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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00 호
단기 4340. 11. 9 (음력 9. 3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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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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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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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나눈 기쁨은 두 배나 더 기쁘고 서로 나눈 슬픔은 절반밖에 슬프지 않다. / 스웨덴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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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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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내 살을 주신 분
효자가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살을 베어 내는 것에 대해서는 앞 시대의 유학자들이 자세히 말했다. 지극히 절박한 때를 당해서 다른 데서 얻을 수 없었을 경우에는 자기의 살을 베어 내서라도 어버이의 목숨을 건지려는 것이 자식된 자의 진실한 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원칙으로 삼아 효도하라고 사람들에게 훈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자는 그에 대해 다만 '거의 효도했다'고 말했을 뿐이요, 그것을 더없는 선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어째 해야 할 방법과 합당한 도리를 찾지 못했을 경우에는 부득이 차선책을 찾아서 이에 따라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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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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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3장 사회 및 역사 철학
개인이 우선인가, 사회가 우선인가 - 오창희 (2/2)
개인이 우선인가, 사회가 우선인가
이처럼 개인은 사회에 대해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시에 가진다. 개인의 능동성은 곧 사회의 수동성이며 개인의 수동성은 곧 사회의 능동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사회 역시 개인에 대해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시에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개인주의는 바로 이러한 특성들 가운데서 개인의 능동성을 강조한다. 이에 따르면, 사회는 각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개인들의 집합체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또, 각 개인의 이익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사회 혹은 국가는 개인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각 개인들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졌다(사회 계약설). 따라서 사회 혹은 국가가 이러한 목표를 효과적으로 이루어 내지 못할 때에는 그들의 의도에 따라 해체될 수도 있다. 또, 각 개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각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려고 노력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에 의해 결과적으로 국가 전체도 부유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곧 국가 전체의 이익과도 일치하게 된다는 것이 개인주의의 입장이다. 반대로 전체주의는 사회의 능동성(따라서 개인의 수동성)을 강조한다. 이에 따르면, 사회 혹은 국가는 개인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됨으로써 그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가능하다. 예를 들면, 유기체가 머리, 몸통, 팔다리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국가도 지배자 계급과 관리 계급, 생산자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신체의 각 기관이 유기체 전체 속에서 각각의 역할과 위치를 수동적으로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국가가 하나의 유기체인 만큼, 뇌에서 명령한 것을 유기체의 모든 기관이 수행하듯이 국가 전체를 지배하는 통치자가 명령한 것을 각 개인들도 잘 따라야 한다. 또, 유기체의 각 기관들이 유기체 전체의 유지와 성장을 위해 기능하는 것처럼, 각 개인들은 때로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개인이 있으므로써 국가가 있다기보다는 국가가 있음으로써 개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전체주의의 기본적 입장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주의는 주로 서구에서 발달했으며 그 중에서도 영국과 미국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정치 체제에서의 개인주의는 철학에서의 경험론이나 원자론, 그리고 경제 제도에서의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타난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원리적인 공통성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반해 전체주의는 역사적으로 히틀러의 나치즘, 무솔리니의 과시즘, 스탈린 체제의 공산주의, 일본의 군국주의 등에서 실현되었다. 이들 체제하에서는 단결과 조직이 강조되었으며, 각 개인들은 국가나 민족, 혹은 이념을 위해 기꺼이 희생 봉사하도록 선동 혹은 강요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제2차 세계 대전 다시 일본이 감행했던 가미가제식 자살 공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은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옥쇄라고 하여 영웅시하면서 많은 젊은 조종사들로 하여금 가미가제식 자살 공격을 감행하도록 강요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몇몇 나라에서의 이러한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출현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문화적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영국과 미국은 전통적으로 경험론과 원자론의 철학을 견지해 왔으며 사회 계약설의 입장을 지지해 왔다. 또한 그들은 일찍부터 개인의 자유와 사적 소유를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 제도를 채택해 왔는데, 이 모든 것들은 개인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적절한 토양이 되었다. 한편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개인보다는 집단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군국주의의 형태로 나타난 그들의 집단 의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여 회사와 국가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그들의 문화적 토양과 사회 체제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이익과 공익의 조화
그러면 이러한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중 어느 것이 바람직한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각기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개인주의는 각 개인의 자유와 권익을 우선하여 그것을 극대화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모든 사회적 제도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각 개인의 삶을 더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드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이익이 반드시 전체의 공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양자는 서로 충돌할 수도 있다. 전체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위해 국가가 설치하는 그린벨트는 해당 지역 주민의 이익과 배치되기도 한다. 또, 역사적으로도 개인의 이익이 국가 전체의 공익으로 연결되지 않은 경우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국가의 개입과 조정이 필요해진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는 분명 다르지만 이기주의와 연결되기 쉬운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서는 국가나 사회가 개입하여 각 개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체의 공익을 위해 약간의 조정을 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 나타나 것이 공리주의이다. 공리주의는 개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나타난 이론 체계로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모든 결정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공리주의는 개인주의의 바탕 위에서 전체의 공익을 도모하고자 시도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전체주의 역시 전체 사회의 유익을 우선시하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저마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이익의 충돌을 전체 사회의 공익이라는 관점에서 잘 조정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전체주의는 개인보다 전체를 우선시함으로써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잘못을 저질러 왔다. 아무리 좋은 목표라 하더라도 수단이 좋지 않으면 옳은 것이라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전체 사회의 유익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에 따르는 개인의 희생이 너무 크고 또 그것에 이르는 방법이 옳지 못하다면 이 역시 옳은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전체주의는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언제나 위험스러운 체제로 인식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체제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공익이 충돌할 때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 경우에 국가나 집단이 그 자신의 전체적인 목적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무조건 강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반대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전체의 공익보다는 자기의 이익에만 몰두하여 전체 공익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이기주의에 빠져서도 안 된다. 남이야 어떻든 관계없이 자신의 쾌락 추구에만 관심이 있는 오렌지족이나, 우리 민족 공동의 문제에는 무관심한 채 자기 개인의 이익 추구에만 몰두하는 일상인의 행위 역시 바람직하지는 못하다. 그러므로 개인의 이익은 사회 전체의 공익과 더불어 추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과 더불어 누려져야 한다. 이것이 사회 속에서 함께 사는 길이다.
참고 문헌 K.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민음사, 1982. K.포퍼, '역사주의의 빈곤', 지학사, 1975. R.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1992. A.크레스피그니, J.크로닌, '현대의 이데올로기', 인간사랑,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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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재
본뜻 : 윤회를 믿는 불교에서는 특히 죽은 이를 위한 의식이 두드러지게 많은 게 대표적인 것이 재와 제이다. 재는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삼가하며 맑게 하는 의식이고, 제는 죽은 이를 위해 음식을 바치며 정성을 들이는 의식이다. 재는 한마디로 스님들이나 독실한 불자들이 지키는 계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에는 재와 제가 거의 비슷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재에는 7일재와 49재가 있는데 '7일재'는 돌아가신 날로부터 7일째 되는 날 지내는 것이고, '49째'는 7번째 돌아오는 7일재에 지내는 것이다. 이 밖에 7월 보름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올리는 우란 분재, 윤달에 죽기 전에 미리 공덕을 쌓기 위해서 지내는 예수재 등이 있다.
바뀐 뜻 : 사람이 죽은 지 49일이 되는 날에 지내는 재를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7번의 생사를 거치는 중음신의 과정을 거치는데 49일째 되는 날은 드디어 중음신의 신세를 벗고 삼계 육도에 다시 태어나는 날이라 한다. 남아 있는 가족이나 친지들이 이 날을 기념하여 죽은 자가 삼계(천계, 지계, 인계)에 가서 누리게 될 후생의 평안을 위해서 독경과 공양으로 명복을 비는 것을 사십구일재라 한다. 다른말로는 칠칠재라고 한다. 흔히들 제사를 연상해서 '사십구제'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한 표기는 '사십구재'이다.
"보기글" -옥이 사십구재 때 절 마당의 비둘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보았니? -사십구재 때 읽어 올리는 경이 바로 금강경이란다
싸우다와 다투다
국어사전은 ‘싸우다’를 물으면 ‘다투다’라 하고, ‘다투다’를 찾으면 ‘싸우다’라 한다. 이들과 비슷한 ‘겨루다’도 있는데 그것도 ‘다투다’라고 한다. 참으로 국어사전대로 ‘싸우다’와 ‘다투다’가 서로 같고, ‘겨루다’는 ‘다투다’와 같다면 셋은 모두 같은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 낱말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생겨나서 오늘까지 쓰이고 있겠는가? 본디 다른 뜻을 지니고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서로 달리 쓰였으나, 걷잡을 수 없는 세상 소용돌이를 살아오느라고 우리가 본디 뜻을 잊어버리고 헷갈리는 것일 뿐이다.
‘겨루다’는 일정한 가늠과 잣대를 세워놓고 힘과 슬기를 다하여 서로 이기려고 갋으며 맞서는 노릇이다. 맞서는 두 쪽이 혼자씩일 수도 있고 여럿씩일 수도 있지만 가늠과 잣대는 두 쪽을 저울같이 지켜준다. 한 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바르고 반듯한 처지를 만들어주고 오직 힘과 슬기에 따라서만 이기고 지는 판가름이 나도록 하는 노릇이다. 놀이와 놀음의 바탕은 본디 겨루기에 있고, 그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내세우는 것이 이른바 운동경기다.
‘싸우다’와 ‘다투다’는 둘 다 공평하도록 지켜주는 가늠과 잣대란 본디 없고 어떻게든 서로 이기려고만 하면서 맞서는 노릇이다. 그런데 ‘다투다’는 목숨을 걸지도 않고 몸을 다치게 하지도 않아서 거의 삿대질이나 말로써만 맞선다. ‘싸우다’는 다투는 것을 싸잡고 몸을 다치게도 할 뿐 아니라 마침내 목숨마저 떼어놓고 맞서는 이른바 전쟁까지도 싸잡는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운율
고장말들이 서로 차이를 보이는 게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울림과 높낮이, 그리고 길고 짧음’이다. 이 요소가 지역마다 달라서 경상 방언에는 음의 높낮이가 뚜렷하고, 전라와 충청 방언에는 길고 짧음(장단)이 두드러진다. 시인이나 작가들은 지역 언어에서 익힌 이 고유한 운율로 저마다 고향의 정서를 표현한다.
시인 박목월은 〈사투리〉란 작품에서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고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라며 자신의 고장말을 통해 경상도 사람들의 정감과 심성,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는 시 〈화사〉에서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베암…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라고 표현하면서 장음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는 정서적 현장감과 사실성을 나타내고자 쓰이고, 또한 운율과 관련되어 부드럽고 유연함을 더하고 있다. 김영랑의 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에서는 “오매 단풍들것네”라는 전라 방언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운율적인 효과를 잘 살리고 있다. 감탄사 ‘오매’를 ‘오오매, 오오오매’와 같이 음절을 늘리면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들은 갖가지 비유뿐만 아니라 ‘오오라베, 베암, 오오오매’와 같은 고장말의 독특한 운율을 잘 활용하는 선수들이기도 하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훈훈하다
“아! 훈훈해. 대한민국 만세!” 감동적인 미담을 듣고 난 반응일까? 이는 최근에 장동건과 비가 함께 찍혀 화제가 된 소위 ‘직찍’(직접 찍어 올린 사진)을 보고 여성 누리꾼이 단 댓글이다. ‘미담’ 들은 뒤의 반응이 아니라 잘생긴 ‘미남’을 본 뒤의 반응인 셈이다. 풀이하면 ‘아! 멋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매력 있는 남자들이 있어서 참 좋아!’ 정도가 될 것이다.
본디 ‘훈훈하다’는 “방이 훈훈하다”처럼 날씨가 덥거나 온도가 높을 때, “인간적인 훈훈한 매력”처럼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주는 따뜻함이 느껴질 때, “음식 냄새가 훈훈하게 풍기다”와 같이 향내가 감돌아 흐뭇할 때 쓴다. 처음에 ‘훈훈하다’와 ‘남자’를 합쳐 줄인 ‘훈남’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훈훈하다’의 본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뜻한 인간적 매력을 풍기는 남자들을 가리켜 ‘훈남’이라 불렀고, 얼굴이 곱상한 ‘꽃미남’과 대립되는 말로 쓰였다. 매력 있는 남성의 기준이 외모에서 성품으로 바뀐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마음이 따뜻한 이가 남자뿐인 것은 아니기에 ‘훈녀’도 생겼고, 본디말이 좀더 잘 드러나는 ‘훈훈남, 훈훈녀’도 함께 유행했다.
그런데 이제 ‘훈훈하다’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뛰어나다, 어떤 면에서 매력이 있다’라는 뜻의 새말이 되었다. “얼굴이 훈훈하다” “몸매가 훈훈하다”와 같이 쓰인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물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기분 좋게 해 주는 사람도 훈훈한 시대가 되었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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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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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0.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 보이는 법이다(숙손통)
호랑이의 입 속에 있을 때는
숙손통은 원래 진나라 2세 황제 때에 학식을 인정받아 등용되었다. 몇 년 뒤 진승이 산동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2세 황제는 즉시 신하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 초나라 지방에서 진승의 무리가 군사를 일으켜 소란이 일어났다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좋다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30여 명의 신하들이 일제히 말했다. "신하된 자로써 반역을 하다니,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마음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품어도 반역죄인 것입니다. 단호하게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당장 군대를 파견해 진압하십시오."
2세 황제는 반역이라는 말을 듣자 매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이때 숙손통이 나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잘못입니다. 지금 온 천하가 한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졌고, 무기는 모두 녹였으니 이제 전쟁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자애로우신 황제 폐하의 은총으로 무든 법령이 충실히 지켜지고, 모든 백성들은 각기 맡은 직분에 충실합니다. 이와 같은 태평성대에 어떻게 반역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진승이란 작자는 한낱 도적떼에 지나지 않을 뿐이므로, 폐하께서는 신경쓰실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금방 관리들이 모조리 일망타진해 처벌할 것입니다."
그러자 2세 황제는 금새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는 신하를 한사람 한사람씩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의견은 반역설과 도적설로 나뉘었다. 다 듣고난 2세 황제는 반역설 이야기한 신하들을 모두 옥리에게 넘겨 취조하게 했다. 반면 도적설을 말한 신하들은 위로했고, 특히 숙손통에게는 비단 20필과 의복을 내림과 아울러 박사로 승진시켰다. 숙손통이 궁궐에서 나오자 동료들이 비꼬았다.
"아니, 어떻게 그 정도로 아부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숙손통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지금 호랑이의 입 안에 있지 않소? 내가 그렇게 아부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무사하기 어려웠을 것이오." 그리고는 바로 고향인 설 땅으로 도망쳤다.
난세에는 용사가 필요하다
숙손통이 설 땅에 가 보니 그곳은 이미 초나라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우를 모시게 되었다. 그 뒤 유방이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에 들어오자, 숙손통은 유방에게 가담하였다. 숙손통은 원래부터 유학자로서 선비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이 선비옷을 싫어하자 곧 그 옷을 벗어 버리고 짧은 옷으로 갈아 입었다. 유방이 그 사실을 알고 기분이 좋아졌다. 또 숙손통이 유방에 가담했을 때 제자 백여 명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들중 누구도 유방에게 천거하지 않았다. 대신 도적질을 했던 자나 건달들만 자꾸 추천했다. 이에 제자들이 불평불만을 터뜨렸다.
"저희는 선생님께 여러 해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당연히 저희들의 앞길을 열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건달, 깡패만 계속 추천하고 계시니 정말 그 이유룰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숙손통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지금 대왕께서는 싸움터를 전전하며 화살과 칼을 무릅쓰고 다니신다. 학자들이란 전투엔 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우선 적의 머리를 베어 올 수 있는 용감무쌍한 자들을 추천하는 것이다. 너희는 좀 기다리도록 해라.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숙손통은 용사들을 추천한 공로로 벼슬이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수성에는 학자가 중요하다
그 후 드디어 천하 통일 이 이루어졌다. 숙손통은 황제 즉우식의 책임을 맡아 잘 처리했다. 원래 유방은 진나라의 번거로운 의식을 모두 없애 버리고 대폭 간소화했었다. 의식과 규율이 간소화되자 신하들은 제 멋대로 술을 마시고 서로 공적을 다투었으며, 싸움을 벌이고, 심지어 칼을 빼어 들고 궁궐 기둥을 치는 자도 있었다. 사태가 이쯤되자 유방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때 숙손통이 유방에게 아뢰었다.
"학자란 건국 사업에는 별 소용이 없지만, 나라를 유지시켜 가는 수성에는 매우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바라옵건대 학식이 높은 노나라 학자들을 초청하여 제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의식을 제정했으면 합니다." "괜찮은 생각인데, 너무 어려운 일 아니오?" 그러자 숙손통이 말을 이었다. "의식이란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풍속에 따라서 간단할 수도 있고 복잡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 은, 주의 의식은 각각 이전의 의식을 따르면서 취사선택했다.'는 공자의 말씀도 어느 나라에나 똑같은 의식이 없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로부터 전해온 의식에 진나라의 의식을 가미해 우리 나라의 새로운 의식을 만들 생각입니다." "좋소, 한번 만들어 보오. 하지만 알기 쉽게 만드시오."
그 뒤 숙손통은 노나라에 가서 30명의 학자를 초청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거절하면서 이렇게 숙손통을 비난했다.
"당신은 벌써 열 명도 넘는 주군을 섬기면서, 그때마다 면전에서 아부하며 중용되었소. 이제야 비로소 천하가 평정되었지만, 아직 전사자의 장례도 끝나지 않았고 부상자들은 완치되지 못했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예악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오? 본래 예악이라는 것은 황제가 백 년 이상 덕을 쌓아야 비로소 일어나는 법이오. 그러니 당신이 하는 일에 찬성할 수 없소.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옛날의 법에 맞지 않는 일이오. 그냥 돌아가시오. 더이상 우리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그러자 숙손통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은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고루한 선비들이오.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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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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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33장. 현대생활에 내린 행운의 선물.
매직테이프
매직테이프(미국에서의 상표는 벨크로)로 알려진 갈고리와 고리로 동여매는 것은 아마도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독창적인 발명품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중요한 발명과 마찬가지로 이 매직테이프의 아이디어는 아주 우연한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50년대 초, 조지 드메스트랄은 그의 모국 스위스의 시골에서 산책에 나섰다. 집에 돌아와 보니 옷에 도꼬마리가 잔뜩 달라붙에 있었다. 그는 그서을 떼어내면서 "어째서 이렇게 집요하게 달라 붙지?" 하면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호기심을 가지고 현미경으로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도꼬마리는 갈고리로 꽉 차 있으며 그 갈고리가 옷 천의 고리에 끼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흩어져서 번식하기 위한 자연 법칙으로 도꼬마리는 자기 종자의 가시가 지나가는 새나 짐승에게 달라붙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드케스트랄은 도꼬마리를 본따서 혐오대상이 아닌 유용한 것을 만들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음은 고착제의 이야기다. 현재는 도꼬마리형의 갈고리와 섬유의 고리를 응용한 매직테이프가 어린이의 신발에서부터 우주선의 마이크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을 고착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제품으로서의 응용범위는 엄청나게 크며 자동차, 가정용품, 의료 기구, 군사용 기기 그 외에도 너무 많아서 다 쓸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등록 상표인 벨크로(velcro)는 우단(velvet)과 코바늘 뜨개질(crochet)에서 앞글자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 갈고리와 고리식 테이프는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그 생상은 손으로 직접 만들어 매우 더디었다. 고리 테이프의 기계생산은 비교적 용이했으나 갈고리 테이프의 기계생산은 처음에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시스템을 실용화하는 해결법으로는 우선 고리를 기계로 만들고 그것의 끝을 잘라 갈고리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처음 매직테이프가 시장에 나온 이후로 지금까지 많이 개량되었다. 갈고리와 고리에 새 소재를 쓰면서 품질향상이 도모되었다. 먼저 갈고리와 고리를 만드는 나일론 필라멘트를 굵게 하고, 그리고 나일론에 폴리에스테르를 섞어서 더욱 강하게 했다. 자외선이나 화학약품 또는 습기에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순수 폴리에스테르 테이프가 사용되었다. 항공기가 우주선용의 매직테이프로서의 지금은 섭씨 약 430도의 고온에서도 견딜 수 있는 강철이나 우주시대용 합성직물도 사용되고 있다. 우주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매직테이프 중에는 순수한 산소 속에서도 타지 않는 것도 있다. 숲속을 걸어가면서 옷에 도꼬마리가 달라붙어서 난처한 경험을 한 사람이 무척 많을 것이다. 그것이 왜 그러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봄으로써 이 자연의 오묘함을 응용하여 수백만 수천만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낸 조지 드메스트랄에게 우리는 모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아이보리 비누
수없이 많은 화장비누 중에서 독특한 것은 아이보리 비누로서 이 비누는 물에 떠오른다. 이 독특한 비누의 개발은 아주 우연하게 발생하였다. 1879년 주의력이 약간 산만한 작업원이 점심시간 중에도 비누 가마의 교반기를 작동시킨 채 방치해 두었기 때문에 공기가 많이 들어가 비누의 거품이 너무 많이 일고 말았다. 제작회사인 프록터 앤드 겜블(P&G) 사는 처음에 이것을 전부 버리려고 했으나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제품으로 만들어 판매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수요자들로부터 이 물에 뜨는 비누를 더 구하고 싶다고 편지가 쇄도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것을 판매촉진의 수단으로 간파한 하리 프록터는 그 즉시 물에 뜨는 이 새로운 비누를 빨래는 물론 목욕에도 쓸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는 비누덩이에 홈을 넣어 두쪽으로 쪼개기 쉽도록 했다. 그리고 당시 평판이 높았던 고가의 수입비누 3종류와 비교하여 P&G사의 비누가 가장 불순물이 적다는 분석결과가 나오자 '순도 99.44%'라는 광고를 냈다. 그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아이보리(ivory)라는 이름은 하리 프록터가 어느 일요일, 교회에서 구약성서 시편 제45편에 나오는 '상아의 궁전'(ivory palaces)을 읽는 중에 생각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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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천수를 다하고 부귀를 누린 사람으로 손꼽히는 소세양
소세양(1486-1562)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언겸, 호는 양곡이며 도사 소자파의 아들이다. 중종 4년(150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독서당에 들어갔다. 정언으로 임금을 알현하고 모시면서 현덕왕후의 위호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청하였는데, 말씨가 의분에 차 있으므로 즉시 중종의 윤허를 받기도 하였다.
신광한, 정사룡과는 같은 시기의 인물이었으며, 이행이 소세양을 가장 칭찬하고 마음을 터놓았다. 그가 여러 번 임금에게 아뢰었다.
"소세양은 당연히 대제학이 되어야 할 인재인데 하위직에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통정대부에서 자헌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행이 주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소세양이 부모를 봉양하려고 청원하여 홍주목사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한 지 몇 달이 채 안 되어 이행이 또 아뢰었다.
"문장이 뛰어난 인재를 외직에서 근무하게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이 즉시 다시 불러들이도록 명하였다. 벼슬은 판중 추부사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필법은 모두 당세에 이름이 났다.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 맑고 한가한 복을 누린 지 20년에 이르르니, 근세에 글 잘하는 사람 치고 천수를 다하고 부귀를 누린 이로 그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 소세양이 우찬성이었을 때에 동료였던 상진은 오히려 벼슬이 소세양보다 낮았었다. 그러다가 상징이 정승으로 임명됨에 이르러 학을 그린 두루마리를 가지고 소세양에게 시를 써 주기를 요청하자 소세양이 한 편의 절구를 써 주었다.
쓸쓸하고 외로운 그림자에 강가는 어둠이 깔리고 붉게 시든 여귀꽃은 양쪽 언덕을 음산하게 하네 부질없이 가을 바람을 향하여 옛 짝을 불러보건만 정처 없는 구름과 물 만겹으로 깊숙이 흘러간 줄 모르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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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화 일일지영
무궁화는 아침에 피어났다 저녁에 지는 꽃으로써 덧없는 상징이다. 세상 만사는 허무한 짓이어늘 어찌 환상 같은 애환에 얽매이랴 하는 뜻이다. 백간천의 시 '방언' 중의 싯귀.
'소나무는 천 년을 살지만 마침내 썩어지고 무궁화는 하루를 살지만 스스로 영화롭다. 어찌 세상에 연연하여 죽음을 근심하랴. 육신을 탓하여 속절없이 삶을 꺼리지도 말라.'
백낙천은 중당의 대표적 시인이요, 당의 대시인 이백이 간지 10년만에 태어났다. 또한 그는 두보가 간지 2년만에 태어난 셈이다.
그의 시는 당시의 세태를 반영하였고 정치의 난맥과 사회의 혼란을 풍자했으며 백성들의 고통에 동정산 것이 많았다. 동시에 감상적인 시도 많았으니 '장한가'며 '비파행'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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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1. 보리수를 닮은 사람들
유사무승 (절은 있으나 스님이 없음)
남들은 나를 돈키호테 스님, 싸움쟁이 스님이라 부른다.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어야 중노릇 잘하고 절집에서도 잘살 텐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스님을 무당이나 박수 정도로 아는 싸가지없는 신도나 절을 주식회사쯤으로 아는 정신나간 스님들에게는 내가 목의 가시인 모양이다. 나는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다. 툭하면 면허증을 내밀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동방의 왼쪽팔을 쓰윽 걷어올린다.
"이 정도면 되겠소?"
연비(불탈 연, 팔 비)불법에 대한 믿음과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상징으로 팔뚝의 일부나 손가락을 불에 태우는 것)자국 세 개, 좌충우돌 스님, 갈팡질팡 스님답게. 그러나 연비자국 세 개로 불보(부처 불, 보배 보)라는 사찰 출입허가가 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 중이 승복을 입었으면 됐지 쯩은 제기랄, 신도들한테 공갈 사기로 부처님되겠다는 데도 면허증이 있어야 하나?" 나의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다.
주머니 속에 승려증, 주민등록증이 없는 건 아니다. 내 심사가 뒤틀린 것이다. 겉보기는 내가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다. 대한민국에는 무슨 종단이 그렇게 많은지 집도 절도 종단도 없는 부유잡승인 나로서는 곱게 나섰다가 거리의 찬이슬 신세가 되기 싫어서만이 아니라 오기가 뻗치는 거였다. 나를 '싸이코 승려'니, '정신병자 승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객(손 객)과 음식은 그냥 두면 썩습니다."
궤변을 한참 늘어 놓으면 그제서야 나의 설에 못마땅해 하며 객실을 안내한다. 그러나 이미 아는 스님들은 안다. 나의 동분서주 지랄발광 같은 운수행각, 그 떠돌이중 하면서도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다행한 소문 덕택으로 차디찬 방 한쪽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노라면 서글프다. 언제부터 절집이 이리도 삭막해졌냐는 것이다. 스님들이 설쳐대는 보살들의 꼬락서니에 눈치를 보며 사는 세상이라니 참 꼴같지 않다. 그러나 나의 독설, 반항, 자기혐오도 끝장나던 날이 있었다. 그날도 만행중이었다.
근 두 시간여를 걸어 암자에 다다르니 게딱지만한 토굴이 나왔다.
"하룻밤만 묵어가겠습니다."
내가 막 서두를 꺼내는데 보살이 또 어쩌구저쩌구 하며 퇴짜를 놓을 기미다. 나는 비지땀을 흘리면서 말했는데 공양주보살인 듯한 이가 일언지하에 자르는 거였다.
"아, 글씨 안 된다니까요."
이런, 입에서 요상한 냄새를 팍팍 풍기는 보살님이 스님에게 호통을 진다. 나는 가가대소하였다. 어차피 밤은 깊었고, 더구나 산중에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판이라 속으로는 '이놈의 입장은 참 거지같구나. 콱 죽어 버릴까'하는 심정이었다.
"좋수다. 그렇지만 내 허기져서 그러니 보살님 먹다 남은 곡차나 오징어 뒷다리 같은 거 있으면 좀 내와 보슈."
걸망을 내려 놓고 봉당에 앉아 빗물과 땀이 짬뽕된 얼굴을 쓰윽 문질렀다. 그때 나는 토굴방 쪽에 다 떨어진 가사장삼을 수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은 노승을 보고 벌떡 일어나 가사장삼을 수했다.
"소란을 떨어 죄송합니다. 소승 혜범이옵니다."
내가 오체투지(절하는 법의 한 가지로 두 무릎을 끓은 다음 두 팔을 땅에 대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는 것)로 삼배를 올려도 노승은 꼼짝도 않는 거였다. 방에 호롱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곳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나는 노승이 대꾸가 없자 머리를 벅벅 긁었다.
"스님, 지나가는 객승이옵니다."
그러나 나는 겁을 먹고 말았다. 약간 정신이 나간 보살이 부처님을 법상에서 내려 방바닥에 두시고 가사장삼을 수해 놓은 거였다.
"망할놈의 중들, 그래 절은 있는데 절이 가난하고 볼품없다고 스님들을 모시려 해도 한 번 와 보고는 안 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을 모셨지."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비록 술에 취하기는 했어도 그 놀라운 신심에 한철 살아 주기로 하고 다시 부처님을 법상에 모시고 나니 보살님의 저녁공양(공양: 부처에게 음식물을 바치는 것 또는 스님들이 하루 세 끼 음식을 먹는 일) 짓는 연기가 비 내리는 산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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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2.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새 왕조 설립의 욕망이 부른 반원친명정책)
미묘한 동아시아 정세
14세기 중반 이후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는 내부분열과 한족의 저항으로 차츰 힘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몽고족의 위세에 눌려 신음하던 여러 종족들도 원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고려의 경우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옛 영토를 찾았으며, 원나라의 감시기구인 정동행성을 없애고, 원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거부했다. 여진족은 차츰 독립의 기세를 드러내며 자신의 세력권을 넓혀 갔다. 중국 한족은 곳곳에서 저항을 했으며, 원나라의 통치영역 속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세력의 지휘자들은 때때로 황제나 왕을 자칭했다. 1353년 고우에 근거지를 둔 장사성은 스스로 성왕이라 불렀으며, 1360년 한왕을 자칭하던 진우량은 마침내 자신을 황제라 불렀고, 1368년 오왕을 자칭하던 주원장도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명이라고 불렀다. 그 가운데 주원장의 세력은 장사성의 세력까지 항복을 받으면서 원나라를 북쪽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원나라를 북원이라 부르게 된다. 명나라는 1371년에 대륙의 서부지역을 차지한데 이어 요동지역까지 점령했음, 고려마저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들은 고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자신들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말의 징발을 요구했다. 1372 년에는 형식적으로 50 마리를 받아갔지만, 고려가 군사력을 늘리는 기미를 보이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1384년부터 매년 1천 마리에서 5천 마리에 이르는 말을 강제 징발하거나 수입해갔다. 명나라는 고려뿐만 아니라 여진족으로부터 많은 말을 징발해갔으며, 말과 함께 많은 양의 금과 은 및 가는 베를 받아감으로써, 고려와 여진의 군사적 행동을 예방하려고 했다. 원나라를 북쪽으로 내몰고 대륙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명나라의 군사력은 매우 강해졌지만, 명나라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명나라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대륙 남부의 경제적 어려움이 전혀 치유되지 못했던 것이다. 계속되는 흉작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내부기반이 불안했으며, 이에 따라 자주 모반이 일어났다. 1380년에 있었던 호유용의 반란이나 1385년에 일어난 반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또한 명나라의 주요한 경제기반인 해변지역에서는 왜구가 대규모로 출몰했고, 저항하는 세력에게 항복을 받기 위해 경제적 사정에 걸맞지 않은 군사비 지출을 감당해야만 했다.
고려의 경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해마다 왜구들이 침입해왔고 그들을 물리치느라 군사력을 증강해야 했으며, 홍건적의 침입과 내부의 반란까지 겹쳐 경제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1378 년에는 정부가 강제적으로 물가를 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경제사정이 그런 형편이나 백성들이 들고일어나는 일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1382 년에는 영해와 합천에서, 1383 년에는 평창과 영주 및 순흥(지금의 풍기) 일대에서 각각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정부는 지방세를 더 추징하기 위해 국가기관을 설치하기도 했다. 심지어 1387년에는 사전에서 소출량의 절반을 세금으로 거두어 군수비로 충당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어느 곳 가리지 않고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대륙에 대한 패권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실제로 이 시기의 정세는 군사력과 교섭력이 아니면 어떤 것도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명나라와 원나라의 대결, 그 대결에 고려와 여진 및 왜구가 개입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세력구도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남조와 북조로 나뉘어 끊임없는 전투를 벌이던 일본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고려에서는 외교노선상의 분열이 일어났다.
'구친원론'과 '신친원론'
1372 년 11월 나하추가 이끄는 세력이 요동의 우가장을 공격했고, 이 공격으로 말미암아 명나라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요동을 차지한 지 1 년이 지나지 않아 그런 공격을 받았으므로 요동의 민심은 흔들렸고, 명나라에 대한 신뢰도 떨어졌다. 그런데 명나라는 나하추의 공격이 고려의 부추김을 받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명나라는 외교문서를 보내 고려를 비난하면서 이 추측을 공식적인 외교문제로 발전시켰다. 이듬해 그들은 고려와 국가사절이 요동에 드나드는 것을 막았으며, 나아가 고려를 위압적으로 복종시키려고 했다. 요동을 통과하려던 두 차례의 외교사절이 모두 봉쇄되자, 고려는 명나라의 속뜻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명나라와 친선관계를 맺는 것이 과연 국내외 정국을 안정시키는 합리적인 방편인지에 대해서도 돌이켜 생각하게 되었다. 즉 고려에 대한 명나라의 외교방향이 장기적 우호관계인지 그렇지 않으면 고려를 고립시키고 무력화시켜 무너뜨릴 시간적 여유를 벌기 위한 전술적 우호관계인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1374 년 명나라의 사신이 찾아와 고려가 기병을 키우지 못하도록 견제할 속셈으로 탐라(제주) 말 2천 마리를 요구했다. 그런데 탐라에서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고려 정부는 최영을 파견하여 탐라를 치게 하는 한편, 명나라의 행위를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처럼 고려는 차츰 명나라를 경계하게 되었고, 명나라에 대한 외교적 입장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원나라와 동맹해서 명나라와 대항해야 한다는 친원론도 다시 제기되었고, 명나라와 친교를 맺어 원나라를 몰아냄으로써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여 불안정한 고려 정세를 안정시키자는 친명론도 줄기차게 제기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환간인 최만생이 철저한 친명파인 공민왕을 살해했다. 역사적 기록에야 공민왕의 변태행각을 둘러싸고 이해관계가 얽혀 살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공민왕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대립을 감안할 때 공민왕은 세력투쟁의 희생양일 수도 있다. 누구나 공민왕이 죽기 열흘 전에 친원파의 모반이 발각되어 그 주모자들 일부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개경 중심의 중도파는 우를 임금으로 세우려 했으며, 다른 친원파는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심왕 탈탈불화를 추대하려 했고, 친명파는 제3의 왕족을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이인임 일파가 내세운 우가 결국 임금이 되었으며, 새로운 임금의 등장과 함께 외교정책에 대한 논의가 한층 활발해졌다. 중도파인 이인임이 실권을 잡으면서 고려의 외교정책은 이중성을 띠었다. 고려는 공민왕의 죽음과 관련된 외교사절을 명나라에 보내는 한편, 원나라 나하추가 보낸 사절을 영접하고 단절된 외교관계를 회복했다. 이런 이중성에 대해 정도전을 비롯한 친명파는 강경하게 반발했다. 또 고려의 이중외교로 말미암아 대륙에 대한 확고한 패권을 잡지 못한 명나라도 끊임없이 고려를 압박했다. 명나라는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외교사절을 구금하기도 했으며, 말을 비롯해서 무리한 조공품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고려 정부는 이중외교라는 외줄타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억압은 고려의 경제기반과 민중생존을 위협했다. 명나라의 무리한 조공 요구를 들어주는 과정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으며, 사회적 분위기는 명나라에 대해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영을 비롯한 무인들은 '신친원론'을 제기했다. 이 주장의 요지는 원나라와 전술적으로 제휴한 뒤 명나라와 일전을 벌임으로써 북방진출의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이 주장은 원나라에 대한 굴종을 전제하는 그 이전의 친원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이성계를 비롯한 친명파도 이 주장을 전면적으로 반박할 수 없게 되었다. 신친원론의 지도자인 최영은 서서히 전쟁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1387 년 그는 사전 소출량의 절반을 세금으로 거두는 임시조세법을 실시함으로써 군비확충을 서두르는 한편, 여러 곳에 있던 둔전병을 전투태세로 돌입시켰다. 그리고 명나라가 요동을 평정한 뒤, 철령위 설치를 주장하며 철령 이북지역을 빼앗으려고 하자, 고려는 드디어 명나라와의 전쟁을 결심하기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다음해 정월에는 이성계와 함께 이인임 일파를 몰아내어 민중의 사기를 높이는 한편, 관료들의 복장을 기마종족풍으로 바꾸어 명나라와의 전쟁을 위한 정신무장을 가다듬게 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친원론을 그 이전의 친원론과 마찬가지로 대토지소유자의 보수적인 외교정책으로 이해하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친명론이 정세의 안정을 바라는 보수적인 외교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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