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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08 호
단기 4340. 12. 18 (음력 11. 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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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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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제2회 블루픽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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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 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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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8세 청소년이 읽을 수 있는 장편 청소년 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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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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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패와 부상 2000만 원 (특전 : 볼로냐 도서전 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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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 인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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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자 1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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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 자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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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및 기성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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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 마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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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30일 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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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 요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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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자 원고지 700매 ~1000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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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고는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하며, 디스켓과 인쇄물, 줄거리 요약물을 함께 첨부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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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룡소 홈페이지에서 응모지원서를 다운로드 받아 원고와 함께 우송해야 합니다. (반드시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기재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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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모작 발송 겉봉투에 ‘제1회 비룡소 블루픽션 상 응모작' 이라고 명기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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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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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은 수상이 결정된 후 그해 내에 출간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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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상은 선인세에 해당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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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모작이 이미 발표된 작품이거나, 다른 문학상을 수상한 경험이 있거나, 표절 등의 부당한 작품일 때에는 당선을 취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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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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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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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30일, 비룡소 홈페이지 및 개별 통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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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처 및 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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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887)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4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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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룡소 편집부 블루픽션 상 담당자 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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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3443-4318,4319 / 팩스: 02-3442-46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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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픽션 상 응모양식 내려받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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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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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위한 성장은 암세포의 논리에 불과하다. /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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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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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자신부터 잘 다스리라
주의가 가만히 살펴보니, 옛날의 성현이 사람들을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한 뜻은 어느 것이나 다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를 알게 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닦은 다음에 그것을 미루어 남에게까지 미치게 하려는 것이지, 한갓 읽은 것을 외는 데 힘쓰고 문장을 일삼음으로써 명성이나 구하고 이익이나 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 학문하는 사람들은 이미 이와 다르다. 그러나 성현이 사람들을 가르치던 법은 경전에 갖추어져 있다.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책을 열심히 읽고 깊이 생각하여 묻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진실로 이치의 당연함을 안 후에 자신을 다스려 반드시 이에 따르게 한다면, 지켜야 할 법칙을 어찌 다른 사람들이 마련하여 준 뒤에 지키려 하겠는가. 요즘 학교에는 규약이 있지만, 스승을 대함이 이미 천박하고, 그 법이 또한 결코 옛사람들의 뜻에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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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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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5장 문화, 환경, 종교
종교와 과학, 투쟁이냐 조화냐 - 송현주
종교와 과학은 오랜 기간 투쟁을 벌여 왔고 현재는 과학이 승리한 듯이 보인다. 종교와 과학은 과연 이러한 대립의 관계로서만 정립될 수 있는가? 서로 다른 측면에서 상호 보완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는 없는가?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가
우리는 아침이 되면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고 말하고, 저녁이 되면 "해가 서쪽으로 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태양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과학 시간에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일상 생활 속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비록 시험을 볼 때에는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할 테지만, 그것은 우리가 과학적 진리와는 별개로 실재 삶 속에서는 상식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고 있음을 가리킨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볼 때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진다'는 생각은 종교적으로 지지되면서 상식으로 자리잡아 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해가 동쪽으로 떠올라 서쪽으로 진다'고 말해도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과학적 진리에 어긋나는 이러한 상식을 왜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양자는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종교와 과학의 투쟁사
종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반면 과학은 16세기에 이르러 갑자기 중요성을 갖기 시작했으며, 그 뒤로 차차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 이후 종교와 과학의 투쟁이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과학 없이는 인간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과학의 승리가 확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과학은 관찰이라는 수단을 통해 개별적 사실들을 발견하고 추론을 통해 그 사실들을 상호 연결해 줌으로써 미래에 발생할 것에 대해 예측할 수 있게 하는 어떤 법칙들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과학은 이성, 합리성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반면, 종교는 비과학적인 것, 즉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과학의 발생과 함께 종교의 진리관은 위협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종교 자체가 지니는 신비한-종교 체험 자체를 떠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측면에도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식적인 사람들은 종교적 교리에 대해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당황함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특정 종교, 특정 종파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몇 해 전(1992년) 휴거와 종말론을 주장한 다미 선교회 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이성적 광신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비이성적 광신이 아니더라도 종교적 문헌들을 살펴보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들이 무수히 발견된다. 예컨대 기독교의 성경에 의하면 우주의 창조는 6일 동안에 이루어졌고, 인간은 진흙으로 빚어졌으며,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 또 불교 경전에 보면, 석가모니는 어머니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나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으며 "천상 천하 유아 독존.(하늘 천, 위 상, 하늘 천, 아래 하, 오직 유, 나 아, 홀로 독, 있을 존)"이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진술이 어떤 종교적 메시지를 지니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과연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말뜻을 선뜻 사실 그대로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에 대해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하게 도전해 온 것이 바로 과학이었다. 종교와 과학의 문제에서 과학은 주로 자연 과학을 의미하고 종교는 흔히 기독교를 의미해 왔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전개되어 온 종교와 과학의 투쟁사를 볼 때 우리는 기독교와 자연 과학의 대립, 충돌을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기독교를 놓고 볼 때, 자연 과학의 도전은 천동설에 대한 지동설의 공격과, 창조론에 대한 진화론의 공격 등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편의상 천동설과 지동설, 창조론과 진화론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러나 종교와 과학의 문제는 보다 폭넓은 것으로서, 비단 기독교와 자연 과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개별 종교들(불교, 유교 등)및 종교 일반, 그리고 자연 과학뿐만이 아닌 인문, 사회 과학도 포괄하는 것임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종교와 과학의 투쟁의 쟁점들
1. 천동설과 지동설 신학과 과학 사이의 최초의 본격적이고 가장 주목할 만한 싸움은 현재 우리가 태양계라고 부르는 것의 중심이 지구냐 아니면 태양이냐에 과한 천문학적 논쟁이었다. 당시까지의 정통 이론은 프톨레미우스의 지구 중심설이었다. 이에 따르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태양, 달, 행성 및 항성계가 각각 고유의 위치에서 그 주위를 돌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이론, 즉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에 의하면, 지구는 가만히 있기는커녕 이중 운동을 하는데, 그것은 하루에 한 번 자전하고 또 일년에 한 번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이다. 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기독교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다. 구약 및 신약 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매우 중요하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고 그 우주의 중심에 놓은 것이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은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우주의 중심적 위치로부터 변방으로 끌어내렸던 것이다. 이것은 신학자들에게 인간이 우주의 목적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이 이론을 단지 가설로서 제안한 것일 뿐이라고 슬쩍 발뺌함으로써 공식적 비난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이 이론을 이어받아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에 유리한 논증을 제공하였다. 그 결과 그는 두 번씩이나 종교 재판소에 출두하게 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신념과는 달리 지동설을 부인하는 발언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하여 교회로부터 파문 당했던 갈릴레이는, 파문 당한 지 359년 만인 1992년에야 비로소 카톨릭 교회에서 공식 복권되었다. 기독교 교회는 1835년까지도 지구의 움직임을 가르치는 자적들을 금서 목록에 올려놓고 있었다.
2. 창조론과 진화론 과학과 종교가 대결하였던 또 다른 쟁점은 세계 창조와 관련된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이다.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 이론보다 더 완고한 신학적 편견과 싸워야 했다. 교회의 정통적 견해에 의하면, 우주는 엿새만에 창조되었으며,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천체들과 노아의 대홍수 때 멸망된 것들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동물과 식물들은 창조 때부터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지금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은 노아의 방주에 있던 종(종류 종)에 속한다. 그리고 종들은 변하지 않으며 각각의 종들은 별도의 창조 행위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창세기의 족보에 의해 계산을 한 어떤 대주교에 의하면, 이 창조의 시간은 기원전 4004년이라고 추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석이 발견되고 나아가 지질학적 연구가 발전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화석들은 현재 다양하게 분리된 종들 사이의 중간 동물들이 과거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다윈의 자연 도태설은 신학에 대해 코페르니쿠스가 입힌 타격만큼이나 심각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자연 과학적 발견물들에 따르면 신학은 종의 불변성 내지는 창세기가 주장하는 각각 독립된 많은 창조 행위를 포기해야 했으며, 나아가 생명의 기원이래 많은 시간의 경과를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모자라서 (이것은 최악의 경우인데)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하등 동물에서 유래했다고까지 주장했던 것이다. 이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그렇다면 종교와 과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바라보는 데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종교와 과학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종교와 과학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현대에는 이전과 같이 공개적인 투쟁은 사라졌지만, 종교와 과학은 기본적인 세계관과 인간관에서 양립 불가능하다는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도 매우 강력하게 남아 있다. 다른 또 하나의 관점은 종교와 과학을 양립 가능한 것으로 보는 시각으로서, 종교와 과학은 상호 보충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1. 양립 불가능하다는 견해 먼저 종교와 과학의 근본적 대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이들은 종교가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던 미개인의 무지와 오류에서 발생했다고 보는 데에 대체적인 일치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종교는 유치하고 불충분한 지식일 뿐이다. 이들은 이러한 유치하고 불완전한 지식을 대치하는 것이 과학이며, 과학의 성장은 종교의 소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즉, 과학이 우주의 모든 신비를 해결하고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무지와 오류의 소산인 종교는 이제 불필요하며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다. 현대인만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할 수 있으며 미개인에게는 진정한 관찰과 추리의 능력이 없었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라는 것이었다. 즉, 미개인들이 무지와 미신으로 덮여 있었다는 가정은 오만하며, 선사 시대인들도 불의 발견이나 도구의 제작 등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경험적 지식을 발전시켜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와 과학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에 따르면, 종교와 과학은 자연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상반된 체계 및 가정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과학의 기본적 가정은 자연의 모든 사건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발생한다는 것이며, 만일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있다면 과학자는 그 원인을 인간 지식의 불완전함에 돌리고 새로운 자연적 요인을 찾는다. 그러나 많은 종교는 단순히 신 또는 초자연적 인간 사건에 개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종교의 입장, 즉 신 또는 초자연적 세력이 자연적 사건의 원인으로서 개입할 수 있다는 입장은 순전히 믿음에 기반을 두는 것이며 과학적으로는 도저히 입증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종교와 과학간에는 근본적으로 충돌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2. 양립 가능하다는 견해 이와는 반대로, 종교와 과학의 역사적 충돌을 익히 알면서도, 종교와 과학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상호 보완적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의 역사적 충돌은 둘 사이의 모순과 상호 배타성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그 충돌은 인간의 지적 발전의 필수적 과정이었을 뿐 근본적 상반성의 표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항상 그르고 과학은 항상 옳다는 견해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학도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과학 역시 신학보다 더 변화하고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갈릴레이나 뉴턴의 과학적 발견이 후대에 와서 수정, 보완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현재의 과학적 신념이 앞으로도 무조건 지켜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과학자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아인슈타인은 종교와 과학의 충돌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양자는 깊은 상호 관계를 갖고 있으며 나아가 상호 의존적이기까지 하다고 보았다. 그는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종교와 과학의 충돌은 그들이 상호 모순적이어 서라기보다는 과거의 종교가와 과학자들이 자기 영역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그 한계를 이탈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보았다.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과학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실재(reality)를 '파악'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그 실재가 앞으로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며, 반면에 종교는 인간이 어떻게 살고 행동해야 한다는 가치 판단에만 관계하는 것으로서 과학과는 그 영역이 다르다. 따라서 그 둘은 서로 충돌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기독교 교회가 갈릴레이나 다윈의 과학적 학설들과 대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종교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도 종교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가치 체계의 제시나 판단에 대해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것 역시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종교는 과학이 제시하는 지식을 참작하면서 무엇이 중요하고 올바른가 하는 가치 판단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데 중요성이 있다. 즉, 종교는 우리가 실현해야 할 삶의 설계와 행동의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자는 유전자의 복제 기술을 개발하는 능력을 지녀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지만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오직 기술이 있을 뿐 가치 판단의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도덕적 선악 문제는 종교의 가치 체계가 제시해 준다. 이는 종교와 과학의 영역을 구분하고 그 둘의 역할을 분담해 주면서 아울러 그들의 상호 보완적 관계 형성을 촉구하는 입장이다.
종교와 과학의 이상적 관계
사실 과학은 종교가 지닐 수 있는 독단과 맹목적 신앙의 오류를 제거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여도 그것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삶의 종교적 측면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운명, 즉 삶과 죽음의 문제, 인류의 고통을 감소시키고자 하는 욕구, 선한 삶에 대한 동경,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 등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는 과학의 기대라고 할만큼 과학의 발전이 눈부시며, 과거의 종교가 차지했던 영광을 과학이 대신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행복과 장수를 신에게 기원하기보다는 과학의 발견물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통해 마음에 들지 않는 성(성 성)을 지닌 태아의 낙태가 성행하고 핵 무기의 개발로 인류 전체의 삶이 위협받는 등,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인류가 겪는 새로운 문제도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과학의 발전이 곧 우리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문제는 과학이 가치 중립적이며 그 자체로서는 선도 악도 아니라는 데 있다. 그 자체로서는 해롭지도 이롭지도 않은 과학의 여러 결과물들(예를 들어 핵 에너지나 유전자의 복제술 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아가 인류의 평화를 위해 사용되도록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점에서 종교와 과학이 만나야 하며 또한 만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결국 종교와 과학 그 둘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는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해야 할 당위 앞에 서 있다고 할 것이다.
참고 문헌 B.러셀, '종교와 과학', 전파과학사, 1986. 오경환, '종교 사회학', 서광사, 1988. A.N.화이트헤드, '과학과 근대 세계', 서광사, 1990. D.M.맥케이, '현대 과학의 기독교적 이해', 전파과학사, 1986. 김용정, '과학과 불교', 동국대 부설 역경원,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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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글터 → 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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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자찬
본뜻 : 자기가 그린 그림에 자기가 찬을 쓰는 일을 가리키는데, 찬이란 그림에 써 넣는 시나 글로서, 주로 칭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찬은 본래 스승, 선배, 동문 등 다른 사람이 써 주는 것이다.
바뀐 뜻 :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스스로가 칭찬을 하거나 추켜 올리는 것을 가리킨다.
"보기글" -김정희의 그림에 박제가의 찬이 들어 있다 -그 사람 자화자찬은 더 이상 못 들어 주겠더라 얘, 그 정도면 완전히 심각한 자기도취인 거 아니니?
전광석화
본뜻 : 전광은 번개와 천둥을 가리키는 말이고 석화는 지극히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번개불이 번쩍 하는 것처럼 지극히 짧은 시간이나 혹은 그처럼 재빠르고 날랜 동작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지금 보신 장면은 우리 나라 선수의 전광석화 같은 공격이 있습니다 -절대 절명의 그 순간에 슈퍼맨이 날아와 전광석화처럼 어린아이를 끄집어낸다
고구마
쌀·보리 같은 곡물 대신 감자와 함께 흔히 먹는 식물에 고구마가 있다. 대체로 ‘고구마’로 부르지만 경남에서는 ‘고매’라 일컫고, 전남에서는 ‘감자’, 제주에서는 ‘감저’라고도 한다. 겨울에는 물기가 많은 ‘물고구마’가 좋고, 여름에는 밤처럼 포슬포슬한 ‘밤고구마’를 즐겨 찾는다. 군고구마·찐고구마도 있고, 쌀이 모자라던 전날엔 술을 담가 먹기도 했다.
고구마는 잎이 자라면 어린잎을 따 먹는데 이를 ‘고구맛순/고구마 순’이라 한다. 조금 더 자라서 줄기(덩굴·넝쿨)를 뻗으면 이를 ‘고구마 줄기’라 하는데, 실제로는 ‘잎자로’로서 지역에 따라서 ‘고구마 줄기/쭐기, 고구마 줄거리/쭐거리’라 부른다.
경기도에서는 ‘고구마 줄기, 고구마 줄거리, 고구마 순’을 일반적으로 쓰고, 경상 방언에서는 ‘줄기’를 ‘쭐기·줄거리·쭐거리·쭐그리·쭐겡이’로 쓴다. 충북에서도 ‘줄기·줄거리·쭐거리’로 발음한다. 전남과 충남에서는 ‘감자 순/감잣순, 감자 줄기, 감자 줄거리, 감자 대/감잣대’로 쓴다. 제주에서는 ‘감젓줄·감저꿀·감저뗑가리’ 등을 쓴다. 전북에서는 ‘고구마 줄거리, 고구마 순/고구맛순, 고구마 대/고구맛대’라고 일컫는데 특히 ‘고구맛순’과 ‘고구맛대’를 많이 쓴다. 고구마 잎자루를 따서 잎을 버리고 그 대를 먹는 까닭에 ‘고구맛대’로 부르는 것 같다. 표준어로는 ‘고구마 줄기’라 부르면 되지만, 지역에 따라서 고구마의 어린잎과 줄기를 부르는 이름과 그것을 식용으로 하면서 부르는 이름에서 상당한 차이가 난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도우미
2년 전쯤이다. 인기가 높은 한 방송극에서 여주인공이 ‘헬퍼’라는 직업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고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도우미’라는 우리말이 ‘헬퍼’에 자리를 빼앗기지는 않을까 걱정한 적이 있다. 극작가로서는 외래어가 더 세련된 표현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가사) 도우미’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하필 보편화되지도 않은 ‘(리빙) 헬퍼’라는 말을 썼을까 하는 아쉬움이 더했다. 드라마 영향만은 아니겠지만 결국 ‘헬퍼’라는 말은 ‘가정부, (가사) 도우미’ 등으로 불리던 직업의 또다른 말로 자리를 잡고 말았다.
우리말보다 외래어가 더 세련된 표현이라는 막연한 인식 탓에 외래어 새말이 우리말을 밀어내는 사례가 많다. 백화점에 ‘목도리 매장’은 없고 ‘머플러 코너’가 있다. 회의를 할 때 명단과 일정을 점검하기도 하지만 ‘미팅을 세팅할 때 리스트와 스케줄을 체크’하기도 한다.
외래어 새말이 큰 세력을 얻지 못하거나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라이프가드’(life guard)보다는 ‘안전 요원’이 훨씬 많이 쓰이고, ‘데빗카드’(debit card)보다는 ‘직불카드’가 익숙하다. 이렇게 새로 들어온 외래어보다 우리말이 쉽고 간단할 때는 호락호락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다. 이미 쓰던 말이 있는데 비슷한 의미의 새말이 생기면 기존의 말과 경쟁 관계에 놓인다. ‘베이비시터’, ‘실버시터’와 자리를 다투는 ‘아이 돌보미, 경로도우미’ 등의 새말들이 널리 자리잡기 바란다. 말은 가려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따른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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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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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2. 북방의 정복자(흉노전) - 4/4
우리는 우리 식대로 산다
그 얼마 후에 묵특이 죽자, 그 아들 계육이 즉위하여 노상선우라고 칭했다. 노상선우가 즉위하자, 문제는 고조의 전례의 따라 황족의 딸을 공주로 꾸며서 선우에게 짝지우기로 하고, 그 후견인으로서 연나라 출신의 환관 중행열을 동행시켰다. 중행열은 흉노로 가는 것이 꺼림칙하여 그 임무를 사양했으나,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중행열은 흉노로 가는 길에 다짐을 하였다.
"두고 보자. 강제로 보낸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다. 나는 반드시 한나라의 화근이 될 것이다."
그리고 흉노 측에 도착하자마자 곧 선우에게 귀순하더니 곧바로 선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흉노들은 전부터 한나라의 비단이나 면, 음식 등을 애용하고 있었다. 중행열은 우선 그 점을 지적하여 선우에게 진언했다.
"흉노는 인구로 본다면 한나라의 일개 군보다도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한나라에 필적하는 힘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의식과 풍습이 한나라와 달라서 한나라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우께서 지금 흉노 본래의 관습을 버리고 한나라의 물건을 즐기시는데 이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가서는 한나라가 자기 나라 물자의 2할만 흉노에게 소비하게 하면 흉노는 완전히 한에게 종속되고 말 것입니다. 미리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한나라의 비단이나 면을 입은 자에게는 그것을 입혀서 가시밭 속을 달리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면은 곧 여지없이 찢어지고, 모피, 수피가 얼마나 뛰어난 물건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나라의 음식을 입수하시면 즉각 버리시고, 흉노의 유제품이 얼마나 편리하고 맛이 좋은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중행열은 이렇게 진언함과 동시에 선우의 측근에게 흉노의 인구 및 가축 수를 상세히 조사하여, 그 통계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어서 중행열은 한나라에 보내는 서한의 양식을 고치도록 했다. 지금까지 한나라에서 흉노에게 보내오는 서한은 한 자 한 치의 두루마리가 사용되었으며, "황제, 삼가 흉노의 대선우에게 문안하노니, 편안하신가."라고 시작되어 헌납한 물건과 용건을 적는 것이 통례였다. 그래서 중행열은 선우가 한나라에 보내는 서한에는 한 자 두 치의 두루마리를 사용하게 했으며, 봉인을 크게 하고는,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 삼가 한의 황제에 문안하노라. 편안하신가."라고 오만한 태도로 물건과 용건을 기록하게 했다. 또한 중행열은 한나라 사신의 언동에 눈을 크게 뜨고 부라렸다. 어느 때인가 사신이, "흉노의 풍속은 노인을 천대한다."라고 비난했다. 중행열은 때는 이때라고 생각하여 사신을 크게 꾸짖으며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묻겠는데, 너희들 한나라 풍습으로는 젊은이가 변경 수비병으로 종군할 때 늙은 부모가 자기를 희생하고 따뜻한 의복을 주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이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러자 사신이 되물었다. "아니, 그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이에 중행열이 말했다. "그것이 당연하다면 흉노가 노인을 천대한다는 말이 어떻게 나오는가. 말할 것도 없이 흉노는 싸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싸우지 못하는 노약한 자가 맛있는 것을 강건한 젊은이에게 양보하는 것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부자가 서로 오래도록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흉노는 부자가 한 천막 속에 거주하며,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계모를 아내로 삼거나, 형제가 죽으면 나머지 형제가 미망인을 자기 아내로 삼거나 하지 않는가. 게다가 흉노는 의관도 없으며 예절도 없다." 그러자 중행열이 사신을 비난했다. "한나라의 사자여, 흉노의 풍습을 모른다면 가르쳐 주지. 흉노의 생계는 모두 축산으로써 이룩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축의 고기를 먹으며 그 젖을 마시고 모피를 입는다. 그리고 가축에게 필요한 풀과 물을 구해서 계절 따라 이동한다. 그러므로 언제 전쟁이 터지더라도 말타고 활을 쏘는 훈련이 되어 있으며, 평상시에는 편안하고 온화한 생활을 즐길 수가 있다. 법은 간단하여 실행하기 쉽고 군신 관계도 단순하여 한 인간의 몸처럼 움직이기 좋게 되어 있다. 부자, 형제가 죽으면 남아 있는 자가 미망인을 자기 처로 하는 것은 가계의 단절, 종족의 절멸을 막기 위함이다. 때문에 흉노는 언뜻 보기에는 문란한 것 같지만 혈통이 끊기지 않고 존속해가는 것이다. 분명히 중국에서는 계모와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때문에 친척끼리 점점 사이가 멀어져 나중에는 서로 다투고 죽이기까지 하게 된다. 혁명이 일어나면 황제의 성이 바뀌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한 예의라고 해도 오늘날에 와서는 나쁜 풍습만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상하가 서로 원한을 품거나 시기를 하면서 사치만을 좇고, 그것을 위해서는 생계조차 돌보지 않는 판국이 아닌가. 그리고 의식을 농경, 양잠에 의지하고 자위를 위해서는 성벽을 의지하는데, 그렇게 때문에 만일의 경우가 생기더라도 백성들은 충분히 싸우지도 못하고 평시에도 생산에 쫓길 뿐 잠시도 여유없는 것이다. 흙집에 사는 가련한 한인이여, 자기 나라의 실정을 알았다면 이제부터는 공연히 아는 척 안 하는 게 좋겠다. 또 관을 써봤자 뾰족한 수도 없지 않은가."
이런 말이 오고 간 후부터 한나라 사신이 무슨 말을 꺼내면 중행열은 듣기도 싫다는 듯이 이렇게 일축해 버렸다.
"한나라 사자여, 쓸데없는 수다는 떨지 말게. 너는 한나라가 흉노에게 보내오는 비단, 면, 쌀, 누룩을 정량대로, 또 좋은 것을 가져오기만 하면 돼. 양과 질이 두루 완전하면 그것으로 족해. 만약 수량이 모자라거나 품질이 조잡할 경우에는 가을 수확때에 기마대를 몰아 너희를 노작물을 짓밟을 테니 그쯤 알게."
그리고 한편으로는 쉴새없이 선우를 부추켜 한나라의 틈을 엿보게 했다. 그 후 문제 14년, 드디어 흉노의 선우가 14만 기를 이끌고 침입하여 다수의 주민을 포로로 잡고, 많은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기습부대를 풀어 옹 지방의 감천궁까지 점령하였다. 문제는 급히 전차 1천 대, 기병 10만을 출동시켜 장안 부근 일대에 방위선을 구축하여 흉노의 침략에 대비하는 한편, 계속 전차, 기마의 대군을 내보내 반격을 가해 나갔다. 그러자 선우는 한나라 영토에 머물기 한 달 남짓해서 깨끗이 요새밖으로 철수해 버렸다. 한나라 군사가 이를 추격했으나 아무런 전과도 없이 곧 철수해 버렸다. 흉노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한나라를 멸시하여 매년 국경을 침범해서는 다수의 주민을 사로잡고 손에 닿는 대로 약탈해 갔다. 이렇게 하여 중행열은 한, 흉노의 화친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신이 예언한 대로 '한나라의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노상선우가 죽은 후에도 그 아들 군신선우를 섬겼다. 그 사이 양국은 전투와 화해를 되풀이했으나 한나라는 항상 수세의 입장에 몰려 있었다.
마읍에서 생긴 일
그 뒤 한무제는 즉위하자 흉노와의 화친책을 선명히 내걸고 흉노를 정중히 대접했다. 흉노와의 교역에도 힘을 들이고, 한나라 물자를 충분히 흉노에게 공급했다. 그러므로 흉노도 선우 이하 한나라와 친하지 않은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화친책 뒤에서 한나라는 은밀히 흉노 토벌의 책략을 꾸며 마읍의 한 노인을 흉노 땅에 들여보냈다. 그는 밀수를 하면서 흉노와 친교를 맺고 교묘히 선우에게 근접하여 마읍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이 말을 믿은 선우는 마읍의 풍부한 물자를 손에 넣고자 10만 기를 이끌고 침입했다. 이에 대해서 한나라는 마읍 근처에 30여 만의 대군을 미리 매복시켜 충분히 사전 준비를 갖추고 선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를 알 턱이 없는 선우는 마읍을 향해 단숨에 진군해 왔다. 그런데 마읍까지 백여 리를 남겨 놓았을 때였다. 평원 일대에 가축이 떼지어 있는데 그것을 망 보는 사람의 모습이 하나도 안 보였다. 수상히 여긴 선우는 방향을 돌려 근처의 경비초소를 급습했다. 때마침 변경의 요새에서는 보초병 하나가 선우의 부대 움직임을 정찰하고 있었다. 한나라 군사의 책략을 알고 있었던 그는 선우에게 붙잡혀 칼로 위협을 받자 한나라의 잠복 사실을 모조리 불로 말았다.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했었지." 선우는 놀라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즉각 군사를 요새 밖으로 퇴진시키면서 경비병에게 말했다. "너를 잡은 것은 천운이라 할 것이다. 하늘이 네 입을 통해 알려 주신 것이다." 그리고는 그를 왕으로 등용하여, '천왕'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한편 한나라 군대는 선우가 마읍에 들어서자 각 군이 일제히 습격 할 작정이었으나 선우가 철수해 버렸으므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배신감을 느낀 흉노는 한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끊고 닥치는 대로 한나라 변형을 하기에 이르렀다. 변경에 침입하여 약탈 행위를 일삼는 사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역만은 계속되었다. 흉노는 여전히 한나라의 물자를 탐냈으며 한나라 또한 교역을 통해서 흉노를 회유하려 했던 것이다.
공격은 했지만
마읍 사건이 일어난 지 5년 후의 가을이다. 한나라는 위청, 공손하 , 공손오, 이광의 네 장군에게 각기 1만 기의 군사를 주어 교역장 주변의 흉노를 공격케 했다. 그러나 손실에 비해 전과는 미미한 것이었다. 다만 전과라 할 수 있는 것은 위청 장군이 상곡에서 출격하여 겨우 7백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는 정도였다. 공손하는 운중에서 출격하여 아무런 전과 없이 철수하고, 대 지방에서 출격한 공손오는 대패하여 7천여 명을 잃었으며, 안문으로 출격했던 이광도 흉노의 대군을 만나 참패를 당했다. 이광의 경우는 뒤에 탈출했다고는 하나 한때는 흉노에게 생포되기조차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공손오와 이광은 옥에 갇혀 속쇠금을 물고 평민으로 격하되었다. 같은 해 겨울, 흉노는 줄곧 한나라의 변경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대해 한나라는 가장 큰 피해를 받은 지방에 장군 한안국을 주둔시켜서 흉노에 대비했다. 그 후 얼마 동안은 흉노도 잠잠했다. 그러나 다음해 가을에는 2만 기가 침입, 요서의 태수를 살해하고 2천 명을 포로로 데려갔다. 또한 어양 태수의 수비군 천여 명을 쳐부수고 장군 한안국의 군대도 포위했다. 한안국의 군대는 그때 천여 기에 불과하여 전멸의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위기 일발에 연나라에서 구원군이 도착하여 흉노를 쫓음으로써 위기를 면했다. 그 후 흉노는 또다시 안문에 침입하여 천여 명을 살해, 약탈했다. 그리하여 한나라는 위청에게 3만 기를 주어 안문에서 출격하게 했다. 이때 머리를 벤 자와 포로를 합쳐서 수천의 전과를 올렸다. 위청 장군은 다음해에도 운중에서 흉노 토벌에 나섰다. 그는 서진하여 농서에 이르러서 오르도스에 진을 친 흉노의 누번왕, 백양왕을 공격하여 수급과 포로를 합쳐 수천, 소와 양을 백여만 마리나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리하여 한나라는 오르도스를 탈취하여 그곳에 삭방군을 설치하고 진나라 시대에 몽염이 구축했던 요새를 수복하고 황하를 따라 방비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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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2부 활성산소가 주범인 수많은 질병
활성산소가 문제
인간은 모두 나이를 먹고 늙어가며 결국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 잠을 자고 깨며 밥을 먹고 하는 리듬을 반복하면서 자기 울타리 범위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을 한다. 또 몇몇 사람과는 특별한 관계를 맺고 사랑을 하면서 사는데, 이렇게 살 수 있는 최대 기간은 아주 길어야 110년에서 120년 정도 된다. 그런데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평균수명은 대략 70세 전후이다. 그 70년 동안을 항상 건강하고 에너지가 넘쳐나듯이 보내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마지막 5~10년은 허리가 아프고 팔다리가 쑤시고 숨이 차고 기억력도 떨어진 상태로 보내지 않는가? 거기에 적어도 2, 3개씩의 지병을 갖고 있으면서 약의 도움을 받고 지낸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조물주로부터 120년 정도는 사용할 수 있는 신체를 물려받았으면서도 그 절반도 제대로 못 써보고 죽는 셈이다. 인간을 이렇게 나약하게 만들고 천수를 다 못 누리고 죽게하는 대표적인 사망 원인에는 중풍 같은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암, 사고사 등이 있다.
요즘 웬만한 병원이면 대부분 종합건강검진센터라는 것이 있다. 병이 있거나 여기저기 아픈 사람 말고도 건강하거나 질병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와서 정기적인 질병 체크를 받는 곳이다. 내가 있는 병원에도 이런 센터가 있다. 그런데 검사 결과들을 보면 아직 30~40대 밖에 안 되었는데도 미래의 뇌혈관, 심장질환, 암환자 후보들이 수두룩하다. 물론 예방법과 치료에 대해서 처방을 해 준다. 하지만 아직 이상소견이 경미한 사람은 별 불편한 증상이 없다는 이유로 예방법을 잘 지키지 않는다. 의사 앞에서 고개만 끄덕거리는 그게 전부다. 이미 질병이 생긴 사람도 성가시다는 이유로 약을 잘 먹지 않는다. 그리고는 국적불명의 신비의.., 기적의.. 뭐뭐라고 선전되는 약을 사 먹는 데는 열심이다.
'한국 성인의 의식구조'에 대한 자료를 보면 재산, 자녀, 교육, 건강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 중에서도 건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성인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건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 국민들은 분명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40대 사망률이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분명히 건강하지 않은 나라이다. 40대 사망률 세계 1위의 국가, 하지만 건강을 가장 중시하는 나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반된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어째서 건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식을 가진 우리 나라가 40대에서 세계 1위의 사망률을 나타내는 것일까? 아마도 터무니없는 건강비법, 허무맹랑한 자가치료법, 종잡을 수 없는 의료 관행,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학적이 아닌 건강생활, 건강 미신이 원인이 아닌가 싶다. 무엇무엇을 해라. 그러면 기적처럼 암이 낫고 풍이 치료되며 노화가 오지 않는다라는 식의 글이 나오면 앞뒤는 안 읽어보고 그냥 맹복적으로 따라한다. 심지어는 덜 과학적이고 신비스러운 표현이 들어 있을수록 우리 국민들은 이를 거의 광신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수염을 기른 노인네가 나와서 정월 대보름에 영롱하게 뜬 보름달의 정기를 받으며 대나무에 구운 무엇을 만병통치약이라고 선전하면 그것을 구해 먹으려고 장사진을 이룬다. TV에서는 유명한 장수촌의 소개와 더불어 어떤 식품을 선전하면 국민들은 그것을 먹으면 오래 사는 것으로 인식한다. 어쩌다 유력 일간지에 동물실험의 결과인 것을 전제로 소식을 하면 장수한다는 내용이 실리면 당장부터 무조건 식사량을 줄이느라고 법석이며, 심지어는 단식을 강행하기까지 한다. 주위에서 누가 그거 한번 먹어보니 참 좋더라. 아프던 게 싹 가셨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왜 좋은지를 한번쯤 생각해 보지도 않고 받고 있던 치료도 중단해 버리면서 열심히 수십 만원씩 들여서 정성껏 사먹는 국민 - 외국에서 저술된 달콤하고 편견 투성이의 책들이 번역되어 대형서점 건강코너에 스테디셀러로 팔려 나간다. 또 대중 잡지들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흥미로운 것을 마구 베껴서 건강코너에 싣고 이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건강상식화되고... 도대체 침을 튀기며 목청이 쉬도록 얘기해도 고쳐질 줄 모르는 이 건강미신의 원흉이 무엇일까? 의사의 잘못이나 현대의학의 한계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아마 20~30년이 지나면 과학적으로 증명된 예방법이나 치료법을 지키지 않던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환자가 되어 다시 병원신세를 지게 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의사의 지시를 잘 지키도록 만들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를 나는 매일같이 느낀다. 사망원인 중 급작스런 사고사는 막기가 어렵겠지만, 앞의 다른 병들은 안 생기도록 예방할 수 있다. 좀 늦게 생기도록 늦출 수도 있으며, 조기에 발견해서 치료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평균 수명이 길어질테고, 사는 동안에는 건강하게 지낼 수가 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무병장수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바로 이런 의미의 무병장수를 하도록 해주는 과학적이고 새로운 방법 중에 한가지가 프리라디칼 처치법이다. 그리고 이 방법은 동기부여가 잘 된다. 별 증상이 없는 사람도 프리라디칼의 피해가 위험 수준에 왔다는 것을 단순한 말이 아닌 검사 수치로 객관적으로 보여주면서 처방을 해주면 꼬박꼬박 잘 지키는 사람이 많다.
미래의 의학은 훨씬 더 진보된 예방의학의 시대이다. 어느 정도 이상이 생기고 난 후에야 발견이 되는 지금 같은 검사법이 아니라, 세포 수준에서 생긴 이상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질병과 노화의 싹이 이미 생기기 훨씬 전에 감지해 내어 없애버리는 것이다. 프리라디칼 손상도 세포 수준에서 생기는 이상에 속한다. 지금의 의사들은 심장병, 중풍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콜레스테롤이 높은 사람이나 고혈압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 현재는 콜레스테롤이 정상이지만 앞으로 높아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내는 검사 방법이 나올 것이다. 또한 현재는 혈압이 정상이지만 앞으로 고혈압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수치로 보여 주는 검사도 사용될 것이다. 젊은 사람에게 당신은 노화 속도가 빨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검사도 가능해진다. 현재처럼 아무런 검사 이상이 없는 사람에게 생활습관이 나빠서 병에 걸릴지 모르니 운동을 하고 담배를 끊으라고 하는 게 고작인 처방시대는 곧 끝날 것이다. 왜 어떻게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를 세포의 미세한 이상을 찾아내는 검사 방법으로 찾아내어 그것을 수치로 보여 주게 된다. 동시에 지키기 쉬운 처방을 손에 쥐어 쥘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다. 동네 병-의원에는 감기나 복통 환자보다는 첨단 예방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이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법 중의 하나가 프리라디칼의 처리능력과 그 피해 정도를 측정하고 항산화벽 구축법을 처방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방법으로 노화를 늦출 수 있다고 확신한다. 실제 노화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도 인간의 노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을 프리라디칼 이론으로 꼽는다.
인간의 노화에서 가장 중요한 프리라디칼 이론
아직도 순수한 의미의 노화 메커니즘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때문에 프리라디칼이 노화의 주범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더구나 엄밀한 학문적 관점에서 볼 때 프리라디칼 제거법이 인간의 노화예방에 얼마나 관여하는지에 대해 아직은 불확실한 면도 있는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노화에 관한 얘기를 할 때에는 '무슨무슨 이론에 의하면'이라든가, '무슨 학설에 의하면' 같은 말을 쓰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들을 종합해 보면 프리라디칼을 처리하는 항산화제가 노화를 늦추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 더 우세하다. 그리고 노화에 관한 가장 유력한 이론중의 하나가 프리라디칼 노화이론이다. 오래 전에 휴식 상태의 동물에서 그 세포가 활동하는 정도가 클수록 그 동물의 수명이 짧다는 프리라디칼 이론이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많은 학자들이 이와 유사한 연구결과를 보고하였다. 이 이론을 풀어 설명하면, 세포활동이 많다는 것은 산소를 이용한 대사가 많다는 것이고, 산소대사가 많다는 것은 산소를 많이 소모한다는 뜻이며, 이는 곧 더 많은 프리라디칼이 생긴다는 뜻이므로, 결국 수명이 짧다는 것은 프리라디칼이 많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아직도 프리라디칼이 노화를 진행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확실한 근거는 부족한 실정이다. 즉 나이를 먹을수록 프리라디칼에 대한 방어 능력이 떨어진다거나 혹은 활성산소에 의한 조직손상이 나이를 먹을수록 많아진다는 확실한 과학적 증거가 아직은 부족한 것이다. 또 프리라디칼을 처치하는 항산화제를 투여하면 순수히 그 효과로 인해 수명이 길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도 아직은 불확실하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각종 경로로 들어서 알고 있고, 많은 학자들이 효과가 있다고 보고한 항산화제를 포함한 수많은 장수법들은 인간의 사망원인이 되는 질병에 걸릴 확률을 감소시켜 주고 노화를 천천히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일 뿐이다. 아직은 그 어느 것도 노화 자체를 예방하는 효과로 인해 당신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확실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노화와 장수를 공부하는 필자도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해 보라. 그러면 분명히 장수한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냉정하고 엄밀한 학문적 입장에서 말하라고 한다면 아직까지는 만병통치나 불로초 같은 것은 없다. 물론 앞으로 언젠가는 전세계 수많은 과학자들의 연구가 결실을 맺을 날이 있겠지만 말이다.
이제 정리를 해 보자. 첫째, 프리라디칼이 여러 질병의생성과 진행에 관여한다는 것은 인정되고 있다. 둘째, 하지만 노화 그 자체에 관여하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 불확실하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먹음에 따라 세포 안의 미토콘드리아에서 프리라디칼의 생성이 증가되며, 그에 따른 조직손상의 정도가 수명을 결정한다는 프리라디칼 이론은 여전히 노화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론이다. 넷째, 따라서 아직까지는 프리라디칼 이론에 입각한 노화를 늦추는 항산화 구축법이 과학적인 노화예방법이라 할 수 있으며 실천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방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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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인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김인후
김인후(1510-1560)의 본관은 울산이고, 자는 후지, 호는 하서이다. 중종 26년(1531) 2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9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여 독서당에 들어가 학업을 닦은 뒤 정자 겸 설서를 역임하였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에 김인후를 만나 보고 크게 기뻐하여 은사와 예우가 날마다 융숭하였다. 그래서 간혹 김인후가 숙직하는 곳에 직접 찾아가서 조용히 어려운 데를 묻기도 하고 특별히 서책을 내려 주기도 하였으며, 또 대나무 묵화를 그려 주어 은미한 뜻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김인후가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원하여 옥과현감이 되었다. 그 무렵 인종이 승하하였는데 부음이 전해지자 김인후는 놀랍고 슬퍼서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으나 그 일로 인하여 병이 들었으므로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는 어떤 관직에 임명되어도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선산 곁에다 재실을 짓고 '잠재'라 편액하고 그것으로 호를 삼았다. 송강 정철이 시를 지었다.
동방에 처세하는 근본이 없더니 유독 잠재옹이 있구려 해마다 7월이 오면 깊은 산중에서 통곡하도다
이 시는 김인후가 매년 7월 1일 인종의 기신을 당하면 번번이 산골짜기로 들어가 밤새도록 통곡하다가 돌아오곤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김인후는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에 환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시를 지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위대한 두 분이 있으니 원기로 뭉쳐진 공자와 진실로 다져진 주자이네
시호는 문정이며 문묘에 종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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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
사물의 시초를 말한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성장을 하고 공자를 뵈러왔다. 공자는 그의 보라는 듯 싶은 기색을 알아채고 그냥 보아 넘겨선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자로군, 그 성장은 웬 일인가?" 하고 물은 다음 비유해서 말하였다. "예로부터 양자강은 그 근원인즉 술잔을 띄울 정도의 물에 불과했다네, 그런데 내려울수록 물이 깊어지고 흐름이 빨라져 배를 타고서도 바람이 없는 날을 택해야지만 건널 수 있게 되거든" 공자는 이처럼 비근한 사례를 들어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는데 능란하였다. 그는 또한 상냥하게 "자로군, 지금 자네는 성장을 하고 득의 양양하네만 자네를 충고하는 데에는 나 이외에 없겠구먼" 어떤 사람이든 시초가 중요하며 시초가 언짢으면 갈수록 나빠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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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1. 보리수를 닮은 사람들
불교 불교하는데
한국불교하면 먼저 통불교, 호국불교란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생활불교가 되어야 한다. 기복신앙에 빠져 그저 복이나 빌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실천불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불교에 있어서 깨우침이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불교라 할 것인가. 그저 불교를 내세운 사이비 집단이지. 평상심이 도(길 도)다. 도는 먼 곳에 있지 않다. 백만 번 천만 번 듣는 소리겠지만 숨 쉬고 내뱉는 것부터 밥 먹고 잠 자는 것까지 일상의 모든 행동이 바로 수행인 것이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라든가 '살아 남기 위해'라는 말은 정말 구역질난다. 요즘 세상에 사지가 멀쩡한 이라면 먹고 살지 못하는 이가 몇 있겠는가. 비록 몸이 성치 못한 이라 하더라도 근면하기만 하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꿈틀거리며 살 수가 있는 것이다. 대개 게으르고 마음이 사악해 남에게 해충 같은 존재로 사는 이들이 십팔번처럼 내뱉는 '죽겠네'라는 자기변명의 도구로 하는 말들을 들을 때면, 잡아다가 절집 선방에 앉혀 놓고 죽비(두 개의 대나무를 합하여 만든 법구로 나무부분을 오른손에 쥐고 갈라진 부분은 왼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대중의 행동을 통일시킴)를 옆에 들고 서서, 용맹정진(성불을 향해서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고 용맹스럽게 나아가는 것)시키며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것이, 이 무엇꼬'하며 마음 갈무리를 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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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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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6. 정조,대원군의 실험정치 실패 (타율적인 개항을 초래한 세도정치) 1/2
나침반 없는 나라
언젠가 어느 공영방송의 역사 프로그램에서 근조선의 '예송논쟁'을 다루는 것을 보았다. 그 프로그램은 근조선의 당쟁이 결코 야비하고 음모적인 권력투쟁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즉 효종의 장례와 효종비의 장례를 둘러싸고 벌어진 서인과 남인의 정치투쟁은 사회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는 건강한 논쟁이었다는 것이다. 프로그램은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서인의 지도자 송시열과 남인의 지도자 허목이 정치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서로 신뢰하며 존중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예송논쟁은 과연합리적이고 건강한 정치투쟁이었을까? 서인과 남인 사이에 처음으로 예송논쟁이 벌어진 것은 1660 년이었다. 1659 년 5월에 효종이 죽자 임금자리를 물려받은 현종은 아버지 효종의 장례를 치르게되었다. 이때 서인인 송시열 등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아들의 상복을 1 년만 입으면 된다고 주장했고, 임금은 이 주장을 따랐다. 그러나 이듬해 3월에 남인의 두령인 허목과 윤휴는 상소를 올려 1 년 상복은 틀린 것이고 3 년 상복이 옳다고 주장하며, 송시열을 비판했다. 그들은 효종이 비록 맏아들은 아니지만 임금이었으므로 맏아들로 보아야 하며, 이에 따라 자의대비는 3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윤선도는 1 년 상복을 주장하는 송시열의 견해가 반역행위나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즉 효종은 임금으로서 사대부와 다른 특수한 존재인데 그런 그에게 사대부의 예법을 적용하려 하는 것은 임금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반역의 의도가 엿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런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송시열의 주장은 그대로 관철되었으며, 그를 거칠게 비판했던 윤선도는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송시열에 대한 비판상소는 1667 년 윤선도 귀양살이에서 풀릴 때까지 가끔씩이긴 하지만 계속 올라왔다. 그러다가 1674 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자, 이 문제가 다시 정치적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아들에 이어 며느리까지 앞세운 자의대비가 며느리 인선왕후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다시 격돌한 것이다. 즉 인선왕후를 작은며느리로 보아 9개월 상복을 입을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맏며느리로 보아 1 년 상복을 입을 것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내놓았던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34세의 청년 임금 현종은 인선왕후를 작은며느리로 보는 것은 아버지 효종을 작은아들로 보는 것이고, 이는 임금을 능멸하는 것이라며, 송시열 등 서인을 귀양보내기에 이르렀다. 그는 서인의 주장이 왕권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서인과 남인은 서로 예의를 갖추어 상대방을 공격했다. 또 그들은 모두 성리학을 숭상했으며, 성리학적 예법이 사회를 지탱하는 이념적 바탕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그들의 논쟁을 합리화시켜줄 수 있을까? 예송논쟁이 벌어진 시기는 인조가 삼전도의 치욕을 맛본 지 24 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사회는 전쟁의 후유증을 달래며 변화의 몸살을 앓고 있었다. 1653년에는 전염병이 돌아 서북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곡식이 부족해서 금주령을 내렸는데도 굶어죽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상평청(물가조절기관인 상평창과 다르며, 평상시에 곡식을 비축했다 기근이 들면 이름을 진휼청으로 바꾸어 빈민구제를 했음)은 죽을 쑤어 빈민을 먹여야 했으며, 재정이 부족해서 관료들의 녹봉까지 줄여야 했고, 신분질서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행성 열병은 전국을 돌고 또 돌았으며, 인육을 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예송논쟁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것이 당시 정치세력의 진정한 관심사가 될 수 있었을까? 예송논쟁은 성리학파의 '낡은 질서 지키기'였을 따름이다. 그것은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외면이며, 새로운 국가 세우기에 대한 의무 방기였다. 한마디로 그런 논쟁은 근조선 후기의 성리학파가 역사적 방향을 상실하고 있었음을 드러낼 뿐이다. 그들 사이의 의리와 예의는 전체 역사에서 너무나도 부차적인 것이다. 역사를 읽을 때는 늘 눈을 크게 뜨고 큰 줄기를 찾아야 한다.
정조와 문화부흥운동의 발전
사회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면 될수록 성리학파의 낡은 질서 지키기는 더욱 거친 모습을 드러냈다. 대륙으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천주교는 성리학파를 놀라게 했으며, 문화부흥운동에 힘입은 학문적 성장과 전통문화의 부활은 성리학파를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이제 특별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경우 성리학파의 파멸은 매우 빠르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정조 때에는 임금과 왕실조차 문화부흥운동을 적극 지원하면서, 성리학파를 견제하려고 했다. 정조는 임금이 됨과 동시에 청나라로부터 "고금도서집성" 5,020권을 수입했으며, 새로운 성과들을 원활하게 출판할 수 있도록 활자를 보수하고 서둘러 추가제작에 들어갔다.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이 바로 이때 만들어진 활자들이다. 그리하여 정조 때 문화부흥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근조선에서 가장 많은 서적이 간행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으며, 그 가운데 성리학과 무관한 서적이 놀랄 만한 분량을 차지한 것도 이 시기이다. 뿐만 아니라 정조 자신도 '개유와'라는 서재에서 청나라 건륭 시기의 문화사업을 열심히 검토하였다. 정조는 역사의 진행방향에 대한 감각과 현실적 정치감각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기득권 세력인 성리학파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 내부의 경쟁관계를 이용하기도 했다. 홍국영 일파를 내세워 홍인한 등 구세력을 제거했고, 마침내 홍국영까지 쫓아낸 것이다. 그는 강화된 왕권을 중심으로 근조선을 재건국하려 하였는데, 이를 위해 왕권 강화를 지지하는 남인들을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참된 면모는 개혁을 주장하는 젊은 인재들과 문화부흥파를 깊이 신뢰하고 그들에게 현실참여의 기회를 준 데서 잘 드러난다. 남인 가운데서도 문화부흥파의 선봉장이었던 정약용 등을 중용해서 왕권에 대한 지지도가 낮았던 북학파를 포섭하도록 하는 한편, 그들 모두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여 근조선 재건국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박지원의 제자인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가 등용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서얼로서 그들의 등용은 성리학파에 대한 강한 도전임과 아울러 사회변화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통치행위이기도 했다. 문화부흥운동에 대한 정조의 지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중인 이하의 계층에게까지 이어졌다. 정조는 중인들의 문학단체인 '옥계시사'를 지원하여 그들이 성리학파의 문화독점에 반기를 들 수 있도록 그들의 공동시집인 '풍요속찬'까지 발간하게 했다. 그 결과 시문학에서도 성리학적인 분위기를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었다.
정조는 문화부흥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다른 사상까지 받아들이는 개방성을 보였다. 임진전쟁 때 큰 공로를 세웠지만 승려라는 신분 때문에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사당조차 없던 서산을 위해 표충사를 세우게 했고, 그곳에 친필 액자를 내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불국사의 남쪽 행랑을 보수하도록 하고, 금강산 표훈사를 복구했으며,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빈다는 명분으로 수원 용주사를 개수하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성리학파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전통문화와 실용적 지식의 연구를 장려했고, 그 결과물을 공식 출판하도록 허용했다. 이덕무와 박제가 등이 편찬한 '무예도보통지'는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작업의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문체반정'을 주장하며 중국적 어휘와 성리학파의 상투어를 배격하기도 했다. 서학의 경우 공식적으로 개방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탄압 조치도 있었지만, 서학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바른 학문을 세우는 것이라고 하면서 유연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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