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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18 호
단기 4340. 12. 30 (음력 11. 2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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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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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계절출판사는 십대들에게 자양분이 될 수 있는 본격문학선 ”사계절 1318문고”를 출간하여 1318 독자들과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랑과 성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힘입어 (주)사계절출판사는 우리 작가들에게 청소년문학의 창작 정신을 북돋우고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을 발굴하기 위해 사계절문학상을 제정했습니다. 한국 청소년문학의 앞날을 이끌어 나갈 역량 있는 작가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모집 부문 13∼18세 청소년이 읽을 수 있는 장편소설로, 미발표 창작물이어야 합니다.
>> 원고 분량 200자 원고지 700매 안팎
>> 시상 내역 대상:1편 상금 2,000만원(선인세)
>> 응모 자격 기성 및 신인 작가
>> 응모 마감 2007년 12월 31일까지
>> 응모 방법 원고는 반드시 A4용지로 출력해야 하며, 우편으로만 접수합니다. 디스켓, 이메일 등은 받지 않습니다. 응모시 ”제6회 사계절 문학상 응모작”임을 명시하시고, 연락처(전화번호, 주소)를 꼭 남겨 주십시오. 응모된 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 접수처 (우)413-756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파주출판도시 513-3 (주)사계절출판사 청소년문학팀 사계절문학상 공모 담당자
>> 심사 예심과 본심으로 나누어, (주)사계절출판사가 위촉한 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칩니다 심사 경위는 (주)사계절출판사 홈페이지에 밝힐 예정입니다.
>> 발표 2008년 3월 -입상자에게는 개별 통지하며, (주)사계절출판사 홈페이지에 게재합니다. 저작권 등 수상작은 본사에서 발간하는 ‘사계절 1318문고’로 출간합니다. 대상 수상 작품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출판권은 5년간 (주)사계절출판사가 소유합니다.
>> 문의처 자세한 내용은 청소년문학팀으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전화 (031)955-8568 청소년문학팀 사계절문학상 공모 담당자
* 4회 대상 수상작 『몽구스 크루』 http://www.sakyejul.co.kr/event/literature/literature_1.asp?pPList=2005년%20[제4회]
* 2회 대상 수상작 『푸른 사다라』 http://www.sakyejul.co.kr/event/literature/literature_1.asp?pPList=2003년%20[제2회]
* 1회 대상 수상작 『사슴벌레 소년의 사랑』 http://www.sakyejul.co.kr/event/literature/literature_1.asp?pPList=2002년%20[제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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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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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양을 찾는 것은 사냥 중에서 가장 쉬운 사냥./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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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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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혁명에 대하여
일모도원
중국 초나라 평왕은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죽였다. 오자서는 평왕의 체포명령을 피하여 도망을 갔고 우여곡절 끝에 오 나라에 갔다. 그 곳에서 그는 이를 갈면서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15년의 세월이 흐른 후 오자서는 전략가 손무의 도움으로 초나라에 쳐들어가 수도를 점령하였다. 복수심에 불탄 그는 이미 10년 전에 죽은 평왕의 묘를 파헤쳐 그 시체에 매질을 하였다. ‘시체에 매질하기 300대. 그 때서야 멈추다’라고 사마천은 사기에 적었다. 이에 오자서의 친구인 신포서는 이 말을 듣고 “아무리 부형의 원수라고 하지만 너도 한때 평왕의 신하였는데 시체에까지 매질한 것은 너무하지 않았느ㅑ?“고 따져 물었다. 오자서는 “해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그래서 내가 천방지축 거꾸로 다니면서 이치에 어긋난 행동을 하였을 따름이다“고 말했다.
결론
혁명이란 순리에 따라 침착하게 진행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해야 할 일은 많고 남아있는 시간은 짧은 것이다. 짧은 시간 내에 큰 업적을 만들어내려 하니 무리가 따르고 과격한 행동이 일어난다. 역사는 항상 교훈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혁명을 주동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혁명도 일어나는 모양이다.
혁명은 부드러운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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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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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김재은
제5장 - 교육
사고를 방해하는 것(III)
1. 교육은 사고의 장애가 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들이 '올바른 사고 방법'을 몸에 익혀 가는 데 있어서 가장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교육'이라는 장애다. 교육이 정신의 기생충'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결코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상으로는 교육이란 지성에 탄력성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신적 훈련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교육은 정신을 단련시키는 대신에 정신을 지치게 하고, 탄력성을 줄이는 구실을 하는경우가 많다. 두뇌라고 하는 것은 쓰면 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머리는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생각은 기정 사실이다. 사람은 뭔가를 생각하면 할수록 그만큼 '사고'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 만일 생각하는 습관을 만드는 수단으로서의 구실을 한다면 아무런 문제는 없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는 바로 그 반대가 아닐까?
"당신은 자기가 받은 교육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여기서, 우리들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불만은 우선 일단 제쳐놓기로 하자.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은 가르치는 쪽에 대한 불만에 관해서이다. 독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불만스러운 것은 당연하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라블레(1484-1554, 프랑스의 작가로서 "가르강튀아 이야기"라는 소설의 작가), 몽테뉴(1533-1592, 문예부흥기의 프랑스의 모랄리스트, 주요 저서는 "수상록"), 존 로크(1632-1704, 영국의 계몽철학 및 경험의 창시자), 펜롱(1651-1715, "덴마크"의 작가), 루소(1712-1778, 프랑스 계몽기의 사상가), 이러한 여러분의 사상가들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당신은 반드시 마음속에 짚이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교육에 대해서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세기의 나타난 이름 있는 교육자들도 대개는 교사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또 그것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교육의 어떠한 점이 그들로 하여금 뛰어난 지성이 결함투성의 교육의 희생물이 되었으며, 발전이 저해 당했다고 할 수가 있다. 결함투성이의 교육! 이것은 루소나 페스탈로치(1746-1827, 스위스의 교육가) 시대의 옛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이에 대한 대답은 '노!'이다. 현재에도 뜻있는 교사들은(그들 자신이)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다. 한 발 양보한다 해도 교육은 아직까지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 커다란 갭을 안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창조적 사고'를 향상시키는 데 있어서는 교육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어쨌든 우리들의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 이야기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앞에서 '장애'라는 말을 사용했던 사실을 상기해 주길 바란다. '장애'는 이런 교육을 계속 받으면 도리어 나빠진다는 관점에서 한 말이다. 예를 들면, '교육'을 받았던 탓으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열등감만 자꾸 심해진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도 비교육(무교육이 아니고)의 교육적 악효과의 한 실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모든 나라의 교육에 결함이 있을 겁니다"라고. 그렇다고 여기서 모든 나라의 교육의 결함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미국이나 프랑스의 경우만을 예를 들어서 검토해 보자. 미국의 교육은 지나치게 실제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문화라는 것은 소수의 엘리트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의 경우는 미국과는 정반대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문화'를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나머지 단순한 지적 만족감을 추구하여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실제적인 의무는 가볍게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간에 올바른 사고의 능력이 손상되고, 따라서 사람들은 최초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평생 동안 노력해도 안된다는 비극 속으로 빠져들게 되기가 쉽다.
2. 프런티어 정신의 폐해-미국의 교육(1)
미국의 교육은 오늘날까지도 개척자(또는 그 후손)를 위한 교육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외국인은 누구 나가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서부만이 아니고 고층 빌딩이 하늘을 찌르는 대도시라 해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미국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개척자의 습관이나 기질을 이어받고 있다. 미국인 집의 문패 하나만 보아도 곧장 알 수가 있다. 통나무 끝에 매우 우편함은 근대적인 롱 아일랜드의 한복판에서도 볼 수가 있다. 철저한 레이디 퍼스트의 풍속도 따지고 보면 여성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대접을 받던 개척 시대의 유물이라 할 수가 있다. 개척자들이 만든 학교의 목적은,
#1 우선 학생의 육체를 건강하고 억세게 단련시키는 것. #2 다음으로 건장한 육체에 어울리는 건전한 정신과 강인한 의지를 기르는 것. 이라는 것이다.
미국 사람에게 있어서 건강한 육체로 단련해야 한다는 것은 인디언과 싸우면서 농장을 개간하고 목장을 이룩하던 저 프런티어 이래의 전통이며 또한 본능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의 캠프 생활에의 정열이 독립 자주의 정신과 결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스포츠는 학교 생활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고 물론 그것이 나쁠 것은 없지만 모든 일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미국인들이 이 점에서 생각이 부족한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어떤 학교를 방문했을 때, 그 학교의 교장은 제일 먼저 나를 그들 학교의 '신성한 장소'로 안내해 주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놀랍게도 은으로 만든 받침대 위에 야구공이 소중하게 모셔져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공에 대해서 경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 지나친 스포츠 우선-미국의 교육(2)
어떤 일이나 정도가 지나친 것은 옳지 못하다. 미국인이 스포츠를 즐긴다는 것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학교 교육에 있어서의 지나친 스포츠 편승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미국의 대학 신문은 스포츠 신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노트르담 대학은 카톨릭 계통의 대학이지만 일반적으로 '미식축구가 센 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기야 체육도 어느 모로 보아서는 기술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체육을'문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우리 나라의 교육은 체육과 문화를 잘 조화시키는 시도에는 성공하지를 못한 것 같다"라고 불평을 하게 된다. 또한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당신네 나라(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말재주가 뛰어나더군요. 서로 대화를 해보면 매우 재치 있는 표현을 능숙하게 하는데 그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프랑스의 학교에서는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서 밤 여덟 시까지 사이에 레크리에이션 시간이라고는 불과 두 시간 정도밖에 없습니다. 프랑스말로 '공부한다'는 말 '뜨라바이에'는 영어의 일하다에 해당되는 말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운동장이나 보트를 타는 강에서는 '뜨라비아에'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렇군요" "프랑스의 소년들은 말재주는 뛰어나지만 가슴이 좁지요. 미국의 소년들은 말솜씨는 서툴지만 체격만은 훌륭하더군요. 장점도 있고 결점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학교는 실생활에 들어가지 전에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만 일반적인 교육이란 생활을 위한 준비라는 점에서는 직접적인 효과가 부족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런 점을 탐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매우 실제적인 것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화'와 같은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효과가 없는 것을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보지를 않는다. 스포츠 우선이 '공인'되고 있는 이 나라의 교육 자체도 미국적 기질을 만드는 데 중요한 구실을 맡고 있다고 하겠다. 미국인들은 뭐든지 세계 제일이 아니면 마음이 편치 않은 민족이다. 그러면서도 사상이나 예술의 분야에서는 의외로 욕심이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미국인들은 문화라고 하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민족이다. 잘못된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4. 점점 젊어지는 국민 미국의 교육(3)
미국인들은 언제나 젊다든지, 미국은 젊은이의 나라라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과연 젊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말은 어느 정도 핵심을 찔러 주고 있기는 하지만 의아스러운 점이 없지는 않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영광스러운 여러 인물들을 한 번 보라. 그들, 즉 과거의 미국인들은 결코 '젊지는' 않았다. 미국은 그 역사의 후반에서 젊어진 것이다. 뜻있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개탄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서 '어른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오늘날 끈질기게 추진되고 있으나 이러한 노력도 대중의 저항에 의해서 그리 신통한 성과는 올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교육은 대중을 향상시키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교육방법이 도리어 대중에 의해서 대중이 하라는 대로 마구 휘둘려지고 있는 것 같다. 대중이란 직접적이고 실리적이며 실제적인 것만을 바라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다. 교육이 현실성의 편중과 손을 끊지 않는 한, 세부적인 방법론 같은 것을 아무리 주물럭거려도 별로 큰 효과를 바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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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초가 되다
본뜻 : 녹은 초처럼 되어 흐물거리거나 보잘 것 없이 되었다는 뜻이다.
바뀐 뜻 : 아주 맥이 풀어져 힘을 못쓰고 늘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비슷한 말로는 '파김치가되었다'가 있다. 파는 평소에 빳빳하게 살아 있는 게 특징인데 갖은 양념을 해서 김치를 담가 놓으면 양념이 잦아들면서 까부라져서 풀이 죽게 마련이다.
"보기글" -우리 애가 2박3일 동안 여행을 다녀오더니 아주 녹초가 됐어요 -하루 종일 밭일을 했더니 저녁에는 녹초가 되서 꼼짝도 못하겠더라
덜미를 잡히다
본뜻 : 몸의 뒤쪽을 덜미라고 하는데 전체를 가리킬 때는 뒷덜미라 하고, 목 부분만 가리킬 때는 목덜미라고 한다.
바뀐 뜻 : 뒷덜미를 잡히면 힘을 쓸 수가 없게 되므로 뒷덜미를 잡은 사람의 뜻대로 끌려가게 된다. 그러므로 덜미를 잡힌다는 말은 '약점을 잡히다' '꼬리를 밟히다' '어떤 단서를 제공하게 되었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보기글" -요리조리 수사망을 빠져나가던 그가 드디어 덜미를 잡혔다 -그 녀석이 흡연 사건으로 한 번 덜미를 잡히더니 묻지도 않은 다른 일까지 줄줄이 실토를하더라구
꽈리
울타리 근처에 빨갛게 익은 꽈리주머니를 열면 주홍빛 열매가 들었다. 바늘로 씨앗을 빼내고 열매 껍질을 물에 씻어서 입에 물고 바람을 불어넣으면서 살짝 깨물면 소리가 났다. 재미있는 가을놀이여서 아이들은 ‘때왈’ 부는 소리를 크게 내는 데 열중하곤 했다. 이 놀이가 너무나 유행하여 한참 동안 고무로 만든 ‘꽈리’를 팔기도 했다.
문헌에는 15세기에 ‘ 리’가 나타나고, 17세기에는 ‘ 아리’가, 20세기 들어 다시 ‘꽈리’가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변화 과정이 분명한 말이다. ‘꽈리’는 주로 중부지방인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등에서 많이 쓴다. ‘까리, 꽤리’ 등을 함께 쓴다. ‘꼬아리’는 ‘꽁아리’와 함께 북녘에서 많이 쓰는 형태다.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는 ‘땅깔, 땡깔, 땡꽐’을 주로 쓰고, ‘뚜깔’도 쓴다. 경북 쪽에서는 ‘뚜가리, 뚜과리, 뚝과리’라 한다. 전라 방언에서는 ‘때깔, 때꽐, 때왈’을 주로 쓰고, ‘꽈리’가 줄어든 ‘꽐’과 ‘하늘때왈, 하늘떼꽐’ 등도 쓴다. 제주 지역에서는 ‘부께, 푸께, 푸게기, 푸께기, 불처귀, 풀처귀, 푼철귀, 하늘푸께’라 일컫는다.
‘꽈리’는 꽈리주머니가 등불이 담긴 초롱 같다고 하여 한자어로 ‘등롱초’(燈籠草)라 하고, 빨간옷을 입은 낭자와 같다고 하여 ‘홍낭자’라고도 한다. 한의에서는 ‘산장’(酸漿)이라고 한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 계절에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우리 식물이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교육과 새말
사람들의 관심을 반영하듯 교육 제도가 바뀔 때마다 새말이 생긴다. 현재 사회에서 활동하는 기성세대들은 ‘본고사 세대’ 혹은 ‘수능 세대’다. 얼마 전 2008년부터 대입 제도가 바뀐다는 발표가 나자 ‘죽음의 트라이앵글 세대’, ‘저주받은 89년생’, ‘배틀로열 세대’ 등의 새말이 쏟아졌다. 고교 내신 성적, 대학 수학능력 시험, 논술 고사 세 가지를 두루 챙겨야 하는 새로운 입시 제도를 처음으로 적용받는 1989년생들부터는 잔인한 영화의 내용처럼 치열하게 같은 학급 친구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반영하는 말들이다.
공교육 내실화가 이상에 머물고 점점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온갖 과외가 성행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됐고, 최근에는 일정한 장소에 묵으면서 공부하는 ‘기숙 과외’까지 생겨났다. 부모와 함께 놀러가서 묵을 법한 콘도에 과외 선생님과 함께 머물면서 방학 내내 갇혀서 공부를 하는 어린 학생들이 측은할 따름이다. 이렇게 의존적으로 공부를 한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더 심각한 것은 이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들어간 대학이 ‘주차장 대학’이 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주차장 대학’은 결혼이나 졸업 따위 적절한 시기를 놓친 사람을 속되게 ‘똥차’라고 일컫는 데서 비롯된 새말이다.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서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도 이를 미루고 계속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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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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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7. 군인은 군인의 임무에 따른 뿐이다(위청, 곽거병)
1) 흉노 토벌의 명자(위청)
어두웠던 소년 시절
위청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기구했다. 그의 아버지는 정계라는 사람인데 한무제의 동생이던 평양공주의 집사로 지내다가 그 집의 첩인 위오와 눈이 맞아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청이었다.(그의 동복 누이는 후에 무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던 위자부였다) 청은 그 집에서 자랐는데, 종살이를 해야만 했다. 나이가 들어서야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 양치는 소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청이 다른 사람을 따라 감천궁의 감옥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죄수 중에 한 사람이 청의 관상을 보더니, "너는 귀인의 상을 가지고 있다. 벼슬은 제후에 이르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청이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종놈으로 태어나 매나 맞지 않고 욕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제후가 되다니 말도 안됩니다." 청은 장년이 되자 자기가 태어났던 평양공주의 집에 호위병으로 들어갔다. 당시 무제는 장모나 부인 등 주위에 온통 드센 여자들만 있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은 오직 누이 평양공주밖에 없었다. 평양공주는 무제를 자기 집에 불러 자주 잔치를 벌여주었는데, 어느 날 위자부로 하여금 술시중을 들게 했다. 무제는 그녀를 몹시 마음에 들어했다. 이를 눈치챈 평양공주는 그녀를 궁으로 보내 후궁으로 삼게 하였다. 이때부터 청도 위자부의 성을 따라 위청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그때 황후는 아기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위자부가 무제의 사랑을 받고 그 뒤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황후가 그 사실을 알고 매우 질투하였다. 화가 몹시 난 황후는 보복하기 위해 위청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위청이 잡혀 들어가 목숨이 위태로울 때 위청의 친구인 공손오가 청년들을 이끌고 달려와 그를 구원해줬다.
대장군 위청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위청을 보호해주기 위해 그를 불러들여 벼슬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위씨의 동복 형제 모두에게 벼슬과 상금을 내렸다. 공손오도 위청을 도와준 공로로 벼슬을 얻었다. 몇 년 후 위청은 드디어 장군이 되어 흉노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위청은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장군이었다. 그 이듬해에 위청의 누이 위자부는 아들을 낳고 정식으로 황후가 되었다. 이후에도 위청은 흉노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이에 황제는 위청에게 엄청난 땅을 주고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한무제 5년 봄, 무제는 다시 대규모의 흉노 토벌을 결심하고 거기장군 위청에게 기병 3만을 이끌고 출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위청의 목표는 흉노의 우현황이었다. 그런데 우현왕은 한나라 군사가 어차피 여기까지는 오지 못하리라 업신여기고 본영에서 술에 만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 군사는 전격적으로 야습하여 우현왕을 일거에 포위했다. 그러자 우현왕은 당황하여 애첩 하나와 수백의 정예만을 데리고 야음을 틈타 포위망을 돌파하여 간신히 북방으로 도주했다. 한나라 병사들은 수백 리나 추적했으나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한군은 우현왕의 부왕 10여 명, 흉노의 남녀 1만 5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가축 수십만 두를 포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위청이 국경의 요새까지 철거해 버리자 무제는 즉각 위청을 대장군으로 승격시켰다. 이렇게 하여 모든 장군의 군대는 위청의 지휘하에 들어오게 되어 그는 대장군의 격식을 갖추고 늠름하게 장안으로 개선했다. 실로 오랜만에 흉노를 대파한 것이었다. 이때 무제는 친밀하게 말을 건넸다.
"대장군 위청, 그대는 스스로 병사의 선두에 서서 크게 승리하고, 흉노의 왕 1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그대에게 6천 호를 더 하사함과 아울러 그대의 아들 모두에게 제후의 직위를 주겠노라." 그러나 위청은 굳이 사양했다. "신은 황송스럽게도 장군으로 등용되어 폐하의 위광에 힘입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오나 이는 오로지 장수들의 분전의 결과이옵니다. 지금 폐하께오서는 저에게 영지를 늘려주시온 데다가 아직 나이도 어리고 아무런 공도 없는 변변찮은 자식놈들에게까지 황송하게도 제후로 봉하시겠다 하시었습니다. 하오나 이는 저를 장군으로 임용하시어 장병의 사기를 돋구시려는 의도에 어긋나는 처사가 아니시옵니까. 어찌 이러한 은혜를 받자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무제가 대답했다. "아니, 나도 장수들의 전공을 잊은 것은 아니오. 당장이라도 조처할 작정이오."하고는 바로 다음과 같은 조서를 어사에게 내렸다. "호도군위 공손오는 세 차례 대장군을 따라 흉노를 쳤고, 본대를 잘 원호하여 부대장과 함께 적을 생포했다. 이로써 1천 5백 호의 영지를 주고 합기후에 임명한다. 도위 한열은 대장군을 따라 흉노 우현황의 본영을 습격하여 백병전을 결행했다. 이로써 1천 3백 호위 영지를 주고, 용액후에 임명한다. 기장군 공손하는 대장군을 따라 적의 부왕을 잡았다. 이로써 1천 3백 호의 여지를 주고 남교후에 임명한다. 경거장군 이채는 두 번 대장군을 따라 적의 부왕을 잡았다. 이로써 1천 6백 호의 영지를 주고, 낙안후에 임명한다." 이렇게 하여 모든 장수에게도 영지와 제후의 직위가 내려졌다.
부하를 아끼는 마음
이듬해 봄, 대장군 위청은 또다시 흉노 토벌에 출격하여 수천 명을 목베었다. 또다시 한 달 후, 토벌에 나선 위청은 수급과 포로를 합해 1만여의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이 무렵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우장군 소건과 전장군 조신의 군사 3천여 기가 단독으로 선우의 주력군을 만나 하루 동안의 격전 끝에 전멸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조신은 원래 흉노 출신으로 한나라에 귀순해서 부장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고전의 틈바구니에서 흉노로부터 끈질긴 투항 권유를 받은 끝에 드디어 나머지 병사 8백을 데리고 선우에게 항복했다. 또한 우장군 소건은 전 병사를 잃고 제 몸 하나만 도망쳐 대장군에게 돌아왔다. 당연히 소건은 책임이 문제되었다. 위청은 부하들을 모아 놓고 그 처리에 대해 의논했다. 한 부하가 입을 열었다.
"대장군께서는 출진한 이래 부장을 벤 적이 없습니다. 지금 소건은 군을 버린 것입니다. 이 기회에 그를 베어서 장군의 위광을 보이셔야 합니다."그러나 다른 부하들은 반대했다. "그것은 안됩니다. 소군이 아무리 견고해도 대군에게는 대적하지 않는다는 것이 병법의 상식입니다. 소건은 겨우 수천의 병력으로 선우의 수만 대군과 대적하여 분전하기를 하루 남짓, 병사를 모조리 잃으면서도 항복치 않고 스스로 귀대한 것입니다. 만일 이를 문제삼아 처형시킨다면 금후 이같은 경우에 돌아오지 말라는 것을 뜻합니다. 절대 베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위청이 결단을 내렸다. "나는 폐하의 친척이기 때문에 장군직을 명령받고 있는 자이다. 내 위엄 따위를 문제삼지 말라. 위엄을 보이라는 의견은 말도 안된다. 그야 부장을 베는 것도 내 직권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폐하의 은총을 받들고 있을수록 요새 밖의 땅에서 멋대로 주벌을 행하기는 싫다. 폐하께 이러한 사정을 상세히 보고 드린 연후에 재가를 받도록 해야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하로서 권한을 조심하는 것이 될 줄 아는데 어떻게들 생각하는가?"
그러자 모두 찬성했다. 그리하여 소건은 목숨을 건지게 되어 황제에게 보내어졌고, 전투를 중단한 채 국경 안으로 철수했다. 서울로 송환된 우장군 소건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평민이 되었다.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위청은 흉노 토벌에서 귀환하여 천금을 하사 받았다. 그리고 당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어 있던 평양공주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옛날 위청은 평양공주의 집에 노예의 신세나, 혹은 기껏 호위병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이제 주인 마님을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한편 그 무렵, 무제의 마음은 위청의 누이인 위황후를 떠나 왕부인을 총애하고 있었다. 이때 영승이라는 자가 위청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군은 뛰어난 공훈도 없이 1만 호의 녹을 먹고 자제들은 셋이 모두 제후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만 한 가지, 귀공이 황후의 집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폐하는 지금 왕부인을 총애하시지만 왕부인의 일족은 아직 불우한 채로 있습니다. 하사금 천금으로 왕부인의 부모를 위해 장수를 축수하는 잔치를 베푸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위청은 그 말을 따라 5백 금을 들여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 소문을 들은 무제는 기뻐하면서 위청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위청은 영승의 진언을 그대로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무제는 영승을 동해군의 도위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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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3부 활성산소 피해를 최소화한다 제 3의 항산화벽
우리 몸을 크게 2부분으로 나누면 하나가 세포 안부분이고 다른 하나가 세포 바깥부분이다. 예를 들어 혈액은 세포 바깥쪽이다. 뇌나 척수를 흐르는 뇌척수액, 관절 내의 관절액도 전부 세포바깥에 위치한다. 이곳 역시 프리라디칼의 공격 대상이다. 세포 내부에는 프리라디칼에 의해 공격당하는 것을 막아 주는 SOD, 카타라제, 글루타치온 페록시다제 같은 막강한 항산화 방어벽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세포 바깥에서는 큰 작용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첫째, 세포 밖에서의 글루타치온 페록시다제의 활동력은 매우 약하며 둘째, 카타라제는 세포 밖에 존재하질 않고 셋째, SOD 역시 아주 미미한 정도의 양밖에 되질 않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세포 안에는 많지만 세포 바깥에는 거의 없거나 적은 양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포 외부에는 다른 항산화 방어기전이 있다. 이들은 세포 바깥 곳곳에 항산화벽을 치고 그 지역을 방위하는 역할을 한다.
혈액이 녹슬지 않게 하는 지역방위군, 토코페롤과 비타민 C
상수원에서 물이 수도관을 통해 각 가정으로 가듯이 음식에서부터 흡수되거나 체내에서 만들어진 지방질들이 필요한 조직 세포로 이동되기 위해서는 혈액을 통해 운반되어야 한다. 그런데 기름 성분인 지방질이 혈액을 타고 잘 흐르도록 하기 위해 단백질이 붙어 운반하게 된다. 지방에 단백질이 붙은 형태라서 지질단백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혈액 속에는 여러 가지 혈중 지질단백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음식으로부터 섭취되어 소장에서 조직으로 운반되는 카이로마이크론(음식으로 섭취한 지방질을 장에서부터 정맥으로 운반하는 지질단백), 간에서 만들어 낸 지방을 지방 조직으로 운반하는 초저밀도 지질단백(VLDL, 밀도가 아주 낮은 지질단백), 간에서 만든 콜레스테롤을 조직으로 운반하는 저밀도지질단백(LDL, 밀도가 낮은 지질단백으로 동맥경화증의 주원인), LDL과는 반대로 조직의 지질을 간으로 운반하는 고밀도지질단백(HDL, 밀도가 높은 지질단백으로 동맥경화증의 주원인), LDL과는 반대로 조직의 지질을 간으로 운반하는 고밀도지질단백(HDL, 밀도가 높은 지질단백으로 동맥경화증이 안 생기도록 하는 물질)등이다.
지질단백 중에서 지질 부분은 프리라디칼의 공격을 받아 과산화지질로 변질이 잘된다. 특히 다가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한 음식을 많이 먹으면 혈액 속의 다가불포화지방산의 양이 증가되므로 과산화 변질이 더 잘 일어난다. 지질단백 중에서도 LDL은 나쁜 지방이다. LDL이 과산화 변질되면 동맥경화증이나 심장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LDL의 과산화변질을 막을 수 있나, 하는 것은 의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에 속한다. 현재는 이 분야에 대해서 상당 부분이 연구 규명이 되어 실제 치료에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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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밥알을 내뿜어 나비가 되게 한 전우치
전우치는 본관이 담양인데 대대로 송도(개성)에서 살았다. 전우치가 언젠가 기재 신광한의 집에 갔더니 규암 송인수가 미리 와 있었다. 기재가 전우치에게 말했다.
"어찌 장난을 하지 않는가?"
조금 있다가 그 집에서 볶음밥을 대접하였는데 전우치가 한창 그 밥을 먹고 있다가 입 안에 든 밥을 뜰 쪽으로 내뿜으니 밥알이 모두 흰 나비가 되어 이리저리 날아가 버렸다. 차식이 아들 차천로에게 말하였다.
"하루는 전우치가 와서 두시 한 질을 빌려 갔는데 나는 그가 죽은 줄 모르고 빌려주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죽은 지가 이미 오래이더라"
그 뒤 전우치는 옳지 못한 도술을 부려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구실로 신천 감옥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다. 신천 태수가 사람을 시켜 그의 시체를 꺼내다가 임시로 매장하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 친척들이 이장하려고 널 뚜껑을 열어 보니 널 속이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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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가 - 영구차를 이끌며 부르는 노래.
한의 유방이 항우를 무찌르고 고조로서 등극했을 때였다. 일찍이 한신의 급습을 받고 화목사를 쪄 죽였던 제나라 왕 전횡은 고조가 등극하자 보복이 두려워서 부하 5백여 명을 이끌고 섬으로 도망쳤다. 고조는 전횡의 후한이 두려워 죄를 용서할테니 오라고 청하였다. 전횡은 낙양까지 3백리를 앞두고 포로가 되어 고조를 섬길 것이 수치스러워서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그 목을 고조에게 바친 두 나그네도 전횡의 무덤에 들어가서 스스로 목을 베었다. 섬에 남아 있던 5백여 명 역시 전횡의 높은 절개를 흠모하여 모조리 자결하였다. 이윽고 무제의 시대로 옮겨지자 무제는 악부라고 하는 음악원을 만드니 그곳의 총수인 이연년이 지난 날 전 횡의 제자가 지은 상가에다 곡조를 붙어 영구를 이끌며 부르게 하였다. 사람들은 그 노래를 '만가'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러나 만가의 시초는 그보다도 예전이라 한다.
주나라 경왕 36년 노나라의 애공과 오나라의 부차가 합세하여 제나라를 쳤다. 그때 제나라의 공손 하가 부하를 격려하여 장송가를 부르도록 명령하였다. 필경 제나라는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니 장송가는 결국 불길한 전조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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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3. 비로자나부처님의 외출
올 때는 흰구름 더불어 왔고 갈 때는 밝은 달 따라가네
부천 살 때의 일이다. 막 법당문을 잠글쯤인데 누더기승복을 입은 객스님 한 분이 법당으로 들어섰다. 나는 껐던 촛불을 다시 켜고 객스님이 어서 참배를 하고 법당을 나가기를 기다렸다.
"허허 고거 참 잘 빠졌다." 절은 하지 않고 객스님은 부처님만 보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였다. "......" "그렇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 내게 한 소리 이르라는 거였다. "그러네요, 스님. 통통한 젖가슴, 성숙한 너무 성숙한 허리. 저도 태어나서 이 이상의 곡선은 보지 못했습니다."
나의 말이 끝나서야 객스님이 오체투지로 삼배를 올렸다. 법당문을 잠그고 나서는데 객스님이 또다시 '스님'하고 나를 불러 세웠다.
"스님, 곡차 한 잔 사시오." 날카로운 눈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절망에 찬...... "동물인들 절망이 없겠소? 내 두 잔인들 사리다." 나는 육두문자를 써버렸다. "그래, 절망하는 그 동물은 혜범이요?" "그 중놈은 시내 나갔소." 나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을 그렇게 튕겨 버렸다.
"허허, 못된 짐승같으리나구. 종파 싸움하러 갔구나."
객스님의 입에서 거친 말과 함께 침이 튀어나오는 거였다. 나는 속으로 '이 친구 안 되겠구먼'하면서 객스님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 짐승 견두(犬頭)요, 불두(佛頭)요?" "닭대가리요."
객승의 한 마디에 나는 박장대소하며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밝은 달 따라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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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21. 작은 겨레를 고백하는 까닭 2/2
단일민족이라는 역사적 실험
대진국의 멸망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대진국의 멸망은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공존을 지탱하던 문화권의 분열과 해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즉 거란 겨레가 요나라를 세우고 대진국을 대신해 동아시아 기마종족을 이끌면서부터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문화권은 심각하게 해체되어 각 종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좀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대진국의 멸망 자체가 그런 현상의 주된 동기는 아니었다. 남조신라를 대신한 고려왕조가 오히려 그런 동기를 제공했다. 대진국이 무너지자 고려왕조는 거란 겨레를 비롯한 요나라의 구성원들을 철저하게 적대하면서, 동아시아 기마종족 문화권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역사적 행로를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순수한 단일민족의 역사라는 관념도 바로 이때부터 굳어지기 시작했다.
고려시대를 살펴보면서 고려장성을 첫 번째 주제로 삼은 것도 그런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고려의 천리장성은 바로 우리 겨레와 다른 기마종족을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 갈라놓기 위해 쌓았던 것이며, 실제로 고려왕조의 안정과 더불어 그런 경계선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것이다. 고려시대가 비록 전통문화와 유교문화 및 불교문화의 공존에 의해 유지되는 왕조였다고 하지만, 천리장성이 쌓이는 순간부터 기마종족의 전통문화는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고려왕조는 중국으로부터 과거제도를 도입해서 유교문화를 실용적 통치이념으로 삼는 데 주력했으며, 불교문화를 종교적 통치이념으로 삼으려고 했다. 즉 전통문화의 실용적 측면은 이제 유교문화에 의해 밀려나거나 변질되기 시작했으며, 전통문화의 종교적 측면은 불교문화에 의해 변질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전통사상을 밀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유교문화였다. 과거제도를 기반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 유교문화는 고려왕조를 체계화하는 데도 중요하게 기여했지만, 우리 역사에서 사회적 획일성이라는 고질병을 만드는 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를 다루면서 과거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의 주제로 삼은 것도 바로 그런 사실을 밝히고 싶어서였다. 기마종족 사이의 공생공존을 거부하고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중국 한족과 손을 잡고 준독자적 문화를 내세웠기에,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최치원이나 도선 등의 계통을 이은 전통문화 중심의 문화통합론자들이 자주적 입장에서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마침내 그들에 의해 내전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묘청의 고려 재건국운동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다시 검토한 주제이다.
문화통합론자들은 비록 내전에서 실패했지만, 그들의 정당한 요구는 고려왕조의 후반기를 우리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시기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전통문화 중심의 자주적 문화통합론이 고려 후기를 뒤흔들면서, 그 시기를 우리 역사의 문화부흥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어떤 지식인들은 독자적으로 문화부흥 활동에 참여했으며, 어떤 지식인들은 정치적 뿌리가 약했던 무인정권과 손잡기도 했고, 다른 어떤 지식인들은 문화적 뿌리가 비슷한 몽고제국의 보호막 아래서 그런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고려 후기의 르네상스는 실패하고 말았다. 전통문화 중심의 자주적 통합문화가 발돋움하기도 전에, 중국으로부터 성리학이 들어와 고려 르네상스를 강제로 중단시켜버렸던 것이다. 특히 일부 야심가들에 의해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성리학이 그들의 통치이념이 됨으로 말미암아 문화부흥운동은 표면적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러므로 고려 후기의 이런 문화적 경향은 뒷날을 기다려 완성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 시대를 살펴보면서 고려 르네상스의 실패와 이성계 일파의 위화도 회군을 각각 작은 겨레의 중요한 까닭으로 꼽은 것은 바로 그래서였다.
이처럼 고려시대는 우리 겨레가 일부 세력에 의해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커다란 문화권에서 벗어나 단일민족의 울타리에 갇히기 시작한 시대였으며, 그 울타리 속에서 겨레 문화의 중심축을 놓고 전통문화와 수입문화가 한편 경쟁하고 한편 공존하는 시대였다. 그리고 비록 실패했지만, 그런 경쟁과 공존 속에서 통합문화를 내놓기 위해 문화부흥기를 이루어낸 시대이기도 했다.
근조선과 문화적 뒤틀림
이성계 일파가 친중국적 성리학파의 후원을 받으면서 조선왕조를 세우자, 문화적 자주성은 '작은 중국'이란 구호에 휩쓸려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의 통치세력은 '작은 중국'과 '성리학 문화'를 굳히기 위해 다른 사상과 문화를 힘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고려 르네상스 시기의 문화적 업적에 대한 탄압은 문화말살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들은 전통문화에 바탕을 둔 자주적 입장의 역사서와 사상서적을 금서목록에 올려 탄압했을 뿐 아니라, 먹고 입는 일상생활 부분에서도 전통문화의 색채를 지우려고 했다. 기마종족의 강건한 기상을 순화시켰으며, 그 대신 복종을 강요했다. 이런 굴레는 너무나 강력해서 조선왕조의 군주들조차 그 굴레를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었다. 주된 탄압의 대상이 아니었던 불교조차 관료들의 반대로 편하게 신앙할 수 없었으니, 문화적 자주성을 내세우고 탈중국화를 지향하며 기마종족의 문화권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꿈조차 꾸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조선왕조의 가장 뛰어난 군주였던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그런 측면에서 매우 높이 평가된다. 그것은 세종이 '작은 중국'과 '성리학 통치'라는 원칙과 타협하면서 이루어낸 최대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은 사실상 우리 겨레의 옛 문자를 재정리한 것으로서 문화적 자주성을 상징하지만, 그런 자주성은 매우 한정적이다. 겨레글을 재정리했다는 것은 분명 자주적이지만, 타협을 통해 이루어낸 자주성은 결국 성리학을 널리 알리는 문화통치의 도구로 바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자주성은 없더라도 새로운 사상으로서의 신선함이 유지되는 동안 조선왕조의 통치기반은 굳건했다. 몇 차례의 사화를 통해 길재에서 김종직과 조광조 등을 거쳐 이황에 이르는 성리학파의 정통이 수립되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작은 중국'과 '성리학 통치'에 반기를 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파의 정통이 수립되는 순간, 성리학파는 이리저리 분열되어 타락함으로써 자신들이 수립한 정통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새로운 모색과 시련
자주적 역량을 중시하지 않던 그들의 통치가 타락으로 치닫자, 우리 겨레의 백성들은 굶주림과 문화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성리학 통치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이웃나라들의 침입이었다. 일본이 쳐들어와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여진족을 중심으로 부분적인 종족통합을 이루어내면서 대륙을 넘보던 청나라(처음엔 금나라)의 종족연합 제의를 거부함으로써 두 차례나 전쟁을 겪었다. 이 전쟁에서 조선왕조를 뒤흔들었고, 이에 따라 비자주적 성리학 통치에 반대하는 자주적 경향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다. '실학파'라고도 불리는 그들은 고려 르네상스 시기의 업적을 계승하려 했으며, 조심스럽게 '작은 중국'과 '성리학 통치'에 맞서 전통문화에 입각한 현실개혁을 주장했다. 조선왕조 후기의 가장 뛰어난 군주인 정조도 이들의 후원자가 되었고, 백성들도 차츰 그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기 시작했다. 참으로 2세기가 넘게 진행된 거대한 문화 뒤틀림이 바로잡히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성리학 통치를 내세우는 낡은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세도정치라는 극단적인 통치방법을 통해 낡은 비자주적 문화를 옹호함으로써,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기득권을 지키려고 발버둥쳤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저항도 훨씬 더 극단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무장단을 조직해서 통치질서에 노골적으로 도전하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다양한 형태로 드러냈던 것이다. 이런 극단적 대립과정에서 이른바 대원군 정권이 들어섰다. '탈중국'과 '자주적 전통문화'를 전면적으로 내세우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실학파 출신이었던 대원군 이하응은 왕권 강화를 빌미로 두 세력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면서, 성리학파의 점진적인 축출을 시도했다. 그의 이런 정책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이 땅에 불어닥친 또 다른 문명이 그의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더 이상 외줄타기가 어렵도록 만들었다. 쇄국정책을 선택했던 그는 개항론을 악용한 일부 통치배들의 공격을 받아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자주적 준비가 되지 않았던 이 땅에 서구 문화가 파도 치듯 밀려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적 시련이 시작되었다. 자주적 준비기간을 거쳐 서구 문화를 받아들인 이웃나라 일본은 이 나라를 자신들이 식민지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온갖 수단을 다 부려 우리 겨레의 자주적 전통을 말살하려고 했다. 그들이 겨레의 뿌리를 뒤흔들고 지나간 뒤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세력이 작아진 영토마저 반으로 갈라놓고, 내부대립을 이용해서 남과 북 모두를 자신들의 문화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런 시련 속에서 우리는 말과 문화를 잃어가고 있다. 이것이 '세계화'를 내세우는 우리들이 현실이다.
이제 새로운 좌표를 모색할 때
이상의 내용과 관련해서 이제 우리 문화의 현주소를 알아낼 수 있다. 비자주적 자본주의화와 더불어 남의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으나 정치, 경제, 문화적 종속성은 더욱 깊어진 나라,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전통문화를 철저하게 저버린 나라, 전통문화를 찾는다 하면서 오히려 전통문화를 짓밟아 버릴 정도로 뒤틀어진 겨레, 전인교육을 한다 하면서 자주적 전통을 찾지 않고 서양 교육의 틀을 고집하는 뿌리 빠진 나라, 얼빠진 개방을 세계화라고 주장하는 뿌리 모르는 지도자가 설치는 나라, 제 나라 말조차 잃어버리고 사는 겨레, 사람을 화폐가치나 상품가치로만 판단하는 국적불명의 문화, 이로 말미암아 삶의 터전이 빠르게 파괴되는 땅,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 문화의 주소인 것이다.
나라옷을 입고 다니면 괴짜가 되며, 나라말을 찾아 쓰면 고리타분한 퇴물이 되고, 전통적 방식에 따라 몸과 마음을 닦을라치면 사회낙오자나 도피자가 되며, 청렴하게 살려는 이는 무능력자가 되기 일쑤다. 옛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일은 천직으로 알고 부지런히 살아가는 사람은 부동산과 유흥업 등으로 벼락부자가 된 얼빠진 사람의 놀림감이 되며, 공동체 원리에 따라 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은 안락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자들의 비웃음거리가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우리다운 우리 역사를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알맹이가 빠진 과거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조차 우리 문화의 관점이 아닌 다른 문화의 관점에서 쓰여진 이야기일 따름이다. 우리는 이제 참으로 우리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거짓 투성이의 역사, 사료와 사료를 짜기워서 엮은 생명 없는 역사, 편견으로 가득 찬 눈에서 한쪽만 다루어진 역사, 미래를 설계할 안목을 보여주지 못하는 무용지물의 역사, 이제 이런 역사는 마땅히 새로 쓰여야 한다.
역사는 취미생활에 도움이 되는 재미있는 지식놀음이 아니다. 역사는 철학과 문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의 창고이며, 현실생활의 절대적 지표이고, 미래를 위한 최고의 설계도다. 그런 뜻에서 역사는 살아 있는 것이며, 죽은 것이 아니다. 틀이 제대로 짜여진 생명체가 온전하듯, 역사도 먼저 큰 틀을 제대로 짜야 한다. 누가 우리이며 그 가운데 보다 가까운 우리는 누구인지도 밝혀야 하고,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도 우리 문화의 관점에서 밝혀내야 한다. 앞서 여러 번 말했듯이 단일민족이라는 테두리를 극복하고 우리 역사를 새롭게 쓰는 일은 그 가운데 핵심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역사를 가지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정치경제적 식민지를 겪은 뒤 문화적 자주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자주적 미래 설계도를 그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의 문화에 마냥 취해서 세계로 나아가려고만 한다. 이른바 선진 열강이 갔던 길을 따라 그들을 본받으려고만 한다. 일정한 양이 축적되어야 질적 변환이 일어나듯, 세계화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라 것이 충분히 축적되어야 그 폭발의 힘으로써 세계무대의 자주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매우 강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현주소를 고백할 저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의 미래는 매우 희망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그런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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