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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27 호
단기 4341. 1. 10 (음력 12. 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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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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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제1회 전국 창작희곡 공모
Ⅰ. 행사 목적 및 시행방침
1. 행사 목적 극작가들에게는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줌과 동시에 창작극을 보다 활성화 하며, 이를 극장 공연까지 연계함으로써 부산연극 및 한국연극의 질적 수준을 높이데 목적이 있다.
2. 시행 방침 ○ 부산광역시가 주최하고 (사)한국연극협회 부산광역시지회 주관으로 시행한다. (자치단체, 언론사와 공동 주최할 수 있다) ○ 본 행사는 2008년 제26회 부산연극제 행사와 연계하여 시행한다. ○ 공정하고 엄격한 심사를 위하여 심사위원회를 구성한다. ○ 심사위원 선정방법과 심사규정은 차후에 정한다. ○ 본 행사의 심사결과에는 모든 참가자가 조건 없이 따라야 한다. ○ 언론사와 연계 Spot 광고, 지상주최 등을 유도하여 홍보를 강화한다.
Ⅱ. 세부 시행계획
1. 행사 개요
가. 행 사 명 : 2008 제1회 전국 창작희곡 공모
나. 행사 목표 1) 국내 창작극의 확산과 발전 가능성 제고 2) 관객들에게 수준 높은 작품을 제공하여 한국연극에 대한 불신감 해소 3) 전국연극의 교류로 인한 지역연극과의 경계 완화
다. 응모자격 ○ 신인 및 기성작가로 공연 또는 어떠한 지면(인터넷 매체 포함)에도 발표되지 않은 순수 창작희곡에 한함. ○ 소재 및 장르제한 없이 90분 내외의 공연을 목표로 한 희곡을 대상으로 함.
라. 응모방법 ○ 접수방법 : 우편접수 및 방문접수 ○ 접수기간 : 2008년 2월 18일(월)~2월 29일(금) (마감일 우체국 소인 유효) ○ 우편접수 : 부산시 동구 범일동 830-31번지 부산시민회관3층 (사)한국연극협회 부산광역시지회 (겉봉에 반드시 “전국 창작 희곡 공모 재중” 표기) ○ 제출서류 : 1. 공모신청서 1부. (소정양식_www.bstheater.or.kr에서 다운로드) 2. 작품개요서 1부. (소정양식) 3. 서약서.(소정양식) 4. 창작희곡 원고 사본 7부. (표지에는 반드시 작품명만 기재) 5. 창작희곡 원고 디스켓 1개. (서류미비 시 접수가 불가하며 응모작품은 일체 반환되지 않음.) ○ 문 의 : (사)한국연극협회 부산광역시지회 사무국(051-645-3759)
마. 심 사 예심은 중진 연출가 및 작가로 구성된 예심심사위원단이 심사를 맡으며 본심은 저명한 희곡작가 및 관련 전문가로 심사위원단을 구성하여 진행한다.
바. 당선작 발표 ○ 4월 중순 홈페이지에 발표함.(당선자에게 개별통보) ○ 당선작이 이미 공개 발표된 작품이거나 타 작품을 모방한 것으로 인정될 경우 무효처리 됨. ○ 당선작의 저작재산권은 발표일로부터 2년간 (사)한국연극협회 부산광역시지회에 귀속된다. ○ 당선작은 극단과의 연계작업을 통하여 2009년 부산연극제(전국연극제 예선대회)에 공연 함. (작품 제작에 따른 연출, 각색등 일체의 진행은 (사)한국연극협회 부산광역시지회에서 추진 함.) ○ 단, 적격자 없을시 시상치 않을 수 있음.
사. 주 최 : 부산광역시, (사)한국예총 부산광역시연합회
아. 주 관 : (사)한국연극협회 부산광역시지회
자. 후 원 : 한국예총부산광역시연합회, KBS부산방송총국, MBC부산문화방송,부산경남대표채널 KNN, BBS불교부산방송, CBS기독교부산방송, 부산일보, 국제신문 (승인 후 결정)
카. 특별협찬 - 협찬 의뢰 후 의뢰 기관의 승인에 의함.
Ⅲ. 시상계획
1. 시상 계획
가. 시상식 일정 : 2008. 4월 14일(월) 예정/ 제26회 부산연극제 시상식 및 폐막식
나. 시상내역 : 대상 (1개 작품) 700만원 / 금상 (1개 작품) 500만원 / 은상 (1개 작품) 3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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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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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라는 모래밭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은 좋은일.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기왕이면 훌륭한 방향의 발자취를 남기는 것. /제임스 B.캐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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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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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경주와 싸움에서 이기는 법
세상 일을 보면 힘이 세다고 항상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잘 달린다고 해서 달리기 경주에서 항상 1등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역발산 기개세
힘과 기개가 세상에서 당할 사람이 없던 초나라 왕 항우, 그는 자기보다 힘이 강하지 못한 유방에게 해하 싸움에서 져서 오구란 곳까지 쫓겨가게 되었다. 강 건너는 자신의 고향인 강동 땅이었다. 항우는 자신의 애첩 우미인을 위해 마지막 연회를 베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불렀다.
힘은 산을 뽑아낼 정도로 세고, 용기는 이 세상을 덮고도 남는데 때는 불리하고 추는 달릴 일이 없구나. 추가 달릴 일이 없으니 너를 어이할거나. 내 사랑 우야 우야 너를 또한 어찌 할거나.
추는 항우가 타던 얼룩빛 명마이다. 항우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작시를 읊조리자. 우미인은 그의 노래에 맞추어 이 세상 마지막 춤을 추었다. 그녀는 항우의 노래가 끝나자 “천한 계집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하고는 항우의 보검으로 스스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다. 항우는 고향에 돌아가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라는 오구 면장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강을 건너서 서정길에 올랐을 때 강동 출신의 귀여운 자제 8천명과 같이 왔는데 지금은 한 사람도 없다. 내가 강동에 무슨 낯으로 그들의 부모를 볼 수 있겠는가? 하늘이 나를 버리시니 강 건너는 것을 그만 두겠다“ 하였다. 그는 추격해 온 한나라 군대를 향해 쳐들어가 옥쇄 작전을 펴다 큰 부상을 입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다윗과 골리앗
힘이 형편 없이 모자라서 질 게 뻔하다고 생각되던 사람이 상대를 거꾸러 뜨린 경우, 으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견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영어권의 나라에서는 이 말이 지금 숙어화되어 ‘서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a David and Goliath situation'을 사용하고 있다. 가드(Gath) 사람 골리앗은 키가 3미터나 되는 거인으로 놋으로 된 투구를 쓰고, 57kg에 달하는 놋 갑옷을 입고, 다리에는 놋으로 만든 각반을 찼으며, 놋창까지 들고 다녔다. ‘역발산 기개세’의 항우보다 힘이 더 세었던 모양이다. 그와 대항하는 다윗을 보자. 그는 혈색이 좋고 눈에 총기가 흐르며 하프를 잘 연주하던 소년으로, 전쟁이나 싸움을 모르는 양치기 목동이었을 뿐이었다. 이스라엘의 용맹한 장수 여럿이 골리앗에 의해 차례로 죽임을 당하자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다. 골리앗을 처치하겠다고 공언한 후, 그는 시냇가로 가서 매끄러운 돌 다섯개를 골라 담고, 양을 칠 때 사용하는 지팡이와 물매만 기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갔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더니 “녜가 나를 개로 알고 막대기를 가지고 나왔느냐?” 하고 비웃었다. 골리앗이 다가오자 다윗은 주머니에서 돌 하나를 집어 물매에 넣어 골리앗을 향해 날렸다. 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아꽂혔고 골리앗은 땅에 쓰러졌다. 다윗은 넘어진 골리앗에게 뛰어가서 골리앗의 칼로 그의 목을 베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자만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며 사는 것이 좋다. 항우와 골리앗처럼, 강하다고 해서 항상 싸움에 이기란 법 없고, 머리 좋다고 해서 시험에 항상 1등으로 합격하란 철칙은 없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듯 언제 불행을 당할지 우리는 그때를 알지 못한다. 우리를 기다리는 운명이 사랑인지 미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빨리 달린다고 경주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며, 강하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The race is not to the swift; nor the battle to the strong.)
아들과 딸
전통적인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지금 우리나라의 초·중등학교에서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성비불균형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여자 아이가 없이 남자 아이들만 있는 ‘홀아비 반’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이들이 자라서 결혼 적령기에 이르면 사회생태학적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하다. 여자들이 턱없이 부족하므로 짝을 찾지 못한 ‘홀아비’들이 터져나오는 욕구를 해결하려면 홀아비 여럿이 한 여자를 공유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홀아비’를 ‘고아수출’ 하듯이 외국에 수출하거나, 외국에서 ‘신부들’을 수입하는 방법 밖에 없다. 일부일처가 아니라 다부일처의 사회가 될까 두렵다. 몽고 어느 지방에서는 형제들이 한 여자를 마누라로 삼는 다부일처제가 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적은 것과 모자라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고르지 못한 것을 근심하라‘는 공자의 말씀은 이런 사태를 우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자. 딸 집에 간 부모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데 아들 집에 간 부모는 버스비도 어렵게 타서 집에 온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서양에서도 아들은 결혼 전까지만 아들 노릇하는 데 비해 딸은 일생동안 딸 노릇을 한다 하여 딸을 더 선호한다. 시드니 교민 사회의 소식에 따르면 장인과 장모를 초청한 집안은 오손도손 잘 사는데 비하여, 시부모를 초청한 집안은 서로 싸워 갈라서는 집안이 약 80% 이상이라고 한다. 이렇게 ‘딸’이 아들보다 부모에게 잘해주고 부모 생각을 많이 해주는데 ‘아들 아들’ 타령을 하고, 병아리 성감별하듯 딸이면 낙태 수술을 한다니, 그런 사람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사회생태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남녀 차별이 바람직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아들 집에 가면 버스비 타기 힘들지만, 딸 집에 가면 비행기 타고 온다. (My son is my son till he gets him a wife, but my daughter is my daughter all the days of her lif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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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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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김재은
제10장
상상력이 사고를 만든다 사고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I)
1. 저속한 욕망에서의 자기 해방
인간의 마음을 채워 주고 있는 이미지는 결코 일반적으로 고상한 것만 이라고는 할수 없다. 감수성의 강도나 사랑의 깊이에 있어서, 인간은 동물에게 미치지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점은 아무래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일단 저속한 욕망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이 이미지의 포로가 되어 쉽사리 풀려 나오지 못한다. 다음에서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술 없이는 못하는 알코올 중독자 #2 색정광
항상 늘씬하게 차려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여자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3 수전노. 이것은 글자 그대로 돈밖에 모르는 일종의 중독자이다. #4 야심의 포로가 된 속물. 헛된 명예욕이라든가 겉치장에 홀린 사람들을 말하며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5 사회적 야심가 #6 이밖에도 여러 가지 치사하고 하찮은 문제에 골몰한 나머지, 나무는 보지만 숲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대체로 쭉 한번 훑어보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열등한 이미지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가 있다. 좀더 구체적인 실례가 필요하다고 하는 분들에게는 제인 오스틴(1775-1817, 영국의 여류작가 철저한 사실과 풍자로 유명한 작가임)의 소설을 권하고 싶다. 여기서 아주 훌륭한 표본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비관적인 전제가 길어지기는 했지만 지금 한 가지 필자 자신이 소년시절에 체험한 바를 덧붙여 말하겠다. 그것은 프랑스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화상 가게 앞에 서 있었던 일이다. 주인인 베야 씨는 체구가 조그마하나 뚱뚱한 중년 남자인데, 보기보다는 민첩하고 줏대가 있는(나중에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이었다. 어린 소년인 내가 가게의 과자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베야 씨는 싱글벙글하면서 어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귀만은 엉뚱한 곳으로 향해져 있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가게의 안쪽에서 종알종알하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은 베야 씨의 부인과 딸들인데 모두 미인들이었다. 베야 씨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쳇! 시시한 소리들..."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시시한 소리들'하는 말이 분명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깊은 인상을 나에게 심어 주었다. 나는 왠지 베야 씨가 '시시한 소리들!' 하고 중얼거린 말에 끌렸었다. 베야 씨의 인상이라고 한다면 단지 이것뿐이었으나 그 후 오늘날까지도 나의 마음속 깊이 새겨 져 뚜렷이 흔적을 남겨준 것이다. 베야 씨가 어째서 그런 말을 했으며, 또 어째서 내가 그 말을 잊지 않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베야 씨는 여자들의 이미지의 빈약함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의젓한 베야 씨의 태도는 어린 나의 마음에까지도 중요한 뭔가를 강하게 인상짓게 하는 힘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한 가지 복습을 해 볼까요. '인간의 이미지가 본래 저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또는 그 인간의 사고)의 가난함을 숙명 짓는 것은 아닐까? -베야 씨가 이에 대해서 하나의 해답을 보여준 것이다. 즉, 저속한 이미지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욕망이 사고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첫걸음인 것이다. 밖을 넓게, 그리고 멀리 내다보는 눈이 지금부터 가야 할 깃을 밝혀 주는 것이 아닐까? 이미지의 확대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2.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라
도시의 공해에 견디기가 어려워지게 되면, 우리들은 멀리 떨어진 바닷가의 솔밭의 솔 향기에로 마음이 이끌리게 된다. 이웃 사람들과 남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세계 정세를 논할 수도 있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디딥시다" "그런 이론이야 누구나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역시 이론상으로는 알고 있지만 일단 실행을 하려고 들면 무언가 꺼림칙한 것이 있어서 일이 잘 안되는 일이 있다. 국제정세라는 테마에 대해서 여기서 좀 생각해 보자. 우리들은 지금 어지럽게 움직이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더구나 국제문제란 복잡한 것이 되어서 극히 소수의 특권적인 당사자 또는 관측자의 손에 맡겨지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난날을 돌이켜 보자.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를 생각해 보라. 그 때, 우리들 일반시민, 수백만 명의 시민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서로 주고받았던 이야기 내용을 상기해 보라. 그 무렵에는 매일매일의 토픽이 역사 그 자체였다. 그러나 평화가 찾아옴과 동시에 이야기의 대상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세상의 흔해빠진 너절한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국제문제라고 하는 '보다 높고 넓은 사고'의 소재는 여전히 시시각각으로 충분히 계속 제공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물을 '보다 높고 넓게'생각하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질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국제정세를 논할 때와 이웃의 뜬소문을 이야기할 때에는, 이미지의 질이 다른 것이다. 결국 수준 높은 이미지는 의식적으로 선택할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이미지를 획득하려면, 어떤 대상을 선택하면 좋을까?' 라는 문제에 촛점이 옮겨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명석한 해답을 내는 것은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다소 추상적인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효과적 방법이 있다. 즉 모든 것에서 최선의 것을 택하라. 단순하고도 명쾌한 듯이 보이는 이 원리가 실상 한 곬으로만은 문제가 잘 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두세 가지 실례를 들어 설명하겠다.
여기에 몇 사람의 비평가를 빠뜨린 함정이 있다. 그들은 문학사상의 '2유급의' 인물을 통해서 문학의 본질을 해명하려고 시도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물론 아더 영(1741-1840, 영국의 농정학자, 저술가)은 낭만주의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샹플로리(1821-1889, 프랑스의 사실소설가)는 사실의 철저함에 있어서는 플로베르(1821-1880, 프랑스의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 대표작 "보바리 부인") 이상이었다. 이런 견해 자체는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영이나 샹플로리를 알기 위해서는 책한 권 정도씩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이에 비하면, 발작(1799-1850)이나 플로베르나 바이런(1788-1824)의 경우는 도서관 가득히 채울 책을 써도 결코 많지 않은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무수한 학자들에 의해 연구, 토론되면서도 또한 중대한 숙제로서 남아 있는 테마-그것이야말로 본질적이 테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연구해도 끝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테마의 중대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호머, 플라톤, 버질, 밀턴, 라신과 같은 문학자들을 들 수 있으며, 알렉산더, 시저, 나폴레옹 등의 정치가들도 이에 못지 않은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사도시대라든가 대혁명시대 같은 역사상의 시대나 사건이 다른 의미로 보다 중요한 테마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더구나 이밖에도 철학상의 테마가 있다. 예를 들면 '사랑과 죽음'과 같은 문제이다.
다시 되돌아보자. 우리들은 저속한 욕망이 초래하는 '저속한 사고'와는 깨끗하게 인연을 끊어야 되겠다. 그러나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는 가장 뛰어나고 두드러진 인물의 생애를추적하여 그들이 남긴 저작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파헤쳐 보는 것이 어떤가를 제안하고 싶다. 두말할 여지도 없이 여기 당신 자신을 테스트할 단 한가지 방법이 있다. 당신의 이미지의 질이 저속한가 어떤가를 아는 간편한 방법이다. 당신이 지금 본받고 있는 위인의 이름을 적어도 한 사람 들어 보라. 당신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본받고자 하는 위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안심이다. 당신의 내면은 저속하다는 것과는 적어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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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글터 → 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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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를 가하다
본뜻 : 말을 탈 때 구두 뒤축에 달아 뒤로 뻗치게 하는 쇠로 만든 물건을 박차라 한다. 박차의 끝에 달린 톱니바퀴로 말의 배를 차서 빨리 달리게 하는데 이용한다. 그러므로 '박차를 가한다'는 말은 한자 성어 주마가편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가해서 더 빨리 달리도록 하는 것과 같이 일이 빨리 성사되도록 힘과 열의를 더하는 것을 뜻한다.
바뀐 뜻 : 일이 진행이 빨리 되도록 힘을 더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보기글" -자,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이번에 마지막 박차를 가해 봅시다 -각자 하던 일에 박차를 가해서 이번 휴가 가기 전까지 어떻게든 일을 마무리 지어 놓고 갑시다
반죽이 좋다
본뜻 : 쌀가루나 밀가루에 물을 부어 이겨 놓은 것을 반죽이라 하는데 반죽이 잘 되면 원하는 음식을 만들기가 한결 쉬워진다. 이렇듯 반죽이 잘 되어서 마음먹은 대로 원하는 물건에 쓸 수 있는 상태를 반죽이 좋다고 한다.
바뀐 뜻 : 성품이 유들유들하여 쉽사리 노여움이나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얼굴이 잘 생겼다는 뜻이 아니다.
"보기글" -그 아인 반죽이 좋아서 어딜 가더라도 금방 적응 할거야 -나 같으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을 일인데도 반죽 좋은 이 과장은 천연덕스럽게 잘 넘기네
쇠죽
겨울을 농한기라고 하지만 한편으로 일손이 바쁠 때가 있다. 소를 먹이고자 겨울 양식인 여물을 장만해야 한다. 겨울에 소가 가장 좋아하는 여물은 벼를 거두고 남은 짚이다. ‘여물’은 마소를 먹이려고 말려서 썬 짚이나 마른풀이다. 사전에는 ‘소여물, 말여물’이 나온다. 벼를 베고 난 논에 짚을 뭉친 짚동·짚뭇이 놓여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여물감들이다.
‘쇠죽’은 소먹이로 짚·콩·풀 따위를 섞어 끓인 죽이다. 쇠죽을 끓일 때 넣는 쌀겨는 ‘쌀을 찧을 때 나오는 고운 속겨’인데 쇠죽을 죽처럼 만들어준다. 콩을 넣는 것은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해서다.
‘쇠죽’은 지역에 따라 ‘소죽·세죽·쇠죽·시죽’으로 발음하는데, 전국적으로 고루 분포되어 있다. 제주도에서는 ‘쉐죽·쉐석’이라고도 한다. ‘쇠죽’은 복합어로 ‘소/쇠(牛) + 죽(粥)’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쇠물·세물·소물·쇠물·시물’이라고도 하는데, ‘쇠물’은 ‘쇠여물’을 줄여서 말한 것이다. 북쪽에서는 ‘쉐머리·쉐모리·쉐어리’라고 발음한다.
쇠죽을 끓일 때, 작두로 짚을 썰어 ‘쌀겨, 콩’과 함께 가마솥에 넣은 뒤, 음식물 찌꺼기가 담긴 구정물을 넣는다. 다 삶고 나서 나무로 만든 쇠죽바가지로 떠다가 구유에 넣어주면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쇠죽을 먹으려고 긴 혀를 날름거리면서 소가 다가온다. 소가 쇠죽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구수한 냄새를 느낄 수 있다. 겨울이면 생각나는 시골집 풍경이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말소리의 억양
우리는 낯선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의 고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독특하게 쓰는 낱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대개는 말씨에 나타나는 억양으로 알 수 있다. 억양이란 문장에 얹히는 소리의 높낮이를 말하는데 억양은 그 말의 특징을 구별해 주는 구실을 한다. 억양을 통해 사투리를 분간할 수 있는 것은 우리말뿐만 아니라 여러 말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어에서 영국영어, 미국영어를 분간하고, 미국영어 가운데서도 인종간의 언어 차이를 분간하는 데 억양이 그 몫을 한다.
그런데 억양은 문장의 문법 기능을 구별하는 데도 쓰인다. 우리말에서 보면, 똑같은 문장을 두고 끝 억양을 올리느냐 내리느냐에 따라 문법 기능이 달라진다. ‘이 책 읽었어요’를 끝을 내려 말하면 ‘읽었다’는 서술의 뜻이고, 끝을 올려 말하면 ‘읽었느냐’란 의문의 뜻이다. 영어에서도 ‘You are reading the book’을 올려 발음하면 묻는 문장이 된다. 대부분 언어에서 서술문은 문장 끝에 내림 억양이 놓이고 의문문은 문장 끝에 올림 억양이 놓인다.
문장이 아니더라도 한 낱말로 된 말도막도 억양 따라 뜻이 구별되는 경우가 많다. 영어 ‘What’은, 억양을 올리면 앞에 한 말을 되풀이해 달라는 요구이며, 내리면 내가 잘 듣고 있다는 뜻이고, 높은소리로 말하면 절망과 불신을 나타낸다. 이처럼 억양은 모든 언어에서 말씨의 특징을 나타내기도 하고, 문법적 기능을 구별해 주기도 한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말다듬기
“‘나이타’가 뭔지 아십니까?” 성인들이 듣는 강의에서 이렇게 물었을 때 아는 이가 없는 걸 보면 이 말은 사라진 말임이 분명하다. ‘나이타’는 프로야구가 처음 생겼을 때 밤에 하는 경기를 일컫는 말이었다. 일본식 야구말인 이 말이 방송을 타자 시청자들이 항의했고 그 대신 ‘야간 경기’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새말은 이렇게 언중의 필요 따라 자연스레 생겨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데 언중들이 새 물건과 함께 개념이나 외국어가 따라 흘러들 때 이에 해당하는 새로운 우리말을 만드는 게 쉽지 않고, 또 만들어도 두루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국립국어원에서 무분별하게 쓰이는 외국어 어휘를 우리말로 바꾸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만들어진 말의 전파가 쉽지 않다.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 사이트(malteo.net)를 통해 언중과 함께 만들어낸 말들 중에 널리 쓰이는 새말은 그림말·댓글·누리꾼·대중명품·경로도우미 등 소수에 불과하다. 정착에 성공한 새말과 실패한 말들의 면면을 보면 앞으로 새말을 만들 때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할지가 눈에 보인다. 우선 말의 길이가 본디 말보다 길면 성공하기 어렵다. 유행어 ‘유시시’(UCC)를 ‘손수제작물’로 바꿨는데 뜻은 살렸지만 말이 길어 잘 쓰이지 않는다. 이미지 문제도 있다. ‘웰빙’을 다듬은 ‘참살이’는 ‘참살’(慘殺)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떠오른다는 이도 있으니, 말다듬기가 쉽지 않은 일임을 절감한다. 모쪼록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란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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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 속에 숨어 있는 역사의 비밀(근, 현대편) - 박영수
1.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갔나
패션 발전소, 퐁파두르
르네상스 이래 선명한 시대 채색을 바탕으로 하던 남녀 복식의 귀족적 취향은 왕권 쇠퇴와 함께 긴장감을 잃고 퇴조했다. 위용을 과시하던 틀은 유연해지고 유난스럽던 장식은 퇴색하여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련된 쾌락 추구와 여린 감성주의가 미묘하게 교차하는 여성적 우아함이 새로운 생활 형태의 기조를 이루며 유행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8세기는 여성적 요소가 복식의 취향과 양식을 결정한 시대로, 복식뿐만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하였다. 1715년 루이 14세가 죽은 뒤, 루이 15세가 왕위에 오를 무렵부터 프랑스의 문화 양식은 이제까지의 엄하고 차가운 규칙을 버리고 쾌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인간에 내재한 감정이 새로운 문화 양식을 형성하는 중심 요소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적이라는 것과 병행해서 생활은 자유로워지고 도덕은 퇴폐적으로 흘렀다. 루이 14세 이후파리 상류 사회에서는 정부를 두는 음성적 관행이 상식처럼 표면화되어 유행했다. 여자들은 국왕의 정부가 되는 것을 최고 가치로 여겨 요염한 화장과 호사스러운 옷으로 국왕과 귀족들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하여 유행을 주도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퐁파두르(1721∼1764) 부인이다. 퐁파두르 부인은 스무 살이 될 무렵 파리 사교계의 빛나는 별로 떠올랐고 국왕 루이 15세의 찬사를 받았다. 1744년 루이 15세의 젊은 정부인 샤토루 공작 부인이 갑자기 죽자 그녀는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루이 15세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퐁파두르 부인은 매우 지성적이었고, 예술 전반에 걸쳐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어 의상뿐만 아니라 베르사유 궁전의 실내 장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다양한 예술적 취미는 프랑스 문예를 진흥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으니, 극장이나 소극장의 건립은 물론 당대의 화가들도 모두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을 받았다. 그녀는 가구나 도자기, 은그릇, 의상, 보석, 그림, 책 등 많은 수집품을 모았는데, 그녀가 갑작스레 죽은 뒤 가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는 데에만 1년이나 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우아한 부인은 당대의 모든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고 묘사한 당시 기록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녀의 이러한 수집열은 각종 미술품의 생산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퐁파두르 부인의 입김이 온갖 곳에 미치자 자연스레 그녀의 취향은 당시 유행 기준으로 통용되었다. 그녀는 가볍고 날아 갈 듯한 옷감을 즐겨 썼고 주름 장식, 레이스, 리본, 꽃 등을 주로 사용하여 여성다움을 강조하였다. 또한 목이 U자 형태로 깊게 팬 드레스도 즐겨 입었는데 이 옷 역시 당대 여성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퐁파두르 부인이 유행시킨 것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가르마를 타지 않은 채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올려 이마, 귀가 훤히 보이도록 하는 이른바 '퐁파두르 두발'로 달걀형 얼굴을 강조하였으며, 뺨에는 홍조가 느껴지도록 색조 화장을 하였던 바, 이 또한 당시 여성들의 절대적 유행으로 번져 나갔다. 이 때문에 당시 귀부인들의 초상화는 한결같이 머리를 빗어 올린 달걀형 얼굴에 뺨에는 붉은 색조를 띤 모습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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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 4부 항산화벽이 무너지면 건강도 무너진다
산소적 스트레스로 인해 병이 생길 수 있다
혹시 여기까지 책을 읽은 분들 중 프리라디칼이 굉장히 나쁜 것이고 만병의 근원이로구나,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이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인간의 질병에서 활성산소물이 하는 정확한 역할은 무엇일까? 인간이 다른 원인으로 일단 먼저 질병에 걸리게 되고나면 그 다음에 프리라디칼이 생성되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거꾸로 프리라디칼 때문에 인간의 질병이 생긴다고는 아직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간염바이러스가 들어오면 간염이 생기며, 간염이 생길 때 프리라디칼이 발생한다. 즉 프리라디칼은 간염 바이러스가 들어오고 난 후의 일이지, 프리라디칼이 간염의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몇몇 질병에서는 그 질병의 원인으로 프리라디칼이 기여했다고 확실히 말 할수 있는 것들이 있다.
1) 사람이 방사선에 노출되면 조직의 수분에서부터 독성이 강한 히드록시라디칼이 생겨 조직손상이 온다. 2) 만성적으로 셀레니움이 결핍되면 병이 생긴다. 3) 선천적으로 항산화 효소가 부족하면 신경이 퇴화하는 병 등이 온다. 4) 산소에 너무 많이 노출되면 미숙아에서 망막이 마아진다. 5) 구리가 너무 과하면 윌슨씨병이 온다. 6) 철이 너무 과하면 혈액질환이 온다. 7) 백내장이 생길 수 있다. 8) 자외선 노출로 피부가 손상, 노화된다.
질병이 생기면 산소적 스트레스 상황이 된다
위의 8가지 예에서는 프리라디칼이 인체 손상의 가장 중요한 직접적 원인이 된다. 하지만 다른 질병에서는 직접 원인이라기보다는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 관계를 간단하게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각종 질병의 원인(세균, 사고, 독소, 면역이상, 나쁜 생활습관 등) 조직 손상 유발 - 각종 프리라디칼 생성 - 조직 손상이 더 악화
다른 원인으로 조직 손상이 먼저 온 후에 프리라디칼 생성이 더 많아져서 조직 손상이 더 심해지는 예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세균이 들어오거나 세포가 손상되면 인체는 이를 처리하기 위해서 백혈구나 식세포들이 출동한다. 그리고는 백혈구나 식세포에서는 프리라디칼을 만들어 세균을 죽이는 데 사용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생긴 프리라디칼이 주변의 멀쩡한 조직에 스트레스를 주게 된다. 둘째로 조직의 손상을 복구하기 위해서 체내 항산화제 탱크가 소모되어 버린다. 셋째, 다른 원인으로 세포가 죽으면 그 세포 안에 있던 금속이온(예: 철)이 흘러나와서 수퍼옥시드라디칼과 과산화수소를 아주 해로운 히드록시라디칼로 전환시킨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세포 안에 철의 양이 많아지므로 같은 병에 걸리더라도 노인에서 더 많은 히드록시라디칼이 생기게 된다. 넷째, 또 다른 원인으로 세포의 에너지생성 메커니즘인 전자전달계가 망가지게 되면 전자 누출이 일어나 프리라디칼이 생긴다.
산소가 부족한 허혈증인데도 산소적 스트레스가 생기는 이유
현대인의 사망 원인 1위를 차지하는 병이 중풍, 협심증, 심근경색증 등이다. 이들은 모두 조직에 산소가 부족한 허혈증 때문에 세포가 죽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은 세포 안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에너지를 계속해서 만들어내야 살 수 있으며, 그 에너지를 만들려면 산소가 있어야 한다. 산소가 잘 공급되려면 혈액순환이 원활해야 하는데, 이것이 원활하지 않은 것을 허혈증이라고 한다.
심장으로 가는 혈관에 허혈증이 온 게 협심증이고, 뇌로 가는 혈관에 허혈증이 온 게 중풍 조짐이다. 허혈증 상태에서 더 진행되어 아예 혈관이 혈전 찌꺼기 같은 것 때문에 막히면 이를 경색증이라고 한다. 이는 피가 안 통하는 상태이므로 혈액을 통해서 뇌세포로 공급되는 산소의 공급이 끊겨서 뇌세포가 죽는다. 이게 바로 뇌경색증이라고 하는 중풍이다. 마찬가지로 심장혈관이 동맥경화증 때문에 막히면 심장 세포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협심증이 생기다가 세포가 죽으면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심근경색증이라는 병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매우 역설적인 것은, 처음에는 분명히 산소가 부족해서 중풍이나 심장병이 생긴 것인데, 나중에는 산소가 과할 때 생기는 산소적 스트레스 때문에 그 병이 더 악화된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첫째, 조직으로 가는 혈류의 장애로 허혈증이 오면 세포에 여러 대사 장애가 와서 세포가 죽기 일보직전의 위급상태이다. 물론 아직 죽은 건 아니지만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곧 죽어버려서 복구가 안되는 상황이란 말이다. 이걸 어떻게 복구시킬 수 있을까?
우선은 산소가 부족한 것이 근본 원인이므로 산소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산소 부족의 원인이 혈관을 막은 혈전증이면 빨리 혈관을 뚫어 줘야 하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 것이라면 수혈을 해 주어야 하고, 염증이 원인이라면 염증을 제거해 주어야 한다. 심근경색에 의한 심한 가슴통증으로 응급실에 온 환자를 어떻게 치료하는지 아는가? 막힌 혈관을 뚫는 혈전용해제를 초응급으로 투입하는 것이다. 만일 몇시간이라도 늦어지면 영영 회복이 안되고 사망하게 된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산소를 공급해 주는 치료말고도 우리 몸은 허혈을 극복하려고 자체적으로 산소를 늘리려고 하는 치료 기능도 발동시킨다.
자, 이제 산소가 재공급되어서 위급상황은 간신히 넘겼다고 치자. 바로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부작용이 생긴다. 즉 산소가 부족하다가 산소가 재공급이 되니까 산소적 스트레스 현상이 나타나서 이제는 이것 때문에 조직이 손상이 되는 것이다. 원래는 산소 부족에 의해 망가진 미토콘드리아에 다시 산소가 공급되어서 기능이 회복이 되니까, 에너지를 다시 생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아무래도 망가졌던 미토콘드리아였으므로 에너지 생성과정이 매끈하지 못해서 전자가 누출이 되기 쉽고, 이로 인해 프리라디칼이 생기게 된다. 산소가 재공급되면 산화 효소가 재활동을 시작하여 세포 안에 쌓여 있던 물질을 산화시켜서 수퍼옥시드라디칼과 과산화수소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때, 세포에서 새어 나온 금속이온(예: 철)이 존재하면 더욱 해로운 히드록시라디칼이 생겨서 조직 손상이 더 생긴다. 또 세포에서 새어나온 각종 독소물들이 혈관을 타고 흘러 다른 조직에도 손상을 주게 된다.
이와 같이 일단 조직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산소를 재공급해 주는 게 불가피하고 필수적이지만 그로 인해 산소적 스트레스를 다시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산소 공급이 되기도 전에 죽어버린 세포는 문제가 안 되지만, 살아 남아 있던 세포에서는 이 산소적 스트레스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손상 정도는 어떤 경우는 경미하고 어떤 경우는 꽤 상당한 손상이 초래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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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백마강부'가 동방에 크게 전파된 민제인
민제인(1493-1549)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회중, 호는 입암이다. 중종 15년(152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젊어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백마강부'를 지어 자부하는 마음을 가지고 선배에게 품평을 구하였는데 선배가 차중(네 등급 중의 둘째)으로 등급을 매기자 만족하지 않은 표정으로 즐거워하지 않았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어서 꽃과 버들이 도성에 가득하므로 남쪽 성곽을 산보하다가 남대문 위에 올라가 자기가 지은 '백마강부'를 낭랑하게 읊으니 그 소리가 남대문의 다락과 들보를 진동시켰다. 그때 마침 장안의 이름난 기생인 성산월이 장차 남대문을 나가 어느 재상이 강가에서 베푸는 잔치에 가려고 하다가 민제인이 시 읊는 소리를 듣고 다락에 올라가서 보니 어느 젊은 유생이 두건을 벗고 이마를 내놓은 채 글을 외고 있으므로 다 듣고 난 뒤에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어떤 서생이기에 가사가 그리도 맑고 그리도 낭랑하시오?" "이것은 내가 지은 것으로 마음에 항상 좋게 여겼다가 선배에게 욕을 당하였기에 큰 소리로 외어 본 것이오" "서생은 함께 이야기할 만하니 저와 함께 누추한 저의 집으로 가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그와 함께 집으로 가서 3일 동안 머문 뒤 청하였다.
"엊그제 외던 백마강부를 한 본 나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민제인이 써서 주었더니 성산월이 그 부를 사인의 연회 자리에서 펼쳐 놓았더니 자리를 가득 메운 고관들이 똑같은 목소리로 감탄하며 칭찬하고, 어디서 이런 절창을 얻었느냐고 물었다. 성산월이 대답하였다.
"이는 첩이 마음 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지은 것입니다"
이로부터 백마강부가 동방에 크게 전파되었다. 백마강부의 끝에 가사가 없었는데 어떤 문사가 가사를 지어 붙여 놓았더니, 중국의 학사가 그것을 보고 탄복하여 말하였다.
"아깝다. 이 가사는 부를 지은 이의 솜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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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봉
보완, 보충과 같은 말이다.
주나라의 환왕이 정나라의 장공을 무찌르러 나설 때 환왕은 몸소 중앙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런데 왕군의 배치를 본 정나라의 공자 원은 장공에게 진언하였다.
"왕군의 좌익을 진나라의 군사가 맡고 있는데, 진나라는 국내 사정이 어렵기 때문에 전쟁을 할 기력이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먼저 좌익을 쳐서 물리치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그러노라면 중앙군은 어지럽혀지고 우익군도 지탱할 수 없어서 달아날 것이올시다."
장공은 이 의견을 쫓아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왕은 어깨에 화살을 맞고서도 버티었는데 장공은 왕을 추격하려는 부하를 만류했다.
"우리는 천자를 능가할 수 없느니라. 본시 자위를 위해 한 노릇이니 나라의 안전이 유지되면 족하다."
그날 밤 장공은 부하를 왕의 진지로 보내어 왕의 노고를 위로했다 한다. 이 전투로써 장공은 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그 당시의 포진을 '좌전'에서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원형을 지어 전차를 앞세우고 보병을 뒤로하여 전차의 사이 사이를 메웠다. '좌전'에서는 이 밖에도 다시 두 군데서 미봉이란 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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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3. 비로자나부처님의 외출
마음이 마음이 아니다.
"주술기복, 제사 중심의 불교, 불자들을 그쪽으로만 모는 것은 옳지 않아요."
나는 혼자말로 한다. 그리고 엉뚱한 생각을 한다. 그럴 때면 참회의 뜻으로 가사장삼을 수하고, 법당으로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법당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나는 나와의 싸움을 즐기는 편이다. 절에는 온통 스님들의 손때가 묻지 않는 곳이 없다. 오래된 사찰일수록 그렇다. 그러나 절은 스님네들의 소유물이 아니다. 스님네들의 사용물일 뿐이다.
낮의 일이다. 점심공양을 끝내고 한가로이 객실에 앉아 있는데 도량에서 높은 소리가 들린다. 주지스님이 한 여대생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신도는 아닌 것 같고 아마 절에 놀러온 모양이다. 이리저리 구경하다 아마 종을 보고 동전을 던져 맞혔는데 그만 불독 같은 스님에게 들켰나 보다. 나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주지스님의 호통이 그치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던 어느 한 시인의 시 구절을 떠올렸다. 그래, 나도 저 종 앞을 지날 때면 한 망치라도 '타앙' 쳐 보고 싶었다. 하물며......
분명 종은 사찰의 의식 집전에 필요한 법기다. 그러나 종 몇번 두들겼기로서니, 한 사람에게 평생 한이 될 듯하게 나무라는 스님의 모습은 내게 그렇게 유쾌하게 비치지 않았다. 이삼 일 객실에 눌러 있다 보니 스님들이 신도들에게, 그것도 금력이나 권력이 있는 신도들한테는 살살거리며 허리를 굽히고, 시장바닥에서 노점판이나 벌일 듯 없어보이는 신도들에게는 거드름을 피우는 걸 내가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속에서 불이 일어나는 거였다. 그럴 때면 머리 깎은 이들에게는 특권이 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걸망을 곱게 꾸렸다. 그리고 법당에 가서 삼배를 하고 주지스님한테는 인사도 없이 길을 나서는데 딱 맞닥뜨렸다.
"스님, 아무리 스님이 지극한 진심으로 절을 건립하고 불사를 했더라도 이 절은 스님의 전유물이 아니라 신도님들, 관광객이나 구경꾼들의 것입니다. 탑이나 절을 짓는 불사만이 구도의 방법이 아닙니다. 불가의 주인은 스님이 아니라 속인들입니다. 스님은 과연 이 절을 짓는데 얼마나 시주하셨습니까? 스님은 결국 이 절 짓는데 시주님네들의 은혜로 불사하지 않으셨는지요?"
새파란 청춘이 주름살이 진 스님에게 따따부따 입바른 말을 총알같이 쏟아내자 주지스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 조금 더 하다가는 두들겨 맞을 것 같아 나는 삼십육계다 하고 두손 모아 공손이 합장하고 돌아섰다. 그때 스님이 나를 부르는 거였다. 나는 속으로 '아이고 내 성깔'하고 또 피곤하게 생겼구나 하며 긴장을 하고 주먹을 꼬옥 쥔 채 막무가내로 걷는데 그 주지스님이 쫓아와 나의 어깰 붙잡는 거였다.
"스님, 여비나 하세요."
나는 한숨을 푸 내쉬었다. 봉투도 없이 지갑에서 꺼내 주는 돈이 수월찮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꼭 그 돈이 복채로 받은 돈 같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합장배례하고 산을 내려오는데 주지스님의 '잘 가시오'하는 소리와 함께 '또 오시오'하는 소리가 뒤통수에 들렸다. 바로 그때 다람쥐 한 마리가 콩콩거리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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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2장 제14대 선조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세자에게 전위하겠다는 선조의 교서까지 거부한 세력에게 광해군의 즉위는 두려운 일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신하가 왕위를 두고 세자와 다투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었다. 선조와 인목왕후의 전위 교서를 거부한 유영경으로서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다른 인물을 임금으로 택한 신하와, 그로부터 배척받았던 임금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선조가 죽었다고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유영경이 영의정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세자의 장인 유희분은 전한 최유원을 시켜 선조 사망 당일 세자가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하였다. 하지만 유영경이 세자의 당일 즉위를 반대하고 나섰다. 유영경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씩이나 반대하고 나섰다. 이는 유영경으로서는 목숨을 건 반대였지만 이미 대세는 세자 광해군에게 기울었다. 광해군은 이튿날 백관이 모여 천세를 부르는 가운데 즉위식을 거행하고 드디어 왕이 되었다. 유영경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다음달 유영경을 중도부처시켰다가 같은 해 9월 유배지에서 사사했다. 영수 유영경의 몰락과 함께 소북도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광해군이 이처럼 소북을 처단하고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이로써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의 존재가 남아 있었다.
만약 임해군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처럼 현명하다면 골육상쟁의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동생을 임금으로 둔 형은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의도적으로 정치를 멀리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임해군은 명나라가 광해군의 책봉을 거부하는 상황에 희망을 걸었을지 모르지만, 명이 책봉을 거부한 것은 자국의 광종을 위해서지 임해군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임해군은 동생 광해군이 자신을 절도로 유배 보내라는 대신들의 청을 거부하며 군사를 동원해 자택 연금을 시켰을 때 근신하고 있어야했다. 그러나 임해군은 부인 차림으로 변장해 다른 사람에게 업혀 도망가다가 발각됨으로써 스스로를 궁지로 몰았다. 신료들의 거듭된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광해군은, 임해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 보내고 말았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그 다음해 수장 이정표가 독을 들고 찾아갔으나 임해군이 독약 마시기를 거부해 이정표가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임해군의 비참한 죽음은 권력은 형제 사이에도 나눌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경위야 어찌 됐것 이 사건은 광해군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광해군과 대북세력에게 임해군 이상의 위협적인 존재는 영창대군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영창대군은 어엿한 선왕의 적자였으며 그의 생모 인목왕후는 엄연한 대비였다.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은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김제남과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지지함으로써 광해군과 대북세력이 영창대군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야 했다. 그러나 김제남은 영창대군이 성장함에 따라 더욱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대북정권이 그를 의심하게 되면서 사태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광해군 5년에 발생한 박응서의 옥사는 김제남을 물론 영창대군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이 사건은 전 서인 정승 박순의 서자인 박응서가 주범이라 해서 '박응서의 옥사'라 불린다. 박응서는 전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등 7명의 서자들과 사생계를 조직하고, 소양강 위에 같이 살면서 스스로를 강변칠우, 또는 죽림칠현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새재를 지나던 은상을 살해했다가 포도청에 체포됨으로써 계획이 발각되었다. 서인측 기록인 <광해군 일기>에는 대북 영수 이이첨이 이 사건을 김제남의 사주를 받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 반역 사건으로 조작했다고 비난했다.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사건은 영창대군 추대 사건으로 인정되어, 배후 인물인 김제남은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다. 김제남이 사사된 다음해인 광해군 6년 강화부사 정항은 음식물 공급을 중단하는 등 영창대군을 핍박하다가, 방에 가두고 심하게 불을 때 비참하게 죽였다고 한다. 더구나 김제남의 세 아들이 모두 화를 입는 등 인목대비 집안은 사실상 멸문의 화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사건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인 것으로 끝날 수 없었다. 김제남의 딸이자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만일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영창대군 살해라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최소한 목숨은 부지시켜주는 온건한 방법을 택했다면 서인들의 쿠데타 명분은 궁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친아버지와 친아들을 죽여버린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더 이상 인목왕후를 대비로 모실 수 없었다. 두 지친을 죽여버림으로써 형식적인 아들과 형식적인 어머니로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어지마저 없애버린 이 사건은,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큰 실책이었다. 이들은 3년후에 드디어 폐모론을 주창하였다. 광해군 9년부터 주창되기 시작한 폐모론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여버린 대북정권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 있지만, 성리학 사회 조선에서 '모자관계'는 권력으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하수였다. 제 아무리 현세의 권력이 강고해도 아들이 어머니를 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폐모론은 내외의 엄청난 저항을 받았다. 심지어 평생 당색이 없었던 이항복마저 이에 반대하다가 귀양 가면서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랄 비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신처에 뿌려본들 어떠리"라고 원한을 가질 정도로, 어머니를 폐한다는 비윤리적 행위는 광해군과 대북정권을 고립시켰다. 그러나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었던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드디어 광해군 10년 인목대비를 폐하고 존호를 깍아 서궁으로 칭하면서 유폐시켰다. 비록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수행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민새을 위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어머니를 폐한 사태는 반대파에게 이런 모든 업적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아들이 어머니를 폐한 사태는 처음이었고, 일반 사가에서 이런 일을 했다면 당연히 사형이 었다.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정권에서 완전히 멀어진 서인들은 폐모론을 명분삼아 세력을 모았다. 그리고 드디어 광해군 15년 3월, 서인들이 광해군의 조카뻘인 능양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문제의 찹쌀밥
선조는 죽기 직전 인목왕후를 통해 유서를 세자 광해군에게 전했다. "형제를 내가 있을 때처럼 사랑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이를 너에게 부탁하니 너는 모름지기 내 뜻을 받아라." 선조는 어린 영창대군의 보호를 맡길 인물은 세자 광해군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으로 하여금 영창대군의 존재를 두려워하게 만든 인물은 다름아닌 선조 자신이었다. 선조는 끝없이 병을 달고 다녔으면서도 약간의 기력만 있으면 세자를 흔들었다. 또한 신하로서 임금의 전위 교서 받기를 거부한 유영경 대신, 그를 탄핵한 정인홍을 귀양 보낸 인물도 선조 자신이었다. 따라서 선조가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상태에서 급서하다보니 독살의 의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유력한 물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성협이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 검푸르니 바깥 소문이 헛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남계집>의 기록이 있으나, 이 역시 광해군이 폐출된 뒤의 기록이다. 광해군측에서 편찬한 <선조실록>에 선조 독살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조반정 후 서인들이 편찬한<광해군일기>에도 선조 독살설이 언급되지 않은 점은 시사적이다. 다만<광해군일기>에는 선조 독살설에 대해 서인측이 유일한 근거로 삼은 찹쌀밥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선조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에 찹쌀밥을 올렸는데 상이 갑자기 기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라는 내용이다. 바로 이 찹쌀밥을 세자가 들였다는 것이 서인들의 주장이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광해군을 쫓아낸 당사자 인조의 찹쌀밥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시 선조께서 위독하실 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상세히 알고 있다 .선왕께서 병 후에 맛있는 음식이 생각날 즈음 동구의 약밥이 마침 왔기에 과하게 잡수시고 기가 막혀 이내 돌아갔을뿐 중간에 어떤 농간이 있었다는 말은 실로 밝히기 어렵다."
선조의 기를 막히게 한 약밥, 즉 찹쌀밥을 들인 인물이 광해군인 것은 맞지만 찹쌀밥에 독이 들었는지를 밝히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을 입증하는 인물로 개시라는 궁녀가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말로 '개똥이'라는 뜻의 이름를 가진 개시가, 세자를 교체하려는 선조의 뜻을 알고 광해군과 몰래 접촉해 뒷날을 도모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개시가 선조를 독살했는데 실상 광해군은 이런 사실을 몰랐다고 하고 있다. 선조 때부터의 궁녀였던 개시는 광해군이 즉위한 후 이이첨과 한편이 되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파는 것은 물론이고,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광해군을 모시려면 개시의 허락을 얻어야 했기 때문에 광해군과 동침하고자 하는 궁녀는 그녀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광해군에게도 마음에 안 들면, "나의 큰 덕을 감히 잊는단 말이오. 내 입에서 말이 나올 것 같으면 임금이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오"라고 성을 내니 광해군이 당황하고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서인측에서 과장한 소문일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개시가 정몽필이란 자를 사랑해서 음란한 짓을 하면서 광해군의 후궁인 소의 윤씨를 중매해 음행하게 했다는 데 이르면 그 신빙성은 더욱 떨어진다.
선조 독살설은 인조반정 후에 조직적으로 유포되었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미약하다. 반정 일등공신 원두표는 집권 후 광해군이 선조를 시역했다고 상소하려다 그만둔 적이 있었다. 이때 왜 상소를 그만두었냐는 박세채의 질문에 대한 원두표의 대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처음 장유가 지은 왕대비(인목대비)의 교서 외에 언문으로 된 교서에는 광해의 작은 죄상도 다 주워 모았는데 다만 약밥에 중독되었다는 말은 없었소, 이를 가지고 봐도 경솔히 들추기는 어려워서 그만둔 것이오."
즉 서인들이 아무리 물증을 찾으려 해도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 없었기에 상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미약한 근거라도 있었다면 이는 인조반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에 그만두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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