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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95 호
단기 4340. 11. 4 (음력 9. 2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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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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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첫 째주 문학소식 및 신간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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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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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상을 대했을 때 느끼는 고통의 정도를 가지고 자신의 나이를 판단할 수도 있다. / 존 누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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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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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지나친 욕심을 버려라
일이란 좋은 일과 나쁜 일, 큰 일과 작은 일을 막론하고 그것을 마음속에 오래 두어서는 안 된다. 이 '둔다'는 글뜻은 한 군데 붙어 얽매여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꿍심을 품거나 나쁜 일을 조장하고 이익만을 따지는 여러 가지 폐단이 주로 여기에서 생기기 때문에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이라는 한 글자도 알기 어려운 말이다. 이른바 '마음에 두는 것도 아니요, 아니 두는 것도 아니다'란 것이 곧 이 '일'이란 글자의 뜻이다. 고요히 생각하면 하늘의 이치를 기르고, 움직이면 곧 욕심이 생기는 법, 그것이 싹트는 기미를 보일 때에 잘라 버려야 한다. 이렇게 참된 공부가 쌓이고 노력이 오래되어 순수히 숙달되면, 일상 생활에 있어서 비록 백 가지 천 가지 일이 생겨나고 사라지더라도 마음은 제대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어서 잡스런 생각들이 절로 나의 걱정이 될 수 없는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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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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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3장 사회 및 역사 철학
자유와 평등은 양립할 수 있는가 - 서유석
자유와 평등은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인 인간 존중을 실현하는 핵심적 개념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볼 때 두 개념은 서로를 굴절시키고 제한해 오기도 하였다. 두 개념은 상호 배타적인가, 혹은 보완적으로 관계지을 수 있는가?
자유와 평등의 이율 배반
자유와 평등은 민주주의 사회의 핵심적인 두 이념이다. 한 집단이나 사회가 과연 어느 정도 민주적이냐 하는 것은 바로 이 자유와 평등의 실현 정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두 이념은 현실에서 종종 충돌한다. 우선 무제한의 자유는 불평등을 초래한다. 어렸을 때의 일이다. 국민학교 교실은 부족한데 학생 수가 너무 많아서 한 학년에 12반씩 편성하고도 3부제 수업을 했다. 그저 두어 시간만 수업을 받으면 온종일 마음대로 노를 게 일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입학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우선 머리를 빡빡 깎고 군복 같은 교복을 입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무서운 담임 선생님의 감시와 통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늘날에 비하면 어수룩하던 시절이라 제대로 씻지도 않고 학교에 오는 학생이 많았다. 용모 검사라 하여 손발을 씻고 다니는가, 목에는 때가 없는 가까지도 그 자상한(?) 여선생은 감시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자유가 찾아왔다. 선생님이 아이를 낳게 되어 한 달 간 휴가에 들어간 것이다. 더 이상 구속이 없어지자 우리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였다. 노는 시간이면 책상과 의자를 뒤로 밀어 놓고 씨름을 하였으며, 한쪽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주사위 돈놀음판이 벌어졌다. 즐거운 날들이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고 한 일주일쯤 되자 새로운 일이 벌어졌다. 반에서 주먹 좀 쓰는 아이들이 반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공평하게 해야 하는 교실 청소를 하지 않았다. 공정해야 할 시험 시간에도 나머지 학생들은 그들의 협조(?)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공부한 학생이나 공부하지 않은 그들이나 시험 성적은 비슷하게 나왔다. 무정부 상태, 약육강식의 상태였다. 한마디로 무제한의 자유가 불평등을 초래한 것이다. 거꾸로 평등을 무리하게 강제하면 개인의 자유는 그 존립이 불가능하게 된다. 모든 학생이 동일한 교복을 입어야 했던 시절을 생각해 보라. 개인의 기호와 취향은 무시되었던 셈이다. 무리한 평준화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창발성과 다양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말하는 것은, 자유와 평등은 정의로운 사회,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전제되는 두 이념이면서도, 그 어느 하나만이 일방적으로 절대화되는 경우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그럴 경우 진정한 자유, 진정한 평등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평가는 다분히 추상적이다. 자유와 평등은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비로소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 역사적 이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념들의 내용과 상호 관계를 구체적인 역사 과정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 속에서 살펴보면, 이 두 이념은 각기 절대적인 개념으로서 주창된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 정의의 실현을 위한 상대적 개념으로서, 또 서로간에 보완하는 이념으로서 주장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때때로 그 균형이 깨졌지만 그럴 때마다 그 불균형을 시정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
자유주의에서의 자유와 평등
근대 자유주의의 이념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은 봉건 체제의 질곡을 철폐하고자 했던 근대 시민의 투쟁 속에서 시민적 자유, 정치적, 자유, 그리고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형태로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여기서 시민적 자유란 기업 활동의 자유, 계약의 자유, 재산과 신체의 자유,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을 가리키며, 정치적 자유란 참정권을 비롯하여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한편 법 앞에서의 평등은 봉건제의 신분적 불평등의 제거를 의미하였는데, 이는 개인의 자유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과거에는 봉건제적 제약으로 인해 개인의 능력 발휘가 불가능했지만, 그러한 특권들이 폐지되면 능력만 있다면 그것을 발휘할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법 앞에서의 평등은 기회의 균등을 의미한다고도 하겠다. 이러한 근대적 자유와 평등의 사상은 일종의 시민적 권리 주장으로서 근대 시민 사회를 잉태하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자유주의(liberalism)'라고 부르는 이념적 사조의 중심적인 사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유럽의 실제 사회는 이러한 초기 계몽주의자들의 자유, 평등의 이념과는 동떨어진 모습이 되어 버린다. 여전히 법적으로나 형식적으로는 누구나 위에서 이야기한 자유, 평등의 권리를 지니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소수의 자산가들에 의해 지배되는 불평등한 사회, 따라서 부자유한 사회로 전락했던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민중의 불만이 유럽 전역을 감돌고 마르크스(K> Marx), 엥겔스(F. Engels)를 위시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때문이었다. 초기 시민 사회에서의 자유와 평등의 권리 주장은, 그 이념적 보편성과는 달리 실제에 있어서는 근대 상공업 계층의 무제약적인 기업 활동과 이윤 추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민적 자유는 현실에 있어서는 봉건 왕정이나 국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리 활동의 보장을 의미하였고, 법 앞에서의 평등이란 것도 사실은 이러한 기업 활동의 자유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의 신분적 제약의 철폐에 불과하였다. 물론 당시의 자유주의자들 중에 애덤 스미스 같은 사람은, 국가가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고 기업가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 생산성 제고는 물론이고 나아가 시장의 자동 조절 장치와 같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구성원 전체의 부(가질 부)도 균형 있게 증대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의 결과는 달랐다. 사회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심화되었으며, 많은 실업 인구와 절대 빈곤의 문제 등이 야기되어 시민적 자유와 법적 평등이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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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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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랍인형
본뜻 : 밀랍이란 꿀벌이 벌집을 만드는 물질을 말한다. 토종 벌꿀 같이 벌집 째로 뜨는 꿀을 걸러내기 위해서 약한 불에 녹이면 꿀은 녹아 아래로 가라앉고 밀랍의 주성분인 기름기만 위로 뜬다. 걷어 낸 밀랍은 마치 촛농과 같은데 따뜻할 때 만지면 자유자재로 여러 가지 모양을 낼 수 있다. 밀랍은 돌이나 청동보다 양감이니 질감을 나타내는 것이 우수하여 사실적인 등신대의 인형을 만드는 데 널리 쓰인다.
바뀐 뜻 : 벌집의 주성분인 밀랍으로 만든 인형으로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생한 인형을 가리킨다 흔히 '밀봉한 인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보기글"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서 그런지 우리 나라 박물관에서는 밀랍 인형을 본 기억이 없어 -엊그제 본 영화에 프랑켄슈타인 밀랍 인형이 나오는데 진짜인 줄 알고 깜짝 놀란 거 있지
여성상과 새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은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을 제쳐놓고 나서면 집안일이 잘 안 된다는 말이다. 나아가 여성의 행실과 지위를 한계지우는 말이기도 했다. 살림하며 내조를 제대로 하는 게 미덕으로 여기던 때가 있었으나 이젠 여성이 사회 활동을 활발히 하는 게 더 자연스런 시대가 됐다.
이런 여성상의 변화를 새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적극적인 여성상을 반영하는 새말이 ‘줌마렐라’다. ‘줌마렐라’는 경제적인 능력을 갖추고 자신을 위해 시간과 돈을 들이며 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기혼 여성을 이른다. 요즘 ‘줌마렐라’의 사회생활에 필요한 도우미 상품과 가사 보조 상품들이 인기라고 한다.
여성상의 변화는 드라마 등장인물에도 반영된다. ‘삼순이 신드롬’을 일으켰던 〈내 이름은 김삼순〉의 주인공 ‘삼순이’의 캐릭터는 ‘순대렐라’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이후 겉보기엔 순박하지만 실은 대찬 여성을 ‘순대렐라’라고 부르게 됐다. 기존에 자주 등장하던 ‘신데렐라형’ 인물과는 달리 독립적이면서도 평범하고 순박한 ‘삼순이’는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줌마렐라’, ‘순대렐라’ 등에 보이는 ‘-렐라’는 ‘신데렐라’에서 따온 것이다. 신데렐라는 고달픈 인생을 바꿔 줄 왕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의존적 여성상을 대변하는 말이었으나 요즘 새말에 붙는 ‘-렐라’는 단지 앞에 붙은 말의 특성을 가지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뜻한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언어 보존
사라져가는 말을 보존한다는 것은 이들 말을 되살려 직접 쓰도록 하거나, 적어도 문서나 음성·영상으로 기록하여 오래도록 남기는 일이다. 이들을 보존해야 하는 까닭은 뭔가?
문화인류학적 이유가 있다. 말에는 이를 쓰는 민족이 여러 세기에 걸쳐 접촉한 자연·사회 환경과 관련한 숱한 정보가 담겨 있다. 그러니 다양한 언어의 보존은 곧 인류의 문화유산을 갈무리하는 일이다. 북극의 이누이트족은 최악의 기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이를 자신들의 ‘이누이트말’에 반영하여 얼음과 눈에 관한 다양한 명칭을 발달시켰다. 아메리카 대륙의 ‘미크맥말’은 가을에 부는 바람소리에 따라 나무에 다양한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 어떤 나무에 70년 전과 다른 이름이 지금 붙여져 있다면, 이 나무 이름을 통해 그 사이에 벌어진 자연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언어학적 이유도 있다. 개별 언어가 지닌 다양한 어휘와 문법을 보존할 수 있다. 인디언말 가운데 ‘체로키말’에는 씻는 행위에서 무려 14가지 어형이 있으며, ‘디르발말’에는 뱀장어를 가리키는 수십 가지 명칭이 있다. 언어를 지킴으로써 인류는 이런 다양성을 보존할 수 있다. ‘한 개, 두 마리, 세 포기’의 ‘개, 마리, 포기’와 같은 세는 단위가 매우 다양하게 분화된 ‘폰페이말’에는 보통 음식과 잔치 때 자기 몫으로 받은 음식을 세는 단위가 다를 정도로 문법이 분화돼 있다. 언어가 사라진다면 결국 이런 낱말과 문법의 다양성과 섬세함을 동시에 잃고 마는 것이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야단벼락/혼벼락
‘벼락’이란 자연현상 말고도 심한 꾸지람이나 나무람을 비유적으로 일컫거나 매우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이런 뜻의 ‘벼락’은 다른 말과 어울려 새말을 만들기도 하는데, ‘감벼락, 날벼락(생벼락), 돈벼락, 돌벼락, 마른벼락, 물벼락, 불벼락, 산벼락(호되게 당하는 재난을 이르는 말), 앉은벼락, 칼벼락’ 등이 그것이다. 여러 벼락 가운데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은 말로 ‘야단벼락’과 ‘혼벼락’이 있다.
“아내의 버릇없는 말에 사내가 곧 한바탕 야단벼락을 내리고 싶었으나 ….”(홍명희, 〈임꺽정〉) “까딱 잘못해서 모시옷에 얼이라도 가면 야단벼락이 떨어지고 ….”(박경리, 〈파시1〉) “그렇게 혼벼락 맞고도 언감생심 덤벼들겠습니까?”(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 “네놈이 살아남는다면 혼벼락을 내어줄 테니.”(박경리, 〈토지〉) “바로 이때 녀석의 아버지가 혼벼락을 내주려고 몽둥이를 거머잡고 연기 나는 써까래 사이로 들이닥쳐 …”(한상렬, 〈문장표현의 기법〉)
‘야단벼락’은 “눈물 쏙 빠지게 벼락야단을 맞지 않았겠습니까”처럼 앞뒤를 바꿔 쓰기도 하는데, 뜻은 ‘갑작스레 소리 높여 하는 아주 심한 꾸지람이나 나무람’을, ‘혼벼락’은 ‘혼이 빠질 정도로 심한 꾸지람이나 나무람’의 뜻을 나타낸다. 줄기찬 장맛비로 온나라가 물난리를 겪는다. 막개발로 사람손을 많이 탄 지역에 수해가 심각했다. 하늘의 야단벼락, 혼벼락인 듯싶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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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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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2) 도대체 여자의 욕심이란 그 끝이 어디일까?(여후)
정부와 동성연애자
벽양후 심이기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래 유방과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항상 유방의 부하 노릇을 했으며, 이 후에도 이른바 '가신'이었다. 특히 그는 일찍이 유방이 항우에게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을 때, 항우가 유방의 가족을 체포하려 하자 여후 및 유방의 아버지와 함께 도망가다가 같이 포로가 된 적도 있었다. 천하 통일 후 유방이 죽고 나자, 여후는 심이기를 가까이 하였다. 그리고 이내 두 사람은 깊은 관계에 빠졌다. 이 소문은 소리도 없이 퍼져 나갔으며, 마침내 어떤 자가 여후의 아들인 황제 효혜제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러자 효혜제는 크게 화를 내고 당장 심이기를 체포하여 감옥에 처넣고는 처형시키려 했다. 여후는 그토록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이 사실만은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주건이라는 현명한 선비가 있었는데, 그는 말재주가 좋고 변론을 잘 하며, 청렴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장안에 그 명성이 높았으며, 심이기도 그와 사귀려고 몇 번이나 해 봤지만 주건은 만나 주지 않았었다. 그 후 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그의 집은 너무 가난해 장례 비용조차 마련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심이기가 그의 집을 찾아가 열심히 일을 거들고 부의금도 후하게 내며 성의를 보였다. 그러자 주건도 차츰 심이기를 좋게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감옥에 갇혀 위기에 몰린 심이기는 주건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주건은 냉정히 거절했다.
"사사로이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는 주건은 효혜제가 사랑하고 있던 남자인 굉적유를 찾아갔다. 굉적유는 미소년으로서 효혜제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효혜제는 동성 연애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마 사나운 어머니 여후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굉적유를 찾아간 주건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황제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아는 것이오. 그런데 지금 벽양후 심이기가 태후의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옥에 갇혀 있소.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모함해서 그를 죽이려 한 것이라 믿고 있소. 지금 만일 심이기가 죽게 된다면, 바로 다음날 여후께서 당신을 죽이려 할 것이요. 그런데 왜 당신은 심이기를 구해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오? 황제께 말씀드려 심이기를 풀려나게 한다면 태후께서 크게 기뻐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당신은 황제와 태후 두 분의 사랑을 몽땅 차지하게 될 터인데 말이오."
이 말을 들은 굉적유는 크게 두려워하여, 황제에게 심이기를 풀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황제도 할 수없이 풀어 주었다. 한편 심이기는 주건이 자기 부탁을 거절하자 매우 원망을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사실을 알고는 주건을 찾아가 후한 선물을 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 후 여후가 죽고 여씨 천하가 몰락하자 심이기도 당연히 처벌 대상이었다. 그러나 역시 주건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후에 결국 회남왕에게 철퇴로 맞아 죽었다. 회남왕의 어머니는 반란의 혐의를 받고 자살했었는데, 그때 여후와 심이기가 도와 주었으면 살 수 있었던 것을 전혀 손을 써 주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회남왕은 언제나 심이기를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장례에 마음을 빼앗기면 천히도 빼앗긴다
소제 유흥 8년 3월에 여후는 패수 기슭에서 제사를 모시고 돌아오던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파란 개 같은 것이 나타나서 여후의 옆구리를 물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도 괴이하여 점을 쳐 보니 죽은 척희의 아들 여의가 복수를 하고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날 이후 여후는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무척 시달려야 했다. 7월에 접어들면서 여후의 병세는 더욱 깊어만 갔다. 다시 일어날 수 없음을 안 여후는 자기 조카인 여록과 여산을 불렀다.
"선제는 천하를 통일한 다음, 모든 대신들을 모아놓고 '유씨 아닌 자가 왕이 되었을 때는 모두 힘을 합해 이를 무찌르라'고 서약을 시켰다. 때문에 우리 여씨 문중이 권세를 잡았다 해도 중신들이 마음 속으로 복종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죽으면 그들은 반드시 반격을 해 올 것이다. 정신 차리고 우선 군사를 모아 궁궐을 지켜야 한다. 장례에 정신을 빼앗기면 천하를 빼앗길 것이다. 명심하도록."
드디어 8월 초하루에 여후는 세상을 떠났다. 여후의 유언에 따라 여산이 상국으로 임명되었으며, 여록의 딸이 황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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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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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30장. 오염된 물과 진흙에서 얻은 약
오늘날 가장 중요한 약 중 두 가지는 오염된 물과 진흙에서 발견되었다. 신형 페니실린의 대표적인 항생물질인 세팔로스포린(cephalosporin)은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 섬에 있는 칼리아리 시의 오염수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또 사람의 장기이식을 용이하게 하는 항생물질인 시클로스포린(cyclosporine)은 제약회사 사원이 위스콘신 주와 노르웨이에서 스위스로 가지고 온 흙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균이 항생물질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균이라고 하면 무좀이나 빵의 곰팡이 등과 같은 불쾌한 것을 상기하기 마련이다. 농가에서는 균이라고 하면 작물을 망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에 불쾌한 정도가 아니다. 그러나 균 중에서도 좋은 균이 있어 맥주나 와인 또는 된장과 간장을 만들기도 하고 빵을 부풀게 하는 것도 있다. 이와 같은 발효 과정을 포함한 모든 공업 작업과정은 이스트(yeast)균에 의한다. 또한 균의 가장 중요한 작용 중 하나는 다른 생물 특히 세균(박테리아)에 대항하는 항생물질의 생산이다.
세팔로스포린.
1950년대 초엽, 페니실린을 사용하고 있던 의사들은 중대한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몇 가지의 세균, 특히 포도상 구균에 페니실린의 효과가 없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그 몇 년 전에 발견되었는데 한동안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1948년 지중해에 있는 이탈리아의 큰 섬인 사르디니아의 세균학 교수 주셉 브로추는 칼리아리 시의 하수구 가까이의 바다에서 세팔로스포륨 아크레모늄(cephalosporium acremonium)종의 균으로 만들어진 항생물질을 분리했다. 브로추 교수는 하수의 자체 정화작용에 항생물질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연구하고 있었다. 균 배양액을 농착하여 항생물질로서의 활성을 발견한 그는 동물테스트를 생략하고 이를 국부 도포와 주사의 두 가지 방법으로 감염증인 환자에게 투여했다. 그 결과 환자, 특히 장티프스의 환자에게는 상당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되었다. 이 발견으로 이탈리아의 제약회사들의 관심을 끌려다가 실패한 그는 1948년 '칼리아리 위생연구소 연구보고'라는 학술잡지에 사르디나아 섬에서 설비도 기기도 한정되어 있으므로 누군가가 이 연구를 계속해 주기를 희망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또 이 발견을 이전에 칼리아리의 공중위생을 담당한 관리였던 영국인에게도 보고하였는데, 그 결과 영국의 오스포드대학 병리학교실의 에드워드 에이브라함 경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몇 년 후에 에이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브로추의 연구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그의 연구보고가 지방의 학술잡지에 게재되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제가 그에게 그 잡지가 어느 정도의 횟수로 발행되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그 보고가 실린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다음 호가 발행된다면 그것은 아마 이전과 같은 재미있는 발견을 했을 때일 것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에이브라함은 옥스포드대학에서 세팔로스포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항생물질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개시했다. 옥스포드대학의 연구팀은 이 균이 몇 가지 종류의 다른 항생물질은 만들어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으로 분리된 것은 그람 양성(gram-positive)균에 효과가 있었서 세팔로스포린 P라고 이름지어졌다. 그러나 브로추가 균으로 조제한 액은 그람 양성균과 그람 음성균 양쪽에 유효했기 때문에 옥스포드대학의 연구자들은 배양기에서 다른 항생물질을 찾아내려고 시도했다. 1954년에 에이브라함과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또 하나의 항생물질을 거의 순수한 형으로 분리해 내었는데 그람 음성(gram-negative)균을 죽임으로서 세팔로스포린N이라고 이름지었다. 그 후 화학적인 연구 결과 이 물질은 페니실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페니실린N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55년 또 하나 순수한 결정물질을 얻고 그것을 세팔로스포린C라고 이름지었다. 이것은 독성이 매우 낮았고 1950년대에 널리 사용되었던 페니실린에 저항력이 있는 몇 가지의 극동성 세균에 유효했다. 1961년 에이브라함과 가이 뉴턴은 화학적인 근거를 둔 세팔로스포린 C의 분자구조를 발표했다. 그 잡지의 같은 호에 도로시 C. 호즈킨과 E.N. 메슬렌은 X선 결정해석에 의하여 이 구조를 확인했다는 내용을 보고했다. 도로시 호즈킨은 그보다 앞서 1940년대에 페니실린의 구조에 관하여 X선 해석에 의한 결정적은 증거를 제공했었다. 그녀는 1965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세팔로스포린의 단리나 구조 결정에 관한 연구는 거의 옥스포드의 연구들에 의한 것이었으나 세팔로스포린C의 합성은 하버드대학의 로버트 B. 우드워드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우드워드는 1966년 그의 노벨상 수상강연에서 이 합성법을 발표했다.
원래의 균에서 세팔로스포린C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양은 너무 적어서 도저히 실용적이라고 할 수 없었으나 다음의 두 가지 발견 덕택으로 세팔로스포린은 의약품으로서 사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세팔로스포린C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변종균의 발견이며, 두 번째는 세팔로스포린 C분자를 화학적으로 변환시켜 의학적으로 유용한 광범위한 베타 락탐계 항생물질을 제조하는 방법의 발견이었다. 락탐이란 질소원자를 포함한 4원자 고리분자를 말한다. 페니실린도 베타락탐의 일종이지만 그림 30-1과 같이 페니실린은 제2의 고리가 6원자 고리이다. 미국에서는 현재 20가지에 가까운 세팔로스포린이 사용되고 있으며 더 많이 합성되어 가고 있다. 최근 6개의 제3세대 세팔로스포린은 모두 기본이 되는 베타 락탐핵이 있으며, 그림 30-1의 R1, R2, R3에서 명시된 위치의 치환기가 다르다. 이것들은 모두 폭넓은 그람 음성균에 활성이 있으나 각 약마다 중요한 다른 점이 있다. 지중해의 연안 도시에서 바다로 흐르는 하수구가 바닷물 속에서 어떻게 정화되는가 하는 최초의 의문에서 시작된 좀 별난 사건이 아주 새로운 항생물질의 보고를 발견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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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술을 마구 마셔 위장이 못쓰게 된 유운
유운(1485-1528)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종룡, 호는 항재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변호하다가 배척을 당하여 파직되었으며, 2년 뒤에는 벼슬과 품계를 빼앗기고 관원의 명부에서 삭제되었다. 유운은 성격이 활달하고 조행에 유의하지 않아 당시 집권 세력의 논의에 용납되지 않았다.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단양군의 객사에다 시 한 편을 써 놓았다.
흉측하고 미련한 돌 모두 주워다 깨끗한 물 흐르는 데다 고루 깔아나 볼까 바람도 잡고 바다신마저 가두고서 그 뒤에야 나의 배를 띄우리
간교한 무리들이 그 시를 외워 권하면서 유운이 신진 사류들의 고상하고 깨끗한 언론에 용납되지 않아 이런 시를 지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14년에 대사헌으로 발탁되자 그날로 임금에게 취임 인사를 하고 곧장 의금부로 달려가서 감옥의 문틈으로 그곳에갇혀 있는 조광조의 자를 부르며 그의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오래 전부터 일이 있으리란 것을 알았으나 이런 극한 상황에까지 이를 줄을 어찌 상상이나 하였겠나"
그는 조광조를 극력 비호하다가 탄핵을 당하여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권세를 잡고 있던 자들이 없는 사실을 꾸며 해치려고 하여 일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에 놓이자 세상을 한탄하며 술을 하도 많이 마셔 위장을 버려 죽음에 이르렀다.
중종 13년 무렵에 독서당 관원과 선배들이 모여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끝난 뒤에 조광조가 유운과 함께 자게 되었다. 밤중에 유운이 술이 다 깨지 않아 벗은 채로 일어나 조광조를 밟고 넘어갔다. 난간에 서서 소변을 보고 돌아올 때도 그렇게 하자, 조광조가 준엄하게 말했다.
"종룡(유운의 자), 이게 무슨 꼴인가?" "이게 좋은 걸세. 자네가 부르짖는 '소학'의 도리는 본받고 싶지 않네"
유운이 부끄러움 없이 이렇게 말하자 조광조 또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의 풍채와 인품을 아껴서 단지 언행을 단속하도록 권면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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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우일모
많은 것 중의 극히 적은 것을 말한다. 천한2년, 무제의 장수 이능은 불과 5천년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를 무찌르러 나섰는데 기마조차 주어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수십 배의 적군과 싸우기를 10여일, 그 동안에 유리한 전황을 알리는 사자가 올적마다 천자를 비롯하여 대신들은 축배를 들어 경하했다. 그러나 필경은 참패를 보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이듬해 죽은 줄 알았던 이능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능의 일적을 몰살하려 하였고 그에 대해서 신하들도 감히 만류를 못하는 터에 유독 사마천이 사학자로서의 안목으로 대담하게 변호하고 나섰다.
"이능은 목숨을 걸고 국난 극복에 나선 명장이었으나 인간의 능력으로서의 극한점에 다다른 셈이올시다. 그가 흉노에게 항복한 것도 미상불 훗날 한나라에 보답코자 하는 뜻이었을 겁니다. 그런 즉 차라리 이능의 공헌을 천하에 표창하심이 타당할 줄로 아뢰오"
무제는 이 당돌한 사학자를 옥에 가두고 마침내는 궁형에 처하고 말았는데 궁형이란 남성으로서의 기능를 박탈하는 형벌이었다. 수염은 절로 빠지고 얼굴이 매끄러워질뿐더러 성격조차 변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사마천은 치욕을 참고 견디며 선친인 사마담의 유언대로 사기 130권을 완성하였다.
그때 그가 한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궁형을 당하는 노릇쯤은, 소 아홉 마리에서 털 하나가 빠진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을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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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1. 보리수를 닮은 사람들
보리수를 닮은 사람들
보리수 열매는 잎사귀 가운데 툭 삐져나와 맺는다. 그 이파리 위로 단풍맞은 바람이 널뛰듯 달아나고, 후드득 낙엽이 떨어질 때면 언제나 가을이었다. 그러나 올 가을과 함께 하는 보리자 알갱이는 예년의 보리자 알갱이가 아니었다. 내가 맨처음 보리수 이파리를 보았을 때의 떨림,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불수(부처 불, 나무 수)의 이파리가 전하는 묘법의 진리, 생명의 법음 때문이다. 높푸른 하늘, 그 보리수 아래 울려 퍼지던 종소리는 지금도 내 가슴에 생생하다. 그 옛날 많은 이들이 시주금을 정성스레 모아 종을 만들었을 때, 나는 한푼도 보태지 못했다. 그러나 몇 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그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수행을 제대로 못하고 기생충처럼 꿈틀거리며 사는 내가 다시 그 보리수를 염(생각 념)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은덕이었다. 석스님을 만났을 때 나는 요사채 앞에서 합장한 채 장승처럼 멍청히 서서 움직일 줄 몰랐다. 스님은 속가에서 버림받은 반신불수의 어린아이들을 거두어 함께 살았는데, 마침 뇌성마비가 스치고 간 일곱 살 난 아이에게 우윳병을 물리고 있었다. 아이는 자기가 송아지가 아니라는 듯 우윳병꼭지를 빠는 일보다 비구니스님의 젖가슴 주무르기에 더 열중해 있었다. 나이는 일곱 살이지만 정신연령은 돌 지난 아이도 안된다는 거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찾았다. 아이들에겐 의료보험카드는 고사하고, 호적은 물론 주민등록번호도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나는 구겨진 감탄사를 입으로 흘렸는데, 얼굴이 홍당무가 된 스님은 연신 우윳병꼭지를 내뱉는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려주었다. "극락 갔을 거예요."
내가 석스님을 찾은 이유는 스님과 함께 살던 아이, 보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때 찾아뵙지 못해서였던 것이다.
"우리가 사는 여기에선 힘겨웠을 테니까요."
석스님은 말씀을 마치고 나직이 한숨 짖는다. 그때 나는 두 손을 공손히 모아 합장배례했다. 석스님의 마음을 누가 모르랴. 나는 어금니를 꼬옥 깨물었다. 마치 보리수나무를 보는 듯했다. 부처님은 보리수나무기둥, 석스님은 가지, 아이는 이파리, 아니 보리자 알갱이. 반면에 요즘 세인들의 눈총을 받고 있는 종단의 불협화음의 주역들을 보면 안타깝다. 안타깝다 못해 배신감, 배반감까지 느낀다.
참으로 부끄럽다. 한마디로 슬프다.
그러나 귀뚜리 우는 지금 이 시간에도 처처시불(곳 처, 곳 처, 이 시, 부처 불)하시며 작금의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정진하시는 석스님 같은 다수의 스님들을 보면 고개가 수그러진다. 아직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스님들은 참회와 포살의 '이 뭣꼬'를 화두로 삼아 참다운 수행정진하시길 불자의 한사람으로 간절히 애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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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0. 묘청의 실패와 김부식의 승리 (보수와 사대주의의 수렁에 빠진 고려 재건국의 실패)
반란인가 재건국운동인가
1135 년 정월에 묘청 일파는 마침내 군사력을 동원해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한편, 개경의 보수파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개경에서 파견된 사람들과 개경 출신의 인사들을 감금했으며, 자비령 이북의 교통로를 차단하고 서북 방면의 군대를 서경으로 집결시키는 한편, 이 사실을 스스로 중앙정부에 통보했다. 이것은 모두 매우 갑작스럽게 진행된 일로서, 묘청 일파의 핵심인물이었던 정지상 등도 미처 개경에서 탈출할 틈이 없었을 정도였다. 묘청 일파는 이와 아울러 개경 중심의 보수적 정권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그들은 나라 이름을 대위라 불렀으며, 연호를 '천개'라 정했고, 편성된 군대를 '하늘이 보낸 충의의 군사'라 불렀다. 이에 개경 정부에서는 김부식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진압의 책임을 맡겨 진압군을 파견했다. 김부식은 노련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투를 벌이기 전에 먼저 전투의 분위기를 자기편에 유리하게 만들어나갔다. 그는 진압군을 출발시키면서 개경에 머무르고 있던 정지상과 백수한 등을 처형하여 진압의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토벌문을 발표하여 묘청 일파에게 합류하려는 다른 지역의 군대를 협박함으로써 그들의 군사적 행동을 차단하는 한편, 서서히 군사를 늘려 서경 세력을 차츰 고립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계속 전투를 미루면서 78차례에 걸쳐 투항을 권고함으로써 서경 군대의 강한 전투의지를 둔감하게 만드는 한편, 묘청 일파의 내부분열을 유도했다. 김부식의 노련한 지휘는 그대로 효과를 드러냈다. 서경 군대의 핵심 지휘자인 조광이 마침내 칼날을 거꾸로 들이댄 것이었다. 그는 지도자인 묘청 등의 목을 베고 투항의 사자를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개경에서는 투항의 사자를 감옥에 가두고 조광의 투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경 세력은 묘청이 죽은 이상 서경을 함락하는 것은 쉬운 일이며, 이런 기회에 서경 세력을 아예 뿌리뽑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조광은 투항을 포기하고 다시 저항을 시도했다. 지도자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당황한 개경 세력은 다시 투항을 권유하면서 협상을 시도했지만, 협상을 위해 서경에 파견한 사자는 죽임을 당했을 뿐이다. 저항은 무려 1 년을 넘게 끌었다. 그러나 서경성 안에는 식량이 떨어졌고, 완전한 포위 때문에 외부로부터 식량을 공급받지도 못했다. 이에 개경 정부군은 총공격을 시도했고, 조광을 비롯한 서경 군대의 지휘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마침내 반란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묘청 일파가 일으킨 이 사건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새로운 나라 이름을 내걸고 새로운 연호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새로운 임금을 세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거사를 스스로 개경 정부에 통보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거사가 반란이 아니면, 그들의 거사는 다만 개경의 보수파를 제거함으로써 보수와 사대주의의 수렁에 빠진 고려를 재건국하려 했음을 말해준다. 묘청 일파는 유학만 공부하고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된 개경의 기득권층에 의해 전통사상과 불교가 약화되는 현상을 바로잡으려 했으며, 유학파들에 의해 고려가 중국화되어가는 현상을 뿌리뽑으려 했다. 그들은 고려가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옳다고 믿었으며, 이를 위해 친중국적,반기마종족적 유교파를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런 뜻에서 묘청 일파가 일으킨 이 사건은 왕권에 도전하는 봉건시대의 전형적 반란도 아니었고, 천박한 이해관계로 말미암은 단순한 권력투쟁도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화에 대한 기마종족 자주화의 운동이었으며, 작은 고려에 맞선 고려의 고구려화 운동이었다. 즉 그들은 고려가 중국적 세계질서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거부했으며, 중국적 사상이 고려를 지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고려 재건국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재건국운동의 실패와 무너지는 정통성
묘청이 주도한 재건국운동이 실패하자, 고려사회는 표면적으로 평온을 되찾았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장한 중국적 유교파들에겐 부담스런 견제세력이 사라졌고, 전통사상과 고조선의 부활을 꿈꾸는 세력은 설 곳을 잃어갔다. 김부식을 비롯한 유학파는 한껏 세력을 자랑했으며,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등용한 과거 출신의 관료들이 오히려 왕권을 짓누르는 풍조마저 생겨났다. 왕권 강화의 도구였던 과거 출신의 관료들은 중국화의 선봉부대가 되었으며, 귀족화된 그들은 과거의 호족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정치경제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차츰 대토지 소유자가 되었으며, 도태된 호족 출신의 무인들을 무시하면서 그들만의 기득권을 최대로 누렸다. 묘청 일파는 재건국운동을 파괴한 김부식은 중국적 관점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했는데, 그는 이 역사서에 대륙에 있던 백제의 영토를 고의적으로 서술하지 않았으며, 대진을 우리 역사에서 아예 빼버렸다. 또 그는 중국적 세계질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시기의 삼국이 모두 중국왕조의 연호를 사용한 것처럼 서술하기도 했다. 중국적 유교파의 정치경제적 독점과 그들에 의한 문화적 왜곡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고려의 임금들은 서서히 그들의 허수아비로 전락해갔다. 어떤 부류의 세력이든 이들과 결탁해야만 기득권층이 될 수 있었다. 불교의 사찰도 이들과 결탁해야만 사원전과 노비를 비롯한 그 권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전통사상가들도 이들의 하수인이 되어야만 기득권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이제 사상,문화들 상호공존과 상호견제에 의해 유지되던 고려왕조는 사실상 무너진 셈이었다. 요컨대 묘청의 재건국운동 실패와 더불어 고려왕조도 사실상 붕괴된 것이며, 본질적으로 새로운 국가의 탄생이 예고되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해서 중국적 유교파와 결탁하기를 거부하는 불교인이나 전통사상가들은 돌파구를 얻기 위해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 했으며, 이 대열에는 일부 유학자들까지 동참하고 있었다. 바로 그들에 의해 전통사상이나 불교계에도 차츰 새로운 기운이 꿈틀거렸다. 불교의 조계결사나 백련결사가 그런 기운의 실체였으며, 이규보와 금의에서 이승휴와 이암으로 이어지는 전통사상 연구 인맥도 그런 기운의 실체였다. 물론 이들 가운데 일부 유학자들은 성리학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무인세력은 중국적 유교파에 대해 직선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고려를 재건국하거나 새로운 국가를 세울 만한 사상적 저력이 없었다. 그들의 역할은 다만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세력들의 울타리가 되는 일이었다. 무인정권 시기에 고려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쨌든 묘청 일파가 주도한 고려 재건국운동의 실패는 우리 역사를 중국화시키고 우리 겨레를 다른 기마종족과 문화적으로까지 구별짓게 만들었다. 고려의 건국이 비록 우리 겨레와 다른 기마종족을 갈라놓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경제적인 차원의 갈라섬이었다. 그러나 재건국운동의 실패와 함께 귀족으로 등장한 중국적 유교파는 이 갈라섬을 문화적 갈라섬으로 탈바꿈시켰으며, 마침내 무인세력의 극단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혈통적으로는 기마종족임에 분명한 우리가 오늘날 다른 기마종족들과 상당히 다른 문화적 특징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재건국운동의 실패였다. 재건국운동이 실패한 뒤, 우리 역사는 마침내 단일민족의 테두리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고 서서히 중국화의 화려한 수렁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오늘날의 겨레 형편을 떠올리면서, 묘청의 재건국운동 실패를 작은 겨레가 된 중요한 사건으로 꼽아본다. 더구나 나라와 사회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떠들면서 성급하게 핏대를 올리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어설픈 운동의 실패가 얼마나 위험스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새삼 되짚어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내용 없는 개벽을 떠벌리는 사람들, 남의 예언이나 주워섬기는 부류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개혁론 등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묘청의 일그러진 초상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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