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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93 호
단기 4340. 11. 2 (음력 9. 2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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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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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여성, 외국인노동자 등 온누리안 문예백일장
온누리안(이주여성, 새터민, 외국인 노동자 등) 문예백일장 2007아시아-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 -전주 기념
Ⅰ. 온누리안 문예백일장
* 대회명 : ‘온누리안’ 문예백일장 대회(IHR교육사업단)
* 일시·장소 : 2007년 11월 7일(수) 13:00~18:00 / 전주교육대학교 황학당
* 주최, 주관 : 전주교육대학교, IHR교육사업단, 2007ALLF조직위원회
* 대상 : 이주여성, 이주노동자, 새터민 등(연령 제한 없음)
* 부문 : 운문/산문 구분 없음(통합 심사)
* 참가 신청 : 2007.10.22~11.6 - 온라인 접수 및 전화, 방문접수
* 접수처 : ihr@jnue.ac.kr / 063-281-7219 / 063-288-3339(IHR사업단 사무실)
* 진행일정 12:30~13:00참가자 접수 및 원고지 배부 13:00~13:10대회장 인사말 및 시제 발표 13:10~15:30원고 접수 15:30 접수 마감 15:30~18:00원고 심사 및 시상식
* 시상 내용 : 장원 1명, 차상 2명, 차하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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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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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에 관해 누구나 알아둬야 할 한 가지 일은, 모차르트가 생전에 아무런 상도 타 본 적이 없다는 사실./ 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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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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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는 공자의 말씀은, 산이 어질다거나 물이 지혜롭다고 한 말이 아니다. 또한 사람과 산수의 본바탕이 본래 동일하다고 한 말도 아니다. 다만 어진 이는 산과 비슷하기 때문에 물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인데, 비슷하다고 함은 다만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의 기상과 뜻을 가리켜 한 말이다. 어짐과 지혜로움의 이치는 미묘하여 알기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 기상과 뜻을 가리키고 반복하여 표현하였으니, 이것은 사람들이 그 형상을 통하여 근본을 구해 모범을 삼게 하려는 것이지, 산과 물에서 그것을 구하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산과 물을 좋아한다는 '요산요수'라는 두요의 뜻을 알려면, 마땅히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의 기상과 의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의 기상과 의사를 아는 데 있어서 어찌 다른 곳에서 구하겠는가? 내 마음에 돌이켜 결과를 얻어야 하겠다. 참으로 내 마음에 어진 지혜의 결과가 충만 되어 밖으로 나타난다면, 요산요수는 간절히 구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그 즐거움이 있게 된다. 그렇게 힘쓸 줄은 모르고 한낱 높고 푸른 것만 보면서 '내가 이것으로 어진 이의 즐거움을 구한다'하고, 또 끝없이 넓게 흐르는 것만 보면서, '내가 이것으로 지혜로운 이의 즐거움을 구한다'하면 넓고 아득하여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러므로 '어진 이가 산과 같다'는 것은 옳지만, '어짊이 산의 본바탕'이라 한다면 전체의 인이 아니며, '지혜로운 자가 물과 같다'는 것은 옳지만, '지혜가 본바탕'이라 한다면 지라고 이름한 본래의 뜻이 아니다. 대개는, 사람과 산수의 본바탕이 본래 동일하다는 것만 알고 나뉘어 다른 것은 알지 못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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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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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2 장 과학 철학
과학자는 연구 결과에 대해 사회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가 - 이필렬
현대의 과학은 많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제공했으며, 따라서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정치가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자는 사회적으로 자신의 연구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말은 과학자들이 그들의 연구 활동의 결과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자는 자연을 탐구하여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려 할 뿐이지, 그것이 사회에 어떤 충격을 미칠지, 또는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설령 과학자의 연구 결과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오용되어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과학자는 책임질 이유가 없다. 책임은 그것을 오용한 사람들이 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과학자들도 있지만, 이러한 생각을 거부하고 과학자가 연구결과에 대해서 직접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요구는 과학 연구 결과가 도덕적, 사회적 가치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때라야 제기될 수 있다. 과학의 연구 결과는 사실 그 자체이고 따라서 객관적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의 삶이나 사회 전체의 변화에 대해서 그 자체로서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면, 연구를 통해서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 내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는 공허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가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인 가치 판단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의 가치 판단의 영향을 받는 것이고 또한 사회나 개인의 삶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고 한다면,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일은 자명한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과학이 객관적인가, 가치 중립적인가 하는 물음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라는 답이 나오면 과학자는 자기 연구 결과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책임을 질 필요가 없을 것이고, 아니다라는 답이 나오면 우리는 과학자들에게 그의 연구 결과가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엄중하게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은 객관적인가
과학이 객관적이라는 말은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이 보편 타당한 진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고, 적용 대상이 다양하다 하더라도 그 다양성에 상관없이 완벽하게 적용되며, 그것을 배우거나 평가하는 사람이 바뀐다고 해도 참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과학의 가치 중립성은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이 선한 것이라거나 악한 것이라는 가치 판단의 차원을 떠나 있음을 뜻한다. '과학이 객관적인가? 그리고 가치 중립적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고 이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게 된 배경은 과학이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18세기, 19세기까지만 해도 과학 활동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시할 만큼 미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과학에 대한 비판이라든가 논쟁이 사회적으로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현대,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수많은 과학자들의 참여하여 원자 폭탄이 개발되고, 그 후 과학 연구가 정부의 군사 정치적 정책이나 산업체의 상품 개발 전략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히 커지고 그 결과 과학 활동 자체가 사회 냉에서 매우 중요시됨에 따라 과학의 객관성과 가치 중립성이라는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해졌다는 것은 우리가 사회 속의 많은 문제에 대해서 접근할 때 과학이라는 요소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과학이 그러한 문제들의 원인을 제공했으며 동시에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현대 과학이라는 대상에 대해서만 과학의 객관성, 가치 중립성을 둘러싼 논쟁이 의미를 지닌다. 고대 그리스의 과학이나 동양의 과학, 10~11세기의 이슬람 과학에 대해서는 그러한 논쟁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과학이라고 하면 현대 과학을 말한다.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은 과연 객관적인가? 만일 보편 타당한 과학적 진리가 존재할 수 있고 과학 법칙, 과학적 사실이 그러한 진리의 차원에 도달했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보편 타당하다면 어떤 것에도 적용될 수 있고, 적용 주체나 객체에 따라 달라짐이 없으므로 객관적인 것이다. 보편 타당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좋다거나 좋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없다.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할 수 없고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우 우리는 과학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회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전체적으로 볼 때 그러한 진리의 차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객관적이지 않다. 그 이유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과학이라는 것이 자연에 관한 서술이나 법칙으로서 보편 타당하려면 자연 탐구의 모든 분야, 모든 방법을 포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그렇지 않다. 간단한 예를 든다면, 현대의 과학은 동양에서 현재 존재하고 실행되는 한의학이라는 자연 탐구 체계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 과학은 과학이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부합하는 활동만을 과학으로 인정하고 이 활동의 결과만을 과학적 진리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한의학도 그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현대 과학의 틀에는 부합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과학이 아닌 것으로서 배제하고 한의학의 성과들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 어떤 과학 법칙이 보편 타당하려면 그 법칙이 적용되는 분야의 모든 현상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운동에 관한 보편 타당한 법칙들이 있다고 하면 어떤 운동을 막론하고 모두 이 법칙들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하지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 법칙들에는 예외가 있다. 예를 들어서 뉴턴의 고전 역학은 처음에는 우주의 모든 운동을 설명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처럼 여겨졌지만, 200년이 지난 후 원자 세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원자 세계의 운동은 고전 역학의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예외인 것이다. 즉, 고전 역학은 우리 눈에 보이는 거시 세계의 운동에는 잘 들어맞지만, 원자 세계의 운동에는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보편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셋째, 과학은 행위 주체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할 때 '객관적인' 활동(이 말을 선입견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라는 의미로 좁게 사용한다면)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과학 연구를 하는 사람은 자연이란 것은 우리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조작할 수 있다고 하는 자연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자연을 조작 대상으로 보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학은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자연에 대한 이 선입견이야말로 현대의 과학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근본적인 것이다.) 물론 과학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자연을 그러한 방식으로 대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들은 자연을 조작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물질을 전기나 열을 가해서 분해하고, 유전자를 멋대로 조작하고, 동물의 생명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까지도 실험 대상으로 하는 행위는 자연을 인간이 마음대로 주물러도 된다고 여기는 기본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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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
본뜻 : 혼자서 한 자루의 칼을 들고 곧장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바뀐 뜻 :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여담이나 그 밖의 말을 늘어놓지 않고 요점이나 본문제의중심을 곧바로 대놓고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보기글" -단도직입으로 말해서 그 문제는 자네가 잘못했네 그러니 여러 말 말고 어서 사과하게 -시간이 없어서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가두 모금에 우리 모두 참여하자 이겁니다
만주말
물밀듯 밀려오는 외국말에 어지러워진 우리말을 걱정할 때 흔히 이런 표현을 한다. “잘못하면 우리말도 저 만주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청나라를 세워 한때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만주족이 쓰던 만주말은 이제 글자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만주족은 현재 자기네 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쓰고 있다. 만주말은 알타이어족의 만주-퉁구스어파에 드는 말이다. 같은 어파에 속하는 언어들은 대부분 중국 헤이룽장성(흑룡강성)과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소수민족 언어들이다. 만주말과 가장 비슷한 말은 지금 중국 서부의 신장 지역에서 쓰이는 ‘시버말’이다.
현재 만주말이 쓰이는 유일한 곳은 중국 헤이룽장성 푸유현의 작은 마을 산짜스촌이다. 현대적 목축업이 발전하여 집안마다 수입이 꽤 높은 부유한 마을이라고 이 마을 촌장이 방문객에게 소개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았다. 이 마을에는 약 280집, 천여 명이 살고 있다. 그 절반 정도가 만주족이며, 그 밖에 한족을 비롯한 여러 겨레가 어울려 살고 있다. 그 만주족 가운데 실제 만주말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스물에 불과하며, 그저 몇 마디 정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까지 합쳐도 200명을 넘지 못한다.
그 스무 명, 또는 200명이 세상을 등지고 나면 만주말은 영영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우리말도 저 만주어처럼 사라질 위기에 이르기 전에” 우리 모두 우리말 지킴이가 돼야 할 것이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미혼남·미혼녀
우리나라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라는 통계가 나오고서 이를 걱정하는 말들이 많다. 정부·자치단체 두루 출산 장려 정책을 내놓을 정도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는 말로 ‘저출산, 미혼남, 미혼녀’들이 있다. ‘출산·미혼’에서 나온 말이어서 새로울 것은 없으나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저출산으로 허덕이는 전국 자치단체에서 아예 결혼 주선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서울신문) “조사 결과 미혼남의 54%와 미혼녀의 40%가 동료와의 데이트에 개방적인 입장을 나타냈다.”(한겨레) “가녀린 심성을 간직한 스물여섯 살의 미혼녀로 그 미모 때문에 하루에 두 번쯤은 길거리의 사내들에게 농지거리를 받는 입장이었다.”(김주영 〈다락방의 초대〉)
이런 말들도 조어법에 어긋나지 않고 널리 쓰이고 있으므로 국어사전에 올림직하다. 또 ‘이혼녀·이혼남’이나 ‘유부녀·유부남’은 사전에 올랐는데, 같은 계열이라 할 ‘기혼녀·기혼남’은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았다. 이 말도 “미혼녀 울린 30대 기혼남 철창행”(신문 제목)처럼 흔히 쓰인다. 이런 말들은 대체로 짝을 이루어 쓰이는데, 짝이 없는 말도 있다. ‘미혼모’는 있지만 ‘미혼부’는 없다. ‘독신’을 ‘싱글’로 쓰는 것도 홀로 사는 이가 늘어나는 한 세태를 반영하는 듯하다. 홀아비·홀어미는 이혼과 상관없이 상대를 여읜 사람을 일컫는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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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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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2) 도대체 여자의 욕심이란 그 끝이 어디일까?(여후)
여후는 유방이 아직 이름도 없던 때에 결혼했던 부인으로, 유방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바로 뒷날의 효혜제와 노원 공주였다. 천하 통일 후, 여후의 억센 성격은 드디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신을 처형하고 팽월을 죽이는 등 공신들을 숙청하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차츰 정치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다. 한편 유방은 한나라 황제가 된 뒤, 척희라는 미인을 얻어 매우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척희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바로 여의였다. 그런데 여후가 낳은 아들, 그러니까 효혜는 워낙 천성이 착하고 나약했다. 그래서 유방은 효혜가 부모의 성격을 닮지 않은 점에 매우 서운해 했으며, 효혜 대신 척희의 아들인 여의를 태자로 세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더구나 여의는 유방을 똑같이 닮아 유방도 그를 매우 아끼고 있었다. 그 당시 척희는 유방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을 때라, 유방이 궁궐을 떠나 여행을 하는 데에도 항상 곁에 있었다. 그러면서 척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아들 여의를 태자로 삼아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여후는 완전히 버림받고 있는 조강지처였다. '색이 시들면 사랑도 식는다'는 말이 역시 정확했다. 여후는 유방의 사랑을 받기는커녕 제대로 얼굴을 맞댈 기회조차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화살이 있어도 쏠 수가 없으니
여의를 태자로 삼아야겠다는 유방의 마음은 더욱 굳어져 가고 있었다. 초조해진 여후는 장량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이에 정량은 궁궐에 들어가 유방에게 몇 번이나 태자를 바꾸지 말라고 간청했지만, 유방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장량은 생각을 바꿔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어느 날 궁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효혜 태자도 와 있었는데, 그 뒤에는 네 명의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80을 넘은 노인들로서 수염이나 눈썹까지 하얗게 새어 있었다. 그들은 차려입은 옷매무새가 마치 신선과 같았다. 그러자 유방이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냐?"
이에 네 노인이 유방 앞에 나아가 각자 이름을 밝혔다. 다름아닌 동원공, 녹리 선생, 가리계, 하황공의 상산사호였다. 이들은 실로 유방이 천하 통일 전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그렇게 찾아다녔던 도인들이었던 것이다. 유방은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아니, 이제까지 내가 얼마나 찾았었는데.... 그간 어디 계셨소? 일부러 나를 피하는 것 같던데...." 이에 노인들이 말했다. "황공합니다만, 폐하께서 인물을 못 알아보시고 곧잘 바보 취급하시는데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태자는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우애로 감싸며, 남에게도 겸허한 태도로 대해 주시기에 모든 사람들이 태자를 따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랬던가...." 유방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면 앞으로도 태자를 잘 부탁하오."
네 노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유방의 장수를 기원하는 술잔을 들고 물러나갔다. 한참 후 유방은 척희를 불렀다.
"나는 정말 여의를 태자로 삼고자 했으나, 태자는 네 도인이 보필하고 있네. 태자에게도 날개가 돋아난 셈이지. 내 힘으로도 어쩔 수 없다네. 그대는 내가 죽은 후 여후를 도와 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척희는 흐느껴 울었다. 그러자 유방은 노래를 읊기 시작했다.
새는 하늘 높이 천 리를 날으네 날개 어느새 굳세어 사해를 건너네 사해를 나는 날개를 어지 막으리오 화살이 있어도 쏠 수가 없으니
척희의 뺨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 뒤 효혜 태자는 태자 자리를 굳게 지킬 수 있었다. 이 모두 장량의 도움 덕택이었다.
사람돼지
그 후 유방이 죽었다. 효혜 태자가 황제로 즉위하고, 여후는 태후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런데 여후에겐 눈엣가시가 있었으니, 바로 척희였다. 유방의 사랑을 모조리 빼앗아가고, 아들 효혜의 태자 자리도 거의 빼앗길 뻔했을 정도로 항상 여후 옥죄어 왔던 척희! 실로 여후는 유방이 살아 있을 때부터 척희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방이 죽자마자, 여후는 척희를 곧장 잡아다가 궁중에서 죄지은 자만 가두는 영항이라는 토굴 감옥에 처넣어 버렸다. 그러면서 척희의 아들 여의도 즉각 입궐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몇 번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여의는 오지 않았다. 대신 주창이라는 신하거 편지를 올렸다.
"선제께서 '여의가 아직 어리니 네가 지켜주어라'는 분부를 내리셨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태후께서 척희 부인을 미워하셔서 여의 왕자님까지 함께 죽이시려고 한다니, 어떻게 보낼 수 있겠습니까?" 편지를 일고 난 여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무슨 말이냐, 두말 말고 그 놈을 끌어와라!" 하고 호통을 쳤다. 드디어 여의는 궁궐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원래부터 우애가 깊었던 효혜제는 여후의 속셈을 알아채고 여의가 궁궐에 도착하기 전에 손수 궁궐밖에 나가 궁궐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잠시도 여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의를 죽일 기회만 노리던 여후도 할 수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효혜제가 사냥을 나가게 되었는데, 아직 어렸던 여의는 일찍 일어나지 못해 궁궐에 홀로 남게 되었다. 이때를 놓칠세라 여후는 사람을 보내 여의에게 독을 탄 술을 먹이도록 했다. 효혜제가 사냥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여의는 차디찬 시체로 변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후의 복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여후는 영항에 갇혀 있던 척희에게 처참하게 복수했던 것이다. 여후는 우선 척희의 수족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는 눈을 도려내고 귀를 찢어 태웠으며, 벙어리가 되게 하는 약을 먹였다. 그것도 모자라 변소 밑바닥에 버리고 '사람돼지'라 부르게 했다. 며칠 후 여후는 효혜제에게 그 '사람돼지'를 보여 주었다. 효혜제는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척희라는 말을 듣자 통곡하다가 그대로 앓아 누웠다. 그리고는 사람을 보내어 여후에게 애원했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제부터 나를 아들로 여기지 마십시오. 나는 이런 식으로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겠습니다."
그 후 효혜제는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가뜩이나 쇠약한 몸으로 매일같이 술과 여자에 파묻혀 지내다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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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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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 29 장. 약품(우연히 발견된 예상 밖의 효과).
페니실린, 설파제, 세팔로스포린, 시클로스포린 등은 우연히 발견되었다. 대부분의 약도 세렌디피티 또는 최소한 유사 세렌디피티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목적에 사용되던 약이 전혀 엉뚱한, 때로는 대단히 중요한 목적에 효과가 있음이 나중에 발견된 경우도 더러 있다. 이 장에서는 그런 타입의 발견의 예를 몇 가지 밝히기로 한다.
아스피린.
이 약은 무척 오랫동안 가장 많이 사용되던 약 중의 하나였으며 최근에 다시 그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처음에 아스피린은 내복용 살균제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효과가 없다고 판명되었다. 그러나 귀중한 진통제와 해열제로 밝혀졌으며, 최근에는 마비를 방지하는 데 추천되고 있다. 조셉 리스터가 외과 수술용 살균제로 페놀을 처음 이용하게 된 직 후, 연구자들은 세균성 질환 환자의 내복용 약을 찾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살리실산이 합성되었으며, 그것이 체내에서 페놀을 생산한다는 것이 알려져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해열의 효과는 있으나 열의 원인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구역질을 일으킨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 후 바이엘 사의 화학자 페릭스 호프만이 살리실산의 개향형으로서 아세틸 유도체를 합성했더니 해열과 관절염의 통증을 억제하는데 효과가 있으며 반갑지 않는 부작용도 적다는 것을 알았다. 아스피린(aspirin)이라는 이름은 살리실산을 처음에 장미과의 조팝나무과(Spiraea)의 식물에서 얻은 데서 유래되고 있으며 접두어인 a는 아세틸을 뜻하여 붙여진 것이다. 1890년대에는 제약업계가 등장한 이래 아스피린은 다른 어떤 약보다도 많이 사용되어 왔다. 심장발작예방효과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시험되지 않는 응용분야이지만, 이미 미국에서는 연간 1800만톤의 아스피린이 생산되고 있으며 이것은 1인당 매년 약 300정에 해당된다.
정신병 치료제.
1950년대 이전, 정신병은 약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었다. 정신분열증, 심한 조울증이나 신경증(노이로제) 등의 환자는 정신병원에 감금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약 10년 가량 동안에 정신병에 치료하는 약이 개발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하는 희망을 갖게 함으로써 정신병원은 사실상 텅텅 비게 되었다. 거의 모든 정신병 치료약의 발견에는 세렌디피티가 얽혀있다.
클로로프로마진 : 1940년대 후반, 프랑스의 정신외과 의사인 헴리라보리는 수술에 앞서 마취보다도 먼저 환자를 안정시키기 위한 약을 찾았다. 수술 전의 불안에 의해서 환자의 체내에 히스타민이 방출된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라보리는 항히스타민제가 이 목적에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라보리는 어느 제약회사로부터 프로메타진이라는 이름이 진정용 항히스타민제를 얻어서 사용해 보았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 그는 좀더 강한 항히스타민테인 클로로프로마진(chlorpromazine)을 구했다. 라보리는 클로로프로마진에 의하여 수술 전의 환자가 '평온한 행복감'을 갖게 되는 것에 강한 감명을 받고 그의 동료들에게도 이 약을 사용할 것을 권했다. 다른 두 사람의 프랑스인 정신과 의사 장 드레와 피에르 드니케르는 이 약이 수술 직전의 외과 환자에게 유용할 뿐만 아니라 조울증 환자를 진정시키는 데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을 포함한 또다른 정신과 의사들이 1952년부터 1955년에 걸쳐 정신병 환자에게 이 약을 사용해 보았더니 정신분열증의 치료에 특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0년 후반, 클로로프로마진은 유럽과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약 10년만에 정신분열증 환자는 그때까지 갇혀 있었던 보호시설의 완충벽으로 둘러싸인 방과 구속하는 옷으로부터 해방되어 사회의 생산적인 일과 거의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주립 정신병원의 환자가 수십만 명이나 감소했으며, 정신장해자를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만든 사회의 정책변화도 강도가 심한 정신병 환자의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 클로로프로마진의 효능 때문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다. 클로로프로마진의 사용은 정신질환의 약물치료에 있어서 두 번째 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임상시험 결과 이 약을 대량으로 투여하면 파킨슨병(뇌질환의 후유증으로서 일어나는 신경증상)과 유사한 증상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뇌의 운동기능을 관장하는 부분에 고농도로 존재하는 신경 전달물진인 도파민(dopamine)은 파킨슨병으로 사망한 환자의 뇌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뇌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도파민으로 변화시키는 화학물질 L-도파를 주사하면 파킨스병 환자의 증상은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스웨덴의 약리학자 아비드 칼슨은 클로로프로마진과 같은 약이 정신분열증을 억제하는 것은, 사실상 도파민 수용체를 막아냄으로써 뇌안에 도파민의 부족상태를 유발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1975년 존스 흡킨즈연구소의 솔로몬 H. 스나이더 박사에 의해서 뇌안의 도파민 수용체의 측정이 가능하게 되면서 클로로프로마진과 같은 항정신분열증 약의 치료 효과가 도파민 수용체의 방응억제에 의한 것임이 확인되었다. 이 발견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뇌의 기본적 이상이 도파민이의 과잉생산이거나 도파민 수용체의 과민화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다.
이미프라민(Imipramine) :정신분열증에 대한 클로로프로마진의 세렌디피터적 성공은 화학적으로 유사한 약을 다수 합성하여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스위스의 제약회사인 가이기(Geigy)사에 의해서 합성된 이미프라민이었다. 롤랜드 쿤 박사는 이것이 정신분열증에는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안 후, 다른 정신질환에 실험해 보았다. 1957년 그는 이 약이 클로로프로마진과 상반되는 약리 효과인 '항우울제'로서 훌륭하다고 보고했다. 리튬(Lithium): 항정신병약으로서의 리튬의 발견은 그야말로 있을 수 없을 뻔했던 일이었다. 1940년대 말엽, 젊은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인 존 케이드는 조울증의 일종인 조병이 요산의 대사 이상으로 인하여 발병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이 가설을 테스트하기 위해 그는 요산을 리튬염의 형으로 해서 탄산르튬과 함께 실험 동물에 주사하여 극적인 치료 효과를 관찰했다. 그는 이 발견을 오스트레일리아의 논문지에 보고했는데 1950년데 중엽까지 그의 관찰 결과에 주목한 정신과 의사는 거의 없었다. 그 무렵 덴마크의 의사 모건스 쇼우가 케이드의 논문을 읽었다. 그는 케이드가 말한 화합물을 조병 치료에 사용해 보았더니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 약의 성분 중 요산 부분은 유효성분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요산이 르튬염의 형태로 사용된 것이 치료 효과의 원인이었으며 다른 어떤 리튬염에서도 마찬가지로 효과가 있는 것을 알았다. 리튬염 따위는 흔해 빠진 것으로서 약으로서도 특허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제약회사는 임상용으로서 대량 제조에 관계하기를 꺼려 했다. 리튬의 임상 사용을 더디게 한 또 다른 원인은 리튬이온을 약으로서 대량으로 섭취하면 화학적으로 유사한 나트륨이온과 몸 안에서 경쟁하여 독성을 나타낼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이 예상되었기 떄문이었다. 그 결과 조울증을 억제하는 리튬의 효과가 발견된 지 20년 이상이 지난 1970년이 되어서야 겨우 리튬이 미국 정신과에서 치료에 받아들여졌다. 이 간단한 리튬이온은 조병의 치료용으로서는 가장 효과가 있는 약제이지만 그 효과의 원인은 아직 해명되지 않고 있다. 리브륨(Librium)과 발리움(Valium): 화학 요법의 역사에 있어서 1960년은 중요한 해였다. 이 해에 발매된 두 가지 약은 사회의 각각 다른 명에서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새로운 진정제 시리즈의 첫 번째 약은 리브륨과 여성호르몬 경구피임약이다(피임약 필의 발견에 관해서는 재20장 에 설명되어 있다). 1960년대에 가장 많이 처방된 리브륨은 1970년대가 되어서 화학적으로 비슷한 성질인 발리움에게 그 수위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 두 가지의 진정제가 개발된 사연은 유사 세렌디피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호프만 라 로슈 사의 레오 스턴바흐는 불안을 치료하는 약의 개발에 착수하고 있었다.
레오 스턴바흐는 1908년, 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일부였으며 그 후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된 풀라반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약학의 석사와 박사학위의 폴란드의 크라쿠프대학에서 받았다. 1940년에는 스위스 바젤에 있는 호프만 라 로슈 사의 연구소에서 일했으나 다음해 미국 뉴저지 주 너틀리에 있는 연구소로 옮겼으며, 1946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 후 그는 1973년 의약품 화학 부장을 마지막으로 호프만 라 로슈 사를 퇴직했다. 1953년 스턴바흐 박사는 새로운 타입의 진정제를 개발할 것을 임명 받있다. 경쟁회사가 같은 약을 개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을 감소하기 위해 핑요한 화학물로는 어느 정도 합성의 연구 노력이 요구되면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물질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화합물은 입수하기 쉬운 출발물질이어야 한다. 게다가 효과가 있는 약을 발견한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 화합물의 기본적인 분자구조가 다수의 유도체로 변환될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스턴바흐는 크라쿠프대학에 있을 때 염료 합성의 출발물질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연구하였던 화합물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화합물군은 새로운 신경안정제로 앞서 말한 희망하는 바를 거의 만족시키고 있었다.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스턴바흐가 합성한 이래 18년 동안이나 아무도 이와 관련된 어떤 연구도 하지 않았었다). 합성은 쉬우며, 생물학적으로 알려진 몇 가지 화합물과 마찬가지로 방향성 고리에 질소원자 하나가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요구되고 있는 진정효과가 없다고 밝혀졌다.
1957년 4월, 스턴바흐는 부하 연구원들에게 이 화합물군에 관한 연구를 끝내고 다른 타입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대청소를 하던 중 한 연구원이 2년 전에 합성되었으나 약리 시험을 하지 않았던 화합물을 찾아내고 스턴바흐에게로 내밀었다. 그는 약리 시험을 해보았자 어차피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여 희망을 포기하고 모든 사람의 관심이 다른 타입의 화합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턴바흐가 매우 놀란 것은 이 소홀히 했던 화합물이 강력한 진정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진정효과도 보이지 않았던 화합물군과 화합적으로 닮았을 이 화합물의 이상한 성질을 알아보기 위해 조사했더니 이 화합물은 그때까지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합성하는 동안에 예상 외의 분자내 전위반응이 일어나 전혀 다른 구조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잊고 있었던 화합물의 구조를 닮은 다른 화합물군을 합성시켜 보았으나 원래의 것보다 효과가 큰 것은 하나도 찾지 못했다. 이어서 신중한 임상시험 후 이 '잊혀졌던 화합물'은 1960년에 리브륨이라는 상품명으로 발매되어 바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미 리브늄이 발매되기 이전에 호프만 라 로슈 사의 연구자들은 리브늄이 체내에서 가수분해될 때 생기는 것으로 여겨지는 화합물이 동일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가수분해 화합물의 여러 유도체를 합성해 본 결과 그 중의 하나가 리브륨보다도 여러 가지 점에서 우수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새로운 약의 상품명은 발리움(일반명은 디아제팜)이라고 명명되었다. 1963년에 발매되어 신경안정제로 리브륨과 교체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강력한 진정효과를 지닌 정신분열증 치료제인 클로로프로마진과 항우울제인 이미프라민이라는 두 가지 약이 서로 닮은 분자구조로 되어 있으면서도 거의 상반되는 약리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리브늄과 발리움도 닮았으나 똑같지는 않다(약으로서 유용한 것은 아니지만 강력한 강력한 항정신성 물질인 LSD의 우연한 발견에 대해서는 제20장에서 설명했다.) 발리움이 발매된 이후 미국에서는 유사한 화학 구조의 약이 12종류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으며,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규제가 미국보다 엄하지 않는 점도 있고 하여 그 외에도 21종류가 판매되고 있으나 리브늄과 발리움의 우연한 발견 후에는 진정제의 분야에서 기본적인 약리학적 진보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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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왕희지의 필법과 한퇴지의 문장으로 일컬어진 김구
김구(1488-1534)의 본관은 광주이고, 자는 대유, 호는 자암이다. 예조 판서 김예몽의 증손이다. 16세에 한성시에 장원하고, 중종 2년(1507)에 생원, 진사시에 모두 장원하였으며, 동왕 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 때에 부제학으로서 개령으로 귀양갔다가 남해로 옮겨 섬 속에서 13년을 지내는 동안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중종 26년에 임피로 옮겼다가 동왕 28년에 석방되자, 예산으로 달려가서 부모의 분묘에서 곡하고 추모의 정을 펴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분묘에 올라 눈물을 흘리니, 그 자리에 있던 풀과 나무가 다 말라 버렸다. 그로 인해 병이 들어 1년 만에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김안국이 소싯적에 생원, 진사의 회시에 모두 장원이 되었는데, 방을 발표할 때에 "한 사람이 두 장원이 될 수 없다" 하여 진사는 2등이 되니, 평생 그것을 한으로 여겼다. 김안국이 시관이었을 때 김구가 생원, 진사시에 모두 장원이 되자, 모든 시관이 "한 사람이 두 장원이 될 수 없다" 하였지만, 김안국이 분연히 말하였다. "왕희지의 글씨와 한퇴지의 문장으로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김구는 드디어 두 장원이 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그 이듬해인 중종 15년(1520) 봄에 김구의 부인이 말 한 필에 짐 한 바리를 싣고 종 5, 6명을 데리고 김구의 적소를 따라갔다. 그때 김식이 도망 중이어서 현상을 걸고 그를 체포하는 영이 매우 엄하여, 갈림길에 나졸들이 늘어서서 지키며 여행자는 모두 수색 검문한 뒤에야 보냈다. 경상감사 반석평이 노상에서 한 부인의 행차가 붙잡혀서 가지 못하고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측은하게 여겨 양곡을 주고 또 감영의 소속 아전을 시켜 그 일행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김구는 마침내 죽림에 집을 짓고 살았다. 김구는 문장이 기이하고 필력이 굳세어서, 위의 종유와 진의 왕희지의 필법을 사모하여 본받았다. 중국 사람이 자기 글씨를 귀중하게 여긴다는 말을 들은 뒤로 글씨를 쓰지 않아서 필적이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김구의 필법을 '인수체'라 했으니, 이것은 김구가 인수방에 살았기 때문이다.
김구가 한번은 옥당에 당직하고 있을 때이다. 달밤에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므로 나가 보았더니, 임금이 걸어서 옥당까지 오고 별감이 술을 가지고 따라왔다. 김구가 종종 걸음으로 나가 엎드리자 임금이 말했다.
"달이 이처럼 밝으므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내가 이곳에 이르렀다. 어찌 임금과 신하의 예로 대하랴. 마땅히 벗으로 서로 대해야 한다"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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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지교
형세의 빈부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는 교우를 말한다. 관중은 춘추시대 초기의 제나라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포숙아는 관중의 비범한 재주에 심취되어 언제나 좋은 이해자요, 또한 동정자였다. 훗날 관중은 제나라의 공자 규를 섬기고 포숙아는 규의 아우인 소백 공자를 섬겼다. 그런데 그 공자의 아비인 양공이 사촌네 공손 무지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자 관중은 규를 모시고 노나라로 망명했으며 포숙아는 소백을 모시고 거나라로 망명하였다. 이윽고 공손 무지가 죽음을 당하니 규와 소백 두 공자가 제왕의 자리를 다투게 됨에 따라 관중과 포 숙아는 서로 적수가 된 형국이었다. 관중은 규를 왕위에 올리기위해 소백의 목숨을 노렸으나 실패. 소백이 마침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이름 높은 제나라의 환공이다.
규는 환공의 지시로 망명처인 노나라에서 죽고 그를 추종하던 관중은 제나라로 붙들려 오게 되었다. 환궁으로서 보면 관공은 지난 날 자기의 목숨을 노린 자이니 목을 칠 생각이었으나 관중의 옛 친구인 포 숙아가 환공에게 아뢰었다.
"나랏님께서 제나라 하나만을 다스리려면 모르되, 천하를 잡으시려거든 모름지기 관중의 정치적인 재능을 활용토록 하소서"
환공은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던 만큼 신뢰하는 포숙아의 충고를 받아들여 관중에게 대부라는 벼슬자리까지 주었다. 관중은 국민경제의 안전에 입각한 덕본주의로써 어진 정치를 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시대의 다섯 패자 중의 일인이 되게 하였다. 훗날 관중은 포숙아를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젊은 시절에 가난하여 포군과 함께 장사를 했는데 그 이득은 언제나 내가 더 많이 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또한 내가 그를 위해서 한 노력이 실패하여 그가 도리어 궁지에 빠진 적도 있었으나 그는 나를 어리석은 자라고는 하지 않았다. 일에는 실패가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나는 또 몇 번이나 벼슬을 하다가도 파면되었으나 그는 나를 무능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아직 내 운수가 트이지 않았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싸움터에서도 몇 번이나 패배하여 도주했건만 그는 나를 비겁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연로하신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또한 내가 사로잡혀 왔을 때도 그는 나를 몰염치하다고는 보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떨치지 못하는 것만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줄을 아는 까닭이었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로되 나를 알아준 이는 포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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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스물일곱번째 이야기 새끼 여우 베니티요
어느날 여우가 새끼 여우를 데리고 늑대에게 찾아가 자식에게 세례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응한 늑대는 새끼 여우에게 베니티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해준 후에 여우에게 말했다.
"여우야, 내가 네 아들을 키워서 기술도 가르치고 교육도 시킬 테니 허락해다오. 내가 아는 기술들을 모두 전수시켜줄 테니 나와 같이 있는 게 네 아들한테도 이로울 거야. 다른 자식들도 많이 있는데 네가 그 자식들을 모두 다 제대로 키우려면 얼마나 고생이겠느냐." 여우가 대답했다. "당신 생각대로 하세요. 저를 잊지 않고 이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래서 베니티요는 늑대와 남고, 여우는 다른 자식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늑대가 양을 잡아먹기 위해 베니티요를 데리고 양떼들이 머무는 목장으로 갔다. 하지만 개와 목동들에게 들켜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깊은 산 속으로 도망쳤다. 늑대가 양자인 베니티요에게 말했다. "오늘밤 양떼들을 습격했더니 몹시 피곤하구나. 눈을 좀 붙일 테니 너는 망을 보고 있거라. 풀을 뜯어먹으러 나온 동물들이 있는지 잘 살펴보고 있다가, 보이는 놈이 있으면 즉시 나를 깨우도록 해라. 그래야 출출한 배를 채우지." 다음날 아침 베니티요가 늑대를 깨웠다. "대부님, 대부님." "왜 그러느냐, 양자야." "돼지들이 나왔어요." 늑대가 말했다. "돼지는 지저분하고 거친 동물이니 그냥 내버려두자. 나는 어째 돼지만 먹으면 속이 영 거북해지고 입맛이 나빠지더구나." 잠시 후에 베니티요가 다시 늑대를 흔들어 깨웠다. "대부님." "무슨 일이냐, 양자야." "소들이 풀을 뜯어먹으러 나왔어요." 늑대가 대답했다. "잔인하고 힘센 목동들이 소들을 지키고 있는 데다가 못되고 용감무쌍한 개들도 있으니까 소들은 그냥 내버려두자. 개들이 나를 보면 목이 터져라 짖어대면서 죽을 때까지 달려들 거야." 잠시 후에 베니티요가 다시 늑대를 불렀다. "암말들이 나왔는데요." "말들이 어디고 가는지 잘 살펴보거라." "저기 산 중턱에 너도밤나무가 많이 있는 초원에 있어요." 그 말을 들은 늑대는 말이 있는 초원까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다가가서는 제일 통통하게 살찐 말을 골라 그 위에 올라탄 후 질식을 시켰다. 배불리 먹은 베니티요가 늑대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대부님. 저도 이제 혼자서 인생을 개척할 만큼 강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님의 놀라운 기술도 배웠고요. 이제는 엄마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늑대가 베니티요를 만류했다. "아들아, 안 가면 안 되겠니? 넌 아직 충분히 배우지 못했단다. 지금 떠나면 곧 후회하게 될 게다." "그래도 저는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늑대는 떠나겠다는 베니티요의 결심이 완강한 것을 보고는 말했다. "정 그렇다면 가거라. 하지만 곧 후회하게 될 거다. 가서 네 엄마에게 안부나 전해주렴." 베니티요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아들을 보자 여우가 말했다.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온거니? 공부는 다 끝났니?" 베니티요가 대답했다. "더 이상 배울 게 없어서 일찍 돌아온 거예요. 이제 엄마도 고생하지 않으셔도 돼요. 앞으로는 내가 엄마와 동생들까지 다 배불리 먹일게요." "아들아, 어디서 뭘 그리 빨리 배웠다는 거냐?" "엄마, 질문은 이제 그만 하시고 그렇게 궁금하면 저를 따라오세요. 제가 얼마나 뛰어난 사냥꾼인지 직접 보시면 되잖아요."
여우는 너무나 자신만만한 아들이 미덥지는 않았지만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아들을 따라갔다. 베니티요는 늑대가 했던 대로 날이 어두워지자 양을 잡아먹으러 목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양을 잡지 못하자 다시 높은 산 위로 올라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도 잘 아시다시피 오늘밤에 양을 사냥하느라고 제가 피곤하고 많이 지쳤어요. 잠깐 눈을 좀 붙일 테니까 엄마는 망을 보세요. 풀을 뜯어먹으러 나오는 동물들이 있는지 잘 보고 있다가 저를 깨우세요. 그러면 제가 배운 걸 어떻게 써먹는지 보시게 될 거예요. 엄마에게 제가 알고 있는 지식과 재주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다음날 아침 여우가 아들을 깨웠다.
"엄마, 왜 그래요?" "돼지들이 나왔다." 베니티요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돼지들은 더럽고 지저분한 데다가 성질이 고약하니까 그냥 내버려두세요. 그걸 먹으면 소화도 안 되고 입맛만 떨어져요." 잠시 후에 엄마 여우가 다시 아들을 불렀다. "소들이 나왔다." "소들은 성질이 고약한 개와 목동들이 지키고 있어서 너무 위험해요. 개들이 나를 보면 마구 짖어대면서 내가 지쳐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을 때까지 악착같이 따라올 거예요." 잠시 후 여우가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엄마 여우가 대답했다. "암말들이 풀을 뜯으러 나왔다." 그 말을 들은 베니티요가 반색을 하면서 기분이 들떠 말했다. "엄마, 말들이 어디로 가는지 잘 보고나서 돌아오세요." 엄마 여우가 돌아와서 암말들이 산 근처에 있는 초원으로 들어갔다고 일러주자 베니티요가 말했다. "엄마는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내가 하는 걸 잘 지켜보세요. 내가 얼마나 영리하고 용감한지 곧 알게 될 거예요."
베니티요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말들이 있는 곳으로 살금살금 숨어들어가서, 제일 통통하게 살찐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선생인 늑대가 했던 것처럼 말을 질식시켜 죽이려고 말의 코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암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코에 매단 채 목동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산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엄마 여우가 애가 타서 아들을 불렀다.
"베니티요야, 말은 내버려두고 어서 돌아와."
하지만 베니티요는 말의 코에 이빨이 박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목동들이 달려나와 베니티요를 몽둥이로 때리는 광경을 보자 엄마 여우는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고, 내 아들 베니티요야! 그러길래 왜 그렇게 빨리 돌아왔니. 이제 사람들이 너를 죽일 텐데 이를 어쩌나. 그래 겨우 이 어미의 가슴에 못을 박으려고 일찍 돌아온 거니? 네 스승인 늑대의 말을 들었어야지."
* 완벽하게 배울 때까지는 겸손한 자세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보다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을 얕잡아봐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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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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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9. 두 얼굴의 과거제도 (획일적인 인재 양성)
사람을 뽑아 쓰는 일
한 사회의 저력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평균적 능력에 의해 평가된다. 아울러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얼마만큼 다양하고 깊이 있게 개발되어 있는가 하는 점도 매우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이런 판단기준은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과도 관련되는데, 이런 문화적 수준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교육제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인재를 어떻게 양성하며 인재에 대한 판단기준이 어떠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교육제도인 탓이다. 전근대사회의 경우 교육제도의 꼭대기에는 늘 관리선발제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교육의 최고 목표는 대부분 관리가 되는 것이었으며, 관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더라도 국가로부터 일정한 자격을 인정받음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전근대시대의 문화적 수준을 살펴보려고 할 때, 그 시대의 관리선발제도를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전근대사회의 관리선발제도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스스로 관리가 되겠다고 나서는 자천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에 의해 관리로 추천받는 타천이었다. 자천에는 일정한 시험을 거치는 과거와 재능을 시험받아 선발되는 취재가 있었고, 타천에는 혈통을 보고 관리를 선발하는 음서와 인물됨을 보고 남이 추천해서 관리로 선발되는 천거가 있었다. 또 관리선발제도는 능력이나 인물됨을 보고 뽑아 쓰는 제도와 혈통에 다라 관리가 되는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후자에 비해 전자가 사회발전의 유리한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능력이 인품을 보고 인재를 선발할 경우, 선발하기 위한 객관적 기준이 세워져야만 한다. 과거제도는 바로 이런 기준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런 면에서 과거제도는 상당히 발전된 사회제도라고 할 수 있으며, 과거의 시험내용은 그 사회의 문화적 저력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관리선발제도에 관한 한, 지식인적인 전통을 존중하던 한족이 기마종족보다 단연 앞서는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6세기 말(587)에 이미 과거를 실시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400여 년이나 늦은 958 년(광종 9년)에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과거 실시의 배경
잘 알려진 대로 고려는 여러 실력자들의 연합에 의해 세워진 국가였다. 다양한 성향을 가진 지방 실력자(이른바 호족)들이 남조신라 말기부터 독자적인 세력권을 쌓으면서 서로 경쟁했고, 이런 경쟁은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남조신라를 존중하는 세력도 있었고, 이미 멸망해버린 고구려나 백제를 동경하는 세력도 있었으며, 전통문화를 앞세우는 세력과 불교 및유교를 존중하는 세력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세력근거지는 내륙과 바다에 고루 흩어져 있었다. 이른바 '후삼국시대'(남조신라,대진 남북국시대 중에 '남조신라 분열기'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는 이런 세력들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나름대로 남조신라를 대신할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던 시기였다. 이들은 먼저 자신들만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지역적인 연합을 시도했다. 멸망해가는 남조신라를 중심으로 반도의 동남부가 하나의 세력권을 이루었으며, 이들은 남조신라의 권위를 자신의 힘으로 활용하려 했다. 다른 실력자들은 반도의 서남부에서 멸망한 백제의 부활을 내세우며 상당한 세력권을 이루었다. 그리고 반도의 중북부에서는 고구려의 부활을 내세우는 실력자들이 연합해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이루었다. 그러나 남조신라를 내세우는 호족들의 연합은 본질적으로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해버린 남조왕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남조신라를 내세우는 호족들은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도 없었고, 따라서 후고구려와 후백제 등 신흥왕조의 세력다툼에서 합당한 명분과 더불어 자신의 기득권까지 보장받을 수 있으면 언제든지 그들과 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은 후고구려의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호족대표로 선출된 고려 태조 왕건이었다. 그는 수수방관하던 남조신라계의 호족들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여 마침내 남조신라의 모든 영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고려의 남조신라 통일과 더불어 반도 내부에 존재하던 친신라적,친고구려적,친백제적 갈등은 어느 정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들 호족들은 이제 나름대로 독특한 문화를 내세우며,새로운 왕조의 실력자로 등장하려고 했다. 고려의 임금들은 이들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들의 갈등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는 한 분열과 혼란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었다. 특히 초대 통합대표였으며 가장 강력한 실력자였던 태조 왕건이 죽은 뒤, 이런 위험성은 현실로 드러나 호족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왕위다툼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4 대 임금이었던 광종은 이런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서 왕권을 한층 강력하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는 먼저 호족들의 인력자원에 타격을 주면서 왕실의 수입원을 늘리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했다. 즉 호족에 의해 근거 없이 노비가 된 사람을 다시 평민으로 복권시켜줌으로써, 호족에 대한 1차 견제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왕실을 유지하고 왕조를 합리적으로 운영할 인재들을 뽑는 일이었다. 그래서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한지 두 해가 지나자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물론 호족들의 지나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호족들의 자제를 관리로 선발하는 음서를 아울러 실시했다. 과거제도는 일반적으로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는 나라가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이 제도는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중앙관료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시행되었다. 고려 광종도 한족 출신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려 건국에 참여했던 호족들이 유교를 그리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도 과거 실시의 주요한 배경이었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남조신라의 6두품 출신들이 지방호족들과 결탁하기도 했지만, 지방 호족들은 대체로 불교와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있었다. 특히 남조신라 말기에 유행한 선종불교는 지방호족들의 이념적 토대가 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학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할 경우 지방호족들의 이념인 선종불교를 견제할 수 있었고, 선종불교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의 폐쇄성을 돌파할 수 있었다. 즉 유학은 물밑에 가라앉아 있던 지방색을 잠재웠고, 폐쇄적인 지방색을 중심으로 독자적 세력을 쌓아가던 호족들을 악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권력의 강화와 지방색의 통합
과거제도는 고려시대의 사정으로 보아 매우 적절한 제도였다. 과거제도는 남조신라의 유물인 골품제도의 벽을 상당히 허물었으며, 지식과 능력의 기준을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 기준의 근거지인 왕실도 이 제도로 말미암아 상당히 인정되었다. 과거를 볼 수 있는 고려시대의 지식인들은 모두 유학을 공부했으며, 유교의 경전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교과서가 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과거시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상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것은그 어떤 사상통제보다 효율적인 것이었다. 관리선발제도를 통해 국가가 사상을 통제한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중앙에서 모든 지방에까지 관료를 파견할 수 없던 초기의 고려왕조는 과거제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방을 통제할 수 있었다. 과거제도는 중앙정부가 지방을 통제하도록 기여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당시까지 상당히 남아 있던 지방 정서의 적대적 성격을 완화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각 지방 실력자들의 자제는 공통적으로 시험과목인 유학을 학습했고, 설령 과거를 보지 않고 음서를 통해 관료로 진출할 경우에도 유학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지방색이 강한 선종불교에 기대어 지방을 독자적 세력권으로 가꾸어가던 호족들의 문화는 유교문화에 의해 차츰압도되어 갔으며, 전통사상과 전통적인 생활습관 속에도 유교적인 문화가 깊이 스며들었다.
고려의 과거에는 크게 제술과와 명경과 및 잡과가 있었다. 그 가운데 제술과와 명경과는 모두 유학의 공부 수준을 시험하는 과목으로서, 여기에서 급제하면 문신이 될 수 있었기에 고려시대에는 이 두 과목을 일러 '양 대업'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과거의 비중이 높아진 것이다. 제술과는 유학이론의 창조적 적용능력을 시험했으며, 명경과는 유교 경전 그 자체를 시험했다. 대부분의 응시자들은 제술과를 지원했다. 고려시대를 통틀어 제술과는 급제자는 7천여 명인 데 비해 명경과 급제자는 겨우 400 명을 넘는 것에서 이런 사실은 잘 입증된다.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해 유교를 시험했다지만, 전통사상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과거제도에는 그런 것을 시험하는 과를 설치하여 명분을 쌓았는데, 잡과가 바로 그것이다. 잡과는 전통사상과 관련된 실용적 지식을 시험하는 과목으로 처음에는 의업과 복업만을 시험 보다가 뒤에 많은 과목들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과목들도 차츰 중국적 기준에 따라 실시되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고려왕조는 과거제도를 통해 사회적 기능까지 표준화하기에 이르렀던 셈이다.이런 기능들의 표준화는 다른 과목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지위를 높이 끌어올리고, 지방색의 적대적,독자적 성격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획일화되는 사회
고려청자는 세계적인 명품이지만, 오늘날 우리 겨레는 그것을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한다. 조선시대의 청화백자도 마찬가지이며, 그 밖의 숱한 기술들도 그런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 재능을 거의 그대로 또는 좀더 발전시켜서 보유하고 있다. 중국에도 과거제도가 있었지만, 그 시험내용이 고려나 근조선에서처럼 획일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려시대나 근조선의 과거제도는 매우 획일적인 능력을 요구했다. 더구나 고려시대의 제술과나 명경과 및 근조선의 문과는 절대적인 것이어서, 그 밖의 다른 과목은 주목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물론 다른 과목들도 그 나름대로 인재를 선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귀족 신분과 걸맞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신분적 지위를 지키고 사회적으로 많은 권리를 가지려면, 과거를 통과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철저한 유학자가 되어야 했다. 과거제도가 신분제도와 맞물리고 특정한 사상과 결합되면서, 마침내 사회사상도 획일화되어 갔다. 과거와 관련되지 않은 공부, 곧 유학과 관련되지 않는 공부는 점차 퇴보되기 시작했다. 물론 과거가 처음 시행된 고려시대에는 아직 그런 현상이 눈에 두드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김부식과 같은 인물의 등장은 그런 추세를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준다. 과거시험의 대상이 되면서 유학적 사상은 엄청나게 연구되었다. 그래서 유학이 성립된 중국보다 고려나 조선에서 엄밀한 이론적 성과가 나온 것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최충이 해동공자로 불리고, 뒷날 근조선에서 이황이나 송시열이 아성으로까지 숭앙된 것도 결국 과거제도가 물고 온 유학돌풍과 무관하지 않다.
유학의 놀랄 만한 발전과 획일화된 사회상은 유학이 아닌 다른 사상과 중국적이지 않은 다른 뛰어난 재능의 쇠퇴를 몰고 왔다. 아무리 뛰어난 지식과 재능이라도 그것이 유학적이지 못하거나 과거시험의 기준과 일치하지 않으면, 결국 소멸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지적 연구와 재능이 계승되지 못한 채, 획일화된 사회에 의해 천박한 것으로 배척되었다. 우리 겨레의 전통사상인 하늘사상은 유학자들에 의해 정도가 아닌 삿된 지식으로 배척받았고, 심지어 근조선에 이르러서는 불교조차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근조선의 경우 하늘사상의 계승자나 불교 수련인들은 (준)천민 대우를 받았으며, 전통적인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천민 대접을 받으면서 차츰 그 재능을 후대에 전수해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는 점차 획일화되어 다양하고 창조적인 사상을 내놓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근조선 중기의 사상적 정체는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현상들이 바로 고려시대의 과거제도, 특히 유학만을 시험하는 시험제도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그러므로 과거제도는 고려사회를 안정시킨 역할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 다양성과 창조성을 잠재운 역할까지 함께 떠맡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뛰어난 적응력과 우수한 잠재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성과 다양성에 뒤진다는 평가를 듣는 것도 어떤 면에서 1천여 년 전의 과거 실시와 무관할 수 없다. 더구나 어리석은 교육제도를 통해 그런 획일화가 거듭되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과거 제도를 작은 겨레의 한 원인으로 꼽아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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