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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05 호
단기 4340. 12. 15 (음력 11. 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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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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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심사방법 및 대우
가. 원고 마감 후 심사 발표합니다 나. 심사 위원은 문단의 권위 있는 인사로 위촉합니다 다. 당선 작가는 1회의 당선으로 기성 문인으로 대우받으며, 당선과 동시에 서정문학 작가회의에 가입할수 있습니다. 라. 당선 작품은 신인작가상을 수여하며, 본지에 발표합니다 마. 본지를 통한 작품발표와 작품집 발간을 적극 지원합니다
3. 기타
가. 응모 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나. 당선 작품의 판권은 1년 동안 서정문학 에 귀속됩니다 다. 응모 원고에는 ‘신인 작품’ 임을 명기하고 본명,주소, 나이, 전화번호, 간단한 약력 을 꼭 기재할것 라. 방법 : sjmh1@hanmail.net 에서 원고 접수 합니다. 마, 접수 : 2007년 11월 13일~2008년 1월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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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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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은 수만 번의 실패를 감싸준다. / 조지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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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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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나는 세상의 아들
하늘은 아버지며 땅은 어머니라고 한다. 나는 매우 작은 존재로서, 자연히 그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지 사이에 들어찬 것은 나의 몸이며, 천지를 이끄는 원리는 나의 본성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의 동포이며, 모든 사물이 나와 같은 친구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는 것은 그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는 근본이며, 외롭고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 어린이를 어린이로 보살피는 근본이다. 성인이란 그 덕이 천지와 더불어 합치되는 사람이며, 현인이란 무엇이든 빼어난 사람이다. 이 세상의 늙고 허약한 사람이라든가, 병들어 고통을 받는 사람이라든가, 형제가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홀아비나 과부와 같이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은 모두 다 나의 형제가 심히 곤란한 처지를 당하고서도 호소할 데가 없는 경우와 같다.
하늘의 뜻을 보존하는 것이 내가 세상의 아들로서 천지를 공경하는 것이며, 늘 즐거워하고 근심하지 않는 것이 효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천명을 어기는 것을 패덕이라 하고, 어진 일을 해치는 것을 도둑이라 한다. 악한 일을 더하는 자는 못난 놈이고, 하늘로부터 받은 천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부모를 닮는 경우가 많다. 천지의 조화를 알면 그 부모의 사업을 잘 이어가며, 그 조화 속의 오묘함을 다 알면 그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방구석에서도 부끄럽지 않는 일이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며, 마음을 보존하고 착한 본성을 기르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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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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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4장 윤리학
낙태, 무엇이 문제인가 - 김정희
그 동안의 낙태 찬반 논쟁은 주로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선택권 사이의 논쟁으로 이루어져 왔다. 최근에는 낙태를 유발하는 원인과 구조에 대한 검토나 숙고 없는 논쟁은 탁상 공론이 되기 쉽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들어가는 말
낙태는 인위적으로 모체로부터 태아를 떼어 내어 임신을 중단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낙태를 임진 중절 혹은 인공 유산이라 하기도 한다. 이러한 낙태 문제는 생명, 의료 윤리에 속한다. 생명, 의료 윤리란 인간의 생명 현상과 관련된 실험이나 의료 행위를 함에 있어서 반듯이 지켜야 할 윤리를 말한다. 예컨대, 의사는 죽음을 선고받은 환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하는가, 과학 기술과 의학의 발달을 위해 생체 실험은 윤리적으로 허용되어야 하는가, 시험관 아기는 용납될 수 있는가 등, 생명,의료 윤리는 현대의 의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제기될 수 있는 모든 윤리적 문제를 망라하고 있다. 그 가운데 우리가 논의할 낙태, 즉 임신 중절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낙태 문제에 대해서는 서구에서 매우 격렬할 논쟁을 벌였고 지금도 한창 논쟁 중이다. 낙태에 관한 견해는, 태아란 맹장과 간은 것이어서 태어나기 전이면 언제라도 제거될 수 있다는 하나의 극단론으로부터, 태아는 모체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경우에도 보호되어야 한다는 또 다른 극단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서구의 기독교 문화권에서 카톨릭과 개신교의 전통 남성 신학자들은 주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절대권'이라는 이름으로 낙태를 반대해 왔다. 한편 여성의 경우, 새로운 생명을 책임 있게 키울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 낙태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낙태와 관련된 여러 사안들을 신중하게 생각해 볼 여유 없이 경제 개발 계획과 결부된 가족 계획의 일환으로 낙태를 산아 제한의 한 방법으로 묵인해 오다가, 최근 형법 개정안 135조에서 다음 네 경우의 낙태를 법칙으로 허용하고 있다
(1) 임신의 지속이 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2) 태아가 유전적 소질 또는 출생 전의 해로운 영향으로 인하여 건강 상태에 중대한 소산을 입거나 입을 가능성이 뚜렷한 경우, (3) 강간 내지 준강간 미수 내지 간음이나 추행에 의하여 14세 미만자가 임신한 경우, (4) 법률상 추행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한 경우.
그러나 현실적으로 낙태는 이러한 네 경우에 국한하여 일어난다기보다는 한국의 부계 혈통 사상과 관련해 여아 낙태가 1년에 3만 건이나 이루어지는 등 파행적으로 많이 시술되고 있는 측면도 있다. 한편 낙태 관련 개정안을 두고 카톨릭과 개신교의 일부 단체들은 낙태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고, 반면에 여성계에서는 이를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낙태는 여성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낙태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가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 낙태에 관한 몇 가지 논쟁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것이므로 절대로 낙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 견해는 주로 기독교의 전통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지지 받는다. 특히 카톨릭은 임신 순간부터 임신 중절을 죄악시한 1869년 비오 6세의 선언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카톨릭의 견해에 따르면, 인산과 분만 사이에는 어떤 의미 있는 구분이 없으며, 그 전체 발육 과정에 있는 태아는 성인과 동등한 생명의 권리를 가진다. 태생학에 의하면 태아는 수태의 순간부터 독특한 유전 인자들을 가진 생명이며 따라서 인격을 갖춘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을 낙태 반대의 근거로 삼는다. 수태와 동시에 영혼이 부여된다는 종교적 교리뿐만 아니라, 수태와 동시에 인간의 유전 인자가 형성된다는 현대의 유전학파의 학설도 카톨릭의 견해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된다. 이러한 카톨릭의 견해에 따르면 임신 중절이란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죄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든지 생명체의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되며, 자신을 위해서 태아의 생명권을 짓밟는 여성은 이기적인 존재들이다. 다만 이 입장에서도 임신의 지속이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칠 경우에는 낙태를 허용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 경우에는 지정된 의사가 시술하되 시술 병원 이외의 종합 병원의 진단서가 첨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태아와 신생아 사이에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구분 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면 그 기준에 따라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 낙태를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신생아와 태아 사이에 의미있는 구분을 시도하려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구분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구분 기준이 되는 시기 이전에는 임신 중절이 도덕적으로 가능하지만 그 이후에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태아와 신생아 사이에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구분 기준으로는 대체로 출생, 체외 생존 능력, 태동 등이 있다.
1. 출생 태아의 발육 과정에서 임신 중절이 허용되는 구분 기준으로 가장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시기는 분만의 시기, 즉 출생의 시기이다. 왜냐하면 갓 태어난 신생아는 태아와 달리 감각적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생아가 출생 이전의 태아보다 두드러지게 더 인간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 구분 기준은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가령 조산아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명백하다. 발육 과정의 측면에서 조산아는 정상적인 임신 말기에 있는 태아보다 덜 발달되어 있다. 그런데 출생을 구분 기준으로 삼을 때, 조산아를 죽이는 것은 유아 살해에 해당되고, 그보다 더 발달된 임신 말기의 태아를 낙태하는 것은 허용되는 기이한 결과를 가져온다.
2. 체외 생존 능력 태아의 체외 생존 능력을 구분 기준으로 선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궁 바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태아의 생존 능력이 인간 생명체로서 정당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시기이다. 체외 생존 가능성을 지닌 태아는 출생 후의 아이와 대등한 생존 능력을 갖고 있으며, 다른 점이 있다면 자궁 속에 있는가 자궁 밖에 있는가라는 장소의 차이뿐이다. 그러나 태아가 산모의 몸 바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점이 의료 기술의 수준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이 구분 기준도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의료 기술의 수준이 상당한 정도로 발달하게 된다면, 태아는 수태된 직후라도 산모의 몸 바깥에서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3. 태동 태동을 낙태 허용의 기준으로 제시할 수 있다. 태동은 태아의 신체적 움직임이 감지되는 때인데 대체로 임신 3개월 정도에 해당한다. 그러나 태아의 신체적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는 태동 이전에도 실제로 태아는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태동을 구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태아의 신체적 발육 과정의 연속성을 고려할 때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임신 중절의 허용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태아의 발육 과정의 특정 시점이 태의 생명체를 죽게 하거나 혹은 살게 하는 것은 도덕적 위력을 발휘한다고 보기 어렵다. 다시 말해서 윤리적 기준을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생물학적 기준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 찬성론자들은 태아를 성인과 동등한 인간 존재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강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에 반해서 좀더 현실적인 입장에서 낙태를 찬성할 수 있다. 이 견해는 주로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이제부터 이러한 여성주의자들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낙태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낙태 여부의 결정권은 우선적으로 여성에게 있다. 주로 여성주의자들(feminists)이 제시하는 견해이다.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판단은 여성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주의자들에 의하면, 그 동안 여성들은 다른 사회적 일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몸에 대한 일에서조차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낙태 문제에서까지 여성에게 선택권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것은 여성을 도덕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강한 성차별적 태도라고 본다. 물론 여성주의자들이 낙태를 물 한 컵 마시는 것처럼 간단한 일로 치부하는 생명 경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이 원하지 않거나 태어날 아이의 복지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서 낙태를 결정하는 것은 도덕적 딜레머 속에서 윤리적으로 덜 나쁜 선택을 하는 것일 뿐임을 분명히 한다. 즉, 책임지지 못할 생명을 낳는 것보다는 낳지 않는 것이, 그리고 아직 인간은 아닌 가능태로서의 태아보다는 자신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덜 나쁜 결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원하지 않은 임신이나 책임질 수 없는 임신은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렇지 못하게 되는 여러 현실적 조건이 존재하는 한 차선책으로 선택권은 여성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낙태를 유발하는 원인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낙태는 덜 나쁜 윤리적 결단으로 여성에게 허용되어야 한다는 여성주의자들은, 낙태를 유발하는 상황에 대한 논의가 낙태 행위 자체의 윤리성 여부를 질문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낙태 행위 자체보다는 낙태를 유발시키는 구조적 조건들이 우선 비판의 표적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1. 미혼 여성의 낙태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혼전 성 규범과 혼전 성 관계는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많은 미혼 남녀는 사랑한다면 혼인을 전제하지 않고도 성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남성의 80퍼센트 이상, 여성의 40~50퍼센트 가량이 혼전 성 관계를 경험한다. 이러한 변화의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 문화 변화의 추세를 여성에게만 순결을 요구하고 남자는 성 경험이 많을수록 남자답다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성 규범과 성 문화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을 것이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젊은이들이 성 개방을 무책임이나 문란, 상처 등으로 경험하지 않고 성숙하게 경험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젊은이들 당사자들과 기성 세대가 진지하게 숙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각적으로 접근하여야 하겠지만, 중요한 대안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책임자는 성 관계는 당사자들의 피임을 동반하여야 한다'라는 의식과 태도이다. 이러한 의식과 태도는 저절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성 교육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데, 문제는 입시 위주의 교육 속에서 제대로 된 성 교육이 비중 있게 행해지지 못한 채 청소년들의 성이 개방되고 있다는 데 있다. 피임의 필요를 자각하지도, 따라서 당연히 준비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성 개방의 물결 속에서 오늘날 10대 미혼모 문제가 발생한다. 여성주의자들은 성 차별적 규범에 불과한 여성에게만 순결을 강조하는 식의 명목상의 성 교육이 아니라 청소년의 성 관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실질적인 생활 교육으로서의 성 교육만이 이러한 미혼모 임신과 미혼모 낙태를 방지할 수 있다고 본다.
2. 성 폭행으로 인한 낙태 성 폭행 후 48시간 내에 자궁 세척을 할 경우 임신의 가능성을 제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 폭력으로 경황이 없거나 성 폭행의 빌미를 여자 쪽에서 제공했다고 보는 고정 관념과 성 폭행을 당한 여성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존재하는 문화 속에서 피해 여성이 임신의 가능성을 고려하여 48시간 내에 자궁 세척을 할만큼 철저한 의식을 갖기란 쉽지 않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낙태를 하려던 아이를 낙태하지 못하고 출산하였을 경우 여성은 아이에게 분노감을 갖는다고 한다. 성 폭행으로 인한 임신과 출산의 경우 이 분노는 아마 극에 달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여성주의자들은 물론 심리학자나 정신 의학자들도 이런 경우 피해 여성이 임신을 했다면 낙태를 당연히 허용해야 한다고 본다.
3. 기형아 낙태 태아가 심각한 장애 또는 기형임을 임신 중에 알았다면 산모는 낙태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 또한 여성주의자들과 의료계 종사자들의 견해이다. 장애 또는 기형의 태아를 임신했을 경우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이 낙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임산부 검진이 의료 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한 여성들이 임신 중 정기 검진을 받지 못하는 것은 현행 의료 보험 제도의 문제점이다. 산전 정기 검진으로 기형아 여부를 감별하지 못하여 출산한 심각한 장애아나 기형아를 적지 않은 부모가 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현행 의료 보험 제도를 개선하여 임산부의 산전 검진을 일반화하여 심한 장애 태아의 경우 낙태할 수 있는 기회를 산모에게 주고, 이런 경우의 낙태는 의료 보험의 혜택까지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이다.
4. 피임 실패로 인한 낙태 현재까지 개발된 모든 피임법은 100퍼센트 완전하지 않다. 따라서 철저한 피임을 했을 경우라도 임신을 할 수 있다. 카톨릭에서는 주기법을 이용한 자연 피임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여성의 생리 주기는 규칙적인 여성의 경우도 몸과 심리 상태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주기법도 완전한 피임법은 못 된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에서 많은 경우의 피임 실패는 남성들의 협조와 책임 의식 부재에도 기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할 경우 낙태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이다.
5. 여자 태아의 낙태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낙태 문제는 남아 선호로 인한 여아 낙태일 것이다. '한국 인구 보건 연구원'에 따르면 연간 여자 태아의 낙태는 3만 건이나 이루어져 출생아의 심각한 성비 불균형을 유발하고 있다. 이러한 여자 태아의 낙태 원인은 한국 사회의 부계 혈통(대물림) 위주의 사고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 차별이기 때문에 양성 평등적인 사회로의 변화 없이는 이러한 여자 태아의 낙태는 해결될 수 없다. 즉, 여성 자신들의 각성을 요구하지만, 여성이 남편이나 시댁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가부장제 구조가 변화하지 않는 한 여아 낙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래서 여성주의자들은 카톨릭에서 여성에게 신부나 교황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주지 않는 성 차별 조직을 갖고 있으면서 낙태를 반대하는 것은 위선적이라고 본다.
맺는 말 이제까지 낙태에 대한 논의는 낙태를 유발하는 원인, 구조에 대한 검토나 숙고 없이 '태아의 생명권'이냐 '여성의 선택권'이냐 하는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져 왔다. 낙태를 유발시키는 구조가 건재하는 한 이러한 추상적인 논의는 탁상 공론이 되기 쉽다. 더욱이 출산의 영향을 그 누구보다도 크게 받는 여성의 입장에서 이러한 추상적인 논의는 성 차별적 결과를 낳게 되기도 한다. 임신, 출산과 관련해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원하지 않는 임신은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건강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낙태에 대한 논의는 추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낙태를 발생시키는 조건에 대한 사려 깊은 검토와 이를 통해 제시되는 대안을 실행하는 가운데서만 해결될 수 있다. 낙태는 행위의 윤리성 여부를 묻기보다는 낙태를 유발하는 상황의 윤리성에 대한 질문으로 옮아가야 한다.
참고 문헌 한국 성폭력 상담소, '일그러진 성 문화, 새로 보는 성', 동아일보 출판부, 1993. 또 하나의 문화, '새로 보는 성 이야기', 도서출판 또 하나의 문화, 1991. P.애보트, C.왈라스, 박민자 옮김, '여성 사회학', 경문사, 1991. R.M.텅, 이소영 옮김, '페미니즘 사상', 한신문화사, 1995. P.싱어, 황경식 옮김, '실천 윤리학', 철학과 현실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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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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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장
본뜻 : 고대 인도의 신화에 등장하는 아수라 왕은 호전적인 성품 때문에 툭하면 싸움을 벌였다. 그래서 아수라 왕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싸움이 끊이질 않았으며,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아수라 왕의 호적수는 언제나 하늘을 다스리는 신인 제석천이었다. 하늘의 신인 제석천은 항상 전쟁터에 나가는 여러 신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 평정을 유지하라 그리하면 싸움터가 아수라의 장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바뀐 뜻 : 끊임없이 분단과 싸움이 일어나 난장판이 된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줄여서 '수라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보기글" -94년 봄 조계종 총무원장 사건 때 보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더구만 -재개발 지역에서 세입자들과 철거반원들이 시비 끝에 엉겨 붙어 싸우는데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더라구
야단법석
본뜻 : 야단법석은 그 표기와 뜻이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으므로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야단법석이라고 쓸 때의 야단은 야기요단의 준말이다. 야기요단은 곧 '요단을 일으킨다'는 말인데 줄여서 '야료'라고 한다. 흔히 생트집을 잡고 괜한 시비를 거는 사람을 가리켜 '야료를 부린다'고 하는데 거기에 쓰이는 야료가 바로 야기요단의 준말이다. 그러나 불법에서 말하는 '야기요단'은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진리에 대한 의심은 깨달음으로 가지 위한 첫걸음이 되는 것이므로 그것의 가치 또한 만만하게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단법석이라 함은 진리에 대한 의심을 묻고 대답하는 설법의 장을 얘기하는 것이다. 두 번째 야단법석으로 쓸 경우는 글자 그대로 야외에 법단을 차려 놓고 설법을 여는 것을 말한다 대중들이 많이 모여서 미처 법당 안에 다 수용할 수 없을 땐 할 수 없이 법석을 야외에 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럴 경우 많은 사람이 모였으니 그 모양이 성대하고 시끌벅적할 것임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바뀐 뜻 : 흔히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몹시 소란스럽게 구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원을 야단법석에서 찾는가 하면 야단법석으로 삼기도 하는데, 떠들고 소란스럽게 구는 것을 '야단났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소란스러운 상태를 가리키는 야단법석의 어원은 야단법석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야단법석으로 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보기글" -공항은 외국으로 배낭 여행을 떠나는 학생들로 야단법석이다 -요즘 한창 인기가 오르고 있는 모 가수의 공연이 취소되자 극성 청소년 팬들이 공연장을 점거하며 농성을 벌이는 등 야단법석이 났다
옮김과 뒤침
남의 글을 우리말로 바꾸는 일을 요즘 흔히 ‘옮김’이라 한다. 조선 시대에는 ‘언해’ 또는 ‘번역’이라 했다. 아직도 ‘번역’ 또는 ‘역’이라 적는 사람이 있는데,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쓰니까 본뜨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언해’든 ‘번역’이든 ‘역’이든 이것들은 모두 우리말이 아니지만 ‘옮김’은 우리말이라 훨씬 낫다고 본다. 그러나 ‘옮김’은 무엇을 있는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자리바꿈하는 것이다. 거기서 ‘발걸음을 옮기다’, ‘직장을 옮기다’, ‘말을 옮기다’, ‘모종을 옮기다’, ‘눈길을 옮기다’, ‘실천에 옮기다’ 같은 데로 뜻이 넓혀지지만 언제나 무엇을 ‘있는 그대로’ 자리바꿈하는 뜻으로만 써야 한다.
남의 글을 우리말로 바꾸는 것을 우리는 ‘뒤침’이라 했다. 글말로는 ‘언해·번역’이라 썼지만 입말로는 ‘뒤침’이었다고 본다. ‘뒤치다’를 국어사전에는 “자빠진 것을 엎어놓거나, 엎어진 것을 젖혀놓다” 했으나 그것은 본디 뜻이고, 그런 본디 뜻에서 “하나의 말을 또 다른 말로 바꾸어놓는 것”으로 넓혀졌다. 어릴 적에 나는 서당 선생님이 “어디 한 번 읽어 봐” 하시고, 또 “그럼 어디 뒤쳐 봐” 하시는 말씀을 늘 들었다. ‘뒤쳐 보라’는 말씀은 가끔 ‘새겨 보라’고도 하셨는데, ‘새기라’는 말씀은 속살을 알아들을 만하게 풀이하라는 쪽으로 기울어져 ‘뒤치라’는 것과 조금은 뜻이 달랐다. 어린 시절 나는 ‘읽다’와 더불어 ‘뒤치다’, ‘새기다’, ‘풀이하다’ 같은 낱말을 서로 다른 뜻으로 쓰면서 자랐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다슬기
다슬기를 사다가 된장을 좀 풀고 거기에 아욱이나 시금치 또는 애호박을 조금 넣고 끓이면 맛있는 다슬깃국이 된다. 다슬기의 시원한 맛과 채소 맛이 어우러져 한결 가을 입맛을 돋울 만하다.
‘다슬기’도 고장에 따라 부르는 말이 다르다. 경남에서는 ‘고동·고둥·고딩이’라 부르고, 경북과 강원에서는 ‘골뱅이’라 일컫는다. 충청 지역에서는 ‘올갱이·올강·올뱅이’라 하거나 ‘베틀올갱이·베틀올강’이라고도 부른다. 강원과 경기 쪽에서는 ‘달팽이’라 부른다. 전북·전남 등 호남 지역에서는 ‘다슬이·대사리·대수리·다실개’라 일컫는다. 전북을 중심으로 한 인접 지역에서 ‘물고동’이라고도 하고, 전남에서는 ‘갯고동·갯다사리·갯물고동·갯비트리·비트리’라고도 부른다. 제주에서는 ‘가메기보말·민물보말’이라고 한다.
‘고둥·골뱅이’는 주로 바다에 사는 연체동물을 말한다. ‘다슬기’를 ‘고둥·골뱅이’라 부르는 지역은 바다와 가까운 곳이다. ‘달팽이’는 주로 논과 밭이나 풀숲에서 사는데, 내륙에서 주로 쓴다. ‘다슬이·대수리’라 일컫는 지역은 냇물이나 연못이 많은 지역이다. ‘물고동’은 바다에 사는 ‘고둥’과 구별하려고 민물에 사는 ‘민물고둥’을 일컫는 말이다.
곳에 따라 생활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 문화에 따라 연체동물의 이름도 섬세하게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이름에 걸맞은 문화를 존중해야 할 때다. 따라서 하나만 내세우고 나머지를 버릴 것이 아니라, 두루 그 고장 문화를 이해하고 알고자 노력했으면 한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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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2. 북방의 정복자(흉노전) - 1/4
흉노의 영걸
흉노는 북방의 이민족이다.(흉노족은 오늘날 핀란드와 헝가리 민족의 선조로서 원래 유럽인종에 가까운 편이었다-역자 주) 목축과 수렵을 생업으로 삼으며, 가축을 따라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이동하며 살고 있었다. 흉노의 사나이는 모두 활을 잘 쏘고, 전시에는 모두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싸움터로 나갔다. 두만선우(선우는 흉노의 군주 칭호)에게는 묵특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그러나 선우는 그 후 애첩이 낳은 아들을 귀여워 해 묵특 대신 애첩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생각했다. 한편, 그 당시 이웃의 월지족은 매우 강성하여 흉노에게 인질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우는 우선 묵특을 인질로 삼아서 월지로 보냈다. 그리고 그가 갇힌 몸이 되었음을 확인하자 갑자기 월지로 토벌군을 보냈다. 누가 보아도 이는 묵특을 죽이려는 음모였다. 흉노의 침입을 받은 월지는 예상대로 인질인 묵특을 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묵특은 뛰어난 말 한 마리를 훔쳐서 본국으로 도망쳐 왔다. 두만선우는 자기의 의도는 실패했으나, 아들 묵특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게 되어 제거하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오히려 1만 기를 주어 장군에 임명했다. 그런데 장군이 된 묵특은 소리나는 화살을 만들게 하는 한편 부하에게는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훈련을 매우 강하게 시켰다. 그런던 어느 날,
"모두 듣거라. 내가 소리나는 화살을 쏘거든 너희들은 계속 내가 쏜 표적에 활을 쏘아라. 따르지 않는 자는 베겠다."
이렇게 명령하고는 전군을 이끌고 사냥을 나갔다. 묵특은 소리나는 화살로 새나 짐승을 쏘아 맞히고는 자기의 명에 따르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 그러더니 묵특은 이번에는 자기의 애마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그러자 부하 가운데는 멈칫 하면서 화살을 날리기를 망설이는 자가 있었다. 그때도 묵특은 즉석에서 그들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어느 날은 훈련 끝에 자기의 애첩을 쏘았다. 이때도 부하 가운데는 당황하면서 활을 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묵특은 역시 사정없이 그들을 베었다. 이렇게 엄격한 훈련을 치른 후 묵특은 또 다시 사냥을 나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버지 두만의 애마를 쏘았다. 그러자 이제 부하들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그를 따랐다. 묵특은 이로써 부하 전원이 자신의 명령대로 움직인다는 확신을 얻었다. 얼마 후 그는 아버지 두만을 따라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사냥이 한참 진행중이었는데 갑자기 그가 아버지 두만을 향해 소리나는 화살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의 곁에 머무르고 있던 그의 부하들도 묵특의 화살 소리를 따라 일제히 화살을 날려 보냈다. 두만은 이렇게 하여 훌륭한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묵특은 이어서 계모와 이복 형제 및 복종하지 않는 중신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렇게 하여 묵특은 스스로 선우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적을 방심케 하라
묵특이 선우 자리에 올랐을 당시, 동방에서는 동호족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묵특이 아버지 두만을 죽이고 선우 자리를 빼앗았다는 소식은 바로 동호왕의 귀에 들어 갔다. 그러자 동호왕은 사자를 보내어 죽은 두만이 애지중지하던 천리마(하루에 천 리를 뛴다는 명마)를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묵특은 측근과 의논했다. 그러자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천리마는 우리 흉노의 보배이오니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묵특은, "한 마리 말을 아끼기 위해 이웃 나라와의 우의를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하며 신하들의 의견을 누르고 동호의 요구에 응했다.
묵특이 자기네를 두려워한다고 판단한 동호는 얼마 후 다시 사자를 보내 왔다. 이번에는 미녀를 달라는 요구였다. 묵특이 측근에게 의논하자 이번에도 그들은 모두 성을 냈다.
"미녀를 요구하다니 이런 무례한 짓이 어디 있겠습니까? 동호의 무도함에는 이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부디 공격 명령을 내려 주소서." 그러자 그때도 묵특은, "계집 하나를 아낌으로 해서 이웃과의 두터운 우의를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하며 격분하는 신하들을 누르고 사랑하는 애첩 한 명을 동호에게 보냈다. 그러자 동호는 더욱 더 교만해지더니, 이윽고 흉노의 국경을 마구 침범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흉노와 동호의 중간에는 천여 리에 걸쳐 삶이 사는 집 하나 없는 불모의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다. 동호는 이 황무지에 눈독을 잔뜩 들이고 묵특에게 다음과 같이 통고해 왔다. "귀국과 우리 나라의 경계가 되어 있는 황무지는 귀국에 있어서는 무용지물이다. 따라서 이 황무지는 우리가 소유하기로 한다." 이에 묵특은 또다시 측근들과 의논했다. 그러자 몇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땅입니다. 주어 버려도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듣자 예전과는 달리 묵특이 격노했다. "땅이란 나라의 근본이다. 한 줌의 흙도 동호에게 줄 수는 없다." 그리고는 주어도 좋다고 말한 자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다. 그러더니 당장 말에 오르면서, "지금부터 동호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한다. 늦게 오는 자는 베어 버리겠다." 하며 즉각 동쪽으로 군대를 진격시켜 동호를 습격했다.
그런데 동호는 이전의 예로 보아서 완전히 묵특을 업신여기고 있었으므로, 방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무장하고 피나는 훈련으로 준비한 묵특의 군대는 순식간에 동호를 격파하고 왕을 죽여 없앴다. 묵특은 동호를 격파하자 곧바로 서쪽으로 진격하여 월지를 패주시켰다. 또한 남쪽으로 오르도스의 누번왕, 백양왕의 영지를 병합하고, 일찍이 진나라 장군 몽염에게 빼앗겼던 영토까지 모두 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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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1부 산소 - 너무 좋아하지 말라
짝을 찾는 프리라디칼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소단위를 원자라고 한다. 원자를 다시 들여다보면 중심부에 양자와 중성자가 있고, 그 주변에 전자가 있는데, 이때 전자는 항상 쌍으로 짝을 지어 존재한다. 만일 쌍을 이루지 못한 전자를 가지고 있으면서 짧은 시간이나마 일정시간 동안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물질이 있으면 이를 프리라디칼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이 프리라디칼이란 결혼 적령기에 이른 청춘남녀와도 같다. 좋은 짝이 나타나면 언제라도 한 쌍의 부부가 되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짝을 이루지 못한 전자를 갖고 있는 원자를 가진 물질은 그 종류에 관계없이 프리라디칼이 될 수 있다. 이 프리라디칼은 매우 불안정하며 수명이 길게는 몇초, 짧게는 수억분의 일초밖에 안되어 생기자마자 곁에 있는 물지로가 반응을 해버리는 성질이 있다. 짝을 못 이루는 전자 때문에 매우 불안정하여 곁에 있는 물질로부터 전자를 빼앗거나 자신의 전자를 다른 물질에 건네 주기 때문이다. 프리라디칼이 다른 물질과 반응할 때 그저 얌전히 결합만 하고 말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요란하게 흔적과 상처를 남기면서 반응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아마 프리라디칼이란 말보다는 자유기니 활성산소니 유해독성산소니 하는 말들을 더 많이 들어보았을지 모른다.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전부 비슷한 말이지만, 구체적인 뜻은 조금씩 다르다. 실제로 필자에게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프리라디칼의 손상을 입지 않기 위한 처방을 해 주다 보면 이런 여러 용어의 뜻에 대해 혼동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요즘에 와서 신문의 첨단의학 건강난에도 심심치 않게 프리라디칼이니 활성산소니 하는 말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 자주 이런 말들이 매스컴에 실릴 것이므로 그 뜻을 명확히 알아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설명했듯이 짝을 이루지 못한 저자를 가지고 있으면서 매우 불안정한 성질을 가진 물질을 통틀어서 프리라디칼이라고 한다. 프리라디칼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자유기'가 된다. 자유롭게 몸의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닐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몸 속에서는 여러 물질에서 짝을 못 이룬 물질이 만들어지므로 자연히 프리라디칼의 종류도 여러 가지가 된다. 예를 들어 안정된 구조를 가진 단백질이 어떤 이유로든지 깨져서 불안정한 전자구조를 가진 물질이 생기면 이를 단백질라디칼이라고 한다. 단백질라디칼은 다시 그 구성성분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손톱을 만드는 단백질에는 설파라는 물질이 있는데, 이때느 설파라디칼이라고 한다. 단백질이 분해되어 질소라는 물질로부터 프리라디칼이 생기면 이는 질소라디칼이라고 한다. 또 세포막을 구성하는 지질에서부터 짝을 못 이룬 전자를 가진 물질이 생기면 지질라디칼이라고 한다. 지질라디칼도 다시 그 구성 성분의 이름에 따라 알콕시라디칼, 페록시라디칼 등이 있다. 산소가 주성분이 되어서 짝을 못 이룬 전자를 가진 물질이 만들어지면 이를 산소라디칼이라고 한다. 산소라디칼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활성산소가 된다. 얌전하고 조용한 산소가 아니라 반응력과 활동력이 매우 큰 바람둥이라는 말이다. 또 그 결과 우리 몸에 해를 입히므로 유해독성산소라고도 한다.
이런 여러 가지 프리라디칼 중에서 인체 내에서 가장 흔하게 많이 생기며 주목을 받아온 것이 바로 활성산소이다. 활성산소 중에서도 우리 몸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대표적인 2가지가 수퍼옥시드라디칼과 히드로시라디칼이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은 프리라디칼과 활성산소란 말뜻을 같은 것으로 이해해도 별 무리가 없다. 이 책을 읽을 때에도 군데군데 프리라디칼과 활성산소란 말이 나오면 같은 의미인 것으로 알고 읽어 주기 바란다. 프리라디칼의 종류는 이렇게 여러 가지인데, 어째서 활성산소를 가장 중요시하는가? 가장 많이 생기고 동시에 가장 심각한 손상을 많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이마신 산소의 대부분(90%이상)은 세포 안에서 에너지를 만드는 데 사용이 되고 산소 자신은 물로 변화된다. 하지만 이 중 약 2--5% 정도는 다른 산소 부산물로 바뀐다.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면 그 연료가 연소되어 동력에너지가 생긴다. 에너지가 생겨야만 자동차 본래의 기능을 할 수 있지만, 불가피하게 배기가스라는 다른 해로운 부산물이 생기지 않는가? 체내 산소 부산물 중 대표적인 것이 수퍼옥시드 라디칼, 히드록시 라디칼, 과산화수소이다. 이 중 첫 번째, 두 번째 물질은 짝을 이루지 못한 불안전한 전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프리라디칼이다. 하지만 과산화수소는 프리라디칼은 아니다. 따라서 프리라디칼에 비해 활동력이 약하지만, 반면에 여건만 되면 프리라디칼을 만들 수 있다. 과산화수소처럼 평소에는 얌전하다가 호시탐탐 기회만 되면 프리라디칼을 만드는 물질을 반응산소종이라고 부른다. 반응성이 강하고 언제든지 활성산소가 될 수 있는 물질이라는 뜻이다.
세포가 죽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 프리라디칼의 파괴 반응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파열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연쇄적으로 여러 차를 들이받아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일으키고 난 후에야 멈추지 않는가? 방안에서 문을 닫고 용수철처럼 강하게 튀는 고무공을 벽에 힘껏 던져 보라. 이리저리 여러 번 사방의 벽과 유리창에 부딪쳐서 힘이 약해지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다. 프리라디칼도 똑같은 성질이 있다. 세포 안과 바깥에서 좌충우돌마구 휘젓고 다니다가 더 이상 괴롭힐 대상이 없어져야 얌전해진다. 이런 프리라디칼의 성질은 단 한번만 말썽을 일으키고마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보다 훨씬 더 고약하다. 인간이 산소를 사용하는 한은 끊임없이 생겨서 계속 말썽을 일으킨다. 프리라디칼이 세포를 공격하는 방법에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딱 한번의 공격만 하고마는 것으로, 이때는 세포 손상이 그리 크지는 않다. 둘째는 프리라디칼의 반응으로 또 다른 프리라디칼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또 다시 다른 물질을 공격하여 새로운 프리라디칼을 만드는 식의 연쇄반응으로 이때의 세포손상은 꽤 큰 편이다. 이런 연쇄반응은 프리라디칼이 다른 프리라디칼과 만나 안정된 물질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멈추게 된다. 셋째는 가장 고약한 동시다발성 공격방식이다. 이때는 마치 융단폭격을 하는 것처럼 한군데서 시작되어 가지치기 방식으로 계속 퍼져 나가면서 프리라디칼이 만들어지는 반응으로 가장 파괴력이 크다. 이 반응은 세포기능이나 세포구조가 완전히 파괴되고서야 비로소 멈추게 된다. 이런 프리라디칼 중 대표적인 것이 수퍼옥시드라디칼과 히드록시라디칼이다. 수퍼옥시드라디칼은 산소분자에 전자가 하나 더 붙어서 만들어지는 물질이다. 산소는 산소인데 수퍼 산소란 뜻이며, 세포 내부에서 매우 강한 독성을 갖는다. 히드록시라디칼은 가장 반응력이 강한 활성산소로 알려져 있다. 즉 이 물질은 일단 생기기만 하면 다른 데로 이동할 사이도 없이 근처에 있는 다른 물질과 아주 빨리 결합하는 요주의 물질이다. 따라서 모든 생물학적 분자에 닿자마자 그것들을 융단폭격식으로 공격하고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해를 입힌다. 유전자인 DNA에 손상을 주는 예를 들어 보자.
우리 몸에 필요한 어떤 물질을 만들어내려면 그에 필요한 정보를 담은 DNA들이 복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히드록시라디칼이 DNA성분을 공격한다. 그 결과 히드록시 DNA라는 것이 생성되면 잘못된 정보에 의해서 비정상적인 물질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를 돌연변이현상이라고 부른다. 엑스선이나 감마선같은 전리방사선에 노출될 때도 히드록시라디칼이 만들어져서 다른 분자들에 대해 해를 입힌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히드록시라디칼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이 방사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알려진 것이다.
만일 히드록시라디칼 2개가 만나거나 2개의 수퍼옥시드 라디칼이 만나면 과산화수소라는 반응산소종이 만들어진다. 또 어떤 질병에 걸리면 조직이 상하면서 많은 수퍼옥시드라디칼과 과산화수소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 과산화수소는 푸르스름한 액체로서 물과 쉽게 잘 섞이며, 우리 몸 안의 여러 막들을 잘 통과하는 성질이 있다. 오래 전부터 과산화수소는 옥시푸이라는 이름의 소독제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물질이다. 이것은 짝을 못 이룬 전자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므로 프리라디칼은 아니지만, 만일 전자 한 개가 과산화수소에 전달되면 맹독성의 히드록시라디칼을 만든다. 따라서 과산화수소를 움직이는 시한폭탄 같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산화수소 자체는 프리라디칼은 아니지만, 언제 어느 때라도 전자가 추가되면 히드록시라디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소독제로 쓰일 정도로 강한 과산화수소가 우리 몸 안에서 생기니, 어찌 조직이 손상을 안 입을 수 있겠는가?
어떤 과학자의 계산에 의하면 이와 같은 프리라디칼들은 1분에 1만번 정도 세포를 공격한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10분에 10만번, 1시간이면 60만번, 하루에는 1,440만번이나 우리 세포는 프리라디칼의 시달림을 받는다. 물론 앞으로 설명할 항산화방어벽 구축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면 이런 공격에도 끄떡없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의 세포는 프리라디칼에 의해서 채이고 뜯기고 시달리다가 하나둘씩 쓰러져 간다. 처음 하나둘씩 세포가 죽을 때는 별 이상이 안 생기지만, 차차 그 수가 많아지면 신체에 활려이 떨어지고 쉽게 피곤하며 무기력에 빠진다. 건강이 분명 예전같지는 않은 것을 느끼지만 병원에 가서 무슨 검사를 해도 이상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건강의 이상이 오기 시작한 것이고 질병의 씨앗이 이미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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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소인이란 비난을 면치 못한 주초위왕의 주인공 남곤
남곤(1471-1527)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사화, 호는 지정이다. 고려 말엽에 참지문하를 지낸 남을진의 증손이다. 김종직에게 글을 배워 시문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크게 떨쳐 박은, 이행, 홍언충 등과 더불어 명망이 높았다. 금남 최보는 그를 인재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눈은 생김새가 특이하여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있고, 용모와 거동은 단정하고 아담하였다. 성종 25년(149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연산군 때에는 부제학으로 왕의 뜻을 거슬러 평안도 변방으로 귀양갔다. 중종 2년(1507)에 남곤이 상중에 있으면서 박경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죽게 하였으며, 그 공로로 이조 참판에 승진되고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정광필이 크게 기용할 만한 인재라고 추천하여 그를 불러다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조정과 재야에서 오래도록 분하게 여겼던 공론에 따라 현덕왕비의 위호를 회복시키는 내용의 글을 올려 왕의 윤허를 받기는 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이 그를 경멸하여 대제학의 자리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당이 그를 적극 추천하였다.
"옛날부터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인물은 많지 않았다. 남곤의 문장은 버릴 수 없다"
마침내 남곤이 신용개를 대신하여 대제학이 되었다. 남곤은 한편으론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유감을 품었다. 그 무렵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남곤과 같이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게 되었는데, 남곤이 조정의 의논을 회피하기 위해 능헌관이 되어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그 일로 조광조가 그를 가볍게 보았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서울과 지방에 큰 지진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걱정이 되고 두려워하여 심기가 편치 않았다. 남곤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태로운 말로 불안해하고 있는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여 몰래 사람을 시켜 대궐 동산에 있는 나뭇잎에다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네 글자를 쓰게하였는데, 동산의 벌레들이 꿀물이 묻은 부분을 갉아먹어 '주초위왕'이란 글자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큰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중종 14년(1519) 11월 15일에 이장곤, 홍경주, 고형산을 꾀어 초저녁에 대궐의 북문인 신무문으로 들어가 왕에게 조광조 등이 당파를 만들어 과격한 일을 자행하고 정치를 어지럽히니 처벌해야 한다고 비밀리에 아뢰어 기묘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모두 남곤이 주장한 것이었다. 그 뒤 중종은 정광필을 갈아치우고 남곤을 승진시켜 좌의정으로 삼고, 김전을 영의정으로, 이유청을 우의정으로 삼아 세 정승의 자리를 채웠다. 2년 뒤에 송사련의 옥사가 이루어지자 스스로 소장을 짓는데, 일부러 죄인을 다스리는 행정이 엄중하지 못한 것과 조정의 기강이 풀렸다는 몇 가지 조목을 거론하며 당인들을 얽어 모함하고 교묘하게 꾸며 자기 주장을 늘어놓고 반역에 동조하였다고 지목하여 되도록 엄중한 형벌과 준엄한 법을 적용하도록 힘을 써서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변론하거나 구원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18년에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는데 5, 6년 사이에 그와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이 서로 잇달아 죽게 되자 인심은 속이기 어려운 터라 공론이 저절로 과격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읽고 있던 남곤은 항상 불안하여 진나라 은호처럼 허공에 글씨를 쓰면서 근심을 품고즐거운 빛이 없었다.
"남들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하더냐?" 그가 친족들에게 묻자, 그들이 입을 모아 대답하였다. "반드시 소인이라는 비난을 모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남곤이 마침내 집안 사람을 시켜 자신이 평생 동안 쓴 문고를 가져다 모두 태워 버리게 하였는데 '유자광전'만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중종 22년 57세로 죽었는데, 시호는 문경이다. 선조 초에 그의 벼슬을 깎아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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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지세
범을 타고 몰아친다는 것이니, 이미 큰 일을 착수한 이상 도중에 그만두면 오히려 위험함을 말한다. 잡다한 이민족이 한 민족과 대항하여 수많은 나라들이 생겨났다 망했다 하던 남북조 시대. 북조 최후의 왕조인 북주의 의제가 죽자 외척인 한인 양 견이 궁중에 들어갔다. 견은 재상으로서 정치를 총괄하고 있었는데 한인의 천하를 이룩하고자 염원하고 있던 터에 죽은 의제의 자식이 어린데다가 슬기롭지도 못하여 스스로 제위에 올라 수 나라를 세웠다. 서기 581년의 일로서 견은 그로부터 8년 후에는 남조의 진 나라를 무찔러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가 수 나라의 고조 문제인 것이다. 문제의 황후가 독고 황후였다. 일찍이 남편의 대망을 알고 있었기에 남편이 북주 천하를 장악하고자 궁중에 들어갔을 때 사람을 보내어 남편을 격려하였다. "하루에 천리를 내닫는 범을 탄 이상 도중에 내려오신다면 범에게 잡아 먹히십니다. 범을 몰아 끝까지 가셔야 합니다. 이미 큰 일을 일으키려고 일어서셨으니 도중에 물러나서는 안됩니다. 기필코 목적을 이룩하도록 힘써 주셔요." 남편이 아내의 이 말에 용기를 얻은 건 물론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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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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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1. 보리수를 닮은 사람들
그저 나는 내가 시정(市井)의 소인배인 줄 안다
촌놈, 석간수 한 잔 먹으러 요사채(요사라고도 하며 사찰 내의 불전, 산숭문 외의 스님의 생활과 관련되는 대부분의 건물을 총칭)를 나왔다가 열무김치 담그는 공양주보살을 보고 코끝이 찡했다. 그만 어머니 생각이 난 거다. 고개를 숙이고 법당에 올라가 백팔배 참회를 하고 저녁공양상을 마주하는데, 막 담근 달랑무 김치를 베어 물다 나는 또 코끝이 찡했다.
"아이고, 저 촌놈." 노스님이 빙그레 웃으셨다.
공양주보살님께서 내민 숭늉 주전자를 받아 노스님께 따르다가 '그래 엄마 젖 더 먹고 싶은 거여?' 하시는 말씀에 찔끔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공양주노보살님의 하얀 머리 뒤로 반달이 떠오른다. 나는 내가 한 번도 도를 닦겠다고 나서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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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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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4. 조선의 금서목록 (전통사상에 관한 서적들로만 꽉찬 금서목록) - 2/2
사화와 당쟁의 본질
오늘날 일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자는 명분 아래 많은 역사적 사실이 재조명되고 있다. 근조선 때 일어난 네 차례의 사화나 당쟁도 그런 관점에서 재평가되곤 했다. 그래서 사화와 당쟁은 일제 식민사학자의 주장과 달리 우리 민족의 고질적 분열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평가는 물론 옳다. 근조선의 당쟁에 분열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우리 민족의 특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사의 특징이라면, 그것은 세계사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특징이다. 어쩌면 세계사 그 자체가 민족과 민족, 종족과 종족, 국가와 국가, 신분과 신분, 가족과 가족, 개인과 개인의 분열사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모든 역사는 그런 단위의 통합과 융합의 역사인 것이다. 서로 편을 짜고 험악하게 싸우다가도 공통의 문제가 생기면 서로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힘을 모으는 것은 어느 한 민족사나 종족사의 특징이 아니라 인류역사 전체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분열이니 단결이니 하는 무의미한 주장과 그 주장에 대한 발빠른 반박이 아니라 그 분열과 단결의 밑바닥에 흐르는 역사적 성격이다. 근조선의 사화와 당쟁도 그런 점에서 이제 좀더 본질적으로 관찰해야만 한다. 잘 알려진 대로 사화와 당쟁의 밑바닥에는 늘 성리학이 깔려 있었다. 성리학은 한족 중심의 세계질서를 배경으로 한 근조선의 통치이념이었다. 근조선의 정치사상사에서 성리학은 자기 이외의 모든 사상을 지나치게 배척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정해버린 독단적 이념이었다. 그렇지만 이론적으로 성리학은 매우 체계적이고 폭 넓은 사상이었다. 성리학파가 배척한 전통사상과 불교 및 도교 등의 요소가 성리학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될 정도로 폭 넓은 사상이었다. 그런데 성리학은 그 내용적 폭과 체계성에 반비례할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속담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듯이, 성리학의 폐쇄성은 여러 요소를 일원론적으로 꿰고 있는 줄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 줄의 첫째 특징은 한족과 한족화된 사람만이 진정한 인간이라는 관점이다. 한족의 관점에서 '오랑캐'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이다. 오랑캐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한족을 닮아가면서 '작은 중화'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는 나라는 자신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를 버리고 중국의 사상과 문화만을 따라야 했다.
둘째 특징은 성리학이 다루고 있는 다양한 요소의 사상적 뿌리는 모두 한족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을 경우, 자기 겨레의 뿌리깊은 역사는 거짓이 되게 마련이다.
셋째 특징은 기초원리가 매우 주관적이어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현실적 문제를 해석할 경우 서로의 입장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견해를 내놓을 수 있다. 더구나 주희의 심법(주희가 사물을 보았던 마음으로써 다른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과 문법(주희 등이 남긴 문헌을 그대로 따르는 방법)이 복잡하게 얽히면, 같은 문헌을 놓고도 서로 다른 주장을 펴게 된다.
또 다른 특징은 정통은 하나뿐이라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정통을 지키기 위해서 늘 독단적,배타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다른 사상을 배척하고 탄압했을 뿐 아니라, 성리학파 내부에서도 정통론을 둘러싸고 치열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근조선의 사회는 바로 정통을 세우기 위해 내부투쟁을 벌인 사건들이었다. 물론 네 차례의 사화가 모두 정치적 입장을 둘러싼 음모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본질은 성리학파가 자신의 유일 정통을 세워나가는 과정이었다. 김종직 일파가 희생된 무오사화와 조광조 일파가 희생된 기묘사화는 그런 특징을 잘보여준다. 그 결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라는 성리학의 정통 학맥이 세워졌다.
이에 비해 당쟁은 이미 세워진 학맥의 계승권을 놓고 벌인 치열한 내부투쟁이었다. 이 투쟁도 물론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벌어졌으며, 현실에서 제기된 중요한 안건이 대부분 그런 투쟁의 소재가 되었다. 때때로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상대방을 모함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누가 성리학의 정통 교의를 따랐느냐에 따라 그 승패가 갈라졌다. 물론 이런 당쟁은 실학으로 불리는 르네상스의 부활을 맞으면서 그 명분을 잃고 정치투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근세 르네상스의 부활이 사회적 설득력을 얻으면서, 성리학적 정통론은 이미 정당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상탄압과 작은 겨레
사상에 대한 탄압은 늘 자기 부정으로 이어진다. 다른 사상을 탄압하는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사상은 내부숙청을 동반하게 마련이며, 그 결과 자신의 논리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근조선의 성리학파는 이런 점에서 지극히 전형적이다. 자기 고유의 역사와 사상을 탄압했고, 앞시대의 사상사적 업적까지 감추는 한편, 이미 토착화된 불교까지 모질게 탄압한 성리학파는 결국 내부분열 과정에서 자기 사상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사화를 통해 자신의 정통을 세우는 동안 성리학파는 성리학 속에 시대적 대안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냈으며, 정통이 세워진 뒤 당쟁을 통해 정통을 가리는 동안 성리학이 역사를 거슬렀음을 알게 만들었다. 즉 성리학은 사상탄압과 비례하는 내부투쟁에 시달렸으며, 이로 말미암아 근조선의 진정한 시대적 과제는 미완성의 고려 르네상스를 계승하는 것임이 드러나버린 것이다. 실학파는 그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바로 고려 르네상스의 계승자였던 셈이다. 혹독한 사상탄압과 엄청난 내부투쟁으로 말미암아 성리학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이론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사화와 당쟁을 통해 정통을 세우고 지키는 동안 이황, 조식, 이이, 송시열과 같은 이론가들이 학문적 완성도를 자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서 성리학파는 역사적 걸림돌이었다. 마치 성리학이 유교적 예법을 대중화시킨 것처럼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성리학이 '살부살조'해서 우리 겨레를 중국화시킨 것을 아직까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이다. 또 그것은 치열하게 이루어지던 고려 르네상스를 파괴함으로써 겨레 문화가 주체적으로 높은 꼭대기에 오르는 데 걸림돌이 되었음을 모르는 생각이다. 예법과 도덕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들의 미풍양속이 과연 성리학적인 것인지 충분히 의심해볼 일이다. 예컨대 농촌사회에서 두레가 먼저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성리학자들의 환난상휼이 먼저였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진정한 공동체의 덕목인지도 살펴볼 일이다. 성리학이 한족의 사상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외래사상의 수입은 어느 시대에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외래사상을 수입하는 태도가 과연 주체적인가 하는 점이다. 불교도 외래사상이었으며, 초기에 수입된 유학도 외래사상이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겨레 조상들은 그것을주체적으로 받아들여 겨레 문화의 자양분으로 활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고려 르네상스는 바로 그런 자양분을 융합시켜 스스로의 것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은 그런 작업을 파괴하면서 들어왔을 뿐 아니라, 겨레의 뿌리까지 도려내려 했다. 그 결과 성리학파는 몇몇 빼어난 성리학자를 배출하는 대신 겨레 문화를 왜소하게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외래문화에 대한 태도에서 그런 잘못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과거와 같은 '작은 겨레 만들기'나 '작은 인간 만들기'가 없어야 하겠기에 성리학의 전통문화 탄압과 잘못된 내부투쟁을 작은 겨레의 주요한 요인으로 꼽아본다. 사상에 대한 탄압이야말로 작은 역사의 근본적인 출발점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은 자기 부정은 작은 역사의 종착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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