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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16 호
단기 4340. 12. 28 (음력 11. 1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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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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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문학동네신인상' 공모
문학의 순수성과 존엄을 지켜나갈 참신하고 역량 있는 작품을 모집합니다. 미등단의 예비문학인은 물론 젊은 문학인들 모두에게 응모의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한국문학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야심찬 문학인들의 많은 관심과 응모 바랍니다.
모집부문 중단편소설 2편 / 시 5편 이상 / 평론 1편 이상 분량 소설부문 : 200자 원고지 각 80장에서 200장 사이 상금 소설 1,000만원 / 시 500만원 / 평론 500만원 응모마감 2008년 6월 20일 발표 『문학동네』 2008년 가을호
보낼곳 413-756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파주출판도시 513-8 (주)문학동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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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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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빨리 퍼지지만 진실만큼 오래 가지는 않는다. / 윌 로저스(미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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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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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가난한 사람의 고통
맹자는 ‘몸을 굽실거려 웃는 것을 억지로 하면서 남에게 아첨하는 수고로움은 여름날 땡볕에 밭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고되다‘고 하였다. 정말 그렇다. 몸을 굽실거려 웃는 것을 식은 죽 먹듯이 하여야 하는 사람의 고충을 이루 말할 수 없을정도다. 필자도 사업을 한답시고 ‘불난 산의 토끼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이마를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과 상대해야 했던 적이 있다. 그가 하는 농담은 정말 밥맛나지 않는 수준의 것이었지만‘한 건을 잡으려고’ 아첨의 웃음을 지어야 했는데, 그 고통은 땡볕에 밭에 나가 일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맹자 어른의 말씀을 확실히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아무리 재미있고 배꼽 잡고 포복 졸도할 농담을 하더라도 그 말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은 없다. ‘지혜를 얻는 것은 금을 얻는 것보다 낫고 지식을 얻는 것은 은을 얻는 것보다 낫다’는 옛말도 있긴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인 듯하다. 아무리 지혜가 많고 현명한 사람이라도 돈이 없으면 '비단 옷 입고 밤길 가기’와 같이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소진의 친척
동주 사람 소진은 고향을 떠나 유학하면서 돈을 벌지 못해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였다. 이 때 형제, 형수, 누이 등은 그의 무능함을 비웃으며 그를 ‘과천나무장수 나무라듯이’ 박대하였다. 그는 그럴수록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후에 그는 천하를 돌면서 여섯 나라의 합종의 맹약을 성사시켜 이들 연합국의 수상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고향인 주나라로 돌아왔고, 자신의 명망과 위세에 눌린 주나라 임금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금의환향한 그가 자신의 가족들을 초대하여 화려한 만찬 식사를 할 때의 일이었다.
소진의 형제와 형수들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 척하면서 곁눈으로 서로 볼 뿐,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였다. 소진은 웃으면서 “전에는 그토록 나를 ‘쥘 데 없는 똥바가지’같이 대하시다가, 지금은 이토록 공손히 조아리시니 웬일들이십니까?“하고 물었다. 소진의 형수가 지난날 잘못을 크게 뉘우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린 채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솔직히 말했다. “계자의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기 때문입니다.” 계자는 소진의 자였다. 소진은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인데 부귀하면 상감마마 모시듯 하고 빈천하면 발꿈치의 때만도 여기지 않으니, 일반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구나....“라며 장탄식을 하였다. 그러면서 발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날이 있지 못할 것이다!”하고는 가족들에게 많은 돈을 나누어 주었다.
부자들의 농담은 항상 웃음꽃을 피운다
변함없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친구이며 위급할 때 서로 돕는 것이 형제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이 가난하면 피를 나눈 형제에게도 업신여깁을 받는데 어찌 부자인들 멀리하지 않겠는가? 가난한 자가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이야기하고 싶어도 그들을 만나주지 않을 것이다. 시인 토마스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애송이들아, 돈은 꿀보다 달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의 농담은 항상 웃음꽃을 피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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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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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김재은
제3장 - 강박관념 또는 열등감 : 사고를 방해하는 것(I)
5. 사고는 쓴다고 닳는 것이 아니다.
아직 그럴 나이가 되지도 않았는데 아주 지치고 맥이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 특히 인텔리들에게 많은 타입이다. 그들이 그렇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사고하는 것의 효과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고하는 것을 아끼고 있는 것이다. '사고'는 쓴다고 결코 닳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을 뿐더러 반대로 쓰지 않고 놓아두면 퇴화해 버리는 것이다. 시끈가오리(우리 나라 근해에도 있는 어류로서 길이는 40cm 정도이고 회갈색. 30~40볼트의 한 쌍의 발전 기관이 있어 몸에 전기를 통하게 하여 적을 공격하고 자기를 방어한다)의 흉내를 내어서는 안된다. 소모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방전을 주저하거나 하면, 제대로의 일은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고의 방전'이 신경의 소모를 가져온다는 환상은 뿌리가 몹시 깊어서 가끔 '사고의 전문가'들까지도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문학가 중에는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많은 것 같지만, 그들 작가는 미술가들이 따르지 못할 자유분방하고 시원스러운 그림을 그린다. 반대로 직업적인 화가들이 쓴 문장도 가끔 같은 경향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의 활달한 문체와 재치 있는 문장은 도리어 문학가들이 부러워할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예에서도 뚜렷이 알 수 있듯이 예술가들은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끊임없이 자꾸 떠오르는 '환영'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 많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특히 그들이 '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라고 생각했을 때 더욱 강화되는 것 같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작가들일 것이다. 그래도 "알고 있어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고 그들은 털어놓는다. 떼느(1828-1893, 프랑스의 철학자, 역사가)와 같은 사람도 환영에 사로 잡혔던 체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나는 여전히 쓸데없이 '세계를 그려내는 방법'을 계속 추구했다. 이러한 욕망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고민했다"고 말하고 있다. 칼라일(1795-1881, 영국의 평론가, 사상가)의 경우는 언제나, "너는 언제나 사물의 한 면밖에 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속삭이는 환상과 필사적인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한다.
6. 자기 자신의 그림자에 겁을 먹지 말라
작가들은 평론가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론가들이 어떤 식으로 비평을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평론가의 공격을 받으면 펜이라는 무기를 휘둘러서 반격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상상상의 독자'라는 그림자이다. 자신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수퍼 맨'의 그림자에 겁을 집어먹는다는 것은 기묘한 이야기이긴하지만, 그들로서는 이것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몇 번씩이나 이야기된 적이 있고 또 논의가 된 적이 있는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같은 것을 되풀이해 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게 아닐까?'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당신 같으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단순한 사람일수록 도리어 명쾌한 해답을 할지도 모른다.
#1 정당한 것은 언제, 어느 때나 정당한 것이다. #2 정당한 이론이라면 몇 번이고 되풀이하더라도 상관이 없지 않느냐? 이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 깊은 사람'일수록 이와 같이 명쾌하게는 안된다. 사실 수많은 재주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을 단념하고 말았던 것이다. "같은 말을 되풀이해 보았자 쓸데없는 노릇이야" 이렇게 귓가에 속삭이는 악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강박관념'이다. 주베르(1754-1824, 프랑스의 도덕가)나 아미엘(1831-1881, 스위스의 작가)도 이러한 환영의 유혹을 간신히 떨쳐 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쓴 글을 발표하는 것을 삼갔던 것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글을 썼다. 또한 되도록 공공의 문제에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그 박력의 힘참, 영향력의 크기를 생각할 때, 우리들은 그들이 좀더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썼었으면 더욱 좋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재능을 좀먹는 환영은 여러 가지 모습의 수단 방법을 써서 공격해 온다. 실례를 일일이 들고 있다가는 끝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쥬르 르메트르(1855-1914, 프랑스의 작가)와 같이 의식적으로, 또 자유로이 사물을 볼 수가 있었던 사람조차도 "과거를 재현하려는 노력 자체가 강박관념이 될 수가 있다" 라고 쓰고 있다. 오후 한때 양지바른 곳에서 한가롭게 쉬면서 흰 포도주로 목을 축이는 제본공들에게도 강박관념의 씨가 있을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1844-1924, 프랑스의 작가)의 "신들은 목마르다"에 등장하는 혁명적인 직업인의 이미지가 이 제본공들은 위협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7. 글쓰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
'쓰는 것'은 창조적인 사고 방법의 가장 유력한 수단이다. 나도 여러분에게 꼭 쓰도록 권유하고 싶다. 그러나, 쓰는 행위 자체가 어쨌든 환상을 만들기 쉽다는 점은 알아야 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바꾸어 말하려고 한다. "쓰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쓰지 말 것이다"라고 말이다. 자기 표현은 그것 자체가 가쁨이고 구원이다. 그러나 현실은 직업적인 저술가를 포함해서 쓰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왜 그렇게 되는것일까? 그 이유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1 사용되어지는 언어의 파악이 불완전하다. #2 다루는 주제에 대한 진정한 흥미가 결여되어 있다. #3 이미 쓰기를 마친 부분의 이미지가 자주 걸리게 된다. 등을 들 수가 있다.
물론 이밖에도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쓰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 학교 시절에 몸에 붙었던 '환상'이 아직도 남아 있지는 않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작문을 잘 지었던 사람도-괴롭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더욱이 주베르가 말했듯이, '마음속의 생각이 정리가 되면, 즉시 써 보는' 습관을 꼭 우리들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 말하는 것은 즐거우나 쓰는 것은 잘 안된다고 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세상에는 실제로 말재주가 뛰어나면서도 글을 쓰라고 하면 잘 안되는 사람도 가끔 볼 수가 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우스운 이야기이다. 이런 절름발이가 어디서 왜 생겨나는 것일까? 여기에도 커다란 수수께끼가 있다. 다분히 거기에도 열등감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1 나는 예전부터 글짓기는 매우 서툴렀다. #2 화술의 기교를 그대로 문장 속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3 쓴 것은 꼭 남이 보게 마련이다.
이와 같은 강박관념에 일시적으로나마 걸려드니, 꼼짝 못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은 사람은 흔히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형용사를 세 개나 네 개씩 쓰고 싶어한다. 그러다가 드디어는 아무런 소용도 없이 무위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자,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예술가들까지도 '나의 작품은 고전적인 스타일에 비한다면 결정적으로 뒤떨어진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의 포로가 되는 일이 있다. 여기에 괴테(1794-1832, 독일의 사상가)의 잠언이 있다. "자기 자신의 시대를 진정으로 산 사람은 어느 시대에도 산 것이 된다" 이 말에 용기를 얻어서 우리는 앞으로 계속 나아간다. 우리들의 마음은 언제나 '눈'과 같은 것이었으면 한다. 우리는 눈처럼 단순해야 한다. 마치 눈이 여러 개 있으면 판단에 혼란이 오듯이 말이다. 비전 내지 이미지가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으면 과연 어떤 결과가 올까?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쭉 검토해 온 바가 있다. 참고를 위해서 열등감에 져 버린 사람들의 증상을 적어 보자.
#1 겁쟁이고, 조그만 일에도 안절부절하는 사람. #2 사람을 지도하기보다는 지도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3 자기가 만들어 내는 인상을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자기의 약점에서 오는 '과민성' 때문에 고민한다. #4 정신의 기생물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다. 강박관념이나 열등감은 우리들의 의식 속 깊숙이 숨어들어 있어서 자각되어지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들의 '잠재의식' 속에서 이와 같은 콤플렉스를 끄집어내어, 그 정체를 밝힌 것을 프로이트(1859-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나 아들러(1879-1967,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의 공적이다. 그들은 동시에 강박관념이나 열등감이 불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친절하게설명하고 있다. 우리들도 '열등감을 지배할 수 있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싸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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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불을 떼다
본뜻 : 여기 쓰인 '군'은 접두사로서 '필요 없는, 가외의'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옛날에는 온전히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만 불을 땠기 때문에 단순히 방을 덥히기 위해서 때는 불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군불'이란 곧 필요 없는 불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방을 덥게 하려고 불을 때는 것을 가리킨다. 속어로는 담배 피우는 것을 이르기도 한다. '군'이라는 접두사가 붙는 말에는 군것질, 군소리 등이 있다.
"보기글" -오뉴월에 감기라도 들렸냐, 웬 군불을 이렇게 때냐? -요즘 기름값이 얼마나 비싼데 이렇게 군불을 때고 있냐?
귀추가 주목된다
본뜻 : 귀추는 사물이 돌아갈 바를 가리키는 말인데, 귀취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귀취'란 사람의 마음이 돌아가는 형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귀추가 주목된다'는 말은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므로 가히 눈 여겨 볼만하다는 뜻이다.
바뀐 뜻 : 결판이 나지 않아 궁금한 어떤 사건이나 사람의 마음이 돌아가는 형편을 살필 때 쓰는 말이다. 흔히 '귀추가 주목된다' '민심의 귀추를 살펴야 한다' 등에 널리 쓰인다.
"보기글" -김일성 사후 북한의 권력투쟁의 귀추가 궁금한데, 과연 어떤 구도로 정착될까 -이런 난국일수록 대통령은 마땅히 민심의 귀추를 살펴야 한다
막바로
같거나 유사한 형태가 겹쳐 만들어진 합성어를 ‘첩어’, 또는 ‘반복 합성어’라 한다. 이런 첩어에는 ‘꼭꼭’ ‘바로바로’, ‘차츰차츰’처럼 완전히 동일한 꼴이 반복된 짜임이 있는가 하면, ‘머나멀다’, ‘좁디좁다’처럼 형태의 일부가 다른 것도 있다. 단독으로 쓰일 때보다 겹짜이면 그 의미가 뚜렷해지거나 강조되는 특징을 지닌다.
한편, 첩어는 아니지만 비슷한 의미를 지닌 형태가 반복되어 그 의미가 더욱 뚜렷해지는 합성어도 있다. ‘곧바로’, ‘막바로’ 등이 그것인데, ‘곧바로’는 큰사전에 올랐지만 ‘막바로’는 찾아볼 수 없다.
“여주에는 당도하였지만, 남의 눈도 있고 하여 막바로 창골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황석영 <장길산>) “하지만 이번에도 … 의견을 물어 본다거나 하는 일 없이, 막바로 통고와 다름없는 방식을 취했다.”(최일남 <누님의 겨울>) “그러자 … 태인댁의 시선이 막바로 부월이한테 돌려졌다.”(윤흥길 <완장>)
‘막바로’는 ‘(지체 없이) 지금’의 뜻을 지닌 ‘막’과 ‘그 즉시’의 뜻을 지닌 ‘바로’가 합쳐서 만들어진 말이다. ‘막’과 ‘바로’의 비슷한 의미가 반복되면서 ‘막’이나 ‘바로’가 단독으로 쓰일 때보다 ‘강조’된 뜻이 생기게 되었고, 더불어 이와 유사한 다른 의미도 더 생기게 되었다. 그 결과 ‘막바로’는 ‘바로 그 즉시에’, ‘다른 곳을 거치거나 들르지 아니하고’, ‘멀지 아니한 바로 가까이에’의 뜻을 나타내게 되었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가을하다
들판에 가을이 그득하다. 이제 가을걷이를 할 때다. 오곡 가운데 으뜸인 벼를 거둬들이고 콩을 타작하는 철이 된 것이다. 시장에는 제철 사과와 배, 밤이 그득하고, 단감과 통통하게 살 오른 대추들도 나와 있다.
‘추수’(秋收)의 의미를 지니는 고유어가 ‘가을’이다. ‘가을걷이’를 줄여서 ‘가을’이라고 하고, ‘가을걷이하다’는 줄여서 ‘가을하다’로 말한다. ‘가을’의 중세국어 형태는 이다. 고장말에서 ‘가실하다’를 많이 쓰는데, 이는 옛말 흔적이 많이 살아 있는 형태다. 전날엔 받침 ㅀ의 ㅎ소리를 살려 ‘가을카리’도 인정해 썼으나 요즘엔 비표준어로 친다. 준말 ‘갈카리’도 그렇다. 그러나 이 역시 고장말들엔 살아 쓰인다.
‘가을하다’는 ‘가을일하다, 가을걷이하다, 가을거두다, 가을걷어들이다, 가을추수하다’ 등으로도 쓰는데, 이때 ‘가을’은 지역에 따라 ‘가실, 갈’로도 쓴다. ‘가을하다’는 경기도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쓰이고, 준말은 ‘갈하다’다. ‘가실하다’는 충청 이남에서 많이 쓰는데, 제주도에서는 ‘ㄱㆍ실하다’로 쓴다. 북쪽도 거의 비슷하게 사용하고 있다.
우리말인 ‘가을일’은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며, ‘가을일하다’는 동사가 된다. ‘가을걷이’는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들임’이라는 뜻이다. ‘가을’은 ‘익은 곡식’을 의미하므로 ‘가을을 걷다’는 표현에서 ‘가을걷이’가 나온 것이다. 고장말에서는 한자어인 ‘추수하다’는 별로 쓰지 않고 ‘가을일하다, 가을걷이하다, 가을하다’를 많이 쓴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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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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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6. 기러기의 큰 날개를 가졌어도 때를 만나지 못한다면(공손홍, 원고생, 동중서)
2) 곡학아세는 학자의 길이 아니다(원고생)
원고생은 "시경"에 능통하여 경제 때에 박사가 되었다. 언젠가는 조정 회의석상에서 황생이라는 선비와 논쟁이 벌어졌다. 황생이 먼저 말했다.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군주를 시해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자 원고생이 반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폭군 걸왕과 주왕이 포악하고 난폭해서, 천하의 민심이 모두 탕왕과 무왕에게 쏠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탕왕과 무왕은 천하의 민심에 따라 걸과 주를 쳤던 것입니다. 또한 걸과 주의 백성들은 폭군의 치하에 있기 싫어해 탕왕과 무왕에게 찾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없이 천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다시 황생이 말을 받았다. "관은 아무리 낡아도 반드시 머리에 쓰고, 신은 아무리 새 것이라도 반드시 발에 신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위에 있을 것과 아래에 있을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걸과 주가 비록 천자의 도리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분명히 위에 있어야 할 임금입니다. 이에 반해 탕왕과 무왕은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결국 아래에 있어야 할 신하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잘못했을 때 신하가 바른 말로써 허물을 바로잡아 줌으로써 임금을 받들지 않고, 도리어 임금의 허물을 핑계로 삼아 이를 무찌르고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이것이 시해와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원고생이 다시 반박했다. "그렇다면 고조 황제가 진나라를 대신하여 천자의 자리에 오른 것도 잘못이겠습니까?" 그러자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경제가 말했다. "고기를 먹으면서 말의 간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말의 간은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죽는다고 한다) 고기 맛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또 학문을 하는 사람이 '탕왕과 무왕이 천명을 받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논쟁은 중단되었다. 그 뒤로 어느 학자도 천명과 시해에 대해 감히 논쟁하려는 자가 없었다.
멧돼지와의 결투
그 무렵 경제의 어머니인 두태후는 "노자"의 글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원고생을 불러 "노자"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원고생은 즉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식한 하인들의 말과 같아 취할 바가 없습니다." 이에 태후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그럼 그대에게 강제 노역형에 처하도록 해 줄까." 그러면서 원고행을 멧돼지 우리에 집어넣고 멧돼지와 싸우도록 시켰다. 이때 경제는 원고생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아는지라, 그가 돼지 우리로 들어갈 때 몰래 잘 드는 비수를 주었다. 그래서 원고생은 우리에 들어가자마자 정확히 멧돼지의 염통을 찔러 돼지를 쓰러뜨렸다. 이렇게 되자 태후도 다시 처벌할 수도 없게 되어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무제가 즉위한 후, 무제는 원고생을 다시 조정에 기용하고자 했다. 그러자 평소 원고생의 꼼꼼한 성격을 싫어하던 신하들이, "원고생은 이미 너무 늙었습니다. 그를 이제 기용해 봤자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하며 헐뜯었다. 그래서 무제도 그를 등용시키지 못했다. 이때 원고생의 나이는 이미 아흔 살이 넘고 있었다. 원고행이 무제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갔을 때, 소장학자로 유명한 공손홍도 그 자리에 와 있었다. 공손홍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원고생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원고생은 그런 공손홍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 자리가 파하자, 원고생이 공손홍을 불러 말했다. "내가 듣건대 조정에 온갖 아첨배들이 날뛰고 그대가 그들과 가까이 한다는 소문도 있으나 나는 믿지 않소. 그대는 상당한 학문을 닦았고 아직도 젊으니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더욱 노력해 올바른 학문을 세워 주기 바라오. 결코 학문을 굽혀서 권세에 아첨하는 그런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오." 공손홍도 원고생의 깊은 뜻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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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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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3부 활성산소 피해를 최소화한다 제 2의 항산화벽
세포를 보호하는 항산화제들인 SOD, 카타라제, 환원형글루타치온, 글루타치온 페록시다제들은 세포 내부를 지키는 근위병들이다. 그러므로 세포를 빙 둘러싸고 있는 세포막에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프리라디칼은 성벽을 부수듯이 세포막도 공격을 한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우리들의 세포막에는 다음과 같은 용맹무쌍한 수비대들이 이미 진을 치고 있으니까. 하지만 용감한 성벽수비대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사기가 왕성한 것은 아니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와르르 세포 벽이 무너질 소지가 항상 있다. 때문에 이들의 주인인 우리는 매일같이 보급품을 열심히 대 주고 격려해 주어야만 한다. 성벽 수비대의 면면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세포막의 구조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인체의 세포막은 두겹으로 된 성벽 구조를 하고 있다. 성벽 자체는 인지질이라는 성분으로 만들어져 있고, 막 사이에는 세포 안팎을 감시하는 단백질이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단백질이 제 기능을 하려면 성벽이 부드럽고 유동성이 있어야 한다. 세포막을 성벽에 비유하다 보니까 여러분들이 돌벽같이 단단한 모습을 생각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매우 부드럽고 유연한 보호막이다. 이런 유동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세포막을 구성하는 다가불포화지방산이라 부르는 지방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한가지 있다. 다가불포화지방산은 프리라디칼 공격에 예민해서 다치기가 쉬운 것이다. 다가불포화지방산은 간단히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몸에 좋다고 알고 있는 식물성기름을 생각하면 된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다시 다루기로 한다.
축대를 아무리 잘 쌓아도 중간중간 취약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취약한 부분이 위험 한계를 넘을 정도가 되면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세포막에서 프리라디칼의 공격에 취약한 부분이 바로 다가불포화지방산이 있는 부분이다. 몸에 좋다고 알려진 식물성기름인 다가불포화지방산의 문제점이 바로 이 점이다. 반면에 몸에 나쁘다고 해서 되도록 안 먹으려고 하는 동물성기름 성분인 포화지방산은 프리라디칼의 공격에 강하다. 프리라디칼이 세포막의 다가불포화지방산을 손상시키면 그것으로 공격이 끝나는 게 아니다. 한번의 공격으로 생긴 파편들이 산소와 결합하여 연속적으로 또 다른 프리라디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중막 안의 단백질까지도 손상을 준다. 세포막의 지질이 연속적인 프리라디칼의 공격을 받으면 그 성분이 변한다. 마치 관리를 잘 안한 쇠파이프가 녹이 슬어 부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프리라디칼에 의해 변질된 세포막 지질을 과산화지질이라고 한다. 과산화지질로 된 세포막은 여기저기 금이 가고 갈라진 축대와 같다.
이 과산화지질은 원래의 지질에 비해 물에 더 작 녹는 성질이 있어서 세포막이 아주 약해지게 된다. 물에 적시면 흐물흐물 녹아버리는 휴지처럼 말이다. 바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항산화 성벽수비대의 임무인 것이다. 이 수비대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2가지 방어 기구(프리라디칼 제거, 손상된 지질 수리와 교체)를 작동시켜서 세포막이 망가지지 않도록 보호 작전을 펴는 것이다. 이제부터, 세포막 보호 작전을 수행하는 항산화제에 대해 알아보자.
세포막 수비대장, 토코페롤
수비대장이라고 하니까 마치 신기하고 막강한 새로운 물질이 있나 보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미 널리 알려진 낯익은 물질인 토코페롤이 그것이다. 아마 한번쯤 복용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랫동안 장복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토코페롤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십수년 전, 미국 유수 매스컴에 심장병을 획기적으로 줄여 준다는 보도가 되고서부터이다. 이후에도 토코페롤의 항암효과, 심장병 예방효과, 노화방지 효과, 면역증강 효과에 대한 연구들이 꾸준히 발표되었다. 그 결과 토코페롤은 젊음을 가져다 주는 회춘제처럼 알려져서 아직도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꾸준히 복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다른 나라에 비해 대중들에게 선전되고 애용되는 '장수식품'들이 유난히 많다. 그런데 왜 셀 수 없이 많은 장수식품들이 그 이름처럼 장수하지 못하고 있을까?
첫째 이유는 검증되어질 가치조차 없는 허무맹랑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연구 가치는 있지만, 실험 및 검증 단계에서 그 효과와 안전성이 입증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막말로, 한때 유행처럼 그걸 파는 사람들의 주머니만 불룩하게 해 주고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 중 그나마 사용해 볼 가치도 있고 연구 가치도 인정되어 있는 것들은 아직도 꾸준히 팔리고 있는 정도이다.
토코페롤은 이런 허무맹랑한 약들과는 격이 다른 물질이다. 세포를 보호하는 효과가 동물실험은 물론 많은 임상실험에서 증명이 되었다. 게다가 안전성까지도 검증을 받은 물질인 것이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이 복용을 하는 거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 많은 임상연구의 결과에 힘입어 더욱 증가될 것이다. 토코페롤이라는 뜻은 그리스어로 '아이를 분만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비타민 E와 같은 말이다. 자연계에는 비타민 E 기능을 가진 물질이 8종류가 있는데, 이 중에는 디-알파-토코페롤(참고로 자연형이 아닌 합성형은 디엘-알파-토코페롤이라 함)이 세포막에 존재하면서 가장 효과적인 항산화물질이며 다른 말로 RRR-알파-토코페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외의 다른 토코페롤도 항산화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장에서 잘 흡수가 안되고 우리 몸에도 양이 많지 않아서 인체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알약으로 복용하는 합성 토코페롤에는 약 12.5% 정도의 디-알파-토코페롤이 있으며, 나머지는 좀 활성이 적은 토코페롤로 만들어져 있다.
토코페롤이 어떻게 해서 세포막을 지킬 수 있을까? 세포막이 무너지는 것은 프리라디칼 공격에 의해 지질성분이 과산화지질로 산화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번의 공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허물어질 때까지 계속 말이다. 그런데 토코페롤은 프리라디칼이 이런 연속적인 공격을 못하도록 차단하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우리는 토코페롤이 세포막지질의 과산화 연쇄반응을 억제한다고 해서 이를 연쇄사슬반응 분쇄 항산화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프리라디칼의 공격을 막아낸 토코페롤 자신도 상처를 입고 탈진된다.
수비대장인 토코페롤이 세포막에 무한정을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탈진이 된 상태에서 또 다른 프리라디칼이 공격을 해오면 막아내지 못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코페롤은 자신을 받쳐 주는 보좌관들을 데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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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귀신 같은 점을 치고도 오해받아 사형 당한 점쟁이 홍계관
장님 홍계관은 귀신처럼 점을 잘 친다고 이름이 알려졌다. 하루는 자신의 수명을 계산해 보니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반드시 비명으로 죽을 운명에 놓여 있었다. 곧 죽게 된 가운데서 살아남기를 구하는 점괘를 뽑아 풀어 보니, 임금이 앉아 있는 용상 아래 숨어 있으면 모면할 수 있다고 되어 있으므로, 그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었더니 임금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날을 당하여 용상 아래 숨어서 엎드려 있었는데, 그때 마침 쥐 한 마리가 난간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임금이 홍계관에게 말했다.
"쥐가 이곳을 지나갔는데 몇 마리인지 네가 시험삼아 맞추어 보아라" "세 마리입니다"
임금이 그의 터무니없는 말에 노여워하여 즉시 형관에게 압송하여 참형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그 당시 죄인을 사형시키는 장소가 당고개 남쪽 강변의 백사장에 있었다. 홍계관이 사형장에 이르러 다시 한 괘를 뽑아 보고 사형 집행관에게 간곡히 사정하였다.
"한 끼의 음식을 먹을 만한 시간만 집행을 지연시켜 주면 살아날 길이 있습니다" 형관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한편 임금은 홍계관을 압송하게 한 뒤에 그 쥐를 잡게 하여 배를 가르게 하고 보았더니 새끼 두 마리가 뱃속에 있으므로 크게 놀라며 이상스럽게 여겨 중사(왕명을 전달하는 내시)에게 급히 따라가서 사형 집행을 정지시키도록 명하였다. 종사가 빠르게 말을 달려 당고개 위에 이르러 바라보니 한창 사형을 집행하려는 참이었다. 그가 집행을 중지하라고 큰 소리로 외쳤지만 그 소리가 미처 형관에게 들리지 않는 것 같아 급히 손을 저으며 중지시키려고 하였다. 형관이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빨리 집행하라고 재촉하는 신호인 줄 잘못 알고 그만 목을 베고 말았다. 중사가 돌아와서 그런 사유를 아뢰었더니, 임금이 "아차 아차" 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당고개의 형장을 아차 고개라고 고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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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용문
용문은 황하의 상류에 있는 좁은 골짜기의 이름인바 매우 가파른 까닭에 큰 물고기도 거슬러 올라 가기가 어렵다. 그러나 일단 거슬러 올라 가기만 하면 물고기가 대번에 용이 된다고 전하며 등용문-즉 용문을 오른다 함은 난관을 돌파하여 약진의 기회를 얻는다 함이다.
후한도 이미 종말에 가까운 환제때 일이다. 발호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은 포악한 외척 양기가 살해되고 이른바 오사로 일컬어진 환관들이 날뛰기 시작했을 때 일부 정의파 각료들은 그에 대해서 과감한 항쟁을 벌여 대규모의 탄압을 받던 무렵이었다. 그 항쟁의 중심 인물이요, 정의파 각료중의 영수로서 알려진 이가 이응이었다. 감찰관으로 관계에 나서서 치안국장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는데 특히 청년 학도들 간에 평판이 높았으며 신진 각료들은 그의 천거를 받는 것을 '등용문'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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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2. 관음보살상 앞에서
행각기 1
폭포다. 물보라가 일고 쏟아지는 나. 나의 잔해 속에 윗도리 아랫도리 홀랑 벗고 폭포 아래 나를 맞는다. 팔만사천의 내가, 내가 아닌 하나의 나를 보고 마음대로 하라 한다. 칡넝쿨처럼 나를 칭칭 감은 법복을 벗고 고통과 슬픈 등나무와 같이 얽힌 번뇌와 망상을 더불고 미륵불 마중간다.
바다를 건너가는 배가 있다. 목포는 항구다. 항구는 목포다. 새벽닭은 울고 배 아파하는 운수(雲水)가 있다.
벼랑에 매달려 놀고 있는데 지나가는 이가 스님 '무얼 하느냐?'고 묻는다. '내가 얼마나 오래 버티다 떨어지나 시험중'이라 한다.
나의 뿌리는 오줌이다. 똥이다. 마른 똥막대기 같은 충만.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팔만사천 부처가 중생들을 위해 꽃을 꺾어 들어 보인다.
검은 산 검은 막장. 아름답다. 탄광촌에 핀 야생화 피곤한 나그네에게 안식을 주는. 새벽길, 일체중생의 곁으로 수좌걸음으로 간다.
텔레비전에서 권투를 본다. 왁자지껄하다. 링 위의 두 사람 몸의 짓과 일체가 끔찍하다. 그렇게 맞고도 안 죽나. 이윽고 한 사내가 대자로 뻗는다. 환호하는 사람들 전파상 앞에서 세계챔피언의 탄생보다 쓰러진 선수가 더 걱정이 된다. 갈 길이 구만 리인데 일어나려는가, 의사가 달려가고, 일어난다. 쓰러진 권투선수처럼 황망히 전파상 앞을 빠져나온다.
절에는 낙타들이 산다. 늙은 낙타를 모시고 새파란 낙타들이 사막을 건너는 법을 배운다. 가도 가도 땡볕 가도 가도 사막 낙타는 날개가 없이도 사막을 건넌다.
노승이 정직하게 난을 친다. 그 화합에 나는 취하고 그 흰 눈썹에 합장한 채 심만(心滿)에 찬 얼굴로 노승의 난을 본다.
산사에서 몰래 아무도 몰래 담배를 태운다. 노을과 함께 하늘로 부유하는 연기 끽끽끽, 만월이 뜬다.
안개는 편안하다. 부끄러운 내가 당당할 수 있으니까 비록 안개가 걷힐 때까지지만 안개를 피운다.
불이 났다. 산불이다. 불구경은 즐겁다. 황홀하지만 다람쥐, 토끼들의 가재도구가 탄다. 갑자기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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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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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20. 사라진 식객문화 2/2
수정되어야 할 현대 민주주의
공동체문화가 꺾어진 오늘날의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만드는 일은 이제 개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개발하고 전달해서 사람을 '자연인'으로 가르치는 스승도 존재할 수 없다. 때로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경제적 이해관계가 똬리 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일정한 사회적,경제적 조건만 갖추면 '자신의 내면세계'(이 말에 대해서도 이제 상당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지만, 이 글에서 그것을 정의하지는 않겠다)를 개발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명예나 사회경제적 지위와 관련된 것은 물론 끊임없는 개발의 대상이 된다. 이제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경제적 동물이 되어버린 셈이다. 더구나 현대사회의 공통적인 정치이념인 민주주의는 그런 현상의 바탕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조건 아래서 모든 인간은 만 18세 또는 만 20세가 되면 저절로 완성된 인간으로 간주된다. 이때부터 그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의 내면세계가 얼마만큼 깊이 있게 개발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법적,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가족의 주된 구성원인 부모의 간섭도 받을 필요가 없으며, 보통선거(국민 1인 1 표의 평등한 선거)와 비밀투표라는 원칙에 따라 부모와 전혀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부모가 그의 선택을 사전에 묻는 것도 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현대 민주주의는 가족제도 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식객문화를 혐오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모든 가족을 해체하고 개인을 바탕으로 해서 사회를 구성하려고 한다. 이제 가족은 경제적인 편의를 위해서 존재하며,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도 키워주고 키워준 만큼 되돌려받기만 하면 되는 경제공동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대 민주주의가 가족제도 속에 남아 있는 식객문화를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어 민주시민의 권리를 획득하는 순간, 인간은 이제 사회적으로 완성된다. 그는 더 이상 정치경제적 동기말고는 내면적인 발전을 이루어야 할 다른 사회적 동기를 찾지 못한다. 이제 내면적인 인간발전이란 정치경제적 적응력이 낮은 인간들의 유치한 자기 변명으로 간주된다. 마침내 '인간수련을 한다고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라는 말이 넓은 공감대를 얻게 되었으며, 자아개발이니 인성함양이니 하는 말들도 정치경제적 변화에 따라 개념을 바꿔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내면적으로 점차 보잘것없어지고 만다. 마침내 '문화적 생활'이라는 말도 사회경제적 편의를 도모하고 자신의 육체적 만족도를 높이는 생활을 뜻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문화적 생활이라는 개념 속에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개발하던 과거의 전통이 상당히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노예가 되어버린 자유인
'타자녀 교육'이란 말은 어느 근대 종교의 덕목 가운데 하나다. 물론 이 덕목도 식객문화의 기초적인 항목에 해당하며, 공동체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항목도 식객문화와 함께 사라졌다. 사라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장학사업 정도에 그치고 있다. 즉 이 항목도 현대 사회의 병폐에 직접 도전하는 인간을 기르지 못하고, 현대사회에 알맞은 인간을 기르는 것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식객문화는 한 시대가 자신을 부정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다음 시대를 재생산하는 공동체문화다. 즉 그 시대에 잘 맞지 않을지라도 재능있는 사람을 길러 그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화가 바로 식객문화의 본질인 셈이다. 그리고 식객문화에서 재화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그런 인재들을 키우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재화를 많이 가진 부자들은 미래시대에 지도적 역할을 맡을 '사'를 중심적으로 키웠다. 식객을 키우는 사람들은 재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일에 재화를소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재화의 노예가 아니라 재화를 이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부자들은 재화를 제대로 이용할 줄 모르고, 재화를 숭배하며 재화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재화가 자신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재화를 재화답게 쓰기 위해 재화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재화를 모으기 위해 재화를 모을 따름이다. 재화를 모으는 일과 관계없이 재화를 쓰는 경우, 그들은 공동체에 대한 파괴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왜냐하면 식객문화와 함께 재화의 사용에 대한 문화적 감각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재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로지 재화 소유자의 무질서한 마음에 달려 있다.
신분제도의 파괴와 함께 등장한 자유민주주의는 내면세계를 추구하던 불완전한 인간은 법적으로 자유,평등하게 만드는 대신, 재화를 새로운 주인으로 앉혀놓았다. 이제는 사람이 재화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재화가 인간을 지배한다. 인간은 내면적 발전을 추구할 필요도 없게 되었으며, 직업질서를 존중할 필요도 없고, 공동체의 내일을 적극적으로 설계하기 위해 식객을 키울 필요도 없게 되었다.
식객문화가 사라진 오늘날의 사회에서 내일이란 없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을 닦아가는 문화는 없다. 가족도 없다. 스스로 부자가 되지 않는 이상 과거의 식객이 누렸던 혜택을 받아 미래의 일꾼이 될 인재는 없다. 물론 어떤 개인이 학자금을 받는 등의 혜택을 입을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는 이미 식객문화와 본질적으로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즉 그들은 대개 자본주의적 투자 개념에서 그런 혜택을 받은 것이며, 혜택을 입은 사람은 새로운 세대에게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혜택을 베푼 이에게 그 대가를 되돌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객문화'와 함께 그 속에 흐르던 공동체 원리를 잃어버린 오늘날의 우리는 작은 사람이다. 이제 우리에게 민족적 기상이니 전통적 인간상이니 하는 말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공염불이 아니 되려면 식객문화를 다시 키우고 공동체문화를 꽃피워야 한다. 작은 겨레를 벗어나려는 소망이 진지하다면, 부활된 식객문화 속에서 그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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