 ‘나는 책을 읽었다’와 같이 어미 ‘-었-’을 써서 과거를 표시하고, 영어에서 어미 ‘-ed’를 통해 과거를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말이나 영어의 경우, 과거시제를 표현하는 것이 한 단계밖에 없다. 곧, 모든 과거는 ‘-었-’이나 ‘-ed’로 표현한다. 그러나 과거시제를 몇 단계로 나눠 표현하는 말이 있어 흥미롭다. 인도 북동부 미슈미말에는 현재로부터 가까운 과거는 ‘so’로, 한참 지난 과거는 ‘liya’로 표현한다. ‘ha tape tha-so’라 하면 조금 전에 내가 밥을 먹었다는 뜻이고, ‘ha tape tha-liya’라 하면 한참 전에 내가 밥을 먹었다는 뜻이다. 벰바말에서는 더 다양하다. 그저께보다 더 과거라면 ‘-ali-’, 어제쯤은 ‘-alee-’, 오늘 아침쯤이면 ‘-aci-’, 서너 시간 전쯤이면 ‘-a-’를 써서 지난적을 나타낸다.
이렇게 다양하게 과거를 구분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말을 통해 생각하는 방식과 문화의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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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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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 속에 숨어 있는 역사의 비밀(근, 현대편) - 박영수
1.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갔나
나폴레옹이 일곱 번 읽은 소설
'산더미 같은 재판 기록이 날마다 쌓여만 간다. 드디어는 적체된 사건이 2만여 건에 이르게 됐다. 그런데도 1년 동안 처리할 수 있는 것은 겨우 60건에 불과하다.' 독일의 문호이기 이전에 변호사였던 괴테가 그의 자서전에서 한탄한 말이다. 괴테는 이 같은 권태기에 친구의 약혼자인 로테와의 절망적인 사랑에 빠져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게 되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1774년 괴테의 나이 25세 때 씌어졌다. 이 책은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 이외에도 당시 독일에서 생겨 난 '질풍노도'라는 문학 운동의 시발로 큰 문학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괴테는 "이 작품을 읽어보고 자신을 위해 씌어졌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사람은 지극히 불행한 삶을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의 소설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과민하고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이자 자의식이 강한 염세적인 변호사 베르테르는 어떤 유산 상속의 사건의 변호를 맡아 로테라는 여인과 알게 되면서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로테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 자기 애정을 억제할 수 없게 된 그는 그 도시에서 도망친다. 방황하던 베르테르가 다시 도시로 돌아왔을 때, 로테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에 구애받지 않고 정열에 넘친 나머지 그는 그녀에게 반강제로 키스한다. 그리고 다음날 밤 베르테르는 권총자살을 하는데,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긴다.
"아아 모든 것이 공허하도다. 그러나 어제 내가 당신의 입술에서 받은 생명은 내 마음에 스며들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 당신은 나의 것이요. 오오, 로테여!"
이와 같은 청년 베르테르의 슬픈 인생은 당대 젊은이들에게 충격적인 감동을 전해 주었다. 여자들은 소설 속에 나온 찻잔을 다투어 구입하였고, 남자들은 베르테르와 같이 푸른색 코트에 노란색 조끼와 짧은 바지를 차려 입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심각하게 유행한 것은 모방 자살이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실연에 빠진 젊은이들이 자살을 기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괴테의 작품에 아무리 감동하였기로 앞길 창창한 청년들이 어떻게 자살까지 모방하게 됐을까? 그것은 현실 세계의 고통을 거부하고 자연의 신비한 힘을 찬양하는 복잡한 베르테르의 정신 세계가 유럽 젊은이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감수성 예민한 젊은이들이 '소설'의 감흥에 도취되어 속세를 떠나거나 삶의 변화를 꾀하는 일은 현재에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감명 깊은 문학 작품의 영향이 얼마나 큰가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당시 베르테르 열풍의 강도는 나폴레옹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폴레옹은 이 소설을 일곱 번이나 읽었고, 1798년 이집트 원정 길에 이것을 휴대하고 가서 애독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을 정도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오늘날에도 전세계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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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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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 4부 항산화벽이 무너지면 건강도 무너진다
대기오염 주의보까지 생긴 이유
청백색 가스인 오존은 지구 상층권에서는 자외선을 차단하여 자외선의 해로움을 줄여 주는 이로운 물질이다. 하지만 반대로 지층 가까이에서는 대기오염의 원인 물질이 되므로 해로운 물질이 된다. 오존 생성의 주된 원인 물질은 다름 아닌 자동차 배기가스에서 배출되는 질소화합물인 일산화질소이다. 이 일산화질소가 고익 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이산화질소가 된 후 여기에 태양광선과 산소가 다시 반응하여 오존이 생기는 것이다.
자동차가 많은 도시일수록 오존 생성원이 많이 생기므로 오존이 잘 생기며, 자동차 속도가 감소할 때 배기가스 중의 오염물질이 높아지므로 교통체증이 심할 때가 오존이 잘 생긴다. 또 태양광선의 작용으로 오존이 생기기 때문에 여름철이나 하루 중에서는 오후 2시 전후에 가장 오존 생성량이 많다.
오존이 인체에 해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오존은 눈이나 코, 인후, 호흡기를 강하게 자극하므로 가슴이 답답한 증세, 기침, 숨찬 증상의 원인이 된다. 천식같은 만성호흡기 질환이 있는 사람은 상태가 악화되기도 한다. 연령층으로는 호흡기가 약한 어린이와 노인에서 가장 영향이 많으며, 오존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에 사는 어린이는 실제로 감기를 달고 사는 아이들이 많다. 사실 오존은 프리라디칼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직접적인 산화작용이 있어서 인체 조직의 단백질, 지질, DNA등을 산화시키고 손상을 입힌다. 이런 오존의 해로움 때문에 오존주의보다, 오존경보다 하면서 오후 2--5시경에 외출을 삼가라는 방송까지 나오는 것이다.
환경부 발표에 의하면 작년(1997년) 6월~8월 오존주의보 발령횟수가 24회였으며, 이 숫자는 전년에 비해 2배 이상 증가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이 오존주의보는 좀 나은 편이다. 왜냐하면 신경 안 쓰고 가만히 있어도 언제언제, 몇시 경에 외출을 삼가라고 알려주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프리라디칼의 해로움은 누가 알려 주는가? 세포들이 프리라디칼의 무차별 공격을 받고 허덕거리다가 하나둘씩 죽어 자빠지는 데도 무슨 경보음이 울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표시도 안나지 않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유비무환의 자세로 평소 항산화 방어벽을 튼튼히 해 주는 게 중요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짜증나도록 막히고 공기도 탁한 거리의 차 속에서 경제파탄이다. 부도다 하는 맥빠지는 뉴스를 들어가면서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운전자들이여! 잠시 마음의 눈으로 자기 몸의 삐꺼덕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라!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세포들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 대화를 해 보라! 건강만큼은 부도내고 싶지 않다면 당장 집에 가서 항산화 물질이 듬뿍 든 음식을 먹을 일이다.
항산화벽을 무너뜨리는 나쁜 음식들
활성산소니 항산화제니 하다가 갑자기 지방 얘기를 꺼내는 것은 이유가 따로 있다. 활성산소가 가장 좋아하는 공격 대상이 지방이며, 유감스럽게도 인체 내 세포 안팎에는 많은 지방 성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방에 대해서 기본 지식이 있어야만 활성산소 피해에 대비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들이 꼭 기억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지방산에는 포화, 불포화라는 게 있으며, 2) 이들 중 불포화지방산은 다시 단일불포화, 다가불포화로 나뉜다. 3) 활성산소의 공격에 가장 약한 지방은 바로 다가불포화지방이다.
세포를 성벽처럼 싸고 있는 세포막은 세포 내, 외부의 영양물질의 교환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세포 내부 안쪽도 다시 여러 칸막이에 의해 나눠진다. 예를 들면 소기관(예: 핵, 미토콘드리아)과 세포질로 나누어져 있다. 이런 막의 주요 구성선분은 단백질과 지질이다. 막이 수행하는 기능이 맣을수록 단백질의 양은 많다.
일상적으로 혼용해서 사용하는 용어인 기름, 오일, 지방을 통틀어 '지질'이라고 하고, 지방산(예: 중성지방, 인화지질)이나 탄화수소고리(기호로 C-H)를 가진 분자(예: 콜레스테롤, 스테로이드 호르몬, 지방에 녹는 비타민)들도 포함하며 유기 용매에 녹는 생물학적 지방물질을 뜻한다. 지질 중에서도 인지질(주: 인산과 지방질이 합쳐진 것)은 인체 세포막을 형성하는 중요한 지질이다. 인지질 중 지방 부분은 물을 싫어하는 성질이 있는데 비해서 인산부분은 물을 좋아하는 성질이 있다. 따라서 이중막 구조를 가진 인체의 세포막을 들여다보면 이중막 안쪽으로는 물을 싫어하는 지방사슬이 위치하고, 물이나 액체 성분과 접촉을 해야 하는 바깥쪽에는 물을 좋아하는 부분이 위치하고 있게 된다. 그리고 단백질은 막의 내-외부 모두에 걸쳐서 위치하고 있다.
모든 지방산은 탄소와 수소 사슬고리를 갖고 있다. 만일 지방산 사슬에 있는 탄소들이 모두 단일 결합으로 연결(C-C로 표시)이 되어 있으면 이를 포화지방산이라고 한다. 학술적인 표시로 C16:0, C18:0같이 표시하며, 이때 16, 18은 탄소 원자수이고, 0은 탄소간에 이중결합(C=C)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고, 완전히 포화된 지방산이란 뜻이다. 그런데 만일 탄소간 이중결합이 존재한다면 이는 포화가 아닌 불포화지방산이다. 이때 이중결합이 하나라면 단일 불포화 지방산이라 하고, 이중결합이 2개 이상이면 다가불포화 지방산이라 한다. 예전에는 다가불포화란 말이 생화학자나 영양학자들만이 사용했던 용어지만, 이것이 건강에 이롭다는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는 꽤 많은 사람에게 친숙한 용어가 되었다. 현재는 이들이 많이 들어 있는 생선기름이나 식물성기름들이 건강보조 식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불포화지방이라고 해서 항상 이로운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프리라디칼에 의해 공격을 잘 받는 것이 바로 다가불포화 지방산이기 때문이다.
보통 온도에서 잘 굳어지냐에 따라 포화지방인지 불포화지방인지를 대략 알 수가 있다. 대두유, 올리브유 등의 식용유에는 불포화지방이 많으며, 보통온도에서 액체 상태의 기름으로 존재한다. 반면에 돼지비계나 버터는 포화지방이 많으며, 데울 때에는 녹다가도 식으면 금방 잘 굳어진다. 그런데 불포화 지방산의 이중결합에다가 수소이온을 첨가하면 포화지방산이 생기게 되며, 이를 수소첨가 촉매반응이라고 한다. 이때 수소화의 정도를 완전히 할수록 더 딱딱하게 된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불포화지방인 식물성기름을 가지고 고체 형태의 마가린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액체 상태의 옥수수기름을 가지고 단단한 옥수수마가린을 만들 수 있다. 불포화지방을 일부분 수소화 시켜 만든 지방산이 인체에 해로운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지만 가급적 많이 먹지 않는 게 이롭다. 다가불포화 지방산은 2개 이상의 이중결합을 가지고 있으며, 오메가6과 오메가3 지방산으로 나누어진다.
인체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예가 음식으로부터 섭취한 오메가6 지방산인 리놀산을 이용해서 우리 몸에서 만드는 아라키돈산이다. 참고로 리놀산은 주로 식물성 음식으로부터 얻어지며, 우리가 반드시 먹어서 섭취해야만 하는 필수지방산(주: 우리 몸 자체에서 만들지 못하므로 반드시 음식으로 섭취해야 하는 지방산)이다. 또 오메가 3지방산인 알파리놀렌산, EPA(아이코사펜타노엔산), DHA(도코사헥사노엔산)DMS 주로 생선기름에 들어있고 동맥경화증 예방 효과가 있다 하여 주목받는 지방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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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무뢰배 생활을 청산하고 훌륭한 학자가 된 이항
이항(1499-1576)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항지, 호는 일재이다. 타고난 기상과 용력이 범상하지 않아, 어려서부터 장난할 때에 동리 아이들이 겁을 내어 굴복하였다. 자라서는 놀기를 좋아하며 협기가 있어 만 리를 달리려는 뜻이 있었고, 씨름, 활쏘기, 말타기에서는 한 패의 으뜸이어서 억센 적과 주인을 배반한 종이 있으면 반드시 가서 그들을 눌러 이겼다. 무과 준비를 하면서 남치조, 남치근, 민응서같은 무리와 서로 어울려 따르니 사람들이 미치광이로 지목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비상한 사람임을 아는 이가 있었다. 어느 날 달이 휘영청 밝은 깊은 밤에 남대문에 올라가 기와가 덮인 처마 끝부분을 잡고 나는 듯이 몇 바퀴 돌기도 하였다.
하루는 그의 친구 남씨가 과실로 사람을 죽여 의금부의 관원이 시체를 검사하는데, 이항이 주위의 사람들을 헤치고 시체를 조사하고 있는 가운데로 느닷없이 들어가 시체를 움켜쥐고 나는 듯이 달아나 강물에 던져 버리고 그날로 비호같이 달려 전라도 관찰사를 찾아가 뵙고서그날에 서울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하였다. 한편 시체를 조사하던 관원은 갑자기 시체를 잃어버리고 그것이 이 아무개가 한 짓임을 들어서 알고는 호남에다 파발을 띄워 체포하도록 요청하였다.
"이항은 그날 전라도 감영에 있었다"
전라도 관찰사가 이렇게 회보하여 이항과 연루된 자들이 모두 모면할 수 있었다. 대체로 그의 뛰어난 용맹이 이와 같았다. 30세 이르러 그의 백부가 경계하는 말을 듣고 즉시 뉘우치며반성하여 그 자리에서 같이 어울리던 무리들과 사절하였다. 그리고는 '대학'을 소매 속에 넣고 도봉산 망월암으로 가서 마음을 단단히 하고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마침내 큰 유학자가 되었다. 그 뒤 남명 조식, 퇴계 이황과 함께 언관으로 훌륭한 계책을 진언한 것이 많았다. 임금이 진언하는 것마다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고 차례를 뛰어넘어 임천군수에 임명하자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장령에 임명하여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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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 불여 일견
귀로 백 번이나 설명을 듣느니보다 눈으로 한 번 보는 편이 이해하기에 낫다는 말이다.
한나라의 선제때 서북방의 유목민인 강이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장군이 강의 무리 천여 명을 죽인 데 대한 앙갚음이었는데 한나라 군사는 그들에게 참패를 하고 물러났다. 그래 선조는 후장군 조충국에게 사람을 보내어 누구를 토벌군의 장수로 삼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조 충국은 그때 70세가 지나 있었는데 자기에게 맡겨 달라는 대답이었다. 그는 일찍이 흉조와의 싸움에 나섰다가 포위를 당하여 몸에 20여 군데나 상처를 입으면서 포위망을 돌파, 전군을 건진 유공자였던 것이다.
"장군이 토벌에 나선다면 어떤 계략을 쓸테요? 그리고 군사는 얼마나 필요하겠고?" 하는 선조의 물음에 노장군은 대답하였다. "백문이 불여 일견이올시다. 현지에 가서 방책을 세우도록 하소서."
이리하여 그는 현지에 가서 정세를 살펴 둔전법이 상책이라고 여겼다. 기마병을 버리고 보병 만여 명이 각지에 나뉘어서 농사를 지으면서 두고두고 반란을 진압한다는 방책이었다. 그는 1년 걸려서 진압에 성공한다는 방책이었다. 그는 1년 걸려서 진압에 성공하였거니와 이 한서 조충국전에 '백문이 불여 일견'이란 문자가 최초로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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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3. 비로자나부처님의 외출
H스님
그 스님은 나보다 십 년이나 선배다. 스님은 시인이시기도 한데 요즘 바둑에 심취해 기원을 정해 놓고 가끔 바둑을 두러 다니시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스님과 바둑을 즐겨 두었는데 내가 두 점을 깔아야 한다. 그러면 내가 두 번지고 한 번쯤 이기는데, 하루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경기도에 있는 모사의 객실에 있을 때였다. 그런데 그 날은 내가 바둑을 연이어 두 판이나 이겼다. 스님은 어금니를 꾸욱 다물고 계시다가 눈을 씀벅거렸다. "밤이 늦었으니 잡시다." 스님과 나란히 누운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어느덧 밤은 두 점이 넘어가고 있었고 나는 가부좌(결가부좌. 불교에서의 앉는 법의 한 가지. 먼저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놓고,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놓고 앉는 것)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입정(선정에 드는 것. 마음을 한 경계에 정하고 고요히 생각함)을 하고 있으면 팔다리가 쑤실 것이고 잠이 오리라 하는 나의 심사였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또아리를 틀고 앉았는데 옆에는 콜콜 주무시던 스님이 입을 쩝쩝 다시는 거였다. "스님, 바둑판 가져오세요." 나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가 하면서도 바둑판과 알을 준비했다. "자아 두세요." 스님이 드러누운 채 명령하는 거였다. 스님은 누운 자세였다. 나는 두 점을 먼저 깔고 두는데 나보고 먼저 두라면 세 점을 깔라는 이야기인가 하고 눈을 멀뚱거렸다. 그런데 드러누운 채 중얼중얼거리는 스님이 이상했다. 그러나 사숙뻘인 스님에게 이래라저래라 가타부타 따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둑돌을 두고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도 그저 누워 있을 뿐 바둑을 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였다. 나는 화가 나서 스님을 흔들었다.
"스님, 두세요." "뭘요?"
그때 눈을 부비며 일어나는 스님이 웬밤에 홍두깨냐고 바둑판 앞에 앉은 나를 쳐다보는 거였다.
"잠이 안 오니 바둑이나 한 수 두자고 하셨잖아요."
내가 볼멘 소리로 말하자 스님은 그런 적이 없다는 거였다. 나는 투덜대며 바둑판을 치우고 보니 탁상시계가 삐리릭 울었다. 새벽예불이 끝나고 바둑 두자던 일을 기억하느냐는 물음에 모른다는 거였다.
스님의 잠꼬대에 멍청하게 바둑판을 깔았던 나는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스님 우리 내기 바둑 한 판 할까요?' 했더니 '스님이 무슨 내기 바둑이냐' 하시면서도 '그럼, 먼저 도에 깨달으면 나부터 중생구제해 주기로 하는 내기를 하자'며 씨익 웃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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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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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3장 소현세자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상
인조의 이런 소견 좁은 처사는 많은 사대부들의 불만을 낳았다. 광해군이 법적인 모후 인목대비에게 불효했다는 것을 반정 명분으로 삼은 인조가, 며느리 강씨의 왕곡을 막은 것은 심각한 자기 부정 이었다. 며느리 강빈의 왕곡을 끝내 허락하지 않은 인조의 처사로 인해 급기야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추대하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주모자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청원부원군 심기원이란 데서 인조에 대한 당시 사대부들의 감정을 알 수 있다. 끝내 세자빈의 왕곡을 허락하지 않은 인조는 세자와 세자빈의 심양으로 되돌아갈 때 환관 김언겸을 딸려 보냈다. 김언겸은 인조가 세자부루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간자, 측 첩보원이었다. 친아버지 인조는 이처럼 세자 부부를 의심해 간자까지 딸려 보냈으나, 세자는 배웅 나온 심기원과 김류, 홍서봉, 조창원 등 여러 부원군들에게 인조의 병을 옆에서 보살피지 못하는 심정과 이역에서 나그네로 머물러 있는 고통을 이야기하여 듣는 이의 눈물을 훔치게 하였다. 바로 그 이틀 후인 인조22년 3월21일 부사직 황익과 오국별장 이원로 등이, 청원부원군 심기원, 전지사 이일원, 광주 부윤 권억 등이 모반하려 한단고 고변했다. 고변자 황익이 전하는 심기원의 말은 이렇다.
"주상이 반정한 뒤로 잘못하는 일이 많아, 주상을 상황으로 추존하고 세자에게 전위하게 하고 싶어 내 집의 재산을 털어 온 수천냥을 마련하고 역사를 모집하여 지성으로 대접했는데, 내 소원은 오로지 강상을 부식하는데 있는 것이다. 지난번 세자가 심양에서 나왔을 때 전위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아무리 세자를 받들어 세운더라도 별다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실행하지 않고 회은군을 추대하려 한다."
또 심기원과 함께 정형당한 초판 정형은 심기원과 종질 권두형 형제의 말을 전했다.
"숙주께서 명선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그들과 합세해 심양과 끊으려고 하지만, 세자는 본디 원대한 계획이 없고 주상도 원수를 갚을 길이 없으니 한탄스럽다. 22일 거사한 후에 상에게 왕자 중에 합당한 자에가 자리를 물려주게 하고 상왕으로 높인 다음 정예포수 5만명을 거느리고 심양을 쓸어버린다면 어찌 남자의 사업이 아니겠는가."
즉 이들은 세자가 귀국했을 때 거사를 일으며 인조를 상왕으로 내쫓은 후 북벌을 단행하려 했으나, 소현세자를 추대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가 발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인조의 처사는 의외이다. 인조는 여러 신사들이 다 심기원을 정형하라고 청하는데도 사사를 고집하다가 허락하였으며, 그 시신은 팔도에 돌리지 말고 가족에게 내주어 장사 지내게 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이덕인은 정형하지 않고 사사하고 재산도 적몰하지 않았다. 역모 사건의 주범에 대한 처사치고는 매우 온건했다. 또한 심기원과 권억, 정형, 이일원, 이지룡, 이권, 김즙, 권두창등 관련다들을 정형한 후, 그해 4월 1일 명정전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대적인 사면 조치를 내린다. 이 또한 이례적인 거조가 아닐 수 없다. 인조로서는 반정 일등공신인 자신을 폐하고 세자나 회은군을 옹립하려 한 사건을 확대해 좋을 것이 없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이 경우 그렇지 않아도 인심을 잃은 인조의 위상은 땅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자신을 추대하려는 사건으로 옥사가 벌어지는 동안 조선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의 이런 움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자는 심양에 도착하자마자 청의 구왕을 따라 북경에 가야했다. 그해 4월 이자성 군대를 산해관에거 격파함으로서 중원 정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청은, 중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목적으로 소현세자를 데려간 것이다. 세자는 이렇듯 동아시아 정세를 놓고 자웅이 일철을 겨루는 역사적현자의 한가운데 있었으므로, 국내의 추대 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추대니 모반이니 하는 소모적 정쟁은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세자는 북경에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있었다.
아담 샬과의 만남
그 해 5월, 하루 평균120-30리 길을 달리는 청군과 함께 북경으로 향한 세자는 구왕이 이끄는 청군이 파죽지세로 북경을 손에 넣는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청이 북경을 차지한 것은 대세가 이미 청에게 기울었음을 의미했다. 북경에 도착한 세자는 문연각이라 불리던 명 목종의 부마 후씨 집에 가서 거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량이 극도로 부족해 20여 일 만에 심양으로 되돌아왔다가, 그해 9월 청나라 황제를 따라 다시 북경에 들어가 약 70일 동안 머물렀다. 이때 소현세자는 아주 중요한 인물을 만나 새로운 사상과 문물의 셀례를 받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다.1628년 32번째 예수회 신부로서 북경 옹안문 내에 거주한 아담 샬은 해박한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역서와 대포를 제작하는 일을 맡아 명나라 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청 세조는 북경 점령후 그의 과학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지금의 천문대장격인 흠천감정으로 삼고 대청시헌력을 짓게 하였다. 아담 샬은 북경 남문인 선문 내에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세운 남천주당에 자주 머물렀는데, 소현세자는 아담 샬의 거주지와 남천주당을 자주 찾아 이 벽안의 선교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세자의 북경 숙소인 문연각은 아담 샬의 숙소와 가까운 동화문 안에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오가면서 우정을 쌓았다. 아담 샬에게 소현세자와의 만남은 조선에 천주교을 전교할 수 있는 호기였고, 소현세자에게 아담 샬은 서양 문명과 천주교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머나먼 이국 따으로 자청해서 온 푸른 눈의 선교사와, 불모로 잡혀 온 불행한 세자의 남다른 처지가 이색적인 감화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 만남을 지켜봤던 당시 남천주당의 신부 황비묵은 <정교봉포>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순치 원년에 조선 국왕 인조의 세자는 북경에 볼모로 와서 아담 샬 신부의 명성을 듣고 때때로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에 대해서 살펴 물었다. 샬 신부도 자주 세자 관사를 찾아가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깊이 사귀었다. 샬 신부는 거듭 천주교가 정도임을 말하였는데 제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며 자세히 물었다. 세자가 귀국하자 샬 신부는 자신이 지은 천문, 산학, 성교정도서적 여러 가지와 여지구, 천주상을 선물로 보냈다."
선물을 받은 소현세자는 곧 아담 tif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귀하가 주신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적은 정말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 중 몇 권의 책을 보았는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널리 읽히고자 합니다. 이것들은 조선인이 서구 과학을 습득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 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해왔으니 하늘이 우리를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인조가 세자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을 때. 세자는 이렇듯 왕조가 교체되는 도시 북경에서 "하늘이 이끌어준 만남"에 감사하고 있었다. 세자가 아담 샬과 교류한 때는 서기 1644년 조선이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개국하기 232년 전으로 일본이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개국한 때보다도 211년 앞섰다. 소현세자의 이 개방적인 사고는 그야말로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운명을 뒤바꿔놓을 수도 있는 만남이었던 것이다. 9년간 볼모 생활을 소현세자의 사고를 이처럼 개방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세자는 아담 샬이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자, 신부를 대동하고 귀국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아담 샬을 놀라게 했을 정도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도 신부가 부족한 형편이어서 아담 샬은 신부 대신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들을 데려가라고 제의했다. 이방송, 장삼외, 유중림, 곡풍 등 중국인 환관들과 궁녀들이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마 임진왜란때 천주교 신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 땅을 밟은 이래 최초로 천주교 신자들일 것이다.
1644년 11월 1일 청 세조는 북경의 첫단에 제사하고 등극을 선포했다. 자신이 천하의 주인임을 선포한 것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이행사에 따라가 참예했다. 그 달 11일 구왕은 용골대를 시켜 세자가 꿈에도 그리던 말을 전했다.
"북경을 얻어 이전에는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의심하여 꺼리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은 대사가 이미 정해졌으니 피차가 서로를 신의로써 믿어야 할 것이다. 또 세자는 동국의 왕세자로서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의당 본국으로 영원히 보낼 것이다."
비운의 귀국길
드디어 길고 긴 볼모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청에서 세자를 귀국시키는 이유는 구왕의 말대로 "북경을 얻어 대사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세자를 붙잡아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기쁨에 앞서 다음과 같이 우려하며 대신들에게 물었다.
"청이 세자를 돌려보내는 이 조치가 참으로 좋은 뜻에서 나왔고 딴마음은 없는 것인가?"
대신들은 모두 다른 염려는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인조의 생각은 달랐다. 인조에게 세자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귀국하는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인조의 이런 마음을 모르는 채 장장 9년 간 품어왔던 가슴 벅찬 기대를 안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번 귀국은 이전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돌아오는 것이었다. 인조 23년2월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심양에 잡혀 갔던 세자는 삼십대 중반의 연부 연강한 나이로 귀국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타국에서 볼모로 보낸 34세의 비운의 왕세자였다. 세자는 이제 자신의 비운이 끝나는줄 알았으나, 귀국은 비운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 비운은 9년간의 볼모 생활을 지혜롭게 보낸 데서 시작되었다. 세자는 치욕의 볼모 기간을 새로운 국제 정세와 사상, 그리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체화시키는 기간으로 삼았다. 명나라를 죽도록 사모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깨달았고, 성리학 이념 체계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도 깨달았다. 세상에는 성리학뿐 아니라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리학은 덜대 진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사상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느낀 것이다. 수많은 서양 물품을 가지고 귀국하는 소현세자의 머리 속은,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이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조선은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상상 못할 비극의 현장이었다.
비극의 조짐은 인조가, 귀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를 막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부왕 인조는 명나라가 멸망했기에 더 이상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아둘 필요가 없어졌다는 합리적 사고를 멀리한 채, 그저 세자의 귀국 자체를 의혹의 눈초리로만 바라보았다. 세자가 휴대한 수많은 서양 서적과 물품들도 새로룬 세상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몸짓이 아니라 오랑캐에게 정신을 팔아먹은 증거물로 보았다. 소현세자가 귀국 두 달 만에 병석에 누운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인조의 냉담한 방응에 깊이 상심한 것이, 병으로 연결될 개연성은 있다. 그러나 그 이외에 인조나 후궁 조씨의 외부적 작용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귀국한 해 4월 23일 세자가 병석에 누윤 이유는 학질이었다. 이미 장성한 세자에게 학질을 그다지 큰 병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세자의 학질을 치료하기 위해 등장하는 어의 이형익이 바로 세자 독살설의 한가운데 위치한 인물이다. 이형익이 열을 내리게 한다며 발병 다음날부터 침을 놓았는데, 침을 맞은 세자가 3일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한 나라의 세자가 학질에 걸렸는데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침만 맞다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귀국한 해 4월 26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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