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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07 호
단기 4340. 12. 17 (음력 11. 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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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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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스토리 & 인물 다큐멘터리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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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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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말에 성난 말로 대꾸하지 말 것. 말다툼은 언제나 두 번째의 성난 말 때문에 비롯되니까.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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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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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천하를 얻으려면
"대학"의 뜻은 밝은 본성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에 있으며, 지극히 착한 경지에 머무는 데 있다. 머무를 데를 안 뒤에야 목적이 있고, 목적을 정한 뒤에야 동요되지 않을 수 있으며, 동요되지 않은 뒤에야 편안할 수 있다. 편안한 뒤에야 생각할 수 있고, 일에는 시초와 종결이 있으니, 먼저하고 나중에 할 것을 알면 정의에 가까워질 것이다. 옛날 큰 덕을 천하에 밝히려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렸고, 그 나라를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을 바로잡았고, 그 집안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참되게 했고, 그 뜻을 참되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얾을 투철히 했으니, 앎을 투철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데 있다. 사물의 이치가 밝혀진 뒤에 라야 앎이 투철하여지고, 앎이 투철하여진 뒤에 라야 뜻이 진실하여지고, 뜻이 진실하여진 뒤에 라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라야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이고 난 뒤에 라야 집안이 바로잡히고, 집안이 바로잡히고 난 뒤에 라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라야 천하가 화평하게 된다. 지도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 몸을 닦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 백성이 다스려지는 법이 없으며, 후덕하게 해야 할 데에 야박하게 굴고, 야박하게 해야 할 데에 후덕하게 되는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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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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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5장 문화, 환경, 종교
환경 파괴, 기술의 문제인가 체제의 문제인가 - 강성화
오늘날 환경 문제의 심각함과 해결의 시급함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기술적으로만, 혹은 구조적으로만 접근해서 문제의 핵심 원인에 다가갈 수 있을까? "매월 140여 종의 생물이 사라지고 있으며, 적어도 4800여종의 동물이 현재 멸종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오늘날 환경의 파괴와 오염으로 인한 문제가 어느 정도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어느 보고서의 한 구절이다.
물론 환경 문제는 과거에도 줄곧 존재해 왔다. 사실 그것은 인류의 문명과 더불어 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사회적 문제이다. 기록에 따르면, 인구가 밀집한 고대 도시 아테네와 로마에서의 소음, 먼지, 수많은 마차 왕래로 인한 교통 체증 및 사고, 상수도 오염, 납중독 등 많은 환경 문제가 있었고, 이를 규제하기 위한 각종 입법 조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또한 근대적 대도시의 출현과 자본주의적 산업의 발전으로 환경 문제는 더욱 심각한 지경으로 치닫게 되었고 그에 대한 논의도 더욱 활발해졌다. 그렇지만 아직 환경에 대한 '위기 의식'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후반의 오늘에 이르러 환경 파괴가 지역적이고 부차적인 수준을 넘어서 국제적이고 전지구적인 생태계 위기를 초래하고 있으며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경 파괴는 과거와는 양적,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에 놓이게 되었다. 실로 오늘의 환경 문제는 인간을 포함한 환경 전체의 위기 상황을 의미하고 있다.
환경 파괴의 상황은 빠르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산화탄소와 메탄 등의 증가로 인한 지구 온난화 현상과 프레온 가스 등에 의한 지구 오존층의 파괴는 생태계의 대변동을 예고하면서 우리 모두를 전율하게 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환경 문제의 심각함과 해결 필요성의 시급함에 대해서 누구나가 공감하고 동의한다. 그러나 환경 문제의 진정한 원인과 그 해결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이는 환경 문제가 단단하게 다루어질 수 없는, 지극히 복잡한 시대적 난제임을 보여 준다. 문제는 환경 문제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원인을 밝혀 낸다 해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물론 어려운 과제로 남겠지만, 적어도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환경 파괴, 기술의 문제인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말은 '과학은 자연에 대해 기술적 위력을 발휘한다'는 말로 풀이된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과 기술이 이전처럼 별개이거나 하나는 숭상되고 다른 하나는 천시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서로 밀접히 결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의 이 역사적인 결합의 결과로 오늘의 우리는 오히려 '과학 기술'이라는 하나의 통합된 용어에 매우 친숙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환경 문제는 산업화 및 그 추진력인 과학 기술의 발전과 여러 점에서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환경 문제가 지난 1,2세기 동안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과학 기술 및 그 발전이 환경 파괴의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곧바로 함축하지는 않는다. 과학 기술 발달과 환경 문제의 관련성을 인정하면서도, 환경 문제의 근본 원인은 과학 기술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과학 기술, 그리고 그것의 환경 관련성에 대한 지극히 우호적이고 낙관적인 해석과 전망에서 비롯된다. 여기에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의한 생산력 향상과 경제 성장은 인류가 계속적으로 추구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라는 강한 믿음이 깔려 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환경 문제를 취급하는 입장을 우리는 기술주의적 환경론이라 부를 수 있겠다.
기술주의적 환경론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 기술 그 자체는 환경 파괴와 직접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러한 주장은 과학과 기술이 철저히 객관적이고 불편부당하며 가치 중립적이라는 관점을 견지한다. 기술주의적 환경론의 보다 중요한 주장은, 설령 과학 기술의 발달이 현재의 환경 문제를 낳았다 하더라도 그 해결책은 과학 기술의 제한과 포기가 아니라 과학 기술의 발전과 신장에 있다고 보는 데에 있다. 기술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합리주의에 입각해서 환경 문제가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라고 파악한다. 간단히 말해, 환경 문제란 환경 자원과 관련해서 하나의 용도를 과도하게 이용한 결과 다른 용도에 지장을 초래함으로써 야기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강물에 폐수를 지나치게 배출한 결과 식수나 공업용수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오는데, 이것이 바로 수질 오염의 문제라는 주장이다. 덧붙여 이 수질 오염은 화학 기술을 발전시켜 강물을 중화시키는 약품을 개발하거나 유전 공학에 의해 오염 물질을 먹어 치우는 미생물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해결되는 기술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제한 받지 않는 성장, 그리고 그것에 가장 필수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이 사회적 진보를 가져온다는 기술 낙관주의에 입각해 있는 이러한 환경론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이유로 경제의 기술적 토대를 현대화하고 환경 기술 및 환경 공학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과학 시술만 발전시킨다면 환경은 무난히 구해 낼 수 있다는 '기술 메시아주의'의 태도를 지니는 이들에게 환경 문제는 사실상 부차적이고 대수롭지 않은 문제이다. 기술주의적 환경론과는 정반대로 현재의 환경 문제가 전적으로 과학 기술의 전개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자연 생태계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 기술은 그 이용 방식 및 발전 방향은 물론이고 그 내용까지도 파괴적이며 따라서 반생태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우리는 생태주의적 환경론이라 부르기로 하자.
생태주의는 인간을 생태계의 일부로서 생태계의 법칙에 종속된 존재로 보는 사고 양식을 지칭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에 필수적인 존재가 아님에 반해 자연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존재이다. 만일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의 위치를 망각하고 자연의 지배자로 군림하려 한다면,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닌 까닭에 그 과정에서 자연에 입힌 상처로 인해 인간 또한 상처를 입게 된다. 일종의 '부메랑 효과'가 생태계의 법칙에도 적용되므로, '인간이 자연 생태계에 미치는 직접 또는 간접의 영향은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인간은 자신의 편의만을 위해 자연을 '학대'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을 돌보는 하인'이어야 한다. 이처럼 생태주의는 자연과의 '윤리적'관계-흔히 이 관계는 '생명 윤리(bioethics)'라는 개념으로 논의된다-를 강조한다. 이러한 생태주의에 입각한 환경론자들은 과학 기술이 선사한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를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 기술이 오늘날 환경 파괴의 주범이며, 결국은 인간의 소외와 정신적 빈곤을 야기한다고 본다. 생태주의적 환경론은 그러므로 철저히 반기술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기술주의적 환경론과는 반대로 생태주의적 환경론은 성장의 제한, 구체적으로는 생산력 발전의 생태학적 한계를 부각시키면서 생태학적 탈산업화를 강력히 옹호한다.
아니면 체제의 문제인가
우리는 과학 기술 및 이에 힘입은 산업화의 발전이 인간의 자연 지배력을 크게 확대시킴과 동시에 심대한 환경 문제를 야기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 과학 기술의 발달이 생태계의 수용 범위와 정화 능력을 넘어서서 환경 파괴를 가속화시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과학 기술은 가치 초월적이며 가치 중립적이라는 기술주의적 견해가 소박한 믿음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이 기술주의적 과학관은 환경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무시해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왜, 그리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과학 기술이 사용되는가'하는 문제는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변수이다. 우리가 통상 과학 기술이라 부르는 말에는 실상 여러 유형의 계기, 즉, 과학적 지식, 기술적 응용, 도구 및 기계, 생산 과정, 그리고 생산물까지도 포함하는 복합적인 여러 가능성이 포괄되어 있다. 이 가능성들을 분석해 보면 과학 기술이 어느 고리에선가 환경 문제의 발생과 보다 긴밀히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 기술이 환경 파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문제 해결의 돌파구로만 생각하는 기술주의적 환경론은 잘못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대적인 기술 자체를 폐기해야 하고 탈산업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기술 낙관주의적 견해가 극단적인 주장이듯이, 과학 기술의 긍정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그 부정적 측면만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생태주의적 견해 또한 극단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생태주의적 환경론의 지적을 받아들여 과학 기술이 환경 파괴의 주요인이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결자해지의 관점에서 과학 기술이 문제 해결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을 발견해서 개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생태주의적 환경론은 생태계의 조화와 질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으나, 과학 기술에 대한 지나친 혐오감을 가진 나머지 그것에 대한 '대항 문화'로서 히피즘이나 신비주의를 지향하는 듯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 또한 받아들일 만한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는 굶주림 때문에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자의든 타의든 산업화를 생존을 위한 제일의 과제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생태주의적 환경론은 과학 기술이 온갖 환경 문제를 일으킨다고 고발만 할 것이 아니라, '그 파괴적 기술을 조정하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 깊이 있는 답변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이러한 지적과 비판은 환경 문제가 사회 경제 체제와 관련되어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는 주장에서 더욱 의미 있고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와 착취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와 착취의 구조와 무관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환경 문제는 사회의 구조 및 체제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을 접하게 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환경 문제는 무차별적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해서, 환경 문제가 이윤 추구와 경제에 근거한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모순의 결과이며, 문제의 궁극적 해결은 체제 자체를 뜯어고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강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잠정적으로 '탈자본주의적 환경론'이라 이름 붙여 보자.
탈자본주의적 환경론은 다음과 같은 인식과 평가에서 출발한다. 자본주의는 이윤의 증가를 합리성의 기준으로 삼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운영되기 때문에, 생태계의 안정을 합리성의 기준으로 삼는 생태적 논리와 필연적으로 충돌하는 내적 모순을 안고 있다. 기술주의적 환경론이나 순수 생태주의적 환경론은 바로 이 점을 문제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구조적 해결책도 제시해 줄 수가 없다.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은 동시에 자본주의의 위기와 연결된다. 탈자본주의적 환경론의 가장 전형적인 유형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환경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일반 위기는 경제 위기라기보다는 생태 위기로 표출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적 환경론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모순을 유한한 지구와 타협할 수 없는 과도한 성장을 강요하는 구조의 문제로 보고, 더 많은 생산과 더 빠른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경제 운용은 마땅히 지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 동기는 끊임없는 확대 재생산, 그리고 이를 위한 무한한 욕망과 소비의 창출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연 파괴는 가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환경 파괴의 궁극적 해결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철폐를 통해서나마 가능하다는 것이다.
더 포괄적인 접근을 기대하며
이상의 논의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요점은, 환경의 위기는 사회 체제 및 그 체제 성원들의 구체적 이해 관계를 고려하지 못한 채 '인류 공동의 문제'라는 생태주의적 구호만을 소리 높여 외쳐 대거나 또는 기술 공학적 접근만을 고집하는 것으로는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회 경제 체제의 분석을 바탕으로 사회 집단의 구체적 이해 관계가 환경 파괴와 어떻게 관련되고 있는가를 보여 줌으로써 누가 (집단이나 국가를 포함해서) 진정 환경 파괴의 가해자 (또는 수혜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를 밝혀 낼 수 있다. 탈자본주의적 환경론의 장점은 다른 어떤 이론보다도 이러한 접근 방식에 상대적으로 가장 근접해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탈자본주의적 환경론은 몇 가지 중대한 난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사회주의가 실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 없다. 과거 동구권과 소련에서 폭로된 극심한 환경 오염은 사회주의가 경제 발전과 환경 보호를 병행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론적으로도 사회주의의 이념적 모태인 마르크스주의가 환경에 관한 논의를 결코 사고의 중심에 놓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과학 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을 무한히 신뢰했던 계몽주의의 영향을 이어받고 있어서 발전 이론과 환경 이론을 서로 조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그동안 많은 환경론자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적대적인 대립과 반목의 태도를 보여 왔다는 점은 납득할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지적한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탈자본주의적 환경론은 현실적으로 유효하고 적절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입장의 장점은 환경 위기의 구조적 원인을 중심 관심사로 삼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접근이 환경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 주고 새로운 전망을 시사해 준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역설적이지만 마르크스주의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기존의 환경론이 그것과 통합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겠다.
인간주의라는 윤리적 목표의 달성은 적절한 물질적 기초를 요구한다. 이를 위한 생산력의 발전은 그러므로 필수적이다. 발전은 멈출 수 없다. 그러나 환경은 더 이상 발전에 의한 파괴를 허용할 만한 처지에 있지 않다. 이러한 딜레머 속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방안은 환경론적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새로운 발전의 모델을 채택하자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자본주의적 발전 전략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발전 전략도 이 '지속 가능성'이라는 환경론적 관심을 포착하는 데 실패해 왔음을 보여 준다. '미래 세대에 위험을 주는 일이 없이 현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발전'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이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개념은, 유엔 환경 개발 회의가 1987년 브룬트브란트 보고서를 통해 처음 공표한 이래로 환경에 관한 많은 논의들에게 공통되는 원리가 되고 있다. 물론 이 원리의 현실화 방안에 대해서는 여러 상이한 견해가 존재한다.
환경 문제에 대한 '정답'은 아직 없다. 다만 더 포괄적인 접근 방식이 요구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환경 문제는 총체적인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사회 체제나 경제 구조라는 요인 말고도 많은 사회적 요인들이 환경 문제와 관련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 문화적, 역사적인 여러 요인들도 소홀히 취급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환경론을 포함해서, 앞서 이야기한 기술주의적 환경론이나 순수 생태주의적 환경론의 오류와 한계를 인지하고, 동시에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메시지들은 올바르게 평가해 주는 자세도 중요하다. 그리고 이상의 여러 요인들은-어느 것이 직접적이고 일차적이며 어느 것은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복합적으로 고려할 때 '정답'의 실체는 점차 뚜렷이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김명자, '동서양의 과학 전통과 환경 운동', 동사출판사, 1991. D.페퍼, 이명우 외 옮김, '현대 환경론', 한길사, 1989. R.그룬트만, 박만준 외 옮김, '마르크스주의와 생태학', 동녁, 1994. M.레드크르프트, 강현수 외 옮김, '발전과 환경 위기', 한울, 1993. 문순홍, '생태 위기와 녹색의 대안', 나라사랑, 1993. J.애거시, 이군현 옮김, '현대 문명의 위기와 기술 철학', 민음사, 1991. 환경연구회 편저, '환경 논의의 쟁점들', 나라사랑, 1994. 황태연, '환경 정치학과 현대정치 사상', 나남,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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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사판
본뜻 : 마지막 궁지에 몰린 상황을 말하는 이판사판은 이판과 사판의 합성어다. 이판은 참선, 경전 공부, 포교 등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스님이고, 사판은 절의 산림을 맡아 하는 스님이다. 산림이란 절의 재산 관리를 뜻하는 말인데 산림이라고 쓰기도 한다. '살림을 잘한다'에 쓰이는 살림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한말의 국학자 이능화가 쓴 "조선불교통사" 하권 "이판사판사찰내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판승과 사판승을 설명한다. '조선 사찰에는 이판승과 사판승의 구별이 있다. 이판이란 참선하고 경전을 강론하고 수행하고 흥법 포교하는 스님이다. 속칭 공부승이라고도 한다. 사판은 생산에 종사하고 절의 업무를 꾸려 나가고 사무 행정을 해 나가는 스님들이다. 속칭 산림승이라고도 한다. 이판과 사판은 그 어느 한 쪽이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상호관계를 갖고 있다. 이판승이 없다면 부처님의 지혜 광명이 이어질 수 없다. 사판승이 없으면 가람이 존속할 수 없다. 그래서 청허, 부휴, 벽암, 백곡 스님 등의 대사들이 이판과 사판을 겸했다. 조선조에 스님이 된다는 것은 마지막 신분 계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가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국교로 세우면서 스님은 성안에 드나드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조에서 스님이 된 것은 이판이 되었건 사판이 되었건 그것은 마지막이 된 것이었고, 끝장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바뀐 뜻 :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북한은 지금 이판사판의 지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어떤 돌발 행동을 취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집도 절도 잃은 이판사판인 사람하고 시비가 붙어 봐야 하나도 좋을 일이 없네
일사불란
본뜻 : 여러 갈래의 실타래가 있는데 그 중 한 가닥의 실도 얽히지 않은 잘 정돈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질서정연하여 조금도 어지러움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비상종이 치자 급우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그때까지 공부하던 폴란드어 책을 밑으로 숨겼다 -일사불란하게 펼쳐지는 매스게임은 보는 이에게는 경탄을 자아내는 것이지만, 땡볕에 나와 앉아 그것을 연습했던 학생들에게는 지겨운 것일 수밖에 없다
궁시렁궁시렁
소리나 모양을 본떠서 나타내는 낱말을 시늉말이라 한다. 이런 말은 ‘졸졸/줄줄’, ‘겅중겅중/껑충껑충’처럼 자음이나 모음을 바꿔 느낌을 달리 나타낼 수 있다. 곧 ‘졸졸’보다 ‘줄줄’이 크고 무거운 느낌을, ‘겅중겅중’보다 ‘껑충껑충’이 ‘세고 거친 느낌’을 준다. 이처럼 시늉말에서는 양성보다 음성모음이 결합된 말이 크고 무거운 느낌을, 예사소리보다 된소리나 거센소리가 합친 말이 세고 거친 느낌을 준다. 시늉말 가운데 사전에 오르지 않은 낱말이 적잖다.
“궁시렁궁시렁 불만이 많지만 … 조금씩 악기를 연주하게 된다.”(〈한겨레〉 2006년 3월15일치)/ “등 뒤에서 운전사가 뭐라고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구효서 〈낯선 여름〉)/ “칡덩굴로 탄탄하게 엮은 광주리 속에서 중병아리가 삐약삐약 운다.”(박경리 〈토지〉)
못마땅하여 군소리를 자꾸 하는 모양을 뜻하는 말로 ‘구시렁구시렁’은 있지만 ‘궁시렁궁시렁’은 사전에 없고, ‘삐악삐악’은 있지만 ‘삐약삐약’은 오르지 않았다. 시늉말은 소리나 모양을 본뜬 말이므로 언중이 널리 쓰는 말을 사전에 올려야 한다. 현실에서는 ‘구시렁구시렁’보다는 ‘궁시렁궁시렁’이, ‘삐악삐악’보다는 ‘삐약삐약’이 더 많이 쓰인다. 이 말들을 사전에 올린다면 ‘궁시렁거리다·궁시렁대다·궁시렁궁시렁하다’와 ‘삐약거리다·삐약대다·삐약삐약하다’도 함께 올려야 할 것이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가시버시
‘가시버시’는 요즘 널리 쓰지 않는 낱말인데, 누리집에는 이것을 두고 말들이 없지 않다. 우리 토박이말을 알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토박이말 뜻을 몰라 일어나는 이야기들이니 참으로 반가운 노릇이다. 그런데 누리집에서 오가는 말들이 국어사전 때문에 잘못으로 빠지는 듯하다. 국어사전이 낱말 뜻풀이를 잘못하면 그것은 대법원이 법률을 잘못 풀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잡을 길이 없다. 그런데 국어사전은 ‘가시버시’를 ‘부부’라고도 하고, ‘부부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니 ‘부부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니 해놓았다. ‘가시버시’는 ‘부부’도 아니고, 부부를 ‘속되게’ 이르거나 ‘낮잡아’ 이르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가시버시’는 보다시피 ‘가시+버시’다. ‘가시’는 ‘각시’니 요즘 말로 아내다. 그리고 ‘버시’는 ‘벗이’다. ‘벗이’는 ‘벗’에 임자토씨 ‘이’가 붙은 것이 아니고, 풀이토씨 ‘이다’에서 ‘이’만 붙여 어찌꼴로 썼다. 뜻은 ‘벗하여’ 또는 ‘벗으로’ 또는 ‘벗 삼아’와 비슷하다. 그래서 가시버시는 ‘각시를 벗하여’ ‘각시를 벗 삼아’ ‘각시를 벗으로’ 이런 뜻의 낱말이다. ‘남편이 아내와 둘이서 정답게’ ‘부부끼리 오손도손’ 이런 뜻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며 쓰는 낱말이다. “아따,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가시버시 그렇게 차려 입고 나섰는가?” “장에 가면서도 꼭 그렇게 가시버시 해야 직성이 풀리는가?” 이처럼, 평소에 사이좋게 살아가는 부부가 함께 나타나면 추어주느라고 부러움을 담아서 자주 쓰던 낱말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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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2. 북방의 정복자(흉노전) - 3/4
한나라를 마음껏 농락하다
이전부터 한왕 신은 흉노의 장군이 되어 자리가 잡히자 때때로 협정을 무시하고 한나라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더구나 얼마 후에는 한나라의 장군 진희가 흉노에 넘어가 한왕 신과 공모하여 침공해 오기도 했다. 한나라는 장군 번쾌를 보내 여러 군, 현을 간신히 탈환하기는 했지만 국경선 밖까지 토벌하려 나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변경의 요새로 파견된 한나라 장군이 부하들을 이끌고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그 때문에 묵특은 국경의 지방을 마음대로 침략하여 한나라를 괴롭혔다. 이에 유방은 할 수없이 방침을 바꾸어 회유책으로 나갔다. 그래서 유경의 제안대로 사자를 보내 황족의 딸을 공주라고 속여서 선우에 시집 보내면서 매년 일정량의 솜, 비단, 술 쌀, 양식을 헌납하기로 하고 형제국이 되는 조약을 맺어 화친을 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자 얼마 동안은 묵특도 한나라에 대해 침략 행위를 삼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한을 배반한 연왕 노관이 부하 수천 명을 이끌고 흉노에 투항, 상곡군 동쪽에 출몰하여 주민을 괴롭혔다. 세월이 흘러 유방이 죽고 혜제, 여후의 시대가 되자, 한나라는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는 듯 했으나, 흉노가 한나라를 멸시하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묵특으로부터 여후에게 한 통의 편지가 보내졌다. 그것은 희롱을 늘어놓은 편지였다. (사기 2권 '계포' 편 참조) '장맥분홍'이라는 말이 있다. 혈기가 터질 듯이 넘쳐 도저히 욕정을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자기도 홀아비이고 당신도 과부이니 우리 한번 어울려 정분을 풀어 보자는 노골적인 언사로 가득 찼던 것이다. 톡톡히 망신을 당한 여태후는 당장에 흉노 토벌군을 내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입을 모아 말렸다. "선제께서도 평성에서 고역을 치르셨습니다." 여후는 하는 수없이 출병을 중지하고 회유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싸울 것이냐, 화평할 것이냐
세월이 흘러 문제가 즉위하자 다시 흉노와 화친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문제 3년(기원전 177년) 5월에는 흉노의 유현왕이 오르도스에 침입하여 상군의 요새를 공격해 왔다. 그러면서 한나라에 귀속해서 변경 방위를 맡고 있던 하나라 소속의 오랑캐족을 살해하고, 나아가 부근의 주민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자 문제는 승상 관영에게 토벌을 명령했다. 이에 관영은 전차대와 기마대 8만 5천을 이끌고 우현왕을 공격하여 그 군대를 요새 밖으로 몰아 냈다. 그런데 문제가 태원에 행차한 틈에 제북왕 흥거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문제는 급히 서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관영의 흉노 토벌도 중지되었다. 그 다음해에 묵특 선우로부터 다음과 같은 서한이 한나라에 도착했다.
"천제가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 정중히 황제에게 문안하노니, 편안하신가. 일찍이 황제께서 나에게 화친을 요청했을 때 나는 그 취지를 양해하여 화친을 받아 들였소. 그럼에도 귀국의 국경 수비대가 우리 우현왕의 영지에 침범하고, 또한 우리 쪽의 현왕도 나에게 무엇 하나 상의함이 없이 귀국의 수비대와 일을 벌였소. 이들은 모두 양국 군주의 약속을 어기고 형제국의 우의를 저버리는 행위였소. 이 사건에 관해서 황제로부터 매번 책망의 편지를 받았으므로, 나는 사자를 통하여 회답을 보냈소. 그런데 나의 사자는 귀국에 간 채 돌아오지 않고, 또한 귀국에서도 그 후 한 사람의 사자도 오지 않았소. 그 이래 양국은 화친 관계를 끊은 채 오늘에 이르렀소. 원래 귀국의 수비대가 약조를 깨뜨렸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긴 하지만 나는 이번에 우현왕에게 벌로써 서방 월지 토벌을 명령했소. 우리 군대는 하늘의 가호와, 단련된 병정과 강건한 말로써 월지를 항복시키거나 혹은 참살로 토벌했고 아울러 그 인접 26개국을 평정하여 모조리 우리 흉노에 병합했소. 이로써 활을 무기로 삼는 모든 민족은 완전히 통합되어 북방은 평정된 것이오. 현재 나의 희망은 무기를 거두고, 병사와 말에 휴식을 주며, 이제까지의 원한은 씻어 버리고 화친 조약을 부활시키는 것이며, 이로써 옛날처럼 변경 백성을 안심시키고 어린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늙은 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천하를 이룩하여 이를 자손에게 물려주는 일이라오. 나는 이와 같은 희망에 대해서 황제의 동의를 얻고자 사신을 보내어 이 서한을 드림과 동시에 낙타 1두, 승마 2두, 마차 8두를 헌상하는 바이오. 만일 황제께서 우리 흉노가 한나라 국경에 근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명령을 내리시어 수비대나 주민을 국경에서 멀리 보내기 바라오. 또한 나의 사자가 무사히 도착했을 경우에는 6월중에 귀국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기 바라오."
서한을 보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화친이냐 싸움이냐를 놓고 그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중신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선우는 월지를 쳐부수고 지금 승운을 타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공격을 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설령 흉노의 영토를 빼앗았다 하여도 그 불모의 땅에 우리나라 백성을 이주시킬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 기회에 선우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게 최상의 방책인 듯합니다." 이렇게 하여 선우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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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1부 산소 - 너무 좋아하지 말라
프리라디칼을 만들 수 있는 금속들
TV나 라디오에 안테나가 없으면 화면이 잘 안 나오고 소리도 매끄럽지 않다. 기계가 씽씽 잘 돌아가다가도 나사나 부품이 하나만 빠지면 덜컹거린다. 인체내에서 필요한 물질을 만들 때에도 이런 중요한 부품 역할을 하는 물질이 있다. 바로 구리나 철같은 금속물질이다. 산소를 혈액 내에서 운반하고 근육이나 심장에 제대로 저장하려면 철이 필요하다. 해로운 물질을 해독할 때도 철이 있어야 그 처리가 원활해진다. 호르몬을 만들고 조직을 탄력있게 해 주는 콜라겐이라는 물질을 만들 때에는 구리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반응들이 일어날 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물질 중의 하나가 산소이다. 하지만 철이나 구리가 같이 있어야 빠르고 매끈하게 일이 마무리된다. 전문용어로는 이런 철이나 구리같은 물질을 촉매라고 한다. 만일 구리나 철이 없으면 그 반응이 매우 느리며 아예 반응이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 반면에 구리나 철이 있으면 그 반응이 매우 빠르게 일어난다.
왜 그럴까? 산소가 관여하는 곳에서는 활성산소가 만들어지므로 마치 산소가 매우 활발하고 불안정한 물질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활성산소가 불안정한 것이지 산소 자체는 안정된 물질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안정성이 있는 물질인 산소가 관여하는 화학반응들은 그 속도가 느리게 진행된다. 하지만 여기에 전자를 쉽게 추가하거나 잃어버리는 성질을 가진 불안정한 물질이 첨가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연히 빨리 안정되기 위해서 반응이 빨리 일어날 것이다. 철이나 구리가 바로 그런 물질이다. 산소만에 의한 느린 산화반응이 매우 빠르게 촉진되므로 이것을 철이나 구리에 의한 자동 산화반응이라고 부른다. 느린 반응이 빠르게 촉진된 것까지는 좋지만, 호사다마라고 해로운 프리라디칼 역시 빠른 속도로 생기는 것이 문제이다.
철이나 구리는 우리 몸에 필요한 물질을 만들 때 있어야 하는 금속 성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을 음식을 통해서 섭취해야 한다. 그런데 체내로 섭취된 후에 마구 몸 속을 돌아다니게 방치하면 안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프리라디칼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멋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장치를 가지고 있다. 축구경기를 할 때 보면 상대편 진영의 요주의 선수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마크맨이 있다. 철이나 구리도 이들을 붙잡고 따라 다니는 결합단백질이라는 마크맨의 감시를 받는다.
예를 들어보자. 철은 붉은 고기 안에 많이 들어 있다. 이 고기를 먹으면 철분이 소장으로 흡수되며 우리 몸에 해는 입히지 않으면서 필요로 하는 만큼만 흡수가 되어 피 속으로 들어간다. 남는 철분을 그대로 놔두면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있으므로 마크맨이 가서 달라붙어 운반을 하고 나중에 필요할 때 쓰기 위해 저장을 해 둔다. 마크맨은 여러 종류가 있으며 트랜스훼린, 락토훼린, 훼리틴, 헤모시데린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감시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음식을 제대로 못 먹어서 철분 섭취가 불충분하거나 위십이지궤양, 대장암, 생리 양이 많을 때, 치질 등이 있을 때에는 출혈이 되어 철분이 부족하게 되므로 이때는 붙잡고 있던 철분을 놓아 준다. 더 이상 풀어 줄 철분이 없는데도 계속 철분이 모자라게 되면 어지럼증이 오며 이를 빈혈이라고 한다. 이때는 피검사를 하여 철분이 정상보다 감소된 것을 확인 후 철분제를 투여하게 된다. 물론 어지럽다고 다 빈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환자들은 어지럼증이 있다고 그냥 약국에서 철분제를 사 먹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철분을 감시하는 마크맨들이 있지만 이들도 감시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한계 상태에서도 계속 철분이 공급되면 통제불능이 되어 프리라디칼을 마구 만들고 다니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반드시 병원에서 검사를 한 뒤 빈혈치료를 하도록 하라.
구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체 내에서 철분이 마크맨 역할을 하는 단백질에 딱 붙어서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구리도 그런 결합단백질의 감시를 받는다. 철이 지각층에 매우 많은 금속인데 비해 구리는 소량만 포함되어 있다. 인체 내에서도 철분에 비해 60분의 1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과산화수소와 반응하여 가장 해로운 프리라디칼인 히드록시라디칼을 만드는 속도는 철보다 더 빠르다. 음식물로부터 섭취한 구리가 위와 상부 소장에서 흡수된 다음부터는 마크맨이 따라다닌다. 제일 먼저 알부민이라는 단백질이 달라붙어서 구리를 간으로 운반한다. 간에서는 세룰로플라스민(혈액 속에 있는 구리단백질의 일종)이라는 단백질이 알부민에 붙은 구리를 떼어서 옮긴 후 피 속으로 안전하게 이동시킨다. 알부민은 단순한 마크맨의 역할 외에 다른 보호기능도 한다. 즉 구리가 관여하여 만들어진 프리라디칼의 공격을 자기 자신에게 향하도록 함으로써, 우리 몸 안의 여러 다른 중요한 생물학적 분자들을 보호하는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것이다. 필자는 노인의학을 전공한 의사이므로 아무래도 입원환자 중에는 노인환자가 많다. 그런데 같은 나이에, 같은 병을 가진 노인환자라해도 알부민 수치가 낮은 환자가 더 회복이 느리고 치료가 힘들다. 실제로도 많은 노인병 전문의들이 혈중 알부민 수치를 그 환자의 예후나 회복 정도를 예측하는 데 사용한다.
자, 이제 정리를 해 보자. 철이나 구리는 산소와 반응하여 우리 몸에 필요한 물질이 빨리 만들어지게 해 준다. 때로는 이것이 없으면 반응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전자를 주고 뺏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전자를 가진 물질을 뭐라고 부르는가? 바로 프리라디칼 아닌가? 결국 반응은 빨리 일어나지만 철이나 구리가 있는 곳에는 해로운 프리라디칼이 잘 생기는 것이다. 참으로 조물주가 창조한 우리 신체는 복잡하고 오묘하다. 필요하고 이로운 물질을 갖게 하면서도 반대로 너무 과하게 사용하거나 잘못 사용하면 해를 입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여기에 또 다시 덧붙여서 해로움을 덜 입도록 막아 주는 장치도 같이 주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할 몫은 이 안전장치가 잘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안전장치가 잘 돌아가도록 하는 왕도는 무엇일까? 이제 곧 설명드릴 항산화방어벽 구축이다. 똑같은 날에, 똑같은 가격의 전자제품을 사도 어떤 사람은 1년 안에 망가뜨려 고물로 만들지만, 어떤 이는 10년이 넘도록 사용한다. 비싼 돈 들여 산 물건의 기본구조와 사용법을 제대로 알고 지켰느냐의 차이이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다. 어떨 때 신체가 소리없이 해를 입는지를 모르는 사람, 또 안전장치에 위험 신호가 들어왔는데도 못 알아차리고 사는 사람은 일찍 몸이 덜거덕거리고 병이 나고 수명이 짧다. 안전 장치의 점검법을 제대로 알고 있지만 실천을 못하는 사람도 매 한가지이다.
활성산소가 우리 몸을 녹슬게 한다
인간과 포유동물들은 21%라는 대기 중의 산소량 환경에 맞게 적응하여 살아왔으므로 만일 이보다 산소가 더 많아지면 문제가 생긴다. 물론 산소가 적어져도 생명을 유지하기가 힘들게 된다. 산소가 증가할 때 피해가 온다는 것에 대한 임상 증거들은 아주 많다. 쥐에게 21%가 아닌 100%의 산소를 3일간만 주어도 경련마비 증상이 생기고 심한 폐손상이 유발된다. 햄스터나 기니아피그에게 70% 정도의 산소를 3, 4주 정도 마시게 하면 고환 손상이 오고 골수에서 적혈구를 생성하는 기능에 장애가 오기도 한다. 저산소증이 온미숙아에게는 21% 이상의 산소를 치료 목적으로 주게 되는데, 이때도 부작용으로 망막 손상이 생긴다. 성인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100% 산소를 6시간 정도 마시게 하면 역시 폐에 미세한 손상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21%의 산소환경에서도 프리라디칼이라는 해로운 물질이 부산물로 생긴다. 프리라디칼을 처리하는 장치가 원활한 사람은 해를 안 입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로 인한 해로움이 점점 쌓이게 된다. 결국 세포가 녹슬고 병들며 생명체가 노화되어 죽게 되는데, 이는 지금도 노화 원인에 관한 유력한 가설 중의 하나이다. 산소가 해로운 이유는 무엇인가에 관한 초기 연구 결과들은 산소의 직접적인 억제 작용 때문인 것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이런 직접적인 억제 작용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1954년에 미국의 Gerschmann과 Gilbert 박사가 산소의 해로움은 산소 농도가 아니라 활성산소 때문이라는 이론을 제기한 이래로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이 이론을 뒷받침해 주는 연구 결과들이 계속 발표되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활성산소를 무력화시키는 효소의 발견과 이에 근거한 활성산소 이론이다. 활성산소 이론은 지금까지 설명한대로 프리라디칼이 세포의 여러 기관에 손상을 주어 인체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물론 동물실험의 결과에 비하면 활성산소 이론을 지지해 주는 결과들이 인간에서는 아직 불충분한 점도 있다. 하지만 사람에서 이제까지 연구된 결과들을 보면 각종 질병과 노화에 프리라디칼이 관여한다는 증거들이 매우 많다. 또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것이 질병과 노화 예방면에서 인체에 매우 중요하다는 증거를 증명한 연구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이러한 증거들이 앞으로 더욱 확실히 규명이 되고, 동시에 지금의 것보다 더 강력하게 세포 내부에까지 흡수되어 오랫동안 작용을 하는 항산화 방어벽 구축법이 개발이 된다면 그때는 그야말로 21세기의 불로초가 될 것이다. 불로초라고하면 왠지 불가능한 것이며 황당한 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언젠가는 이것이 현실로 다가올지 모른다. 항산화제를 위시한 세포 수준의 이상을 찾아 처리하는 각종 질병 예방법과 유전자 치료, 손쉬운 인공 장기 이식법 등의 각종 질병 치료법까지도 개발될 것으로 믿는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150세 정도는 거뜬히 활력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장수의학을 가르치는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여러분들 시대에는 80세, 90세, 100세까지는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부르게 된다.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불리려면 120살은 넘어야 될 것이다. 만일 100살이 안되어 죽은 친구를 애도할 때는 '아까운 나이에 단명하였다'고 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 여러분들의 나이가 20대 초반이니 앞으로 남은 인생은 적어도 100년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발등에 떨어진 불 끄는 식으로 급하게 살지 말고 장기적인 인생계획을 짜두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이런 얘기가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지, 좀더 먼 미래에 실현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앞으로의 얘기이므로 독자 여러분들에게는 별 도움이 안될지 모르겠다. 그러니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많은 사람이 익히 알고 있고, 또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견해를 같이하는 인간의 한계수명은 120세 정도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밝혀진 과학적인 방법을 총동원하여 120세까지 질적으로, 또 양적으로 활력있고 건강하며 인간답게 살도록 많은 사람들을 교육하고 환자들에게 처방을 하는 것이 나같은 의사들의 임무이다. 내 몸 안에 생기는 프리라디칼을 처리해 주는 항산화건강법에 대한 이 책을 쓰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이제 다음 장부터는 최근 5년간 세계적인 의학잡지에 실린 프리라디칼과 항산화제에 관한 5,000여편의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나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먼저 2부에서는 프리라디칼이 우리 몸을 녹슬게 하여 어떠어떠한 질병의 발생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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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성균관 뜰에다 손수 은행나무를 심어 교훈을 남긴 윤탁
윤탁(1472-1534)의 본관은 파평이고, 편감 윤사은의 아들이다. 자는 언명, 호는 평와이다. 연산군 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주계군 이심원에게 글을 배웠는데 주계군은 종실의 자제로서 성리에 관한 학문을 앞장서서 제창한 분이다. 윤탁은 갑자사화 때에 귀양갔었는데 중종이 왕위에 올라 그를 방치된 가운데서 기용하여 대사성에 임명하였다. 당시 정암 조광조와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조정에 모여 도학을 제창하고 천명하면서 자신들이 강학하던 자리를 치워 버리고 모두 윤탁을 선생으로 추대하였다. 윤탁은 가르치기를 곡진하게 하고, 부지런한 것을 즐겁게 여겼다.
퇴계 이황이 매양 선생에게서 들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 내용을 열거하였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윤탁을 윤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바 '대학'의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는 학설도 송나라 주희가 연구하여 물려준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남곤, 심정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려고 도모할 적에 윤탁이 죄정을 의논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즉시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 일을 계기로 뭇 소인들이 윤탁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마침내는 파직되고 물리침을 당하였다. 지금 성균관 뜰에 그가 손수 심은 은행나무 몇 그루가 있다. 윤탁은 매양 학생들에게 말하였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마지막에 틀림없이 무성하게 된다" 때문에 그에게서 배운 이들은 모두 근본을 돈독하게 하고 실학을 힘쓰며 정정당당하여 그 스승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중종 29년 개성유수로 임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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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지몽
꿈 혹은 꿈같은 세상, 당의 덕종때 광릉이란 곳에 순우분이란 사내가 있었다. 집의 남쪽에 커다란 느티나무 고목이 있었는데 어느 날 취해서 그 나무 밑에서 자고 있노라니 보라색 옷을 입은 사내 둘이 나타났다.
"괴안국 임금님의 분부로 모시러 왔습니다."
분이 그들을 따라 느티나무의 구멍 속으로 들어갔더니 커다란 성문 앞에 이르렀다. 대괴안국이라고 황금으로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왕은 분을 보자 매우 기뻐하며 사위로 삼았다. 하루는 왕이 분에게
"남가군의 정치가 어지러우니 그곳의 태수가 돼 주겠나"
분은 친구인 주변과 전자화를 부하로 삼아 남가군으로 부임하였다. 그로부터 20년간 분은 두 친구의 도움으로 어진 정치를 펴니 왕은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단라국이 남가군을 침노하니 분은 주변을 장수로하여 방어케 했으나 변이 적을 넘본 탓으로 패배하였다. 적은 분양품을 가지고 물러갔으나 변은 이윽고 동창이 생겨 세상을 떠났다. 분의 아내도 병으로 숨졌다. 분은 태수를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오니 그의 명성은 대단하고 권세는 날로 불어나 왕도 내심 불안해졌다. 마침 그 무렵 서울을 옮겨야 할 이상한 징후가 있다고 상주문을 올린 자가 있어 항간에서는 그것이 분의 세력이 강해진 탓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왕은 그를 사저에다 연금했으나 그 억울함을 인정하고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깨닫고 보니, 분은 예전대로 느티나무 밑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상히 여겨 느티나무 뿌리를 살폈더니 그 구멍이 있어 구멍을 파본즉 침대 하나가 들어갈만한 공간에 개미떼가 무리져 있는 것이다. 그곳이 괴안국의 서울이요, 한 쌍의 큰 개미가 곧 국왕 내외였다. 남쪽 가지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개미떼가 있는 편편한 곳이 있는데 거기가 남가군이었다. 분은 예전대로 구멍를 메워 두었는데 그 날 밤에 큰 비가 와서 개미떼가 온데간데 없어졌다. 나라에 변고가 있어 천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나라 이 공좌의 '남가기'에 있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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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1. 보리수를 닮은 사람들
삭발
이 세상에서 태어났던 사람치고 머리를 깎지 않아본 사람은 없다. 부처님 집안에서는 대개 머리를 빡빡 깎는다. 그리고 염색된 옷을 입는다. 이를 일러 '삭발염의(削髮染衣)'라 한다. 율장에도 있다. 어떻게 보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출가 수행자의 모습이 꼭 머리가 짧아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생각을 비우고 세속적인 번뇌를 단절한다는 뜻에서 머리를 깎고,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는 것이다. 머리카락을 절집에서는 '무명초(無明草)'라 한다. 할 짓 못 할 짓 다하는 속세적인 삶에의 집착, 오욕의 표상이라 하여 무명풀이라는 거다. 무명초. 무명이다.
문제는 허공에 있지 않다. 땅에도 문제는 있다. 문제는 바로 나인 것이다. 승(僧)과 속(俗)이 따로 없다. 옷모양, 머리모양에 끄달리는 것은 무명이다. 그러나 머리를 깎고 안 깎음은 발심의 차이요, 인연의 차이다. 우리가 머리 깎음을 좋은 업을 닦기 위한 행이라 할 때, 옛 선지식들이 머리를 하루에 세 번 만졌다 하는 이야기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번뇌와 망상에 사로 잡히고 얽매인 이들이여, 소리와 형상에서 속박을 풀라. 자유를 알고 참 해방, 참 삶을 사는 길은 오로지 나를 알고 마음을 갈고 닦는 일이다. 머리 깎지 않은 자는 머리 깎은 이를 볼 것이요, 깎은 자는 깎지 않은 자를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보고 그냥 스쳐서도 안 될 것이다. 향 사르는 마음으로 합장을 해야 한다. 모든 장식의 마음을 버리고 한 걸음 나아갈 때 차별의 마음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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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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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5. 못다 핀 꽃 한 송이, 실학 (3 대 전쟁으로 드러난 성리학의 한계)
성리학 왕조의 붕괴와 실학
제2차 조만전쟁 이후 근조선은 사실상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근조선 앞에는 근본적 개혁을 통해 과거와 다른 새로운 통치체제를 세우느냐, 그렇지 않으면 변화를 주도하는 새로운 세력에 의해 국가가 무너지고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느냐 하는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어떤 운명을 따르더라도 이제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근조선에서는 이 두 가지 흐름이 모두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중간적인 입장도 있었으며, 이런 선택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과거 체제를 고수하려는 흐름도 없지 않았다. 과거 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성리학파는 이러한 모든 흐름을 경계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고, 개혁적인 성리학파는 성리학을 반성적으로 재검토하는 한편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는 정치경제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달리 일부 세력은 새로운 이념을 가지고 성리학적 국가체제를 부정하면서자신들이 근조선의 새로운 주도세력이 되려고 했다. 또 다른 세력은 성리학파의 통치뿐만 아니라 근조선의 이씨왕조 자체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제2차 조만전쟁 이후의 역사는 바로 이들이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서 만들어낸 복잡다단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뒷날의 학자들은 이들 가운데 두 번째 부류와 세 번째 부류를 통칭하여 '실학파'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정치적 용어를 빌려쓴다면, 실학파에는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가 뒤섞여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현실로부터 사회적 대안을 찾는 진실한 학문이라는 뜻을 가진 실학은 애초부터 두 세력을 혼돈시킬 수 있는 모호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실학적 경향'을 가진 인물들에 대한 개별적 연구는 상당히 진행된 편이다. 더구나 1980 년대 이후 역사연구의 주요한 관심이 사회경제 분야로 옮겨감에 따라 실학에 대한 연구는 사회경제적 조건과 실학자들의 사상을 연결시키는 방향으로 바뀌는 경향을 드러냈다. 그리고 차츰 실학연구에 대한 재검토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실학에 대한 연구에서 몇 가지 중대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문제점은 유럽의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역사연구의 관점을 우리 역사에 그대로 적용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실학이 '근대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것은 역사적 변화의 방향을 자신의 과거 역사 및 인간의 본성에서 찾아내지 못하고, 남의 역사와 비교나 하는 엉뚱한 일이다. 둘째 문제점은 실학이라는 개념을 근조선 후기의 사회적 변화에서만 찾아내려는 근시안적 관점이다. 그것은 소나무의 뿌리와 아무 관계없이 솔잎을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와 같다. 그 결과 실학은 근조선 이전의 고려 르네상스와 연결되지못했으며, 나아가 우리 역사 전체를 꿰뚫고 있는 역사의 방향성이나 굽이치는 정신세계와도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앞서 밝힌 대로 실학에는 원래 두 가지 흐름이 있었고, 연구자들도 이를 인정해왔다. 즉 중농파와 중상파로 나누기도 하고, 경세치용학파와 이용후생학파로 나누기도 하며, 성호학파와 북학파로 나누기도 한다. 중농파나 경세치용학파 및 성호학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재검토를 통해 변화된 현실을 이해하며, 나아가 그런 차원에서 사회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려 했던 사람들이다. 유형원이나 이익이 그런 부류의 대표적 인물인데, 그들은 토지제도의 개혁을 중심적인 과제로 설정했다.
중상파나 이용후생학파 및 북학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근조선이라는 틀을 개혁의 전제조건으로 삼으면서도 성리학을 거부하는 개혁가들이었다. 박제가나 박지원이 그런 부류의 인물인데, 그들은 토지제도보다 상공업의 발전을 개혁의 중심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마침내 이들 두 부류의 개혁파는 하나의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재검토는 성리학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차츰 새로운 사상적 발전으로 이어졌고, 현실개혁에 치중하는 사람들도 차츰 그것을 뒷받침할 사상에 대해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들에 의해 성리학파의 왕국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성리학파가 그 동안 눌러놓았던 고려 르네상스의 기운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실학 또는 후기 문화부흥의 좌절
흔히 근조선 후기는 사회변동기라고 평가된다. 신분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생산력이 높아지고, 사회문화가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서민문화가 활발하게 발전하는 시기였다는 말이다. 또 상공업이 발전하고 시장경제가 발전한 것도 바로 이 시기부터였다. 아울러 이런 변화는 '근대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씨앗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변화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복고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역사에서 완전한 의미의 복고란 없는 법이지만, 근조선 후기의 이런 변화는 성리학파에 의해 흔적까지 지워질 뻔했던 고려 르네상스 시기의 문화가 부활한 것이기도 했다. 다양해진 사회문화 가운데는 나라 밖에서 들어온 것들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그 동안 억눌려왔던 과거시대의 문화가 변질된 모습으로 되살아난 것이었으며, 이 시기에 발전한 서민문화의 본질도 정신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서민층에 의해 근조선 이전의 문화가 되살아난 것이었다. 이처럼 되살아난 전통문화는 근조선 후기의 사회변동을 추진한 문화적 원동력이었다. 이 문화는 차츰 성리학파에 의해 강요된 틀에 짜인 듯한 문화를 파괴했으며, 마침내 성리학 자체까지 삼켜버리기에 이르렀다.
실학파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바로 이런 복고경향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그들이 과거의 역사, 특히 근조선이 없애버린 대진의 역사나 그 이전 시대의 역사를 연구한 것도 그런 관심 때문이었다. 또 각 지방에 묻혀 있는 전통적인 풍습을 발굴하려고 했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그들은 그 시대와 그런 문화를 되살림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관심을 진정한 의미의 문화부흥으로 발전시킨 인물이 바로 실학의 집대성자로 알려진 정약용이다. 처음에 그는 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재검토로부터 시작했지만, 19 년간의 귀양살이를 통해 성리학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남과 아울러 전통사상과 불교, 나아가 천주교를 통해 전파된 유럽 문화까지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정약용은 그런 차원에서 다양하고 방대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뛰어난 문학가이자 상당한 수준의 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작품들에서까지 성리학적 발상을 벗어던지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어떤 시에서는 기마종족의 전통 수련법에 대한 탁월한 식견이나 불교사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방대한 작업조차 고려 르네상스를 완전히 계승,발전시킨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강진 땅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그가 만날 수 있는 인물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구할 수 있는 자료도 한정되어 있었으며, 고려 르네상스를 그 한 사람이 완전히 부활시킨다는 것도 애당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독특한 글씨체로 유명한 김정희와 같은 사람도 문화부흥의 대열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부흥 활동은 아직 힘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성리학파의 눈치를 보아야 했으며, 성리학파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작업이 높은 봉우리에 올라 마침내 창조적인 사회적 대안으로 굳건하게 자리잡기 이전에 유럽의 문물이 먼저 한반도를 강타했고, 그 문물에 의해 이들의 업적은 다시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져야만 했으며, 마침내 우리 역사는 자기 문화 속에서 주체적 발전의 기회를 또다시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19세기의 비극이었고, 겨레 역사가 다시 한 번 움츠러든 결정적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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