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5장 문화, 환경, 종교
문화는 고유한 것인가 - 이봉재
문화는 삶의 양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시대, 지역, 집단마다 고유성을 가진다. 그 고유함이란 문화의 생명인가? 세계가 하나로 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문화의 고유함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최근의 몇 가지 뉴스들
1. 얼마 전에 타결된 우루과이 라운드의 최종 협상에서 프랑스는 영화에 관한 한 무제약적인 자유 무역의 정신을 적용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이때 프랑스가 내세운 논리는 영화는 상품이 아니라 문화라는 것이었다. 2. 공로명 주일 대사는 일본 문화의 수입 개방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많은 지식인들은 일본 문화가 한국인들에게 주는 독특한 매력과 저질성-폭력성과 선정성 등-을 들어 시기상조라고 반대하였다. 3. 싱가포르에서 경범죄로 입건된 미국 청년을 태형(매맞을 태, 형벌 형)으로 다스리겠다고 결정했고 실제로 집행하였다. 훈련된 무술 전문가가 매질을 하는데, 우리 국민 학교 시절에 있곤 했던 매질과는 달라서 매 자국이 엉덩이에 평생 남는 정도의 것이라고 한다. 미국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번 태형이 대단히 비인도적이며, 죄지은 청년이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정한 것이 아니라고 항의했다.
나라간의 관계에서는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위에 든 몇 가지 사건도 그런 것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문제들이 공히 문화적 차이를 주제로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먹고 사는 문제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일견 사소해 보이는 문화적 차이가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피자 가게가 잘 되면 그것이 우리 고유의 식생활을 해친다 하고, 여학생들이 일본풍의 옷을 입고 화장을 한다고 해서 왜식 문화를 걱정하고, 비디오 가게에서 외국 비디오를 손쉽게 빌려 봄으로써 외국 문물이 여과 없이 청소년들에게 유입된다고 우려하는 등 고유 문화의 변질에 대한 우리의 염려는 대단하다. 드디어는 신토불이. 이제 단순히 외국 문화의 과도한 유입을 걱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것, 우리 문화 아니면 몸을 망친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이른바 문화의 문제는 우리 시대의 일상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문화가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우리는 우리 문화와 더불어서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가? 세상은 자꾸 좁아져 외국이 어느 이웃 마을처럼 여겨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 세계 속에서 우리 문화의 전통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번에는 이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어 보려 한다. 과연 문화는 독자적 고유함을 생명으로 하는가? 그리고 그 고유함이란 우리의 삶에서 절대 중요한 것인가? 세계가 하나의 생활권이 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문화의 고유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보편주의의 득세
원래 문화란 지적, 정신적 차원의 행위나 산물을 지칭하는 한정된 의미를 갖는 말이었다. 종교, 과학, 예술, 국정 운영의 기술과 같은 상당히 수준 높은 행위 영역에 적용되었던 말인데, 오늘날 그 의미는 대폭 확장되었다. 20세기 문화 인류학의 대두와 함께 문화란 어떤 시대, 어떤 지역의 인간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변경되었는데, 그리하여 농경 방식, 사냥, 도구 제작, 의복 제조, 성 관습 등의 모든 것이 문화의 내용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는 하나의 인간(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차적인 정신적 행위만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의 모든 행위로부터 드러나는 특성들도 필요하다는 깨달음에서일 텐데, 그리하여 오늘날 문화란 삶의 양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삶의 방식이라는 의미에서 문화가 각 시대 각 지역의 사람들마다 다르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접하는 자연 환경, 그들이 전수 받은 전통적 지식, 인구 등의 조건들이 모두 다르고, 따라서 그들이 꾸려 가는 사람의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쌀밥을 먹는 대신 미국 사람들은 빵을 먹고, 미국 사람들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곤 하는데 우리는 아무래도 그러지 못하고, 우리는 아프면 한의사에게도 가는데 미국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 등의 차이가 모두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떤 시대에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수백 년 전의 어떤 세계를 상상해 보자. 교통 수단이나 정보 전달 수단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을 때에는 서로간의 문화적 차이가 문젯거리가 될 수 없었을 테며, 따라서 그런 시대의 이방인은 사람이 아닌 괴물로까지 여겨졌을 것이다. 조선조 말에 외국 선교사들을 보고 우리 선조들이 놀랐던 것이 그런 경우다. 오늘날 문화적 차이가 참으로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는 것은 현대 사회가 봉착하고 있는 국제화의 추세 때문이다. 즉, IBM이나 GM과 같은 다국적 기업에 의해 세계 공통의 상품, 광고, 경영 기법이 대두하고, 대중 매체의 급속한 발달로 인하여 세계의 모습과 소식들, 삶의 방식들이 간단하게 전달되며, 또한 UN과 같은 국제적 정치 기구와 EU(유럽 연합), NAFTA(북미 자유 무역 협정)등의 초국가적인 경제 단위들이 출현함으로써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이 모든 것을 시장의 논리, 상품의 논리로 환원시켜 버리는 자본주의의 국적 초월적인 탐욕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현대의 과학 기술, 경제, 사회 조직이 요구하는 국제화의 경향과 문화적 개성, 고유성의 개념이 상충하는 것이 문제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상충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문화의 고유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요즈음에는 문화의 고유성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사실 삶의 양식이라고 이해되는 문화를 무조건 바람직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예컨대 배타적이고 내향적인 야만인들의 미신이나 맹목적인 충성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문화적 차이란 잔인함과 폭력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되기 십상이다. 멀리는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부터 인민 사원이니 오대양이니 하는 사교 집단의 집단 자살극,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유고의 참혹한 내전 등이 모두 나름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으로부터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는 것이 그 예다. 또한 도대체 자기 나름의 삶의 방식에 대한 완강한 고집이 어떻게 이성과 계몽의 정신과 공존할 수 있으며, 만인에게 혜택을 주는 국제 무역과 국제적 분업의 이득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무역은 국경을 넘어 흐르고, 지성의 세계도 국경을 무시한다. 학식과 부와 산업의 진보는 문화적 차이를 만들어 냈던 편견, 미신, 광기 등을 점차 쇠락하게 하지 않았던가?
보편주의자들의 생각에는 인간성에 대한 중요한 통찰 또한 들어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차이점도 많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근본 요소는 아무래도 인간들간의 공통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적 추론 능력, 불의의 고통에 대하여 분연히 일어서는 용기, 정당한 근거 없는 불평등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 등, 이런 것들이야말로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문화적 내용이며, 그것이 인간 사회의 위대한 역사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문화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아무래도 몽매주의, 야만주의, 비인간주의와 한 편인 듯하다는 것이 보편주의자들의 생각이다.
문화의 고유성이 갖는 가치
이렇듯 문화란 본질적으로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근대이래 대부분의 사회 사상가들은 문화에 대한 보편주의적 관점을 사상의 축으로 삼는다. 계몽주의가 그러하며 자유주의, 사회주의가 모두 그러하다. 그것들 모두가 문화적 차이와 무관하게 인간 사회라면 마땅히 적용 가능한 그런 사회 조직 원리와 규범을 제시하려 한다. 문화적 특수성은 일상의 떨칠 수 없는 습관 같은 것이리라. 훼손되면 생활에 상당한 불편을 주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건전한 삶의 내용이 손상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일 것이다. 인간이 공통의 보편 문화, 보편 언어로 무장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은 바벨탑의 이야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이성과 윤리를 보편의 원리라고 한다면, 문화는 분명 개별성의 원리, 특수의 원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의 고유성에 대한 강조가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이익을 훼손하는 역효과도 없지 않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문화적 개성을 전혀 무시할 수 있는지는 단정할 수 없는 문제다. 이 점과 관련하여 보편주의의 인간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과연 물질적 향락 아니면 고귀하고 이성적인 행동으로부터만 만족을 얻는 존재인가? 우리의 일상적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익숙한 자연 환경, 공통의 규범과 취향으로 묶인 가족과 친구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오던 흐뭇한 이야기들, 이런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로부터의 편안함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역사적 존재라는 말이다. 우리들은 나름대로 역사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존재이며, 그 역사란 우리가 살기 위해 호흡하는 또 다른 의미의 공기 같은 것이다. 이런 역사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편주의자들의 인간 이해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유치함, 단순화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고, 따라서 역사적 환경이라는 의미에서 문화란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무대 배경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편 현실의 역학상 보편이란 결코 무색 투명한 최적의 보편이 될 수 없다는 측면도 있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국가들이 병립하여 경쟁하고 또한 그들 국가간에는 국제 경쟁력에서의 우열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현실상, 보편은 항상 누구의 보편이고 보편은 항상 누구의 이익과 더불어 횡행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즘 말 많은 환경 보호는 분명 우리 시대의 보편적 가치이지만, 환경 보호라는 깃발 아래 저개발 국가의 빈곤한 대중의 생존권은 얼마나 무시되는가? 환경 보호를 위해 석탄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나무를 함부로 베어 내서도 안 된다는 요구가, 가난한 국가의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더 가난하게 만들 것인가?
또한 환경 관련 기술이 공유되고 있지 않은 현실에서 환경 보호의 슬로건은 특정 국가와 그 산하 기업들의 판촉 전략과 구별될 수 있는가? 예컨대 오존층을 파괴하는 CFC(프레온 가스)를 사용 금지할 경우 그 대체 물질은 대단히 비싼 비용으로 선진국의 화학 회사에서 구입할 수밖에 없다는 이중적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환경 보호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이 글을 읽어서는 안 된다. 환경 보호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 중요한 보편적 가치가 대부분의 경우 특수한 이익 창출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보편적 가치는 그와 관련되어 있는 특수한 현실적 이익과 단절될 때에만 보편으로서의 가치를 갖게 되는데, 어떤 현실이 그 단절을 가능하게 하겠는가?
문화 사대주의의 문화
문화의 개성과 차이를 강조하는 주장들을 철학에서 문화 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 상대주의에 따르면 모든 문화는 나름으로 미적, 윤리적, 인식적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상호간에 우열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여러 문화를 평가하는 보편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20세기 초 문화 인류학이 대두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문화 상대주의는 내용상 계몽주의 시대 이래의 보편주의적 인간관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인간이란 나름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형성되는 존재라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다. 문화 상대주의가 이른바 문화 제국주의의 위험을 제어할 수 있는 이론임에는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모든 문화가 나름대로 고유의 가치 기준을 가진다고 한다면, 문화들간의 관계는 힘의 관계로 변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어떤 공통의 합리적 평가 기준에 합의하지 않을 경우 개개 문화의 운명은 어떤 문화의 물리적 힘이 더욱 강한가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귀결을 갖게 된다. 많은 철학자들이 문화 상대주의를 현대의 비합리주의적 성향의 한 가지 표현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문화의 고유성은 그것이 고유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옹호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지적한 대로 엄청난 비합리주의, 폭력, 잔인함의 온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개 문화의 고유성은 무조건 보호될 것만은 아니라는 앞서의 보편주의자들의 우려는 전적으로 수긍할 만하다. 그것은 문화적 개성의 존재론적, 정치적 가치를 인정했을 때에도 결코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명과 문화
오늘날 우리에게 문화란 자신의 정체와 소속을 확인하는 일차적인 기준이다. 히피 문화, 흑인 문화, 동양 문화, 한국 문화, 일본 문화 등 다양하게 사용되는 문화라는 낱말의 쓰임새를 보면 문화란 결국 하나의 집단을 다른 집단과 구별하는 방식의 총칭으로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이러한 개성, 차별화의, 원리로서의 문화는 상당히 위험스러운 것이기는 하나 결코 삭제될 수 없는 행복의 요소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문화적 고유함의 편협함이라는 점과 보편주의적 합리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되어 버린 국제화란 곧 보편주의적 합리성을 조장하는 것인데, 과연 그 속에서 문화적 개성을 어떻게 자리매김해 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독자 나름으로 판단이 있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이러하다. 먼저 문명과 문화를 개념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이것은 문명이고 저것은 문화라고 엄밀히 구분하기는 어렵겠지만, 일단 사람살이의 방식을 문화라 하고, 사람살이가 기반하는 물질적, 정신적 조건들, 즉 과학 기술, 종교, 예술, 도덕 등의 제반 성취를 문명이라 하자. 그럴 경우 우리에게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대부분 문명적 요소들이다. 예컨대 우리 시대의 보편이란 서구 물질 문명의 그것 아니면 자본주의 문명의 그것이 아닌가? 문화를 동일한 문명의 지반 위에서 구별될 수 있는 사람살이의 방법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국제화라는 이름 아래 팽창하는 보편의 흐름 속에 문화라는 특수를 위치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아직까지 이 글에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문화와 관련하여 절대 명심해야 할 한 가지 요소는 문화의 역동성, 변화 가능성이다. 문화란 원래부터 도구나 그림, 건축물 등의 정적인 사물보다는 사람살이의 제반 행동거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종교적 의식에서부터 성애의 행위, 사냥 등의 다양한 행동들이 갖는 활력과 변화 가능성 속에 문화의 진정한 모습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의 제언은 다음과 같다. 문명이라는 물질적 토대 위에서 우리의 살림 방식을 개선해 나가는 것, 또는 우리의 살림 방식을 통해 문명의 방향을 변경시키려 하는 것 모두가 문화의 이름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살림살이를 무조건 고수하는 것은 문명이라는 보편의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며, 반면 국제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경시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행복을 저해하는 일인 동시에 우리 문명 자체의 변화 가능성 또한 감소시키는 것이 된다. 1990년대 들어 우리 나라는 국제 경쟁력을 일종의 국시로 삼고 있다. 국제 경쟁력은 기업을 평가하는 동시에 대학을 평가하며 한 사람의 행위를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20세기 말의 문명의 흐름, 급속한 세계화라는 환경 때문일 텐데, 이에 우리의 논의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가치를 다시금 확인하고 보존해야 할 시점임을 말해 준다. 지난 100년의 우리 역사가 수동적, 타율적 외세 추종의 굴욕을 맛보았던 것은 주변 환경의 변화에 대해 주체적으로 대응할 문화 전통이 망실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것이 반복될 수는 없다.
참고 문헌 J.스토리, '문화 연구와 문화 이론', 현실문화연구 R.윌리엄스, '문화와 사회', 이화여대 출판부 C.A.반 파슨,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의 문화', 서광사 M.해리스, '문화의 수수께끼', 한길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삶과 철학', 동녘,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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