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292 호
단기 4340. 11. 1 (음력 9. 2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발행지가 길어질 경우 하단부분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문학소식
|
한국건축가협회 건축에세이 공모
|
|
|
|
‘좋은 거리, 좋은 건축’ (해제: 홈페이지/상세요강 참조) |
|
|
- 학생부문 : 초, 중, 고등학교 재학생 및 만 18세 이하 청소년 - 일반부문 : 도시와 건축에 관심 있는 모든 분 |
|
|
- 제출형태 : A4(210x297)용지에 2p분량으로 자유롭게 기술 - 편집형태 : 상세요강 참고 - 사용언어 / 툴(tool) : 국문 또는 영문 / 한글2002, MS-Word2003 이하 버전 |
|
|
- 출품방법 : 공모전 웹사이트(http://convention.kia.or.kr)에서 온라인 접수 및 파일 업로드 - 접수 및 제출기간 : 2007년 10월 1일(월), 11:00am ~ 2007년 10월 26일(금), 6:00pm |
|
|
없음 |
|
|
학생부문과 일반부문으로 나누어 부문별로 3명, 총 6명 수상(각 상금 20만원과 상장) |
|
|
2007년 11월 2일(금), 공모전 홈페이지(http://convention.kia.or.kr)및 개별통지 |
|
|
- 출품작의 사용권은 본 협회에 귀속됨. - 출품작은 반환하지 않음 - 제출형태와 편집형태가 제출규정과 심히 다를 경우 심사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음. - 1인 1작을 원칙으로 함 - 접수된 원고는 수정 불가 - 원고에는 지원자의 소속이나 이름이 있어서는 안되며 글씨이외에 그림이나 다른 기호 등도있으면 안 됨 - 초중고 부문 지원자중 입상자는 결과발표 후 일주일이내 재학증명서를 제출하여야 함 - 상세요강을 꼭 다운로드 받아보십시오 |
|
|
(사)한국건축가협회 / 평론분과위원회 |
|
|
http://convention.kia.or.kr 질의/응답 게시판에 게시하여 주시면 수 시간 내에 답변하여 드립니다 |
|
|
|
글터 → 명언 / 격언
|
상식은 본능이요, 그것이 많은 사람은 천재. / 조지 버나드 쇼
|
|
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옳고 그름을 분별하라
가난하여 농토를 사는 것은 본래 의리에 크게 손상되는 일이 아니며 값의 높고 낮음을 따져서 비싼 것을 깎아 알맞은 시세에 따르려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이다. 다만 한 번이라도 자기만을 이롭게 혹 남을 이기려는 생각이 있으면, 이는 곧 선과 악이 분별되는 분기점인 만큼 반드시 재빨리 전신을 바로잡아 옳고 그름을 판별하여야 비로소 소인배를 면하고 군자가 될 수 있다. 굳이 농토를 사지 않는 것이 고상하다고 여길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일에 마음을 오래 쓰면 인생의 헛된 함정에 빠지기 쉬우므로 항상 마음을 착실하고 꼼꼼하게 가다듬어 타락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
|
|
글터 → 철학 / 사상
|
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2 장 과학 철학
인간의 행위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 우기동
인간의 행위를 '생물학적 특성과 사회 환경적 특성의 상호 작용으로 설명할 수 없을까?
인간의 특성을 살펴볼 때 첫 번째 고려 사항은 인간의 '자연적, 생물학적 기원'이다. 각 개인의 삶은 일정한 '생물학적 주기'에 따라 진행된다. 사람은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죽는다. 또한 사람은 먹고 마시고 쉬고 잠자야 하는 생물학적 요구와 항상적인 성적 욕구 등을 지닌다. 그리고 사람은 생물학적 기초에 바탕을 두고 있는 성, 나이, 인종 등에 의해 서로 구별된다. 따라서 사람은 자연의 아들이다. 인간의 사회적 발전은 바로 이러한 생물학적 기초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생물학적 기초는 사회적 조건의 영향 아래서 변형되며, 특정한 사회적 결과들을 낳는다. 가령, 지리적 환경은 인간의 외양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문화 형태의 차이를 낳는다. 피부색이 다르고 음식 문화가 다른 것은 바로 지리적 환경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리적 환경의 차이가 인간 본성의 차이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리적 영향 때문에 생긴 피부 색, 머리카락 등 단순히 외양적인 '인종적 차이'가 생물학적 결정론의 관점에서는 인종 차별과 인종간의 투쟁이라는 엄청난 사회적 결과를 낳는다. 실제로 인종적 차이는 인간의 본성을 결정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적 차이를 사회적 차이로까지 확대하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독특한 생물학적 특성을 지닌 개인은,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장소에서 태어난다는 사실로 인해 특정한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은 어느 정도 개인의 성격과 장래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을 통해 인간이 사회적으로 적응하고 영향을 받는 모습을 살펴보자. 어린아이는 일단 생물학적으로 부모와 종족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부모의 노동에 의존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울음으로 부모의 보살핌을 강요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보모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어리광이나 애교를 부릴 줄도 알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른들이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구태여 명령하지 않아도 아이가 스스로 규칙을 준수하게 자신을 절제할 줄 알면 그 아이는 철이 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아이들이 한편에서는 부모에게 의존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규칙을 지키는 것은 가족이라는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적응 과정은 학교 생활에도 일반 사회 생활에도 그대로 연결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행동 양식이나 특성이 결정된다.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학파를 '생물학의 변증법 그룹'이라고 한다. 이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을 생물학적 특성과 문화(사회적 환경) 사이의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들은 생물학적 결정론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지만, 도시에 문화 결정론도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 방식이 잘못 되었다고 본다. 특히 이들은 과거의 나치와 같은 극우 정권이나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이래 영국과 미국에서 집권한 보수 정권이 생물학적 결정론 연구를 부추기고 지원하여 그 연구 결과를 사회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고 비판한다. 생물학의 변증법 그룹은 자신들의 입장을 '해방적 과학', '비판적 과학'이라고 한다. 해방적 과학, 비판적 과학은 거짓된 과학성으로 위장하여 지배 계급에 봉사하는 과학을 타파하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글을 맺으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의 본성, 인간의 행동 양식을 설명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몇 가지 다른 입장들을 살펴보았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행위를 생물학적 유전자의 특성을 통해 설명한다. '문화 결정론'은 사회적인 환경, 특히 문화로 설명한다. 그리고 '생물학의 변증법 그룹'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의 행동 양식은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동시에 형성된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본성이나 우리의 행위와 떨어져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행위를 둘러싸고 엄청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세 입장이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이론이다. 각 입장의 핵심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각 입장의 장단점을 논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특정한 입장을 취할 수도 있고 특정한 주장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 경우에는 반드시 주장에 대한 근거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참고 문원
S.로즈외,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한울, 1993.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삶, 사회, 그리고 과학', 동녘, 1991 R.도킨스, '이기적인 유전자', 동아, 1992. D.모리스, '털 없는 원숭이', 정신세계사, 1992. 서유헌 외, '인간은 유전자로 결정되는가', 명경출판사, 1995.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두문불출
본뜻 : 이 말에는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에 얽힌 역사가 들어 있다. 이성계가 역성 혁명을 일으킨 뒤 고려의 유신 72명이 새 왕조를 섬기기를 거부하고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두문동에 깊숙이 들어가 죽도록 나오지를 않았다 한 데서 생긴 고사다.
바뀐 뜻 : 집에만 있고 바깥으로 나다니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김 군이 이 더운 여름에 두문불출하고 있다니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냐? -직장을 그만 두고 3개월 동안 두문불출 하고 있었더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
소설속 고장말
괜찮은 소설들을 읽다보면 모를 말들이 꽤 나오는데도 그냥 큰 줄거리를 따라 어림으로 읽고 지나친다. 박경리의 소설〈토지〉에는 ‘가이방하다’(비슷하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전북 방언 화자인 필자는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깝치다’가 나와서 ‘까불다’가 아닐까 생각했더니 ‘재촉하다’는 뜻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는 ‘느자구’(싹수)가 나오는데 필자는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다. ‘비문하다’(어련하다), ‘왈기다’(으르다), ‘종그다’(노리다), ‘뜨광하다’(뜨악하다) 등 그동안 들어본 적이 없는 낱말들이 상당히 많다.
최명희의 소설〈혼불〉을 보면 ‘보독씨리다’(부리다·넘어뜨리다), ‘애돌하다’(안타까워하다), ‘사운거리다’(살랑거리다) 등 전북 사투리가 많이 나온다. 다른 방언의 화자들이 잘 모르는 말들이다.
소설에는 지역에서 사용하는 독특한 말들이 숱하게 녹아서 실려 있다. 그런데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어려운 고장말을 독자들이 이해하지 않은 채 읽고 넘긴다. 방언사전과 어휘사전이 일부 나와 있기는 하지만 일반인들이 구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독자들은 소설에 나오는 고장말을 이해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문제를 해결하자면 우선 지방 정부가 지역 언어를 다루는 정책을 제대로 펼쳐야 한다. 중앙 정부도 표준어 정책과 아울러 방언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각 고장말 조사·보급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댓글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인터넷 문화와 관련된 새말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인터넷 게시판에 오른 글을 보고 새로운 의견을 피력하는 짧은 글을 영어권에서는 주로 ‘코멘트’(comment)라 하고 우리는 ‘리플라이’(reply)를 줄여 만든 말인 ‘리플’ 혹은 ‘댓글’이라는 말을 썼다. ‘리플’과 ‘댓글’ 두루 200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리플’은 국어원에서 2004년에 우리말 다듬기 말터 사이트(malteo.net)를 만들면서 초창기에 다듬을 대상으로 삼은 말이었다. 그런 영향인지 처음에는 ‘리플’이 강세였다가 요즘에는 ‘댓글’이 많이 쓰인다. 이런 추세는 방송에도 반영이 되어 한 방송 프로그램의 ‘리플하우스’라는 꼭지가 없어지고 대신 ‘공감 댓글’이라는 꼭지가 생겼다. 프로그램의 성격이 우리말에 대한 관심을 이끄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함께 바뀐 것이어서 더욱 반가운 일이다. ‘댓글문화’라는 말이 백과사전의 올림말이 된 것을 보아도 ‘댓글’이라는 말이 제대로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국어원에서는 서툰 외래어나 외국어를 대신할 우리말로 된 새말을 국민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모티콘’ 대신에 ‘그림말’을, ‘네티즌’ 대신 ‘누리꾼’을, ‘메신저’ 대신 ‘쪽지창’을 쓰자는 것이다. ‘댓글’이라는 새말이 정체불명의 영어 ‘리플’을 누르고 자리를 잡았듯이 쉬운 우리말로 된 새말들이 더 널리 쓰이기를 기대한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
|
|
글터 → 세계사
|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1) 유방이 천하를 얻은 이유는?
큰 바람 일어나 구름 날아오른다. 천하를 덮는 위세와 더불어 고향에 돌아오니 어찌 용맹한 자와 더불어 이 땅을 지키지 않을 것인가!
유방은 천하 통일을 이룬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인 패에 돌아와 잔치를 벌이고 이 노래를 불렀다. 유방은 노래를 부르며 일어나 춤을 추었고 감개무량해 눈물까지 흘렸다. 이름하여 대풍가이다. 난세에 큰 뜻을 품고 일어나 여러 영웅들의 도움을 받으며 천하를 평정하고 금의환향한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용맹스러운 부하들의 도움으로 천하를 지키겠다는 희망도 드러내고 있다. 일찍이 유방은 신하들 앞에서,
"그대들은 왜 항우가 천하를 잃고 내가 천하를 얻었다고 생각하는가?"하고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이때 왕릉이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부하들을 가볍게 생각하시는데 반해 항우는 솔직하며 부하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부하에게 성을 공략케 한 후 항복해 오는 자를 부하가 부리게 하고 땅과 재물을 똑같이 나누십니다. 이에 비해 항우는 현명하고 재주있는 부하를 시샘하고 공이 있는 부하를 의심합니다. 그래서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부하에게 공을 돌리지 않고 재물을 얻어도 부하에게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항우는 비록 70번에 걸쳐 계속 승리했지만 결국 이 때문에 천하를 잃은 것입니다." 그러자 유방이 말했다. "좋은 말이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오. 장막 안에서 계략을 짜서 천 리 밖의 승리를 이끌어 내는 면에서 내가 장량을 따르지 얻게 된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렇게 훌륭한 이들을 잘 활용하였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천하를 얻게 된 것이오. 하지만 항우는 천하의 재사인 범증이 있었지만 활용하지 못했소. 그것이 나에게 사로잡힌 이유인 셈이오."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
유방이 '대풍가'를 부른 것은 반란을 일으켰던 경포를 토벌하고 돌아오던 길에 고향을 들었을 때였다. 더구나 그는 그 토벌전에서 화살을 맞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찍이 장량이 해하 전투에 앞서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장군들이 필요하다'고 했던 한신, 팽월, 그리고 경포! 그 세 용맹한 부하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그리하여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기막힌 탄식을 들어야 했던 유방이었다. 그라고 사무친 감회가 없었겠는가? 그래서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고 했는지 모른다. 어쨌던 이제 유씨 왕족이 아닌 왕으로는 오직 연나라의 왕인 노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원래 노관은 유방과 같은 동네에서 태어난 죽마고우였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같은 날 태어났으며, 아버지끼리도 친구였다. 그래서 친구끼리 같은 날에 사내 아기를 낳자 동네 사람들이 모두 양고기와 술을 가지고 몰려들어 축하하기도 했었다. 그 때문에 노관은 태어날 적부터 계속 유방과 함께 다녔으며, 항우와 천하 결전을 벌일 때도 언제나 함께 있었다. 심지어 침실까지도 출입할 만큼 친한 사이였다. 천하 통일 후에도 기꺼이 유방은 노관에게 연나라의 왕을 내 주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결코 노관만은 배반하지 않겠지'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노관은 진희가 망하면 바로 자기가 다음으로 당할 차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부하를 진희에게 보내 최대한 오랫동안 전쟁을 계속해 승패를 결정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 후 진희가 죽고 반란이 진압되자, 진희의 부하가 이렇게 폭로해 버렸다.
"연나라 왕 노관이 부하를 진희에게 보내 공모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유방이 진상을 알아보려고 노관을 불렀으나, 노관은 두려워 한 나머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이에 유방의 의심은 짙어갔다. 이에 노관은 더욱 무서워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살면서 탄식했다. '유씨가 아닌 왕은 나뿐이다. 그런데 지난해 한신이 죽었고 또 팽월도 죽었다. 이 모두 여후의 음모였다. 지금 폐하께서 병이 들어 나라 일은 여후가 틀어쥐고 있으면서, 공이 있는 신하들을 모두 죽이고 있구나!' 그런데 이 탄식소리를 누군가가 듣고 유방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유방은 크게 노했다. 설상가상으로 흉노에서 항복해 온 자 하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장승이라는 자가 흉노에 와 있는데, 알고보니 연왕 노관이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장승은 원래 노관이 흉노에 정탐하기 위해 보낸 밀사였다. 그러나 유방은 그 말을 듣고, "과연 노관이 배반했구나!"하고 판단해 번쾌를 시켜 토벌을 명령했다. 이때 노관은 가족들과 수천의 병사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피다가 자기가 직접 유방을 만나 사죄하려고 했다. 그러나 때마침 유방이 죽자, 그는 할 수 없이 부하들을 데리고 흉노 땅에 들어가 언제나 한나라에 다시 돌아갈 날만 생각하다가 1년 만에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나라는 유방의 친족과 여후의 친족만이 권세를 잡게 되었다.
유방이 죽기 전 앓아 누웠을 때였다. 여후가 다가와 유방에게 물었다.
"폐하께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 재상을 맡겨야 합니까? 지금 소하 대신도 너무 연로하셨는데...." "소하 뒤는 조참에게 맡기시오." "그 다음은 누가 맡아야 하는지요?" "왕을이 적임자이지만, 조금 우직하니 진평이 그를 돕도록 하시오. 진평도 비록 지략이 뛰어나지만 단독으로 국사를 맡기 어렵소. 그러니 정치는 왕릉과 진평 두 사람에게 맡기고, 군사는 중후하고 소박한 주발에게 맡기시오. 유씨를 안정시킬 사람은 반드시 주발뿐이니, 그에게 총사령관을 맡기시오." 여후가 다시 물었다. "그 후는 누가 좋습니까?" 유방은 아내의 욕심에 기가 막혔다. "아니, 당신은 얼마나 오래 살려고 그러시오?"
유방은 드디어 기원 전, 195년, 그러니까 천하통일을 이룬 지 8년이 되던 해 4월 장락궁에서 숨을 거두었다.
|
|
|
글터 → 과학/예술/교육
|
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28장. 가솔린('꽃' 이론과 안티녹제)
이 장에서는 가솔린 공업기술에 있어서의 두 가지 우연한 발견에 관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자동차의 초기 무렵에 있었던 것이며, 또 하나는 최근의 발전에 관한 것이다.
에틸용액의 발견. 녹킹(Knocking)을 방지하는 가솔린 첨가제의 탐구는 찰스 F. 케터링이 1912∼1916년형 캐딜락 엔진이 녹킹에 의해 시달리는 것을 해결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최초의 성공은 잘못된 착상에 우연히 겹쳐져서 탄생하였다. 케터링과 델코 사(그 후 제너럴 모터스 사에 흡수되었다)의 연구원 토마스 미즐리는 녹킹이 가솔린의 불완전연소 때문에 생기는 후속 폭발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붉은색 잎을 가진 철쭉과의 상록관목이 땅에 눈이 녹지 않은 초봄일지라도 다른 꽃보다 일찍 꽃이 피는 것에서 착안하여 가솔린을 진홍으로 착색한다면 복사 에너지를 좀다 빨리 흡수하여 기화가 빨라지고 녹킹을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1916년 12월의 어느날 미즐리는 붉은색 염료를 구하기 위해 화학실험실에 갔다. 그러나 요오드가 들어있는 병 외에는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한 그는 이 요오드가 가솔린을 붉게 할 수 있으므로 우선 이것으로 시험해 보기로 했다. 요오드로 녹킹을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연구한 결과 연료의 색은 녹킹 해소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다만, 첨가물로 녹킹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요오드는 너무 비싸고 부식성 떄문에 사용할 수 없으므로 탐구는 계속 되었다. 시행착오를 여러 번 되풀이한 후 1921년에 철쭉과의 똧에서 착안한 것 보다는 조금은 과학적인 구상으로 테트라 에틸납(4에틸연)을 발견했다. 이 구상의 일부는 '에디슨 식', 다시말해 약품 선반 위에 놓여져 있는 병의 내용물을 전부 시행착오를 거쳐 시험해보는 방법으로 얻은 실험 결과와 또 일부는 좀더 과학적으로 원소의 주기성에 관한 멘델레예프(Mendeleef)의 이론을 근거로 한 것이다. 녹킹을 방지하는 가솔린에 녹인 것이 에틸(ethyl)액의 주성분이다. 에틸액이 훌륭한 안티녹(antiknock)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60년 이상 동안이나 주요한 가솔린 첨가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환경 중에 납이 배출되는 위험성 때문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메탄으로 가솔린을 만들다.
1986년, 뉴질랜드의 북쪽 섬에 있는 한 공장이 천연가스를 이용해 가솔린 제조를 시작했다. 이것이 순조롭게 가동되어 뉴질랜드의 액체 연료의 자급률은 현재 50%에 이른다. 이 제조과정의 1단계는 화학적으로 말하자면 천연가스의 주성분이 메탄(CH4)에서 메탄올(CH3OH, 메틸알콜)로의 변환이다. 그리고 2단계는 메탄올에서 분자의 탄소수가 6에서 12까지의 범위를 가진, 자동차의 엔진에 적합한 휘발성 탄회수소의 혼합물인 가솔린으로 변환한 것이다. 이 두 번째 단계가 메탄 분자에 산소를 1원자만 더할 뿐인 처음 단계보다 다음 단계쪽이 복잡해 보이지만 놀랍게도 그렇지가 않았다. 실제로 이 과정의 장기적이인 관점에서의 성공 방법은 제1단계의 원가를 어떻게 삭감하느냐 하는 개량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개량은 세균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고 알려진 효소의 변화과 필적할 만한, 효율이 좋은 공업용 촉매를 발견함으로써 달성될 것이다. 제2단계의 성공은 모빌 오일 사 화학자의 세렌디피적 발견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Chemical and Engineering News'지의 1987년 6월 22일자에는 뉴질랜드의 새로운 메탄으로부터 가솔린을 생산하는 제조 공장을 커버스토리로 소개하였다. 또한 1987년 9월 2일자의 투서란에 은퇴한 화학자 윌리엄 H. 랭이 이 발견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972년 3월 10일, 그와 클라렌스 창은 ZMS-5라는 부호의 결정성 실리카-알루미나 촉매를 사용해서 이소부탄(C4H10)과 메탄올에서 네오펜탄(neopentane)을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모든 메탄올과 일부의 이소부탄은 액체 탄화수소로 변화했습니다만 그 중에서 네오펜탄을 검출하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나는 나프타의 성분 개선 연구를 지도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때 이 탄화수소 생성물의 성분이 고옥탄가 가솔린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에 메탄올과 이같은 촉매만으로 실험한 결과 메탄에서 가솔린 계열의 탄화수소로의 변화가 확인되었습니다 ... 그 후 수년간 연구와 개발이 거듭되어 이 최초의 발견이 뉴질랜드에서의 성공적인 과정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랭 박사는 이전에 가솔린 화학을 연구하고 있었던 덕택으로 이와 같은 물질에 대한 센스가 충분히 있었으며 그 결과 우연한 관찰을 최대한 이용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
|
|
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글은 배우되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고 아들을 가르친 임형수
임형수(1504-1547)의 본관은 평택이고, 자는 사수, 호는 금호이다. 중종 26년(1531)에 생원이 되고 중종 3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서 사가독서한 뒤에 설서를 지냈다. 수찬으로 회령 판관에 임명되어 임지로 나가는데, 어떤 때는 이틀에 한 끼만을 먹고 어떤 때에는 수일의 분량을 한꺼번에 먹으면서 말하였다.
"장수가 되는 사람은 이러한 습성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 변방의 오랑캐를 잘 어루만져 그들의 환심을 얻고, '오산가' 수백 구를 지어 북방의 풍물을 기록하였다. 명종 2년(1547)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사사 당할 때 의기양양함이 평일과 같았다. 그는 태연히 안뜰에 들어가 부모에게 두 번 절하고 나왔다. 임형수는 채 열 살이 못 된 아들을 불러서 경계하였다. "절대로 글을 배우지 말아라" 아들이 돌아서자, 다시 불러 말하였다. "만일 글을 배우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이 될 터이니, 글은 배우되 과거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는 사약을 끌어다가 끓어 앉아 마시었다. 어떤 종이 울면서 안주를 올리니, 임형수가 그것을 물리치며 말하였다.
"상여꾼들이 벌을 줄 때에도 안주를 쓰지 않는 법인데, 이것은 어떤 술이냐"
임형수는 호당에 있을 당시 퇴계 이황과 같이 있었는데, 이황에게 사나이의 호쾌한 취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눈이 산에 가득히 쌓일 때 검은 돈피 가죽을 입고 흰 깃이 달린 긴 화살을 허리에 차고, 어깨에는 천근 짜리 센 각궁을 걸고 철총마를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골짜기로 달려들어가면, 큰 바람이 골짜기에서 일어나고 천만 그루의 나무가 진동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큰 멧돼지가 놀라 일어나서 길을 헤매며 달아날 때에 곧 활을 한껏 잡아당겨 쏘아 맞히고는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아 그 돼지의 멱을 딴 다음, 고목을 베어 불을 피워 놓고 긴 꼬챙이로 그 고기를 꿰어서 구우면 기름과 피가 뚝뚝 떨어진다. 이때 호상(걸상)에 걸터앉아 고기를 저며서 먹으며 큼직한 은대접에 술을 가득히 부어 따뜻하게 데워서 시원하게 마신다. 얼큰히 취할 때에 하늘을 쳐다보면 골짜기의 구름이 눈이 되어 비단처럼 펄펄 내려 취한 얼굴에 흩날리게 된다. 이것이 장쾌한 일이네"
그 말을 들은 이황은, 임형수의 인품을 말할 때면 언제나 그가 하던 말을 뇌었다.
"그 기상의 호탕함을 지금도 상상하겠다"
|
|
|
글터 → 이글저글
|
곡학아세
스스로 믿는 학설을 굽혀 세상의 속물들에게 아부한다는 말이다. 한의 무제는 왕위에 오르자 곧 천하의 인재를 찾았거니와 먼저 아흔살 난 시인 원고생을 불러 들였다. 그는 강직한 선비였기에 무제 측근의 어용학자들이 그를 중상하였다.
"폐하, 그따위 늙어빠진 촌뜨기 선비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저 촌구석에서 증손주나 돌보는 것이 제격일까 하옵니다"
하나 무제는 단호히 그를 등용하였다. 그와 동시에 공손흥이라는 젊은 선비도 기용했는데 그 자 역시 원노인을 마땅치않게 여겼다. 그러나 원노인은 개의치 않고 젊은 선비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지금 학문의 길은 어지럽혀지고 속석이 유행하고 있오. 이대로 놓아두면 유서있는 학문의 전통은 마침내 사설 때문에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요. 그대는 요행히 젊으신데다 학문을 즐기는 선비라고 들었고. 아무쪼록 올바른 학문을 착실히 닦아 널리 세상에 퍼뜨려 주오. 결코 자기가 믿는 학설을 굽혀 세상의 속물들에게 아부하지는 마시오"
공손흥은 원노인의 굳은 절개와 풍부한 학설에 감복하여 불손했던 일들을 사죄하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
|
|
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
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스물여섯번째 이야기 은혜를 모르는 용
용 한 마리가 강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용이 자라면서 물이 부족해지자 용은 점점 하류 쪽으로 내려오다가 모래밭까지 오고 말았다. 물이 없어 용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농부가 그 옆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다. 농부가 용에게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냐고 묻자 용이 대답했다.
"물을 찾아서 오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그런데 여기도 물이 다 말라버려서 이렇게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답니다. 나는 물이 없으면 꼼짝도 못해요. 그러니 나를 당신 당나귀 위에 묶어서 강으로 데려다줘요. 그러면 금은보화를 선물로 드릴게요."
금은보화라는 말에 욕심이 생긴 농부가 용을 묶어서 당나귀에 싣고는 강으로 갔다. 용을 강에 내려준 농부는 약속대로 금은보화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용이 농부에게 말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네 놈이 감히 나를 묶어놓고는 그 대가를 바래?"
농부가 어이없다는 듯이 용에게 말했다.
"네가 네 입으로 묶어달라고 사정했잖아." "그건 그때 일이지. 이제 배가 고프니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네가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는구나."
한참을 이렇게 다투고 있는데 우연히 그 옆을 지나던 여우가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는 말했다.
"자, 그렇게 싸우지 말고 차근차근 얘기해봐요." 그러자 용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농부가 나를 꽉 묶어서 자기 당나귀에 싣고는 여기까지 데리고 왔어요. 그래놓고는 이제와서 그 대가를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 다음으로 농부가 말했다. "여우 선생,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이 용이 강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모래밭을 만나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걸 내가 발견했소. 그러자 용이 내게 자기를 묶어서 당나귀에 싣고 여기까지 데려다주면 금은보화를 주겠다고 약속했소. 그런데 이제 와서 약속을 지키는 건 고사하고 나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소." 여우가 말했다. "용을 묶은 건 당신 잘못이에요. 하지만 이제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용을 어떻게 묶었는지나 보여주세요. 그걸 보고나서 판단하겠어요." 농부가 용을 묶기 시작하자 여우가 용에게 물었다. "지금 농사꾼이 묶은 것만큼 세게 묶었습니까?" 용이 대답했다. "이것보다 백 배는 더 세게 묶었을 겁니다." 여우는 농부에게 더 세게 있는 힘을 다해 묶으라고 말했다. 여우가 다시 용에게 물었다. "어때요? 지금처럼 꽉 묶었어요?" 용이 대답했다. "예, 바로 지금처럼 묶었어요." 그러자 여우가 농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을 꽉 묶었으니 이제 당신이 용을 당나귀 위에 싣고는 용을 발견했던 원래 위치에 다시 갖다 놓으세요. 그럼 더 이상 당신을 잡아먹을 수도 없을 거예요."
농부는 여우가 시킨 대로 하고는 용을 내버려둔 채 떠나버렸다.
*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되어 있다.
|
|
|
글터 → 국사
|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8. 한국사에 등장하는 두 개의 천리장성 (영토를 확보한 고구려 장성과 영토를 축소시킨 고려장성)
종족의 경계를 국경으로
천리장성이 처음 축조될 때, 고려와 여진의 국경은 그 장성을 쌓은 곳이 아니었다. 장성 북쪽에 기미주도 당시 고려가 차지하고 있던 땅이었으므로, 장성 축조에는 종족적,문화적 경계를 분명히 하려는 의미가 더 강하게 들어 있었다. 기미주에서는 여진족과 한족이 문화와 생활을 공유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문화의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보던 고려왕실의 눈에는 이미 이 지역은 오랑캐화된 곳이었다. 그래서 장성을 넘나드는 여진족을 정벌한 뒤에 고려는이 땅을 오히려 여진족에게 돌려주고 만 것이다. 즉 고려는 장성이 국경선과 일치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이런 입장은 외교정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고려가 거란이나 여진에 대해 적대적 입장을 보인 것은 대진의 멸망과 관련되어 있다. 고려는 멸망한 대진을 기마종족 연합의 유일한 정통으로 설정하고 그 유민들을 우대하는 한편, 대진을 무너뜨리고 자기들이 주도하는 연맹을 세운 거란은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고려는 북진을 통해 대진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진의 멸망하기 전인 922 년(태조 5 년)에 거란의 지도자 야율아푸치는 근처의 여러 기마종족을 통합하면서 고려와도 동맹하기 위해 낙타와 말 등을 보내왔는데, 이때만 해도 고려는 그들과 공식적으로 우호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926 년 대진이 멸망하자, 고려의 외교적 입장은 돌변했다. 924 년에 거란이 다시 30 명의 사신과 낙타 50 마리를 보내왔는데, 고려는 대진을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을 수 없다며 사신을 유배 보내고 낙타는 굶어죽게 했다.
여진에 대해서도 왕건은 비슷한 태도 변화를 보였다. 대진이 멸망한 뒤 방황하고 있던 여진족을 복속시켜 영토를 넓혀나가는 한편, 거란과 결탁한 여진족에 대해서는 몰인정한 정복사업을 벌였다. 그러므로 왕건이 죽기 전까지 고려의 북방정책은 대진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대진의 옛 영역은 거란족이 먼저 차지했고 그들이 주도해서 주변 기마종족을 통합하기 시작하자, 고려는 거란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정벌계획은 중국 한족과 결탁함으로써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진의 영토를 차지하고 여러 기마종족을 복속시키려는 야심을 가진 것은 고려만이 아니었다. 여진족과 부여족을 비롯한 대진의 일부 후예들이 정안국(부여족의 대씨와 여진족의 열씨가 함께 주도하던 작은 종족연맹)을 세워 야심을 키웠으며, 거란과 한족의 송나라도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야심이 서로 격돌하면서 대진의 옛 영역은 여러 세력들이 서로 나누어 가지는 형편이 되었다. 고려는 대진의 옛 영토 가운데 한반도 북부지역을 차지하였으며, 거란은 그 동북부를 차지하였고, 송나라는 서남부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결국 이 땅의 상당 부분이 한족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고 말았다. 따라서 태조 왕건이 죽은 뒤, 고려는 북방진출을 사실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방진출이라는 명분을 유지하는 한편, 다른 기마종족과 끝내 통교하지 않으면서 마침내 천리장성을 쌓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나머지 기마종족과 우리 겨레는 차츰 이 장성을 경계로 문화적 발전의 길을 달리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분열사가 이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면서, 차츰 우리 겨레는 단일민족의 굴레에 갇히게 된 것이다.
서글픈 국난극복의 역사
고려가 대진의 고토 수복에 내걸고 거란족 등과 적대관계를 맺자, 거란도 고려를 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란은 기마종족의 연맹체를 재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고려를 정벌하려 했으며, 고려도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거란은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다. 첫 번째 침입에서 거란은 특별한 군사적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우호관계를 요구했다. 그들은 고구려의 땅이 원래 자신들의 것이며, 고려는 마땅히 고구려의 계승자인 자신들을 따라야 하고, 중국 한족이 세운 송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말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거란이 당장 영토를 탐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고려는 재능이 뛰어난 서희를 보내 교묘한 외교술로 전쟁을 끝맺게 했다. 그러나 차츰 세력이 강해진 거란은 강조가 목종을 시해한 것을 구실삼아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그러나 거란의 전략적 목적은 고려와 송의관계를 확실하게 끊어버리고, 고려가 거란족이 주도하는 연맹에 참여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같은 목적으로 거란은 한 차례 더 군사력을 동원하였으나, 고려를 복종시키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고려가 거란족에 등을 돌린 것이 북진정책이라는 명분과 현실적 여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면, 전쟁 또한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한족이 세운 송나라와 손을 잡으려고 한 고려의 외교정책이 그런 상황을 재촉한 것도 분명하다.
어쨌든 이때부터 기마종족의 내부투쟁사는 치열했다. 그리고 그 투쟁을 통해 기마종족들은 문화적,정서적으로 점차 분화되어갔고, 마침내 서로가 고조선과 고구려 및 대진이라는 같은 나라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마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형제종족 사이의 서글픈 투쟁사는 중국 한족의 영역을 넓혀주고 그들에게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우리 겨레는 고조선과 고구려 및 대진으로 이어오는 기마종족 연맹체에서 분명 주도적인 종족이었다. 그러나 그 주도권을 거란족에게 빼앗기자 그것의 회복을 둘러싸고 마침내 형제종족들이 역사적으로 갈라지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대진이 멸망한 뒤 거란과 고려의 전쟁은 천리장성을 쌓게 했고, 마침내 '큰 역사를 돌보지 않는 우리의 작은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