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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29 호
단기 4341. 1. 12 (음력 12. 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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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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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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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풍경을 감상하면서 걷는 일에 견줄 만한 것은없다. 멋진 경치는 한 곡의 음악과 같다. 그것은 적절한 박자로 감상되어야 한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도 속도가 너무 빠르다./ 폴 스코트 모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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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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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2. 행동의 방향을 밝히는 충고
밤새도록 곡하고 나서 누가 죽었냐고 물어본다
한국에 대형사고가 나면 관련부서나 장관이 실무자에게 책임을 묻고 새 사람으로 바꾸어 버린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책임이 있는 현직 장관이 사고 뒷처리를 하여 수습하게 하고 일이 정상화가 된 후 장관을 바꾼다.
복수하는 방법
사람들은 남에게서 은혜를 입으면 곧 갚으려 하지 않지만 피해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바로 복수를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작가 호머는 일리어드에서 ‘복수는 달다’고 하였다. 그는 그 당시 ‘깨소금’은 없고 꿀만 있어서인지 ‘복수를 하면 사람 마음 속에 꿀샘이 넘쳐 흐르는 것 같다’고 하였다. 하지만 ‘복수는 음식을 식혀서 먹듯이 시간이 지난 후에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말도 있다. 천천히 생각해 보란 이야기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격한 감정은 가라앉고 이성이 지배하므로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자식이나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자식이나 학생에게 체벌을 가할 때 반드시 자식이나 학생 자신에게 회초리를 갖고 오도록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존 밀튼(1608~1674)은 <실락원>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복수는 처음에는 깨소금같이 고소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쓴 물로 다시 되돌려 받는다. 피는 피를 부르듯이 복수는 복수를 부르므로 이러한 악순환을 방지하는 방법은 용서밖에 없다. ‘네 원수가 굶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러면 너의 원수는 머리에 숯불을 올려 놓는 것같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것이고 너는 하느님에게 상을 받을 것이다‘고 하였고, 네 자신이 직접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이 그 일을 처리할 때까지 기다려라‘고 성경은 말하였다. 원한은 올바름과 덕으로 갚으라고 하였다. 노여움이 크더라도 남에게 그것을 풀지 않는 사람이 되자.
복수는 천천히 하는 것이 좋다. (Revenge is a dish that can be eaten co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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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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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김재은
제12장
생각하기 위한 독서법 사고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III)
1. 자기 페이스로 읽는다
'생각하기 위해서 읽으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 자. 그러면 도대체 '생각하기 위해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질문에 앞서서, "도대체 읽는다는 것과 '생각한다'는 것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있을까요?" 하고 당신이 따지고 나온다면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지적한 바는 '읽는 것은 생각하는 것' 이라고 믿었던, 고전시대의 독서관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이렇게 추궁을 당할 필자는 꼼짝 못할 판단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다. '생각하는 것'과 '읽는 것'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 이 두 가지의 관계에 대해서, 고금의 철학자들이나 대독서가들이 어떤 것을 생각했으며, 어떤 말을 했는가를 한번 훑어봄으로써 교훈을 찾아보자. "너무 빨리 읽는다는 것은 좋지 않다" 고 말하면서, "너무 느리게 읽어서는 안된다" 라고 언뜻 듣기에는 모순처럼 보이는 까다로운 주문을 붙인 것은 저 유명한 파스칼이다. 그러나 이 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철학자가 독서 그 자체를 금할 턱은 없는 것이므로 우리들은 여기에서 '정도가 지나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의자에 앉아 있노라면, 나의 생각은 알게 모르게 잠들어 버리고 만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생각을 집중하고 싶을 때에는 걷는다" 라고 독서에 대한 마음가짐에 대해서 몽테뉴는 말하였다. 몽테뉴와 같은 위대한 인물조차도 이렇게 조심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생각하면서 읽고 있다' 고는 하면서도, 솔직하게 말한다면 마음은 언제나 공중에 떠 있는 경우가 많다. 너무 빨리 읽어 버리거나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들여서 읽는다는 비난을 듣게 되는 것은 결국 '뭔가 생각하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하는 씁쓸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씁쓸한 경험을 또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한 가지 비결로 가장 흥미를 끄는 것만을 읽는 방법이 있다. 희극에 흥미가 쏠려 있을 때에 무리하게 대수 문제와 씨름하거나 하지 말 것, 활극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 굳이 애써서 희극의 연구로 돌아올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만 어중간한 열중이어서는 안되겠다. 전심전력으로 열중해야 된다. 열중하는 것이야말로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열중하지 않고는 어떻게 해서 '잘 생각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앞에서 말한 파스칼의 의견에 다소 보충을 해 보자. "빨리 읽는 것이 즐거우면 빨리 읽는 것 이상으로 좋은 방법은 없다"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상태는 독자의 마음이 가장 '생각하기 쉬운'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는 일 자체가 '적당한 독서의 속도'를 정하고 있는 셈이다. "열중할 수 잇는 것일수록 읽기 쉽고, 읽기 쉬울수록 그만큼 생각하게 된다" 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더 나아가 생각하는 내용=이해의 효율을 올리는 일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2. '필요'는 생각하기 위한 첫걸음
"당신은 기차 시간표를 어떤 식으로 봅니까?"라는 질문에 "그런 거 뻔하지 않소?"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선 자기가 필요한 데까지 훌쩍 뛰어넘게 된다. 그리고 요점만을 자세히 살펴본다. 극단적으로 기호화된 기차 시간표 중에서 당신이 필요하고도 충분한 사항만을 이해하려고 들 것이다. 기차 시간표를 자주 보아야만 하는 사람은 그런 건 별로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가차 시간표를 보게 된 사람은 별수 없이 그 많은 시간표를 모조리 읽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어디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일까? 물론 '경험의 차이'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경험을 얻기 위한 근원이 된 '필요'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기차 시간표는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 다만 이 사실만이 쉽게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두 가지 극단으로의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여행을 즐기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차 시간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임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또 여행하는 것이 취미만이 아닌 사람들, 즉 직업상 여행을 자주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에게 기차 시간 같은 필요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들은 '기타 시간표 읽기'에는 프로 선수인 셈이다. 어쩌다가 기차 시간표를 이용하게 되는 사람과 항상 기차 시간표를 보아야 하는 사람 사이에는 읽는 속도라든가 이용하는 솜씨에 있어야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을 것은 뻔한 일이다.
이와 같이 대충 '생각하면서 읽는다'고는 하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커다란 핸디캡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상기하기 바란다. 몽테뉴와 같은 '책 읽기의 후로 선수'라 할지라도 '앉아 있으면 잠들어 버리는' 위험이 있었다는 점이다. 즐거운 것이어야만 할 독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짐스럽고 싫증나는, 한마디로 말해서 귀찮은 것이 되어 버려서야 되겠는가. 읽고 있던 책 위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몽테뉴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도 몽테뉴의 흉내를 내어서는 안된다.
3. 겉치레보다는 저자의 인격
그런데 기차 시간표의 예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기차 시간표를 보는 방법이 생각하면서 읽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한 하나의 열쇠가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 하는 독서와 인격 형성을 위해서 책을 읽는 것과는 어디까지나 구별되어져야 한다. 지식을 얻기 위한 태도는 자연스러운 욕구의 나타남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키워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식의 책'은 결국 그 자체로서의 의미밖에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기본(1737-1794, 영국의 역사가, "로마제국의 쇠망사"로 이름이 높다)이나 마콜레이(1800-1859, 영국의 역사가, 시사평론가), 몸젠(1817-1903, 독일의 고전학자, 역사가)의 역사책은 과연 존경할 만한 노작이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지식의 책이고, 생각하는 도구의 백화점이지만, 생각하면서 읽기에는 적당치 않은 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지식의 책'이란 어디까지나 '알 필요가 있어서 읽는' 종류의 책이다. 당신의 꼭 알고 싶은 부분이 20페이지에 있다고 하면, 그 부분만 읽으면 되는 것이다. 전부를 읽지 않으면 양심적이라고 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전부 읽는 것은 도리어 해로울 때도 있다고 하겠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라. 시간을 아낀다는 것은 유효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태도이다. 가능하면 당신의 노트를 활용하라.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사항은 될 수 있는 대로 반드시 노트를 하자. 이렇게 하면 훗날 책을 다시 읽는 시간을 절약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하면 훗날 책을 다시 읽는 시간을 절약할 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지식의 정리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한두 줄 읽기만 해도 내용을 알 수 있는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 목차를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내용을 알 만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서점에서 책을 선택할 경우 저자와 당신의 의견의 차이를 뚜렷이 알 수가 있는지, 또 책의 장절을 보아서 금방 알 수가 있는지 어떤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저자와 당신의 의견이 대립된다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간단히 잠들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논쟁을 하면서 좋든 싫든 당신은 '생각을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저자나 출판사 쪽에서 보면 책의 주제, 특히 독자에 대한 논점을 명백히 드러내 놓는다는 것은 센세이셔널 하다기보다는 성실한 태도라고 할 수가 있다. 의미를 명석하게 하려고 한 나머지, 인쇄상의 기교를 부렸다고 해서 백안시 당한 샤를르 폐기(1873-1914, 프랑스의 시인, "반월수첩" 창간자)의 일이 생각난다. 그와 같은 '편견'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판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출판사의 스타일도 나날이 새로워져서 새로운 장식을 하게 되는 것은 시대의 추세라고 할 수가 있다. 새로운 시대의 독자의 의도가 거기에 반영되고 있음을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급한 주장이나 겉치레가 거창한 것만을 보고 본질적인 논점의 소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더욱 조심하고 싶은 심정이다. 공격적이고 겉보기에 그럴 듯하게 보이는 책일수록 내용이 빈약한 것이 많다는 것이다. 비판에 대해서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에 소홀히 하기 쉬운 일방적인 주장은 대개의 경우 당신의 '인격형성'이나 교양의 향상에 도움이 안될 뿐만 아니라 지식의 씨앗조차도 되지 않는 것이다. 사정은 이렇다.
#1 어떤 책이 여기에 있다. #2 저자의 논점이 당신을 자극했다. #3 당신은 저자와 논점의 가부를 따져 보고 싶다. #4 당신의 기대는 채워졌다. 즉 당신은 읽는 과정을 통해서 생각하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물론 졸지도 않았다.
이렇게만 된다면 이상적이겠지요. 그러나 #1-#3의 전제가 결과인 #4에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없다고는 할 수가 없다. 당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왜 생겼을까? 물론 그것은 당신을 자극한 논점이 '겉치레만 번지르르한' 엉터리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실수를 미리부터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결과를 보고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은 저자가 제시한 논점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들이 정말로 대결할 가치가 있는 것, 그것은 저작의 인격이지 인격에서 독립된 견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변에-즉 주제의 배우에-당신의 존경을 느꼈을 때에 다분히 그 책은 진짜일 것이다. 당신이 읽고 생각하게 되는 책이라 당신이 읽으면서 '존경'을 잃지 않았던 책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당신과 저자 사이에서 침묵 속에 주고받는 '존경의 뜻'이 '창조적 비평'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설명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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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글터 → 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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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알이 꼬인다
본뜻 : 배알은 창자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줄임 말로 '밸'이라고 쓰기도 한다. 배알이 꼬인다는 것은 곧 창자가 꼬여서 속이 아프다, 편치 않다는 뜻이다.
바뀐 뜻 : 어떤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일이 비위에 맞지 않아 눈꼴이 사납게 느껴질 때 '배알이 고인다' '배알이 뒤틀린다'는 표현을 쓴다. 즉 창자가 꼬일 만큼 속이 편치않다는 말이다.
"보기글" -그 사람,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거들먹대는 거, 정말 밸이 꼬여서 못 봐 주겠더라구 -야, 어제까지 같은 동료였다가 자기만 1계급 특진했다고 당장에 반말하는데 야, 정말 배알이 뒤틀리고 욕지기가 나오더라니까
본데없다
본뜻 : '본 데'는 '보아서 배운 예의범절이나 지식'을 가리키는 말로서, 본데없다는 말은 보아서 배운 바가 없다는 뜻이다.
바뀐 뜻:어른들이나 주위로부터 보고 들어 배운 예절이 없다는 뜻으로, 버릇없이 굴거나 건방을 떨 때 쓰는 말이다.
"보기글" -어디, 어른 앞에서 본데없이 구느냐? -그 사람,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왜 그리 본데없이 구는가 모르겠네
울과 담
“울도 담도 없는 집에 시집 삼 년을 살고 나니 …” 이렇게 비롯하는 ‘진주난봉가’는 지난 시절 우리 아낙네들의 서럽고도 애달픈 삶을 그림처럼 노래한다. ‘울’이나 ‘담’이나 모두 삶의 터전을 지키고 막아주자는 노릇이다. 이것들이 있어야 그 안에서 마음 놓고 쉬고 놀고 일하며 살아갈 수가 있다. 울도 담도 없다는 것은 믿고 기대고 숨을 데가 없이 내동댕이쳐진 신세라는 뜻이다.
‘울’은 집이나 논밭을 지키느라고 둘러막는 것이다. ‘바자’나 ‘타리’로 만드는 것 둘이 있다. ‘바자’는 대·갈대·수수깡·싸리 따위를 길이가 가지런하도록 가다듬어 엮거나 결어서 만든다. 드문드문 박아둔 ‘울대’라고 부르는 말뚝에다 바자를 붙들어 매면 ‘울바자’가 된다. ‘타리’는 나무를 심어 기르거나 베어다 세워서 만든다. 탱자나무·잔솔나무·동백나무 같은 나무를 심어서 기르면 저절로 자라서 ‘생울타리’가 되고, 알맞게 자란 나무를 베거나 가지를 쳐서 세우고 울대 사이로 새끼줄로 엮어서 묶으면 그냥 ‘울타리’가 된다.
‘담’은 논밭 가를 막는 데는 쓰지 않고, 오직 집을 지키느라고 둘러막는 것이다. 흙에다 짚 같은 검불을 섞어서 짓이겨 쌓는 흙담, 흙과 돌을 층층이 번갈아 섞어서 쌓는 흙돌담, 오직 돌만으로 쌓는 돌담이 있다. 흙담·흙돌담은 반드시 위에 짚으로 이엉을 이거나 기와로 덮어서 눈비를 막아야 한다. 그러니까 눈비가 많고 비바람이 무서운 고장에서는 돌담이 아니면 견디기가 어렵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고양이
‘고양이 앞에 쥐 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 등은 고양이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속담이다. ‘고양이’(猫)는 15세기 문헌에서는 ‘괴’로 나타난다. 이 ‘괴’에 ‘작은 것’을 뜻하는 뒷가지 ‘-앙이’가 연결되어 ‘괴양이>고양이’가 된다. ‘고양이’는 17세기에 보이며 19세기부터 많이 썼다.
‘고양이’는 방언에서 매우 다양하게 쓰인다. 그 부류를 크게 나누어 보면 ‘괴·고양이·고니’로 나눌 수 있다. ‘괴’는 중세국어의 형태를 쓰는 것으로 지역에 따라 ‘고이·괴·궤·귀’로 발음한다. ‘고양이’는 ‘고앵이·고얭이·귀앵이·귀얭이·괴양이·괴앵이·광이·괭이·괘이·궤이’로 발음한다.
‘고니’(鬼尼)는 12세기 문헌인 <계림유사>에 보이는 어휘로 ‘고니’에 뒷가지 ‘-앙이’가 연결되어 ‘고냉이·고넹이·고냥이·꼬냥이·고넁이·개냉이·고내기·괘내기·귀내기·괴대기’로 발음한다. 소설 <토지>의 “니내 할 것 없이 사우는 고내기 새끼, 다 마찬가지 아니겄소”란 문장에서 이 방언을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새깨미·살찡이’ 등을 쓰고 있다. 북쪽에서는 위에서 제시한 것 외에도 ‘고내·고냬·고내이·고애·고얘·공애·공얘’ 등의 발음을 사용하고 있다. ‘고양이’는 매우 다양한 발음으로 고장에서 쓰고 있다. 마치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듯하다. “약빠른 고양이 밤눈 어둡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서울 / 허재영
서울
서울은 예부터 수도를 상징하는 토박이말이다. 게다가 서울이라는 땅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는 매우 다의적이다. ‘그 나라의 서울은 어디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때의 서울은 ‘수도’를 뜻하는 말이며, ‘서울 600년사’라는 말에서는 한국의 수도인 ‘서울’을 뜻한다.
그런데 ‘서울’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 말은 본디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과 같이 정치나 행정의 중심지역을 뜻하는 말이었다. 특히 서라벌과 서벌은 ‘동쪽’을 뜻하는 ‘새’( )에 ‘마을’이나 ‘성’을 뜻하는 ‘벌’이 합쳐진 말로,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의 옛이름이었다. 그러기에 양주동은 〈고가연구〉에서 ‘향가’의 옛이름 가운데 하나인 ‘사뇌가’를 ‘동방의 노래’라 풀었던 것이다.
옛말 가운데 ‘서울’과 관련된 지명은 백제에도 있다. 백제의 서울인 ‘부여’의 옛이름이 ‘소부리’(所夫里)다. ‘서라벌’이나 ‘소부리’는 같은 뜻을 지닌 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마을을 뜻하는 말로 신라에서는 ‘화’(火: 불)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고, 고구려에서는 ‘홀’(忽)을 붙이는 사례가 많았는데, 백제는 ‘부리’(夫里)를 붙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 백제의 수도인 ‘소부리’는 모두 ‘서울’에 해당하는 옛말이었음이 증명된다.
중국에서는 서울을 소리가 비슷한 ‘서우얼’(首爾)로 적기로 했다고 한다. 얼마나 정착될지 궁금하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국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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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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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 속에 숨어 있는 역사의 비밀(근, 현대편) - 박영수
1.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갔나
커피와 카페
"커피!" 하고 주문하면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은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오해다. '커피'가 아닌 '카페'로 불리는 곳이 의외로 많을 뿐만 아니라 나라마다 즐기는 커피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비엔나 커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만 하더라도 '카페'를 주문하면 '비엔나 커피'를 갖다 주는 일이 흔하다.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 터키, 영국, 미국 사람들은 커피를 광적으로 좋아하며, 좋아하는 커피 맛도 제각각 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에서는 카페오레와 크로와상이 없으면 결코 아침이 오지 않는다'란 얘기가 있을 만큼 카페오레는 프랑스인에게 인기가 높다. 카페오레는 '우유를 탄 커피'란 뜻인데, 같은 분량의 진한 커피와 우유를 따로 데운 다음 큼직한 잔에다 부어 섞어 마신다. 이탈리아는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로 유명하다. 이탈리아에서는 '카페'를 주문하면 에스프레소를 준다. 독하고 끈적끈적한 에스프레소의 맛은 무척 강렬해서 순한 맛을 좋아하는 이는 인상을 찌푸리기 쉽다.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아어로 '급행'을 뜻하는데, 주문받는 즉시 내 오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마실 때에도 카운터에 서서 단숨에 마셔 버리는 경우가 많다. 또 하나의 색다른 커피인 '카푸치노'는 검은 커피, 흰 거품이 카푸친 종파의 수도승복을 연상시킨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터키에선 아침 식사를 '커피 마시기 전'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커피를 좋아한다.여성들의 결혼 조건으로 '커피의 거품을 잘 내는 솜씨'가 꼽힐 정도다. 터키에서도 '카페'라고 부르는 커피는 주문할 때 '세켈리'(설탕 넣은 것), '사데'(설탕 없는 것) 여부를 명확히 해야 한다. 한 잔씩 주문대로 끓여 나오는 이 곳 커피는 물 끓이기 시작할 때 아예 설탕을 넣기 때문이다. 쓴 맛이 강하기 때문에 터키식 커피를 먹은 후엔 입가심으로 냉수를 마시는 습관이 있다. 그리스에서도 터키와 비슷한 방법으로 끓이지만 이름은 '카페 엘레니코'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카페'가 아닌 '커피'로 통한다. 흔히 '아메리칸 스타일' 하면 '미국인들이 즐기는 양 많은 순한 커피'를 말하는데,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인들도 아침이면 빵과 함께 부드러운 커피를 '배불리' 마신다. '커피광'의 시각에서 보면 아메리칸 스타일은 무미건조한 맛이지만, 공복에 마시면 한결 부드럽다.
커피는 1천 년 전 에디오피아에서 처음 흥분제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한 염소몰이꾼이 커피를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는 염소들이 어느 야생 나무의 붉은 열매를 따 먹은 후 흥분해서 뒷발질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이상하게 여겨 몇 개 따서 맛을 보았다. 맛이 독특했으므로 그는 기도 중에 졸음이 와서 못 견디겠다는 어느 수도승에게 건네 주었고, 커피의 자극성은 수도승의 수양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커피나무는 남아라비아로 전파되었다가 15세기경부터 재배되었다. 커피는 특히 이슬람교도들의 긴 종교 의식에서 대중적인 음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정통 사제들은 그것이 사람을 도취 시킨다며 코란에 의거해 이를 금지시켰으나, 엄한 벌칙에도 불구하고 커피 음용은 아라비아와 그 주변국들로 급속히 퍼졌다. 커피가 유럽에 퍼지게 된 것은 1628년 터키 군대의 패전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와 유럽의 패권을 다툰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그들을 누르기 위해 은밀하게 터키와 손을 잡았으며, 그들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를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터키 군대는 빈을 향해 진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승리한 오스트리아 군대는 패주한 터키 군대의 막사에서 자루에 든 초록빛 콩을 발견했다. 그것을 불에 볶아서 가루로 만든 뒤 더운 물을 붓자 힘이 용솟음치는 멋진 음료가 만들어졌다.
터키 군대를 물리친 뒤, 빈에서는 유럽 최초로 카페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그 음료의 맛은 빈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들, 특히 영국인과 프랑스인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커피는 이제 유럽인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음료가 되었고, 18세기부터는 상류 사회의 유행 음료가 되었다. 커피의 유행은 재배지 확대를 불러 일으켰다. 17세기 말까지 세계의 커피 공급은 전적으로 남아라비아의 예멘 지방에 의존했다. 그러나 음료의 대중성이 높아짐에 따라 커피나무 재배는 여러 나라로 급속히 전파되었고, 18세기 들어 아이티, 브라질, 자메이카, 콜롬비아, 멕시코 등으로 확산됨으로써 오늘날 남아메리카가 '커피 원료의 왕국'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커피'를 프랑스어로 '카페'라 하는데, 프랑스어에서 차용한 카페는 커피라는 뜻의 터키어 'kahve'에서 유래한다. 즉 초기의 카페는 '커피 파는 집'을 뜻했다. 세계 최초의 카페는 1554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차이하나' 라는 간판을 달고 문을 열었으며, 이 아이디어는 17세기경 유럽으로 흘러들어가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모임의 장소이자 데이트 장소로 선보이게 되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2백 년 동안 런던과 파리를 중심으로 번성한 유럽의 유명한 카페들은 경쟁적으로 휘그당과 토리당에서 발행하는 신문들을 마련해 놓았다. 따라서 당시 카페는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상인들의 집합지이기도 했다. 카페는 처음엔 커피만을 팔았으나 차차 가벼운 식사도 팔기 시작했다. 커피와 커피 음료가 유럽에 도입되자 술을 마시지 않고도 사교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교 형태에 있어 대단한 변화를 유발했다. 술기운을 빌어 감상적이거나 에로틱한 대화를 나누던 사교 문화가 맑은 정신 상태에서의 이성적 대화 문화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프랑스인들이 대화와 토론을 좋아하게 된 시대 배경에는 바로 커피가 놓여 있었다. 역사가 미슐레는 커피의 유행이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냈고, 사람들의 기질까지 변화시켰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프랑스 사람이 이 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게 된 것도 드문 일이다.(...) 커피가 유행한 결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변화됐다. 그것은 담배의 게으름성으로부터 신경이 약화되던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피는 정신을 흔들어 놓는 애매하고도 둔한 시의 자취를 감추게 함으로써 진리의 빛을 전면으로 밀어 올렸다.'
프랑스 최초의 카페는 1672년에 생긴 프로코프란 곳으로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가 즐겨 찾았던 곳이다. 카페는 1750년 무렵 6백여 군데나 있었다. 보험, 선박, 주식, 상품 거래, 심지어 노예 매매까지도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문필가와 예술인들은 단골 카페에서 동인들과 함께 공연을 하거나 시낭송회를 가졌다. 또한 19세기에 일간 신문과 가정 우편함이 등장할 때까지 카페는 소포와 편지를 배달하는 비공식적인 우편 업무도 수행했다. 18세기의 카페는 지식인과 예술인들에게 지적 교류를 위한 최상의 장소였으며, 프랑스 혁명 직전에는 거사를 위한 모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프랑스의 사상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카페 드 플로어'에서 만나 실존주의를 구상하기도 했다. 한편, 오늘날 영국에서 말하는 '카페'란 가벼운 식사를 겸할 수 있는 곳으로 레스토랑보다 간편한 식당을 뜻하는데, 이것이 동양에 전해지면서 여자 종업원의 서비스가 따르는 음식점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여급이 있는 술집으로 변하고 대신 커피 등 차를 파는 집은 다방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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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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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 4부 항산화벽이 무너지면 건강도 무너진다
운동을 잘못하면 항산화벽이 무너진다
운동은 활성산소를 만들므로 해롭다는 연구에 대해 얼마 전 국내 TV프로에서 노화와 장수에 대한 특집방송이 방영된 적이 있었다. 세계 각국의 노화학자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보충자료를 모아 만든 특집이었는데, 일반인들은 물론 의료인들에게도 반응이 매우 좋았던 프로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 특집에서 세계적인 노화전문 학자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운동을 무리하게 하면 활성산소가 발생해서 오히려 더 해로울 수 있다. 운동을 시킨 쥐가 안 시킨 쥐보다 수명이 짧다. 인간의 경우에는 걷는 정도의 운동이 바람직하다 하는 등의 내용이 보도되었는데, 이후 얼마간 스포츠센터와 헬스클럽마다 해약사태가 일어나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의 하나로, 당뇨와 고혈압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 한 분은 내가 해 준 운동처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운동에 대한 활성산소 유해론에 대해서 몇 가지를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우선 운동을 하게 되면 평상시보다 훨씬 더 많은 산소를 소모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활성산소도 많이 만들어질 것이고, 그에 따른 손상도 커지게 된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인간은 항산화 방어벽을 가지고 있으므로 운동의 피해를 줄일 수가 있지만, 무한정 보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활성산소와 운동에 관한 연구들을 일단 종합 요약을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휴식이나 가벼운 운동을 할 때에는 체내 항산화 방어벽으로 세포를 보호하여 정상 기능을 계속하도록 유지해 주지만, 과다한 운동(특히 진이 빠지도록 하는 운동)을 하게 되면 방어벽의 한계가 와서 세포와 조직의 손사잉 올 수 있고 둘째, 항산화 방어벽이 질병이나 영양부족으로 약해져 있을 때에는 더욱 피해가 클 수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원칙을 지켜서 하는 운동은 활성산소의 피해도 줄이면서 운동의 효과를 최대로 얻을 수 있다.
운동 때 생긴 활성산소는 조직에 손상을 준다
운동할 때 증가되는 활성산소의 양을 아직까지는 직접 잴 수는 없다. 하지만 산소 소모가 증가되면서 생기는 활성산소의 양이 수배 이상 증가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우선 휴식 때보다는 당연히 숨이 차고 호흡이 빨라지게 된다. 이에 따라 미토콘드리아에서 전자의 흐름이 증가되어 활성산소도 같이 증가하게 된다. 운동을 하면 백혈구가 활성화되고, 이로 인해 조직 손상과 염증 반응이 생기기 때문에 활성산소가 증가된다. 누구나 경험했겠지만 안 하던 운동을 하고 나면 근육에 젖산이 축적되면서 뻐근한 통증이 며칠 간다. 이렇게 근육에 젖산이 쌓이면 혈색소로부터 산소 분비가 촉진되므로 활성산소가 증가된다. 또 교감신경 호르몬 증가로 인한 심장대사의 증가로 역시 활성산소가 증가된다. 어쨌든 활성산소가 증가된 것이니 아무일 없이 조용히 넘어갈 리는 없고, 조직에 손상을 주게 되는 것이다.
운동 때 생긴 활성산소의 피해를 증명하는 것은 조직에 손상이 온 것을 직접 측정해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좀 현실적으로 어렵고, 그 대신 간접적인 방법으로 그 피해를 증명할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으로 활성산소에 의한 지질의 과산화변질 정도를 잴 수 있다. 세포막 성분인 다가불포화지방산이 프리라디칼에 의해 손상이 되면 수소화탄소 가스(예: 펜탄)와 알데하이드(예: 말론디 알데하이드)란 물질이 생기는데, 이들 두 물질은 측정이 가능하다. 실제로 오랜 시간 심한 운동을 한 사람이 호흡할 때 내뱉은 공기에서 펜탄수치가 운동의 강도에 따라 증가되는 것이 관찰되었다. 마찬가지로 말론디알데하이드도 운동 후 각 조직에서 수치가 증가하였다. 두 번째 증명 방법으로 세포 내 항산화 근위병의 하나인 환원상태의 글루타치온(이하 GSH로 표기함)이 소모되는 것을 측정할 수 있다. 이미 설명했듯이 세포 내부의 물질들이 프리라디칼의 공격을 덜 받도록 해 주면서 단백질과 핵산의 엉김을 막아 주는데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물질이 GSH이다. 만일 세포내부에 활성산소가 많이 생기면, GSH가 이들을 처리하는 데 소모되므로 그 양이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운동할 때 GSH양이 원래보다 매우 적어지는 것을 보면 이는 활성산소가 많이 생겼다는 의미가 된다. 그외 DNA가 손상되었을 때 생기는 '8-히드록시-데옥시-구아노신'이 마라톤 달리기 후 선수의 소변에서 증가되기도 한다.
적당한 운동이 건강에 이롭다는 것은 건강상식이다. 한 가지 방법으로 각종 질병 예방효과와 치료 효과를 내는 것 중에서 운동을 따라갈만한 것도 별로 없다. 그렇다면 활성산소에 의한 운동유해론은 이제까지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의학자들이 운동이 좋다고 한 것은 몇 가지 원칙을 지켜서 하는 운동을 말한 것이지 무조건 운동이 좋다고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운동을 해야 활성산소의 피해를 안 받고 이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 7부에서 따로 다루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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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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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소인들이 조정에 있으면 붕당을 만든다고 임금에게 책임을 물은 임권
임권(1486-1557)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사경, 호는 정용재이다. 중종 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6년 뒤 문과에 급제하였다. 을사년(1545) 7월의 인종 상사에 조정 신하들 중 절반이 평상복 차림의 옥관자를 썼으나 유관과 임권만은 유독 소복을 입었었다. 그리고 인종의 위패를 별묘인 연은전에다 모시려고 할 때에, 임권이 인종은 위로 중종을 계승하고 아래로 명종에게 물려 주었으니 실제로 대통을 이은 군주인데, 별도로 연은전에서 모시게 하는 것은 남에게 붙여서 먹는 그런 임금과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혼자서 정론을 가지고 항거하며 사사로운 의논에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권이 언제인가 경연에 나아가 아뢰었다.
"김안로가 조정에 있게 되자 소인으로서 일정한 주관이 없는 자들이 붕당을 만들어서 못된 짓을 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겠지만 전하께서도 붕당을 만들게 하여 그들에게 못된 짓을 마음대로 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중종이 대답하였다. "내가 그 책임을 핑계댈 수는 없다" 임권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융성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참으로 만세 제왕의 본보기이다. 신하의 바른 말을 수용하고 과실을 자신에게 돌리니 한 가지를 거론하여 두 가지의 아름다움을 갖춘 격이다. 만일 임금이 자신이 옳다고 하면서 바른 논의를 듣기 싫어 한다면 누가 기꺼이 바른 말을 발설하여 화의 함정으로 빠져들려고 하겠는가?"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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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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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지진
강을 뒤로 하고 진을 치면 적은 정면으로 공격해 오고 뒤에는 강물이니 물러서면 빠져 죽을 판이라서 나아가 사력을 다해 적을 무찌른다는 전법.
한 고조가 제위에 오르기 2년 전(BC204)일이다. 한 신은 위나라를 무찌른 여세를 빌어 조나라로 진격하였다. 그래 조나라 군사 20만이 정경땅의 좁은 길목에 집결하고 굳건한 성을 쌓고 대비하고 있었다. 한 신은 정경 땅 어귀에 이르자 경기병 2천만에게 한 자루씩 깃발을 주고
"그대들은 저 성 근방의 산에 잠복해 있으라. 우리 순사가 도주하는 척하고 물러나면 적은 전력을 다해 추격해 올테니 그대들은 그 사이에 성으로 들어가서 적의 깃발을 거두고 우리 군사의 기를 꽂으라."
한 신은 또한 만여 명의 군사를 강물을 뒤로 하고 포진한 다음 일부 병력으로 하여금 좁은 길목으로 진격케 하였다. 강물을 뒤로하고 포진한 한군을 보고 조나라 군사들은 자못 비웃었다. 드디어 몇 차례의 각축전 끝에 한군은 예정대로 후퇴하여 '배수의 진'에 합류하니 조나라 군병은 한 신의 목을 베겠다고 온통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성새가 빈 사이에 잠복해 있던 한 신의 경기병 2천 명이 들어가 성벽의 깃발들을 온통 갈아 꽂았다.
한편 강물을 뒤로 하고 포진한 한군 만여 명은 물러날 여지가 없는 까닭에 필사적으로 싸웠으니 조군은 다시 성채 안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기네 성채에는 어느새 한군의 깃발들이 나부끼고 거기서도 한군이 공격해 오고 있지 않은가. 앞뒤로 한군의 공격을 받아 조나라 군병 20만은 참패하고 말았다. 싸움이 끝난 축하연에서 부하 장수들이 한 신에게 물었다.
"병법에는 산을 등지고 강을 바라보며 싸우라고 했습니다. 한데 이번에 강물을 등지고 싸우신 까닭은?" "어느 병서에 보면 자신을 사경에 빠뜨림으로써 비로서 살아날 수 있느니라 하였고. 그 병법을 이번에 활용한 셈인데 왜냐면, 우리 군사는 워낙 원정을 거듭해왔던 만큼 온통 보충병으로써 이루어진 군병이오 그러니 생지에 놓아두면 결속이 안될 것이 뻔하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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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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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3. 비로자나부처님의 외출
역마살
"아니 자네 어디를 가려는가?"
객승으로 떠돌던 시절 경기도의 한 절에 있을 때였다. 내가 걸망을 꾸리자 주지스님이 물으시는 거였다.
"정이 너무 들었습니다. 더 깊이 정들기 전에 떠나려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주지스님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동안 주지스님은 편안했던 것이다. 내가 새벽예불의 기도에서 저녁까지 목탁을 두들겨 댔으니까 말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는 것도 소중하지. 그러나 인연을 다스리는 것 또한 중요하지. 신도들이 스님을 좋아해요."
기실 걸망을 꾸렸던 이유는 어찌된 일인지 신도들이 주지스님을 싫어하고 모두 나를 좋아하는 까닭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주지스님은 게을러 예불을 빼먹기 일쑤였고, 법회가 있어도 대강대강 해치우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도 중 굶어 죽는 법 없다고, 날이면 날마다 곡차 타령에다가 신도들의 신심을 울거먹고 사는데 해도 해도 너무한 거였다.
"아닙니다. 제가 이곳을 떠나야지 스님이 부지런해지십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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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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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3장 소현세자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잊을 만하면 출연자만 바꿔 재탕 삼탕을 하는 우리나라 텔레비젼 역사드라마의 단골 주제는 연산군과 장희빈이다. 그러나 이들의 삶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의미도 있으며 무대도 드넓은 주제가 소현세자이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그리고 삼전도 치욕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도, 그 뒤에 존재하는 소현세자와 그 일가의 비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만큼 소현세자는 잊혀진 인물이다. 그가 만약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면 이후 조선의 운명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는데, 소현세자는 이런 국제 정세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다.
소현세자는 삼전도 치욕의 이후 이조를 대신해 청나라로끌려가, 초기청의 수도였던 만조의 심양에서 9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볼모로 보냈다. 조선의 세자가 볼모가 된 것 은 조선의 마지막 세자 영치노가 소현세뿐이다. 소현세자를 독살한 혐의자가 부왕 인조라는 점은, 그의 심산한 일생을 한마디로 축약해 보여준다. <인조실록>에따라 그의 죽음의 현장에 가보면, 9년여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세자가 병에 걸린 것은 귀국한 두 달 후인 인조 23년 4월23일 이었다. 어의 박군이 진단한 세자의 증세는 학질이었다. 그런대 장년의 세자에게 그다지 중병이라고 볼 수 없는 학질을 치료한 인물이 문제의 의관 이형익이다. 약방에서는 다음날 새벽 인조에게 이형익을 시켜 침을 놓앙서 학질의 열을 내리게 해야 한다고 주청했고 인조는 그 말에 따랐다. 그날 <인조실록>은 화성이 적시성을 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형익은 인조의 명에 따라 세자가 발병한 다음날인 34일부터 침을 놓았다. 다음날인 25일에도 세자는 침을 맞았는데 그 다음날일 26일에 그만 덜컥 세상를 떠나고 말았다.
세자의 갑작스럽고 허무한 죽음은 당연히 수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어린아니도 아니고 풍토가 다른 이역에서도 9년을 너끈이 버틴 세자가 학질 따위에 쓰러질 리는 없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학질에 침을 맞다 죽은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었으므로 당연히 세자가 독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근런데 소현세자가 독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는 정사인 <인조실록>23년 6월27일자에도 나온다. 소현세자의 졸곡제기사중 세자의 시신 상태를 설명해 놓은 부분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 나오므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는 것이다. 김종직의 조의제문 파문이 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기본 자료인 사초에서 비롯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실록은 함부로 적을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게다가 종실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라고 목격담의 출처까지 적어놓았으니, 실록의 이 내용은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현세자는 정말 독살된 것일까? 또한 그렇다면 왜 볼모 생활 중의 심양에서가 아니라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고국에서 독살당해야 했을까? 그 의문을 추적해보자.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인조 15년 1월30일 50여명의 사람들이 통곡을 하면서 남한산성을 나왔다. 의장도 없는 신하의 행렬속에, 신하를 뜻하는 푸른 남염의 차림으로 백마에 올라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였다. 그 초라하고 굴욕적인 행렬 속에는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도 있었다. 산성을 내려온 인조는 죄인임을 나타내기 위해 가시 박힌 자리를 펴고 앉아 대죄했다. 인조와 소현세자가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의 인도에 다라 삼전도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청 태종이 황제를 나타내는 황옥을 펼치고 않아 있었고, 주위에는 활과 칼로 무장한 갑옷 차림의 장수들이 진을 치고 좌우에 옹립한 가운데 장엄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인조가 손수 걸어 앞에 이르자 용골대가 나와 진문 동쪽에서 머물러 기다리게 하였다. 용골대가 진 안에 들어갔다가 나와 청 태종의 말을 대신 전했다.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인조가 답했다. "천은이 망극합니다."
용골대가 단 아래 북면하는 쪽에 자리를 마련했다. 북쪽을 바라보는 곳은 신하의 자리이고 남쪽을 바라보는 곳은 임금의 자리이다. 인조는 그 자리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삼배구고두례가 끝나자 인조를 단 위에 오르게 하였는데 청 태종은 남면하고 인조는 동북 모퉁이에서 서쪽을 향해 앉았다. 또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서쪽을 향해 나란히 앉고 소현세자는 그 아래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조선의 두 대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은 그아래에 앉았다. 청 태종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무력으로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이에 맞서 청의 콧대를 꺽을 무사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위솔 정이중이 나서서 다섯 번을 쏘았는데 활과 화살이 조선과 다르므로 모두 맞지 않았다. 이에 만족한 청에서는 떠들썩한 술판을 벌였다. 잠시 후 인조가 완전한 항복의 표시로 도승지를 통해 국보를 받들어 올렸다. 당사자인 인조는 물론 소현세자, 봉림대군 모두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으니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치욕이다 .
볼모로 가는 두 형제
삼전도의 치욕은 병자호란때 패전의 결과였으나 사실 그 뿌리는 인조반정에 있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와 폐모론에 대한 반대를 명분으로 일으킨 것인데, 성격상 연산군의 학정에 항거해 일으킨 중종반정과는 달랐다. 연산군과 달리 광해군의 정사는 국가나 백성들의 자리에서 볼 때는 탁월한 것이었다. 인목대비와 서인의 처지에서는 광해군의 정사가 패륜이었을지 몰라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늘상 벌어지는 일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따라서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에게는 인조반정이 희소식이 었겠지만, 광해군의 치세에 만족하고 있던 일반 백성들에게는 임진왜란의 참화 극복에 전력을 바쳐야 할 시기에 벌어진 지배층 내부의 불필요한 정치적 소요에 지나지 않았다. 반정 직후 일등공신의 한사람인 이서의 회고를 보자.
"갑자기 광해군을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새 임금이 성덕이 있는 줄 알지 못했으므로 상하가 놀라 어쩔 줄 몰랐다.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써 진압할 수 도 없어서 말하기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오리 이원익이 적왕조 때의 원로로서 영상에 제수되어 여주로부터 입조하자 백성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으로서는 인심을 수습할 명분과 사람이 없어, 남인 정승 이원익이 명망을 빌려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서인 정권이 겨우 위기를 수습한 반정 다음해인 인조 2년에는 내부 분열인 이괄의 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괄은 반정의 주역이면서도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는데, 이 안은 만주에서 여진족의 통일 기운이 높아져 국경 수비에 치중해야 할 시점에 발생해 북방 국경을 크게 약화시켰고, 더욱이 정묘, 병자 양 호란때 조선군이 무력하게 무너지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반정 후 서인 정책의 핵심 방향은 광해군 정권의 모든 거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 중요한 것이 바로 외교정책의 변화였다. 광해군의 명,청 중립외교에 대한 반정정권의 인식은 인조의 즉위를 허락하는 인목대비의 즉위 교서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년으로,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임진년에 재조해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어 선왕께서는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삼한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그 통분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반정정권이 급격하게 반청정책을 전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반정 당시 중국대륙은 후금, 즉 청나라와 명나라가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 대치하고 있었다. 이런 긴장 상태에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평북 철산의 가도에 주둔하면서 요동 정벌을 계획한 것이 청의 심기를 건드렸다. 후금은 조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중원을 정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묘호란은 양국이 형제관계를 맺는 정묘조약으로 종결되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당시 청은 명과 조선 모두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수습책으로 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정묘조약 9년후인 인조 14년에 청이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나선 것은 조선과의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인조와 서인정권이 이를 거부하려면 정묘조약 이후 9년동안 그만한 힘을 길었어야 했다. 하지만 서인정권은 국방력 대신 명분만 쌓았고, 그 명분에 의하면 청을 천자국으로 모실 수 없었다. 청을 천자국으로 받드는 것은 반정 명분 자체를 부인하는 자기 모순이었다. 인조는 8도에 선전 교서를 내렸다 조선 백성보다도 '명나라를 향한 큰 의리"를 더 큰 목소리로 주창한 이 선전 교서는,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후금과 화를 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목청뿐인 허세에 대한 청의 대답은 군사 공격이었고 그 결과는 삼전도의 치욕이었다. 그러나 삼전도의 치욕은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끝나지 않았다 . 이후 조선은 군사력을 가지 수 없으며, 소현세자 부부를 비롯해 봉림대군 등 왕자들을 볼모로 끌고 가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화의 조건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삼전도의 항복 5일 후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는 청나라로 잡혀 가기 전 하직 인사를 하러 대궐로 돌아왔다. 이때 배웅하던 신하들이 모두 길가에 엎드려 통곡하였는데, 한 신하가 말의 재갈을 당기며 울부짖자 세자는 말을 멈추고 함참 동안 그대로 있기도 하였다.
청과의 화의조약 중 가장 논란이 된 것이 세자의 볼모 문제였다. 척화파는 모두 전사하는 일이 있더라도 세자를 청나라에 내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강화파라 해도 세자가 볼모로 가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 문제의 해결은 실로 난감했다. 이때 이 난제를 해결한 인물은 다름 아닌 소현세자 자신이었다.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전하라."
볼모 문제는 소현세자가 이처럼 스스로 청 진영에 나아가기를 자청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운명을 내던진 이 결정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조선 지배층 대다수는 국가의 안전보다 일신의 안전을 더 중시했다. 청이 세자와 대군 이외에도 판서의 아들을 인질로 원하자, 평소에는 아귀처럼 관직에 달려들던 관료들이 서로판서를 맡지 않으려고 다투었다. 실제로 호조판서 김신국이 내외의 비판을 모른 체하면서 병을 핑계대고 사직을 청해 이경직이 대신 임명되기도 했다. 세자가 끌려가는 판국인데도 고위관료들은 나라보다는 집안을 더 생각했던 것이다. 드디어 2월 8일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과 대군부인 장씨는 청 태조의 열네 번째 아들인 구왕과 함께 멀고 먼 북방길을 떠났다. 인조가 지금의 경기도 고양의 창릉(昌陵: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 서쪽까지 거동해 전송하자 구왕이 말했다.
"멀리 오셔서 전송하니 실로 감사합니다."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따라가니 대왕께서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세자의 연세가 저보다 많고, 일에 대처하는 것을 보면 제가 감히 가르칠 입장이 못 됩니다. 더구나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시니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세자와 봉림대군이 절을 하자 인조는 눈물을 흘리며 당부했다.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
엎드려 분부를 받은 세자는 신하들이 옷자락을 당기며 통곡하자 만류하며 말했다.
"주상이 여기에 계신데 어찌 감히 이렇게들 하오. 각자 진중하도록 하시오."
마침내 소현세자는 언제 돌아올지는 물론 살아 돌아올 기약고 할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봉림대군의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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