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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12 호
단기 4340. 12. 23 (음력 11. 1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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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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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신인추천 모집
1 . 장르
■ 소설 : 단편(200자 원고지) 70매 안팎 2편 중편(200자 원고지) 200매 이상 1편 장편(200자 원고지) 1000매 이상 1편 ■ 시 : 10편 ■ 평론 : (200자 원고지) 70매 안팎 1편 2 . 추천방법
■ 응모된 작품의 심사는 본지에서 위촉한 심사위원이 담당함 ■ 추천된 작품은 기성문인과 동등한 대우로 본지에 게재하며, 추천된 장편소설의 경우 단행본으로 출간함 ■ 추천은 1회로 완료됨
3 . 기 타
■ 응모작품 마감은 매년 3월 31일 1회에 한함(마감일자 소인 유효) ■ 응모작품은 반드시 본지 편집부에 접수시켜야 함 ■ 응모원고에 대해서는 반환의 책임을 지지 않음 ■ 우편물 겉봉투에 <신인추천작품 응모작>임을 적고, 작품 앞에 별지를 붙여 반드시 성명과 전화번호를 명기하여야 함(작품에는 성명과 연락처를 기재하지 말 것) ■ 발표는 6월호 본지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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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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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결과만을 알고 싶어한다. 남에게 산고를 말하지 말고 거기서 얻은 아기만 보여줘라. / A.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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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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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밤은 곧 아침으로 돌아오느니
새벽에 잠을 깨면, 이런저런 생각이 점차로 일어나게 된다. 바로 그 때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자.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생각해 내어, 차례로 조리 있게 세워 분명하게 이해하여 두자. 근본이 세워졌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바로 입은 다음 단정히 앉는다. 이 마음 이끌기를 마치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한다. 마음의 상태를 엄숙하게 갖고 책을 펼쳐 성현들을 대하게 되면,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여러 성현들이 앞뒤에 계실 것이다.
성현의 말씀을 친절히 경청하고, 학우들의 질문을 반복해서 참고하여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곧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하늘의 뜻은 밝고 밝은 것, 항상 여기에 눈을 두어야 한다.
일을 끝내고 난 다음에는 나는 곧 예전의 나로 되돌아가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갖고 정신을 모으며 잡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자연의 움직임이 순환하는 중에도 마음만은 이것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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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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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김재은
제2장 - 진정한 사색
1. 사상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여러 명의 의과대학생이 환자의 침대를 둘러싸고 서서, 긴장한 표정으로 환자를 지켜보고 있다. 이 환자는 기록에 남을지도 모를 매우 특이한 병으로 권위 있는 의학교수가 환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있다. 교수의 온 신경은 지금 귀에 집중되어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예민한 감수성을 그 얼굴에 떠올리면서, 교수는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어떤 작은 소리라 할 지라도 놓칠 수가 없다. 이 명의에게 있어서는 흉막의 주름 하나라도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노라면 실제로 눈으로 보듯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학생들은 굳게 믿고 있다. 30분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에, 이 환자는 마치 수술대 위에서 수술이라도 끝난 것처럼 몸의 모든 기관의 내용이 샅샅이 밝혀진다. 이 의사의 놀라운 지성이 하나의 흉막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수행해 냈던 것이다.
당신은 세잔(1839-1906,프랑스의 이상파의 대표적 화가)의 자화상, 즉 사막에서 볼 수 있을 듯한 간단한 도구로 그린 놀라운 걸작을 알고 있는가? 깨끗하고, 그러면서도 차가운 강철과 같은 날카로운 그의 눈은 한번 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예술가는 가끔 이와 같은 눈, '현실'을 사랑하기보다는 사물의 본질에 똑바로 육박하도록 만들어진 눈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눈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시대를 앞질러 내다보고, 사람들의 공포를 꿰뚫어 본다.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17년에, 파리의 살롱에서 여섯 사람이 모여서, 러시아 황제와 루이 16세, 러시아 왕비와 마리 앙투와네트, 케렌스키(11월 혁명의 임시정부의 수상이며, 후에 실각하고는 망명했다)와 지롱드 당(프랑스 대혁명시대의 온건파)을 각각 비교해 보는,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시간 보내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즉 러시아의 장래를 프랑스 혁명의 역사에서 유추해서 끄집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자네는, 위기는 이미 사라졌다고 보는가? 그러나 저 병사 노동자평의회라는 것은 뭐지? 거기에서 뭐가 나타날지는 두고 보면 곧 알게 될 걸세"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이것은 놀라운 직관으로서, 2,3주일 후에는 온통 사태가 뒤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으로서 후일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일도 가끔 있다.
또 때로는 사상가들이 말솜씨가 없었다던가, 그의 사상을 일반인이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던가,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후세에 가서 비로소 그 사상가의 생각하는 바가 평가를 받고 널리 인정을 받게 되는 일이 있다. 네덜란드에 망명했던 데카르트(1590-1650, 프랑스의 철학자)나 그 제자로서 렌즈를 가는 직공 노릇을 했던 스피노자(1632-1677, 네덜란드의 철학자)라든가 전형적인 시골 선생이었던 칸트(1724-1894, 독일의 철학자)-그들의 조촐하고 검소한 생활과 후세에 남긴 그들의 정신적인 유산 사이의 엄청난 차이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바가 있다. 그런데 도대체 사상가를 특징 지우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첫째로 비전이라 할 수 있다. 사상가란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는 말의 참신함, 일종의 계시와도 같은 그들의 성격, 거기에 수반하는 매력, 이런 것들은 모두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인습이나 풍조에 따라 서 틀에 박힌 형식을 되풀이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만, 사상가는 정신적 자유를 충분히 발휘한다. 신성불가침이라고 할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조차도, 그들은 맹목적으로 따르게 할 수는 없다.
16세기에,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돈다는 엄연한 사실, 즉 당시로서는 사실이었던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이론이었다. 그런데도 갈릴레이(1564-1642,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천체망원경을 발명했다. 당시의 천동설에 대해서 지동설을 주장함)는 그건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지적 용기는 육체적 용기 이상으로 우리들을 경탄케 했다. 이와 같이 자기의 힘으로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교만하게 보이기도 하고, 자만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거나 지나친 자신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비굴해 하거나 하지 않고 모든 우상을 모조리 파괴하고 오직 일에만 전념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가끔 독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봄으로써,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생각하는 인간은 뛰어난 교사인 셈이다.
2. 어디에 평가의 기준을 두느냐?
그러면 어떤 사상이 고귀하고 어떤 사상이 저열한가, 그 평가는 어떻게 해야 될까? 진정한 사상은 보통 일상생활 속에 뒤섞이고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인지를 알기가 매우 힘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성을 하면, 이 얼른 보기에 곤란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쉽게 알 수가 있다. 그 결과, 우선 이미지, 다음으로는 이들 이미지에 대응되는 기호, 마지막으로 지적 데이터를 잘 결합시키는 정신적 에너지가 인간의 사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맛있는 음식물, 좋은 옷, 춤이나 여행이나 친구와 같은 이미지로 정신이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경치라든가 건축물, 고아한 멋이나 골동품의 매력, 교회나 미술관, 위대한 예술적 생애의 회상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우리들이 말하는 사상과는 인연이 먼 것이라는 점을 뚜렷이 알 수가 있다.
예술가가 일반 사회인들보다 뛰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이미지가 다른 사람의 이미지보다 뛰어나 있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러스킨(1819-1900, 영국의 저술가, 미술평론가)이나 월리엄 모리스(1834-1809, 영국의 시인 미술가)는 감각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이미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향상, 행복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대문에 우리들은 그들에게 경의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에 우리들의 마음에 어떤 비전이 우러나오며,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를 들여다보면, 사고란 어떤 의미로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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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비박산
본뜻 : 우박이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날아가 산산이 깨지고 흩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일이나 사물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망가지고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흔히 '풍지박산'으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은데 '풍비박산'이 맞는 말이다.
"보기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어디론가 나가시자 아이들만 남은 집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되었다 -전쟁이 나자 황해도의 대지주였던 아버지의 집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되었다
피로 회복
본뜻 : 글자 그대로 보자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피로를 회복시켜 준다는 의미이니 피로한상태를 계속 지속시켜 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이 말이 엉뚱하게 피로를 없애주고 건강을 회복시켜 준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바뀐 뜻 : 현재 쓰이고 있는 관용구에 나타나는 이런 예들을 들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문 닫고 들어와라' '문 닫고 나가라' '너 왜 그렇게 칠칠맞니?' 등이 모두 잘못 쓰이는 예들이다. 이렇게 잘못 쓰이고 있는 말들을 관용구라고 묵인하면서 그대로 쓸 것이 아니라 건강 회복, 피로 제거 등으로 바르게 고쳐 써야 한다.
"보기글" -피로회복제로는 삼선 제약에서 나온 삼선 드링크가 좋습니다(피로 제거에는) -피로 회복에는 뭐니뭐니 해도 푹 자는 게 최고야
누다와 싸다
며칠 들이께 스펀지라는 티브이 방송에서 재미나는 구경을 했다. 돼지 다섯 마리를 새 우리에 넣고 똥오줌과 잠자리를 가릴지 못 가릴지 다섯 사람이 한 마리씩 맡아서 밤중까지 지켜보았다. 한 놈이 구석에다 오줌을 누자 다른 놈들이 모두 똥이나 오줌이나 그 구석에만 가서 잘 가려 누었다. 그런데 지켜보는 사람들은 돼지가 오줌이나 똥을 눌 때마다 한결같이 ‘쌌습니다!’ ‘쌌습니다!’ 했다. 박문희 선생이 유치원 아이들과 살면서 겪은 그대로였다.
“‘똥 오줌을 눈다’와 ‘똥 오줌을 싼다’를 가려 쓰지 않고 그냥 ‘싼다’로 써 버립니다. ‘똥 오줌을 눈다’는 말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변기에 눈 건지 바지에 싼 건지를 가려 쓰지 않으니 가려 듣지 못합니다. 이러니 생활이 이만 저만 불편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분명히 ‘똥을 눈다. 똥을 싼다’는 말을 가려 써 왔습니다.”(박문희, ‘우리말 우리얼’ 46호)
‘누다’와 ‘싸다’는 다스림으로 가려진다. ‘누다’는 똥이든 오줌이든 스스로 잘 다스려서 내보내는 것이고, ‘싸다’는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내보내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마찬가지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어려서 철이 들지 않은 적에는 ‘싸고’, 자라서 철이 들면 ‘눈다.’ 철이 든 뒤에도 몸에 탈이 나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스스로 다스려 ‘누’지 못하는 수가 생기고, 그러면 ‘싸’는 수밖에 없다. 한편, 짐승의 삶이 사람과 달라서 저들은 잘 다스려 ‘누’지만 사람의 눈에 ‘싸’는 것으로 보일 수는 있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깍두기
가을철 밥상에 자주 올라오는 김치의 하나는, 깍둑 썬 무와 새파란 무청과 빨간 고추가 잘 어우러진 ‘깍두기’다. ‘깍두기’는 ‘콩나물국, 시래깃국’과 같이 국물과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
남쪽에서는 고장에 따라 ‘깍두기, 똑닥지, 쪼가리지’ 등으로 말한다. ‘깍두기’는 ‘단단한 물건을 써는 모양’을 나타내는 시늉말 ‘깍둑’에 뒷가지 ‘-이’를 연결하여 만든 토박이말로서, 전국에서 널리 사용한다. 고장에 따라 ‘깍대기/깍떼기, 깍뒤기/깍뛰기, 깍디기, 깍따구, 깍뚝지’ 등으로 발음한다.
‘똑닥지’는 ‘단단한 물건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를 나타내는 시늉말 ‘똑닥’에 뒷가지 ‘-지’를 연결하여 만든 토박이말로, 주로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사용한다. 고장에 따라 ‘똑딱지, 똑데기/똑떼기’ 등으로 소리낸다. ‘쪼가리’는 ‘작은 조각’을, ‘조각’은 ‘작은 부분’을 나타내므로, 이를 이용하여 ‘쪼가리지, 쪼각지, 쪼가리짐치, 쪼각짐치’라고도 쓴다.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쓰는 말이다. 경남에서는 ‘뻬딱짐치’라고도 한다. 무를 조금 삐딱하게 썰어 담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인 것 같다. 북쪽에서는 고장에 따라 함남에서는 ‘간동지’, 평북에서는 ‘나박디’, 재중동포들은 ‘쪽다지, 구물짐치’ 등을 쓰고 있다.
‘뻐꾸기, 얼룩이’와 같이, 소리시늉말이나 짓시늉말을 이용하여 누구나 알기 쉬운 우리말을 만드는 과정을 ‘깍두기’가 잘 보여준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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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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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4. 해는 중천에 뜨는 그 순간부터 기운다(주아부)
주아부는 주발의 아들로서 군사 작전에 뛰어나고 군율이 엄하기로 유명했다. 기원 전 158년 흉노가 대규모로 한나라에 쳐들어 왔다. 이에 문제는 주아부를 비롯한 세 장군을 파견해 패상과 극문, 그리고 세류 지방을 지키도록 했는데, 이때 주아부는 세류의 방어를 맡게 되었다. 세 장군을 파견한 후 문제는 친히 일선으로 가서 병사들을 위문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패상과 극문 지방에 갔는데 황제가 탄 수레가 곧장 성문으로 달려들어 갔지만 누구 하나 막아서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장군 이하 모든 병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나와 환영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다음으로 세류의 주아부 군대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은 모든 병사들이 갑옷을 입고 손에는 서릿발 같은 칼과 창을 들었으며, 성벽 위에는 화살이 겨냥된 채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윽고 문제 일행의 선발대가 성문에 도착했는데, 성문의 경비병은 그들을 막아서며 결코 들여 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선발대의 한 사람이 엄숙한 목소리로, "폐하께서 곧 도착하시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비병은, "장군의 명령이 '군중에서는 장군의 말만 들을 것이며, 설령 폐하의 명령이 있더라도 듣지 말라'고 하셨소."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뒤 바로 문제의 행차가 도착했는데, 역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문제는 정식으로 사자를 장군에게 보내, "짐이 오늘 병사들을 위로하고자 하노라."하고 전하도록 하였다. 이에 주아부는 비로소 성문을 열어 황제 일행이 통과하도록 허락했다. 행렬이 군영으로 들어서려는데 수문장이 호위 군관에게 이렇게 귀뜀해 주는 것이었다. "장군이 정한 규정에 의하면 군영 안에서는 말을 달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호위 군관이 황제에게 이 사정을 말하니 황제는 말이 천천히 걷도록 말고삐를 느슨히 하였다. 드디어 황제가 본부에 도착해 보니 주아부 이하 모두가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히 늘어서 있었다. 주아부는 황제를 보자 두 손을 모아 눈 높이로 들며 절을 하는 것이었다. "몸에 군장을 차렸을 때에는 절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렇게 뵙는 것을 양해해 주소서." 이에 황제는 크게 감동하여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나중에 황제가 성문을 나서자 황제의 수행원들이 모두 주아부가 한 행위를 비판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그 정도라야 비로소 장군이라 할 수 있다. 패상이나 극문이야 아이들 장난이지 그게 어디 군대 꼴인가?"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사람들은 군기가 엄한 군대를 세류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주아부를 크게 신뢰하여 태자의 앞날을 부탁하며 말했다.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겨도 주아부라면 군대를 통솔하여 막중한 임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면서 그를 거기장군에 임명하였다.
도전은 있으되 응전은 없다
그 후 오, 초 등 7개 제후국이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주아부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이때 주아부가 황제에게 말했다. "지금 반란군은 사납고 빨라서 정면으로 맞선다면 승패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양나라 땅을 잠시 내 준 다음 저들의 보급로를 끊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아부는 병사들을 형양 땅으로 집결시켰다. 당시 반란군은 양나라 땅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양나라는 위기에 빠지자 주아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주아부는 못 들은 척하며 군대를 양나라에 못 미친 곳에 머물게 하면서 튼튼하게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양나라 지방에서는 날마다 사자를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주아부는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황제에게 직접 글을 올려 호소하였고, 이에 황제도 양나라 지방에 구원병을 파견하라고 주아부에게 명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아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주아부는 믿을 만한 부하를 시켜 날랜 기습 부대로 반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해 버렸다. 그 후 보급로가 끊겨 굶주림에 시달린 반란군은 사력을 다해 싸움을 걸어 왔다. 하지만 주아부는 맞서 싸우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인가는 병사들 중 일부가 크게 소란을 피우며 떠들어 댔지만, 주아부는 장막 안 침상에 누워 잠을 자면서 내다보지도 않았다. 그 소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 잠잠해졌다. 그 뒤로도 반란군은 매일같이 공격해 들어왔지만, 주아부는 명령을 내려 절대 응전하지 말도록 했다. 반란군은 정예 부대를 투입해 성벽을 허물어뜨리려 했지만, 철통같은 방어벽을 결코 뚫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해 봐도 성과가 없자 반란군은 이제 제 풀에 지쳐 철수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이제까지 그토록 맞서 싸울 생각도 하지 않던 주아부가 전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굳게 닫혔던 성문을 열고 한꺼번에 몰려나가며 반란군을 포위해 들어갔다. 삽시간에 반란군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대패당했다. 주아부는 그 여세를 몰아 반란군을 끝까지 추적해 궤멸시켰다. 이때 반란군의 총소이던 오나라 왕비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양자강 남쪽의 단도현까지 도망쳤다. 그러나 그는 그 지방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했고, 그렇게 하여 반란은 3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실로 오, 초 7국 반란의 진압에 있어 주아부는 일등 공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아부는 그 공로로 승상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 후 황제가 세상을 뜨고,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바로 경제였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정상에 올라간 주아부의 내리막길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주아부는 자신을 과신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오, 초 7국의 반란을 진압하고 난 후 그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한나라 초기에 왕조를 흔든 2대 사건으로 여씨의 전횡과 오, 초 7국의 난이 있었는데, 주아부와 그의 아버지 주발이 각각 이 위기를 해결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아부는 자기들 부자가 아니었으면 한나라가 망했으리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주아부가 황제에게 간섭하는 일이 차츰 많아졌다. 율희의 아들을 태자에서 폐위시키려는 경제의 생각에 주아부는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경제의 부인인 왕부인의 오빠를 제후로 임명하려 할 때도 격렬히 반대했다.
"고조(유방)의 말씀에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공적이 없는 사람은 제후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자 경제는 매우 기분이 상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를 제후로 임명하지 못했다. 그 뒤 흉노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던 여섯 명이 한나라에 투항해온 적이 있었다. 경제는 흉노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그들을 제후로 임명하고자 했다. 이때 주아부가 나서서 말했다.
"그 자들은 자기 군주를 배신하고 투항했습니다. 지금 그들을 제후로 우대한다면, 폐하께서는 장차 신하들이 배신할 때 어떻게 비난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제는 주아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자기 생각을 고집했다. 이에 주아부는 심기가 불편해져서 병을 핑계삼으며 조정 회의에 나가지 않았고 결국 해임되었다. 그 뒤 주아부는 아버지 주발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상방이라는 곳에서 갑옷과 방패 5백 개씩을 사들였다. 무덤에 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원래 상방은 궁궐에서 쓰는 물건만 만들던 곳인데, 주아부가 이를 어긴 것이었다. 그래서 주아부는 조사를 받게 되었고 그는 계속해서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제가 이 소식을 듣더니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며 바로 정위에게 넘기도록 명령했다. 이에 주아부는 자살하려고 했지만, 아내가 극구 말렸다. 주아부는 그 뒤 정위에게 끌려가 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단식하다 굶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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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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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2부 활성산소가 주범인 수많은 질병
프리라디칼이 일으키는 질병들
동맥경화증의 출발점에 프리라디칼이 있다
꽤 전문적인 의학용어 중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장 널리 알려진 용어 중의 하나가 동맥경화증일 게다. 동맥이 탄력성을 잃으면서 좁아지는 것을 말하는데, 쉬운 말로 혈액순환이 안된다는 뜻이 된다. 만일 심장을 먹여 살리는 심장동맥이 동맥경화증으로 좁아지고 혈액 성분이 엉겨서 생긴 혈전증으로 혈관이 막히면 협심증, 심근경색증 같은 심혈관 질환이 된다. 마찬가지로 뇌로 가는 뇌혈관에 이런 일이 생기면 중풍이라 부르는 뇌혈관 질환이 생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질환은 현대인들의 으뜸가는 사망 원인이다. 따라서 튼튼한 혈관과 맑은 피를 유지하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물론 삶의 질도 동맥경화증 환자에 비해 훨씬 좋다.
그러면 어떤 과정으로 해서 멀쩡하던 혈관이 막히게 될까?
첫째, 동맥경화증의 초기에는 혈관벽에 지방반이라고 부르는 황색의 조그마한 융기가 생긴다. 그리고 지방반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안에 수많은 지질덩어리를 갖고 있는 포말세포라는 것들이 존재한다. 둘째, 지방반이 점점 커지면 이를 섬유반이라 하고, 또 여기에 여러 물질들이 침착이 되면 차차 혈액순환에 문제가 생긴다. 셋째, 이 섬유반이 갈라지거나 혹은 다른 원인으로 혈관에 손상이 오면 물에 안 녹는 단백질 덩어리인 섬유소라는 물질이 생긴다. 그리고 여기에 혈소판, 적혈구 등이 같이 엉겨 붙으면서 소위 혈전이라는 응고체가 생기고 결국은 혈관이 아에 막히게 되는 것이다.
동맥경화증을 근원적으로 예방하려면 그 출발점을 알아야 한다. 거기가 어딘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현재까지는 혈관내피세포가 손상된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혈관내피세포란 혈액과 혈관벽 사이에 위치한 세포를 말한다. 바로 이 내피세포에 손상이 오면 그때부터 동맥경화증의 싹이 생긴다는 것이다.
무엇이 혈관내피세포의 손상을 일으킬까?
고혈압은 혈관 내의 압력이 높아진 상태를 말한다. 수압이 높으면 둑이나 관이 터지듯이 혈관 내의 압력이 높으면 혈관이 상할 수 있다. 또 수도관에 오염물질이 들어오면 파이프가 잘 부식되듯이 혈액 속의 여러 독소(담배 성분, 당뇨병 때의 고혈당)가 많아도 혈관에 손상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혈관내피세포에 손상이 오면 피 속을 흐르던 세포들이 손상 부위로 몰려서 들러붙게 된다. 그런데 얌전히 들러붙고마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프리라디칼을 마구 만들어낸다. 이 프리라디칼이 피 속에 있는 물질들을 산화시키고 해를 입힌다. 피 속에 있는 물질 중에서 저밀도 지질단백(밀도가 낮은 지질과 단백질의 결합체로 영어로는 Low Density Lipoporotein이라 함 이후부터는 LDL이라는 약자로 쓰기로 함) 안에 들어 있는 나쁜 콜레스테롤이 프리라디칼의 공격을 잘 받는다. 만일 좋은 콜레스테롤을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프리라디칼에 대한 방어벽이 약한 사람이면 더욱 그 피해 정도가 크다. 결국 동맥경화증이 진행하고 혈전증이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동맥경화증의 프리라디칼 이론이다.
동맥경화증 발생의 프리라디칼 이론에 의하면 혈전증이 생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LDL이 프리라디칼에 의해 과산화변질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론은 이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LDL이 과산화변질되면 어떤 과정으로 혈전증이 생기게 될까?
첫째, LDL의 과산화변질이 생기면 혈관내피세포에 더 손상을 주고 이어서 더 많은 식세포들이 들러붙고, 그럼 또 더 많은 활성산소들이 만들어지고 하는 악순환 고리가 생긴다. 둘째, 식세포 외에 피 속의 임파구들까지도 손상 부위로 모이며 셋째, LDL의 과산화변질이 오면 성장물질이 분비되어 세포 증식이 되고 섬유조직의 성장이 촉진된다. 넷째, 과산화변질 부위가 분해되면서 지지라디칼 등 같은 독소들이 생성되며 이들은 LDL 안에 들어 있는 단백질까지 공격을 하게 된다. 다섯째, 이런 식으로 LDL의 단백질이 프리라디칼의 공격으로 상하게 되면, 식세포들이 이를 알아차리고는 변질된 LDL들을 빠른 속도로 잡아먹는다. 왜냐하면 변질되어 상해 버린 LDL을 처리해 주지 않으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세포 안에는 전과 달리 손상된 지질들로 차게 되는데, 이렇게 된 식세포들을 포말세포라고 부른다.
결국에는 점점 혈관내피세포 손상 부위에 지질덩어리가 가득 찬 포말세포들이 늘어나면서 덩어리가 차차 커지는데, 이것이 앞서 말한 지방반이라고 부르는 황색의 융기이다. 그리고 더 진행되면 결국 혈관이 막히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는 한번쯤 병원에서 피검사를 한 결과, 의사들이 콜레스테롤이 높으니 주의하라든가 약물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전체 콜레스테롤 수치만을 갖고 그러는 게 아니라, 실은 LDL수치가 높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것을 알아두라. 혈액 내 콜레스테롤치가 높다는 것은 결국 과산화변질될 수 있는 LDL의 양도 많다는 의미이며, 동맥경화증의 후보자라는 의미인 것이다. 금연 없이 도맥경화증 치료를 바라지 말라고 하는 이유도 흡연을 하면 LDL치가 올라가기 때문에 그렇다. 또 흡연 성분 자체가 피 속으로 들어가서 LDL을 산화시키기도 하며, 동시에 프리라디칼의 공격을 막아내는 물질을 소모시키기 때문이다. 왜 의사들과 영양학자들이 매일같이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잘 먹으라고 그토록 강조하는가? 이런 식급관을 가진 사람은 LDL의 산화변질이 덜 되기 때문인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이다.
활성산소가 이로움을 주는 유일한 경우
활성산소들이 인체에 해를 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한번쯤 상처에 균이 들어와 덧나서 곪다가 나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때 이 균들을 죽이는 역할을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백혈구에서 만드는 활성산소인 것이다. 혈액 내에는 백혈구라는 세포가 흐르고 있는데, 이들은 외부에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이물질들이 들어오면 혈액 속에 그 숫자가 증가되면서 균들을 찾아내고 잡아 먹으며 죽이는 일을 한다. 그래서 이런 작용을 식균작용이라 하며, 식균작용을 한다 해서 식세포라고 부른다. 병원에서 하는 염증이 있나 없나 보는 혈액검사의 하나도 바로 백혈구 숫자를 조사해서 정상보다 증가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식균작용은 다음과 같은 대단히 정교한 메커니즘에 의해 일어나게 된다.
우선 이물질을 처리하기 위해 이물질이 들어온 곳으로 백혈구가 출동한다. 이어서 이물질을 찾아내면 그 안으로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과산화수소를 만들어낸다. 세균 안으로 침입한 과산화수소는 세균 안에서 강력한 활성산소인 히드록시라디칼을 만들어 세균 안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또 백혈구는 세균을 단번에 죽일 수 있을만큼 강력한 물질을 만들어내는 페록시다제라는 효소다 갖고 있다. 외부에서 침입한 균을 죽였지만 백혈구는 자기가 만들어낸 독물질로 인해 역시 못 견디고 같이 죽게 된다. 결국 상처가 덧나서 생기는 고름은 죽은 외부 침입균과 이들과 함께 전사한 백혈구들의 전쟁 흔적이며, 백혈구가 갖고 있는 효소로 인해 푸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다.
침입자와의 전쟁에서 백혈구가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독성이 아주 강한 어떤 균은 백혈구가 만든 활성산소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러면 균들이 방어벽들을 깨고 온몸으로 퍼져 우리 생명을 위협한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서 그 균을 죽이는 강력한 항생제의 투입이 필요하게 된다. 선천적으로 백혈구 기능이 떨어진 경우나 혹은 후천적으로 프리라디칼 방어벽이 약한 사람은 면역기능이 약해진다. 이 때는 약한 균이 들어와도 이를 못 이겨내고 감기나 폐렴같은 염증이 아주 잘 걸리게 된다.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프리라디칼은 세균을 죽이기는 하지만 위험한 살상무기이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많이 만들어지면 어떻게 될까? 우리 몸이 외부에서 들어온 세균을 죽이게 되는 메커니즘에는 활성산소가 관여된다. 하지만 너무 많이 만들어지거나 하면 세균만 죽이는 게 아니라 멀쩡한 주위 인체조직까지도 해를 입히게 된다. 이 상태가 너무 지나치거나 오래가면 주위 정상 조직에도 손상을 입힐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되어 생기는 대표적인 질병이 류마티스 관절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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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정미사화를 빚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간 정언각
정언각(1498-1556)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근부이다. 진사 정희검의 아들이고 허암 정희량의 조카이다. 중종 11년(1516)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7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명종 2년(1547)에 정언각이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그의 딸이 제 남편을 따라 시댁으로 돌아가는데 전송하러 양재역을 지나다가 벽에 붙어 있는 불온물을 보니 이름은 숨긴 채 붉은 글씨로 씌어 있었다.
여자 임금(문정왕후를 가리킴)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은 밑에서 권력을 농락하니 국가가 망할 것은 서서 기다리는 격이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정언각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매우 즐거워하며 벽에 붙어 있은 글을 그대로 오려 가지고 대궐로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며 그것을 봉하여 올렸다.
"이것은 소원을 이루지 못하여 임금을 원망하는 자들이 한 짓이다"
명종이 명을 내려 세 정승을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삼정승인 윤인경, 이기, 정순봉이 아뢰었다.
"이 글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한 짓이 아닙니다. 지금 이 벽에 붙었던 글을 가지고 증거를 삼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면 올바르지 못한 논의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만은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을사사화 때에 당연히 처벌받았어야 할 대상 인물들의 죄의 경중을 순서대로 적어 올렸다.
"지금 적어서 올리는 것은 이번 양재역의 벽에 붙어 있던 글을 보고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죄를 결정할 때에 가볍게 처벌하여 형률대로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논의가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니 이는 화근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입니다. 그러니 다시 죄를 정한다는 뜻을 교서로 만들어 중앙과 지방에 유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이 답을 내렸다.
"봉성군 원, 송인수, 이약빙은 사형에 처하고, 이언적, 정자, 이염은 먼 변방에 가두어 두며, 임형수, 노수신, 정황, 유희춘, 김난상은 먼 섬에다 가두어 두고, 권응정, 권응창, 정유침, 이천계, 권물, 이담, 한수, 안경우는 먼 지방에 부처하며, 권벌, 송희규, 백인걸, 이언침, 민기문,황박, 이홍남, 김진종, 윤강원, 조박, 안세형, 안함, 윤충원은 중도부 처하라"
그러자 정언각이 또 혼자서 아뢰었다.
"임형수는 윤임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그의 심복으로 수족처럼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매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윤원형을 죽여야 된다고 떠들어댔으니, 그가 윤임과 마음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단지 귀양만 보내는 것은 너무 가벼운 듯합니다" "양재역의 벽에 붙어 있는 글을 본 사람이 한 사람뿐만이 아닐 터인데 그대가 혼자 와서 아뢰었으니 신하로서의 도리에 당연하도다. 임형수는 죄는 같이 짓고 벌을 달리 가볍게 받았으므로 내가 매우 이상스럽게 생각하였다"
문정대비가 그를 칭찬하고 임형수에게 사약을 내려 자진하게 하였다. 향윤온이 윤임에 연좌되어 해남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무렵 정언각이 전라 감사가 되어 양윤온이 죄인의 신분으로 관사에 드나든다는 보고를 받고 그를 잡아다 곤장을 치게 하였는데 양윤온이 매를 못 이겨 죽었다. 뒤에 정언각이 경기 감사가 되어 말에서 떨어졌는데, 한쪽 발이 등자에 걸려 벗겨지지 않은 채 말이 마구 달렸으므로 머리통이 박살이 난데다 뼈가 부서지고 짓이겨져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들 통쾌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정척이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가 되었으나 소인의 자식이라 하여 버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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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오다 가다 들은 말을 또한 오다 가다 지껄임을 말한다.
'논어'의 양화편에 이르기를 "앞길에서 들은 좋은 말을 마음에 간직하여 수양거리로 삼는 게 아니라 뒷길에서 곧 남에게 지껄임은 스스로 그 덕망을 버림이니라, 착한 말은 온통 그 마음에 간직하여 제 것으로 삼지 않으면 덕을 쌓을 수 없다"
또한 후한의 반고에 의하면 "무릇 소설이란 것의 기원은 군주가 서민의 풍속을 알기 위하여 낮은 벼슬아치에게 일러 지껄이게 한데서 비롯된다. 즉 세상 얘기며 항간의 소문은 '도청 도설'하는 무리가 지어낸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애초에는 패관소설이라 했으니 패관이란 낮은 벼슬아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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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2. 관음보살상 앞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경상도를 두루 돌아다닐 때였다. 결제(불교에서 안거"安居"를 시작하는 일을 이르는 말) 해제)기간 중이었지만 나는 그쯤 아무 곳이나 앉으면 결제고 서면 해제다 하는 잘못된 생각으로 만행을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발길이 닿은 곳이 산 속의 암자라기보다도 자그마한 토굴이었는데 마침 초하루였다. 내가 토굴에 당도했을 때 노보살님만 덩그러니 혼자 법당에 앉아 절을 하다가 나를 반기는 거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한쪽 다리를 저는 데다 한쪽 손까지 풍을 맞았는지 제대로 놀리지도 못했다.
"스님, 마, 부처님이 보내셨는갑다." "초하룬데..." "마, 스님이 하믄 안 되겠십니껴. 여 계시던 스님이 가버렸십더."
보살님은 그 말씀만 하시고 내게 삼배를 한 다음에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거였다. 가사장삼을 수하고 나는 예불을 위해 목탁을 내렸다. 그렇게 예불을 모시는데 보살님이 마지(부처에게 올리는 밥)를 올리지 않는 거였다. 내가 보살님을 보고 '마지요'하니까 보살님이 슬픈 눈빛을 내 비쳤다.
"공양미가 없는데예." "그럼 모래라도 한가득 퍼 오세요."
나는 위악적인 눈을 하고 보살을 노려보았다. 보살의 무능과 무지도 미웠고 부처님도 참 너무하신다는 생각에서였다. 큰 절에 계시는 부처님은 공양에다 과일이며 떡,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시는 거야 그렇다치고 배탈이 날 지경이신데 산 속의 가난한 토굴에서는 제때 공양도 못 하시기 때문이었다. 나는 속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빈한한 토굴이라는 건 눈치로 알았다하더라도 공양미까지 없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보살님은 모래를 퍼서 어떻게 마지를 올리느냐며 곤혹스런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살님, 그럼 혼자서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보살님은 그동안 산에서 나물을 따다가 죽을 쑤어 먹었다는 것이다. "보살님. 그럼 산나물은 있어요?" "그럼예. 마, 더덕이 많심니더." "그럼, 가서 이 마지 그릇에 나물하고 더덕을 깨끗이 씻어서 있는 대로 올리도록 하세요."
개금이 벗겨진 못생긴 목불님 앞에서 나는 예불을 계속했고 보살님은 신바람난 듯 공양간으로 가는 거였다. 나는 염불을 하면서도 슬쩍 보살님을 보았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처음으로 더덕으로 마지를 올리며 마지 종을 치는 보살님은 기쁨의 환희가 가득 찬 얼굴이었다. 보살님은 더덕하고 산나물을 불기가 아닌 커다란 광우리로 담아 내오시는 거였다.
"우와, 우리 부처님, 오늘 산나물로 배탈이나 안 나실까."
혼자말을 하며 내심 나는 보살님의 신심을 보고 한철 날 수 있겠구나 하는 기쁜 마음으로 우리는 예불을 끝내고 공양간에서 더덕을 구워 먹는 것으로 아침 겸 점심식사를 마친 다음, 보살님과 함께 나무막대 하나와 바구니를 가지고 산을 뒤지며 더덕을 캤다. 하루종일 캔 더덕과 그동안 보살님이 캐어서 모아 두었던 더덕을 삼십 리 시장에다 내다 팔고, 내가 가지고 있던 돈과 함께 식량을 구해 올라오는데 보살님은 기우뚱 절뚝 기우뚱 절뚝 하는 걸음과 함께 먼 길인데도 연신 관세음보살을 주력하면서 나의 뒤를 따라오는 거였다.
"보살님, 저랑 같이 걸어요." "아니라예, 스님요. 제가 감히 어디라고 스님캉 나란히 걸어예?" 하면서 보살님은 내가 약방에서 더덕을 캐다가 다친 상처에 바르기 위해 사 준 약을 보고 또 보고는 감격해 하는 거였다.
"보살님, 그렇게 좋아요?" "그라믄예. 지는 복받은 지집인 기라예."
나는 빙긋이 웃으며 보살님의 힘줄이 툭툭 불거지고 주름진 손을 끌었다.
"보살님, 덥죠? 우리 저기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사 먹을까요?"
나는 보살님에게 쌀과 반찬거리를 맡기고 구멍가게로 달려가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왔는데 마침 시외 버스가 도착하였다. 웬 늙은 여자와 젊은 스님이 히히덕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빨며 차에 오르자 그간의 우리 사정도 모르고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보살님, 아이스크림이 맛있죠." 내가 보살님께 묻자 보살님이 벌쭉 웃었다. "이 세상에서 제가 먹어본 음식 중에서 가장 맛이 있네예."
시골 버스는 뒤뚱거리며 좁은 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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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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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8. 한반도 분단 (포기되는 정통성과 문화주체성)
'현대'라는 의미
근대 자연과학과 그에 기초한 서양의 산업혁명은 인류의 일상생활에 혁명적이라고 부를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인간 노동의 성격이 수동적인 것에서 능동적인 것으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즉 산업혁명은 인간의 노동력을 자연 재창조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을 통해 생산된 결과물, 곧 재창조된 사물은 자연사물이 인간생활에서 누렸던 지난날의 지위와 명예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사회의 여러 관계들은 주요한 변화를 겪어야 했다. 먼저 현대는 세계시장의 형성단계, 곧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으로 돛을 올린 현대에는 대량으로 생산된 상품이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겨냥하여 시장으로 유입되었으며, 이런 현상은 대량생산 체계의 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촉진되고 축적되어 마침내 만성적인 대량생산의 사회구조가 형성되었다. 그 결과 일정한 문화권과 민족국가를 기본 단위로 하는 시대에서 마침내 세계를 기본단위로 하는 시대로 바라게 된 것이다. 현대의 또 다른 특징은 인간의 지위가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물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인간들이 자신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자신의 사회적 권리를 늘려왔다. 또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사회주의가 등장함으로써, 두 체제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사회적 지위가 한층 높아지기도 했다. 즉 현대는 이른바 민주주의적인 권리가 확대되는 주요한 시기였으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체제가 공존하면서 경쟁하는 시대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이런 경쟁은 지금까지 세계를 이끌어오던 각 문화권의 붕괴와 재편을 촉진했다. 그렇다고 해서 각 문화권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물론 아니다. 아직도 세계는 각각의 문화권으로 표현되며, 때로는 그 같은 구분에 의해서만 현실을 정확히 묘사할 수 있기도 하다. 세계시대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각 문화권의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각 문화권이 더 이상 역사발전의 고립적 단위가 될 수 없음을 뜻한다. 각 문화권은 그런 사실만 가지고도 자기 권역과 자기 시대가 붕괴되거나 종말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유럽 시대의 종언', '중국적 세계질서, 화이관의 붕괴'라고 하는 표현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어떤 문화권은 자신의 틀을 유지하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세계체제에 편입되었으며 ,또 어떤 문화권은 자신의 틀을 잃어버리면서 수동적으로 세계체제에 편입되었다. 비교적 역사가 짧은 미국 문명권과 러시아 문명권이 자신의 틀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세계체제에 편입된 경우라면, 유럽 문화권이나 중국 문화권은 상대적으로 그 틀을 다치게 하면서 세계체제에 편입된 경우이다. 물론 기마종족의 동아시아 문화권은 그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세계체제에 편입되었다.
현대가 고립적 지역문화권을 넘어서는 세계시대라고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현대는 각 지역문화권의 독자적 성격을 한층 빛나게 만든 시대이기도 하다. 즉 세계시대에도 각 문화권의 중요성은 결코 낮아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각 사회와 나라는 자신의 고유한 문화권을 발판으로 삼아야만 비로소 세계무대의 주인다운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무대의 경쟁단위는 궁극적으로 자기 문화권이며, 자신의 고유한 문화권을 잃어버린 사회나 나라가 세계사회에서 어떤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경우는 아직까지 찾아볼 수 없다.
산업혁명을 앞서 수행한 이른바 제국주의 국가 또는 선진 자본주의 열강들 사이의 경쟁관계에서는 문화권 내부의 심각한 갈등이 제국주의 전쟁 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문화권 내부의 갈등관계는 차츰 협조와 공존 관계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직접적 영향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사회와 이들 선진 열강들 사이의 관계는 대부분 문화권과 문화권 사이의 관계였으며, 이른바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식민지 지배나 종속국화의 형태를 띠고 이루어져왔다. 그럴 경우 한 문화권에 의한 다른 문화권의 해체작용이 일어나면서 인종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관계는 아직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약소국가로 구성되어 물리적 방어력이 떨어지는 문화권에 대한 '선진' 문화권의 경제적,정치적 지배가 공공연하거나 은밀한 형태로 잔존하고 있으며, 나아가 문화권 자체를 말살시킬 수도 있는 문화적 지배가 이와 관련하여 넓게 그리고 뿌리깊게 이루어지고 있는 탓이다. 눈앞의 우리 현실이 이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형태는 하나의 국제적 구조로까지 파악되어도 무방하다. 더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적대적 경쟁관계는 이런 현상을 고착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사회주의를 선택한 '선진' 문화권과 자본주의를 선택한 '선진' 문화권은 서로 대결하는 과정에서 세계의 모든 문화권을 자기들 중심으로 재편하려고 했으며, 그 결과 엄청난 문화적 파괴행위가 자행되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대립이 사라진 뒤에도 자기 문화권을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하려는 현상은 물론 계속되고 있지만 말이다.
분단의 성격과 과정
우리나라의 분단은 크게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안으로는 기마종족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내부붕괴를 상징하며, 밖으로는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세계화 과정에서 '선진' 문화권에 의해 우리 문화권이 해체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요컨대 우리의 분단은 그릇된 대동아공영권으로 말미암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내적 응집력이 사라졌으며, 이에 따라 세계화를 주도하는 문화권에 의해 우리 문화권이 급속하게 해체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1945 년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또 한 개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두 도시는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었으며, 전의를 상실한 일본은 마침내 항복을 선언했다. 이미 일본은 1944 년 6월의 마리아나 해전을 계기로 패망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1945 년 5월에는 이이오 섬과 오키나와 섬을 점령당함으로써 패전의 절차를 밟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릇된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음으로써 동아시아 주민들로부터 다른 제국주의자들이 받은 것보다 훨씬 강력한 저항을 받은 결과, 일본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상태에 있었다.
어쨌든 일본 군국주의의 패망은 기마종족 중심의 동아시아 문화권을 철저하게 해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내세운 그릇된 대동아공영권 때문에 동아시아 문화권이 내적 응집력이 약화된데다 강제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던 그 문화권의 틀이 일본의 패망을 계기로 완전히 해체되어버린 것이다. 그릇된 대동아공영권에 맞서기 위해 동아시아의 주민들은 현실적으로 일본과 필적할 만한 세력을 찾아나섰고, 그 과정에서 중국 한족과 손잡거나 소비에트연방 혹은 미국과도 손을 잡게 되었다. 즉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은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주민의 분열을 촉진시킨 셈이다. 그리고 동아시아 주민의 분열현상은 자신들이 손잡은 각 세력에 의해 동아시아 문화권이 철저하게 해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은 식민지 시기를 넘기면서 과거의 유산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오늘날까지 그 주체성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 대신 일본과 맞서기 위해 손잡은 세력들의 문화가 물밀 듯이 쏟아져들어왔다. 소련과 손잡은 결과 사회주의와 함께 러시아 문화가 들어왔으며, 미국과 손잡은 결과 국가독점자본주의와 함께 미국 문화가 들어와 주인 노릇을 했다. 또 중국과 손잡은 결과 중국적 사회주의와 함께 중국 문화가 다시 밀려드는 시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군국주의가 패배해서 물러간 뒤에도 왜곡된 형태의 기마종족 문화 곧 일본 군국주의의 문화적 잔재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바로 이런 문화권의 충돌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물밀 듯이 밀려든 문화 가운데 주도권을 가진 것은 사회주의 소련을 배경으로 한 러시아 문화와 자본주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미국 문화였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는 이들의 정치적,국제적 세력관계에 따라 정치적,문화적으로 재편성될 수밖에 없었다. 두 차례의 세계전쟁이 겪은 뒤여서 그들은 극단적인 대결을 원하지 않았다. 협상을 통해 동아시아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재편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협상의 결과 한반도는 북과 남으로 나뉘어 각각 사회주의 소련(러시아 문화권)과 자본주의 미국(미국 문화권)의 세력권으로 편성되었고, 만주를 비롯한 지역은 중국(중국 문화권)과 소련의 세력권으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패망자 일본은 나름대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미국의 세력권으로 끌려들어갔다. 어쨌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은 이제 주체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율적인 합의와 협상에 의해 재편성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협상과 합의는 일본의 패망 이전부터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와 관련해서 진행된 첫 협상은 1943 년 3월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영국 외상 이든의 워싱턴회담이다. 그들은 이 회담에서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날 한반도는 국제 신탁통치 아래에 둔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면서,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타율적인 재편성에 합의하였다. 물론 이런 합의와 달리 그해 11월에 열린 카이로회담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한반도를 자유독립시킨다"고 하여, 타율적인 재편성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타율적인 재편성은 이미 움직일 수 없는 흐름이었으며, 미국이 소련과 손잡는 과정에서 이 원칙은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먼저 테헤란회담에서 소련(러시아 문화권)은 사할린 열도를 비롯한 태평양 연안의 확보를 조건으로 루스벨트가 제의한 신탁통치안에 동의했다. 또 1945 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는 미국과 소련 및 중국이 20~30 년 동안 한반도를 신탁통치하기로 합의했으며, 중국의 내부혼란으로 말미암아 중국이 제외된 상황에서 열린 그해 7월의포츠담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이 접수할 군사분계선을 설정했고, 그 뒤 38선의 설정과 함께 한반도는 분단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 한반도의 분단과 함께 만주지역은 만주족이 아닌 중국 한족의 영역으로 확정되었고, 태평양 연안지역은 소련의 영역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으로 말미암아 동아시아는 자신의 문화권을 바탕으로 삼아 세계무대에 주체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타율에 의한 문화 왜곡과 변질 및 종족분열의 어두운 세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주체성의 좌절
타율에 의한 문화 재편성과 외부세력에 의한 정치적 결정을 거부하는 주체적인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정이 복잡한 만주지 역은 제외하고 우리나라의 경우만 살펴보더라도, 이런 노력의 흔적은 많다. 식민지 시기의 신간회(1927. 2~1931. 5)는 나름대로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외부 문화권에서 배워온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넘어 민족자주성의 회복이라는 공통의 명제를 내걸고 좌파와 우파가 결합했던 신간회는 매우 초보적이고 불건전한 형태의 주체적 운동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사회운동은 민족운동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구호 아래 민족의 주체적 단결을 주장하며 한때 4 만 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렸지만, 결국 우파 지도부의 변질과 사회주의 소련이 주도하는 국제기구 코민테른의 영향으로 힘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주체적인 입장에서 나라를 세우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45 년 8월 15일에 발족한 건국준비위원회는 대중의 힘을 바탕으로 자주적인 주권 확립에 매진한다는 계획 아래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참여한 단체였다. 물론 미국 문화권의 그늘 아래에서 정치적 이해득실만 따지던 일부 세력이 참여를 거부했지만, 145개나 되는 인민위원회를 설치할 정도로 정치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실질적인 건국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입장에서 동아시아 문화권의 해체를 서두르던 미국과 소련에 의해 좌절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38선 이남의 점령자이자 외부세력인 미군정에 의해 타율적으로 불법화되었으며, 38선 이북에서도 이것을 기회로 소련이 주도하는 타율적인 정치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3 년이 지나자 남쪽과 북쪽에 주체성 없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마침내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이들 두 세력에 의해 주체성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1950 년의 '한국전쟁'은 그 성격상 주체성 파괴의 결정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세력은 늘 주체성을 무기로 삼아 다른 세력을 '괴뢰'라고 비판해왔다. 그러나 어느 세력의 눈치도 보지 않는 주체적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에 주체적인 정치세력은 아직 없다. 한반도의 분단 그 자체가 타율적인 주체성 파괴의 결정체이므로, 분단을 극복해야만 주체성이란 말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과 북, 북과 남의 분단은 그 어떤 이념과 명분에도 불구하고 작아진 우리 역사, 정치, 경제, 문화적 주체성을 상실한 역사를 상징할 따름이다. 나아가 그 주체성 상실은 한반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 해당된다. 즉 우리나라의 분단은 기마종족이 주도해온 동아시아 문화권의 해체를 상징하며, 우리가 문화적 노예상태 또는 준 노예상태에 있음을 가리킨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의 한반도 분단은 과거 삼국시대의 분열보다 훨씬 심각한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에는 문화적 주체성이 없으므로 두 정부에도 정통성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남과 북의 두 정부는 스스로를 정통이라 여기는 자세를 버리고 각자가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준비위원회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 속에서 타율적이거나 비주체적인 요소를 차츰 줄여나가야 한다. 생존과 관련된 현실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런 작업은 진행되어야 한다. 남도 북도 아닌 제3의 길(사실은 원래의 우리 길)이 남과 북 스스로에 의해 모색되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부정해나갈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작은 민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세력이 되어 세계무대에 주체적으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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