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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09 호
단기 4340. 12. 20 (음력 11. 1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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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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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춘계 문학작품 공모
세계불교문화예술신문사에서는 한국불교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참신하고 역량있는 문인을 배출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2008년 춘계문학작품을 공모합니다.
●응모대상
-시 : 10편 이상
-소설 : 200자 원고지 80매 내외 1편 이상
-수필 : 200자 원고지 1매 내외 3편 이상
-희곡 : 200자 원고지 80매 내외 1편 이상
●응모요령
-응모작품 겉봉에 "2008년 춘계문학작품 공모 응모작"이라고 명기한다.
-작품 응모시 본인의 간단한 프로필,주소, 연락 가능한 전화번호를 기재하고 인물사진 1매를 첨부하여야 한다.
-원고를 워드프로세스나 컴퓨터로 작성한 경우 원고 매수를 표시하여야 한다.
-응모작품에 대하여는 반환을 책임지지 아니한다.
●응모기간
-2008년 1월 15일 - 2008년 1월 30일(1월 30일 우체국 소인까지 유효함)
●당선작 발표
-2008년 3월 중 본지에 발표
-당선작에 한해서 본인에게 통보
-당선작이 없을 시에는 본사의 규정에 따른다
●심사방법 및 대우
-심사는 문단의 권위 있는 인사로 위촉한다
-당선 작품은 심사와 함께 본지에 발표한다
-당선 작가는 기성 문인으로 대우한다
-당선 작가는 각종 문인협회와 문학단체에 가입할 수 있도록 적극 추천한다
-당선 작가는 본지에 작품 발표의 기회를 보장한다
-당선 작가는 작품집 발간의 기회를 적극 주선한다
-당선 작품의 판권은 3년간 세계불교문화예술신문에 귀속한다
●문의
(011)9025-6843 (윤찬준)
●보낼 곳
-경남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271번지
세계불교문화예술신문사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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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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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패는 시기가 좌우한다. 시기를 맞추는 것은 방법을 아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 A.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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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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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라
어진 사랑이란 만물을 창조하는 천지의 마음이며, 또한 이것을 얻어 사람의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천지 변화가 아직 생기기 전에도 마음은 갖추어져 있었지만, 오직 어진 사랑만이 4계절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어진 사랑은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며 포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천지의 마음은 그 특성을 네 가지 갖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것이다. 이것들이 운행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차례로 되는데, 이 중에서도 봄을 만드는 기운은 네 계절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도 네 가지의 덕이 있다. 곧 인, 의, 예, 지가 그것인데, 인은 다른 덕을 모두 포함한다. 네 가지 덕이 발동하면 사랑과 공경심, 아름다움과 헤어짐이라는 정으로 되는데, 측은의 마음, 즉 사랑이 그것이다. 참으로 어진 사랑을 체험하여 보존할 수만 있다면, 모든 선의 원천과 백 가지 행위의 근본이 다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공자님의 가르침이 반드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진 사랑을 찾는 일'에 두는 까닭이다. 공자의 말씀에 '극기하여 참사랑을 알면 어진 사랑을 하게 된다'고 한 것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면 자기의 나쁜 마음을 이겨내고 하늘의 뜻에 돌아갈 수 있으면 이 마음의 본체가 다 생기게 되며 이 마음의 작용이 다 이루어지게 됨을 이르는 것이다. 집에 있을 때에는 공손한 태도를 가지며, 일을 볼 때에는 정성의 태도를 가지고, 남을 대할 때에는 받드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역시 이 마음을 보존하게끔 하는 근거이다.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우애로 형을 섬기고, 너그럽게 사물을 다루는 것이 역시 이 마음을 잘 다스리게 하는 근거이다.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세상에서는 만물을 낳는 마음이고, 사람에게서는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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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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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5장 문화, 환경, 종교
동양 사상으로 서양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가 - 조남호
동양은 정신, 서양은 물질, 동양은 윤리적이고 서양은 주지적이라는 등의 정신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양인들이 단지 정신적으로만 우월하다는 열등감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최근 서양 과학주의의 한계를 동양 사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 것인가?
타파해야 할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
동양 사상과 서양 사상을 비교하는 데에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 하나는 서양에서 바라본 동양과 서양의 비교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에서 바라본 동양과 서양의 비교이다. 원래 동양이란 말(Oriental)은 그리스 동쪽 지금의 아랍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런데 동양은 지리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의 중동지방, 인도, 파키스탄 등의 중남지방, 중국을 비롯한 극동 지방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동양이라고 하는 개념이 쓰이는 것은 서양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까지 서양에서는 동양을 서양과 다른 것, 더 나아가서는 서양보다 가치 없는 것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서양이 우수, 남성, 이성, 질서 등의 긍정적 가치 질서를 가지고 있다면, 동양은 열등, 여성, 감정, 혼돈 등의 부정적 가치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묘사는 서양이 동양을 침략하고 지배하기 위한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논리야말로 힘의 차이를 근거로 동양을 식민지로 만드는 이데올로기이다. 서양의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동양학 프로그램의 대다수는 이러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타파해야 한다. 따라서 동양이 여성적이고 감정적이고 혼돈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이러한 논리를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다음은 동양에서 바라본 서양과 동양의 비교이다. 종래에는 동양 사상과 서양 사상을 비교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동양은 정신, 서양은 물질, 동양은 윤리적, 서양은 주지적'이라는 정신을 아무런 의심 없이 주장해 왔다. 이러한 사고는 특히 요사이에 일어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몇몇 사건에 의해서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질적인 유혹이 아버지와 아들의 천륜 관계를 끊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연한 비판은 이들이 외국에 가서 배운 것은 도덕적인 정신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사건을 가지고 '전통적인 우리 것이 최고야'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들로 하여금 이러한 상황에 빠지게 한 우리의 사회적 현실을 문제삼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우리의 전통적인 정신만이 최고라고 할 때 이는 독선에 빠지기 쉽다. 그런데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 자시도 과거 봉건 시대의 산물임을 생각할 때, 이것을 비판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긍정하고 강요하는 것은 더욱더 문제가 클 것이다. 적어도 지금 사회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어 단순히 '효'를 부활시키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 사건의 아버지들이 여전히 권위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동양은 정신, 서양은 물질, 동양은 윤리적, 서양은 주지적'이라는 정신은 19세기 서양의 침략하에 동양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아이텐티티)을 정신 즉 고유한 문화에 두고 있었던 데서부터 발생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동도서기(동녁 동, 길 도, 서녁 서, 그릇 기), 중국의 중체서용(가운데 중, 몸 체, 서녁 서, 이용할 용), 일본의 화혼양재(화할 화, 혼 혼, 넓을 양, 재주 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어들은 단지 자신들이 정신적으로만 우월하다고 하는 열등감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식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수준이 얼마나 천박한가를 반증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동양과 서양의 비교는 이러한 한쪽만의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비교가 아니라 구체적인 논의를 통해 학문적으로 정초되어야 한다. 필자는 동양 사상과 서양 사상의 비교를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이라는 표현보다는 기(기운 기)와 인력이라는 문제를 통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동양 사상이란 중국 사상에 한정하는 것이고, 서양 사상도 뉴턴의 사고 방식에 한정한다.
기의 체험적이고 내면적인 사고
'기우(나라이름 기, 근심할 우)'라는 잘 알려진 우화가 있다. 이 이야기는 옛날에 기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였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열자'라는 책에 씌어 있다. 기우는 오늘날 쓸데없는 근심거리란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의문이 쓸데없는 근심거리일까? '열자'라는 책을 좀더 인용해 보자.
기나라 사람이 근심을 하여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자 그의 친구가 말하기를, "하늘은 기가 모인 것일 뿐이다. 어떤 곳도 기가 없는 곳이 없다. 우리는 움직이면서 호흡하기를 하늘 속에서 한다. 어찌 하늘이 무너지고 꺼질 것을 걱정하는가?" 그가 말하기를, "하늘이 과연 기가 모인 것이라면, 해 달 별들은 떨어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그의 친구가 말하기를, "해 달 별들 또한 기가 모인 속에서 빛나는 것이다.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해를 입지는 않는다." 이에 그가 의심이 풀리면서 크게 기뻐하였고, 그의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하늘과 해 달 별 등은 모두 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무너지거나 떨어지지 않는다. 간혹 별똥별같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기란 무엇이기에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하는가? 기는 원래 숨을 의미했다. 숨이란 바로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이다. 동양 사람들은 이 생명이 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했다. 따라서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나아가서는 무생물까지 모두 기로써 구성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왜냐 하면 무생물을 예로 들면 돌과도 서로 교감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존재는 이 기의 농축화와 희박화에 따라서 구성되는 것이다. 여기에 둘(음양:그늘 음, 양지 양), 다섯(오행:다섯 오, 행할 행)이라는 도식이 가해져, 기는 인간은 신체 구조와 사회, 자연, 우주를 설명하는 포괄적인 개념이 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거의 모든 학파 심지어는 불교까지도 기를 끌어들여 인간과 우주를 설명하였다. 원래 중국에서는 하늘을 기가 농축된 구체적 형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형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언젠가는 떨어질 것이라는 상식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친구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을 형체를 가지는 농축된 기가 아니라, 희박한 기로 이루어진 공간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의 친구는 또한 해 달 별 등이 하늘에 붙어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우주론은 해 달 별 등의 멀고 가까운 순서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 이는 이들의 우주론이 기로 되어 있다는 무한 우주론을 상정하는 것으로, 서양처럼 혹성계 모델 사고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해 달 별이 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해 달 별은 각기 자기의 운동 규칙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아울러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마도 기나라 사람의 친구는 이것을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규칙과 힘을 가정하였을 것이다.
후대에 학자들은 끌어당긴다고 하는 표현을 긴(긴할 긴)이나 강(힘쓸 강)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비유하자면, 높은 산에 올라가면 사람이 서 있을 수 없는데, 이는 기가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가 회전함으로써 긴장 상태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힘은 뉴턴의 인력을 생각나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힘이 어떻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힘에 대한 연구 대신에 해 달 별 등의 운행 주기에 관심을 쏟았다. 왜냐 하면 이러한 행성의 주기야말로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농업이야말로 적절한 시기 선택이 가장 중요하였고, 농업의 수확량에 따라서 국가의 흥망 성쇠가 좌우되었다. 이러한 행성 주기가 곧 역법이다. 이 행성 주기는 해를 정해 놓고 다른 행성의 주기를 맞추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원리를 정하는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특히 행성 주기와 힘의 관련은 고려되지 않았다. 행성 주기에 관심을 쏟은 것은 그래도 대상적인 세계에 관심을 쏟은 편이다. 오로지 자신의 내면적인 것만을 들여다보는 사고가 더욱더 문제이다. 이 점은 '열자'에서 기우가 나오는 부분의 마지막에도 잘 설명되고 있다.
기나라 사람과 그의 친구가 기뻐하는 것을 보자 장려자라는 사람이 그것을 보고 비웃었다. "기가 모인 것이 어찌 무너지지 않겠는가? 천지는 공중의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열자가 듣고서 비웃었다. "천지가 무너진다고 말하는 자도 그르고, 천지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도 그르다. 무너지고 무너지지 않고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전자도 한쪽의 입장이요 후자도 한쪽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살아서는 죽음을 모르고 죽어서는 삶을 모른다. 무너짐과 무너지지 않음에 내가 어찌 마음을 쓰겠는가?"
물론 이러한 사고가 중국의 사고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주 내지 힘에 대한 논의가 이런 식으로 결정되어 버린다. 이러한 사고야말로 기가 가지는 체험적인 사고를 잘 드러내는 것이다.
뉴턴에 의한 지상계와 천상계의 통일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인력을 생각해 낸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왜 인력하고 연결이 되는 것일까? 뉴턴은 우주의 행성들이 타원 궤도를 그린다는 것에 주목했고, 이것에는 힘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것을 힘의 법칙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곧 중력의 법칙이라고 하였다.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발견한 것이 이것이다. 뉴턴은 모든 물질이 서로 당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구가 사과를 당기고, 사과가 지구를 당긴다. 이 법칙을 천체에 적용한 것이다. 뉴턴은 이 법칙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그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에 반비례한다." 그리고 뉴턴은 중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면 행성의 궤도는 타원이라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다. 뉴턴의 이런 사고는 종래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를 뒤엎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계와 천상계로 나눈다. 지상계는 물, 불 공기, 흙으로 이루어져 있음에 반하여, 천상계는 이것과 다른 제5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천상계는 지상계의 4원소가 수직적인 상하 운동을 하는 것과 달리 원 운동을 한다. 불과 공기가 수직적인 상향 운동을 한다면, 물과 흙은 수직적인 하향 운동을 한다. 원 운동은 이런 자연적인 수직 운동과는 달리 외부의 힘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제5원소라고 본 것이다.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원적인 구분을 한 데 비하여 뉴턴은 이러한 이원적인 사고를 배격하고 하나의 사고 즉 인력의 법칙을 통하여 지상계와 천상계를 하나로 통일시켰다. 결국 뉴턴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천체가 왜 운동하는지를 설명하기보다는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기술하였고, 더 나아가서 그 운동을 일으키는 힘을 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와 인력은 얼마나 같은가
그렇다면 기와 인력은 같은 것인가? 전체의 우주를 설명하는 가설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인력이 행성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기하학적 천문학이라면, 기는 역법의 계산을 중심으로 하는 대수학적 천문학이다. 대수학적 천문학은 해 달 별의 움직임을 원리와 추론에 의해서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측정치 사이의 관계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기의 우주론은 추론의 결과를 통하여 원리를 검증하는 체계가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점은 기가 대수적 비율로 설명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1(하나의 기), 2(음양), 4(음양의 네 부분), 8(음양의 여덟 부분)...등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기는 정량적(정할 정, 수량 량, 밝을 적)인 사고로 설명될 수 없다. 차가운 기, 뜨거운 기 등의 정성적(정할 정, 성 성, 밝을 적)인 사고가 기의 주된 모습이다. 과학적인 사고가 동양에서 나올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리 나라의 최한기를 비롯한 실학자들이 뉴턴의 인력을 기로 번역했는데, 이러한 점은 이들이 가와 인력의 차이점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 의해서 서양의 과학이 전해지는데 이는 오히려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동양에서 기는 내적인 체험으로 깨닫는 것이다. 기야말로 만물을 이루는 기본적인 것이다. 만물에 대한 이해는 기에 대한 이해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나의 체험이 곧 우주의 비밀을 여는 것이다. 기가 요사이 체험 위주로 설명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는 기야말로 정신과 물질을 뛰어넘는 제3의 것이라고 하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기를 현대 물리학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에서는 물질을 관계가 끊어진 원자들로 이해하기보다는 통일장이나 파동의 입장을 취한다. 기는 입자론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고 연속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이 현대 물리학과 기의 접합점이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과 기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인력이나 통일장 이론은 수학 공식으로 표현이 된다. 기는 거리와 감응의 강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따라서 기는 인력 내지 통일장 이론과 아주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애매 모호한 개념을 쓰는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기 개념을 강조하는 사고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자명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신비화로 가는 지름길이다. 기와 현대 물리학의 접합점을 강조한다고 해서 동양 문화의 우월성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서양인들의 합리적 사고란 바로 이러한 양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양적인 사고가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자연과 인간을 이해하는데 양적으로만 파악하는 사고야말로 가장 위험한 사고이다. 자연을 양적으로 파악하는 사고는 자연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려는 사고와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인간성 상실이나 환경 파괴는 이러한 사고에서 연유되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 교감 과정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사유체제는 문제가 있다. 기는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아주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기의 부활은 더 큰 문제가 있다. 수적인 이해 속에서 자연과의 상호 교감을 구성해 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 과제야말로 지금 받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것을 찾는 노력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암을 고칠 수 있는 치료술이 없다고 해서 암의 치료를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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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당당
본뜻 : 군대의 진용이 정돈되고 기세가 성한 모양을 가리키는 군사 용어였다.
바뀐 뜻 : 비겁한 짓을 하지 않는 바르고 떳떳한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경기를 할 때는 정정당당하게 해야지 -무슨 일에서든지 정정당당하도록 하거라
제왕절개
본뜻 : 산부인과 의학 용어로서, 제왕절개를 뜻하는 라틴어 sectio caesarea를 독일어로 번역했을 때 '자른다'는 뜻인 caesarea를 로마 시대의 황제였던 시이저(Caesar)로 잘못 본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제왕절개라는 말의 유래가 시이저(Caesar)가 이 수술에 의해서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은 근거 없는 속설이다. 분만시에 산모가 죽은 직후 복벽이나 자궁벽을 째고 태아를 구해 내던 옛날의 산부인과 시술법이었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의학의 발달로 정상 분만이 어려운 경우에도 산모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 복벽을 째고 태아를 분만하게 하는 산부인과 수술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 시술법을 가리켜 제왕절개라고 한다. 이 수술로 태아를 분만하는 것은 두 번까지 가능하다.
"보기글" -제왕절개를 하는 사람 중에는 의사한테 좋은 사주를 들이밀며 그 시간에 수술을 해 달라고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고통 없이 분만한다고 해서 제왕절개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나 본데, 자연 분만만큼 좋은 게 없지
만주말 지킴이 스쥔광
지난주에 이어 사라져가는 자기 말을 지키는 젊은이를 소개한다. 같은 또래의 젊은이와는 사뭇 다르게 지극한 모어 사랑이 만나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스쥔광은 나이 스물여덟인 만주족 젊은이다. 잘 알다시피 중국 헤이룽장성 싼자쓰촌에 사는 스물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만주말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를 너무나도 안타까이 여겨 만주말을 따로 배운 청년이 바로 스쥔광이다. 젊은세대에서 유일하게 만주말을 아는 사람이다.
이런 현실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배운 만주말을 초등학교 어린이를 비롯하여, 마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치기를 바란다. 교육을 통해 만주말이 오래 남아 쓰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어렵다. 예산이 없어 학교 교육은 엄두도 못 낸다. 그리고 다른 젊은이들의 호응도 없다. 중국말로 의사소통이 다 되는 터에 따로 만주말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스쥔광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만주말이라는 큰 풍선이 있었습니다. 묶었던 끈이 풀리자 바람이 스르르 빠져 나왔습니다. 이제는 공기가 거의 남지 않은, 완전히 쭈그러진 풍선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바람을 넣어 주면 그 풍선이 둥글둥글 커질 텐데. 그러나 아무도 바람을 불어넣지 않습니다. 저 혼자라도 힘겹게 바람을 불어넣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커지겠지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개구지다
심하게 장난을 하는 아이를 일컬어 ‘장난꾸러기’ 또는 ‘개구쟁이’라고 한다. 그리고 ‘장난꾸러기’나 ‘개구쟁이’가 하는 행동을 두고 ‘짓궂다’란 표현을 쓴다. 전라남도에서는 ‘제양시롭다’고도 하고, 북한에서는 ‘짓궂다’는 말은 없고 ‘장난궂다’라고 한다. ‘짓궂다’나 ‘장난궂다’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면서 사전에 오르지 않은 말이 있다.
“씨름이며 닭싸움이며를 하느라 한참 동안 개구지게 놀고 난 아이들이 비녀봉으로 칡이나 캐러 갈까 하고 둑을 내려설라치면 ….”(이서하 〈서점 앞에서〉) “아이보다 천진난만하고 개구진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렀던 ○○○씨가 또 한편의 애니메이션 주제곡에 도전한다.”(〈씨네21〉) “그러곤 개구진 미소를 짓다가 인찬의 굳은 표정을 본다.”(최진원 외 〈해바라기 5회〉)
‘개구지다’에서 ‘개구’는 문장에 단독으로 쓰일 수 없는 ‘어근’이다. ‘개구쟁이’에서의 ‘개구’와 같은 뜻으로, ‘장난이 심하고 짓궂음’의 뜻을 나타낸다. 뒤에 붙은 ‘지다’는 ‘값지다’, ‘멋지다’의 ‘지다’처럼 ‘그런 성질이 있음’의 뜻을 더하면서 앞에 오는 어근이나 명사를 형용사로 만드는 뒷가지(접미사)다. 따라서 ‘개구지다’는 ‘장난이 심하고 짓궂은 성질(경향)이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러한 뜻의 ‘개구’가 포함된 북한말로 ‘개구장마누라’가 있는데, ‘입이 걸고 행실이 못된 여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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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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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3. 복은 화가 들어오는 문이다(원앙, 조착)
1) 명예로 일어선 자 명예로 망한다(원앙)
여후의 시대가 끝나고 천하는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유방과 더불어 한나라를 세운 공신들은 거의 죽고 없었다. 이제 전쟁터에서 용맹스럽던 장군의 시대는 가고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가 제일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른바 '관료 체제'가 탄생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세대교체를 동반하였다. 이러한 시대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바로 원앙이었다. 원앙은 어릴 적에 여씨 문중의 세력가였던 여록의 식객이었다. 그러다가 여씨 세도가 끝나자 형의 도움으로 황제를 모시는 비서관이 되었다.
신하를 다스리는 법
당시 승상은 주발 장군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공로를 지나치게 과신하여 황제인 문제조차 얕보고 있었다. 오히려 황제가 그를 정중하게 대접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주발이 끝내고 돌아갈 때 황제가 따라가서 배웅을 할 정도였다. 어느 날 황제가 역시 주발을 배웅하는 모습을 지켜본 원앙은 따로 황제에게 진언했다.
"폐하께서는 승상을 어떤 인물로 생각하십니까?" "그야 나라의 중심 기둥이겠지." 그러자 원앙은 이렇게 말했다. "승상께서는 고작 공신일 뿐 나라의 중심 기둥이 아닙니다. 나라의 중심 기둥이란 오직 황제뿐인 것입니다. 사실 승상 주발은 여후가 천하를 쥐고 흔들 때 그저 방관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 여후가 세상을 뜨고 각지에서 제후들이 들고 일어나자, 우연히도 병권을 쥐고 있던 주발 장군이 고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주발 대감은 걸핏하면 폐하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폐하 역시 그것을 묵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군신의 도리에 맞지 않게 되고, 폐하께서도 좋지 않게 됩니다." 그 뒤로 황제는 주발에 대해 위엄있게 대하였고, 이에 따라 주발도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주발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알아내고 원앙을 크게 꾸짖었다. "젊은 놈이 나를 짓밟으려 하다니!" 하지만 원앙은 한 마디 사과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주발이 반역 혐의로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이때 주위에서 아무도 주발을 변호하지 않았으나, 오직 원앙만이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 원앙의 주장은 크게 영향을 끼쳐 주발이 풀려나오는데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이후부터 주발과 원앙은 가깝게 지냈다.
원앙의 말이라면
문제 3년에 문제의 동생인 회남왕이 벽양후 심이기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뿐 아니라 당시 회남왕의 오만방자함은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원앙이 문제에게 아뢰었다. "교만한 제후를 처벌하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회남왕을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 회남왕의 횡포는 더욱 극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는데, 취조하는 과정에서 회남왕의 관련 사실이 밝혀졌다. 그때서야 비로소 문제는 회남왕을 직접 취조하고, 그를 귀양보냈다. 이때 원앙이 다시 아뢰었다. "폐하께서 평소에 감독을 소홀히 하셔서 이러한 사태까지 빚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귀양을 보내시면 그 멀고 먼 귀양길을 회남왕이 견딜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만약 도중에 회남왕의 신변에 일이 생기는 날이면, 폐하께서는 광대한 천하를 다스리면서 동생 하나 포용하지 못하고 죽였다는 오명을 벗기 어렵습니다. 아무쪼록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문제는 또 그 의견을 묵살하고 귀양을 강행시켰다. 그런데 원앙의 예언대로 회남왕은 귀양길에서 그만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문제는 식사를 하다가 젓가락을 떨어뜨리며 통곡했다. 원앙은 문제 앞에 엎드려 자기가 좀더 강력히 요청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사죄하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나야말로 당연히 그대의 의견을 들었어야 했소." "폐하, 이미 지나간 일이오니 너무 자책하시지 마옵소서. 이 정도로 폐하의 높은 명예가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폐하께서는 세상에 비길 수 없는 세 가지의 훌륭한 공적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공적이라니, 무슨 공적이오?" 그러자 원앙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첫째, 폐하의 높으신 효도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모후이신 박태후께서 3년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계실 때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않은 채 간호하셨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본 후에 드리셨습니다. 이는 효자로 이름난 증삼을 능가하는 효도이옵니다. 둘째, 폐하께서는 여시 일족의 횡포가 끝난 직후 변경 지방에서 장안까지 고작 6대의 수레로 달려 오셨습니다. 당시 장안은 그야말로 무엇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복마전과 같은 불안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맨몸으로 달려오신 페하의 용기에는 용기의 화신이라 하는 맹분이라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폐하께서는 천자의 자리를 다섯 번이나 사양하셨습니다. 고결한 선비로 추앙받는 허유조차도 한 번밖에 사양하지 않았는데, 폐하께서는 그보다 네 번이나 더 사양하는 미덕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번 일도 단지 회남왕의 과오를 깨우치려 한 목적이었는데, 병사하신 것은 전적으로 호위 관리의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문제는 기분이 풀리는 듯했다. 문제는 다시 원앙에게 물었다. "그러면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회남왕의 세 아드님을 잘 대우하십시오." 그리하여 문제는 회남왕의 세 아들에게 각각 왕위를 주었다. 그 뒤 원앙의 명성은 천하에 드날리게 되었다.
한편 어느 날인가 문제가 황후와 신부인을 데리고 상림원에 나들이를 나갈 때였다. 그때까지 신부인은 황후와 똑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상림원을 지키던 관리들도 예전처럼 두 사람의 자리를 나란히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원앙이 그것을 보고는 신부인의 자리를 한칸 내려놓았다. 그러자 신부인은 화가 나서 궁궐로 돌아가 버렸다. 문제도 기분이 잡쳐 그대로 궁궐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런데도 원앙은 태연한 표정으로 궁궐로 들어와 문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신분의 상하를 엄격히 구분해야만 상하의 관계가 원만해지는 법입니다. 폐하께 황후가 계시는 이상 신부인은 측실입니다. 정실과 동렬의 지위에 있어서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으라고 하신 일이 도리어 해를 입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옛날 여태후와 척부인의 '사람돼지' 사건을 설마 잊고 계시지는 않겠지요." 이 말을 들은 문제는, "듣고 보니 정말 맞는 말이오." 하며 즉시 신부인을 불러 원앙의 깊은 뜻을 설명해 주었다. 그랬더니 신부인은 원앙에게 고맙다며 금 50근을 선물로 주었다.
지나치면 해롭다
그런데 원앙은 매번 너무 직접적으로 황제에게 의견을 말했으므로 황제도 차츰 그를 멀리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지방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원앙은 부하들을 아끼고 뒤치닥거리를 도맡아 해주었기 때문에 부하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 뒤 원앙은 오나라의 재상으로 가게 되었는데, 출발하기 전에 조카가 말했다. "오나라 왕은 자만심이 많다고 소문나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는 간신배들이 우글대고 있지요. 그렇다고 그들을 비판해 바로잡을 생각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모함을 당하시든가 칼을 맞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저 하루 종일 술이나 마시는 게 제일 좋을 듯합니다. 이따금씩 오나라 왕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시면 충분하겠지요. 그 이외의 말은 전혀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원앙은 그 말대로 하였다. 그러자 오왕은 그를 융숭하게 대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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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2부 활성산소가 주범인 수많은 질병
"이렇게 멀쩡한데 암이라니... 혹시 오진 아닙니까?"
나는 오늘도 나를 찾아온 환자들 중 한사람에게 폐암선고를 했다. 상당히 진행된 상태로 흉칙한 덩어리가 비웃듯이 폐 한가운데를 먹어가고 있었다. 그 환자는 대뜸 담배 끊은 지도 꽤 되었고, 피곤한 것 말고는 불편한 데도 별로 없으며 그저 한번 검사받아 본 것 뿐인데 어떻게 폐암에 걸릴 수 있느냐, 혹시 오진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다가 곧 얼마나 살 수 있냐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던 40대 후반의 한 중소업체 사장... 옆에 같이 따라 들어온 그의 부인은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느냐. 진작에 미리미리 검사 좀 받아 보라고 하지 않았느냐, 건강에 신경 좀 쓰라고 할 때마다 듣기 싫어하더니'하면서 절규했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나의 얘기를 다 듣고도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아마도 주치의의 입에서 단 한마디라도 더 희망적인 말을 듣고 싶어서일 게다. 그러다가 마지못해 힘없이 일어서서 진료실을 나가던 뒷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게 남의 일로 보이는가? 여러분은 암에 안 걸릴 것이라고 자신하는가?
40대에 들어서 자기 분야에서 성공은 거두었지만, 그 담보로 건강과 생명을 잃는 우리나라 성인들의 생활방식에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다. 우선 애매모호한 성공의 첫 번째 담보가 건강이라는 것이다. 막말로 남보다 잘 먹고 잘 살고 좀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가장 덜 투자가 되고 등한시 되는 것이 건강이다. 결국 건강을 잃은 빈 껍데기 풍요가 생기는 모순이 초래된다. 두 번째로 희생되는 것이 개인적인 삶과 가정이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으며, 하루 24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자투리 시간까지 활용을 해도 시간이 부족하다. 항상 머리 속은 일로 가득 차 있고 압박감을 받고 살며 더 이상 행복하지도 않고 더 이상 가정과 부모, 부부, 자식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자기 자신에게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지 자문해 봐도 답은 안 나오는 상태이다. 그런데도 직장에서는 본보기가 되는 상사로 존경을 받기까지 한다.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이 가치있길 바라고 내 가정이 행복하길 바라고 또 모두 건강하기를 바라면서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손에 쥐어진 것은 전부 바라던 바와는 반대이다.
언제부터가 시작인지 모르지만 자신이 조절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점점 줄어들고 주위에는 온통 다른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는 일거리들만 쌓이게 된다. 차차 잘 안 되는 일들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시작하고 자기 통제력과 주체성을 잃어가며 회의에 빠져든다. 어느 날 문득 건강이 나빠진 것을 깨닫지만 여전히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건강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남에게 의존하고 손쉬운 방법, 어처구니없는 방법에 희망을 걸고 매달린다.
매일 접하는 각종 매스컴, 잡지, 책에는 무슨 비법, 비결, 기적, 100%보장 등등의 앞뒤가 잘려서 혹하는 문구만을 내세운 건강광고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마치 첨단 건강상식인 양 세뇌를 시킨다. 신문의 건강면에는 눈부신 최첨단 의학이 소개되며 사람들은 의사만이 그들의 병을 일으킨 원인을 알고 있다고 믿게 되고 기술적이고 기계적인 치료법에 희망을 걸고 병원을 찾아간다. 의사는 환자의 몸을 몇 mm단위까지 쪼개 볼 수 있는 첨단 기계를 사용하여 검사를 한 후 그 측정 결과에 의거해서 건강과 질병을 구분한다. 모든 인간의 병이 정신, 육체,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진리가 과학논리에 의해 무시된다. 의사가 그런 진리를 설득하기 위해 주사와 약을 쥐어 주면서 동시에 환자 자신이 해야 할 일들-예를 들면 건강을 해친 잘못된 생활태도나 습관과의 전쟁-을 교육해도 환자가 이를 무시하고 지키지 않는다. 또 의사는 환자가 아무리 불편해 해도 기계적인 수치가 정상이라는 것만을 강조한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환자는 또 다른 병원을 전전하지만 결국 같은 말만 되풀이해 듣는다. 건강 미신을 찾아 발길을 돌려서 돈과 시간을 낭비한다. 거기서도 별 효험을 못 보면 이제 그냥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나 문득 건강체크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병원을 다시 찾는다. 그리고는 의사로부터 절망적인 얘기를 듣는다. 오늘 내가 폐암선고를 한 환자도 이런 식으로 10여년 정도를 보냈으리라.
암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주목받는 활성산소 이론
사람에게 생기는 암의 종류는 무려 270여 종이나 된다. 발생 빈도로 보면 전 인류의 약 1/4이 일생에 한번은 암에 걸리는 꼴이다. 암의 원인은 종류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유전적 요인, 잘못된 생활 습관의 축적, 특정한 질병에의 감염 결과 등 여러 가지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수많은 요인들의 복합작용이 누적되어 생긴 미세세포 환경 변화의 결과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런 암발생 과정을 단계별로 나누어 보면,
첫째, DNA의 돌연변이가 시작되는 시기 둘째, 성장이 촉진되는 시기 셋째, 돌연변이된 세포가 악성화 되는 진행 시기가 있다.
그런데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활성산소가 이 3단계에 다 작용하여 암의 주요한 유발 요인이 됨을 시사하고 있다(시사한다는 말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활성산소의 발생은 내적, 외적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내적으로 활성산소가 과다 축적되는 주요 원인으로 만성염증이 있다. 몸 내부에 만성적인 염증이 생기면 이를 물리칙 위하여 백혈구라는 세포가 활성화된다. 활성화된 백혈구에서는 수퍼옥시드라디칼과 염소화합물 같은 활성산소가 계속 생성된다. 이 활성산소들이 다시 만성염증의 다른 요인들과 같이 작용하여 암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장점막에 궤양이 생기고 염증이 일어나서 만성적인 설사를 하는 질병을 궤양대장염이라고 부른다. 대장에 심한 염증이 생긴 것이므로 백혈구가 활성화되어 보통 때보다 장에 활성산소가 많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대장암이 생기는 위험률이 보통사람보다 훨씬 더 높다. 석면에 오래 노출된 사람에서는 폐암의 일종인 악성중피종이 잘 생기며 특정 기생충 감염시 방광암이 잘 생길 수가 있는 것도 비슷한 이치이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B형, C형에 의한 만성간염이 있으면 적어도 6개월마다 간기능 검사와 간암검사를 하는 게 좋다. 만성적으로 간에 염증이 있는 사람에서는 간암의 발생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둘째, 외적인 요인에 의하여 활성산소가 축적되는 경우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면 흡연이다. 흡연을 하면 산화질소라디칼이나 히드록시라디칼 같은 프리라디칼이 생성된다. 그리고 흡연양과 횟수가 많을수록 프리라디칼의 피해가 축적되어서 폐암을 유발하게 된다. 방사능 노출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각종 암으로 비참하게 죽어간다는 외신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또 피부암 예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자외선을 덜 쬐는 것이다. 자외선이나 전리방사선을 많이 쬔 결과로 생긴 프리라디칼이 그 요인인 것이다. 대장암, 유방암, 전립선암을 예방하기 위한 식사 습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바로 동물성지방을 덜먹는 것이다. 동물성지방을 많이 먹으면 고기 안의 철이온이 촉매작용을 하여 생긴 히드록시라디칼이 대장암, 직장암의 유발 요인이 된다. 또 유방조직액 안에 있는 지질이 산화되어 유방암 발생 위험이 증가된다. 소화기 내 지질도 활성산소로 인해 과산화변질되어 대장암, 직장암 발생 위험이 증가한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에서 술의 대사과정으로 생긴 프리라디칼의 축적도 간암 발생위험 증가의 요인이 된다.
인간의 사망 원인으로 항상 경계를 요하는 주요 암들은 거의가 이와 같이 활성산소의 축적 피해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대장암, 폐암, 방광암, 간암, 유방암, 자궁경부암, 식도암, 구강암, 두경부암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암들이 활성산소에 의해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단지 상당히 관련이 된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 게다.
우리는 체내에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항산화 방어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방어벽이 아무런 신경을 안 쓰는데도 불구하고 영원히 자동적으로 작동되는 것은 아니다. 방어벽은 약해지는데 활성산소가 계속 생기면 신체 구석구석에서 손상이 계속 일어난다. 또 DNA와 단백질의 변형도 점점 누적이 되어간다. 이런 식으로 활성산소에 의해 손상된 DNA의 도연변이화가 인간에서 암의 유발요인이라는 것이 활성산소 이론이다. 현재 암의 원인과 해결 방법으로 가장 각광을 받는 것은 유전요인과 유전자 치료이다. 태어날 때부터 암이 생길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며, 언젠가부터 이 유전자가 활동하여 암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후천적으로 암을 억제하는 유전자가 쇠퇴하고 암 촉발 유전자가 강해져서 암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때의 치료는 암유발 유전자를 없애거나 암억제 유전자를 강하게 해 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일반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몫이다.
유전요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환경요인에 의한 암유발이다. 어떤 학자는 식사 습관을 고치고 환경을 정화하는 것만으로도 70~80% 이상의 암을 예방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바로 이 환경 요인에 의한 암 유발 기전이 활성산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활성산소의 생성을 줄이거나 항산화제를 사용하여 피해를 막음으로써 암이 안 생기도록 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당연하다. 이는 유전자 치료의 경우처럼 의사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 각자의 몫이다. 현재로서 어느 날 갑자기 암선고를 받지 않기 위한 최선책도 바로 이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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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아버지의 묘소에 언문으로 비를 세운 이문건
이문건(1494-1567)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자발, 호는 점재 또는 휴수라고도 하였다. 중종 8년(151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이문건은 그의 중형 눌재 이충건과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그러다가 조광조가 화를 당하게 되자 당시의 인사들이 겁에 질려 감히 조문조차 못하였지만 이문건은 그의 중형 및 문하생 한 사람과 같이 가서 조광조의 장례를 의식대로 지냈다. 그리고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에 이문건이 가까이서 오래도록 모셨으므로 가장 후한 예우를 받았으며, 어찰과 갓끈을 내려 주면서 총애하였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문건이 빈전도감의 집례관으로서 명정과 시책 그리고 신주의 글씨를 모두 썼는데, 그의 전서는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그 뒤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에 승지로서 공신명부에 기록되었다가 뒤에 조카인 수찬 이휘의 화에 연좌되어 성주로 귀양갔다. 그곳에서 퇴계, 남명, 율곡 등 여러 선생들과 주고받은 글이 매우 많다. 이문건이 운명할 무렵에 족보를 만들어 자손들의 이름을 미리 지어 놓았는데, 10여 대에 이르도록 적손과 지손으로 더러는 많기도 하고 더러는 적기도 하며 더러는 없기도 한 것이 한결같이 미리 만들어둔 족보와 들어맞았으며, 출생하였다가 일찍 죽은 자에 대해서는 곁에다 동그라미 표시를 해두었으니 대체로 미리 알았던 일들이 많았다. 그가 살아 있었을 적에는 그의 특이함을 아무도 몰랐다.
그의 아버지 정자 이윤탁의 묘가 양주 노원에 있는데 그곳에 세운 비의 비문과 글씨는 다 이문건의 솜씨로 이루어진 것이다. 후손들이 먼 곳에 살고 있어 오래도록 성묘를 못하게 되자, 아무개가 그 주변을 점유하게 되었다. 근래 그 아무개가 묘 주변의 소나무를 베어내 이윤탁의 묘갈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완연히 새로한 것과 같았다. 그래서 산 밑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아무개가 남의 선대의 묘가 있는 곳을 차지하고서 어떻게 비석과 무덤은 훼손하지 않았소?" "신령한 비석 때문입니다. 산 밑에 살고 있는 주민 가운데 질병에 걸린 자가 그곳에 기도하면 효험을 보게 되고, 나무하는 아이들이 혹시라도 그 비석에 흠집을 내기라도 하면 재앙이 따르게 되어 그 신령함이 이와 같은데 누가 감히 훼손하겠습니까?" 이에 그 비문을 고찰하여 보니 앞면과 뒷면은 일반 비석과 같고 양쪽의 측면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한 문자가 있었다. 대체로 몇백 년 전에 언문으로 비석에 기록하였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차마 어떻게 못할 비 부모를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누구인들 부모가 없을쏘냐. 그렇다면 어떻게 차마 훼손하겠는가. 비석도 차마 침범하지 못할 경우이면 묘를 훼손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하니 만대 후에라도 모면하게 될 줄 알리라. 신령한 비 신령한 비석이다. 건드리는 사람은 앙화를 입으리라. 이를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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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
달걀을 쌓아 올린다 함이니 매우 위태로움을 말한다. 전국시대에 장기가 있는 자는 누구나 실력으로 출세하려고 애썼다. 개중에서도 종횡가라고 일컬어지는 변설사는 여러 군주를 찾아다니며 유세하는 것이니 그 지위가 매우 높았다. 위 나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범휴도 종횡가가 될 것이 소원이었는데, 아무리 실력주의 세상이라해도 느닷없이 출세의 실마리를 찾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먼저 고향의 중대부인 수가를 섬겼는데 그를 따라 제 나라로 사신이 되어 갔을 때 부하인 범휴가 도리어 수가보다 평판이 좋았다. 그래서 귀국 후 수가가 위나라의 재상 위제에게 모함을 하였다. "네놈이 제나라와의 내통을 했으렸다?" 하고 범휴는 붙들려가서 호된 매질을 당하였다. 갈대발로 말아다가 변소에 처넣는 욕을 당했다. 그러나 범휴는 가까스로 정안평이라는 동정자에게 문지기를 보내어 그에게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이름도 장록이라 고치고 진 나라로 갈 기회를 노리던 중 진나라 소왕의 사신 왕계가 나타났다. 왕계는 장록을 본국으로 데리고 가서 왕에게 아뢰었다. "위나라의 장록 선생으로 말하면 천하의 외교관 이온바 우리 진나라의 정치를 비평하여 '달걀을 쌓아 올리느니보다도 더욱 위태롭다'면서 말하기를 그러나 자기를 등용하면 정치가 탄탄하리라 하옵기에 소신이 선생을 모시고 왔습니다." 진나라의 왕은 이 불손한 나그네를 구태여 처벌하려고는 않고 뜨내기 나그네로서 놓아두었다. 범휴가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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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1. 보리수를 닮은 사람들
반야선
그 날 나는 무리한 일정을 풀어 나가고 있었다. 가사장삼을 조래기에 넣고 하루에 다섯 개 도시를 거쳐야 했던 것이다. 주최측이 보내준 비행기표를 들고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보니 바로 손오공모양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다. 사바세계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그때 나는 한 생각으로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 나는 얼마나 사소한 존재인가.'
참말로 나는 보잘것이 없었다. 그렇게 내 눈에 수미산처럼 보이던 산맥들, 강, 명산대천의 바다가 발 아래인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찾았다. 무섭기도 하고 단 사십 분에 몇 백 리를 날아가는데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나는 공항을 빠져 나오며 승무원들에게 합장배례했다. 그렇게 김해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구포엘 들렀고, 법회를 마칠 수 있었다. 나는 신도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강의를 끝내자마자 절을 나와 충무로 향하기로 했던 것이다. 충무, 그러나 나는 한숨을 푸 내쉬었다. 시외 버스는 두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곤혹스런 얼굴을 하고 있다가 안내라는 간판 종이가 보이는 이에게 다가가 말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충무로 가는 다른 방편이 없는지요?" "스님, 지금 빨리 택시를 타시고 뱃전으로 가보세요." "뱃전요?"
나는 되물으면서도 뱃전이라는 어감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옳지 됐다'하고 택시를 타고 여객선 대합실로 내달렸다. 마침 시외 버스터미널의 안내 보살의 덕택이었다. 배를 타고 나는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찾았다. 이 몸이 나기 전에 무엇이었더뇨? 어디서 저렇게 많은 물이 모여 있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참으로 나는 미미한 존재였다. 엄청나게 많은 물이 출렁거리며 파도를 치는데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저 바닷속의 깊이는 어느 정도가 될까. 겨우 백 년의 세상을 사는데 어찌 공부하지 않을까. 나는 많은 질문들과 많은 생각으로 넘실거리는 물과 창에 튀어오르는 파도를 바라보며 무사히 이 성난 바다를 건널 수 있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도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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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6. 정조,대원군의 실험정치 실패 (타율적인 개항을 초래한 세도정치) 2/2
세도정치와 성리학파의 반동
정조의 지원으로 문화부흥운동은 크게 발전했지만, 그가 죽은 뒤 근조선에서는 성리학파의 정치적 반동이 거칠게 진행되었다. 정조가 40 대의 젊은 나이에 죽고 12세의 어린 순조가 임금이 되자, 모략을 부려 임금의 장인이 된 김조순 일파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이다. 김조순 일파는 풍양조씨, 남양홍씨, 동래정씨 등과 함께 남인 계열의 보수 성리학파였으며, 김조순은 중국적 세계질서를 옹호하면서 이에 도전하던 만주족과 대결을 벌일 것을 주장했던 성리학자 김상헌의 후예이다. 그는 이런 사실을 즐겨 강조하면서 성리학적 도의정치를 표면에 내세웠다. 김조순 일파의 권력은 철저하게 독점적이었다. 권력은 보수적인 몇몇 가문이 나누어 가졌을 뿐, 개혁적이거나 탈성리학적인 인물들은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밀려났다. 특히 정조 때 중용되었던 '실학파'는 하나도 남김없이 권력에서 밀려났다. 심지어 실학파의 보호자였던 정조 때의 재상 채제공은 죽은 뒤에 관직을 빼앗았으며, 천주교 탄압을 구실삼아 실학파의 지도자 정약용을 귀양보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다. 천주교를 탄압한 데 이어 전통문화의 색채가 강한 무당들마저 더욱 강도 높게 탄압했으며, 승려에 대한 탄압도 다시 거세어졌고, '정감록' 등 예언서에 대한 탄압도 강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리학적 신분질서의 파괴를 막기 위해 호적법을 다시 강화하기도 하였다.
그런 독점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계속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왕비였고, 당시 세자였던 효명대군(뒷날 익종으로 추존됨)은 풍양조씨인 조만영의 사위가 되었으며, 안동김씨인 김조근의 딸은 다음 임금인 헌종의 왕비가 되었고, 김문근의 딸은 철종의 왕비가 되었다. 이렇게 왕실과 외척관계를 맺었을 뿐 아니라 사실상 왕을 결정하기도 하면서 왕실을 약화시켰는데, 강화도에서 숨어지내던 나무꾼 출신의 왕족이 그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허수아비 임금이 되기도 했다. 철종이 바로 그 사람이다. 또 재물도 챙기고 권력의 분산도 막기 위해 공공연히 벼슬자리를 사고팔았다. 이쯤 되자 김조순 일파의 정치적 독점이 철옹성이 되었다. 이리하여 성리학파의 낡은 정치적 이념이 다시 사회를 억압했으며, 개혁에 대한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민중생활은 구렁텅이로 빠졌다. 굶어죽는 사람과 떠도는 사람의 대열은 늘어만 갔으며, 전염병이 널리 퍼졌고, 이들의 반동적 권력독점에 저항하는 민중봉기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1808 년에는 함경도 북청과 단천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며, 1811 년에는 서북지역에서 홍경래가 지휘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나 다음해까지 이어졌고, 1812 년에는 제주도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이것은 큰 규모의 봉기이고, 규모가 작은 봉기나 유랑민들의 사회질서 이탈행위는 하루가 멀다 않고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세도정치는 이미 과거의 성리학파가 누리던 사회적 기반을 잃은 지 오래였으며, 다만 권력을 이용한 버티기를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1860 년 최제우를 중심으로 부활된 전통사상이 동학이란 종교를 내걸고 포교사업에 들어감으로써 성리학파의 낡은 정치에 사상적 도전을 선언했으며, 1862 년에는 진주에서 대규모의 민중봉기가 일어나 남부지역을 휩쓸었다. 그렇지만 세도정치를 앞세운 성리학파의 대응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무자비한 탄압이었다. 남도 민중봉기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생겼고, 최제우를 비롯한 동학의 지도자들도 끝내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다.
실학을 실험한 대원군
그런 막다른 골목에서 안동김씨를 비롯한 성리학파의 반동정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들이 세운 허수아비 임금 철종이 죽고, 고종이 뒤를 이어 임금이 되자,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 이하응이 그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것이다. 이하응은 문화부흥운동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던 김정희의 제자이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성리학파가 세운 낡은 국가를 개혁하여 근조선을 재건국하려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적 방향을 잃고 있던 상황에서 먼저 성리학파의 권리를 최소화하는 한편, 문화부흥운동을 비롯한 개혁파의 권익을 최대화하려고 했다. 이하응은 특권층으로 행세하며 세금까지 내지 않던 양반 성리학파에게 세금을 부과했으며, 그들의 사상적 근거지이자 지방통치의 상징이었던 서원을 대폭 정리했고, 그들이 만들어놓은 복잡한 관행을 고쳤을 뿐 아니라 그들이 키워놓은 탐관오리들을 처벌하였다. 나아가 그는 인재등용의 폭을 넓혀 실용적이고 개혁적인 인물을 존중했다. 또 삼군부를 설치하여 왕권을 지키는 수단으로 삼았으며, 국방협의 기구에서 세도정치의 실권기구로 변질해버린 비변사를 없애버렸다. 그러나 왕권을 중심으로 개혁을 실행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어려움은 국가재정이 허약하다는 점이었다. 이하응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특권 성리학파의 면세토지를 조사해서 세금을 거두었으며, 불필요한 잡세는 폐지하는 대신 은광산의 개발을 허용하는 등 새로운 세금원을 마련하려 했다. 그리고 안동김씨와 협상하여 그들을 가볍게 응징하는 대신 그 대가로 그들이 부정하게 축재한 재물의 일부를 국고로 되돌리려고 했다. 이하응의 이런 정치는 왕권 강화와 근조선의 사회계약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측면은 그가 정약용과 김정희 등 문화부흥파의 사회사상을 실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하응 자신이 문화부흥파로부터 학문을 익혔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자신의 정치를 그런 실험무대로 삼고 있었던 셈이다. 요컨대 그는 문화부흥파의 개혁사상이 조선을 재건국하는 유일한 주체적인 대안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타율적인 개항과 문화부흥운동의 좌절
이하응은 '쇄국정책'이라는 폐쇄적 외교노선을 선택했다. 그는 문화부흥파의 다른 한 세력이 개항을 주장하자, 이들을 배척하면서 쇄국정책을 밀어붙였다.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 등이 개항을 통해 내부적 개혁사상과 외부적 개혁사상을 동시에 결합하려 했지만, 이하응은 먼저 내부개혁을 단행하는 것이 순서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흔히 이 무렵 이후의 정치세력을 개항을 주장하는 파와 개항을 반대하는 파로 나누고, 전자가 진보적 세력이며 후자가 보수적 세력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한 측면만을 지나치게 드러낸 것이다. 당시 쇄국을 주장한 사람들 가운데도 진보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개항을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보수파가 있었기 때문이다. 뒷날 이하응을 밀어낸 민비 일파가 개항을 지지하는 보수파였다면, 집권 초기의 이하응은 쇄국을 주장하는 진보주의자였다. 그는 내부개혁이 우선이며, 내부개혁을 통해 외부세력과 맞서는 것이 옳다고 믿는 '중도우파적인' 문화부흥운동의 지지자였다. 그런데 '중도좌파적인' 문화부흥운동의 계승자였던 박규수는 내부개혁을 위해서도 개항이 필요하며, 개항이 내부개혁을 위한 주요한 조건이라고 믿었다. 이처럼 문화부흥운동의 계승자들조차 개항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성리학파는 개항이 몰고 올 파도를 경계하며, 적극적으로 개항을 반대했다. 그들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성리학적 질서가 개항과 함께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적 질서가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한 일부 성리학파는 자신들의 사상을 버리는 대신 이하응으로부터 권력만이라도 뺏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개항을 지지했다. 왕비를 정점으로 하는 민씨 일파의 세력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19세기 후반은 바로 이런 입장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는 시기였다. 이하응은 내부개혁을 위해 박규수 등과 손을 잡았지만, 쇄국정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성리학파와 손을 잡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이중정책으로 말미암아 이하응의 내부개혁은 성리학파한테 발목을 잡혔으며, 쇄국정책은 박규수 일파한테 발목을 잡혔다. 그의 정치는 이런 측면에서 외줄타기나 다름없었다. 이를 걱정한 이하응은 자신의 정치기반을 극단적으로 강화하고자했으며, 그런 차원에서 경북궁 중건이라는 무모한 결정을 내렸다. 이 같은 무모함은 정치적 실패를 낳았고, 그런 실책들은 철저하게 배척받던 민씨 일파에게 정치적 기회를 제공했다. 권력욕에 물든 민비 일파는 최익현과 같은 성리학파를 동원해서 결국 이하응을 밀어냈으며, 마침내 문화부흥운동의 정치적 실험은 현실정치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민비 일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근조선은 다시 역사적 방향을 상실하고 말기적 상황에 빠졌다. 개항에 대한 준비도 없이 1776 년 일본에 의해 타율적으로 개항이 되었으며, 개항을 준비해온 세력은 오히려 이 과정에서 배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즉 개항을 주장하며 그것을 준비해온 박규수 일파와 이하응 일파는 개항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이는 앞으로 진행될 근조선의 개항이 결국 문화부흥운동의 좌절로 연결될 것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이하응의 정치적 실험이 실패로 끝난 뒤에 이루어진 타율적인 개항은 우리 역사에 거대한 뒤틀림 현상을 몰고 왔다. 고려 르네상스의 실패가 성리학파의 폐쇄적인 왕조라는 뒤틀림으로 직결되었다면, 타율적인 개항은 '외형적 발전과 정신적 혼돈 및 타율의 일반화'를 특징으로 하는 오늘날의 뒤틀린 우리 시대로 직결되었다. 타율적인 개항은 내부개혁 우선론자를 철저하게 좌절시켰으며, 내부개혁과 외부문화 수용의 동시성을 주장하던 세력을 뒷전으로 밀어내버렸다. 그 대신 개항을 이용해서 권력을 유지하려거나 개항정책과 내부개혁을 모두 반대하던 세력이 역사의 전면에 떠오르는 극단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물론 개항과 함께 변화가 일어나고 개혁이라 부를 만한 사건도 없지 않았지만, 그 변화와 개혁은 본질적으로 문화부흥운동의 발전적 계승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문화부흥운동이 가꾸어온 내부적 터전을 짓밟는 것이었다. 설령 외부적으로는 똑같은 변화처럼 보일지라도, 그 변화의 정신적 바탕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 이 시기의 개항은 너무나도 비극적이었다. 오늘날 우리 겨레가 사실상 정신적,사상적 주체성을 잃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는 것도 바로 이 시기에 있었던 문화부흥운동의 좌절과 관련되어 있다. 식민지를 겪은 것도 사실 그보다는 작은 원인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겪은 인도에서 정신적,문화적 뒤틀림이 심각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런 측면에서 살펴볼 일이다. 타율적인 개항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과정에서 주체적인 정신사적,문화사적 발전이 좌절되었고 우리 문화와 정신이 뒤틀려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타율적인 개항에서부터 정신적,문화적으로 작은 겨레의 까닭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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