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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20 호
단기 4341. 1. 2 (음력 11. 2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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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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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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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것이 동정보다 낫다. 동정이란 위로를 하면서도 무언가 숨기는 경우가 많으니까. / 그레텔 에를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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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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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생일잔치 기다리다 굶어 죽는다
‘풀이 자라는 동안에 말들은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꿈이나 기대가 이루어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므로 그 사이를 이겨내기 힘이 든다는 뜻이다. 솔 심어 정자 만든다는 말도 그러하다. 어린 소나무를 심어 뒷날에 정자를 만들 제목으로 쓴다 함이니 그 결과를 보기가 아득하다는 말이다. 조니 버나드 쇼(1856~1950)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런던에서 활동한 극작가이며 비평가였다. 그는 작가로서 명성을 얻기 전에 상당히 어려운 생활을 하였는데, 후에 당시의 고통을 이런 말로 나타내었다.
“원맨쇼 후에 내년의 공연표도 빠른 시간 내에 팔 수 있는 자신이 생겼다. 그러나 생일날 잘 먹으려다 굶어 죽게 생겼다."
철부지급 어느날 굶주림을 참다 참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장자가 마침내 자존심을 버리고 벼슬하는 친구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 장자의 초췌한 몰골을 본 친구는 딱 잡아 거절하고 싶었으나 차마 냉정하게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빌려주지, 그런데 지금은 없고 한달 후에 세금을 걷으니 그때 가서 빌려 주겠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장자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제 내가 여기로 오는 길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어 돌아보니 수레바퀴로 파인 곳에 고인 물 속에 붕어 한 마리가 있었네. 내가 그 붕어에게 ‘그 곳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붕어가 말하길, ‘나는 동해 용궁의 왕이다. 그런데 지금 곤경에 처해 있다. 나를 도와 주시오‘하고 애원하질 않겠나. 그래서 나는또 말했네. ‘좋다. 나는 지금 남쪽의 물나라에 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그 곳에 가서 큰 강물을 그대에게 돌려 대주겠다. 그때까지 기다려라’고 말일세. 그러자 붕어가 나에게 또 말하는 것이었네. ‘나는 있어야 할 곳을 잃어 위급한 지경에 있다. 그러나 지금 한 되나 한 말쯤의 물만 있으면 산다. 그대가 갖고 있는 것조금만 나누어주면 될 터인데 왜 그렇게 삶은 호박에 이도 들어가지 않을 헛소리를 하는가‘라고 말하면서‘그대가 나를 다시 찾으려면 시장 건어물전에 가서 찾으시오’라고 말하더란 말씀이네.“
철부란 수레바퀴로 패인 곳에 고인 물속의 붕어를 뜻한다. 사람이 다급하고 곤궁한 처지에 이른 경우를 두고 이런 말을 쓴다. 생일날 잘 먹으려고 굶다가 장자양반 제삿날 젯밥 공양 받을라! 솔로몬은 <지혜의 글>에서 “선을 베풀 능력이 있거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주저 하지 말고, 너에게 가진 것이 있으면,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면 내일 주겠다’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고통에 쌓인 사람에게 위로하는 말이라도 하여 주자.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마저 깨려 해서는 곤란하다. 생일날 잘 먹으려고 기다리다 굶어 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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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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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김재은
제6장 - 생활은 사고능력을 약화시킨다.
1. 사고하는 사람의 생활
생활이야말로 위대한 교육자라고들 한다. 사실 우리들은 생활 속에서 계속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면서 안전을 찾는 본능-경험이라든가 생활의 지혜라든가 하는 것을 터득하고 있다. 그러나 몇 억이라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되풀이하고 있는 방대한 노력이나 경험은 사람들의 사고 능력을 도리어 줄이는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플라톤(B.C. 427-347,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은, "경험은 플러스보다도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많다"라고 말하였다. 사고에 전념하는 생활에는 아무래도 고독하고 자유롭고 또 틈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수도원의 방 한 칸에서, 데카르트는 파리를 멀리 떠난 조용한 교외에서, 파스퇴에르 (1822-1895, 프랑스의 화학자, 생물학자)와 에디슨의 고립된 실험실에서, 학자인 수도사는 수도원에서, 성자는 매사추세츠 주의 조용한 시골에 틀어박혀서, 또 예술가는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낙원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시도해 온 것이다. 그들은 사회생활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려고 했다. 사고하는 사람에게는 생활이 가져오는 번잡한 일은 필요 없는 방해물이었던 것이다.
2. 사고하지 않는 사람의 생활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은 스피노자나 데카르트의 생활과는 반대이다. 부자이건 가난뱅이건 대개는 자기 자신의 일을 안달복달하면서 일하고 있는 인간들이다. 당신이 사람들의 얼굴에서 문득 피로의 기색을 읽게 되면 아마도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불안을 가지고 있고, 그 불안이 눈을 움푹 꺼지게 했으며, 입을 오므라들게 만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재능은 있지만 재산을 갖지 못하는 문학가나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재산이 예술을 망가뜨린다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예술가도 어느 정도의 재력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실패와 불안이 인간의 능력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끄집어 낸다고 할 수만은 없다. 그 반대로 눈을 움푹 꺼지게 할뿐만 아니라 꽃피려고 하는 재능을 시들게 해 버리는 수가 많은 것 같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회피하게 되거나 '방탕' 속에 도피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고 해서, 만일 부자나 권력을 가진 자와 잘 어울리거나 아니면 자기에 대한 평판에만 신경을 쓰면 인간적으로 비굴해지고 그의 사상의 질은 한꺼번에 타락하고 만다.
설교자는 부자가 가난뱅이보다 근심 걱정이 많다고 말하지만, 부자는 가난뱅이보다도 걱정이 적다는 것이 정말일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이 또 이 부자들의 상투적인 말인데, 가끔 조금 쉬기 위해서 병을 앓는 것을 기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고독이나 싫증에는 참을성이 적다. 여행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함으로써 이 사회의 모습도 알고, 여러 가지 사실이나 지식은 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그들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진지한 책이나 회화에는 흥미나 관심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사색을 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들은 본능을 위해서 생활하고, 오락이나 스캔들 또는 권력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드디어 그들의 가치 판단의 척도는 잘못된 것이 되어 버리고 말며 직접적인 향락만이 최대의 관심거리가 된다.
3. 기분전환의 수단이 되어 버린 독서
독서가 사색에 도움을 줄 수가 있을까? '독서가 완전한 인간을 만든다'라고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 영국의 철학자)이 말했다. 그러나 독서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아직 책이 귀했던 시대에는 독서는 마술과 같은 신성한 분위기를 주었던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을 수가 없었으므로 성직자는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큰 소리로 책을 읽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이 현상은 개인적인 독서에서도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남아 있게 되었으며 지금도 입술을 움직이면서 읽는 시골사람들은 이 전통을 지키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책을 입수하게 되면 몹시 소중하고도 값비싼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엄숙한 태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며, 그래서 온 정신을 독서하는 데 집중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는 책을 읽는 것의 효과를 누가 의심이나 했겠는가? 책의 희소가치가 있었으므로, 무차별한 장서를 늘린다는 일은 없었다. 인쇄술이 발달되고 난 후에도 처음에는 그 이전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종교서적· 시인 철학자의 저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벼운 책으로는 호머나 역사가의 책이 뒤섞여 있었다. 왕이나 귀족들, 그리고 부유한 수도원의 장서라도 천 권을 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개인의 장서는 당연히 이것보다는 적었고, 스피노자도 60권이 못되는 것으로 그 리스트가 오늘날 공개되고 있다. 1백 년 후 칸트가 3백 권을 모았지만 그 중 대부분은 여행기였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는 책의 홍수에 휩쓸릴 것 같은 위험에 처해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얼이 빠져서 열등감이나 환영이 세균과 같이 자꾸만 늘어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처치가 곤란한 것은 아마도 모든 책에 대해서 의견을 가질 수는 없으면서도 알고 있는 척해야 한다는 생각일 것이다. 사람들은 읽지도 않았으면서도 읽은 것처럼 행세를 해야 되며, 다른 사람의 판단을 제 것인 양 표절하고 있다. '생각의 기술'에 있어서 이보다 더 파괴적인 것은 없다.
오늘날 산더미처럼 출판되고 선전되고 비평에서 과장되고 있는 것은 소설이다. 소설은 서점의 책장 뿐 아니라 우리들의 책장에서도 넘치고 있다. 이들 소설은 시간 보내기 위해서 읽히고 있다. 그리하여 '읽는다'는 말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존엄성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의미 그 자체가 변질되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독서란 담배를 피운다던가 카드놀이를 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육체적인 기분 전환의 수단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사교적인 행위로서의 독서가 가져오는 '효과'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이 책의 14장에서 신문이야말로 사색을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도구라는 점을 말하려고 생각하지만, 대개의 경우, 신문은 전혀 읽혀지지 않거나 쭉 한번 눈으로 훑어보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나는 기차 안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을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다. 그 신사는 허드슨 강을 헤엄쳐서 건너간 여성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이것은 상당히 긴 이야기로서 6면에 계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신사는 신문 지면의 석 장을 넘길 생각은 하지 않고, 같은 지면에 있었던 뉴저지 주의 '돼지 여자 사건'의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후, 의회에 보낸 대통령의 교서, 사설, 옥수수 시세, 선박, 스포츠에 관한 소식 등을 거의 비슷한 관심을 가지고 읽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신사는 피로해졌는지 신문을 꾸깃꾸깃 꾸겨서 밑으로 집어던지고는 발로 밟고 난 후 담배를 꺼내 피웠다. 전혀 관심도 없는 기사를 오랫동안에 걸쳐서 읽는다는 지적 작업이 어떤 영향을 주는가 생각해 보라.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생 동안하고 있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독서는 오히려 창조적 사고를 파괴하는 것이 되고, 그 중에서도 신문은 그 산만성 때문에 사람들의 집중적인 사고를 방해하고 무책임한 표제, 헤드라인에 의해서 농락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열등감이나 환영을 가지지 않고, 관찰하는 힘이나 사고를 위한 이미지를 저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데 생활, 즉 교육이라든가 문학작품이라든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유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포함한 생활이라는 것은 이것을 마치 4월의 서리가 꽃을 시들게 하듯이 파괴하고, 드디어 사람들이 흉내내기나 비열함 힘센 자에게 는 양보하라는 식의 사고 방법이 독창성을 몰아내고 그 대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표면은 허쿠라리움(기원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에 의해서 매몰된 나폴리 부근의 로마시대의 도시)과 같이, 딴딴한 지각으로 싸여 있고, 그 밑에 진짜 생활이 잊혀진 채로 버려져 있는 것이다. 극히 적은 사람만이 지하에 숨겨진 방-일찍이 소년시대에 즐겁게 놀면서 지낸 일이 있는 그 방으로 통하는 길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사람들에게는 습관이나 되풀이라는 두꺼운 용암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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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통나다
본뜻 : '들통'이란 말은 밑바닥이 다 드러난 빈 통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들통이 났다는 것은 맨 밑바닥까지 다 보인다는 뜻이다.
바뀐 뜻 : 그 동안 숨겨 왔던 일이 드러나거나 들킨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보기글" -극장에서 김 과장님을 만나는 바람에 사내 연애가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지 뭐야 -너, 그러다가 들통나면 어쩌려고 그렇게 날이면 날마다 대리 출석을 부탁하니?
등골이 빠진다
본뜻 : '등골'이란 말에 쓰이는 '골'은 뼈 속에 가득차 있는 부드러운 신경조직을 가리키는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 쓰이는 등골이란 등뼈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뇌와 연결되는 신경 중추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신경 중추에 손상이 올 경우 디스크 및 운동신경 마비 등의 여러 가지 신체적인 고통을 당하게 된다.
바뀐 뜻 : 견디기 힘들만큼 몹시 힘이 든다는 말이다. 이 밖에도 등골에 관계된 말로는 남의 재물을 갈취하여 긁어먹는 '등골을 빼먹다' 혹은 남을 몹시 고생스럽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등골을 뽑다' 등이 있다.
"보기글" -등골이 빠지게 일해 봤자 남는 게 뭐가 있니? -세 아이 학비 대느라고 우리 두 부부가 등골이 빠진다니까요
뫼와 갓
들온말을 즐겨 쓰는 이들은 토박이말에는 이름씨 낱말이 모자라고, 한자말은 짤막하고 또렷한데 토박이말은 늘어지고 너절하다고 한다. 그런 소리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지를 보이는 말 하나를 들어보자.
‘산’이 그런 보기다. 얼마나 많이 쓰는 말이며 얼마나 짤막하고 또렷한가! 이것을 끌어 쓰기까지는 토박이 이름씨가 없었고, 이것이 들어와 우리 이름씨 낱말이 늘었을까? 사실은 거꾸로다. ‘산’ 하나가 토박이말 셋을 잡아먹었고, 그렇게 먹힌 토박이말은 모두 ‘산’처럼 짤막하고 또렷하였다. ‘뫼’와 ‘갓’과 ‘재’가 모두 ‘산’한테 자리를 내준 말들이다.
‘갓’은 집을 짓거나 연장을 만들거나 보를 막을 적에 쓰려고 일부러 가꾸는 ‘뫼’다. ‘갓’은 나무를 써야 할 때가 아니면 아무도 손을 못 대도록 오가면서 늘 지킨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일부러 ‘갓지기’를 세워 지키도록 한다. 도회 사람들은 ‘갓’을 자주 보지 못하니까 머리에 쓰는 ‘갓’과 헷갈려서 ‘묏갓’이라 하다가 ‘멧갓’으로 사전에 올랐다.
‘재’는 마을 뒤를 둘러 감싸는 ‘뫼’다. 마을을 둘러 감싸고 있기에 오르내리고 넘나들며 길도 내고 밭도 만들어 삶터로 삼는다. 난리라도 나면 사람들은 모두 ‘잿마루’로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며 마을을 지키고 살 길을 찾는다. ‘뫼’는 ‘갓’과 ‘재’를 싸잡고 그보다 높고 커다란 것까지 뜻한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메뚜기
황금빛 들녘 곳곳에는 벌써 가을걷이에 들어간 데도 적잖다. 벼가 익어가면서 메뚜기도 빛깔이 누렇게 변한 채 이리저리 뛰며 가을을 노래한다. 메뚜기는 이제 단순한 곤충이 아니라 환경오염 정도를 가리는 지표가 되었다.
옛 문헌에서 ‘메뚜기’가 나타나는 최초의 형태는 16세기의 ‘묏도기’다. ‘묏도기’는 ‘뫼(山)+ㅅ+도기’로 분석하는데, ‘도기’는 ‘번데기’의 중세국어형인 ‘본도기’에도 쓰였다. ‘묏도기’는 ‘묏도기>뫼또기>메또기>메뙤기>메떼기>메띠기’ 또는 ‘묏되기>뫼또기>메또기>메뚜기>메뛰기>뭬뛰기’와 같은 변화를 겪으면서 고장마다 다양한 소리와 꼴로 쓰인다.
‘메뚜기, 메뛰기, 메띠기’는 전국적으로 쓰인다. 전북 쪽에서는 ‘뫼뚜기, 뫼뛰기, 메띠기’를, 전남 쪽에서는 ‘뫼또기, 뫼뙤기, 메때기’를, 경남 쪽에서는 ‘메뜨이, 매띠, 메띵이, 미띠기’를, 경북 쪽에서는 ‘매띠기, 미떠기, 미떼기, 밀뚜기’를 쓴다. 충남에서는 ‘모띠기, 모때기’를 쓰고 있다.
한편, 전남과 전북에서는 ‘땅개미, 땅개비, 땅구’도 쓰이고, 경북에서는 ‘땅개비, 떼때비’를 쓴다. ‘땅개비’는 ‘방아깨비’를 일컫는 말인데, 메뚜기의 방언으로도 쓰고 있다. 제주로 가서는 좀더 특이하다. ‘득다구리, 만죽, 만축, 말똑, 말촉, 말축’ 등을 쓴다.
함경도에서는 ‘매때기, 매뚜기, 뫼뙤기’, 평북에서는 ‘매똘기, 매뚤기, 매뜰기, 멜뚜기, 부들깨미’라고 쓰는데, 남쪽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드라비다말
인도말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 인도말은 대부분 인도유럽어족에 들지만, 남부 인도에 널리 퍼져서 쓰이는 말들은 드라비다어족에 든다. 이 말겨레는 남부 인도와 스리랑카 쪽에서 많이 쓰며, 파키스탄에서도 쓰이는데, 사용 인구는 모두 1억4천만 정도다. 대표적인 말은 기원전부터 오랜 전통과 문학을 간직한 타밀말이다. 그런데 북부 인도에서도 드라비다말 쓰임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이천년쯤 인도유럽말이 인도에 들어올 당시 인도에 가장 널리 퍼져 쓰이던 말이 바로 드라비다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드라비다말의 명사는 단수·복수를 표시하며, 대명사는 남성·여성·중성으로 나뉜다. 알타이말·우랄말처럼 교착어에 해당하고, 문장도 주어-목적어-서술어 차례로 짜인다. 그래서 알타이말과 드라비다말이 같은 계통이 아닐까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20세기 초 헐버트라는 학자는 우리말과 드라비다말 몇 가지와 문법을 비교한 적이 있다. [kuvi]와 ‘구멍’, [kwi]와 ‘귀’, ‘집’을 뜻하는 [kudi]와 ‘구들’이 그런 보기다. 긍정적인 대답을 뜻하는 [am]과 우리말의 ‘암, 그렇고말고’ 등을 견주기도 했고, [pen](여자)과 ‘여펜네’를 견줬으나 신빙성이 거의 없다.
요즘도 우리말과 드라비다말의 계통 관련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저 몇몇 낱말이나 문법 구조가 비슷하다고 해서 계통이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언어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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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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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8. 서역으로 가는 비단길(장건)
흉노 공략을 발단으로 한나라와 서방 제국과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 때 서방의 길을 개척한 것이 장건이다. 한나라의 하급 관리에 불과했던 장건은 흉노족에게 사로잡혀 있던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귀중한 자료를 모아 후에 본국으로 들고 왔다. 이 보고 자료에 의해서 무제의 세계를 향한 꿈은 피어났고, 그 꿈은 차례차례로 장건의 후계자를 낳았다. 그러나 이 후계자들의 실태는 어떠했는가?
13년 만에 귀국한 장건
서방에 관한 지식은 장건에 의해 처음으로 전해졌다. 장건은 한중 지방 출신으로 낭(하급 관리)이 된 인물이다. 당시 무제는 흉노의 투항자들에게서 여러 가지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흉노는 월지의 왕을 쳐부수고 그 왕의 두 개골로 술잔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월지는 서쪽으로 도주했으며, 흉노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적개심과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으나, 협력해서 흉노를 공격할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때마침 흉노를 격멸하고자 기도하고 있던 한나라 조정에서도 이 정보를 바탕으로 월지와 손을 잡기 위해서 사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한나라와 월지 중간에는 흉노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의 사자는 흉노의 세력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그 중임을 완수할 인물을 모집하기로 했다. 이때 스스로 응모해 월지로 가는 사자로 발탁되었던 사람이 바로 장건이었다. 사자가 된 장건은 흉노인 감보라는 사람을 데리고 출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행은 영내를 통과하다 잡혀서, 선우에게 압송되게 되었다. 선우는 장건을 구속하고 이렇게 문책했다.
"월지국이라면 우리 나라보다도 북쪽에 있지 않은가. 네가 월지에 도착할 길은 없다. 가령 내가 월나라로 사자를 보냈다면 한나라에서 잠자코 보내 주겠는가."
이리하여 장건은 흉노에 의해 10여 년간 갇혀 살면서, 거기에서 아내도 얻고 아이도 키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나라 사자임을 나타내는 황제는 부절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었다. 흉노에서 오래 살게 됨에 따라 장건은 서서히 행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드디어는 야음을 틈타서 일행을 데리고 월지로 도망칠 수 있었다. 일행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을 걸어서 수십 일 후에 대원 지역(중앙 아시아)에 도착했다. 그런데 대원은 한나라의 강력한 힘과 풍부한 물자 소식을 전해 듣고 전부터 한나라와의 통상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대원에서는 장건 일동의 도착을 환영했다. 그리고는 대원의 왕이 장건에게 물었다.
"우리 나라에 잘 와 주셨소. 그래, 일행은 대체 어디까지 가실 예정이오."
이에 장건은 말했다.
"우리들은 한나라를 받들고 월지로 가는 길입니다. 불행히도 흉노에게 잡히어 뜻하지 않게 세월을 허송하다가 겨우 도망쳐 오는 길입니다. 왕이시여, 저를 월지까지 보내 주실 분이 계시다면 오로지 당신뿐입니다. 제가 월지로 갔다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나라는 대왕에게 엄청난 예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이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장건 일행에게 안내와 통역을 붙여서 보내 주었다. 일행은 우선 강거(키르키즈 지방)에 도착했고, 이어서 강거 지방 주민의 도움으로 대월지 (우즈베크 지방)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들에게 있어 한나라는 너무도 멀었다. 그러므로 협력해서 흉노를 보복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일행은 이 나라에서 1년 남짓 머문 끝에 귀로에 올라 강족의 영토를 통과할 무렵 또다시 흉노에게 잡혔다. 그런데 이 땅에서 거의 1년 동안 머무는 중에 선우가 죽고 좌곡려 왕이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 혼란을 틈타서 장건과 흉노인 아내는 한나라로 도망칠 수 있었다. 드디어 조국을 떠난 지 십 년이 넘어 장건은 귀국할 수 있었다. 한나라 왕은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장건 일행을 환영하고 장건은 태중대부로 승진하였다. 장건은 체력이 좋고 관대하여 신의가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 인품의 덕으로 그는 이국 사람에게도 호감을 샀다. 또한 감보는 흉노 출신으로 궁술에 능하여 식량이 떨어졌을 때에는 짐승을 잡아서 굶주림을 면했다. 한나라를 출발할 때, 장건 일행은 백 명 이상이나 되는 부대였으나 13년이 지나서 귀환한 자는 이 두 사람뿐이었다.
해를 따라 서쪽으로
장건이 실제로 발을 들여놓은 나라는 대원, 대월지, 대하, 강거의 네 나라이고, 정보를 가져온 주변국들만도 5, 6개국이나 된다. 그들은 이런 나라에 대해서 황제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올렸다.
"대원은 흉노의 서남방, 한의 서쪽에 위치하며 거리는 1만 리쯤이나 됩니다. 그 땅에 인간이 정주하여 농경에 종사하며 벼와 보리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만듭니다. 또한 품종이 좋은 말을 대량으로 사육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피땀을 흘리므로 선조는 천마의 아들이라 합니다. 도시마다 성곽을 쌓고 가옥에서 삽니다. 지배하는 도시는 대소 합쳐 70여 성, 인구는 넉넉히 수십 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무기로는 활이나 창을 사용하며 기마전에 능합니다. 대원의 북쪽은 강거, 서쪽은 대월지, 서남쪽은 대하, 동북쪽은 오손, 동쪽은 한미, 우전입니다. 우전 서쪽 지대에서는 강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서해(아랄해)로 가고 동쪽으로는 동류하여 염택으로 갑니다. 오손은 대원에서 동북으로 2천 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생활 풍습은 흉노와 같으며 사람들은 일정한 곳에 정착하여 살지 않고 가축을 따라 이동합니다. 활을 쏘는 전사는 수만 명으로 모두 용감히 싸웁니다. 이전에는 흉노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그 후 세력이 왕성해지더니 현재는 명목상으로만 흉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을 뿐 흉노에 바치는 조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월지는 대원에서 서쪽으로 2, 3천 리 떨어진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대하, 서쪽으로는 안식, 북쪽으로는 강거가 있습니다. 그들은 가축을 따라 이동하는 유목 민족으로 생활 양식은 흉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활을 쏘는 전사는 대충 20만 가량 될 것입니다. 이전에 강력했던 시기에는 흉노마저도 우습게 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흉노에서 묵특선우가 나타나서 월지를 격파하고, 또한 그 다음에 즉위한 노상선우는 월지왕을 죽여서 그 두 개골을 술잔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처음에, 월지의 생활권은 돈황, 기련산 일대였으나, 흉노와의 일련의 항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그곳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원 땅을 통과하여 서방의 대하를 공격, 그곳을 점령하고 규수 북쪽에다 도읍을 정했습니다. 그곳에 살던 원주민 중에서 채 도망가지 못한 나머지 무리들은 기련산에 있는 강족의 거주지로 들어가 소월지라 칭하고 있습니다. 안식국은 대월지에서 서쪽으로 수천 리쯤 떨어진 데 있습니다. 안식 사람들은 정착해서 농경을 영위하며 벼, 보리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생산합니다. 성벽을 둘러쌓아 도시를 갖춘 것은 대원의 경우와 같습니다. 지배하는 도시는 대소 아울러 수백 성에 달하고 면적은 수천 리 사방에 이르는 가장 큰 나라입니다. 규수라는 강에 접하고 있으며, 교역 시장이 서고, 사람들은 수레와 배를 함께 활용하여 인근 제국뿐 아니라 때로는 수천 리 먼 나라와도 흥정을 합니다. 은으로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하고 있고, 화폐 문양으로는 그때그때 왕의 초상을 사용합니다. 왕이 죽을 때마다 화폐를 다시 찍고 왕의 초상도 바꿉니다. 글을 쓰는 데는 약간 딱딱한 가죽을 사용하며 거기에다 문자는 옆으로 늘어놓습니다. 대하는 대원에서 서남쪽으로 2천여 리, 규수의 남쪽에 위치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정착해서 성곽, 가옥을 갖추는 것이 대원의 경우와 거의 같습니다. 왕 한 사람이 전권을 쥐고 있는 게 아니고 각 도시별로 영주가 분립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전투력은 약하며 전쟁을 두려워하지만 그 반면에 상업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서쪽으로 이동해 온 대월지에게 격파되어 완전히 예속되어 있지만 백여만이라는 풍부한 인구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중심 도시는 남시성이며 교역 시장에서는 가지각색의 물자들이 거래되고 있습니다. 대하 동남쪽에는 신독국(인도)이 있습니다."
황제의 꿈
장건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제가 대하에 있을 무렵, 공나라의 죽장과 촉나라의 직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장 그 고장 사람들에게 물어 본 즉,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네 상인들이 신독국(인도)에 가서 그곳 시장에서 사온 것입니다. 신독은 대하에서 동남으로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있는 나라로, 정착 생활을 영위하는 점은 대하와 거의 차이가 없지만 습기가 많고 덥다 합니다. 이 나라는 큰 강에 임하고 있으며 코끼리가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타고 싸움을 합니다....' 제가 추측하건대 대하는 한나라에서 1만 2천 리요, 방향은 서남쪽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신독국은 대하에서 동남방 수천 리 밖에 위치하고 촉나라 산물이 유통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촉땅에서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하로 가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강족땅을 통과하기는 길도 험할 뿐 아니라 주민의 환영도 못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약간 북쪽 길을 택하면 흉노에게 잡히게 됩니다. 이상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대하로 가기 위해서는 촉땅에서 출발하는 것이 거리도 짧고 방해받을 염려도 없을까 싶습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무제는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폈다. '대원, 대하, 인식 등의 여러 나라는 모두 진귀한 산물도 많으며 정착해서 농사짓는 것도 중국 본토와 비슷하다. 그런데 군사력을 약하고 한나라 물자에 대한 욕구는 강하다. 더구나 이런 나라들의 북쪽에 위치한 대월지나 강거 같은 나라들은 군사력은 강하지만 자기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협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한나라가 힘으로서가 아니라 계통을 밟아 이들 여러 나라들을 복종시킬 수만 있다면 한나라 영토는 만 리 밖의 저쪽 끝까지 확대되고, 한나라 언어는 아홉 번이나 통역을 겪으면서 풍속이 다른 민족을 통일시킨다. 그렇게 되면 나의 권위는 이 세상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리라....'
이렇게 생각을 한 무제는 장건의 보고를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리하여 장건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려 대하고 가는 4개의 통로를 정하여 밀사를 내보내도록 하였다. 밀사는 모두가 천 리에서 2천 리쯤 전진했으나 그 가운데서 북쪽으로 향해 간 자는 저족, 작족에게 길이 막히고, 남쪽으로 간 자는 쉬주, 곤명 일대에서 앞길이 막혔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 서방으로 1천 리 남짓 떨어진 곳에 코끼리를 사용하는 나라가 있는데 전월국이라 불리운다는 것과 이곳에는 촉나라 밀무역상들이 왕래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한나라는 이렇게 대하국과의 통로를 탐색하는 동안 처음으로 전월국과 통상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이전에도 서남 방면의 이민족과 통상을 시도했으나 막대한 비용을 들이면서도 통로가 발견되지 않아 체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장건의 '대하국과의 통상은 가능하다'는 보고를 받고 한나라는 다시 서남쪽 이민족과의 교섭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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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3부 활성산소의 피해를 막아주는 항산화제의 비밀
또 다른 지역 방위군들
혈액 속에 자유롭게 떠 다니는 철분이나 구리 등은 여건만 되면 프리라디칼 생성을 촉진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말썽을 일으키지 못하게 감시할 필요가 있다. 건강한 사람의 혈액 속에는 철을 꼭 붙잡아서 운반하는 트랜스훼린이라는 단백질이 있기 때문에 자유 상태의 철의 양은 그의 제로에 가깝다. 트랜스훼린에 붙은 철은 프리라디칼을 만드는 반응에 참여하지 못하므로 혈액 속에 있는 자유철을 잡아들이는 트랜스훼린의 능력은 일종의 항산하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트랜스훼린과 유사한 것이 사람의 눈물이나 콧물에 있는 락토훼린이다. 락토훼린은 1개당 2개의 철과 결합할 수 있어서 자유철에 의한 피랄디칼 생성 반응을 억제한다. 또 세균의 성장에 필요한 철분을 빼앗기 때문에 그 결과 세균이 자라지 못하게 도는 감염방어 기능도 할 수가 있다. 구리도 역시 혈액 속에서는 세룰로플라스민이라는 단백질에 안전하게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세룰로플라스민 역시 지질의 과산화변질을 막는 항산화제이다.
그외 비슷한 작용을 하는 혈액 속의 황산화제로는 알부민과 요산이 있다. 알부민은 자신을 희생사면서 항산화작용을 한다. 인체 조깆액 내에 있는 요산이라는 물질도 항산화기능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정확한 역할을 잘 모른다. 대략 지금까지 알려진 요산의 기능을 보면 1) 핵산을 만드는 염기의 원료, 2)활성산소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3)철이온과 결합하여 활성산소의 손상을 예방한다는 것이다. 또 특별히 요산은 인체의 기관지 조직에서 호흡을 통해 들어온 산화성 대기오염물(오존이나 산화질소물)을 제거하는 항산화 역할을 하는 물질로 생각되고 있다.
세계가 주목한 항산화제 효과에 관한 5,000여편의 연구 결과들
지난 1년간 전세계의 의학, 화학, 분자생물학, 유전과학, 영양학등 건강 관련 유명 전문잡지만 해도 항산화제에 관한 연구 논문이 수천 편이 넘는다. 아마 1개의 주제로 프리라디칼이나 항산화제만큼 감초처럼 각 분야별로 안 끼는 데가 없는 것도 드물 것이다. 이런 연구 성과에 힘입어 항산화제는 몇 년 안에 인류의 건강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이 시점에서 항산화제는 아직 별 볼일 없는 물질인가? 그렇지 않다. 단지 빛을 보고 있지 못할 뿐이다. 수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연구해서 발굴한 항산화제가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당연히 그것이 갖고 있는 가치만큼 대접을 받아서 항산화 건강법이 빛을 보게 하려는 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쓰는 가장 큰 목적이다.
지금 당장 책방에 가서 건강코너에 꽂혀 있는 책들 중 아무거나 하나 꺼내서 잘 살펴보라. 항산화제나 프리라디칼, 활성산소 등에 대한 내용이 단 몇 줄이라도 안 써 있는 책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꽤나 잘 팔린다는 건강보조 식품 광고난을 잘 보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적불명의 장수깅 약품 선전난을 봐도 같다. 미용관련 제품, 피부노화를 막는다고 선전하는 화장품까지도 항산화제 성분제품임을 표방한다. 장수를 보장하고, 노화를 예방하고, 암을 안 생기게 하고, 활력을 가져다 주는 열쇠라고 선전되는 항산화제-도대체 어디까지가 과장이고, 얼마만큼이 사실이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제부터 필자는 지난 5년간 동물실험이 아닌 인체를 대상으로 한 항산화제 관련 5천여 편의 연구 결과들을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을 읽고 나면 여러분들은 우리 주변에 가까이 널려 있는 항산화제의 가치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당장 이 순간부터 항산화건강법을 실천하는 사람도 생기게 될 것이다.
노화예방 효과
노화예방에는 유전, 식습관, 운동, 항산화제, 호르몬 등이 관련되지만, 이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므로 어떤 한가지만이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프리라디칼이 노화의주요 요인의 하나인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또한 항산화제가 노화 속도를 늦추는 효과가 있음을 시사하는 연구들이 많다. 주로 동물실험 결과이긴 하지만 노화학, 영양학자들이 가장 근거있는 항노화방법으로 인정하고 있는 방법은 소식이다. 소식은 항산화작용에 의해 수명연장 효과를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에 존재하는 조효소 큐는 항산화작용과 세포막 안정작용이 있는데, 일부 노화관련 질환에 투여할 때 부분적인 효과가 관찰된다.
최근에 각광을 받았던 멜라토닌은 다른 항산화제보다 프리라디칼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효과가 있으며 멜라토닌의 분비 감소는 노화나 노화관련 질환과 연관이 있다. 미 국립 암연구학회지에 의하면 베타카로텐, 비타민E, 셀레니움을 충분히 섭취한 사람들은 사망률이 4-10% 감소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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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천기를 누설한 정렴
정렴(1506-1549)의 본관은 온양이고, 자는 사결, 호는 북창이며 정순붕의 아들이다. 그는 남달리 총명하여 어릴 적에 벌써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고 신명과 통할 수 있어 가까이는 여염집 거실의 은미한 것과 멀리는 네 종류의 이족과 여덟 종류의 만족들의 각기 다른 풍속과 기질 그리고 개를 부르는 소리며 백로의 울음소리를 귀신처럼 알았다.
14세에 중국에 들어가니 유구국 사람이 특이한 기상의 정렴이 도착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와서 두 번 절하고 배우기를 청하였다.
"제가 점을 쳐보았더니 그 점괘에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중국으로 들어가 틀림없이 진인을 만날 것이라고 하였는데, 당신이 바로 진인이 아닙니까?"
이에 외국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찾아와서 배우려고 하므로, 정렴이 사방 이족의 말로 유창하게 응답해 주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고 이상스럽게 여겼으며,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불렀다. 정렴은 1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서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양주의 괘라리에다 살 곳을 정하였다. 어느 해 9월 하순에 늦게 핀 국화를 두고 시를 읊었다.
십구 이십구 모두 구로 된 숫자여서 구월이라 구일이 일정한 때가 없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모르지만 뜰에 가득한 국화만은 알도다
그의 동생 고옥이 화답하였다.
세상 사람들 중양절을 가장 소중히 여기지만 중양절에만 흥취를 길게 할 필요는 없어 언제나 국화를 마주보며 막걸리 마시면 구십 일 간의 가을 어느 날인들 중양이 아니랴
정렴이 본래 휘파람을 잘 불었다. 그의 아버지 정순붕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하루는 금강산에 놀러 갔다. 북창이 따라갔더니 정순붕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네가 휘파람을 잘 분다고 하였으나 내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이런 경치 좋은 곳에 와서 한 곡조 불어 보는 것이 좋겠다"
이튿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일찍 떠나려고 하니 중이 만류하였다.
"오늘은 비가 내려 높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오후 늦게는 틀림없이 날씨가 갤 것이다" 정순붕이 이렇게 말하고 마침내 청려장(명아주 대로 만든 지팡이)을 짚고 갔는데, 한낮이 되자 정말 날씨가 개었다. 정순붕이 중을 따라 올라가는데 산꼭대기에서 피리 소리가 울려 바위 골짜기가 모두 진동하는 듯하였다. 중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깊은 산속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지경에 누구의 피리 소리가 이렇게도 맑고 웅장한가. 틀림없이 신선이 부는 것이리라" 정순붕은 속으로 누 분다는 것을 알고 올라가서 보았더니 피리 소리가 아니고 정렴이 부는 휘파람 소리였다. 정렴이 불교에 마음으로 통하는 술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 요점이 되는 관건을 얻지 못하여 한탄하더니 어느 날 절에 들어가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사물을 관찰한 지 3, 4일 만에 문득 환하게 깨우치고 백리 밖의 일을 곧장 알아맞추기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맞아떨어져 백 가지에 한 가지도 어긋나지 않았다.
어느 날 그곳에 살고 있는 중이 찾아왔다. 정렴이 그를 보며 말했다.
"오늘 집에 있는 종이 술을 가지고 올 것이오"
잠시 후 그가 다시 놀란 얼굴로 다시 중에게 말했다.
"이상하기도 하군.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었소" 얼마 있다가 종이 와서 말했다. "술을 지고 오다가 고갯마루에서 바위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술병이 모두 깨졌습니다"
정렴이 항상 조용한 방에 거처하면서 장생불사하는 선약을 불을 때 만드는 법을 익히기도 하였다. 그 무렵 손님 한 분이 왔는데 가난한 선비였다. 한창 얼어붙는 겨울이어서 그 선비가 몹시 추워했다. 북창이 창고 곁에 있는 차가운 쇳조각을 가져다 겨드랑이 밑에 끼고서 다리미질하듯 왔다갔다 하다가 꺼내어 그 손님에게 주었더니 마치 활활 타오르는 화로같이 더워서 땀이 흘러 그 손님의 온 몸을 젖게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고질병을 앓은 지 몇 달이 되어 침과 약을 두루 써 보았지만 낫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북창이 앉아 있던 자리의 잔디 한 움큼을 뜯어다 손으로 문지르고 입으로 불어 따뜻하게 한 뒤 그것을 복용하게 하였더니 병이 금방 나았다.
또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이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 의원이 지어준 약이 효험이 없으므로 그 사람의 아버지가 북창에게 신기하고 특이한 술수가 있음을 익히 알고 북창에게 아들의 명수를 캐어 물었다.
"정해진 햇수는 이미 다 끝이 나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친구의 아버지가 울면서 구원의 손길을 뻗어 주기를 바라므로 북창이 그 정의를 가련하게 여겨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정 그러시면 저의 10년의 수명을 줄여서 어르신 아들의 나이에다 보태 드리겠습니다. 이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내일밤 삼경에 혼자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틀림없이 붉은 옷을 입은 중과 검은 옷을 입은 중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 앞에 가서 애절하게 간청을 하면서 어르신 아들의 목숨을 연장시켜 달라고 애원하되 중이 아무리 욕을 하며 내쫓더라도 물러나지 말고 아무리 지팡이로 때리더라도 싫어하거나 피하지 말고 정성을 들여 천번 만번 간곡히 빌면 소원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친구의 아버지가 북창의 말대로 밤이 되어 달빛을 의지하여 혼자 남산의 누에머리 봉우리에 올라가니 과연 두 명의 중이 있었다. 그들 앞에 나아가 공손히 절을 하고 울면서 사정을 고해 바치니 두 중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지나가던 중이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당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허망한 짓을 하시오. 당신 아들의 수명이 길고 짧은 것을 내가 어찌 알겠소. 빨리 물러가시오"
그 친구의 아버지는 못 들은 체하며 두 손을 모으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간절히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 사람은 미친 사람이니 때려서 쫓아 버리자"
중이 화를 내며, 마침내 지팡이를 들어 마구 두들겨 패므로 그 아픔을 참을 수가 없었지만 죽기로 버티면서 물러서지 않고 땅에 엎드려 울면서 애걸하였다. 그러기를 한참하고 있으니 검은 옷을 입은 중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는 틀림없이 정렴이 가르쳐 주고 인도한 것이다. 그 아이가 한 짓이 한심스럽기는 하지만 저의 수명 10년을 줄여서 이 사람의 아들 수명에다 보태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다"
붉은 옷을 입은 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하였다. 두 명의 중이 그제야 그 사람을 부축하여 일어나게 하고 위로하였다.
"잠깐 당신을 시험했을 뿐이오"
검은 옷을 입은 중이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붉은 옷을 입은 중에게 전해 주니 그 중이 받아서 달빛에다 대고 붓을 들어 글자를 쓰는 듯하더니 곧이어 말했다.
"당신의 아들은 지금부터 수명이 연장되었으니 돌아가거든 정렴에게 다시는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고 전하여 주시오"
그리고는 갑자기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붉은 옷을 입은 중은 남두였고, 검은 옷을 입은 중은 북두였다. 그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의 병이 점점 나아 정말 10년을 더 살았고, 북창은 세상에서 44년 동안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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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 맑고 티없는 거울과 움직임이 없는 잔잔한 물은 예로부터 맑고 고요한 심경의 비유이다.
노나라의 왕태라는 인물은 형벌로 다리가 잘리웠는데 학문과 덕망이 뛰어나기로 평판이 높았으며 그의 제자는 공자만큼이나 많았다. 공자의 제자인 상계는 그 불구자의 평판을 이상하게 여겨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는 왕태가 이미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훌륭한 인물이라고 역설하며 "그이는 천지 자연의 실상을 알아차리고 외물에 이끌려서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네. 만물의 변화를 자연 그대로 받아들여, 도의 근원을 지키고있는 분이야. 눈과 귀에 비치는 미추 따위는 개의치 않으며 만물을 한결같이 보는 까닭에 득실은 문제가 안되며 다리 하나쯤은 마치 흙덩이를 버린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거든" 또한 상계는 왕 태에게 제자가 많은 곡절을 물었다. 공자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이의 어느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심경 때문이야. 무릇 사람이 제 모습을 물에 비쳐 보고자 할 적에는, 흐르는 물이 아니라 잔잔하게 머물러 있는 물을 거울로 삼을 것 아닌가. 그와 마찬가지로 항시 변함이 없는 심사를 지닌 사람만이 남에도 마음의 평정을 주기 때문일세." 공자는 이렇게 평전된 마음을 잔잔한 물에 비유하고 있다.
또한 현자의 명징을 밝은 거울에 비유한 예를 들어보면, 신도가라고 하는 역시 형벌로 다리가 잘리운 선비가 자기의 스승 백혼무인의 덕을 찬양하여 가로되 "거울이 흐리지 않으면 먼지가 앉지 않거니와 먼지가 있으면 흐려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오랫동안 어진 사람과 같이 있으면 마음이 맑아져서 과실이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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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3. 비로자나부처님의 외출
앞니에 곰팡이가 생기는 까닭은
나는 나의 약점과 헛점을 잘 알기에 사람들 만나는데 기피증이 있다. 이는 '양두구육(양 양, 머리 두, 개 구, 살 욕)', 양머리 내걸고 개고기 팔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소심하다느니 아상(나 아, 바탕 상)이 높아서라느니 하는데, 그것도 아상이라면 아상이겠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닐진대 결코 바람직한 수행자의 자세는 아니다. 수없이 불호를 불러 본들 나는 패배자다. 또한 나는 사이비 승려다. 수도와 포교에 열심이지 못하고 양심적인 정의감도 부족하고 기도, 불사도 헌신적이지 못하며 실천수행도 마찬가지다. 그저 삭발염의한 다른 수행인들에게 누가 될까봐 조심조심 세상을 사는 나는 이중인격자다. 나는 위선자요, 우울증환자다. 나는 슬픔을 팔아 고통을 사는 어리석은 놈이다. 나는 나 혼자서 거드름을 피우지만 실제로는 아양승(벙어리 아, 양 양, 중 승)이다. '아양승'이란 어리석어 선과 악의 계율을 분별치 못해 잘못을 범하고도 참회할 줄 모르는 게, 마치 염소가 죽어도 꽥 소리 못내는데 비유하는 말로 저질승을 일컫는다. 나는 오늘밤 저질승 하나를 일봉타살(한 일, 받들 봉, 칠 타, 죽일 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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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1장 제12대 인종
서른 다섯 중년 왕비의 출산
문정왕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중종이 장경왕후 윤씨의 뒷자리를 이를 계비를 간택하려고 간택령을 내렸을 때, 윤지임의 딸 윤씨는 와병중이었다. 그녀의 병세는 거의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때 용하다는 시골 점쟁이 한 명이 서울에 와 있었는데, 그는 스스로 점을 쳐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귀한 손님이 맨 먼저 오겠구나."
첫새벽에 찾아온 인물은 윤지임이었다. 하인이 점쟁이에게 물었다.
"겨우 종 한 명만을 데리고 왔을 뿐인데 무슨 귀한 손님입니까?" "아니다. 이분은 귀인이다."
윤지임은 점쟁이에게 사주를 내보였다. 위독한 딸 윤씨의 사주였다.
"병이 매우 위독하기에 살 수 있는지 보러왔소."
"이 사주는 국모의 사주입니다. 나리는 임금의 장인이 될 것이오."
과연 얼마후 윤씨는 회복되었고 그 해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열일곱 한창 나이의 윤씨가 왕비로 간택되자 궁중 한 구석에서는 우려가 일었다. 그녀가 왕자를 낳을 것에 대한 우려였다. 윤씨가 왕자를 낳을 경우 궁중의 역학관계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문정왕후 소생의 왕자가 장경왕후 소생의 원자 호를 대신해 중종의 뒤를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문정왕후는 왕비로 책봉된후 10면이 지나도록 왕자를 낳지 못했다. 그러던 윤씨가 비로소 꿈에도 바라던 아들을 낳은 것은 중종 29년, 왕비로 책봉된지 무려 17년 만의 일이었다. 그때 문정왕후 윤씨도 서른다섯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윤씨 소생의 왕자는 태어나자마나 경원대군에 봉해졌다. 경원대군이 태어났을 때 세자의 나이 이미 스무 살이었다. 강보에 싸인 아이와 왕권을 다툴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면 왕위를 이을 인물은 성년의 세자였다. 누가 보더라도 성인인 세자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집념이 강한 문정왕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보에 싸인 경원대군을 임금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윤씨는 경원대군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세력을 길렀다. 그리하여 경원대군이 열 살이 될무렵 문정왕후는 자신을 지지하는 당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당을 소윤이라하는데,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당수였다. 이들을 소윤이라 칭한 것은 윤자를 뜨는 또다른 당, 즉 대윤이라 불리던 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윤의 영수는 세자 호를 낳다가 사망한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이었다. 장경왕후 윤씨가 문정왕후 윤씨보다 먼저 왕비가 되었으므로 장경왕후 계열의 당을 대윤, 문정왕후 계열의 당을 소윤이라 부른 것이다. 윤임은 장경왕후 소생의 왕자이자 자신의 외조카인 세자를 지지했다.
문정왕후의 후원을 받는 소윤은 차차 강성해지면서 대윤과 소윤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세자를 지지하는 대윤과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소윤의 다툼은 차기 왕권을 둘러싼 당쟁이었다. 왕권을 둘러싼 두외척간의 당쟁은 중종이 참석한 경연에서 공공연히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치열했다. 중종 38년 대사간 구수담이 조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풍문에 의하면 간사한 의논이 비등하여 '윤임을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을 소윤이라 하는데 각각 당여를 세웠다'고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있어 어찌 붕우와 족류가 없겠습니까만 하필 왕실의 친척이라는 것을 지목하여 당여라는 의논이 비등하니 매우 음험한 사론입니다.
"백돌아! 백돌아!"
대윤과 소윤 간의 당쟁의 동기는 소윤에게 있었다. 소윤이 이미 책봉된 세자를 끌어내고 경원대군을 세우려 했던 것이 당쟁 발생의 시초였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자를 갈아치우려했기 때문에 세자는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문정왕후가 세자를 불에 태워 죽이려 했다고 전하는 야사는, 당시 세자가 당한 핍박의 강도를 말해주고 있다. 야사는 어느 날 밤 세자가 잠을 잘 때 갑자기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에서 불이 났다고 전하고 있다. 세자빈이 불길에 놀라 탈출하려 했으나 문이 밖에서 잠겨 있었다. 세자가 세자빈에게 말했다.
"내 전날에 죽음을 피한 것은 부모님에게 악한 소문이 돌아갈까 두려워서였는데, 이제 밤중에 깊은 잠을 자다가 불에 타 죽었으면 그런 소문은 퍼지지 않을 것이니 나는 피하지 않겠소, 빈궁이나 피해 나가시오."
지아비가 불에 타 죽겠다는데 세자빈이 홀로 살겠다고 나갈 수는 없었다. 놀란 시종들이 피하려고 권해도 세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자가 불길을 빠져 나가려 하지 않자 시종들은 중종에게 달겨가 고했다. 중종이 급히 달려와보니 둥궁이 불바다였다.
"백돌아! 백돌아!"
다급해진 중종은 세자의 아호를 불렀다. 세자는 그제서야 아버지가 부르는데 나가지 않고 타 죽는 것 또한 불효라는 생각에 불길을 헤쳐 나왔다고 한다. 이 사건을 '작서의 변'이라고 한다 .문정왕후가 쥐꼬리에 불을 붙여 동궁에 들여보내 불이 났다는 뜻이다. 작서의 변은 이보다 훨씬 전인 중종 22년에도 있었다. 세자의 열두번째 생일날 사지와 꼬리가 잘리고 입과 귀, 눈을 불로 지진 쥐 한 마리가 동궁의 북쪽 정원 은행나무에 걸린 것이다. 이때는 문정왕후가 아직 아들은 낳기 전으로,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아들 복성군과 함께 서인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그러나 사건 발생 5년 후에 범인이 권신 김안로의 아들 김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거듭되는 작서의 변은 어머니가 없는 세자의 지위가 얼마나 위태로왔는지를 잘 말해준다.
불분은 쥐를 동궁에 들여보낸 장본인이 문정왕후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것은, 세자 핍박의 한가운에 문정왕후가 있다는 증거였다. 중종은 세자를 사랑했으나 문정왕후도 총애했기 때문에, 문정왕후를 추궁하기 보다는 감싸안으려 했다. 동궁에 불이 났을 때도 중종은 이 불이 방화가 아니라 한 궁녀의 실화라고 주장에 파문을 가라앉히려 했다.
"전에 동궁에 불이 난 사건을 끝까지 추문하려 했으나 일이 분명하지 못해서 추문하지 않았다. 불이 처음 났을 때 내게 고한 자들이 무수비의 방에서 불이 났다고 하기에 내가 직접가서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세자가 불을 피해 앉아 있기에 데리고 대내로 왔는데 그 불은 당초 밖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환관들에게 들어보니 한 방 안에 네 명의 잡물을 두었는데 덕지라는 여종의 제 집의 목면을 그 방에 보관해두고는 밤에 살펴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등불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 여종이 열쇠를 쥐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나 문을 열 줄 몰랐다. 문을 바로 열지 못했으므로 불을 즉시 끄지 못하여 불길이 매우 치열해졌다고 한다. 따라서 그 불은 처음 잠긴 방에서부터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중종은 문정왕후를 두고 떠도는 항간의 소문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중종은 항간의 소문처럼 불이 밖에서 난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났으며, 문이 밖에서 잠겨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 말했지만, 덕지가 문을 열 줄 몰랐다면 어떻게 잠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기초적 의문도 해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말은 설득력이 없다. 중종마저 세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으니 세자의 지위는 점점더 위태로워질 수 밖에 없었다. 조정 신하들은 대윤과 소윤으로 갈려, 차기 임금을 미는 불안한 게임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다. 중종이 사망하기 두달전인 재위39년 9월에도 이 문제가 다시 논란이되었다. 영사 홍언필은 대윤,소윤에 대해 중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대윤 당이라는 것은 동궁을 부호하고 소윤 당이라는 것은 대군에게 마음을 두었다 하는데, 위에 주상이 계신데도 사사로이 동궁을 부호하는 자는 간사한 꾀를 형용할 수 없는 소인일 것이고 대군에게 마음을 두는 자라면 패역의 정상을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릇 이런 말이 도는 것은 동궁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인데 동궁에게 조만간 후사가 있게 되면 종사와 신민의 복이겠고, 불행히 후사가 없으면 종사의 만세를 위한 계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대군이 많지 않고 한 사람이 있을 뿐이므로 형제 사이에 조금도 의심이 없는데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홍언필의 말처럼 문제는 세자에게 후사가 없다는 데 있었다. 당시 세자의 나이 이미 서른이었으나 불행히 후사가 없었다. 만약 세자에게 후사가 있었다면 소윤은 발호하지 못했을 것이며, 설혹 세자에게 이상이 있더라도 세손이 뒤를 이를 것이므로 세자를 흔들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나 세자는 정비 인성왕후 박씨와 후궁 귀인 정씨를 두었음에도 끝내 후순을 생산하지 못했고, 그 공백을 문정왕후의 소윤이 파고들었다. 세자만 없으면 홍언필의 말대로 "대군이 많지 않고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으므로 유일한 대군인 경원대군이 뒤를 이을 것이었다. 이즈음에는 중종도 훗날 두 당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질 것을 염려할 정도로 중종의 후사를 둘러싼 당쟁은 심각하였다.
"소인이 군자를 해칠 때에는 반드시 붕당이라 지칭하여 일망타진하니 지극히 염려스럽다."
중종의 이 우려는 정확한 예언이었다. 그러나 당쟁에 대한 중종의 한계는 뚜렸했다. 중종은 과거 조광조 중심의 사림파는 명분도 신의도 저버린 체 과감하게 제거했으나, 세자의 지위를 흔드는 당파의 제거에는 소극적이었다. 그 소극성 때문에 세자는 혼란스런 조정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되었다. 중종이 재위 39년 11월 사망함으로써 세자 인종이 즉위했으나, 그는 모든 백성의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고 더욱이 소윤에게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었다. 인종의 즉위로, 소윤과 인종의 정면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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