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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87 호
단기 4340. 10. 25 (음력 9. 1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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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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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한국영화 컨텐츠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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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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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은 위대한 예술이다. / 헨리 도로(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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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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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인간이 곧 우주이다
'마음이 곧 우주 만물의 근원'이라 함은 '인간이 곧 우주'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치는 사물과 내가 없고, 안과 밖이 없고, 병이 있을 때마다 곧 그 약이 있다고 생각케 한다. 그런데 주자는 '버리려고 하는 마음이 곧 버릴 수 있는 약이다'고 했다. 묵묵히 공부를 더해 가며 전진하기를 그치지 않고, 오래도록 익혀서 완전히 익숙해지면 자연히 마음과 이치가 하나가 되어, 잡았다 놓쳤다 하는 병이 없어질 것이다. 정자는 '학문은 익힘을 중히 하는 것인데, 익힘은 마음을 오직 한 곳에 집중할 때가 가장 좋다'고 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엄숙하면 마음이 곧 하나로 통일되고, 그러면 저절로 간사함임 생길 수 없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일컬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익히는 방법은 마땅히 '옳지 않으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아야'하고, 몸을 움직일 때나 안색을 바르게 할 때나 말을 할 때나 제대로 공부를 해야만 그 뜻이 참되고 노력하기에도 쉬운 것이다. 그러한 참된 노력이 쌓이고 쌓여 시간이 지나면 얻음이 있게 된다. '마음에 있는 것이나 일에 있는 것이나 다만 하나의 이치일 뿐이다'한 것은 옳다. 그러나 '이른바 한 근본이란 이치의 가장 순수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지, 마음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고 하는 것은 옳다. 무릇 이미 하나의 이치일 뿐이라고 했으며, 이치의 핵심 되는 곳이 마음에 있지 않고 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모름지기 마음에 있는 것과 사물에 있는 것이 본래 두 가지가 아님을 분명하고 투철히 알아야 비로소 참답게 아는 것임을 깨달아야겠다. 진실로 그렇게 않고 막연하게 '하나의 이치일 뿐'이라고 한다면, 한 근본과 만 가지의 다름에 대하여 아직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내가 전에 늘 '이자는 알기 어려운 것이다'고 한 이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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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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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1장 인식론
과학과 가치는 화해할 수 없는 것인가 - 박정하
과학적 탐구에 있어 객관적일 것, 가치 중립적일 것은 지속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인간과 집단을 탐구 대상으로 하는 사회 과학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과연 가치 중립적인 사회 과학이 가능한가? 또 쓸모가 있는가?
가치란 무엇인가
우리는 때때로 화랑에 들러 미술 작품의 미적 가치를 감상하고 따져 보다. 사람들은 맞선을 볼 경우 상대방의 외모, 성격, 건강, 학벌, 재력 중 어디에 더 가치의 비중을 둘까 고민들을 한다. 우리는 윤리 시간에 올바른 가치관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다. 그리고 우리는 가치라는 말을 여러 다른 표현과 결합하여 광범위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윤리적 가치, 종교적 가치, 예술적 가치, 지적 가치라는 말도 쓰고, 정치적 가치, 경제적 가치, 사회적 가치라는 표현도 쓴다. 그리고 인류학적 가치, 군사적 가치, 전술적 가치 등의 말도 쓴다. 이처럼 가치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 언어 생활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말이며, 가치와 관계된 문제는 자주 부딪치는 친숙한 문제이다. 그러나 막상 '가치란 과연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던져 놓고 해답을 찾으려고 하면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질문 중에서도 가치에 관한 것만큼 많은 논란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도 드물다. 우선 가치 자체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워낙 추상적이고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다. 간단히 살펴보면, 어떤 철학자들은 가치를 세계 속에서 어떤 것이 차지하는 높낮이로 본다.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들은, 정신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서로 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때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고, 더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덜 가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차지하는 자리의 높낮이가 바로 가치이다. 그런데 관심, 취미, 이해, 욕망 등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같은 것을 보더라도 모두 똑같은 자리에 놓지를 않는다. 달리 말하면, 가치에는 언제나 평가하는 사람의 주관이 끼여들어 간다. 이 때문에 어떤 철학자들은 가치란 평가되는 대상과 평가하는 사람, 이 두 요소 사이에서 정해지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럴 경우 결국 평가하는 사람의 의지나 바람을 충족시켜 주는 정도에 따라 평가되는 것들의 높낮이가 정해지기 때문에 가치는 주관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평가하는 사람의 의지나 바람은 사람마다, 시대마다, 또 지역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다른 철학자들은 가치를 이렇게 주관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에 반대하여 가치의 객관성, 더 나아가서는 절대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이처럼 가치의 주관성과 객관성, 상대성과 절대성을 둘러싼 문제가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
그런데 가치 자체에 대한 이런 복잡한 논쟁 외에도 우리에게 제기되는 일반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가치와 사실을 구분하는 문제이다. 가치는 사실과 대립되는 말이다. 보통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는 기준은 주관적인 평가의 개입 여부이다. '가치'라고 부르려면 반드시 주관의 평가가 들어가야 하는 반면에, 보통 '사실'이라고 하면 주관의 평가가 들어가 있지 않은 현상을 일컫는다. 이 구분은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을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복잡한 지하철에서 할머니가 한 분 타시자 맹구가 자리를 양보했다고 하자. 이런 맹구의 행위에 대해 다음의 두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1) 맹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2) 맹구는 퍽 착하다. 여기에서 (1)은 사실 판단이고 (2)는 가치 판단이다. 이 두 판단은 형식적으로 볼 때 같은 문법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따져 보면 전혀 다르다. (1)번 판단의 경우, '맹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누구나 그 옆에 있었다면 눈으로 보고 검증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옆에서 직접 본 사람들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없는 판단이다. 누군가가 방금 맹구가 자리를 양보한 것을 보고도 "맹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판단은 경험을 통해 참과 거짓이 검증될 수 있고, 검증된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경험을 통해 볼 수도 있다. 즉, 객관화할 수 있다. 반면에 (2)번 판단의 경우에 '퍽 착하다'라는 판단은 개인적인 평가여서 객관화하기가 어렵다. 어떤 사람은 맹구의 행위를 보고 요즘처럼 경로 사상이 희박한 때에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조는 척하든지 못 본 체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한 것은 '퍽 착하다'라고 판단을 하고, 다른 사람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다지 착한 것이 아니다'라고 판단을 할 경우, 과연 누구의 판단이 옳은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가 있을까? 이처럼 평가의 경우에는 객관적인 기준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통 '사실 판단'이라고 하면 실재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이나 여기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내린 경험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판단들을 일컫는다. 이와 대조해서 '가치 판단'이라고 하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혹은 무엇이 좋은 일이고 무엇이 나쁜 일인지를 주장하는 판단에 대해서 쓰는 말이다. 우리가 사실을 서술할 때에는 어떤 대상이 있다거나 어느 특정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단언하거나, 대상이나 현상의 성질 또는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판단은 실제 세계에 대한 어떤 정보를 주는 것이며, 경험을 근거로 그 정보의 정확성 여부가 판단되어 참과 거짓이 정해진다. 반면에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평가하는 것이며 항상 규범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가치 판단을 할 때에는 해야 할 일을 전하거나 해서는 안 될 일을 금하는 것이고, 또는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혹은 바람직하고 그렇지 않은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과 가치의 관계
이렇게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을 비교해 보면 주관적인 평가의 개입 여부에 따라서 분명히 구분되기 때문에 사실과 가치의 구분이 명확한 듯하지만, 이것도 따지고 들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상당히 많은 철학자들은 사실과 가치가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도 사실과 가치 어느 쪽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여러 입장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로, 사실에 강조점을 두는 입장은 가치를 사실로써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시도를 하는 철학자들의 의도는 규범에 대한 객관적인 탐구를 가능하게 해 보려는 것이다. 가치 판단에 속하는 윤리적인 명제들에 대해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정당화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정당화를 해 보려는 것이 그들의 의도이다. 즉, 윤리의 본질 혹은 윤리에 대한 학의 성립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치를 사실에 환원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입장의 철학자들은 '선하다'라는 윤리적인 가치 개념을 '쾌락을 증진시킨다'라는 사실로 설명하려고 한다든가, '옳다'라는 도덕적 개념을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 보존을 위해 노력한다'하는 등 자연적인 사실에 의해 정의하고자 한다. 이렇게 사실로부터 가치나 당위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입장을 보통 '자연주의'라고 부른다. 자연주의는 주로 근대에 들어와서 중세까지 종교적으로 정당화되어 가치를 탈종교적이고 인간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설명해 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입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어떤 철학자들은 규범이나 도덕에서의 가치들은 결코 사실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주로 직관론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예를 들면 '선하다'라는 성질은 직관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것이지 '행복하다'든지 '바라고 있다'라고 하는 경험적 사실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가치를 사실에 환원하는 것을 '자연주의적 오류'라 비판한다. 둘째로, 가치를 중요시하는 입장은 거꾸로 사실이 항상 엄격한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많은 경우 우리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관적 요소의 개입이 전혀 없는 벌거벗은 사실이 아니고 이미 어떤 가치의 옷을 입고 있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즉, 많은 경우 사실은 가치의 개입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은 논리적으로는 구분이 되지만 실제 지적인 활동에서는 서로 결합될 수밖에 없다. 이런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다. 인간은 과학을 통해서 사실의 구조를 인식하며 윤리를 통해서 가치 판단을 하기 때문에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확연히 구분될 수 있는 별개의 영역이다. 그러나 실제로 한 인간이 어떤 생각이나 판단을 할 때에는 이 두 영역이 서로 맞붙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사실에 대한 가치 판단을 밑바닥에 깔고 그 사실에 관해 이렇다 저렇다고 하는 판단을 내리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이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일상적으로는 한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사실 판단을 내리는 경우도 흔히 있다. 따지고 보면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본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 속에서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출렁이는 감정의 흐름 때문에 우리의 눈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굴절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개인적인 인식의 장애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태어난 전통과 문화 속에 배어들어 있는 가치 판단의 안경을 벗어버리기는 더욱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다소간 그 어떤 가치의 편향에 의해 채색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주장이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적 사실'보다는 '사회적 사실'이다. 자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사실 판단이 가능하지만-물론 이 점도 사실은 많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사회에 대해서는 가치가 개입되지 않은 사실 판단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식의 대상이 자기의 이해 관계와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의 눈은 흐려지고 굴절된다. 욕심이 눈을 흐리게 하며 굴절시켜 놓는다. 이해 관계의 깊이와 인식의 투명성은 서로 반비례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보다는 사회에 대하여 더 어두운 눈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연보다는 자기 주위에 있는 사회가 자기에게 더 깊은 이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 의하면, 인간은 과거에는 자연도 이해 관계의 안경을 통해 들여다본 나머지 자연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자기의 욕망을 자연에 뒤집어씌워 자연을 파악했다. 그러다 차츰 인간은 자연에서 인간의 모습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접근해 왔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은 인간과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그것들은 자기 이해와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개인적 가치 편향, 자기가 놓인 사회적 틀이 지닌 가치 편향에 채색된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볼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입장에 대한 찬반론은 결국 사회에 대한 인식인 사회 과학이 객관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즉 가치와 사회 과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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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지
본뜻 : 마디 촌과 뜻 지로 이루어진 촌지 역시 일본식 한자어다. 직역하면 '손가락 한 마디 만한 뜻'이 되는데, 그것은 달리 말하면 '아주 작은 정성, 혹은 마음의 표시'라는 뜻이다. '작은 정성' '마음의 표시' '작은 뜻' 등의 우리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
바뀐 뜻:'작은 뜻' '작은 정성' '마음의 표시'를 뜻하는 말이나, 대개는 '뇌물'의 성격을 띤 금품을 말한다.
"보기글" -촌지 추방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요즈음에도 촌지 밝히는 공무원이 있나요? -선생님을 찾아갈 때는 으레 촌지를 가지고 가야 한다는 학부모들의 강박관념도 촌지 문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라구요
정서적 의미
국어사전에는 ‘샘’의 뜻을 ‘물이 땅에서 솟아나는 곳, 또는 그 물’이라고 풀이한다. ‘샘’이 가지는 물리적 현상을 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전라 방언에서 쓰이는 ‘샘’의 고장말 ‘시암’을 쓴다면 이 ‘시암’의 의미는 쓰는 사람 따라 상당히 다른 정서적 의미를 갖게 된다.
‘집안이나 마을 어귀에서 물이 솟아나는 곳’이 일반적인 의미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쌀이나 채소를 씻거나 손빨래를 하며 물을 긷는 곳, 아낙네들이 모여 삶의 얘기를 나누는 곳, 겨울에 물 길러 갔다가 얼음에 미끄러져 다친 곳, 여름철 더위에 등목을 하던 곳’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시암’이라는 방언에 녹아 있는 정감은 오랜 전통과 문화와 역사 속에서 다져진 정서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시암’에 얽힌 개인의 추억과 경험에 따라서 방언 ‘시암’의 문화·정서적 의미는 아주 다양할 것이다. 그래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그 고장말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 이는 ‘새미, 시얌, 새암, 삼, …’ 들로 말하는 고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주로 쓰는 말은 대체로 경험적으로 익힌 것들이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길든 말을 즐겨 쓰게 된다. 이럴 때, 표준어가 보여주는 물리·현상적 의미와 고장말의 체험·정서적 의미가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장말의 문화·정서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는 환경을 만나면 사람들은 표현에 한계를 느끼고 글쓰기와 말하기를 어렵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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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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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7. 하늘이 내린 명의(편작, 창공)
1)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일으켰을 뿐이다(편작)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일으켰을 뿐이다
언젠가 편작은 괵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백성들이 통곡을 하고 있었다. 알아보니 태자가 금방 죽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편작이 궁궐 앞에 가서 의관을 만났다.
"태자는 무슨 병이었습니까?" 그러자 의관이 대답했다. "태자의 병은 피의 순환이 불순했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기가 나쁜 기운을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에 양기는 완만해지고 음기가 치솟아 죽은 것입니다." "죽은 시간은 언제입니까?" "날이 밝을 무렵이었지요." "입관은 했습니까?" "아직 죽은 지 얼마 안되어 입관은 하지 않았습니다." 편작이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편작이라는 사람이온데, 지금까지 태자를 뵐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태자를 다시 살릴 수 있을 듯합니다." 이 말에 의관은 웃으며 말했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미 죽은 태자를 어떻게 살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옛날 유부라는 명의는 아무런 것도 쓰지 않고 잠깐 환부를 보고 그 징후를 살피며 동쪽의 맥을 짚어 보고는 살을 가르며, 힘줄은 잇고, 뇌수를 누르며, 위장을 씻고, 마음을 다스려 병을 고쳤다고 합니다. 선생의 의술이 이와 같다면 혹시 살려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지 못한데도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삼척동자도 웃을 노릇입니다."
그러자 편작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당신의 의술은 대나무통으로 하늘을 보고 틈 사이로 모양을 들여다 보는 것이므로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안색을 보고 소리를 들으면 병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습니다. 병의 바깥쪽을 듣고 속을 알며, 속을 듣고 바깥쪽을 압니다. 병의 증세는 밖으로 나타나는 거이니 천리 밖까지 가서 진찰하지 않아도 다만 증세를 듣는 것만으로 병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덮어서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말을 정 믿지 못하시면 당신이 들어가서 태자를 살펴 보십시오. 귀가 울고 코가 팽팽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허벅다리는 아직도 따뜻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의관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는 궁궐로 들어가 이 사실을 괵나라 군주에게 보고했다. 군주는 즉시 편작을 불러 들였다.
"선생의 명성은 저도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그만 나라에 오셔서 태자를 염려해 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정말 제 아들을 살리실 수 있으신지요?"
군주는 그러면서 흐느껴 울었다. 방울방울 흐르는 눈물이 눈썹 가득 고였으며, 급기야 얼굴이 온통 일그러졌다. 편작은 말했다.
"태자의 병은 이른바 시궐이라는 것입니다. 양기가 음기 속으로 흘러 들고 그것이 위를 움직이며 혈맥에 엉겨 붙었다가 다시 갈라져 방광까지 내려갑니다. 말하자면 음기는 위로 올라가고, 체내를 돌아 아래로 내려온 양기는 위로 오를 줄 모릅니다. 이 때문에 음양의 조화가 무너져 얼굴빛이 파리해지고 몸은 움직이지 못해 죽은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태자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양기가 음기 속으로 들어가 오장을 지탱하면 살고, 음기가 양기 속으로 들어가면 죽습니다. 이런 일은 대개 몸 속에서 오장의 기운이 치솟을 때 갑자기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편작은 제자에게 침을 갈게 하고 태자의 몸 바깥쪽에 있는 삼양과 오회에 침을 놓았다. 그랬더니 조금 뒤에 태자가 깨어났다. 그 뒤 편작은 5푼의 고약을 만들고 팔푼의 약을 섞어서 달인 다음, 이것을 양 겨드랑이 밑에 발라 따뜻하게 찜질을 했다. 그러자 태자가 일어나 앉았다. 다시 음양의 기를 조절하고 20일 동안 탕약을 먹이니 태자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편작은,
"내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낸 것이 아니라, 다만 당연히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일으켰을 뿐이다."고 말했다.
너무 아름답고 좋은 것은 불길함의 징조이다
편작의 이름은 갈수록 드높아졌다. 그래도 편작은 천하를 돌아다니며 손수 치료에 나서고 있었다. 조나라에서는 주로 부인병 치료를 하게 되었고, 주나라에 가서는 노인병 치료에 주력했다. 또 진나라에서는 주로 어린이들을 치료하였다. 이렇듯 편작은 가는 곳마다 그곳 사정에 따라 치료를 했던 것이다. 편작은 의술을 발전시키고 집대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서, 한편으로는 점쟁이나 주술에 의한 병의 치료에 강력히 반대했다.
"의약을 믿지 않고 점쟁이나 주술만 따른다면 나을 병이 없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무당이나 주술사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으며, 재능없는 의관들도 그의 높은 의술을 질투하였다. 그가 진나라에 있을 때 그 명성이 날로 높아지자 왕이 치료를 부탁했다. 이때 진나라의 시종의로 있었던 이혜는 편작을 크게 질투하여 그를 없애려고 하였다. 드디어 이혜는 자객을 보내 편작을 죽였다. 그렇게 편작은 죽었지만 그의 의학 이론과 기술은 중국 의학계의 귀중한 보고가 되었다. 그의 의학 이론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 "난경"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었으며, 사람들은 편작을 추모하여 약왕이라 부르고 중국 의학의 시조로 받들고 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얼굴이 곱든 밉든 궁중에 있으면 질투를 받게 되고, 선비는 똑똑하든 그렇지 않든 조정에 있으면 의심을 받는다. 편작은 그 신기 때문에 결국 화를 입어야만 했다. 노자는 '너무 아름답고 좋은 것은 불길함의 징조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편작과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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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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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24장. 항생물질.
설파제.
설파닐아미드 및 이에 관련된 합성 항생제의 발견은 세렌디피티 뿐만이 아니라 오해(제35장 참조)에 의한 경우도 있다. 아무튼 흥미로운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이 발견에 의해 게르하르트 도마크가 1939년에 노벨생이의학상을 수상했는데 이 드라마에는 더 많은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도마크는 1895년 독일의 라고우에서 태어났다. 킬대학에 들어갔으나 의학 공부는 제1차세계대전 때문에 중단하게 되었다. 휴전이 되자 킬대학에 복학하여 1921년 의학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그라이프스왈트대학의 강사에 이어서 묀스테르병리학연구소의 교수로서 수년간을 보낸 후 독일의 염료 카르텔(기업 연합)인 I.G. 파르뱅(I.G.F.)사의 실험병리학과 세균학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가 하는 일은 프릿츠 미츄와 요셉 클라라가 합성한 새 염료의 약리학적 성질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미츄는 이미 최초의 합성 항말라리아제 아타브린의 개발자로서 유명했었다. 말라리아는 매독과 마찬가지로 원충에 의한 전염병으로서 매독에 관해서는 에이를리히가 유효한 약으로서 살바르산을 발견했으며 이것이야말로 병에 대한 화학 요법으로서 최초로 사용된 마법의 총탄이었다. 그러나 1932년에 이르기까지 폐렴, 수막염, 임질 또는 연쇄상 구균과 포도상 구균에 의한 감염증 등 무서운 병의 원인이 되는 박테리아에 대해서 유효한 화학 약품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었다.
I.G.F.사의 화학자와 약리학자 팀은 동물이나 인간에 해를 주지 않고 이러한 병원균을 죽일 수 있는 화합물을 발견하는 연구에 착수했다. 그들이 생각한 계획은 일정한 형의 염료를 합성해서 그것들이 항균성을 가지고 어떤지를 조사하는 것으로서 그 이유는 어떤 종류의 염료, 특히 설폰아미드기를 가진 것은 모직물에 빨리 단단하게 결합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단백질 분자에 대해서 친화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학자들은 세균이 단백질이기 때문에 이들 염료가 세균에 단단히 달라붙어서 세균을 저해하거나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설폰아미드기가 꼭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 생각은 부분적으로 들어맞았으나 항균성을 갖기 위해서 반드시 염료로서의 구조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미츄와 클라라가 합성한 염료 중에는 도마크가 연구실에서 연쇄상 구균에 감염시킨 생쥐나 집토끼에 시험해 본 프론토실(prontosil)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연쇄상 구균에 대해서 강력한 살균성이 있고 더구나 동물에게 대량으로 투여해도 아무런 악영향이 없었다. 이 동물체내에 있어서의 항균 효과는 아마도 1932년 초에 발견되었을 것이며 I.G.F사는 그 해 12월에 특허를 신청했다. 사람에 대한 임상실험은 직후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지는데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어떤 이야기에 의하면 사람에게 아직 아무런 시험도 하기 전에 바늘에 찔린 상철 인해 연쇄상 구균에 감염되어 위독상태가 된 자기의 어린 딸에게 자포자기가 된 도마크가 프론토실을 투여했더니 그 소녀가 바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다른 보고에 의하면, 최초의 임상실험은 포도상 구균에 의한 폐혈증으로 위독해진 생후 10개월의 남자 아기에 대하여 의사인 포에르스터가 프론토실을 투여한 것이라고 한다. 포에르스터는 뒤셀도르프 의과대학의 교수인 쉬리우스 박사의 동료였다. 포에르스타에게 폐혈증의 어린이에 관해서 상담을 받은 쉬리우스는 도마크의 선배인 호레인으로부터 동물실험 당시 연쇄상 구균에 마법처럼 잘 낫는 빨간 염료(프론토실)에 대해서 들었던 것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 염료가 포도상 구균에 대해서 효과가 없더라도 어쨌든 그 어린이는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한 포에르스터가 아기에게 그 빨간 염료를 두 번에 걸쳐 투여했더니 위독 상태로 생각되었던 폐혈증이 급속하게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아야기 중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둘 다 사실인지는 몰라도 도마크가 1939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점으로 보아 1930년대 중반쯤에는 이 의학적 기적이 널리 알려졌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1933년부터 1939년 사이에 그것과는 별도로 중요한 진보가 있었다. 도마크는 프론토실의 감염 동물에서의 시험 결과를 실제 시험이 끝난 후 2년 이상 지나서 I.G.F.사의 특허가 성립된 1개월 후인 1935년 2월에야 겨우 발표했다. 파리의 파스퇴르연구소에서는 독일의 연구 결과를 알게 된 트레포엘 부부가 포르뉴의 지도하에 기본적인 발견을 했다. 그들은 프론토실과 화학 구조가 비슷한 화합물 즉, 아조(azo)염료를 몇 가지 조사했다. 이 염료에 붙여진 아조라는 이름은 프랑스어로 질소를 뜻하는 '아조토(azote)'에서 유래된 것이며, 분자의 한가운데에 이중 결합으로 이어진 두 개의 질소원소가 있기 떄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들 염료는 분자의 한편이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그 반대측은 모두 같은 설폰아미드기를 가지고 있다. 트레포엘 부부는 이들 염료가 모두 프론토실과 거의 같은 항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발견은 프론토실에 관한 또 다른 수수께끼도 잘 설명했다. 즉, 프론토실은 생체 안에서는 세균에 대해서 매우 효과적인데 시험관 안에서는 효과가 없었다. 즉, 어떤 생체의 작용이 설폰아미드염료를 항균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프랑스의 연구자들은 동물의 체내에서 염료가 두 부분으로 분해되며, 설폰아미드기 쪽만이 항균제로서 유효하다고 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프론토실의 설폰아미드 부분 즉, 이미 알려져 있는 물질인 P-아미노벤젠설폰아미드 또는 단순히 설파닐아미드라고 하는 화합물을 합성하여 조사해 보니 세균성 감염증에 대해서 프론토실과 같은 효력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림 24-1에 있는 프론토실과 설파닐아미드의 구조식을 보면 프론토실의 분자가 한 가운데의 질소원자 사이의 이중 결합 부위에서 쪼개지면서 우측 부분에 두 개의 수소원자가 붙으면 설파닐아미드가 생긴다. 이러한 쪼개지는 현상은 프론터실을 주사나 내복으로 섭취할 때 동물의 체내에서 일어나며, 그 결과 생긴 설파닐아미드가 진짜 항균제로서 가능하게 된다. 설파닐아미드는 무색이며 프론토실의 다른 반쪽도 무색이다. 이 둘을 주안에 있는 두 개의 질소원자로 연결함으로써 비로소 아조 염료의 색이 난다. 설폰아미드 색소에 살균력이 있다는 것은 오해이며 병원균을 죽이는 기능을 했던 것은 이 염료 분자 중의 설폰아미드기 부분뿐인 것이다. 이것이 염료 분자의 일부였다는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 발견은 세렌디피티였던 것이다.
트레포엘 부부의 발견은 프론토실에 관한 I.G.F.사의 특허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설파닐아미드는 훨씬 이전에 합성되어 염료 중간체로 특허 등록을 하였으나 항균성이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특허 기한이 지났었다. 이 발견이 포르뉴에 의해서 파스퇴르연구소에서 1935년에 발표되자 설파닐아미드의 임상시험이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 시행되어 기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새로운 약의 이름이 크게 떨치게 된 것은 프론토실이 미국 대통령의 아들 프랭클린 D. 루즈벨트2세의 목숨을 구하는 데 사용되었던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1936년 이 아들이 연쇄상 구균에 감염되어 위독했을 때 모친 엘레노어 구즈벨트의 요청으로 메사츄세츠 종합병원의 조지 토비 박사가 그에게 프론토실을 투여한 결과 그는 즉시 회복되었던 것이었다. 화학자들에 의해서 설파닐아미드의 단순한 유사체가 많이 합성되어 동물과 인간에게 사용되었다. 1938년에 만들어진 설파피리딘은 폐렴에 대해서 보다 높은 효과를 나타냈으며 설파티아졸은 1940년에 만들어져 치료에 사용되었다.
- 약효가 있는 설폰아미드류의 분자 구조는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합성하여 시럼된 몇 천이라는 화합물 중에서 유효한 것은 거의 모두가 그림 24-2에 명시한 설파피리딘과 설파티아졸의 구조식과 너무 흡사하여 고딕체로 쓴 질소원자 우측에 붙어있는 원자군만이 다른 것이었다. 설파제는 1940년내 특히 제2차세계대전 중의 군대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그후 페니실린이나 다른 새로운 항생 물질로 바뀌었으나 어떤 병의 치료에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이 약의 결점 중 하나는 잘 녹지 않는 성질 때문에 신장에 남아서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이 난점에 관해서는 세 가지 종류의 설파제를 꼭 유효량이 되도록 복합해서 투여함으로써 극복되었다. 각 성분의 농도가 3분의 1이 되어 충분히 배설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도마크가 1939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것은 엄밀히 따져서 틀린 말이다. 그는 스톡홀름의 당국에 의해서 수상이 지명되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훨씬 후에까지 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1939년 10월에 수상 통지를 받았을 때 도마크는 일단 수락하는 답장을 보내 왔으나, 그 후 상을 거절한다는 두 번째 편지가 11월에 스톡홀름에 도착하였다. 편지는 나치의 압력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도마크는 이때 게슈타포의 감독하에 있었다. 전후 1947년이 되어서 겨우 스톡홀름을 방문할 수 있게 된 도마크는 수상 기념 강연을 하여 메달과 상장을 받았으나 상금은 노벨재단에 반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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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황진이의 유혹에도 동요하지 않은 서경덕
서경덕(1489-1546)의 본관은 당성이고, 자는 가구, 호는 화담으로, 개성 사람이다.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여 농사와 누에치기를 업으로 삼고 지냈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썼다. 아버지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화담 가에 집을 짓고 도의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학문하는 방법은 오로지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혹 말없이 여러 날 동안 마냥 앉아 있기도 하였다. 만일 하늘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려면 '천'자를 벽에 써서 깊이 연구하고, 다시 다른 글자를 써서 정밀히 생각하고 연구하여 밤이 새는지 해가 지는지 모르고 골똘히 연구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 지나 모든 세상의 이치가 환하게 된 뒤에 글을 읽어 그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스승을 얻지 못했으므로 공부를 한 것이 지극히 깊었지만, 후인이 내 말대로 하면 나처럼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논설은 송대 장횡거(이름은 재임)의 학설을 주장한 것이 많았다. 마음에 스스로 터득하여 만족하게 스스로 즐기고, 세상의 시비, 득실과 영욕은 추호도 마음에 개의치 않았다. 집에 끼니 꺼리가 여러 번 떨어졌으되 늘상 태연하였다. 하루는 문생 강문우가 와서 뵈니, 화담 선생이 못가에 앉아 있었는데, 이미 한낮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강론하였는데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강문우가 부엌에 들어가서 그 집 식구들에게 물어 보니 "어제부터 양식이 떨어져서 밥을 짓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못가를 산보하며 놀다가 종이를 한 치쯤 잘라 몇 글자를 써서 물속에 던져 넣으니, 한 쌍의 잉어가 물에서 뛰어나와 돌 위로 올라왔다. 화담 선생이 손으로 잡아서 살펴보고는 웃으면서 물에 도로 던져 넣고 말하였다.
"좌도(바르지 못한 도)를 하는 사람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구나"
중종 때에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선조 때에 영상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강이다. 겨울에는 화롯불을 쬐지 않고 여름에는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밤에도 잠자리에 쉬이 들지 않았다.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글 읽던 당시에는 세상 다스리는 경륜 뜻했는데 노년에는 도리어 안자의 가난 달게 여기네 부귀는 다툼이 있어 손을 대기 어렵고 산수는 금함 없어 몸을 편히 할 수 있네 산의 나물과 물의 고기로 이 배를 채울 수 있고 달을 읊조리고 바람을 노래하니 정신을 상쾌하게 하네 학문이 의심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참으로 쾌활하거니 헛되이 백년의 인간이 되는 것 면하게 되리
그를 추종하여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수업한 사람이 날로 문에 가득하였다. 송도에 인물이 많아서 차오산(이름은 천로임)의 문장, 한석봉(이름은 호임)의 명필 등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또한 명창 진이란 기녀가 있어 얼굴이 아름답고 노래를 잘 부르고 거문고를 잘 타며 시에 능하였는데, 또한 여자 중의 호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컫기를 "송경에 삼절이 있으니, 그 첫째는 박연폭포이고 그 둘째는 화담 선생이고 그 셋째는 곧 황진이다"라고 하였다. 진이는 화담 선생이 고상하게 살며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시험해 보고자 하여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들고 실띠를 매고 '대학'을 끼고 가서 절하였다.
"소첩이 듣건대 '남자는 가죽띠를 매고 여자는 실띠를 맨다" 하였습니다. 소첩도 학문을 알므로 실띠를 매고 왔으니 원컨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화담 선생은 웃으면서 그를 가르쳤다. 진이는 밤을 이용하여 접근하되, 마치 마등이 아난타에게 달라붙는 것처럼 여러 날 동안 접근하였으나, 화담은 끝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진이는 부끄러움과 한을 견디지 못하여 드디어 화담을 하직하고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칡적삼과 베치마차림에 짚신을 신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국내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고 돌아왔다. 진이는 늘 말하였다.
"지족 노선이 30년 동안 벽을 쳐다보고 수도했어도 나에게 지조가 무너졌는데,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 동안 가까이 지냈으되 끝내 난잡한 데에 이르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
화담이 시냇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서사정'이라는 현판을 걸고서 그 위에서 즐겁게 놀았다. 하루는 문도들과 '주역'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을 적에 홀연히 늙은 중이 와서 섬돌 아래에서 절하였는데, 무성한 눈썹에 고리눈이며 상모가 흉악하고 사나웠다. 화담이 물었다.
"너는 여기 무슨 까닭으로 왔느냐?" "빈도가 마치 갈 곳이 있어 집 앞을 지나는 길에 잠시 뵙기를 청합니다" "내가 죄없이 죽음에 나아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너는 놓아 줄 수 있겠느냐?" "이는 천명에 관계되니 진실로 어기기 어렵습니다"
중이 절하며 하직하고 가 버리자, 화담이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문도들이 모두 당황하여 서로 돌아보면서 그 까닭을 궁금해하자 화담이 말하였다.
"그 중은 아무 산의 신호이다. 오늘 저녁 아무 마을, 아무 집에서 장차 사위를 맞이하여 폐백을 받는데, 처녀가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니 어찌 참혹하지 않겠느냐" 무도들이 말하였다. "선생께서 이미 환하게 아시면 어찌 구제하려 하지 않으십니까. 유곤이 특이한 공적이 있자, 범이 그 아들을 업고 하수를 건너갔고, 황공이 적도를 외자 범이 사람을 해치지 못하였으니, 지금 만 가지 경우에도 두루 통하는 선생의 도로써 어찌 눌러 이기는 술법이 없으시겠습니까?" 화담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뒤에 말하였다. "내가 조금 시험해 보려 하나, 다만 시킬 만한 사람이 없을 뿐이다" 한 문생이 자기가 가겠다고 자청하자, 화담은 기뻐하면서 책 하나를 주며 말하였다. "이것은 '연화경' 안의 보현품이다. 옛날 고환국 손모가 이 경문을 외어 액화를 면하게 되었으니, 불가에서 '고왕관음경'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네가 그 집에 가서 모름지기 기밀을 누설하지 말고 다만 대청 위에 상탁과 향, 촛불을 갖추어 차려 놓고 그 처녀를 방안에 가둔 뒤 문을 굳게 잠그고 건장한 여종 5, 6인을 시켜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말도록 하라. 너는 대청 위에 앉아 이 경만 외우되 구두를 그르치지 말고 닭이 울 때까지 끌어가면 저절로 무사하게 될 것이니, 경계하고 조심할지어다"
그 문생이 화담의 가르침을 받고 그곳에 가니, 곧 산골 마을의 부잣집 민가였다. 집들이 즐비하고 노적가리가 담장 높이 솟았으며, 마당에는 차일과 장막이 여러 군데 쳐져 있고 문밖에 신발이 가득하였다. 방안에 들어가 주인을 만나 보니, 풍채와 인품이 좋은 노인이 물었다.
"손은 무슨 일로 밤에 여기로 왔소?" 그 문생이 대답하였다. "저는 과객이 아닙니다. 주인집에 큰 일이 있는데 화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할 수 있어서 일부러 왔습니다" "무슨 일이오" "오늘밤 주인집에 큰 액이 있으니, 만일 내 말대로 이렇게 이렇게 하면 거의 재앙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 노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쳐다보며 말하였다. "어디서 온 풍객이 미친 헛소리를 하오?" "나는 뜻만 커서 큰소리치는 초나라의 접여가 아니라, 계책이 초나라를 위하는 데에 있는 조나라의 모수입니다. 우선 앞으로의 일을 보고 나서 내 말이 속인 것이라면 곤장을 쳐서 쫓아 내면 될 것입니다"
주인 노인이 마음으로 매우 의아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어떻게 되는지 보겠다 하고 하인을 시켜 일체 손의 말대로 대청을 청소한 다음, 상탁을 설치하고 처녀는 방안에 깊이 숨겨 놓았다. 그 문생은 곧 옷을 가다듬고 대청 위에 단정히 앉았다. 안팎이 조용하고 등불, 촛불이 환하게 밝았다. 그는 상탁 앞에서 불경을 외웠다. 삼경 때쯤 되자, 벽력 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지붕의 기와가 모두 진동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숨어서 보니, 이마가 흰 큰 범이 뜰 가운데로 뛰어내려 왔는데, 눈은 번개처럼 번쩍이고 소리는 뇌성같이 웅장하였다. 그 범은 멋대로 날뛰며 물어뜯고 으르렁거렸는데, 그 형세가 매우 사나왔다. 문생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불경을 끊임없이 읽을 뿐이었다. 이때에 처녀가 변을 보겠다는 핑계로 나가려 했으나 여종들이 좌우에서 그를 포박한 것처럼 단단히 붙잡으니, 처녀는 손발을 어지럽게 흔들며 몸부림을 쳤다. 이윽고 범이 홀연히 번개처럼 잽싸게 떨쳐 일어나서 크게 울부짖고 창문 앞 기둥 나무를 물어뜯었는데, 이렇게 세 번 하였다. 조금 뒤에 마을의 닭이 '꼬끼오' 하고 울자, 범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처녀는 까무라쳐 버렸다. 이윽고 집안 식구들이 정신을 수습하고 따뜻한 물을 처녀의 입에 넣으니 조금 뒤에 깨어났다. 그 문생이 불경 읽는 것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주인이 절을 하고 사례하였다.
"공은 신인인데, 내가 눈이 있으되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천금을 올려 공자를 위해 축수함으로써 만분의 일이나마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내가 우연히 남의 위급함을 구제하는 의리로 인하여 잠시 술법을 시험해 본 것이지, 애당초 술법을 팔아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생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주인 노인이 재삼 굳이 만류하였다. 이에 옷소매를 뿌리치고 돌아와 화담에게 고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세 곳을 잘못 읽었느냐" 화담이 웃으며 말하자 문생이 대답하였다. "잘못 읽은 곳이 없습니다" "조금 전에 그 중이 또 들렀다 가면서 나에게 사람을 살려준 공을 사례하고 또 '경문 세 곳을 잘못 읽어서 기둥 나무를 물어뜯어서 표시하였다'고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생각해 보니 과연 잘못 읽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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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해골
신하가 임금을 섬길 적에는 자기의 뼈를 임금에게 바치는 셈이니 벼슬 아치가 벼슬자리에서 하직하려 함을 말한다. 유방이 항우와의 싸움에 지쳐 강화를 청할 무렵이다. 항우로서도 휴정할 생각이 있어 범증 장군에게 의논하였다. 그러나 범증은 이때야말로 한 나라를 무찔러야 할 시기라고 주장하매 항우는 다시 포위하고 나섰다. 유방은 당황하여 진평에게 의논하자 진평은 항우의 단순한 성격을 알고 있는 만큼 항우와 범증 사이를 갈라놓기로 제의하였다. 자기네 부하를 시켜 초 나라 군병들 사이에다 뜬 소문을 퍼뜨리자는 것이니 범증이 항우에게 불만을 품고 한 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허튼 소문이었다. 항우는 이내 동요하여 범증에게는 은밀히 해둔 채 유방에게 강화의 사신을 보낸다. 한편 지장 진평은 그 사신들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하다 말고 능청을 부렸다.
"범 증 장군께서는 평안하시오?"
사신은 이 느닷없는 질문에 "소인은 범증의 사자가 아니오라 항우의 사신이올시다" "그래? 나는 존경하는 범증 장군의 사자이거니 여기고 후대했구먼. 하, 거 참..."
진 평은 이렇게 흉물을 떨고는 내 놓은 주안상을 거두고 대접을 마구 하였다. 그 사신들이 돌아가 항우에게 고하자 항우는 범증이 한 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확실하다 여기고 범증의 온갖 권력을 박탈해 버렸다. 범증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면서 "천하의 대세는 이미 정해진 거나 같사오니 앞 일은 몸소 조처하소서. 소인은 해골을 빌어 내어 가지고 초야에 묻히렵니다"
이리하여 범 증은 낙향하던 도중 울화로 말미암아 등창이 생겨 사망하니 그의 나이 75세. 항우는 어리석게도 진평의 책략에 넘어가 유일한 지장을 잃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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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스물한번째 이야기 미련하게 욕심만 부린 늑대
늑대가 아침 일찍 일어나 기분좋게 기지개를 켜다가 방귀를 늘어지게 뀌고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재수가 좋을려나 보네. 꼬리에서 이렇게 기분좋은 소리가 났으니 말이야. 배불리 먹을 복을 생기려나?"
그리고는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던 중에 마차에서 떨어진 돼지 비계를 발견했다. 늑대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돼지 비계를 먹으면 배가 그득하게 차오를 테니까 오늘은 저 비계를 먹지 않고 그냥 가야지. 아침에 내 엉덩이가 예언한 바에 의하면 맛있는 걸 잔뜩 먹을 운세인데 미리 배를 채워두면 안 되지." 늑대는 조금 더 가다가 베이컨을 발견했다. "내 꼬리가 예언한 바에 의하면 오늘 맛있는 걸 먹을 운세니까 이걸 먹지 말고 그냥 지나쳐야지." 늑대는 또 절벽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다가 망아지와 함께 있는 암말을 발견하자 기분이 좋아 중얼거렸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내 오늘 먹을 복이 터질 줄 알았다니까." 늑대가 암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말했다. "나는 지금 무척 배가 고파. 네 새끼를 잡아먹어야겠다." 그러자 암말이 대답했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하지만 어제 제 주인과 함께 길을 가다가 왼쪽 발에 가시가 박혔어요. 당신이 명의로 소문이 나 있으니 식사하시기 전에 내 발에 박힌 가시나 빼주세요. 그리고 나면 당신이 하자는 대로 다 하겠어요. 내 새끼를 드셔도 좋아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늑대가 암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주기 위해 말의 발바닥을 들여다보자, 암말이 냅다 늑대의 얼굴 한가운데를 걷어차고는 망아지를 데리고 산 속으로 유유히 도망쳐버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늑대가 혼자 중얼거렸다. '이까짓 일쯤이야. 하여간 오늘 안에 배불리 먹기만 하면 되잖아.' 늑대는 다시 길을 가다가 염소 두 마리가 풀밭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게 웬 떡이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늑대가 염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잘들 있었느냐? 오늘 너희 둘 중 하나는 내 밥이 되야겠다." 그러자 한 염소가 대답했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하지만 우리 둘 중 누가 옳은지 재판부터 해주세요. 원래 이 벌판은 우리 아버지 것이었는데 이 녀석이 자꾸만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올바른 판결을 해주시면 당신 뜻대로 하겠어요." 늑대가 대답했다. "그쯤이야 기꺼이 할 수 있지. 하지만 너희가 어떤 방법으로 나눠 갖기를 원하는지 먼저 말해보거라." 그러자 다른 염소가 말했다. "저에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어요. 당신이 초원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우리가 양쪽 끝에서부터 당신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겠어요. 먼저 도착한 염소가 이기는 거고, 진 염소는 당신 먹이가 되는 거예요." 늑대는 흔쾌히 그 방법에 동의했다.
그런데 염소들은 양쪽 끝에서부터 늑대가 있는 초원 한가운데로 있는 힘을 다해 뛰어와 늑대를 세게 들이받았다. 늑대는 양쪽에서 거센 충격을 받아 갈비뼈가 부러지고 정신까지 잃고 쓰러졌다. 거의 초죽음 상태가 된 늑대가 중얼거렸다.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야. 오늘 아침에 꼬리가 예언한 바에 의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테니 꾹 참아야지."
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길을 가던 늑대는 돼지가 새끼들과 함께 강가 풀밭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오, 이럴 수가. 내가 오늘 먹을 복이 있다니까." 늑대가 어미 돼지에게 다가가 말했다. "네 자식들을 잡아먹어야겠다." 그러자 어미 돼지가 아무렇지도 않은 양 대답했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하지만 우리는 몸을 깨끗이 씻어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아직 그러지 못했어요. 내가 보기에는 신의 뜻에 의하여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 같으니 당신이 사제가 되어 우리 의식대로 내 자식들에게 세례를 주세요. 그때 가서 그놈들을 잡아먹든지 말든지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깨끗하게 씻을 걸 먹으면 당신도 기분이 좋잖아요." 늑대가 말했다. "그러면 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거라." 돼지가 물레방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물이 제일 깨끗하고 신성한 물이에요." 늑대는 물레방아의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가 진짜 사제나 된 것처럼 폼을 재면서 돼지 새끼 한 마리를 잡아 물 속에 집어넣고는 세례를 주었다. 바로 그때 어미 돼지가 물레방아를 힘껏 들이박는 통에 늑대는 땅바닥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온몸에 멍이 들고 심하게 다친 늑대가 혼잣말을 했다.
"흥, 내가 이까짓 고통에 물러날 줄 알고. 잠시 속았을 뿐이야. 원래 오늘의 내 운수가 얼마나 좋은 건데. 내 꼬리의 예언에 의하면 오늘 배불리 먹을 팔자란 말이야."
그리고는 마을 가까이 지나가다가 양 몇 마리가 아궁이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먹이가 눈앞에 있군요."
늑대가 오는 걸 보자 양들은 놀라서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늑대가 아궁이 앞에서 으르릉대며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잡아먹으러 왔다." 양들이 대답했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우리는 제사를 지내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목청 좋은 당신이 노래를 불러주신다면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게요."
늑대는 자기가 덕망 높은 사제나 되는 것처럼 한껏 폼을 잡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는 개를 끌고 몽둥이를 집어들고 달려왔다. 늑대는 개들한테 실컷 물어 뜯기고 몽둥이 찜질을 당한 후 겨우 목숨만 건진 채 간신히 도망쳤다. 가지가 무성한 나무 그늘 밑에 쓰러진 늑대는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구, 내 팔자야. 대체 오늘 일진이 왜 이리 나쁜거야. 하진 내 잘못이 더 컸지. 돼지 비계와 베이컨을 우습게 알고 건방을 떨었으니 말이야. 약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암말을 고치겠다고 덤벼들고, 법에 법자도 모르는 내가 염소들의 싸움을 중재하겠다고 나섰으니, 그리고 글자도 모르는 내가 무슨 사제라도 된다고 돼지새끼들에게 세례를 주겠다고 설쳐대고 교황이나 추기경이 주관할 수 있는 제사를 내가 주관하겠다고 잘난 척했으니 벌을 받은 거야. 오, 주피터 신이시여. 상아로 만든 권좌에 앉으셔서 저에게 칼을 내려 벌을 주옵소서."
바로 그 때 남자 한 명이 나무 위에 올라가 가지를 치고 있다가 늑대가 하는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늑대가 신세 타령을 마치자, 그 남자는 들고 있던 도끼를 집어던져 늑대의 목덜미를 찍었다. 늑대는 아파서 낑낑대면서 주변을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늑대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오, 위대하신 주피터 신이시여. 당신의 섭리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습니다. 소원을 이리도 빨리 들어주시다니 그저 놀랄 뿐입니다. 이 장소를 성스러운 곳으로 지정해 괴롭고 슬픈 사람들에게 소원을 빌도록 하겠습니다."
*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높은 이상을 추구하다보면 그만큼 실망도 크다.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떨어지는 폭도 큰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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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6. 신라의 청해진 폐쇄 (대륙진출을 포기한 신라와 역전된 해상지배권)
청해진의 무역왕
후당 황제로부터 오월왕이라는 칭호를 인정받았던 전류나 9세기 중엽의 쾌속항해가 장지신이 중국 해안을 근거지로 삼은 한족 출신의 지방 실력자였다면, 청해진의 장보고나 혈구진의 계홍은 남조신라의 해안을 근거지로 삼은 지방 실력자였다. 그 가운데서도 독자적인 세력을 쌓았던 막강한 실력자는 신라인 장보고와 중국의 전류였다. 이들 둘 사이에는 한 세대 이상의 시간적 격차가 존재한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9세기 중엽의 해상왕국이었다면, 전류는 10세기 초반의 해상왕이었다. 즉 장보고의 청해진이 851 년에 폐쇄됨으로써, 주인을 잃은 해상지배권이 반세기를 방황하다가 중국 한족의 손아귀로 들어간 셈이다. 장보고의 해상세력은 처음부터 불안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그것은 장보고의 신분 내력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남조신라의 평민이었다. 그는 왕족이나 6 두품 귀족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장보고는 젊은 시절에 정년이라는 벗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군대에 몸을 던졌고, 능력을 인정받아 무령군의 고급장교가 되었다. 무령군의 장교가 된 장보고는 다시 남조신라로 돌아왔고, 청해진에 자신의 세력근거지를 마련했다. 그가 청해진을 기반으로 상당한 해상세력을 쌓자, 남조신라는 그를 청해진 대사로 삼았다. 즉 남조신라도 마침내 그의 실력을 인정한 셈이었다. 당나라와 남조신라로부터 두루 능력을 인정받은 장보고는 먼저 자신이 무령군 장교로 있던 대륙의 해안지역과 청해진을 잇는 해상교통로를 장악했다.그는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을 이용해서 무역을 했으며, 무역으로 얻은 이익은 다시 군사력을 키우는 데 투자했다. 물론 늘어난 군사력은 청해진과 또 다른 지역을 연결시키는 기반이 되었으며, 이런 방법으로 그는 마침내 일본 열도와 류큐 및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거대한 해상교통로를 독차지했다. 무역으로 얻은 엄청난 이익과 끊임없이 늘어나는 군사력은 청해진을독립적인 왕국으로 변모시켜 나갔다. 그러나 청해진은 여전히 불안한 신라 내부에도 그럴듯한 근거지가 없었다. 그리고 장보고는 여전히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었다. 이런 불안함을 털어버리기 위해 장보고는 먼저 중국 내부의 신라방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들어나갔으며, 영암지역 등 한반도 내부에도 차근차근 자신의 세력권을 만들어나갔다. 중국 적산현에서 발굴된 장보고 관련 유물이나 청해진 유물이 모두 영암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장보고는 청해진의 안정을 위해 자신의 신분을 격상시키려고 했다. 적산현과 청해진에 법화원이라는 가람을 지었으며, 저명한 승려들의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 승려 원인이 장보고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난다. 장보고는 또한 남조신라의 왕위쟁탈전에도 관여했는데, 그가 군사력까지 지원해서 왕위에 앉힌 인물이 바로 신문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신문왕의 후원자가 됨과 아울러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한편 그는 지난날 백제가 누렸던 해상주도권 전체를 회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에게는 백제와 같은 영토적 기반이 거의 없었다. 그의 군영에 비록 1 만 명이 넘는 군대가 있었지만, 군사를 계속 징발할 합법적 영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청해진의 무역왕국은 여전히 불안했다. 더구나 장보고가 남조신라의 자객에게 갑작스런 죽임을 당하자, 청해진은 크게 흔들렸다. 영토 없는 해상왕국의 한계가 한꺼번에 드러나기 시작했고, 청해진은 남조신라군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다. 장보고의 기반이었던 청해진 일대의 주민들은 모두 내륙지방인 김제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마침내 미완의 해상왕국은 폐쇄되고 말았다.
미완성의 해상왕국, 청해진
청해진의 해상권과 백제의 해상권은 서로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이와 어른의 힘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백제의 해상권은 한반도의 중서부와 중국 대륙의 드넓은 해안지역 및 일본 열도 등에 수많은 다물이 설치된 데서 드러나듯, 거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이 말을 뒤집으면 백제의 해상권은 수많은 다물을 설치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백제의 해상주도권은 풍수지리적으로 비유컨대 장풍과 득수를 모두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청해진은 실로 얼마 안 되는 작은 토를 점유하고 있었을 따름이며, 그 땅마저 공인되지 못한 불법 점령지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청해진의 해상지배권은 백제의 완벽한 지배권과 달리 무역을 중개하는데 그쳤다. 즉 백제가 바다를 자신의 영토처럼 소유했다면, 청해진은 바다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뿐더러 백제와 달리 청해진은 자체 생산기반을 가지지 못했다. 백제는 대륙과 반도의 중서부에 공인된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이 영토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군사력과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해진은 장보고가 남조신라로부터 식읍으로 받은 토지 이외에는 공인된 영토가 없었으며, 그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로부터 노동력을 징발할 수는 있었지만 군사력을 징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륙과 반도 등의 영토를 가진 백제에게 황해는 자기 영토 안의 호수나 다름없었지만, 영토가 없었던 청해진에게 황해는 결코 완전한 소유물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백제가 차지했던 해상주도권과 청해진의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으며, 청해진 당시의 황해는 언제든지 새로운 실력자에 의해 점령될 수 있는 곳이었다. 즉 백제가 해상교통로를 해상영토로 바꿀 수 있었던 데 비해 청해진은 바다를 자기 영토로 바꾸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셈이다. 청해진이 미완성의 해상왕국이었다는 것도 바로 그런 뜻이다. 대륙진출에 대한 진취성이 없던 남조신라가 청해진을 폐쇄시키자, 이 미완성의 왕국이 만들어 놓았던 대륙의 거점도 모두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청해진이 가꾸어놓은 해상교통로도 모두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제 바다는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새로운 주인이 바로 오월왕 전류였다. 그는 중국 대륙의 남부에 자신의 영토를 만들고 그것을 여러 정치세력으로부터 공인받는데 성공했으며, 이 영토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차츰 해상교통로를 개척했다. 그리고 청해진이 가꾸어놓은 해상주도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비해 남조신라는 오월왕 전류가 만들어놓은 교통로를 이용하는 수동적인 처지로 바뀌고 말았다. 백성들이 근해에서 생업을 유지하는 것 이외의 모든 장거리 해상활동은 이제 남조신라의 능력 밖이었다. 요컨대 청해진이 폐쇄된 뒤 우리 겨레가 주도하는 해상교통의 역사는 차츰 막을 내렸으며, 마침내 해상을 통한 대륙진출의 길은 봉쇄되기에 이르렀다. 즉 이때부터 우리 겨레는 풍수지리적으로 비유컨대 득수를 하지 못하고 우물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역사에도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역할분담이 있다. 우리 기마종족의 역사에도 늘 그런 역할분담이 있었고, 기마종족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역사에도 늘 그런 역할분담이 있었다. 모든 존재의 진정한 존재가치는 아마 그런 역할분담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조선이 무너진 이후 우리와 비슷한 혈통을 가진 기마종족들은 중국 대륙의 동북부에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한족은 대륙의 남서부에서 차츰 대륙 전체로 자신의 삶터를 넓히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대륙은 점차 기마종족과 한족의 각축장으로 바뀌었으며, 삼국시대 이후 이 각축장의 주도권은 한족의 손아귀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 시기 고구려는 육로를 통해, 백제는 바다를 통해 자신의 삶터를 지키고 되찾으려 함으로써 절묘한 역할분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한반도는 육로를 통하지 않고도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엄청난 전략적 근거지였던 셈이다. 그래서 한반도를 삶터로 하는 기마종족은 대체적으로 바다를 통해 대륙진출을 꿈꾸었으며, 한반도 북부나 지도상으로 그 위쪽에 거주하던 기마종족들은 주로 육로를 통해 대륙진출을 시도했다. 삼국시대는 바로 그런 역할분담이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조화롭게 이루어짐으로써, 기마종족의 안정적 번영과 함께 안정적 분열이 함께 이루어진 시대였다. 그런 역할분담은 대진,남조신라 남북국시대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대진은 주로 육로를 통해 대륙진출을 꿈꾸었으며, 남조선이라는 바다를 통해 대륙진출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남조신라의 경우 청해진의 폐쇄와 더불어 그런 역할분담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만큼 청해진의 폐쇄는 겨레 역사에서 치명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대진과 대립관계를 맺음으로서 육로를 통한 진출로마저 봉쇄된 남조신라가 바닷길까지 잃어버린 것은 겨레 역사에서 진취성을 거세해버린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 이후로는 바닷길과 물을 통한 침입의 역사가 남아 있을 따름이다. 다른 기마종족(주로 일본족)이 바닷길로 침입해오고, 북방 기마종족이 뭍으로 침입해오는 역사를 겪은 것도 바로 청해진이 폐쇄된 뒤의 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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