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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24 호
단기 4341. 1. 6 (음력 11. 2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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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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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도 샘터상 작품 공모
삶에서 건져 올린 진솔하고 따뜻한 글들을 기다립니다. 샘터가족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참여를 바랍니다.
●응모 부문
생활수기 부문(제29회) 역경을 딛고 일어선 체험담, 합격, 저축 수기, 감동의 투병기 등 많은 이에게 꿈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인간 승리기.
동화 부문(제30회) 다른 매체에 발표된 적이 없는 순수 창작 동화.
시조 부문(제33회) 매년 ‘샘터상 시조 부문’ 입상작 발표 후 이듬해 4월호까지 매월 <샘터 시조>란에 실린 작품들이 심사 대상이 됨
● 작품 분량 : 200자 원고지 20매 안팎(생활 수기, 동화 부문) ● 응모 마감 : 2008년 2월 29일 ●접수 방법 -우편: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1-115 샘터 편집부 샘터상 담당자 앞 (우)110-809 (겉봉투에 응모 부문 기재) -홈페이지 : 월간샘터> 샘터상 게시판
●각 부문 당선자 및 입선자에게는 4월에 열리는 샘터상 시상식에서 상패와 상금을 드립니다. ●응모 부문, 응모자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반드시 기재하여 주십시오. ●보내신 원고는 돌려드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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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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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팬들이 이름 없는 선수에게 야유하는 법은없다. / R.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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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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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군인과 명령
군대는 일정한 조직과 질서에 따라 편제된 장병의 집단이다. 하는 일은 국토 방위다. 군대는 위계 질서를 생명으로 하고 상명하복의 원칙에 따라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 사회이다.
하극상
1961년 5월 16일 육군 소장 박정희는 용기만 있지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젊은 영관급 장교’를 모아,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구성된 정권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쿠테타를 일으켰다. 그는 혼자서 진급하여 대장까지 오른 후 전역하면서 ‘자기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나와서는 안된다’고 눈물을 흘리며 강조했다. 그의 쿠테타는 상명하복과 위계질서를 생명으로 하는 군에 하극상이라는 치명적인 전통을 세웠다. 그가 18년간 권력을 독점한 후 비명에 가자, 역사는 속성대로 되풀이 되었다. 옛날 박정희 소장의 전통을 이어받은 전두환 소장은 실권을 장악하자 대통령, 국방장관, 대장, 중장 등 자신의 직속 상관들로부터 차례로 경례를 받았다. ‘정치를 함에 어찌 사람을 죽이리오’란 말이 논어에 있다.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악의 무리를 모조리 죽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계강자의 질문에 공자가 타이르며 이른 말이다. 공자는 아무리 악한 백성이라도 살리는 데 의의가 있으므로 죽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전두환 소장은 민주주의를 원하는 수백명의 무고한 양민의 시체 위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공과는 역사가에 의해 굴절없이 판단되어야 할 것이나 하극상이라는 치명적인 전통을 거듭 세운 것은 대한민국 군대에 저지른 큰 죄악이었다. ‘군인이 용기만 있고 정의가 없으면 반란을 일으킨다’고 논어는 가르치고 있다. 아울러 춘추는 ‘옳지 못하면서 강한 군대는 바로 쓰러지기 마련이다’고 전한다. 군인은 확고한 국가관과 상명하복의 원칙에 따라 국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춘추에 나오는 무인의 일곱가지 덕을 보자. 군인이 지켜야 할 수칙이다.
첫째, 난폭한 자를 제압시켜야 한다. 둘째, 무기를 거두어 싸움을 중지시킨다. 셋째, 나라와 국가 원수를 보전한다. 넷째, 공을 세워야 한다. 다섯째, 국민을 편안하게 하여야 한다.여섯째, 모든 사람을 화합하게 한다. 일곱째, 제물을 풍족히 하여 생활을 안정시킨다. 이러한 일곱가지 덕을 갖춘 군대는 정의의 군대로 젊고 씩씩하다. 참된 군인은 의를 바탕으로 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군인은 명령에 죽고 살아야 한다.(The first duty of solder is obedience.) 용기만 있지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집단은 ‘깡패의 집단’이지 참다운 군대는 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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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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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김재은
제8장 - 내면적인 고독
사색의 실마리(II)
6. 싫은 것에 집중하려면
언제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문제만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향상을 원하는 한, 때로는 싫은 것, 싫증나는 것과도 씨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까? 셸리(1792-1822, 영국의 시인)는 "나는 시를 좋아한다. 그러나 역사는 싫어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셸리는 천재였다. 우리들은 죽어도 셸리를 흉내는 낼 수가없다. 또 흉내내 볼 필요도 없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어떤 부인이 솔직하게 말한 '반성'의 말이다. "나는 같은 것을 주의 깊게 되풀이해서 생각하기로 하고 있다" 그녀의 사고 방법은 우리들의 집중의 대상이 단순한 것일 때에는 확실히 유익한 지침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란 것은 일반적으로 복잡한 형태로 우리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복잡한 대상에 대해서 어떻게 집중을 해야 할까? 우선 당신 자신의 체험을 생각해 보자.
"어떤 컨디션에 있을 때 당신은 집중이 안 되어서 고민했습니까?" 여기서는 대상 이전의 문제, 우리들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를 생각해 보자. 자기의 경험을 쭉 되새겨 보면
#1 수면 부족일 때나 반대로 너무 많이 잠을 잤을 경우, #2 너무 음식을 많이 먹었을 때나 반대로 배가 고플 때, #3 운동 부족 또는 지나친 운동으로 몹시 피로했을 때,
이와 같은 육체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 있을 때에는, 우리들의 마음은 좀처럼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와 같은 나쁜 몸의 컨디션을 정비해서 집중을 위해 조금만 신경을 써 보는 것이다. 즉,
#1 여유 있게 마음 푹 놓고 담배라도 한 대 피운다. #2 창문을 열고 멍하니 경치를 내다본다. #3 더운 날에는 나무 그늘을 찾아서 산책이라도 한다. #4 때로는 한 잔의 차를 마신다.
이와 같은 준비나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는 당신도 잘 알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상쾌한 기분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은 골치 아픈 문제와 대결할 때 쓸 만한 테크닉이며 기억해 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으로 모두가 깨끗이 처리된 것은 아니다. 일단 집중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복잡한 분야를 다루게 되면 아무래도 어떤 불안이 따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중요한 것을 쓸데없는 것과 뒤섞어 치워 버리지는 않았을까?'라는 걱정을 하게 되는 사람이(지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면 더구나 이런 경우가 많다) 많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이 경우, 가장 우리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기억된 데이터'인 것이다. 즉 자기의 기억력에 뭔가 의지할 것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가지고 복잡한 문제의 집중에 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어떻게 하면 '기억력'을 강화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도로 검토할 예정이지만...
7. 로빈슨 크루소의 경우
여러분도 알다시피 로빈슨은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 혼자 버려져서 의논할 상대도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살기 위해서 그는 여러 가지의 골치 아픈 문제와 씨름하기도 하고, 또 그것을 오직 혼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했었을까?
#1 우선,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면 종이에 적는다. #2 처음 것과는 정반대의 방법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종이에 적는다. #3 이렇게 해서 두 가지를 비교해서 검토하면서 더 좋은 방법을 선정한다. 이것이 #1 #2의 장점을 취한 제3의 방법이 된다. #4 종이 위에 적은 '생각할 자료'는 소중히 보존한다. #5 그래서, 판단에서 얻은 결과는 실행에 옮겨지게 되는데, 실제로 해보고 어떠했는지에 대한 반성이 마지막으로 첨부된다.
이렇게 해서 #1 #5까지의 기록은 메모의 형태로 남겨지고, 로빈슨이 살아남기 위한 지혜의 양식이 된 것이다. 자기의 기억력에 자신이 없을수록 이 메모의 필요성이 생기는 것인데, 메모가 자꾸 쌓여 간다고 하는 것은, 필경 써서 남긴 '기억'이 확실히 더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더욱이 놓쳐서 안될 것은, 메모는 단순히 지식의 기억이 아니고, 사고 그 자체의 기록이고 살아 있는 데이터로서 그 사람의 일생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1491-1556, 스페인의 승려, 제수이트 교단 창시자)는 (물론 펜도 종이도 풍부하게 있었으므로) 로빈슨이 경우보다도 훨씬 치밀하게, 그러나 같은 방법으로 자기의 문제를 계속 써서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 같은 방법으로 써 두었던 알버트 전하(1819-1861,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황서)의 일기도 빅토리아 여왕에게 주어진 전하의 조언의 둘도 없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당신도 이제는 여러 가지의 소음, 충고, 불안에 위협받음이 없이 자기의 대상에 집중할 수가 있을 줄 안다. 지금 여기에 한 잔의 레몬 스코치나 당신 자신의 노트가 있다고 하면 아무것도 겁낼 것이 없다. 우리들에게 예컨대, 미슐레(1796-1874, 프랑스의 역사가, "대혁명사"로 유명하다)나 카알라일(1795-1881)과 같은, 보통 사람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조직되어진 기억력'이 없다 하더라도, 그리 걱정할 것이 없다. 우리들에게는 자기의 노트가 그 구실을 충분히 해 주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되풀이해 보자. '우리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두는 준비를 지금 즉석에 해 두자. 안톤 채호프(1860-1904, 러시아의 작가, "벚나무 뜰" 등의 작품이 있음)가 그렇게 소설을 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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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글터 → 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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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을 이용하다
본뜻 : 연극 상연 도중에 막과 막 사이에 잠시 쉬는 시간을 말한다.
바뀐 뜻 : 어떤 일을 하다가 잠시 짬을 내어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보기글" -우리 막간을 이용해서 사발면 한 그릇씩 먹는 게 어때? -자, 그럼 이제부터 막간을 이용해서 우리 선생님의 노래를 들어보겠습니다
말짱 도루묵이다
본뜻 : 임진왜란 당시, 피난길에 오른 선조 임금이 처음 보는 생선을 먹게 되었다. 그 생선을 맛있게 먹은 선조가 고기의 이름을 물어 보니 '묵'이라 했다. 맛에 비해 고기의 이름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한 선조는 그 자리에서 '묵'의 이름을 '은어'로 고치도록 했다. 나중에 왜란이 끝나고 궁궐에 돌아온 선조가 그 생선이 생각나서 다시 먹어 보니 전에 먹던 맛이 아니었다 '시장이 반찬'이란 말처럼 허기가 졌을 때 먹던 음식 맛과 모든 것이 풍족할 때 먹는 음식 맛은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맛에 실망한 선조가 '도로 묵이라 불러라'하고 명해서 그 생선의 이름은 다시 '묵'이 될 판이었는데 얘기가 전해지는 와중에 '다시'를 뜻하는 '도로'가 붙어 버려 '도로묵'이 되었다. 이리하여 잠시나마 '은어'였던 고기의 이름이 도로묵이 되어 버렸고, 이것이 후대로 오면서 '도루묵'이 되었다. 바닷물고기인 도루묵은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민물고기인 은어와는 다른 종류다.
바뀐뜻 :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거나, 애쓰던 일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말짱 도루묵'이라는말을 쓴다 '말짱 헛일'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보기글" -기대하던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서 자원 봉사자와 선교사 파견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렸다 -토요일날 비가 오면 그 동안 준비했던 장미 축제는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지 뭐
모음의 짜임새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은 어린이가 말을 배울 때 가장 먼저 습득하는 모음은 [a]라고 한다. 그 다음 모음은 [u]와 [i]라고 한다. 그런데 실어증 환자가 말을 잃어가는 단계에서 맨 마지막에 잃어 버리는 것이 [u]와 [i], 그리고 [a]라고 한다. 여기서, 가장 기본이 되는 모음은 바로 [a], [u], [i]라 할 수 있다.
필리핀은 영어를 공용어로 쓰지만, 고유한 말은 타갈로그말이다. 이 말에는 모음이 세 개다. 바로 [a], [u], [i]이다. 모음 수가 적다고 온전하지 못한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음 대신에 다른 요소가 분화되어 이를 보충해 주기 때문이다.
모음이 다섯인 말에는 이웃 일본말을 비롯해 스페인말·러시아말이 있다. [a], [u], [i] 셋에다 [e]와 [o]가 더 있다. 이렇게 몇 개씩 더해 가면 언어에 따라 모음의 짜임새가 다양해진다. 이탈리아말과 독일말은 짜임새는 다르지만 모음이 일곱이고, 터키말은 여덟, 프랑스말은 열하나다.
그럼 우리말은 모음이 몇이나 될까? 표준어 규정에서 정한 표준발음법에는 열 개를 든다. 그런데 지역과 나이에 따라 머릿속에 갈무리된 모음의 수는 각각 다르다. 나이 따라 [에]와 [애]를 구별하지 않기도 하고, 지역 따라 [어]와 [으]를 하나의 소리로 인식하기도 한다. [위]와 [외]를 겹모음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내 머릿속에는 모음이 몇 개나 들어 있을까?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노무족
아주 새로운 말을 만들기는 쉽지 않지만 쓰던 말을 합하면 쉽게 새말을 만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흔히 쓰이는 말로 ‘그런 사람 무리’ 또는 ‘그 무리에 드는 사람’이란 뜻을 더하는 한자말 뒷가지 ‘-족’(族)이 있다. ‘-족’을 붙여 만든 새말이 뒷가지를 붙여 만든 새말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 10년쯤 전에도 ‘검프족·글사랑족·야깅족’ 등이 흔했던 것을 보면 요즘에만 유행하는 게 아닌 셈이다.
이처럼 ‘-족’을 붙여 만든 말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까닭은 뭘까? 간단한 새말 하나로 사회의 새로운 경향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특성을 지니는 사람 무리가 생겨나는 것은 바로 사회의 변화 양상을 드러낸다. “~족 등장”, “~족 사라졌다” 따위 기사 제목을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최근 유행하는 ‘나우족’(NOW族←New Older Women), ‘노무족’(NOMU族←No More Uncle)은 활동 인구의 노령화와 남성의 태도 변화 등이 엿보이는 말이다. ‘나우족’은 가정은 물론 자신에게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 40∼50대 중년 여성을 일컫는 말이고, ‘노무족’은 미용·패션 따위에 큰 관심을 보이며 자기 발전에 적극적인 40∼50대 중년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집안 살림과 자녀 교육에 여념이 없던 중년 여성들이 자신도 돌보게 되고, 중년 남성도 젊은 여성들 쪽에서 주된 관심사로 여겼던 미용과 옷차림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막하다’
우리말에서 부사로 쓰이는 ‘마구’는 ‘몹시 세차게, 아주 심하게, 아무렇게나 함부로’의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마구 때리다’는 ‘아주 심하게 때리다’란 뜻이고, ‘마구 버리다’는 ‘아무렇게나 함부로 버리다’란 뜻이 된다. 이런 뜻의 ‘마구’가 줄어들어 생긴 말로 접두사 ‘막-’이 있다. 접두사 ‘막-’은 ‘거친’, ‘품질이 낮은’, ‘닥치는 대로 하는’, ‘함부로’란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막소주’는 ‘품질이 낮은 소주’, ‘막말’은 ‘나오는 대로 함부로 하는 말’을 뜻하며, ‘막가다’는 ‘앞뒤를 고려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다’란 뜻이 된다. ‘막-’이 붙은 말이면서 아직 큰사전에 오르지 않은 낱말로 ‘막하다’가 있다.
“어히 자네는 너무 막하네 그려, ‘왜’가 다 뭔가?”(송영 〈군중 정류〉) “손님 대접을 이렇게 막해도 되나 모르겠구먼.”(박완서 〈미망〉)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까 아무렇게나 막해도 된다는 겁니까?”(전상국 〈좁은 길〉) “무뚝뚝하고 말 막하기로 소문난 나의 어디서 그런 간사스러운 목소리가 나오는지 내심 신기할 지경이었다.”(박완서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여기서 ‘막하다’는 ‘말이나 행동 따위를 경우에 맞지 않게 닥치는 대로 함부로 하다’의 뜻을 나타낸다. 실제 쓰이는 말이니까 사전에 올린다 해도, ‘막하다·막가다·막되다’ 같은 말은 덜 쓰이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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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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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 속에 숨어 있는 역사의 비밀(근, 현대편) - 박영수
1.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갔나
해적선과 해골 마크 깃발
멕시코시티 북방 80km의 툴라에 톨텍족의 도시가 세워진 것은 950년경의 일이다. 톨텍족은 일찍이 마야인들이 고도 문명을 이룩하고 있던 유카탄 반도에 침입하자마자 마야의 도시 치첸이짜를 점령하고 그 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호전적이었던 톨텍족은 마야의 자비롭고 온건한 신들을 내쫓고 피에 굶주린 신을 섬겼다. 마야의 장인들에게는 무서운 형상을 조각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의 왕이며 또한 신으로 추앙받은 케살코아틀은 톨텍족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 군림했는데, 무서운 방울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 11세기가 되자 마야와 톨텍의 문화는 차츰 혼합되었으나, 톨텍의 잔인한 경향만은 그대로 남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X자 모양으로 교차된 뼈다귀와 해골 무늬였다. 톨텍족은 신전 내부를 불길한 무늬로 장식했는데, 해골은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해 자주 사용되던 소재였다. 훗날 카리브 해에 출몰한 해적은 이 신전 장식에서 힌트를 얻어 인골 두 개가 X자 모양으로 교차된 위에 해골을 얹은 무늬를 깃발에 그려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해적선에 해골 무늬 깃발을 내거는 것이 유행했을까? 해적은 고대부터 있었다.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 사모스 섬의 왕 포로크라테스는 수십 척의 갤리선을 거느리고 해적질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기원전 81년 로마의 카이사르는 에게 해에서 해적에게 잡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후 즉시 토벌꾼을 이끌고 역습하여 이들을 일망타진했다. 8∼10세기경 바이킹은 영국 해협과 유럽 각지를 휩쓸었고, 12세기에는 슬라브족의 해적이 발트 해를 석권했다. 이처럼 무자비하기만 하던 해적이 국가의 인정을 받은 적도 있었다. 16세기 말에 영국과 스페인의 식민지 확보 경쟁에서는 교전 상대국의 배를 약탈해도 좋다는 국왕의 사략 특허장을 무기로 사선에 의한 해적 행위가 공공연히 행해졌다. 해적은 두 나라의 제해권 쟁탈전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1588년에 영국 함대의 일원으로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격퇴한 것도 사략선 출신의 지휘관들이었다.
17세기 초 유럽 국가 간에 평화가 찾아오자, 해적들은 유럽의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는 아메리카 수역으로 이동했다. 이 무렵 카리브 해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해적 외에도 또 다른 해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버커니어'였다. 본래 버커니어는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훈제하여 생계를 꾸리는 인디오들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스페인에게 박해를 받던 인디오들이 해적화되자 해적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이들과 유럽계 해적들이 다투어 해적질을 함에 따라 종종 해적 간에도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카리브 해 일대에는 스페인의 영토가 많았으므로 스페인 선박들이 주된 약탈 대상이 되었다. 스페인 선박은 기동력 빠른 해적선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돛대를 눕혀 난파선으로 가장하거나 초라한 어선으로 꾸며 스페인 상선에 접근한 다음 상대의 허를 찔러 습격하는 것이 버커니어의 상투적인 전술이었다. 17∼18세기 무렵 해적들의 약탈은 극에 달했으며, 18세기 초에는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해골이 그려진 해적 깃발을 내걸기에 이르렀다. 인디오 출신으로 추정되는 해적이 톨텍족 신전 무늬에서 힌트를 얻어 불길한 느낌을 주는 깃발을 만들었던 것이다. 해골 깃발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나타냈다. 이미 해적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상황에서 불길한 해적 깃발을 본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우왕좌왕하였기 때문에 해적은 손쉽게 약탈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해적선마다 다투어 깃발을 내걸게 되었으며, 뒷날 해적을 묘사한 소설이나 영화에서 해골 깃발을 단골로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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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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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3부 활성산소의 피해를 막아주는 항산화제의 비밀
항산화제 정보에 대한 일간지 보도의 허점
아무래도 책 제목이나 신문 머리기사는 일단 독자들의시선을 끌어야 한다. 하지만 한줄짜리 제목 안에 문제점까지를 다 담을 수는 없다. 따라서 제목 자체는 과장되기 마련이므로 책 제목이나 매스컴 보도의 머리말에 너무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소제목이나 본문 내용까지 살펴보기 바란다. 즉 본문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런 문제점들이 단 한줄이라도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만일 이런 문제점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다면 신뢰하기 힘든 기사 내용일 가능성이 있다. 더 문제가 많은 것은 신문의 건강 광고난이다. 외국의 경우는 건강관련 제품 선전에 의학 연구 결과를 마구 인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이게 잘 안되고 있어서 편리한대로 연구 결과를 마구 변형시켜서 곁들여 선전하는 만병통치약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의학에 무지한 대중에 대한 일간지의 영향은 너무나 막강하다. 의사 입장에서 신문의 보도 내용이 정확하며, 유익한 경우에는 그것만큼 고마운 것도 없다. 일일이 환자에게 예방이나 치료의 필요성을 목 아프게 얘기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반대로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도 매우 많다. 얼마 전에 의사협회 의학회에서 전국 9개 종합 일간지에 4개월간 실린 844편의 건강 기사를 분석-평가한 적이 있다. 여러분은 유수한 종합 일간지이니 만큼 당연히 기사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총 844건의 건강기사 중 건전성과 과학성을 갖춘 것은 70%에 불과했다. 무려 30%가 독자들이 알아야 할 필수정보를 누락시켰으며, 과장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돈을 낭비하게 하고, 부정적이거나 해로운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제 다시 항산화제로 돌아가 보자. 이미 말한대로 항산화제에 대한 기사는 앞으로 자주 접하게 될 것이다. 항산화제에 대한 기사들은 그것 자체가 이미 과학적인 근거가 충분한 주제이다. 또 다른 것처럼 부정저깅거나 해로운 영향을 끼치고 돈을 낭비하게 할 우려는 없다. 하지만 장수나 각종 만성병, 암에 관련된 물질이므로 기사 내용이 과장될 가능성이 많다. 다음의 외국 유수 일간지의 왜곡-과장 보도 예를 읽어 보면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1980년에 심혈관 질환이 없는 약 9만명의 간호사를 대상으로 항산화제의 섭취량을 분석한 뒤, 심장병 발생 여부에 대해 8년간 관찰한 연구가 있다. 연구 결과는 음식을 통한 비타민E 섭취량이 상위 20%에 해당하는 경우,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심장병이 덜 발생하며, 또 비타민E 보충제를 2년 이상 먹은 사람에서 관상동맥질환의 위험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를 가지고 연구자들은 여러 가지를 더 고려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중년여성에서 비타민E 보충제의 사용은 관상동맥 질환 위험 감소와 관련이 있다. 둘째, 하지만 비타민E 보충제를 먹으면 관상동맥 질환이 에방된다는 증거라고는 말할 수 없다. 셋째, 따라서 국민들에게 건강 지침의 하나로 비타민E를 먹도록 권장하기 위해서는 비타민E 투여 효과에 대한 더 확실한 틀의 연구가 더 필요하다. 이 연구가 발표되자 '뉴욕타임즈'는 다음과 같은 과장된 머리기사를 내보냈다.
비타민E, 심장병 위험을 획기적으로 줄여 준다 - 많은 양을 먹을 사람일수록 더 좋은 효과를 보임
원래의 연구 결과는 단지 비타민E 복용과 심장질환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는 것 뿐인데도 불구하고 유력 일간지 보도 내용은 이런 신중함이 무시된 채 비타민E를 안 먹는 것이 심혈관 질환의 원인이 되며, 비타민E를 먹으면 안 걸리는 것처럼 과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욱 심한 것은 비타민E 선전 광고인데, 마구잡이로 변형-과장되어 소비자들을 혹하게 만든다. 그 중의 한 예는 다음과 같다.
비타민E, 기적의 회춘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자신의 연구 결과가 긍정적이라 할지라도 결론을 내릴 때에는 매우 신중을 기한다. 왜냐하면 항산화제를 보충하는 경우 실제로 심혈관 질환이 덜 생길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항산화제제를 안 먹어도 같은 결과가 있을 수 있고, 또 반대로 항산화제를 보충했는데도 심혈관 질환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분이 실천하고 있는 건강법이나 치료법이 이런 면이 있는지를 곰곰히 따져보기 바란다.
필자가 어떤 건강법이 근거가 없고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의미는 그것이 황당하고 효과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효과가 없을 수도 있고, 또 하나 안 하나 그저 그럴 수도 있으며,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이(이게 몇십 명인지 몇만 명인지는 모르겠다)효과를 본 사례만을 과장되게 강조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이런 초기 단계에서는 의사들이 자신의 환자에게 비타민E를 사용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하지만 위 연구가 발표된 1980년에서 17년이 지난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아직도 효과에 불확실성을 제기하는 연구가 있지만, 긍정적인 결론을 내린 연구와 증거가 훨씬 많아졌으므로 많은 의사들이 실제 환자에게 이런 것들을 처방하는 것이다.
항산화제와 심혈관질환 발생에 관한 초기의 연구들이 신문 보도 내용과 달리 이토록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이유를 연구자들의 입을 직접 빌어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식생활 습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잰 비타민E의 섭취량은 정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평균적으로 어떤 음식을 먹는가에 대한 설문지를 가지고 간접 추정한 비타민E 섭취량이 실제 섭취한 비타민E의 양이나 혈액 내 비타민E 양과 같을 수가 없으며, 실제 이들간의 일치도는 50% 정도밖에 안되는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실제로는 비타민E 섭취량이 낮지만 운동도 잘하고 흡연도 안해서 심장병이 없는 건강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만일 이 사람에서 간접 측정한 비타민E 양이 높게 나온다면 마치 비타민E 섭취량이 많아서 심장병 발생이 안된 것처럼 될 것 아닌가? 사실은 금연과 운동 효과 때문인데도 말이다.
둘째, 비타민E를 보충제로 먹는 사람은 아무래도 건강에 대한 관심도 있을 것이고 건강지식도 남다를 것이다. 따라서 남보다 식생활이나 운동 등에 신경을 많이 쓰므로 이런 효과로 인해서 비타민E를 안 먹는 사람에 비해 심장병 발생 위험이 훨씬 적게 나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심장병 발생의 주요 위험 요인인 혈액 내 콜레스테롤치에 대한 비교가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혈액 콜레스테롤치는 정상이면서 간접 측정한 비타민E는 높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사람에서 심장병이 안 생긴 것은 콜레스테롤이 정상이기 때문인데도 마치 비타민E 섭취가 많은 것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연구 결과가 왜곡될 수 있다.
넷째, 비타민E와 심장병 발생간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다른 연구 결과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1993년에 '란셋'이라는 유명한 의학잡지 12월호에 실린 유럽인을 대상으로 한 비타민E 연구 결과를 예로 들어보자. 이 연구에서는 식생활조사가 아닌 지방조직에서 직접 비타민E와 베타카로텐치를 잰 후 심장병 발생 정도를 비교하였다. 물론 지방조직의 비타민E치는 그 사람의 오랜 기간에 걸친 비타민E치를 반영하는 것으로 식이습관에 의해 잰 것보다는 훨씬 정확하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아는가? 심장병 발생과 비타민E 수치간에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섯째, 또 다른 연구결과를 예로 들어 보자. 스코틀랜드에서 시행되었으며, 1991년에 역시 '란셋'에 실린 연구인데, 협심증이 있는 사람의 혈액에서 비타민E, 비타민C, 베타카로텐치가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렇다면 이것만 가지고도 비타민E, 비타민C, 베타카로텐을 적게 먹으면 협심증이 잘 생긴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왜냐하면 협심증과 아주 관련이 깊은 흡연이라는 요인이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즉 사실은 흡연 때문에 비타민E, 비타민C, 베타카로텐치가 낮아진 것이고 그래서 협심증 발생위험이 커진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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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으로 경계한 이황
이황(1501-1570)은 이해의 동생이고, 자는 경호, 호는 퇴계이다. 12세에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논어'를 배웠다. 이우가 늘 그를 칭찬하였다. "집안의 명성을 유지시킬 자는 이 아이이다"
중종 23년(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6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원년에 대제학 박순이 아뢰었다.
"신이 대제학이 되고 이 아무개가 제학이 되었는데, 나이가 많은 큰 선비에게 도리어 작은 임무를 맡게 하고 신진 초학의 선비에게 중요한 직위를 차지하게 하는 것은 조정의 인재 기용이 이보다 더 전도될 수 없습니다. 교체시켜 임명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 박순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이황과 박순의 관직을 서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이황이 대제학이 되어 '성학십도'를 올리고 선조 3년에 죽으니, 나이 70세였다.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으로 경계하였으며,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 쓰게 하였다. 이황은 항상 도연명의 시를 애송하며 그의 사람 됨됨이를 사모하며 야당시를 읊었다.
이슬 젖은 고운 풀이 물가에 둘렸는데 연못의 활수는 모래 없이 깨끗하네 구름 날고 새 지나니 원래 서로 얽매어라 때때로 물결 차는 제비가 두렵다네
이황이 예조 판서의 임명을 받았으나 병으로 사직하니, 이이가 찾아 뵙고 말하였다.
"어린 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으니 분수와 의리를 헤아려 보면 물러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도리로 보면 물러날 수 없다고 하겠지만 내 몸을 볼 것 같으면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성혼이 참봉에 임명되었는데도 나오지 않으므로 어떤 사람이 물었다.
"성혼은 왜 나오지 않소?" 이이가 대답했다. "성혼은 병이 많아 감히 벼슬에 종사할 수 없을 것이오. 만약 그더러 억지로 벼슬하라고 하면 이는 그를 괴롭히는 것이오"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숙헌(이율곡의 자)이 어찌 성혼은 후하게 대접하면서 나에게는 그리 박하게 대접하오" "그렇지 않습니다. 성혼의 벼슬이 선생과 같다면야 일신의 사사로운 계책을 염려해 줄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혼을 말단의 벼슬에 나아가게 한들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생께서 높은 벼슬에 계신다면 국가에 보탬이 매우 클 것입니다. 벼슬이란 남을 위하는 것이지 어찌 자신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황이 답하였다. "벼슬은 진실로 남을 위하는 것이오. 그러나 만약 이로움이 남에게 미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병통이 절실하게 되면 할 수 없는 것이오"
이황이 서울에 임시로 살 때에 이웃집에 밤나무 몇 그루가 있었는데 그 밤나무 가지가 담장을 넘어와 밤이 달리고 영글어 뜰에 떨어지자 선생이 혹시 아이들이 그 밤을 주워 먹을까 싶어 주워서 담장 너머로 던져 버렸다. 그의 청렴결백함이 이와 같았다. 여러 차례 임금이 부르는 명을 내렸지만 진출과 은퇴를 의리로 하였으며,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렀다. 세상에서는 동방의 주자라고 칭송하였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고상하고 도덕이 순수하게 갖추어졌으며, 주자를 높이고 믿어 학문의 오묘한 이치를 깊이 체득하였다. 그리하여 제자들과 도산서당에서 유고를 강론하여 성취한 이가 많았고, 동방학자들의 학설을 모으고 크게 완성하여 우뚝한 이학의 마루가 되었다. 특별히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이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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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상경
문필가는 제각기 자기가 제일이라고 뽐내며 다른 문필가를 얕보는 기질이 있다는 말이다.
명제가 반고와 부의 두 선비에게 분부하여 여러 서적을 비교 검토 수정토록 하였는데 두 사람의 사이가 안 좋았던 모양이다. 문선(6세기)에 전해진 바를 보면
"문인은 서로 상대방을 얕본다 하거니와 그런 풍조는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반고와 부의의 사이가 그러하다. 두 사람의 실력은 서로 백중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는 의를 대단치 않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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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3. 비로자나부처님의 외출
자비의 손수레
나는 수계(스님이 계를 받음)를 받고도 행자로 떠돈 적이 있다. 은사 스님이 행려 병자가 되어 그 누구도 나를 온전한 중으로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객승은 하루 이틀 머물다 떠나야 하지만 행자는 그렇지 않다. 객승에게는 뜨내기 대접을 하지만 매정한 절집에서도 행자에겐 그래도 식구처럼 대해 주는 것이다. 큰스님을 가까이 시봉하며 보고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 하여 얼마든지 공부하고 하심할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구 H사에서 였다. 장행자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나이는 스물 하난가, 스물 둘이었고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행자 생활만 오년이 넘는다는 거였다. 단지 그 이유는 학력 때문이었다. 스님이 되려면 고등학교 졸업자 이상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 외에 전과자와 신체불구자는 안 된다는 사유는 해당사항에 없었다. 장행자는 평생 불목하니(절에서 밥짓고 물짇는 일을 하는 사람)로 떠돌겠다고 내게 공언하던 행자 스님이었다. 그날 사중에는 스님들이 한 분도 안 계셨다. 가끔 담배 먹고 맴맴 술 먹고 맴맴하던 장행자는 그날 술을 한 잔 먹고 맴맴해 있었다. 그때 객승이 들이닥친 거였다. 장행자는 맴맴한 채 기와를 나르고 있었는데 객승이 세면장에서 소리쳐 불렀다. 이제 갓 사미(출가하여 10계를 받아 지니는 20세 미만의 나이 아닌 남자)가 된 듯한 객승이 장행자에게 새로운 비누를 가져오라 했다. 그러나 장행자는 거절했다. 세면장에는 아이들이 사용하는 지우개만한 비누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객승이 눈을 치켜 뜨고 가탈을 부렸다. 그러나 장행자는 막무가내였다. 고무지우개만한 비누를 다 쓰기 전에는 죽어도 새 비누를 갖다 주지 않겠다는 거였다. 언성이 높아졌다. 이윽고 객승은 장행자를 데리고 법당으로 올라갔다. 죽비를 든 객승이 장행자에게 참회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장행자는 묵묵히 객승이 치는 죽비 소리에 절을 했다. 그러나 죽비 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장행자는 땀을 팥죽같이 흘리고 픽픽 쓰러졌다. 그것까지 나는 보았다. 비록 장행자가 천여 장이나 되는 기와를 옮기는 힘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해도, 장행자가 술을 입에 댔기 때문에 내가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혹 지나가는 뜨내기 객승이라도 장행자에게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회가 끝난 후 객승이 법당에서 죽비로 장행자의 등짝에 경책(가볍게 꾸짖음)를 가하는 거였다. 한 대, 두 대......
나는 그동안 행자실의 걸망 속에 고이 넣어 두었던 가사장삼을 수하고 법당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객승에게서 죽비를 빼앗아 장행자의 손에 쥐어 주고 '저 잡놈 내쫓아'하고 일갈했다. 그때 신이 났다는 듯 객승을 몰아 내던 장행자는 지금쯤 아디서 무엇을 하고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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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2장 제14대 선조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조선조 전체를 통틀어 선조만큼 다사다난했던 임금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선왕의 적장자가 아니면서 왕위에 오른 방계 승통부터가 비상한 재위 기간을 암시하는 것이다. 선조 때 있었던 동서 분당과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미 이전의 방식으로는 통치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간 임금, 명나라로 도망가려다 압록강가에서 겨우 멈춘 치욕의 군주가 바로 선조였다. 뿐만 아니라 선조는 무려 40년이상 재위에 있었으면서도 죽은 뒤 독살설에까지 휘말리게 된다. 선조는 과연 독살당했을까? 선조 독살설은 인조반정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끈질기게 떠돌았고, 심지어 현대에 와서도 그의 독살을 다룬 책이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주제이다. 독살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의 죽음의 현장으로 가보는 것이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는 지름길일 것이다 .먼저 선조 독살의 혐의를 받고 있는 광해군과 북인측의 기록인 <선조실록>을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재위 40년 가을 선조는 병세가 위독해져 기가막히면서 갑자기 넘어졌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선조는 기후가 조금 안정되자 "이 어찌된 일인가"라면 불안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어의는 추운 아침에 일찍 기동하여 한기가 밖에서 엄습한 탓이라며 인삼순기산을 권했다. 그러나 며칠 후 다시 호흡이 가빠지며 가래가 끓었다 .의약청에서는 풍기, 즉 중풍에 가까운 증세라고 진단했다. 그러던 선조의 병이 조금 차도를 보였다. 병세가 차도를 보이자 선조는 또 세자 광해군을 꾸짖기 시작했다.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을 때 선조의 병이 다시 위독해졌다. 세상을 떠나는 해인 재위 41년 1월부터 선조는 병세가 다시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았다. 그해 2월 1일 약방의 문안을 받고 "어제밤엔 편히 잠을 잤다"고 말했던 선조는 그날 오후부터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 약방에서 강즙, 죽력, 도담탕, 용뇌소합원, 개관산 등을 들였으나 효력이 없었다. 세자가 어의에게 진찰하게 하자 어의가 말했다. "일이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날 인목왕후가 선조의 병상을 지키고 있었는데 유영경 등 여러 대신들이 "고례에 부인의 손에서 임종하지 않는다"며 왕비에게 밖으로 나와달라고 요청하는 와중에, 안에서 곡성이 들려 비로소 선조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모두 통곡하였다. 이처럼 <선조실록>은 선조가 병으로 죽었으며 마지막 임종을 지민 여인이 부인 인목대비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서인측의 기록인 <광해군일기>에는 선조 독살설에 대한 서인측의 유일한 근거이기도 한 찹쌀방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선조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에 찹쌀밥을 올렸는데 상이 갑자기 기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남계집>을 인용해 선조 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전하는데, 그에 따르면 입시했던 선지 의원 성협이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 검푸르니 바깥 소문이 헛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고 이 말을 들은 조익과 권득기는 광해군 때 벼슬을 거부했다는 내용이다. 과연 선조는 북인측의 기록처럼 병사한 것일까, 서인측의 기록처럼 독살당한 것일까?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문정왕후는 인종 독살설을 무릅쓰고 아들을 명종으로 즉위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더 이상 자신의 핏줄에게 왕위를 잇게 하지는 못했다. 문정왕후의 유일한 손자이자 명종의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요절했기 때문이다. 명종은 재위 18년 열세살의 외아들 순회세자를 잃은 후 탄식했다.
"내 울어 무엇 하랴. 을사년에 충량한 신하들이 죄 없이 떼죽음을 당해도 내가 임금이 되어 말리지 못했으니, 내 집에서 어찌 대대로 군왕이 이어질 수 있겠는가?"
순회세자 외에 다른 아들을 두지 못했던 명종은, 그 2년 후인 재위 20년에 문정왕후가 사망함으로써 친정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명종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문정왕후의 죽음에 대해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문정왕후가 명종에게 "내가 아니면 네가 어떻게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으랴"라며 횡포를 부려 명종이 심열증을 얻었다면서 "윤비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쓸 정도였다. 조선의 왕비 중 죽는 당일 이런 혹평을 들은 인물은 문정왕후가 유일할 것이다. 문정왕후의 몰락과 함께 20년 동안 권세를 누려오던 소윤 윤원형도 몰락해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동안 문정왕후의 기세에 눌려 있던 세월이 병이 되었는지, 명종도 문정왕후 사망 2년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재위 22년 6월 27일 시약청을 설치한 이튿날 새벽에 세상을 등졌으니 급서였다. 명종이 사망했을 당시 가장 큰 문제는 후사가 없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왕위가 비는 비상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2년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이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었다. 문정왕후가 사망한 직후 명종도 덩달아 위독해 저승 문턱을 넘나든 적이 있었다. 그때 가망없다고 여긴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심통원 등이 명종에게 후사를 정해달라고 청했으나, 명종의 증세는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위독했다. 대신들은 할 수 없이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에게 후사를 결정해달라고 요청하여 답을 받았는데, 이를 '을축년의 하서'라 한다.
이때 명종의 뒤를 이을 뻔했던 종친이 덕흥군의 셋째 아들 이균이다. 덕흥군은 중종이 창빈 안씨에게서 난 아홉 번째 아들이었다 중종의 아홉 번째 서자의 세 번째 아들이니 선원보대로라면 이균은 왕위를 꿈꿀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인순왕후가 이균을 후사로 정하는 하서를 내렸던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명종도 평소 이균을 볼 때마다 "덕흥은 복이 있다"며 아꼈다. 한 번은 명종이 종친 자제들을 궁중으로 불러 머리 크기를 알려고 한다며 익선관을 써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여러왕손들은 익선관을 머리에 써보며 희희낙락했는데 제일 어린 이균만은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갖다 놓고 머리를 숙여 사양하며 말했다.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쓰는 것이오이까."
이런 행동이 명조와 인순왕후의 뜻에 꼭 맞았다. 이런 경로로 을축년 명종이 위독할 때 이균을 후사로 결정했던 것이다. 재위 22년 6월 영의정 이준경 등이 문안했으나 명종은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위독했다. 이렇게 되니 다시 후사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인순왕후의 뜻은 2년전과 같았다.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균 이균에게 다시 하교가 내린 것이다. 이런 경로를 거쳐 도승지 이양원과 동부승지 박소립 등이 새 임금을 모셔 오기 위해 덕흥군의 집으로 떠났다. 그런데 이때 덕흥군의 집에 도착한 이양원이 어느 아들이라고 분명히 말하지 못했던 데서, 선조의 즉위가 얼마나 유동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양원은 다만 이균의 외숙 정창서에게 뵙자고만 청했다. 함께 갔던 주서 황대서가 "누구를 뵙자는 것이오. 이같은 큰일을 그렇게 모호하게 할 수 있소?"라고 항의했으나 이양원은 듣지 않고 정창서에게 물었다.
"어느 군이 치장을 차리고 있습니까?" "을축년에 하교받았던 하성군입니다."
이양원이 끝내 자기 입으로 하성군의 작호를 말하지 않은 것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였다. 즉 하성군 아닌 다른 인물이 임금으로 추대될 가능성도 있었고, 그 경우 하성군을 모시러 갔던 인물은 죽게 되어 있었으므로 이양원은 끝내 이름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이날 박소립은, 하성군을 호종한 인물들은 공신이 될 거라는 궁인들의 말만 득고, 호종한 인물들의 명단을 받았다가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은 다시 말해 하성군의 승통이 그만큼 정통성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성군 또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대궐에 들어와서도 상차에서 나오지 않고 사양했다. 대신들이 청하고 인순왕후도 청하자 마지못해 나왔으나 용상에 오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물론 의례저인 거조이기는 했지만 하성군은 한참을 사양한 후에야 용상에 올라 백관의 하례를 받고 임금이 되었다. 그리고는 곧 인순왕후를 왕대비로 높여 수렴청정하기로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방계 승통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즉위한 하성군이 임진왜란을 겪고 이러저리 피난 다니는 수난의 군주 선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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