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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87 호
단기 4340. 10. 25 (음력 9. 1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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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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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주제: 만남, 그 잊지 못할 추억 □ 내 용 o 여행 중 만남 사람 o 다시가고 싶은 곳, 독특했던 그곳의 문화, 잊지 못할 먹거리 o 기타 잊지 못할 추억이 서려있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에세이 ※ 찾아가는 길, 볼거리, 먹거리 등 여행지에 관한 정보 포함
□ 응모개요 o 접수일정 및 방법 - 접수기간 : 2007. 10. 12 ~ 11. 12 - 방 법 : 한국도로공사 홈페이지(www.ex.co.kr)를 통해 응모 o 시상 계획 - 최우수상 : 1명 (상금 : 3,000,000원 및 상패) - 우 수 상 : 2명 (상금 : 1,000,000원 및 상패) - 장 려 상 : 10명 (상금 : 300,000원 및 상패) ※ 수상자는 응모편수 등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o 결과 발표 - 일 시 : 2007. 11. 26(월) - 방 법 : 공사 홈페이지(www.ex.co.kr) 공고 및 개별통지 - 시 상 : 수상작 시상일시 및 방법은 홈페이지 상에 별도 게시
□ 작성방법 o 찾아가는 길은 인근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중심으로 설명 o 형식과 분량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기술 o 여행에 필요한 부가정보 기술 (부가정보 : 관광지명, 연락처, 시설이용시간, 사용료, 주차시설 등) o 여행수기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사진, 이미지 등 적극 활용 (본인이 촬영하지 않은 경우 출처 기재) o 비어, 속어, 은어 등의 표현 지양(글맛을 살리는 사투리 사용은 무방)
□ 응모방법 o ‘한글2004’ 이하 버전으로 응모 o 그림 삽입시 반드시 ‘문서에 포함’을 선택 o 문서내 그림 삽입이 어려운 경우 별도로 그림파일 첨부
□ 기타 사항 o 수상작품의 저작권은 한국도로공사에 귀속 o 응모작품은 일체 반환되지 않음 o 접수시 정확한 정보 입력(시상식 미참석시 상패 등 우편송부) o 기타 공모에 관련된 사항은 홍보실(☏02-2230-4017, 4219)로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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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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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은 변화함을 뜻하고, 변화한다는 것은 성숙함을 뜻하고, 성숙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자기를 창조해 간다는 뜻. / H.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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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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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먼저 실천하고 뒤에 말하라
그대는 학문에 있어서 그 방법을 이미 알았고, 그 병폐의 소재도 알았다. 진실로 '빨리 나아가는 자는 물러가기도 빨리 한다'는 경계를 잘 지키면서, 배움을 오래 쌓아 습관이 이루어지면 바탕이 변하고 어진 지혜가 무르익어, 아마도 인생의 한 가지 큰 기쁜 일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급히 얻으려고 서둘다가 깨닫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부딪히는 곳마다 다 사실대로 보고, 당연한 곳에서는 곧 실천하는 것이다. 사실이 이와 같음을 알면서 실천이 따르지 못하면, 공자님 말씀의 '먼저 행하고 뒤에 말한다'는 교훈에 매우 부끄러울 뿐이다. 오로지 고요한 곳에서 정신 집중하여 공부하고 싶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것도 다 맞다고 할 수는 없다. 속된 일을 무조건 외면하다 보면 그 또한 학문에 해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의 일상사라면 어느 선에서 큰 뜻을 세워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반드시 고요히 공부만 해야 한다면, 그것은 당장 긴요하지 않은 이차적인 일이 되겠다. 과연 그래서야 옳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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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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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1장 인식론
과학과 가치는 화해할 수 없는 것인가 - 박정하
사회 과학과 가치
과학은 본질적으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적 작업이다. 과학은 주어진 현상, 즉 사실의 구조를 설명하고 앞으로 일어날 현상을 예측하고자 한다. 따라서 사회 과학은 사회적 현상(혹은 사회적 사실)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예측하려는 지적인 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과학의 정신이다. 만약 우리가 현상을 보고 싶은 대로보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고 또 올바르게 이해할 도리도 없을 것이다. 이런 식의 관찰과 해석으로는 현상의 진로를 예견할 수도 없을 뿐더러 조절할 능력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즉 사실대로 보고자하고, 과학적 탐구에서 주관의 가치 판단을 개입시키지 말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이 점을 거듭 강조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가 얼마나 까다로우며, 탐구 과정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어려움은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자연 과학의 분야에서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인간이 인간 개인의 또는 집단의 형태를 탐구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사회 과학에서 더욱 절박한 문제로 대두된다. 사회 과학과 가치의 관계는 보통 '가치 중립성' 혹은 '탈가치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사회 과학의 가치 중립성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는 두 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 과연 가치 중립적인 사회 과학이 가능한가? 둘째, 가치 중립적인 사회 과학이 과연 쓸모가 있는가?
첫째 문제부터 살펴보면, 우선 사회 과학의 가치 중립성을 부정한 대표적인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은 마르크스(K. Marx)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모든 지식과 이론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사회적 조건과 결부된 이해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회 과학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부정론에 대해 반박하면서 가치 중립성을 확보하려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상당히 높다. 이런 목소리들은, 사회 과학의 탐구 대상인 사회 현상이라는 것이 가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과학 자체는 가치 중립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가치 판단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는 하나의 사회적 사실이다. 이러한 가치 판단 행위는 한 사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치 판단의 틀을 마련해 주는 윤리 규범, 그리고 가치 판단에 근거하여 마련된 온갖 정치, 사회 제도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 규범, 정치, 사회 제도가 사회적 탐구의 대상이 됨은 물론이다. 사회적 탐구의 대상이 되는 이러한 가치는 하나의 현상이요 사실이다. 어떤 사회 안에서 좋고 나쁨에 대한 가치 판단이 내려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사회 과학의 연구 대상이라는 얘기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 서면 하나의 객관적인 현상으로서의 가치와 어떤 것에 대해 가치 평가를 내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 과학은 가치 현상을 대상으로 하여 그 대상에 대해 사실 판단을 내리는 작업으로 파악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느 한 사회 안에서 채택되고 있는 윤리 규범이 무엇인가를 하나의 사실로서 얼마든지 탐구할 수 있다. 그 연구 대상이 윤리 규범이라는 가치라고 해서 객관적으로 알아 내지 못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 과학의 대상은 가치와 연관되어 있지만, 사회 과학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고 나아가 가치 중립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이 입장의 결론이다. 그래야만 사회 과학이 과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사회 과학은 가치를 다루되 엄격히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다루는 경험 과학으로 규정된다. 이런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바로 '가치 중립성' 혹은 '탈가치성'이라는 말을 개념화시킨 장본인인 베버를 들 수 있다.
둘째 문제, 곧 가치 문제를 배제하는 사회 과학이 과연 쓸모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도 논의가 분분하다. 먼저 쓸모 없다는 부정론을 펴는 사람들은, 사회 과학은 구체적인 사회 현실에 대하여 가치 판단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옹호한다. 즉, 사회 과학은 가치의 문제를 다루는, 예를 들어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지를 따지고 정당화하는 사회 철학을 반드시 전제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 철학과 우연히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회 과학이 가치 문제를 배제할 경우에는 사회 철학과의 유기적인 통일을 깨뜨리는 것이기에 파편적이고 부분적이고 도구적인 작업이 되어 쓸모 없어진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반대하여 긍정론을 펴는 사람들은 부정론의 비판이 근본적으로 과학과 정책 내지 윤리를 혼동하고 있다고 논박한다. 이 사람들은 과학이 주어진 사실의 인식을 목표로 하는 지적 활동이라는 원칙적인 전제에 근거하여, 사회 현상에 대한 가치 평가를 내리거나 어떤 행동의 지침을 제시하거나 정책을 건의하는 것은 모두 가치 판단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순간 우리는 사회 과학이라는 과학 활동을 중단하고 넓은 의미의 가치론 내지 윤리적 작업에 종사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이 사회 현상에 대해 가지는 관심은 사실 인식에 한정될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하고, 또 사회에 대한 가치 평가에 지식인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일들은 적어도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일들은 아니라는 것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은 실제로는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작업을 할 수 있더라도 사회 철학과 사회 과학이 개념적으로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일본의 외타나베 전(앞 전)장관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가 한국의 근대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한 망언을 두고 세 사람이 대화한 내용을 읽어보자.
창민 : 석규야! 일본의 지배가 한국 근대화의 기반을 닦았다고 말한 전직 장관의 발언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석규 :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 일본 정치인들이야 일본인들의 민족 감정을 자극해 표를 얻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반면 우리 정치인들이 이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소위 일본에서 친한 인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사실 알고 보면 대부분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우익 인사들인데, 한일 친선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그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기는 일부 정치인들도 있지 않니? 창민 : 그건 그래. 얼마 전에 한국에서 일부 한국인 학자들이 일본학자와 공동으로 학술 세미나를 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지. 일본 학자라는 사람들이 일본의 우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었거든. 그런데 말야, 곰곰이 따져 보면 일본의 지배가 한국의 근대화를 가져왔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석규 : 너 완전히 웃기는구나! 이젠 완전히 일본놈 편들고 있는 꼬락서니하고선... 너 도대체 무얼 안다고 주둥이를 놀리냐! 창민 : 야, 너 말조심해, 임마! 난 민족 감정이나 가치에 따라 판단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렇게 평가받을 만한 근거가 있다는 거야. 넌 사회 과학을 공부한다는 자식이 그렇게 천박한 민족 감정에 의해 모든 것을 재단해서 본다면 어떻게 객관적 인식을 그 목표로 하는 과학자로서 자격이 있겠니! 석규 : 객관적 인식, 과학의 가치 중립성 좋아하네. 객관적 인식이나 과학의 가치 중립성이라는 것이 바로 너 같은 놈들 말하기 좋으라는 것이지, 그게 가능하냐, 이 쪽발이야! 진실 : 듣고 있자니 못 참겠네. 너희들 만나기만 하면 육두문자가 난무하니, 도대체 너희보고 누가 친구 사이라 그러겠니, 원수지간이지. 어쨌든 너희 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철학적 문제가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아. 너희와 같이 듣고 있는 '철학' 시간에 교수가 강의한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다'와 관련된 문제 같아.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사실 판단'이란 참과 거짓이 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판단을 가리키는 반면, '가치 판단'이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이 좋은 일이고 무엇이 나쁜 일인지에 대한 판단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지. 너희도 알고 있지? 창민 : 그래, 너 말 잘 했다. 진실이 말처럼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은 분명히 달라. 따라서 내 말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가 가치 판단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나라 근대화의 초석을 닦았다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일 수도 있다는 점이야. 기차와 도로와 같은 교통 시설뿐만 아니라 일제 기간 동안 공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 통계로 명확하게 나와 있잖아. 석규 : 그래, 네 말대로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이 다르다는 것은 나도 동의해. 원래 이 두 판단을 구분하고자 했던 것은 경험 과학에서 획득된 객관적 지식으로부터 도덕이나 윤리가 필연적으로 연역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에서였지. 가령,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붕괴된다'는 사실 명제에서 '따라서 사회주의가 옳다'라는 도덕적 명제가 연역될 수 없다는 것이지. 너도 잘 알다시피 요즘 마르크스주의 역사 철학을 비판할 때 흔히 사용하는 논리가 그것 아니니. 그러나 양 판단을 구분하는 것은 개념적 수준에서나 가능하지 현실에서 가능하겠어? 창민 : 물론 쉽지 않지. 너처럼 반일 의식은 좋지만, 그러한 주관적 평가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개입해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것 아니겠어? 특히 자연 과학과 달리 인문 사회 과학은 바로 다름 아닌 인간의 주관적, 의식적 요소를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더욱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이러한 주관적 평가의 개입을 차단하고 어떻게 하면 가치 중립적인 객관적 인식에 도달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 아니겠니? 진실 : 창민이의 주장에는 '과학은 객관적 인식을 목표로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은데, 그게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의 편을 들자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런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는 거지. 석규 : 진실이가 매우 예민한 것을 지적했는데, 과학이 객관적 인식을 지향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좋아.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과연 가능할까? 오히려 객관성과 가치 중립성의 허울을 쓰고 특정의 정파나 민족의 가치를 대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아도 창민이 너도 잘 알 거야. 소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입장이나 가치를 정당화하는 경우를 말야... 너처럼 자꾸 모든 것을 객관적 사실의 문제로 환원하게 되면 오히려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게 될 가능성이 있어. 창민 : 아니, 네가 오해하고 있는데, 나는 가치나 윤리를 사실적 판단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아. 앞에서 네가 예를 든 것처럼, 사회주의의 정당성이 자본주의 붕괴의 사실적 필연성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이 주장은 가치나 윤리의 영역이 가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라 할 수 있어. 윤리나 가치 현상을 포함한 사회적 현상도 객관적 사실로서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해. 가령, 지역 감정과 같은 경우도 가치나 윤리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엄연히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로서 연구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진실 : 너는 왜 자꾸 딴 다리를 긁니! 지금 석규가 제기한 문제는, 가치 현상이 객관적 사실로서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 중립적, 객관적 과학 그 자체가 가능하냐를 문제삼고 있잖아. 창민 : 너는 남의 말을 끊어 놓고 잘난 척하냐! 여자가 끼여들어 가지고선... 진실 : 얘가 또 여자들한데 몰매 맞을 말만 골라서 하네... 알았어. 그래서? 창민 : 석규의 말은 논리적 비약이 있어. 자연적 현상이든 사회적 현상이든 현실적으로 가치 중립적, 객관적 과학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과학을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야. 혼동하지 마. 핵 무기를 발견하는 것과 그것을 이용해 패권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다른 문제 아니야? 핵 무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정치가의 잘못이지. 석규 : 내가 원래 하고 싶은 말은 가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과학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거야. 인류가 시기별로 생각이 달라져 왔고, 그에 따라 과학의 기준도 달라져 왔어. 그리고 같은 시기의 사람들도 문화적 특성에 따라 동일한 사실에 대한 인식이 전부 달라. 그렇다면 과학이라는 것은 오히려 각 시기별, 민족별 가치에 입각할 때에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겠어? 그래서 나는 가치 중립성이니 객관적이니 하는 과학의 기준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거야. 오히려 과학이야말로 가치 지향적이 아닐까? 이것은 과학사에서도 드러난 사실이야. 그런데 마치 과학이 이와 무관한 것처럼 말함으로써 특정의 가치가 타당한 것처럼 강요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진실 : 그럼 석규 너는 과학이 발전하지 않는다고 보는 거니? 창민 : 그래, 너처럼 보면 과학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어. 석규 : 고대 동양에서는 수학이 없었다느니 하는데, 사실은 굉장한 수학이 있었다는 것 창민이도 잘 알 거야. 마찬가지로 과학이 단선적으로 발전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 생각해. 그럼 창민이는 과학의 발전을 어떤 기준에 의해 설명할 수 있겠어? 창민 : 과학이 점차 객관적 사실에 접근해 가는 거지. 진실 : 글쎄, 그것도 문제는 있지. 뉴턴의 과학이 상대성 이론으로 넘어가는 것을 발전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석규 말대로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해야 할까? 석규 : 아무튼 우리가 과학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인간학의 관점을 넘어설 수 없어. 그렇다면 과학이라는 것도 결국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통해서 본 객관적 사실일 뿐이야.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과학의 성과를 이용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진실 : 어이구, 골치야! 일본이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무슨 과학 철학 논의로 넘어왔네. 너희들하고 떠들다 보니 배고프다. 너희들 때문에 내 배가 고파졌으니까 너희들 내 배 책임져!
토론해 봅시다 1. 같은 사물을 관찰하고 내리는 사실 판단이 서로 다를 때 반드시 하나는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인가, 아니면 둘 다 참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도 있는가?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어떤 경우인지 들어보자. 2. 우리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3. 모든 사람이 '설악산은 아름답다'는 명제에 동의할 경우 이 명제는 사실 판단인가 가치 판단인가? 4. '이 여자는 옷을 벗었다'라는 명제가 다음 각각의 경우 과연 명백한 사실 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만일 사실 판단이라면 참인가 거짓인가? ㄱ:추운 날씨에 얇은 내의만 입고 거리에 서 있을 때 ㄴ:해변에서 수영복도 입지 않고 벌거벗고 있을 때 ㄷ:다들 정장을 입고 있는 결혼식장에서 수영복만 입고 있을 때 ㄹ:수영장에서 수영복만 입고 있을 때 5.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제는 과학의 가치 중립성을 지지하는 것인가 반대하는 것인가? 6. 자연 과학에 가치가 개입되는 경우가 없는지 찾아보자.
주요 개념 가치, 사실 판단, 가치 판단, 자연주의, 과학, 가치 중립성, 사회 과학
참고 문헌 김태길, '윤리학', 박영사, 1988. W.K.프랑케나, '윤리학', 종로서적 출판부, 1984. J.하버마스, '인식과 관심', 고려원, 1990. T.S.쿤, '과학 혁명의 구조', 동아출판사, 1992. P.원치, '사회 과학과 철학', 서광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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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증료
본뜻 : 일정 가격에 얼마를 더 얹어 내는 금액을 가리키는 일본식 한자어다. 영어의 프리미엄(premium)에 해당하는 말이다.
바뀐 뜻 : 기존의 정해진 요금에서 얼마를 더 내는 요금을 말하는데 보통은 교통 수단의 요금에 한해서만 쓴다 웃돈, 추가금 등의 우리말로 바꿔 쓸 수 있다.
"보기글" -자정이 지나면 모든 대중 교통 수단에 할증료가 붙는다는 거 알아?(추가금을 내야 한다는 거) -모범 택시 탔는데 할증료까지 붙어 봐, 집에 도착할 때까지 미터기와 지갑을 번갈아 들여다 보느라고 정신이 없어진다니까(추가금까지 붙어 봐)
사라져가는 언어(1)
유네스코는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현재 6000여 언어가 21세기 말께는 그 절반 또는 90%까지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언어는 새로 생겨날 수도 있지만, 이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말과 지리·계통에서 이웃한 만주말도 당장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한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 자체에만 그치지 않고, 그 언어에 반영된 문화와 정신까지 사라져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인류에게 지난 20세기는 획일성의 시대, 다양성 말살 시대였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 이어 소련과 중국 같은 강대국이 세워지면서 이들 나라에 속한 다양한 소수민족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우세한 언어와 문화에 급격하게 동화되어 갔다. 이들 강대국의 언어문화 정책은 겉으로는 소수민족 언어를 유지·보호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거역할 수 없는 압력으로 작용해 자신들의 고유어를 잃어갔다. 얼마 전 러시아에서 만난 어느 소수민족 언어연구소 소장의 말은 되새겨볼 만하다. “국가가, 사냥하며 고유한 말을 쓰며 살아가는 우리를 이곳 도회지로 데려와 교육시키고 문화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나에게는 우리 민족의 언어·문화를 연구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우리 민족과 문화, 언어는 곧 사라지게 되었다.” 인류 문화의 값진 유산인 언어가 사라져 가는 것을 우리는 보고만 있어야 할까? 그리고 과연 우리말은 괜찮을까?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맨정신/맨흙
‘맨’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맨 꼭대기’, ‘맨 처음’처럼 명사를 꾸미는 구실, ‘이 방에는 맨 책뿐이다’, ‘동생은 맨 놀기만 한다’처럼 서술어를 꾸미는 구실이 있고, ‘맨땅·맨발·맨밥·맨주먹’처럼 몇몇 명사 앞에 붙어 새 낱말을 만드는 구실이 있다. 관형사 ‘맨’은 ‘가장·제일’의 뜻으로 쓰이고, 부사 ‘맨’은 ‘온통·모두 다’의 뜻으로 쓰인다. 앞가지(접두사) ‘맨’은 ‘다른 것이 없는’,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의 뜻으로 쓰인다. 관형사와 부사로 쓰이는 ‘맨’은 뒤에 오는 낱말과 띄어 써야 하고, 앞가지로 쓰이는 ‘맨’은 뒤에 오는 낱말과 붙여 써야 한다. 앞가지 ‘맨’이 결합된 말 가운데 사전에 오르지 않은 낱말로 ‘맨정신’, ‘맨흙’이 있다. 맨흙과 비슷한 말로는 맨땅이 있다. “그건 술주정이 아니었어요. 맨정신으론 말할 수가 없어 잠시 술힘을 빌었을 뿐이에요.”(홍성원 〈육이오〉) “그 웃음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웃음 뒤에 나타난 것은 맨정신의 얼굴이 아니었다.”(박경리 〈토지〉) “아스팔트가 끝난 길가 맨흙 위에 패어나간 타이어 자국이 남아 있었다.”(이원규 〈훈장과 굴레〉)
‘맨정신’은 ‘맑은 정신’, ‘맨흙’은 ‘다른 게 섞이거나 깔지 않은 흙’이다. 앞가지에는 ‘맨’ 말고도 ‘군’(군걱정·군불 …)’, ‘날’(날강도·날김치 …), ‘덧’(덧니·덧쓰다 …) 따위가 있는데, 큰사전들에는 200개 안팎이 수록돼 있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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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7. 하늘이 내린 명의(편작, 창공)
2) 자연에 상응해야 병이 없다(창공)
창공은 태창 지방의 장관으로 원래 이름은 순우의였다. 젊었을 때부터 의술을 좋아했으며, 스승인 양경공이 알고 있던 모든 의술을 파기토록 하고 자기의 비방을 전수해 주었으며, 황제와 편작이 남긴 맥서도 전했다. 그리하여 창공은 얼굴에 나타나는 오장의 상태를 진단하여 환자의 병을 알아내고, 의심스러운 질병을 판단하여 그 치료법을 결정하는 방법에 통달했다. 또한 약물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그 후 천하를 돌아다니며 환자를 치료하고 질병의 원인을 구명하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집안일은 돌볼 수도 없었으며 또 그를 부르는 환자가 너무 많아 못가보는 환자들에게 원망도 많이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한나라 문제 4년에, 그는 고발되어 처형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 창공에게는 다섯 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창곡을 붙들고 울었다. 이때 창공이 크게 탄식했다.
"내가 자식을 낳았으되 아들을 낳지 못했더니 이런 일이 생겨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그러자 막내 딸 제영이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소녀의 아버님은 청렴하고 공평하다고 평판이 높았는데, 이제 법에 위반되어 처벌받게 되셨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소녀를 관의 노비가 되게 해서 소녀의 아버님이 스스로 허물을 벗으시도록 해주옵소서." 이 글을 읽은 황제는 딸을 불쌍히 여기고 창공을 풀어주도록 했다.
정확한 진맥이 치료의 근본이다
그 후 창공은 풀려나 지비에서 휴식하며 의술을 연구하였다. 그 뒤 그의 명성을 듣게 된 황제가 하루는 그에게 이제까지 치료하고 다닌 경험을 글로 써올리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창공은 보고서를 올렸다.
방사로 인한 병
제나라의 관리였던 성이 저에게 두통을 호소했을 때 저는 진맥을 하고 "당신의 병은 이미 치료할 수 없을 만큼 악성입니다." 하며 바로 물러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동생에게, "이 병은 옹으로서 앞으로 8일 후 고름을 토하며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과연 성은 예측한 대로 8일 후에 죽었는데, 그 병은 음주와 방사를 지나치게 한 결과 생긴 것입니다. 제나라 사공의 부인인 출어가 아팠을 때, 인근의 의원들은 모두 풍기가 내부에 들어갔고 주로 폐가 병들어 있다고 판단해 그녀의 다리의 소양맥에 침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맥을 짚어보니 그 병은 오줌을 참고 방사를 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저는 곧 발의 궐음맥 좌우 한 군데씩 뜸을 떴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오줌 색깔이 맑아졌으며 아랫배의 아픔도 그쳤습니다. 다시 화제탕을 만들어 먹이니 사흘 만에 완쾌되었습니다.
두통
치천왕이 아파서 제가 불려가 맥을 짚어보고, "이 병은 궐상으로 중병입니다. 머리가 아프고 몸에 열이 나며 환자를 괴롭게 만듭니다."라고 말하고 바로 머리에 냉수를 끼얹으며 어루만진 다음, 발의 양명맥의 좌우에 각각 세 군데씩 침을 놓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나았습니다. 그 병은 머리를 감고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로 잠을 잔 것이 원인입니다.
출산 장애
또 치천왕의 첩이 임신하여 만삭이 되었건만 아기를 낳지 못하자 저를 불렀습니다. 저는 낭탕약 한 숟갈을 술에 타서 먹게 했더니 잠시 뒤에 출산을 했습니다. 다시 맥을 짚어보니 맥이 시끄러웠는데, 이는 아직 남은 다른 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곧 초석을 먹였더니 피가 나왔습니다. 그 피는 콩 같은 것으로서 대여섯 개나 되었습니다.
남자를 못만나 생긴 병
제북왕을 모시고 있던 한녀라는 비첩이 허리와 등이 아프고 열이 나며 오한을 느꼈습니다. 의원들은 모두 한열병이라고 진단했지만, 제가 맥을 짚어보고, "몸이 냉하여 월경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다음 좌약을 넣으니 곧 월경이 나오고 병이 나았습니다. 그 병은 그녀가 남자를 원하면서도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요통
제나라 왕의 형인 황장경의 집에 좋은 술이 있어 손님을 불렀을 때, 저도 가 보았습니다. 아직 음식을 먹기 전에 와 있던 한 사람을 보니 병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병이 있습니다. 4~5일 전에 허리가 아파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소변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병이 신장까지 깊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정말입니다. 나는 원래 허리와 등이 좀 아팠었는데, 4~5일 전에 비가 올 때 몇 사람들이 돌을 들어 올리며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나도 한번 들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저녁 때가 되어 허리와 등쪽이 아프기 시작하여 소변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것이 낫지 않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병은 무거운 것을 들다가 생긴 병입니다. 즉시 유탕을 만들어 복용하게 하니 18일 만에 병이 나았습니다.
충치
제나라의 중대부는 충치를 앓고 있었습니다. 내가 가서 그의 왼쪽 대양명맥에 뜸을 뜨고 즉시 고삼탕으로 하루에 석 되씩 양치질을 하게 했더니 5~6일이 지나자 병이 나았습니다. 이 병은 풍이 들고 잠자리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자며, 식후에 양치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발광하다 죽을 병
제나라에 사는 조산부라는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제가 맥을 진찰 한 다음 '이것은 폐의 소단이며, 그 위에 한열병이 발병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집안 사람에게는 '불치병으로 곧 죽을 것입니다.' 하며 일러 주었습니다. 의서에 의하면 "앞으로 3일이 지나 발광할 것이다. 함부로 일어나 달리려 하지만 5일이 지나면 곧 죽는다."고 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의 병은 화를 크게 낸 후 곧바로 방사를 했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제가 이 병을 안 것은 그의 맥을 짚었을 때 폐의 기운이 몹시 뜨거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맥법에 이르기를 "맥박이 정상이 아니고 약해서 막히게 되면 몸이 여위고 쇠약해진다"고 했습니다. 정상이 아니면 피는 있어야 할 곳에 없고, 막히게 되면 상하좌우에서 뒤엉켜 뛰며 별안간 시끄러워졌다가 커졌다 합니다. 이는 폐 사이의 두 낙맥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죽게 되고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3일이 지나 발광한다는 이유는 본래 간의 한 맥락이 젖 아래 양명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맥락이 끊어지면 양명의 맥이 열리고, 양명의 맥이 손상되면 곧 열이 올라 옷을 벗고 달리려는 것 때문입니다.
심할 열이 있는 병
한편 제나라 왕의 시종의인 수가 병이 나서 스스로 오석약을 달여 먹었습니다. 제가 그를 찾아가니 그가 말했습니다. "제게 병이 있습니다. 한번 진찰해 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그를 진찰해 보고, "당신의 병은 중열입니다. 의서에는 중열에 소변이 나오지 않으면 오석을 복용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또 얼굴빛을 보니 곧 종기가 생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편작이 말씀하시길 음석은 양성의 병을 낫게 하며 양석은 음성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열이면 음석의 약제를 만들어 치료하고, 중한이면 양석의 약제를 만들어 치료하는 것입니다." 이에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편작 선생께서 비록 그와 같이 말씀하셨지만, 반드시 자세히 진찰해야 합니다. 먼저 규격을 정하고 맥의 상태를 살피며 안색과 맥을 아울러 생각해 병을 판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맥의 음양과 기의 소장과 색맥 순역의 이치를 생각하여 병자의 상태 및 호흡의 상호 작용을 참작한 뒤에 비로소 치료 여부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서에 '양성의 병이 안에 들어 내열이 있으며, 음성의 병이 밖으로 나와 한기를 느끼는 경우에는 강한 약과 침을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강한 약을 복용하게 되면 사기는 물리칠 수 있지만 음울한 기운은 더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진찰법에는 '한기가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고, 열이 밖에서 들어가 안에서 섞이는 경우에는 강한 약을 써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강한 약이 들어가면 양의 기운을 움직여 그 때문에 음의 병이 약해질수록 양의 병은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고, 사기는 밖으로 돌아 경맥의 수혈에서 더욱 커지고 화가 폭발하듯이 나타나 종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제 말을 듣지 않고 자기의 방법을 고집했습니다. 결국 백 일이 지나지 않아 과연 젖 위에 종기가 생기고 이것이 젖의 윗쪽에 있는 뼈까지 들어가 죽고 말았습니다. 의술의 이론이란 큰 틀을 제시하는 요지에 불과한 것으로, 이것이 실제로 쓰이려면 반드시 자세한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서툰 의원은 미숙한 점이 적지 않아 이론의 의미를 잘 해석하지 못하며, 또한 실제의 병 치료에 있어서 과실이 있는 것입니다.
심한 설사
제나라의 순우 씨가 아플 때 제가 그 맥을 짚어보고, "화풍을 앓고 있습니다. 이 증상은 음식물이 목구멍을 넘어 가기만 하면 바로 설사해 버리는 것입니다. 원인은 포식한 다음 심하게 뛰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순우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난 어느 잔치집에서 배불리 먹고 나서 술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도망을 쳐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수십 번이나 설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화제탕에 쌀즙을 타서 드십시오. 7~8일이면 나으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또 한 명의 의관이 있었는데, 그는 제가 떠난 후에, "저 사람의 말은 잘못입니다. 이 병은 의서에 의하면 9일 안에 죽는다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하지만 9일이 지나도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시 가서 화제 탕에 쌀즙을 타서 복용케 했더니, 과연 7~8일이 지나자 병이 나았습니다.
풍
어느 날 저는 안양 사람인 성개방을 진맥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병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당신은 풍을 앓고 있습니다. 3년 후 사지를 쓸 수 없게 되고 말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못하게 되면 곧 죽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전 그가 사지를 못쓴다는 말을 들었으며, 또 벙어리가 되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병은 과음한 후 바람을 쐬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입니다.
신경성 소화불량
언젠가는 어떤 유모가 병이 들어서 제가 가 봤습니다. 진맥을 하고 나서, "기가 가슴에 모여 앓는 병입니다."고 했습니다. 그 병은 속을 답답하게 하며 먹은 것이 내려가지 못하게 되어 때로 거품을 토하기도 합니다. 병의 원인은 자주 근심하고 신경 쓰면서 음식을 섭취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즉시 하기탕을 지어 마시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루만에 기가 내려가고 이틀이 지나자 먹을 수 있었으며, 사흘이 지나자 완치되었습니다. 원래 제가 맥을 짚어 보니 심기가 혼탁하고 초조해 경맥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맥법에 이르기를, "맥의 움직임이 매우 불규칙한 것은 대개 마음에 병이 있기 때문이다. 전신에 열이 나고 맥이 마구 뛰는 것을 중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심장을 자극한다. 그러므로 번민하며 음식이 통하지 않으면 낙맥에 고장이 일어난 것이며, 낙맥에 고장이 생기면 피가 치솟고, 피가 치솟으면 죽게 된다. 이것은 마음의 우환 끝에 생기는 병이다."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 병은 걱정이 많아 생긴 병인 것입니다. 신 순우의는 아룁니다. 이 밖에도 수 없이 많은 진찰과 치료를 통해 병을 고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많고, 또 기억할 수 없는 것은 감히 아뢸 수 없어 이만 줄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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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24장. 항생물질.
마가이닌류(개구리의 피부에서 얻은 항균 물질).
국립소아보건발육연구소의 소아과 의사이자 생화학자인 마이켈 저슬로프 박사는 그의 실험실의 물탱크 안에 있는 개구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1986년 여름, 낭포성 섬유증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의 폐 질환에 관한 그의 연구의 일환으로 개구리의 난소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그를 갑자기 놀라게 한 것은 감염증에 걸리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세균이 가득한 실험실의 거무튀튀한 물탱크 속에서 개구리의 수술한 상처가 몇 일만에 깨끗하게 아물고 벌써 나아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른 연구자들도 마찬가지로 같은 종류의 아프리카 개구리의 수술을 여러번 했었으며 그때마다 개구리의 상처가 깨끗하게 낫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저슬로프 박사는 기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였으며, 왜?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가를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었다. 그 후의 연구로 저슬로프 박사는 개구리의 피부에서 두 가지의 펩타이드(단백질의 단편)를 분리하뎌 각각의 아미노산 순서를 정했다. 이 펩타이드들은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과 진균류 또는 말라리아 원충과 같은 원생 동물 등에게 매우 높은 활성이 나타나는 것이 었다. 저슬로프 박사는 이것들의 이름을 헤브라이어로 방패를 뜻하는 '마가이닌(magainin)' 이라고 붙였다. 저슬로프 박사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개구리에서 이 마가이닌의 유전자를 추출하여 그것을 이용해서 인간에게도 같은 유전자가 있는가를 조사했다.
이 발견은 저슬로프 박사에게 있어서 전혀 예기치 않은 것이었으나, 그는 오랫동안 서로 관련된 두 가지 문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유전병인 낭포성 섬유증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가 건강한 아이의 폐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균으로부터 폐의 심한 감염증을 어째서 자주 일으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세균에 대해서 강한 방어 작용을 나타내는 세크로핀류가 어떤 곤충에서 수년 전에 발견된 것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세크로핀류는 펩타이드로서 곤충 자신의 세포막을 상하게 하지 않고 세균의 세포막을 파괴함으로써 세균을 죽이는 작용을 한다. 마가이닌류는 척추 동물 중의 면역 조직으로부터 분리된 최초의 화학 방어 조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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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지극한 효성으로 명당자리를 얻은 김언겸
김언겸의 본관은 김해이다. 대대로 고양에 살면서 곤궁함을 견디어 내며 유학을 업으로 삼았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어머니가 서울에 있으면서 병으로 죽자 언겸이 그 관을 모시고 돌아와 고향 선산에 장사지내려 하였다. 상여가 신원에 당도하였을 때 상여의 수레바퀴가 부러지고 말았는데 언겸이 어찌할 바를 몰라 길 옆에서 슬피 울었다. 인근 마을의주민들이 다투어 와서 도와주어 길 옆의 높은 곳에 임시로 장사지내고 곧 선산으로 이장하려 하였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언겸이 친히 잔디와 흙을 져다가 묘역을 만들었다. 이때 나라의 능을 개수하는 일로 어떤 지관이 지나다가 돌아보고 말하였다.
"이 새 무덤을 누가 잡았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길지이다"
언겸이 그 말을 듣고 뒤따라가서 절을 하고 사정을 말하는데, 말할 적마다 눈물이 같이 떨어졌다. 지사가 측은히 여기며 말하였다.
"산의 형세를 두루 살펴보니, 왼쪽의 청룡과 오른쪽의 백호가 너무 가깝고 명당이 좁아서 비록 대지는 아니다. 그러나 산의 형세가 멀리 뻗어나서 격국이 절로 이루어졌으니, 금방(과거)에 급제하는 귀인이 두 대를 연달아 나올 것이다"
이어서 김언겸의 성명과 족계를 묻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상주는 효성이 있는 사람이오. 나는 젊을 때부터 산을 보아서 이 길을 지나간 것이 몇 번인지 모르건만, 10보 안에 이런 좋은 묘지가 있는 줄 몰랐으니, 참으로 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절대로 이장하지 마시오"
김언겸이 그 지사의 말을 따라 영구히 안장하였다. 장사지낸 지 3년 뒤에 언겸이 과연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그의 아들 현성은 호가 남창인데, 문과에 올라 벼슬이 동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김현성은 관리로서 몸가짐을 청고하게 하여 얼음과 황경나무처럼 맑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백성들을 잘살게 하지는 못하였다. 마침 어느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한 유생이 글로 그를 조롱하였다.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였으나 온 고을이 못살아 원망하였으며, 조금도 재물을 범하지 않았으나 관의 창고가 텅비게 되었다" 김현성이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은 나의 실제 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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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지미
나라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만큼 뛰어난 미인을 말한다. 한 무제를 섬기는 가희에 이연년이라는 미녀가 있었다. 노래와 춤이 능할뿐더러 작곡과 편곡에도 뛰어났는데 하루는 무제 앞에서 춤추며 노래하였다. '북녁에 가인이 있어 세상에 견줄 바 없이 으뜸이라네. 그의 눈짓 하나에 성이 기울고 두 번째 눈길에는 나라도 기운다네. 어찌 성과 나라를 저버리랴만, 가인은 다시금 얻지 못하리' 무제는 한숨을 쉬며 "아, 세상에 그런 여자가 있을까?" 하자 무제의 누이는 소근거렸다. "바로 쟤네 여동생이 있다오." 무제는 연년이네 여동생을 비로 맞으니 그녀가 곧 이부인이었다. 무제의 총애를 누리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무제는 추모의 정을 걷잡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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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스물두번째 이야기 신부의 뇌물
투사아 지방에는 무식하지만 부자인 신부가 있었다. 신부는 기르던 개가 죽자 아주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뤄 무덤까지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무성한 소문을 낳았고, 급기야는 주교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주교는 신부가 부자라는 걸 알자 그의 죄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손수 신부를 불러 벌을 주기로 했다. 그러나 신부는 주교가 자기를 벌주는 것보다는 돈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금덩어리를 들고 주교를 찾아갔다. 주교는 신부가 개에게 무덤을 만들어 준 일을 심하게 문책했다. 그리고 신부를 감옥으로 끌고가 벌을 내리도록 명령했다. 신부는 주교가 강경하게 나오자 그에게 말했다.
"주교님께서 그 개가 얼마나 똑똑했는지 아셨더라면 이렇게까지 노여워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개는 웬만한 사람들보다 머리가 영리했어요. 그 개는 살아 있을 때도 영리했지만,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는 더 그랬습니다." 주교는 신부는 말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신부가 대답했다. "그 개는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어요. 하느님이 계신 성당을 위해 얼마나 큰 돈이 필요한지를 알고는 주교님께 백 개의 금덩어리를 기부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가 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주교에게 금덩어리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주교는 개의 유언과 장례식을 인정하고는, 신하들에게 필요한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금덩어리를 잘 보관해두라고 명했다. 그리고 신부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는 그를 석방시켰다.
* 돈의 위력을 믿고 큰 죄를 지어도 모든 게 용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 죄값을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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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7. 대진(발해)의 멸망 (우리 역사가 한반도로 한정된 결정적 사건 #2)
'해동'이라는 말
오늘날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해동'이란 말을 곧잘 쓴다. 해동은 말 그대로 바다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이때 동쪽은 중국 대륙의 입장에서 동쪽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해동이란 말은 동방이란 말과 더불어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적 언어를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실제로 중국은 고조선의 멸망 이후 우리 겨레를 바다의 동쪽에 있는 나라라고 하여 동방 혹은 해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그들은 대진을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이런 동방이나 해동이니 하는 이름에는 우리 겨레의 땅이 원래 바다 동쪽이며,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주술적 의미가 들어있다. 즉 대륙의 임자는 원래부터 자신들 한족이라고 주장하는 정치적 선전술이 그 표현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썼던 것은 중국 한족만이 아니었다. 우리 겨레도 그런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했다. 한족에 대한 사대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그런 표현을 썼다. 백제인들은 의자왕을 '해동증자'라고 불렀으며, 남조신라를 일러 '해동신라'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려시대의 최충은 '해동공자'라고 불렀으며, 1102 년(고려 숙종 7 년)에 만든 화폐는 '해동통보'라고 했고, 각훈이 엮은 승려들의 전기는 "해동고승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 밖에도 한치윤이 지은 "해동역사" 등 해동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경우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고려 말기 이후에 사용된 그런 표현에는 한족의 논리를 인정하는 측면이 대체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실증을 앞세운다 하면서 중국측 역사서는 맹신하고 우리 역사서는 이리저리 불신한 나머지 너무나 확연한 사실에 대해서조차 중국측의 잘못된 연대기를 그대로 사용한 "해동역사"가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심지어 한무외가 엮은 "해동전도록"은 도가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단학의 원류를 중국으로 설정하는 사대주의적 편견을 드러냈다. 즉 남조신라 때 당나라 유학을 했던 최승우가 중국의 종리권으로부터 단학을 배워 최치원 등에게 전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동이라는 표현 속에는 한편 우리 겨레의 꿈도 들어 있다. 근조선을 해동조선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말 속에는 중국에 예속된 동쪽의 작은 나라 조선이라는 뜻도 있지만 해동조선과 달리 대륙조선도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원래의 조선이기에 해동의 조선을 바탕으로 대륙조선을 회복하겠다는 뜻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그런 이들은 해동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역사의 연원을 대륙으로 잡으며, 그 뿌리를 고조선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정약용의 외손자가 쓴 "해동기략"이나 홍만종이 지은 "해동이적" 등은 해동이라는 수식어를 쓰면서도 모두 우리 영토를 만주나 중국 대륙까지 설정했으며, 우리 정신의 연원을 고조선에서 찾았다. 특히 "해동이적"은 "해동전도록"의 사대주의와 달리 우리 단학의 연원을 고조선의 단군에서 찾았다. "해동악부"라는 제목을 가진 문헌도 10여 종이나 남아 있는데, 거기에서도 지은이에 따라 해동이라는 의미가 다르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담촌거사의 저작과 이복휴의 저작은 해동이라는 말에 뼈가 있음을 보여준다. 담촌거사의 저작은 세 권 가운데 앞의 두 권이 사라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복휴의 저작 첫째 권에는 고조선의 영광을 노래한 '환웅사'나 '북부여' 등의 가사가 실려 있어 해동이라는 말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케 한다.
대조영의 정체
대진에 대한 연구는 아직 황무지나 다름없다. 대진의 건국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대진의 주요 종족이 누구인지 아직도 분명한 결론이 없는 상태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대진이라는 공식 명칭을 버려둔 채 발해라고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발해는 중국의 당나라와 남조신라가 대진을 부르던 이름이다. 대진은 "주역"의 괘 가운데 새로운 출발을 뜻함과 아울러 동방을 뜻하는 진에서 따온 이름으로, 시작은 동쪽에서 했으나 커져서 결국 대륙을 차지하겠다는 야심이 담긴 나라 이름이다. 대진의 건국자가 불분명한 것은 중국측 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에 실린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구당서"에는 "발해의 건국자가 고구려 별부 출신의 대조영"이라 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고구려에 속한 속말말갈 출신의 걸걸중상으로 그는 대조영의 아버지"라 되어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기록을 놓고 어떤 이는 걸걸중상과 대조영이 같은 인물이라 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또 대조영을 어떤 종족의 인물로 보느냐를 놓고도 많은 입씨름이 벌어져, 대진의 건국자가 과연 고구려 사람인지 말갈 사람인지 논의가 분분한 실정이다. 또 어떤 학자들은 대조영(또는 걸걸중상)이 고구려인이 아니고 말갈인일 경우, 대진의 역사는 중국 주변의 역사이지 우리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진을 우리 역사로 보는 데는 상당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대진은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라는 결론이 이런 합의의 전제가 되고 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고구려의 후예들이 대진의 지배계층이 되고, 말갈과 거란 등이 대진의 하층 구성원이었다는 주장도 이런 합의의 주요한 내용이다.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이 되고 말갈과 거란이 피지배층이 된 나라, 그래서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부를 수 있는 대진. 그러나 교과서에까지 실린 이 내용은 사실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갈이나 거란은 본래부터 고구려 유민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에는 북부여족과 거란족 및 말갈족이 원래부터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고구려 유민에는 마땅히 그들 거란족이나 말갈족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 유민이란 고구려 왕족이었던 북부여족만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닌 것이다. 물론 지배층이 된 고구려 유민을 북부여족으로 한정짓는다면, 논리상 성립은 된다. 그러나 그 넓은 대진의 땅을 과연 북부여족이 독단적으로 통치했다고 한다면, 당시 동아시아의 실정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를 몽고족의 역사에서만 다룬다면, 중국사의 절반은 아마 식민통치의 역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식민통치의 역사라고 해서 자신의 역사가 아닐 수는 없다. 설령 대진의 중심세력이 고구려 왕족이었던 북부여족이 아니라 걸사비우가 이끈 말갈족이거나 심지어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이 말갈족이었다고 하더라도, 대진은 분명 우리 역사에 기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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