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4장 윤리학
안락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나 - 허란주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것인가의 가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 만약 안락사가 인정된다면 사회적으로 수많은 부작용이 야기되지 않을까? 과연 인간의 생존과 인간다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잭은 배 안에 딱딱한 악성 종양인 멜라노마가 있었다. 의사들은 그것이 아마도 야구공 정도의 크기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암은 몇 달 전 잭의 왼쪽 어깨에 난 작은 종양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의 수술이 있었다. 의사들은 그 야구공 만한 종양을 제거하고자 했으나, 잭이 얼마 있지 않아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암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버렸던 것이다. 잭은 스물 여덟 살쯤 된 잘 생긴 남자였다. 그리고 무척 용기가 있었다. 그는 계속 고통에 시달렸고, 의사는 네 시간마다 진통제를 놓아 줄 것을 간호사에게 지시했다. 그의 부인은 낮시간의 대부분을 그와 함께 보내며 그의 고통이 진정되도록 애썼다. 하지만 밤이 되면 부인의 병원의 규칙에 따라 그를 떠나야 했고, 그는 고통을 혼자 견뎌 내야 했다. 예정된 시간에 간호사는 잭에게 진통제를 놓아 주었지만 이것은 단지 두 시간 정도만 고통을 진정시켜 줄 따름이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잭은 나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낮게 신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한 그는 마치 개와 같이 울부짖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그나 나는 간호사를 부르며 진통제를 달라고 외쳤지만, 간호사는 진통제 투약 시간이 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잭을 위로하면서 진통 효과가 거의 없는 코데인(진정 수면제의 일종)만을 줄 뿐이었다. 그러면 항상 그 시간이 될 때까지 불쌍한 잭의 신음 소리와 울부짖음은 더욱 커지고 더욱 잦아지는 것이었다. - 이것은 미국의 'Good Housekeeping'이라는 잡지에 실린 스튜어트 얼솝(Stewart Alsop)의 '명예를 유지하며 죽을 권리'라는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글에 나오는 잭은 암에 걸린 얼솝의 병동에서 같이 지내던 암 환자의 이름이다.-
들어가는 말
만약 여러분이 잭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잭은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다. 그리고 그 병으로 인해 겪는 육체적 고통은 점차로 심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잭이 자신의 목숨을 끊고자 한다면 의사들은 그를 도울 의무가 있는가? 이러한 경우는 현대에 들어 가장 첨예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안락사'의 특수한 예이다. 이 예를 처음에 인용한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안락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이다. '의사의 도움을 받는 자살(Physician_Assisted Suicide)'로도 알려진 이 경우가 안락사와 관련된 가장 흥미로운 관심거리이기는 하지만, 필자는 이 글에서 안락사에 대해 좀더 포괄적인 논의를 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안락사는 무엇인가? 그것은 영어의 'euthanasia'를 번역한 말로, 이 용어는 '좋은 죽음'이라는 뜻의 그리스말을 영어권에서 차용한 것이다. '좋은 죽음'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현대에 이르러 이 용어는 '편안하고 쉬운 죽음'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안락사'는 어떤 환자가 불치의 병을 앓고 있어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 그를 좀더 편안하고 용이하게 죽게 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치의 병에 시달리는 환자로 분류될 수 있는 경우도 여러 가지이고, 이때 이 환자를 편안히 죽게 하는 경우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어떤 경우들이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의 구분을 살펴보자.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안락사(편안한 안, 즐거울 락, 죽을 사)는 사람이 죽는 어떤 경우를 의미한다. 이는 죽음이 일어나는 원인과 관련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사람이 죽게 되는 경우로는 다른 사람이 휘두른 흉기에 맞아서 죽는 경우와 같이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이 그 죽음에 관여하는 경우도 있지만, 피를 흘리는 사람을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서 그가 죽게 되는 경우처럼 다른 사람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아서 죽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구분에 따라 안락사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적극적 안락사는 한 사람을 안락사시키는 데 있어 다른 사람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를 의미하고, 소극적 안락사는 한 사람을 안락사시킴에 있어서 그의 목숨을 연장시키는 여러 단계들을 밟지 않고 환자를 방치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전자의 예로서는 치명적인 독을 주사해서 안락사시키는 방법을 들 수 있고, 후자의 예로서는 뇌사한 사람에게 영양 주사를 주지 않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전자는 명백히 불법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후자는 대체적으로 허용이 된다.
자의적 안락사와 비자의적 안락사
자의적 안락사는 환자 자신의 의사에 따라 안락사 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 포함되는 것으로는 다음의 예들이 있다. 환자가 직접적으로 자살을 하거나 또는 치료를 일절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불러오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 환자가 다른 사람을 시켜서 자기의 의도대로 안락사 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만약 위에서 살핀 잭의 경우에 잭의 희망에 따라 의사들이 치명적인 주사를 놓아서 잭이 안락사 되었다면 이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의적 안락사가 가능하다. 이것은 유언장의 작성을 통해서 가능한데, 자신이 만약 크게 다쳐서 말을 할 수 없게 되거나 뇌의 기능이 마비되었을 때 인공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살려 내지 말 것을 가족들에게 미리 지시할 수 있다. 비자의적 안락사는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수 없을 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안락사가 결정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것은 당사자가 의식 불명의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안락사 여부에 대해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경우로서, 안락사 결정은 가족이나 친구들, 또는 의사에 의해 대신 결정된다. 이것은 바로 뇌사를 인정하는 문제와 직결된 것으로서, 비자의적 안락사를 인정한다는 것은 뇌사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뇌사는 여러 선진국들에서 인정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1995년 현재 뇌사한 사람에 대한 안락사가 의사 협회에 의해서는 인정되고 있으며, 뇌사한 사람의 장기 이식도 실행되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뇌사가 인정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이러한 관행은 불법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안락사는 누가 주관하는가에 따라 다음의 여섯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1. 환자 자신에 의한 안락사 -적극적:예)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경우 -소극적:예) 필요한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 2. 다른 사람에 의한 안락사 -적극적이자 자의적:예) 의사한테 자신에게 치사량의 주사액을 투여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 -적극적이자 비자의적:예) 뇌사한 사람에게 치사량의 주사액을 투여하는 경우 -소극적이자 자의적:예) 다른 사람한테 자신에게 필요한 치료를 하지 말도록 부탁하는 경우 -소극적이자 바자의적:예) 뇌사한 사람에게 영양 공급을 중단하는 경우
이제 간단하게나마 안락사와 관련된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안락사를 거부하는 입장 - 이 견해는 게이 윌리엄스(Gay Williams)가 제시하는 것이다.
안락사라는 주제에 대해 일각에서는 어떤 종류의 안락사도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안락사는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크게 세 가지의 이유가 제시된다.
1. 안락사는 자연에 반한다. 먼저, 인간은 계속해서 살고자 하는 자연적인 성향을 지닌 존재이다. 우리 육체의 기능 어느 하나를 보더라도 생존은 인간의 궁극 목표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반사 작용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기능한다.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를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칼에 베었을 때 모세 혈관은 수축되고 피는 응고되며 세포의 재생 작용이 시작된다. 박테리아에 감염되었을 때에도 이 이물질들에 저항하기 위한 항체들이 곧바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안락사는 이러한 자연적인 생존의 목표에 반한다. 자연의 모든 과정은 생존을 향해 움직이기 때문에, 목숨의 연장과 상반되는 안락사는 자연에 반하게 되는 것이다. 안락사에 반대하는 이 입장은 자주 종교적인 믿음들에 의거하기도 한다. 이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는 하느님의 것이고, 인간은 단지 그 육체를 얼마간 지키는 위탁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것이 아닌 육체를 마음대로 해칠 권리가 없다. 하지만 반드시 이런 종교적 이유를 댈 필요는 없다. 이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육체가 삶의 지속을 그 자연적인 목적으로 삼는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안락사는 인간 육체의 자연적인 목표에 반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2. 안락사는 인간의 자기 이익에 반한다. 죽음은 최종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현대 의학 기술이 급진적인 발달을 하여 대부분의 병에 대해 대체적으로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현대 의학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안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잘못된 진단도 가능하다. 실제로 어떤 환자가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큰데도 그가 불치의 병을 앓는다고 잘못 진단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 만약 안락사가 시행된다면 그의 죽음은 헛되게 되는 것이다. 또, 어떤 실험적인 방법에 의해서거나 아직 시도되지 않은 방법으로 불치의 병이 완치될 수도 있다. 안락사는 이런 가능성조차 차단해 버린다. 덧붙여, 소위 '기적적'인 경우들,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치의 병이 치유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환자가 지레 포기하여 안락사 된다면 이러한 기적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차단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약 안락사가 사회적으로 허용되어 우리가 자신의 생명을 언제라도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너무 쉽게 삶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사실 심각한 병이 완치되기 위해서는 환자의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만약 사회적으로 안락사가 허용되어 환자가 쉽게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환자의 낫고자 하는 의지는 약화될 수 있으며, 그것은 결국 환자의 자기 이익에 반하는 것이다. 또, 이렇듯 사회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분위기에서는, 만약 환자가 자신의 병이 나머지 식구에게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부담을 준다고 생각하게 되면 식구들을 위해서라도 삶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길 수도 있다. 더구나 환자들은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기에,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안락사를 결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여러 경우들을 생각해 볼 때, 안락사가 사회적으로 허용되면 우리가 계속 살아 나갈 수 있는데도 삶을 쉽게 포기할 가능성이 커진다.
3. 안락사는 현실적으로 많은 사회적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의사와 간호사는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안락사가 사회적으로 허용됨으로써 그들의 태도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즉, 그들은 더 이상 환자의 생명을 구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환자가 불치의 병을 앓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그를 살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환자가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속단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무사 안일적인 태도는 덜 심각한 병을 앓는 환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또, 안락사는 정책적으로 봤을 때 남용될 소지가 높다. 안락사의 본래 취지는 환자가 자의적으로 안락사를 결정할 때 그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안락사는 의사나 다른 대행자에 의해 시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안락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환자의 의사 표명이 없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임의적'으로 결정될 소지가 남는다. 이러한 상황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을 우리는 이미 역사에서 보았다. 나치들이 수행했던 악명 높은 인종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레오 알렉산더는 나치들의 인종 정책에 있어서 출발점이 되었던 것은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삶이 있다'는 안락사와 관련된 전제를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한다. 이 전제는 초기에는 단지 심각하고 만성적인 질병하고만 관련이 있었으나, 차차로 "사회적으로 생산적이지 못한, 이데올로기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인종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마지막으로는 게르만족이 아닌 사람들을 포괄하게 되었다."고 한다.(싱어 210쪽). 현대라고 이러한 정책적 남용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안락사의 제도화는 엄청난 부작용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안락사의 제도화를 찬성하는 입장
안락사가 제도적으로 허용되어야 하는 적극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불치의 병을 앓는 환자가 겪는 극심한 고통을 방치하는 것이 부도덕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환자가 자신의 삶에 내리는 자율적인 결정이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이 이유들은 사실은 도덕 철학으로 대립되는 두 입장에서 각각 제시하는 이유들이다. 전자는 '공리주의'의 입장이고 후자는 '의무론'의 입장이다. 공리주의는 이 사회에서 즐거움을 최대화시키고 고통을 최소화시키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기 때문에, 불치의 병으로 인해 환자가 앓게 되는 고통은 제거되어야 하는 악으로 규정한다. 의무론은 환자의 자율적인 결정에 대한 존중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자의적인 안락사는 그것이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간에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다. 이 입장들은 도덕 철학에서 양대 진영을 이루고 여러 문제들에 대해 대립하지만, 안락사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대체적인 합의를 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들의 입장 차이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한다. -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이유들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제시된 안락사 반대 이유들이 합당하다고 생각된다면 안락사의 법적인 허용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안락사의 제도화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위에서 제시된 안락사 반대 이유들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차례로 살펴보자.
1. 생존만이 인간 삶의 목적이 아니다. 물론 생존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목적이 생존뿐이라고 보는 것은 인간의 삶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다. "양보다 질"이라는 말이 있듯이, 생명이 긴 세월 동안 연장된다고 그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삶의 질도 양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오랜 기간 생존할 수 있기는 하나 그것은 끊임없는 고통의 과정이라고 해 보자. 그는 계속해서 오장 육부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다른 어떤 활동도 할 수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도, 밖에 나가 산책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사랑을 나눌 수도 없다. 침대에 누워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삶이 과연 가치로운 삶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런 삶을 연장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인가? 또, 만약 어떤 사람이 아무런 의식도 없이 침대에 누워 60년을 생존해 나간다고 생각해 보자. 양분을 얻고 배설하는 등 그의 가장 기초적인 생리적 필요만이 충족될 뿐, 그는 생각을 할 수도, 걸을 수도, 즐거움을 느낄 수도 없다. 마치 나무와 같은 이러한 삶이 가치로운 인간의 삶인가? 만약 여러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생존 그 자체보다는 생존을 통해서 영위되는 자유로움이나 즐거움, 행복 등이 더 가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다운 삶은 사람들과 함께 삶을 공유하면서 상호 작용을 가지고, 즐거움을 느끼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삶이 자신의 구도대로 만들어져 나가는 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인간다운 삶이라고 볼 수 없다. 인간의 목적이 단지 생존일 뿐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단순화이다.
2. 안락사는 자기 이익에 반하지 않는다. 안락사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진영에서는, 의사의 실수로 인한 헛된 죽음이 있을 수 있으며, 기적이나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방법에 의해 살아남을 수 있을 사람들이 안락사 때문에 의미 없는 죽음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안락사는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만약 의사가 양심적이라면 현대와 같이 의학이 발달한 상황에서 불치의 병에 대해 오진을 내릴 확률은 극히 적다. (물론 현재 오진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를 최소화하도록 불치의 병에 대해서는 두 명 이상의 권위 있는 의사가 진단을 내리도록 법적인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먼 훗날에는 모든 병에 대해 확실한 치료법들이 고안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아직 확립되지 않은 어떤 방법에 의해 불치의 환자들이 살아남을 가능성 또한 극히 적다. '기적'에 의해 살아남는 사람들 또한 극소수이다. 이렇게 적은 확률의 생존 가능성 때문에 극심한 고통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만약 안락사가 법제화되면 모든 불치의 환자들이 안락사를 택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안락사의 법제화를 반대할 수도 있겠는데, 이것은 큰 오해이다. 안락사가 법제화된다고 하더라도 불치의 환자가 원하면 실험적인 방법이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 그의 생명을 연장하도록 노력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장려되어야 한다. 다만, 너무도 고통이 심하여 안락사하고 싶은 환자들에게는 안락사를 받을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싱어(P.T. Singer)의 말대로, 안락사가 법제화될 때 일어날 수도 있는 매우 적은 숫자의 불필요한 죽음에 대해, 만약 안락사가 법제화되지 않을 경우 죽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병에 시달릴 환자들이 겪을 엄청난 양의 고통을 대비시켜야 한다(싱어, 196쪽).
또, 안락사 반대 입장에서는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될 경우 환자들이 살고자 하는 의욕을 더욱 쉽게 상실하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 더 나아가, 환자가 치명적인 병으로 인해 겪게 될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지레 안락사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있을 법한 일들이다. 따라서 만약 안락사가 법제화될 때에는 이런 성급한 결정들을 배제하기 위한 기제들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미 안락사가 법제화되어 있는 나라들의 경우를 살펴보자(싱어, 195~196쪽).
안락사는 오직 다음의 두 조건을 만족시킨 사람에 대해서만 시행될 수 있다.
(1) 두 사람의 의사에 의해 그가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되거나 이성적 능력을 상실할 것으로 예상되는 불치의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진단을 받고, (2) 최소한 30일 전에 두 사람의 독립된 증인 앞에서 (1)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였을 경우에 안락사를 시행 받을 것을 서면으로 요청한 사람. 안락사는 오직 의사만이 시행할 수 있으며, 만약 환자가 안락사 시행 당시 아직 동의할 인지적 능력이 남아 있으면 의사는 환자가 아직도 안락사를 원하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 안락사 요청은 언제라도 취소될 수 있다.
이러한 제한들이 가해진 상태에서, 안락사를 받고자 하는 환자의 욕구가 합리적인지의 여부는 여러 단계들을 거쳐서 확인 받을 수 있게 된다. 환자는 여러 단계에 걸쳐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진정으로 원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 볼 기회를 가지게 된다. 만약 환자가 이러한 절차를 통해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안락사를 원한다면 그에게 안락사를 거부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3. 안락사 법제화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은 막을 수 있다. 안락사가 법제화됨으로써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의 생명을 연장시킬 의무를 다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의사나 간호사의 자질 문제이지, 안락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생각한다. 의사나 간호사가 도덕성이 결여되었으면, 그들은 안락사가 법제화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환자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의사와 간호사가 환자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은 안락사 법제화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안락사가 불법이다. 그렇다고 모든 의사와 간호사가 환자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제대로 하는가? 그렇지 않다. 불치의 환자, 또 심지어는 치료가 가능한 환자에게조차 의사, 간호사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이들이 허다하다. (돈벌이가 안 된다고 차에 치여 온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의사들을 생각해 보라!) 물론 안락사가 법제화되면 책임감 없는 의사와 간호사들에게는 또 하나의 핑곗거리가 생기는 셈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의사나 간호사들은 안락사의 법제화로 인해 환자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덜 수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부 의사와 간호사의 책임 의식 결여는 의료 교육의 혁신적인 개혁을 통해서만 개선될 수 있는 문제이며, 안락사를 불법화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의사나 간호사의 도덕성이 잘 확립되어 있다면, 안락사가 법제화되어 있다고 해서 불치의 병을 퇴치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반대의 입장에서는 안락사가 살인 도구화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만약 2번 항에서 말한 방식으로 법제화가 된다면 그러한 위험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의 독립적인 증인, 30일간의 예비 기간, 그리고 정신적 능력을 가진 환자의 경우 의사가 마지막으로 환자의 희망을 조사하는 것은, 안락사가 살인의 수단으로 사용될 가능성을 차단한다. 사실 안락사가 나치에 대해 대량 학살의 수단으로 전락했던 것은-엄격히 말하자면, 나치들의 악명 높은 가스실에서의 살인은 '안락사'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 가스실에 갇힌 사람들은 대부분이 건강한 사람들이었을 뿐 아니라, 공포와 고통 속에서 죽어 갔기 때문이다.-'어떤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안락사의 전제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나치들의 '인종주의'적 태도 때문이었다. 그들이 지니고 있던, 비아리안족은 인간 이하이고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엄청난 과대 망상이 문제였던 것이다. 비록 안락사의 명분을 내세워 사람들을 죽였지만, 그것은 우리가 현재 논의하고 있는 안락사와는 상황뿐 아니라 의도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치들은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안락사를 이용했던 것이 아니라, 비아리안족을 세상에서 말살시키기 위해 조직적인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다. 히틀러와 같은 미치광이가 정권을 잡는다면 안락사의 개념이 없더라도 대량 학살은 자행될 것이고, 그 정권은 그에 대한 합리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대량 학살을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안락사의 불법화가 아니라 합리적인 시민 의식과 공정한 민주적 정치 제도이다.
맺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안락사에 대한 찬반론을 살펴보았다. 물론 여기에 나온 논의가 안락사에 대한 논의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들은 거의 나열되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안락사의 법제화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나름의 결론을 내려 주기 바란다.) 그러나 이론만 가지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이다. 우리 사회는 과연 안락사의 법제화가 이루어질 정도로 성숙되었는가? 얼마 전 뇌사가 인정되어 장기 이식이 수월해졌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눈이 필요한 사람, 장기가 허약해서 죽어 가는 사람 등이 새 삶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제 암암리에 장기를 사고 파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장기가 돈으로 환산되기 시작할 때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이 관행의 부작용은 이미 인도에서 나타나고 있다. 인도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장기를 팔 뿐만 아니라, 장기를 도둑질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어떤 가난한 사람은 피를 팔려 갔는데, 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한쪽 콩팥이 없어졌다고 한다('times', 23쪽).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이 있을까? 끔찍한 일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지 못하도록 장기의 판매는 법으로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어떤 제도이건 그 제도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성숙된 시민 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없이는 아무리 합리적인 제도라도 남용될 소지가 많다. 과연 우리 사회는 성숙한 사회인가? 우리 모두 자문해 볼 일이다.
참고 문헌
J.게이 윌리엄스, "The Wrongfulness of Euthanasia(안락사의 부도덕성)", 매프스와 젬바티의 Social Ethics(사회 윤리), New York:McGraw_Hill, 1987. J.레이첼스, "Active and Passive Euthanasia(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 Social Ethics P.싱어, '실천 윤리학', 철학과현실사, 1993., pp. 176__214 "An Abominable Trade(혐오스런 상거래)", Times, 1995. 2.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