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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97 호
단기 4340. 11. 6 (음력 9. 27)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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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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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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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력은 살아 남는 능력뿐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능력에서도 드러난다. / F.스코트 피츠제럴드(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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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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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남을 통해 스스로의 선악을 찾으라
말을 타고 길을 갈 때 경치는 그곳에 객관적으로 놓여 있는 것이지만, 사물에 관해 시를 읊는 것은 사람의 몸과 마음이 함께 관계하는 일로서, 여기서도 어찌 정성을 첫째로 쳐야 하는 원칙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독서할 때의 책을 읽는 것이나 외출할 때 옷을 입는 것에만 주력하라는 것과 비교해도 심한 차이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동쪽을 바라보면서 그쪽으로만 고개를 돌렸을 때, 시선이 좇아가지 않더라도 마음은 이미 새가 앞에 날아가는 것을 헤아리는 경우이다. 사람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다른 곳을 따라 날아가고 달려가게 된다. 이것은 '고개를 돌린 채 애써 새를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니, 몸은 이곳에 있으면서 마음은 저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뜻한다. 사물이 통과하여 비치는 거울은 마치 불이 하늘 가운데에 밝게 탐으로써 만상이 두루 비치는 것과 같고, 사물을 좇아 비추는 것은 마치 햇빛이 일정한 사물을 좇아 내리비추는 것, 예컨대 응달진 벼랑의 뒷면이나 오두막집의 아랫부분으로 스며드는 것과 같다. 이들 두 가지 말은 매우 비슷한 것 같지만 실상은 크게 다른 것이다. 자신에게서 구하는 것과 남이 나에게서 구하는 것은 군자와 소인의 마음씀씀이 구분되는 가름길이다. 남의 선악을 보고 스스로의 선악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군자의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구하면서 허물을 고치고 착한 데로 나아가며, 결점을 살펴서 고치는 곳에 어찌 사사로움이 용납되겠는가?
남들을 비평하는 사람들의 단점은 자기 스스로를 닦는 데 힘쓰지 않고 남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데에 있다. 이것은 그 마음이 바깥으로 치달을 뿐 스스로를 다스리도록 하는 데에는 소홀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닦아 스스로의 시비를 판단하는 사람들은 이같은 사람들과는 그 마음씀이 결코 같지 않은 것이다. 모름지기 우리의 마음이 그 바름을 얻었을 때는 하늘과 아버지, 땅과 어머니가 같고 만민이 형제자매처럼 되며 만물과 내가 하나로 된다. 모든 것이 뒤섞여 용납되며 측은하고 근심스러워지면서 안과 밖,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없는 절실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부모를 섬기는 것과 하늘을 섬기는 것이 진실로 하나의 이치로 통한다. 눈을 들면 보이는 것은 온통 이 일 아닌 것이 없고, 숨 한 번 쉴 동안의 정지도 용납되지 않으면서 뜻과 생각이 분명해짐으로써 비로소 이와 같은 것이 억지로 꾸며댄 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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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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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3장 사회 및 역사 철학
인간의 소외, 어디에서 오는가 - 서도식
소외는 우리가 느끼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객관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상황이 사람들의 의식에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인가, 혹은 각 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심리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인가?
현대에 확대되고 심화된 소외 현상
우리는 일상적으로 무언가로부터 고립되어 있을 때 소외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를 소외시킨 그 무언가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하더라도 친구들이 나를 소외시켰다고 이야기하지 돈이 그렇게 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즉, 나를 소외시킨 주범은 친구들, 정확히 말하면 친구들의 나쁜 품성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소외된 사람들, 이를테면 가진 것이 없다거나 피부색이 다르다거나 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버림받은 사람들도 결국은 그들을 버린 사람들이 나빠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소외의 주범은 다른 곳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내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면 돈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친구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친구 관계가 돈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냉대 받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가부장적 권위를 정당시하는 사회 제도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인간 관계를 파고들면 그 속에는 무언가 인간 관계가 아닌 어떤 것이 인간 관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 결과 소외 문제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소외의 주범은 인간이 아닌 어떤 비인간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비인간적인 관계는 자연의 산물도 아니요, 신이 부여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순전히 인간이 만든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간다. 예로부터 인간은 자연의 혜택을 있는 그대로 누려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개척하면서 살아왔다. 그 결과 과학 기술은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사회 조직과 정치 및 경제 제도, 사상 체계 등이 나타났으며, 이것들은 나름대로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것들이며, 인간의 삶을 위해 봉사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우리 인간이 산출한 모든 것들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것들은 인간의 손을 벗어나 인간에게 낯선 것이 되었으며, 스스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서 도리어 인간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자동화된 기계의 부속품이 되었고, 거대한 관료 조직의 원자가 되었으며, 스스로 하나의 상품이 되었고, 사상의 노예가 되었다. 인간이 산출한 것들이 인간의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이 그것들의 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현대 사회에서의 소외 문제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소외,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자기 소외란 '인간의 물질적, 정신적 활동에 의해 산출된 모든 것들이 인간에게 낯선 존재가 되어 도리어 인간을 지배하는 힘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의미를 지닌 소외 현상은 현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인간 관계에 걸쳐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소외는 이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든 많은 사람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노인이든 청년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되어 버렸다. 소외 문제는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닌,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가 된 것이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소외 현상들은 바로 그러한 보편적인 문제가 서로 다른 양상을 띠고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적 상황으로 존재하는 소외
지금까지 말한 대로 인간이 모든 비인간적인 것들에 의해 인간 관계가 지배되는 현상을 소외라고 한다면, 소외는 우리가 그렇게 느끼든 느끼지 않든 하나의 객관적 상황이요 사회적 사실이다. 사람들이 소외감을 가지는 것은 소외의 객관적 상황이 사람들의 의식에 반영되어서 나타난 결과이지 그것 자체가 소외를 유발하는 원인은 아니다. 현대 소외론의 고전적인 형태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이론과 이를 따르는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체로 이런 입장에 서 있다. 우선 이들에게는 하나의 분명한 역사 철학이 있다. 역사는 인간이 소외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소외된 상태를 거쳐 종국에는 소외를 극복한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소외 무제는 역사의 한 특수한 시기에 발생하는 사회적인 상황이며, 다가올 미래에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소외 논의는 그 성격상 실천적일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 이론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 소외를 야기하는 주범을 자본주의 경제 제도에서 찾는다. 이들에 따르면 소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버림받은 상태에 있는 노동자 계급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며, 소외의 극복 또한 이 계급들의 역사적 임무로 설정되어 있다. 현대 소외론의 효시가 된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은 바로 이 입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 대립하는 인간의 노동
루카치(G. Luckacs)에 따르면 사물화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으로 인간의 행위, 특히 인간의 노동이 자신에 대립하는 객관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즉, 사물화는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물 세계의 탄생을 의미하며, 인간의 노동이 사회의 객관적 법칙에 종속되어 거꾸로 그 법칙의 지배를 받는 대상으로 전락하는 현상이다. 루카치가 보는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생산이 전면적으로 관철되는 사회이다. 상품은 인간 노동의 산물이 교환 과정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며, 그것의 가치는 인간의 욕구를 직접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값으로 다른 물건과 교환되느냐에 달려 있다. 상품이 갖는 이러한 추상적인 성격은 인간의 노동에도 반영되어 인간 노동을 둘로 쪼개 버린다. 원래 인간의 노동은 스스로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생산물을 만드는 활동이었으나, 이제는 오로지 교환만을 위해 상품을 생산하는 활동이 되었다. 인간 개개인은 무엇을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만큼의 가치를 갖는 상품을 생산하느냐에 따라 서로 구별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상품화요, 인간 관계가 사물 관계로 전락한 것이며, 결국 주체성의 상실이요 자기 소외이다. 루카치는 마르크스를 따라 소외 극복의 방안으로 여전히 노동자 계급의 각성과 실천을 모색한다. 모든 사람의 의식이 사물화된다는 주장은 사실상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 의식의 사물화 현상을 경고하는 것이며, 나아가 노동자 계급이 계급 의식을 일깨워 사물화 현상을 파괴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소외가 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는 루카치처럼 소외의 원천을 자본주의자 사회의 경제 법칙에만 국한시키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 아도르노(T.W. Adorno), 마르쿠제(H. Marcuse) 등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 부류인 비판 이론가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소외라는 용어를 현대 사회에 유행시킨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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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금실
본뜻 : 금실은 본래 거문고와 비파를 뜻하는 금슬이 원말이다. 거문고와 비파 소리의 어울림이 아주 좋다는 데서 온 말이다.
바뀐 뜻 : 금실은 본래 '금실지락'의 준말로서, 부부 사이의 다정하고 화목한 즐거움, 부부간의 애정을 뜻하는 말이다.
"보기글" -그 두 노인네는 어째 파파노인이 될 때까지 그렇게 부부 금실이 좋은지 몰라 -금실 좋기로 말하면야 감히 누가 우리 부부를 따를 수 있으리오
칼미크말
카스피해 서쪽에 칼미크공화국이 있다. 러시아연방국이다. 지금 이곳 대통령은 한때 우리나라 한 자동차 회사의 러시아지역 판매원으로 활동해 큰돈을 번 사람이다. 대통령이 된 뒤 서울시와 경제협력 협정을 맺고 ‘서울타운’이라는 경제자유구역 설치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17세기 초 서부 몽골에서 온 몽골계의 오이라트족 30여만명이 살고 있다. 이들을 칼미크족이라 하는데, 본디 ‘칼미크’란 터키말로 ‘남아 있는 사람’을 뜻한다. 곧, 이들은 이곳에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눌러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쓰는 말이 몽골어파의 하나인 ‘칼미크말’이다.
현재 칼미크말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사용 인구가 급격히 줄어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러시아말을 쓴다. 말을 지켜야 민족을 지킬 수 있음을 알지만 현실은 어렵다. 다른 문제는 문법이 점차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칼미크말은 우리말 ‘나는 책을 읽는다’처럼 ‘주어-목적어-서술어’ 차례로 서술어가 맨 뒤에 온다. 그런데 요즘은 러시아말 간섭을 받아 주어 다음에 서술어가 바로 오는 어순을 흔히 쓴다.
최근 일륨지노프 대통령은 중국 정부에다 중국에 사는 오이라트족 1만명을 이민으로 보내 달라고 이색적인 요청을 했다. 이들이 이주해 오면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서 같은 민족의 영입을 통해 사라져가는 모국어를 되살리려는 한 젊은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책보따리·책보퉁이
지금은 초등학생이나 대학생 가릴 것 없이 ‘책가방’을 메고 다니지만, 1970년대 이전만 해도 국민학생들은 ‘책보’를 들거나 메고 다녔다. 중학생이 되어 제복을 입게 되면서 비로소 ‘책가방’을 들고 다녔다. 넉넉한 집 아이들은 멜빵가방(란도셀, ransel)을 메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책보’였다. 책보는 ‘책보자기’, ‘책보따리’, ‘책보퉁이’로도 불렸는데, 국어사전에는 ‘책보’와 ‘책보자기’만 동의어로 올랐고, ‘책보따리’와 ‘책보퉁이’는 수록되지 않았다.
“야, 빨리 책보따리 싸 가지구 나와.”(박태순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 “며칠 전에 만석이가 책보따리를 챙겨 들고 나가면서 일러 주던 말이다.”(김춘복 〈쌈짓골〉) “나는 … 방으로 들어가서 책보퉁이를 내던지고, 서랍에서 도장을 꺼내 넣고 다시 나왔다.”(염상섭 〈만세전〉) “아무도 책보퉁이를 들고 있지 않아서 몸과 마음이 모두 가벼웠다.”(이상문 〈황색인〉)
‘책보’와 ‘책보자기’는 ‘책을 싸는 보자기’를, ‘책보따리’와 ‘책보퉁이’는 ‘책을 보자기에 싸서 꾸린 뭉치’를 말하는 것이어서 뜻이 다르다. 따라서 ‘책보(책보자기)를 싸다’, ‘책보(보자기)를 풀다’ 등으로 쓰고, ‘책보따리(책보퉁이)를 메다’, ‘책보따리(책보퉁이)를 들다’ 등으로 구분해서 써야 하는데, 이 낱말들이 쓰인 용례를 보면 대부분 ‘책보따리’(책보퉁이)의 뜻으로 구분없이 쓰고 있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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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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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3) 과연 위기를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진평)
진평이 주색에 빠져 있는 이유는?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진평은 여전히 '꾀주머니'로서 그 역할을 다하며 유방을 보좌했다. 특히 유방이 흉노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백등산에서 포위되어 매우 위태로웠을 때 진평의 계교가 빛을 발했다. 진평은 그때 화공에게 절세의 미녀도를 그리게 하고 사신을 시켜 선물과 함께 그 미녀도를 묵특선우의 부인에게 보내게 했다. 그러면서, "지금 한나라 황제께서는 어려움에 처해 이 절세의 미녀를 선우께 몰래 바치고자 하십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선우의 부인은 그 미녀를 선우에게 바칠 경우 그 미녀에게 사랑을 빼앗길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선우에게 졸랐다.
"지금 우리가 한나라 땅을 얻는다고 해도 거기에서 살 수는 없잖아요. 서로 괴롭히면서 살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이에 묵특선우는 드디어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그리하여 유방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진평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위기에 빠진 유방을 신출귀몰한 꾀를 써서 구해 냈다. 그래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큰 벼슬을 받았으며, 승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데 유방이 죽고 난 후 천하는 여씨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진평은 밤낮으로 주색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평소부터 진평을 좋지 않게 보던 여후의 여동생인 여수가 여후를 찾아왔다. 옛날 유방이 여수의 남편인 번쾌를 사로잡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에 진평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평이라는 자가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정치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매일같이 주색에만 빠져 있답니다. 그 자를 처벌하세요."
이 소식을 들은 진평은 그 뒤 더욱 주색에 빠지는 것이었다. 여후는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얼굴에 웃음을 띄었다. 그리고는 진평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아녀자의 말은 듣지 말라는 속담이 있지요. 그대는 어떻게 하면 나하고 잘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바라오. 여수의 말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소."
그 후 여후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여씨 일족을 등용시켰고, 진평도 아무런 불평을 말하지 않았다.
재상과 장군이 힘을 합하면
그러나 진평이 주색에 빠진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여씨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강성하지만, 그 권세는 오래 가지 못한다. 다만 지금은 납짝 엎드릴 때다.'
진평은 집에 틀어박혀 여씨의 권세를 물리칠 방안을 짜내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방의 정치 고문격이었던 육가라는 대신이 찾아왔다. 진평은 누가 온 사실조차 모른 채 생각에 골똘하고 있었다.
"승상 어른,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계십니까?" "아! 육가 선생이 오셨구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어른께서는 승상의 자리에 계시면서 신하로서는 더 이상의 바램이 없을 처지이십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계시다면 역시 여씨 일족의 전횡이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선생의 눈은 정확하시군요. 무슨 방도가 없겠는지요?" "선비란 원래 태평 시대에는 재상에게 기대하고, 난세를 당하면 장군에게 기대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재상과 장군이 힘을 합친다면 선비는 모두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나는 이것을 항상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지금 이 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재상으로는 당연히 승상 어른이 계시고, 장군으로는 역시 주발장군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발 장군은 저와 항상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인지라, 내가 속 마음을 드러낼 때도 그저 농담을 받아들이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승상 어른께 말씀드리는 것이니, 어른께서는 무엇보다도 주발 장군과 친교를 맺어 여시 일족에 대한 견제를 해내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자 육가는 여씨를 제압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얘기하였다. 원래 진평은 주발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옛날 진평이 유방에게 등용되어 장수들의 감찰을 수행할 때, 주발이 특히 불만을 터뜨린 장군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평은 여씨 일족을 누르기 위해 옛날의 감정을 털어 버리기로 하고, 즉시 육가의 말대로 주발을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또한 그의 생일에는 가무단까지 보내어 축하하였다. 주발 역시 진평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어갔다. 이렇게 하여 여씨 일족의 권세는 차츰 힘을 잃어갔다. 그러면서 진평은 육가에게 경비를 주어 조정 신하들을 끌어들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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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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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31장. 유기합성에 있어서의 붕소와 인
1979년도 노벨화학상의 헌사에는 "유기합성의 중요한 시약인 붕소화합물 및 인화합물의 개발에 대하여 각각 인디아나 주 웨스트 라피예트의 허버트 C. 브라운 교수와 하이델베라크대학의 게오르그 비티히 교수에게 반반씩을 ..." 이와 같이 쓰여 있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경력을 가진 이 두사람은 과학계에 대한 기여도가 비슷하다해서 노벨상을 나누어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 이 수상에 이르는 과정도 세렌디피티의 은혜를 나누어 받았다.
수소붕소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브라운은 두 살 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젊은 시절은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보내면서 교육을 받았다. 1935년에 라이트 전문대학을 제1기생으로 졸업하고, 1936년에 시카고대학의 2년 과정을 1년만에 수료하고 졸업했다. 세렌디피티와 초름 조우했을 떄 브라운 자신은 전혀 몰랐었다. 졸업 축하로 그의 여자 친구(나중에 아내가 됨)가 '붕소와 규소의 수소화물'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이 책은 허버트 브라운이 전문가로서의 생애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사실 그녀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책방에 있는 화학책 중에서 가장 값이 쌌으며 아직 대공황의 와중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래의 브라운 부인은 이 선물에 '나의 장래 노벨상 수상자에게'라고 적어 놓았다고 한다. 브라운은 자신의 이름에 H.C.B.(원소기소인 수소, 탄소, 붕소)라는 이니셜이 선택된 것은 부모님의 훌륭한 선견지명 때문이라 술회했다. 브라운은 붕소의 화학에 대한 강한 흥미를 발전시켜 시카고대학의 슐레징거 교수 밑에서 대학원 과정으로 이 분야를 연구하여 1938년에 학위를 받았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국방총성의 원조를 받아 박사 연구원으로 슐레징거 교수 밑에서 붕소와 우라늄의 화합물 연구를 계속했다. 이 연구에서 그들은 수소화붕소의 르튬과 나트륨의 새로운 실용적인 합성법을 개발했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웨인주립대학의 교수로 4년간 제임한 후, 브라운은 무기화학 교수로서 퍼듀대학에 부임하였으며, 거기에서도 붕소의 화합물에 대한 흥미를 계속 가지고 있었다. 수소화붕소나트륨의 연구는 전쟁 중에 정부와의 계약하에 계속되었으며, 그 연구 결과는 기밀이었기 때문에 전후에도 수년간 발표할 수가 없었다. 한편 수소화알루미늄리튬은 전후까지 연구가 계속되었으며, 이와 같은 제약은 받지 않았다. 그것이 처음 발표되자 화학계의 커다란 관심을 끌게 되었다. 브라운은 수소화알루미늄리튬이 먼저 알려져 버렸기 때문에 수소화붕소나트륨을 소홀히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950년대에 퍼듀대학에서 이 화합물의 환원력에 미치는 용매, 치환기, 금속 이온 등의 영향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계획에 착수했다. 수소화붕소나트륨은 염화알루미늄에 의해서 촉매되고(반응속도가 빨라진다) 안식향산에틸이라든가 스테아린산에틸과 같은 '에스텔'이라고 알려져 있는 화합물군의 탄소-산소 이중결합을 환원시킨다(수소가 첨가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두 가지 에스텔은 모두 같은 양의 수소화붕소나트륨으로부터 정확하게 두 가지 수소원자를 받는 데에 대하여 올레인산에틸에 관해서 같은 실험을 해보았더니 이 에스텔에 의해서 소비되는 수소화붕소나트륨의 양은 수소원자 두 개분보다 상당히 많았다.
브라운 교수와 함께 이 실험을 하고 있던 수버 라오 박사는 브라운 교수의 지도하에 1955년 퍼듀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계속하여 공동연구자로서 유임했었다. 브라운이 올레인산에틸의 이상한 거동을 알았을 때, 처음에는 올레인산에틸의 실험재료 중의 불순물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브라운은 올레인산에틸의 실험재료를 주의깊게 정제하여 순수한 재료를 사용해서 다시 한번 실험 중의 불순물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실험을 주의깊게 반복해 보면 스테아린산에틸은 2개 분량의 수소화붕소나트륨과 반응하는 데 대하여 올레인산에틸은 실제로는 3개의 분량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브라운은 이것이 올레인산염 에틸분자와 스테아린산에틸에 공통으로 존재하고 있는 탄소-산소의 이중결합 이외의 부분이 수소화붕소나트륨과 반응(소비)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았다. 올레인산에틸과 스테아린산에틸의 차이는 전자에 존재하는 탄소-탄소의 2중결합이 후자에는 없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이 결합이 여분의 수소화붕소나트륨의 반응상대라고 인식했으나 그것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다음 단계는 탄소-탄소의 2중결합을 가지고 있는 분자와 가지고 있지 않는 분자(단순 알켄)가 수소화붕소나트륨과 염화알루미늄의 혼합물과 반응하는지 어떤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반응이 일어났는데 이 반응은 그 이전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자로서 정확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결론을 내려야 했다. 브라운은 이 반응이 수소화붕소나트륨과 염화알루미늄에서 생긴 다이보레인(diborane)을 중간체로 함유하고 있으며, 이 다이보레인이 2중결합에 더해져서 유기수소화붕소(organoborane)라는 생성물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알켄에 다이보레인을 첨가하는 것은 임 알려져 있었다. 이 반응은 어떤 분자에 대한 수소와 붕소의 첨가를 포함함으로써 수소붕소화(hydroboration)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전의 연구로는 수소붕소화는 대단히 엄격한 실험 조건에서만, 더구나 비실용적인 정도의 진행이었다. 온화한 조건에서 좋은 수율로 수소붕소화를 진행하는 데 성공한 것은 염화알루니늄의 촉매작용 때문일 것이라고 브라운은 생각했다. 브라운과 수버 라오는 에테르용액(그들이 사용한 에테르는 마취제가 되는 디에칠 에테르가 아니고 휘발성이 없는 시판하는 용매의 일종이었다) 속에서 온화한 조건하에서 수소화붕소나트륨과 염화알루미늄에서 다이보레인을 생성하여 그것이 단순한 알켄이 더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브라운은 이 새로운 실용적인 수소붕소화법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이 성공은 염화알루미늄의 촉매작용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므로 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실험을 하기고 했다. 즉 에테르용액 중 다이보레인과 알켄에서 염화알루미늄을 빼고 반응시키는 실험이었다. 놀랍게도 수소붕소화는 염화알루미늄 없이도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다. 그 후의 실험 결과 수소붕소화의 성공의 비밀은 우연히 사용했던 그 에테르 용매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브라운 교수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이 수소붕소화를 신속, 간편하고 일반적인 유기붕소화합물의 합성법으로 계속 발전시켰다. 일단 유기붕소화합물을 용이하게 합성할 수 있게 되자 이것들은 수많은 귀중한 유기화합물(그 대부분은 붕소를 이미 함유하고 있지는 않지만)의 합성중간체로서 매우 유용한 것이 되었다. 수소붕소화의 유용성은 브라운이 받은 노밸상에 의해서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브라운이 '거대한 미지의 대륙'이라고 하는 수소붕소화의 세계를 세렌디피티적 발견에 의해서 해택을 받은 세계의 화학자들의 서적, 총설, 연구 논문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브라운의 발견은 복잡한 유기분자만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는 쉽게 만들 수 없는 지극히 간단한 분자의 합성도 가능하게 했다. 이를테면 어떤 약국에서든지 볼 수 있는 소독용 알콜의 주성분인 이소프로필알콜(2-프로파놀)은 석유를 기초로한 출발원료인 프로필렌에서 간단하게 또한 염가로 제조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이성체인 노르멀프로필알콜(1-프로파놀)은 마르코프니코프의 법칙에 의한 원리 때문에 간편한 방법으로는 만들 수 없다. 그런데 브라운의 수소붕소화법을 사용하면 이 노르멀 프로필알콜은 프로필렌으로부터 '역 마르코프니코프'라는 단계를 포함한 방법에 의해서 만들 수 있으며, 이 방법은 현재 어떤 기초 유기화학의 교과서에도 쓰여져 있다.
- 브라운은 수소화붕소나트륨에 관해서 또 하나의 세렌디피티적 발견을 보고했다. 제2차세계대전 중 미국 육군통신대는 야외에서의 실용적인 수소가스 발생원을 찾고 있었다. 슐레징거와 브라운이 수소화붕소나트륨에서 수소가스를 만드는 방범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그들은 순수한 수소화붕소나트륨을 제조하는 방법을 개발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목적의 실험 중에 브라운은 수소화붕소나트륨을 정제하는 방법으로 지극히 보통의 용매인 아세톤에 의한 추출을 시도했다. 수소화붕소나트륨은 발열하면서 아세톤을 녹였는데 그 용액을 조사해 보니 아세톤이 이소프로필알콜로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해서 알데히드와 케톤(아세톤은 케톤의 일종이다)을 수소화붕소나트륨과 반응시켜서 알콜로 바꾸는 매우 유용하고 일반적인 방법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하자 수소화붕소나트륨을 야외에서 사용하여 수소를 발생시키는 방법은 개발되지 않았으나 알데히드나 케톤과 같은 기능기관을 수소화붕소나트륨으로 환원하는 반응의 발견은 종래 유기화학자가 이와 같은 목적에 사용해 온 방법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이 화합물은 전쟁 중 연구 명령의 급선무하에 개발되어 나중에는 제약 공업의 주된 응용의 장을 차지하게 된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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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남자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고 중종반정을 도모한 성희안
성희안(1461-1513)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우옹, 호는 인재이다. 판관이었던 아버지 성찬이 덕천군 이후생의 딸에게 장가들어 희안을 낳았다. 그의 어머니가 희안을 낳을 무렵 꿈에 신인이 와서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말하였다.
"이 지팡이를 짚고 다녀 너의 집안을 번창하게 하라"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 태어난 성희안은 20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종 16년(1485) 21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2년 뒤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하면서 동생 희옹과 같이 산 속에서 마를 캐어 아침, 저녁의 제물로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피곤해서 동생과 함께 바위 위에서 졸고 있었는데, 꿈에 그의 아버지가 나타나 도적이 온다고 소리치므로 깜짝 놀라 깨어 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희안이 즉시 손을 휘두르며 돌을 던져 호랑이를 쫓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효성에 감동되어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성종이 그를 불러다 위로하고 새매를 내려 주었다.
"너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지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수 없을 것 같기에 이를 특별히 내려 주니 사냥하는 도구로 삼으라"
희안이 임금의 은총을 받으면 항상 골수에 새겨 두고 목숨을 바쳐 충성하기로 다짐하였다. 연산군이 양화도의 망원정에서 놀이할 때에 희안이 이조 참판으로 그 행차에 수행하였다. 연산군이 여러 신하들에게 시를 짓도록 명령하자 희안이 이렇게 지었다.
성상의 마음은 원래 맑은 물이 흐르는 강가의 경치를 좋아하지 않는다
연산군이 자신을 은근히 비난하며 풍자하는 내용이라고 하여 몹시 화를 내며 그의 벼슬을 파면하고 기용하지 않았다. 연산군의 음탕하고 포악함이 날로 더 심해져 종묘와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희안이 매우 분개하며 어지러운 정국을 안정시켜 질서가 있는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뜻이 있기는 하였지만, 함께 일을 계획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박원종이 무사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와 같이 도모하고 싶었으나 만에 하나 뜻이 같은 사이가 아니면 어쩌나 하고 그에게 말을 꺼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런데 우연히도 같은 동리에 사는 신윤무란 사람이 박원종과 매우 가까운 사이임을 알았다. 희안이 그 사람을 시켜 은밀한 뜻을 시험하게 하였더니 박원종이 옷깃을 떨치고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울분을 쌓아온 지 오래이다"
희안이 그제야 밤낮으로 원종의 집에 가서 통곡하며 말했다.
"남자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종묘와 사직이 위태롭게 된 꼴을 어찌 보기만 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들은 마침내 반정할 결심을 하였다. 이조 판서인 유순정이 당시에 인망이 있었고 그도 반정 거사에 참여할 뜻이 있음을 알고서 연산군 12년 9월 2일에 충성심으로 분기한 인사들이 앞장서서 임금을 폐위시켜 연산군으로 삼고, 지성대군을 추대하였다. 그가 곧 조선조 11대 임금 중종이다. 그 뒤 국가를 안정시킨 1등 공신으로 공훈명부에 기록되고 창산부원군에 봉하여졌다. 박원종, 유순정 등과 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시킨 뒤에 서로 번갈아 가며 임금을 보필하였으니 세상에서 일컫는 반정삼대신이다. 중종이 삼대신을 대우하기를 보통 신하들과 다르게 하여 조정에서 물러 나갈 경우는 그들을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문을 나간 뒤에야 도로 자리에 앉았다고 하는데, 삼대신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성희안이 노쇠하고 병이 들어 조정에서 물러나올 때에 매우 느린 걸음으로 문에 이르자 중종이 말하였다.
"정승은 성상께서 기립하여 계심을 모르십니까? 걸음걸이가 어찌 그리도 느립니까?"
성희안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늙은 것이 죽을 곳을 몰랐습니다. 옛날 한나라 때 곽씨 일족이 죽음을 당한 화가 곽광이 선제를 모시고 수레를 탄 시점에서 싹텄으니, 신하로서 임금이 두려워하는 위엄을 지니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잘 보전한 자는 없었습니다"
중종 2년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53세에 죽었다. 시호는 충정이고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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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파 산하제
나라는 망했건만 신하는 남아 있다는 것이니 당 나라때 시인 두 보의 '춘망'이라는 시의 첫 귀다. 두 보는 벼슬이 하고 싶은 욕망이 45세에야 이루어져 조그만 벼슬자리에 앉았다. 이제부터 안정된 생활이 이루어지나보다 했더니 난데없이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났다. 안 록산은 68만의 병력으로 남하하여 낙양을 함락, 스스로 대연황제라고 일컬었다. 장안도 위태로왔으니 현종황제를 비롯하여 관리며 귀족들이 시골로 피난하였다. 두보도 처자를 촌락으로 피난시키고 당시 현종의 태자로 시골에서 왕위에 오른 숙종을 섬기고자 떠났던 바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두보는 조로한데다가 벼슬도 낮았기에 목숨도 건지고 감시도 덜 받는 가운데 전화로 망가진 서울의 모습을 체험하게 되었다. 안록산은 본래 호인이었기에 호병들이 거드럭거리며 말을 몰고 다녀 부녀자는 공포에 떨고 왕손 공자들도 거지의 몰골을 하고 어정거렸다. 이 안록산의 반란은 그 후로 사사명 부자의 반란으로 번져 9년 동안이나 끌었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였던 당나라는 어지러울대로 어지럽혀지고 무사들은 멋대로 할거하였다. 두보는 남의 눈을 꺼리며 장안을 헤매는 동안 그 서글픈 풍정을 수많은 시로써 읊었는데 '춘망' 또한 그 중의 한 편이다.
'나라는 망했건만 산하는 남아 있고 성은 봄이라서 초목이 짙었구나. 세월의 변천을 느껴 꽃에는 눈물 뿌리고 이별을 원망하며 새를 보고서도 도적인가 싶어 놀란다. 전쟁의 횃불은 석 달이나 이어져 가족의 편지는 그지없이 소중하다. 센 머리를 긁으니 더욱 성글어져 있어 갓끈을 멜 비녀를 꽂기에도 어슬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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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1. 보리수를 닮은 사람들
낙타는 등에 왜 혹이 달렸을까?
내가 나를 알았을 때, 나는 있었다. 밥을 먹을 때 혹은 소화하고 배설을 할 때,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집안 식구들의 죽음으로 병듦과 고통, 늙고 죽음의 문제가 내게 왔을 때 나는 괴로워 신음해야만 했다. 나는 누구이며, 왜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가. 나에게 다가서는 세계는 과연 어떻게 된 것인가. 생명이 끊어지고 영혼이 육체에서 떠난 시신을 볼 때 슬펐다. 나는 왜 슬퍼야 하는가. 문득 나는 스스로의 물음에 숨이 찼고 헐떡거려야 했으며, 먼길을 떠나야만 했다. 거렁뱅이였다. 교복을 입고 있었던 중학교 2학년이었다. 그렇다고 학교를 빼먹고 거리를 방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이미 내게는 귀가해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없었다. 가족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해서 뿔뿔이 흩어졌고, 그 빚더미를 감당하지 못한 형들과 어머니는 경기도 광주, 그러니까 서울 변두리의 무허가로 지은 집들을 허물고 지금은 성남시가 된 단대동이라는 곳의 천막촌으로 이불보따리와 옷가지만 간단하게 들고 피난 아닌 유배의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던 것이다. 큰형님은 월부책 장사를 하며 많은 동생들과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했다. 나는 큰형의 많은 동생들 중의 하나였다. 나는 식구들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 물론 식구들도 나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버려야만 했다. 나의 먼 여행은 그렇게 밥숟갈 하나 덜기 위함이었고 역마살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나는 청량리역으로 갔고 입장권을 사서 무임승차를 했다. 두 정거장인가 혹은 세 정거장인가를 가서 역무원에게 무임승차라는 것이 발각되어 쫓겨났다. 그러나 어렸고, 또 교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파출소나 소년원으로 끌려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낡고 닳아빠진 학생증을 목숨과 같이 간직했다. 또래의 산동네 아이들로부터 이미 나는 가출에 대한 교육을 받은 셈이다. 만일 그 학생증 쪼가리가 없다면 너는 갱생원이나 복지원으로 끌려갈 터이니 비록 시효가 끝난 학생증이라도 너를 증명할 얼굴인 셈이니 잘 간수하라는 거였다. '만일에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살인과 도둑질 빼고는 비록 등록금 내지 못해 퇴학을 당했더라도 너의 담임선생님(그때 배문중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쳐 주시던 서건석 선생님, 후에 서문여고로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이 구해 줄 것이다'라는 말을 두 번 세 번 가슴에 새겼다. 첫 번째로 내가 간 곳은 숯불갈비집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주로 하는 일이란 풍로에 담긴 숯에 불을 붙여 손님들의 상에 올려놓는 거였다. 염천의 여름이었는데 어린 나는 땀을 많이 흘렸다. 그러나 낮은 문제가 아니었다. 밤이 무섭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나는 밤이 무서웠다. 첫날밤이었다. 내가 잠에서 깬 건 이상한 촉감 때문이었다. 숯불갈비집에는 남자 세 명이 있었다. 주방장과 주인, 그리고 주방보조로 우리는 그를 '아라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접시를 닦고 주방보조를 하던 그 아라이 형이 남색가였던 것이다. 그 형은 피곤해서 세상 모르고 자는 나의 옷을 벗겨 놓고 쓰다듬고 보듬고 해괴한 짓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불을 움켜잡고 방구석으로 숨었다. 그러나 나는 어렸다. 두들겨 맞았고 엉망진창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무작정 도망칠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로 가나. 날이 새자 나는 그 갈비집을 도망나왔다. 손에는 손님이 음식값으로 내놓았던 상 위의 돈, 이백 원을 움켜쥐고 말이다. 도둑놈이 되지 않으려고 나를 아껴 주던 누나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홀에서 일하던 누나는 내가 훔친 이백 원에다 고의춤에 손을 집어 넣더니 백 원짜리 세 장을 더 쥐어 주며 어서 가라고, 빨리 가라고 이곳은 네가 머물 곳이 아니라며 손을 내젓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고 나는 스님이 되었다. 그 누나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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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1. 실패한 고려 르네상스 (성리학 이후의 동아시아 사회는 중국적 세계질서가 지배하는 사회)
한 발 늦는 습관
정약용과 그의 동료 및 후계자들이 성리학을 개혁하는 새로운 사상을 제기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개혁하려고 할 때, 그 개혁보다 한 발 빨랐던 것은 서구 열강들과 일본 군국주의였다. 즉 사상의 내적 재정비와 자생적 성장보다 외세에 붙어온 외래사상의 한 발 빠르게 이 나라의 지성계를 강타한 것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문화적 진로는 갑작스레 뒤틀리고 나아가 삶의 양식도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걷잡을 수 없이 변화되었다. 그것이 바로 개항기의 이 나라 정세였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이미 그 이전에도 있었다. 성리학이 이 나라의 지성계를 강타한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일연이나 이규보, 금의나 이승휴 같은 지성인들이 했던 작업은 불교와 유교(훈고학) 중심의 사회를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유가 했던 것과 비슷하게 기마종족의 지나간 역사를 정리하고, 수필과 소설 및 시 등을 통해 다양한 사고방식을 검토하였다.
이규보는 장편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어 겨레 역사의 전통을 다시 세우려 하였고,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지어 그 작업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 그들은 작품을 쓰면서 한족 문학의 형식성을 거부하는 한편, 보잘것없어 보이는 설화들까지 정리하면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중국 문학이 아닌 전래의 향가를 수집하고, 나아가 그것을 발전시켜 '경기체가'라는 자주적 형식을 만들어낸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개혁안이 성숙기를 맞이하기도 전에 동아시아 정세 및 고려 내부의 사정과 맞물려 밖으로부터 그것을 대체할 사상이 수입되었다. 그것이 바로 350여 년 동안 숙성된 한족의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먼저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기마종족의 후예인 몽고족의 나라(원)를 정신적으로 삼켜버렸다. 뿐만 아니라 원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세운 몽고족은 성리학을 아시아 전체에 전파하는 '기막힌' 역할을 맡고 말았다. 비유컨대 당나라가 차려놓은 사상의 공장에 기마종족은 재료를 제공했고, 한유는 기획을 맡았으며, 주돈이는 상품 설계도를 그렸다. 마침내 350여 년이라는 숙성기간이 지나자 주희는 조립품을 완성시켰으며, 몽고족은 상품의 수입, 판매권을 독점하여 아시아의 주민들에게 그 상품을 판매했는데, 고려와 조선은 자기들의 조상이 원료를 대어주어 만든 사상적인 상품을 구매한 셈이다.
성리학의 재료가 기마종족, 특히 고구려의 것이라고 해서 기마종족의 문명사적 쇠퇴가 변명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뛰어난 지적 전통을 가지고 스스로 사상사적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것은 기마종족의 역사에 치명적 상처가 생겼음을 뜻할 따름이다. 또한 뒷날 성리학의 주요한 발전단계가 중국이 아닌 근조선에서 이루어졌다고해서 이런 결점이 변명되는 것도 아니다. 이 결점은 오로지 기마종족적인 전통을 복구하여 전면적으로 자기다운 지적 전통을 세워내고 그것을 세계적 보편성을 갖는 사상으로 승화시켜낼 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문명의 동거시대
앞에서 몇 차례 강조한 대로 고려시대는 문명의 혼거단계였다. 고구려적인 전통과 백제적인 전통 및 신라적인 전통이 융합되지 못한 채 뒤섞이고, 나아가 말갈이나 거란 및 여진의 문화까지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온갖 사고방식이 혼거하면서 갈등을 겪던 때가 바로 고려시대였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다양한 세력이 다시 몇 가지 문화적 요소를 앞세워 더욱 혼란스런 상황을 연출했다. 기마종족의 지적 전통을 계승한 흐름과 유학과 도교 등 중국적 색채를 이어받은 흐름 및 불교적 색채를 고수하는 지적 흐름이 서로 견제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발버둥쳤던 것이다. 도선에서 묘청으로 이어지는 하늘사상적인 흐름과 최승로에서 김부식으로 이어지는 유교사상적인 흐름 및 의천에서 지눌로 이어지는 불교사상적인 흐름이 바로 그것이었다. 고려 초기에는 기마종족적인 전통과 불교적인 전통이 사회사상으로서 강세를 보였으나, 유학자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리는 등 강력하게 반기를 들었다, 또 중기부터는 유교적인 전통이 불교적인 전통과 함께 지성사의 쌍두마차를 이끌었으나, 전통사상가 묘청 등이 반란까지 불사하며 충격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이처럼 고려시대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문화적 전통이 서로 투쟁하면서 공존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고려라는 국가가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300여 년 동안, 사상의 공존을 강조한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가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느 사상도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13세기 이후 는 이런 공존과 투쟁이 통합사상에 의해 정리되어야 할 시기로서 고려 왕조의 황혼기이기도 했다. 새로운 통합사상의 수립은 새로운 사회체제를 요구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요구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왕조의 성립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일반적으로 중국과 달리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지 않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차이에 대한 설명에서도 우리는 두 문명 사이의 주요한 역사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 중국 대륙에서 왕조의 교체가 빈번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그 하나는 중국 한족과 기마종족 사이의 끊임없는 주도권 투쟁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 한족이 보여주는 기민한 문명사적 전환 때문이었다. 물론 이 두 가지 측면 사이에는 때로 긴밀하게 때로 느슨하게 서로 연결된 측면이 있다. 중국 문명은 기마종족계 왕조의 수립으로 말미암아 기마종족 문화로부터 늘 일정하게 영향을 받으면서, 그 영향력을 자신의 문화적 자양분으로 활용했다. 즉 중국 한족은 자신의 뛰어난 문화를 가지고 주변 종족을 동화했다는 주장과마찬가지로, 죄래 왕조가 수립될 때마다 신선한 충격으로 몸살을 앓으면서 그들에게 동화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선 일이나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선 일,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일은 크게 보아 기마종족과 중국 한족 사이의 대립관계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고 진나라가 세워진 일,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선 일,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선 일은 중국 문명의 발전단계에서 일어난 내적 전환과 관련이 깊다. 마지막으로 한나라가 망하고 위진남북조가 들어서며 위진남북조가 망하고 나라가 들어서고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선 것은 위의 두 가지 상황이 긴밀하게 맞물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왕조의 흥망이 곧 문명사적 변화와 연결되었다고 볼 때, 우리나라의 과거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중국의 경우와 비교할 때, 우리 역사에서 일어났던 왕조의 교체는 매우 단순하다. 그러나 단순한 만큼 왕조의 교체과정을 기민하게 보이지 않은 만큼의 변화된 내용은 더욱 뚜렷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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