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285 호
단기 4340. 10. 23 (음력 9. 1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발행지가 길어질 경우 하단부분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문학소식
|
|
|
글터 → 명언 / 격언
|
사춘기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바로 열병 같은것. / R.A.
|
|
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옛사람들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은 자기 자신의 실천이 그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친구들과 학문을 논하느라 편지를 서로 나누면서 한 말은 부득이한 것이었지만, 스스로 그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더군다나 이미 말한 뒤에 저쪽 사람은 잊지 않았는데 내가 잊은 것이 있는가 하면 저쪽과 내가 다 잊어버린 것이 있으니, 이것은 부끄러울 뿐 아니라 거리낌없는 무례 같아서 두렵기 그지없다. 그 동안 옛 책장을 뒤져 보존되어 있는 편지 원고들을 다시 베껴서 책상에 두고, 때때로 펼쳐 보면서 자주 반성하기를 그치지 않았었다. 이 중에는 원고가 없어져 기록하지 못한 것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잃어 버리지 않은 모든 편지를 다 모아서 큰 책을 만들었다 한들 무슨 유익함이 있으리오.
퇴계 이황 씀
마음의 병을 먼저 고쳐라
마음의 병은 바로 이치를 살핌이 투철하지 못해 쓸데없는 고집으로 무리하게 탐구하며,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괴롭히고 정력을 극도로 소모하였기 때문이다. 이 또한 학문을 처음 하는 사람들이 공통된 병이다. 이러한 것을 알고 미리 고칠 수 있었더라면 다시는 근심될 리 없겠지만, 일찍 알아서 빨리 고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병이 드디어 생기게 된 것이다. 내가 겪은 평생 동안의 모든 병의 근원도 다 여기에 있었다. 지금은 마음의 병이 전날 같지는 않지만, 다른 병이 이미 심하여졌으니 나이 탓일까. 당신과 같은 젊은이야 기력이 왕성하니, 그 시초에 급히 고치고 섭생과 요양을 절도 있게 한다면 어찌 계속 괴로울 까닭이 있겠으며, 또 무슨 다른 증세가 생길 리 있겠는가?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제일 먼저 세상의 모든 욕심을 생각밖에 두어, 마음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이 마음을 온전히 가질 수 있다면, 병은 이미 5내지 7할 정도는 나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일상 생활에서 타인과의 만남을 적게 하고, 취미와 욕망을 절제하고, 마음을 비워 편안하고 유쾌히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며, 독서와 화초 기르기, 등산이나 물고기 기르기의 즐거움 같은, 진실로 항상 부드럽고 따뜻한, 성내고 원한 품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긴요한 치료법이다. 책을 읽어도 마음을 괴롭힐 정도로는 읽지 말 것이며, 몸이 아플 때는 절대로 많이 읽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마음내키는 데 따라 그 뜻을 음미하며 즐기고, 이치를 궁리함에는 모름지기 일상 생활의 쉽고 명백한 곳에서 간파하고 숙달시켜야 할 것이다. 편안하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그것을 음미하고, 너무 집착하는 것도 아니요 집착하지 않는 것도 아닌 사이에 마음을 두고 꾸준히 공을 쌓으면, 저절로 이해되어 깨달음이 있게 될 것이다. 너무 집착하거나 마음을 얽매여 무조건 빠른 효과를 거두려 해서는 안 된다. |
|
|
글터 → 철학 / 사상
|
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1장 인식론
경험은 완전한 지식을 제공하는가 - 황희숙
자연 현상에 대한 경험을 일반화하는 것은 지식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어떤 경험이 믿을 만한 것인가? 인간의 이성은 지식의 형성과 발전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지식이란?
지식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본능에 들어 있을 앎에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류학에 따르면, 인간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고 일상 용품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하여 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알려는 욕구가 생겨났다고 한다. 물건, 재료의 성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지식이란 인간이 생존하는 데 절대 필요한 수단 중의 하나임을 알려 준다. 인간이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잘 알지 못하고는, 그리하여 적절히 자연을 통제하는 능력을 갖지 못하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연약한 '생각하는 갈대'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 중 어떤 것이 지식이라 불릴 수 있는가? 사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알아내는 것은 여러 가지다. 조물주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고, 악상을 얻을 수도 있고, 인생과 사람에 대한 고상한 시적 상상력도 자극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들을 지식이라 부르지 않는다. 개념상 지식이란 자연의 규칙(또는 법칙)에 대한 이해를 말하기 때문이다. 나무를 어떠어떠한 방식으로 마찰시키면 불씨를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은 지식의 일종이다. 그것은 나무의 마찰에 대한 여러 가지 경험들로부터 나무와 마찰 간의 관계에 대한 어떤 규칙성을 알아 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적 발견이란 일반화의 기술이다. 일반화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 관련되지 않는 것을 구분해 내고, 관련 있는 것들간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지를 알아내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깨달음이다. 예컨대, 나무토막의 모양이나 크기, 색깔은 불씨와 관련이 없지만 나무의 건조 상태는 관련이 있지 않은가? 그러한 구분으로부터 일반화가 시작되며, 그로부터 지식이 얻어진다. 모든 지식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일반화는 우리로 하여금 세계에 대해 예측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의 힘이기도 하다. 위 예에서 적당히 마른 나무를 마찰시키면서 불씨가 생긴다는 일반적 지식은, 바짝 마른 나무들이 쓰러지면서 서로 마찰되는 것을 보고 그 나무들로부터 불씨가 생겨나 큰불이 나리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그러한 예측으로부터 나무숲에서 불이 나지 않게 하려면 나무들을 성기게 심어 마찰이 일지 않도록 조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식에 의해 자연에 대처하고 자연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베이컨(F. Bacon)이라는 근세 철학자의 유명한 격언 "지식은 힘이다."라는 말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일반화는 지식의 출발점이자 지식이 주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말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학문 또는 일반화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 하면 학문이란 체계화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 현상에 대한 믿을 만한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모아 놓으면 경제학이 되며, 물체의 물리적 성질들에 대한 믿을 만한 지식들을 모아 놓으면 물리학이 된다. 그러나 어떤 지식, 어떤 일반화가 믿을 만한 것인가? 이에 대하여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갖고 있다.
경험주의의 대두
한 가지 대답은, 우리가 경험한 내용을 왜곡 없이 충실하게 반영하는 그런 일반화야말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이러한 생각은 경험이야말로 신뢰할 만한 지식의 원천이라는 이른바 '경험주의(empiricism)'의 철학적 입장으로 나타난다. 경험으로부터 나온 어떤 법칙들은 사실 믿을 만하다. 예컨대 단순한 물리 법칙들, 즉 물은 뜨겁다, 인간은 죽는다, 받쳐지지 않은 물체는 밑으로 떨어진다 등의 법칙들은 예외 없이 성립하는 믿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심은 씨앗은 싹이 틀 것이다, 바람이 심하면 비가 온다, 물을 많이 마시면 건강에 좋다 등의 일반화는 경험에서 나오는 것들이지만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지는 않다. 그것들은 여러 가지 예외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심은 회의론자라는 전문적인 의심쟁이들에게서 더욱 증폭되어 나타난다. 회의론자란 의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의심해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 경험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물 속에 넣은 막대가 굽어 보이고, 먼 곳의 물체가 가까운 곳에 있는 같은 크기의 물체보다 작아 보이는 등의 착시 현상, 주변의 빛깔에 따라 달라지는 지각 현상, 신기루 같은 착각 현상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감각 경험은 곧잘 사실을 잘못 파악한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감각에서 비롯되는 지식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경험이 불신될 때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인식 능력은 이성의 그것이다. 이성이야말로 물리적 세계에 관한 모든 지식의 진정한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을 철학자들은 '합리주의(rationalism)'라 부르는데, 이들 합리주의 철학자들은 그들의 지식 모델을 수학적 지식에서 찾는다. 사실 수학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학문 분야가 아닌가?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지식이 수학적 형식을 지니지 않는 한 결코 지식이 아니라고 말할 만큼 수학을 모든 지식의 최고 형태라고 믿었다. 지식에 관한 한 이러한 생각은 근세에 이르기까지 가장 주도적인 입장이었다. 근세의 대표적인 합리주의 철학자인 데카르트(R. Descartes)의 생각 또한 지각에 의한 지식이 불확실하며 믿을 수 없다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경험은 지식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경험 과학'이라는 말이 보여 주듯, 우리는 오늘날 지식이 경험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관련인가?
경험주의자들의 가장 중요한 논거는 수학적 지식, 이성적 지식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우리에게 줄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이는 수학이라는 학문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알듯이 수학적 지식의 체계는 정의와 공리로부터 연역된 정리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연역에 의해 얻어지는 지식이란 전제로 삼고 있는 정의와 공리의 내용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 논리학자들이 알아 낸 성과이다. 단순한 연역의 예를 들어 보자.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것은 논리학 교재에서 전형적인 연역 추리의 예로 제시되는 것인데, 여기서 결론은 전제와 다른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즉, 결론은 전제가 포함하고 있는 내용의 일부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낼 뿐 새로이 알려주는 정보가 전혀 없다. 이렇게 사람과 소크라테스에 대한 전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이상의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는 것이 연역 추리의 본질이며, 따라서 그러한 원리에 의존하는 지식은 영원히 정의와 공리에 들어 있는 정보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원하며 그것이 지식의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라면, 연역적 추리에만 의거하는 지식은 불충분하다는 것이 경험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연역 추리에 대비되는 추리 형태-귀납 추리-를 제시함으로써 그것이 지식에 대한 중요한 대안이 된다. 이러한 발상 자체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있어 왔지만 그것이 정연한 철학적 입장으로 완성되는 것은 17세기 들어 경험 과학이 발전하고 그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 나타나기에 이르러서이다. 새로운 근대 경험주의의 주장은 베이컨의 유명한 비유에 의해 잘 표현된다. 베이컨은 합리주의를 자신의 몸에서 거미줄을 뽑아 내는 거미에 비유하고, 단순한 경험주의를 재료를 그냥 모으기만 할 뿐 그것들이 갖고 있는 질서를 발견해 내지 못하는 개미에 비유했다. 반면 자신이 옹호하는 새로운 경험주의는, 재료를 모아 소화하고 그것에 자신의 것을 첨가시켜 더 고차적인 산물을 창조하는 꿀벌에 비유했다. 이 비유에 경험 지각이 지식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고 거기에서 이성이 담당하는 역할은 보조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경험주의의 지식관이 잘 진술되어 있다.
경험주의의 지식 모델은 합리주의자들의 수학적 지식 모델을 극복하여 지식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는 동시에 경험의 역할이 폄하되는 상황을 역전시킨 점에 중요성이 있다. 경험주의자들에 의해 올바른 지식은 기본적으로 경험적 지식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얻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주의의 주장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베이컨의 꿀벌이라는 비유 속에 이미 문제의 단서가 주어져 있는데, 그것은 그 비유가 경험의 중요성과 함께, 비록 보조적인 것으로 격하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성의 역할 또한 분명히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이컨을 위시한 경험주의자들은 지식에 있어서 경험이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하는 데 전념한 까닭에 이 문제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이후 경험주의의 아킬레스건으로 나타난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애매하다
본뜻 : 일본어 애매는 우리말 모호와 같은 뜻을 지닌 말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하여 널리 쓰이는 '애매 모호'가 된 것이다. 이 말은, 역 앞이라는 뜻을 가진 '역전'이라는 말과 '앞'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역전앞'이 된 것과 같은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모호하다'만으로도 뜻이 충분하므로 어법에 어긋나는 '애매 모호'라는 말은 쓰지 않아야 한다.
바뀐 뜻 : 무엇인가 확실치 않고 불분명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호하다'로 바꾸어 쓸 수 있다.
"보기글" -그 사건은 아직까지도 주모자가 누구인지 애매하지요?(모호하지요?) -그렇게 애매하게 말했다가 상대방이 오해라도 하면 어쩌려구?(모호하게 말했다가)
알타이말
세계지도를 보면 몽골고원 위쪽에 알타이산맥이 있고 알타이라는 땅이름도 여럿 있다. 몇 해 전 러시아연방에 속한 알타이공화국에 간 적이 있다. 알타이산맥 자락인 그곳에는 주로 알타이족이 살며 그들은 알타이말을 러시아말과 함께 쓴다. 그러나 사용 인구는 급격히 줄고 있다. 우리는 준비한 언어 조사표를 들고 그곳 제보자가 하는 말을 조사했다. 제보자는 낯선 곳에서 자기네 말을 연구하러 온 우리들을 무척 반가워했다. 한 시간쯤 조사가 진행되자 갑자기 물었다. “지금까지 조사한 것 중에서 몇 퍼센트나 한국말과 같습니까?” 우리는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제보자는 상당히 같을 것이라 기대하고 물었기 때문이다. 다시 대답을 제촉하기에 “아직은 하나도 없는데요”라 하였더니 꽤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곳에서 쓰는 알타이말은 이른바 알타어어족 터키어파의 한 언어다. 그들은 어족 이름과 자기네 언어 이름이 같아 꽤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마치 알타이어족의 중심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알타이언어를 쓰는 민족의 발원지가 알타이산맥 부근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직 근거가 없다. 어쩌면 알타이산맥과 알타이민족 사이에는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가 조사했던 그곳의 알타이말과 우리말의 관련성을 지금으로서는 말하기 어렵다. 더 많은 알타어언어들을 조사해 보아야 우리말의 뿌리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
|
|
글터 → 세계사
|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6. 고목나무가 꽃을 피우다(춘신군)
꽃을 나무에 접붙이다
초나라의 고열왕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원래 춘신군은 이를 걱정하여 아들을 나을 만한 부인을 구하여 왕에게 바쳤으나 끝내 아들을 낳는 데 실패하였다. 그때 조나라 사람인 이원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와서 왕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왕이 아이들 낳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오래도록 사랑을 받지 못할까 우려를 하였다. 그리하여 이원은 우선 제도가였던 춘신군을 섬기어 그의 가신이 되었다. 얼마가 지나자 그는 귀국을 하였다가 고의로 돌아오는 기일을 늦추었다. 그리고는 되돌아오니 춘신군이 늦게 된 사정을 물었다. 그러자 이원은 답하였다.
"제나라 왕이 사자를 보내어 신의 누이동생에게 구혼하여 그 사자와 술을 마시느라고 좀 늦게 되었습니다." 이에 춘신군이 물었다. "누이를 들여보내기로 하였는가?" "아직 드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얼마나 미인인가 궁금하여 춘신군이 물었다. "그럼 내가 한번 누이를 볼 수 있겠는가?" 이에 이원이, "물론 볼 수는 있지요."하고 곧 그의 누이동생을 바쳤다.
그의 누이동생은 과연 절세의 미인이었고, 곧 춘신군의 사랑을 받았다. 이원은 누이동생이 임신을 한 사실을 알고 누이동생이 임신을 한 사실을 알고 누이동생과 계략을 짰다. 이원의 누이동생은 한가한 틈을 타서 춘신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왕이 나으리를 대우하고 사랑하는 정도는 형제라 하더라도 그렇게 깊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 나으리께서 재상이 되신 지 20여 년이 흘렀습니다마는 왕께서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왕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다른 사람을 세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나으리께서 어떻게 오래도록 사랑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나으리께서는 이제까지 왕의 형제들에 대하여 실례를 범한 것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그 형제들이 만일 왕위에 오른다면 화가 장차 나으리에게 닥칠 것이니, 나으리께서는 무엇으로 재상의 자리와 강동의 땅을 지키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춘신군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도 실은 그것이 걱정이었네." 이에 그녀가 귀엣말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으리께 처음으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지금 첩은 나으리의 아이를 가졌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은 전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그러자 춘신군이 재촉했다. "무슨 말이건 두려워 말고 말해 보라." 그녀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오해마시고 들어보십시오. 황송스런 말씀이오나 첩을 이제 왕에게 바치면 어떨까요? 나으리의 높은 지위로 첩을 왕에게 바친다면 왕은 반드시 첩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첩이 하늘의 도움으로 아들을 얻게 된다면 이는 나으리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고, 나라를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헤아릴 수 없는 죄에 걸려 드는 것에 비하면 낫지 않겠습니까?"
춘신군은 처음엔 깜짝 놀랐으나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이원의 누이동생을 자기 집에서 내보내 근신하게 하고 왕에게 그녀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왕은 그녀를 그 아들을 태자로 삼고, 이원의 누이동생을 왕후로 삼았다. 또한 왕은 이원을 가까이 하여 이원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당한다
이원은 그의 누이동생을 왕실에 들여보내어 왕후를 만들고, 그 아들을 태자로 세운 뒤 춘신군이 그러한 사실을 누설하고 더욱 교만해질까 두려워하여 은밀하게 암살자를 양성하여 춘신군을 죽임으로써 그의 입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상당수 있었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25년 후에 고열왕이 병이 들었다. 이에 주영이 춘신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에는 뜻밖에 찾아드는 복이 있고, 또 뜻밖에 찾아드는 화도 있습니다. 지금 나으리께서는 뜻밖의 일이 벌어지는 세상에 처하여 뜻밖의 일을 당할 왕을 섬기고 계시니 어찌 뜻밖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춘신군이 물었다. "뜻밖에 찾아드는 복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주영이 대답하였다. "나으리께서 재상이 되신 지 20여 년 동안 나으리의 위치는 실은 초나라의 왕이셨습니다. 지금 왕이 병이 들어서 아침 저녁 나절에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러할 경우 나으리께서는 어린 군주를 모시게 되어 그의 대리로 왕의 자리에 서서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때 만일 이윤, 주공과 같이 하신다면 왕이 장성한 뒤에 국정을 되돌려 주시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뜻밖에 찾아든 복입니다." 춘신군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뜻밖의 화란 무엇인가?" "이원은 나라를 다스리지도 않은 사람으로서 나으리의 원수입니다. 그는 군대를 맡고 있는 것도 아닌데 암살자를 양성하고 있는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만약에 왕이 돌아가신다면 이원은 반드시 먼저 궁궐에 들어가 정권을 잡고 나으리를 죽임으로써 입을 막으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뜻밖의 화입니다." 이에 춘신군이 물었다. "그렇다면 뜻밖의 사람이란 무엇인가?" "나으리께서 신을 낭중의 자리에 임명하시면 왕이 돌아가신 뒤에 이원이 분명히 먼저 궁궐에 들 것인즉 신이 나으리를 위하여 이원을 죽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뜻밖의 사람입니다." 이 말을 듣고 춘신군은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은 이제 그만하시오. 이원은 나약한 사람이고, 또 내가 그를 잘 대우하였는데 어떻게 그가 이러한 일까지 하겠소?"
주영은 자신의 계획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알고 화가 자기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초나라를 떠났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뒤 17일 만에 고열왕이 죽었다. 이원은 과연 먼저 궁궐에 들어가 자객을 잠복시켰다. 드디어 춘신군이 문상하기 위해 궁궐로 들어오자 이원의 자객이 춘신군을 곁에서 부여잡고 찌르고는 그의 머리를 베어 궁궐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관리를 시켜 춘신군의 집안을 완전히 멸족시켰다. 한편 이원의 누이동생이 왕궁에 들어가서 낳은 아들이 마침내 왕이 되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유왕이다. 그러나 초나라는 춘신군이 죽고 나서 국력이 급속히 기울었으며, 결국 15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
|
|
글터 → 과학/예술/교육
|
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 23 장 깨질 때 파편이 흩어지지 않는 안전유리.
안전유리가 우연히 발명된 것은 자동차가 발명되어 프론트유리가 사용되기 시작한 직후이며, 바로 그것을 필요로 하는 때였다. 자동차는 마차에 비해서 훨씬 제동이 어렵고 충돌하기 쉽기 때문에 깨진 프론트유리에 의해 승차자가 크게 부상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흑요석과 같은 천연유리는 지구가 탄생했을 때부터 존재했었다. 흑요석이나 다른 형의 천연유리는 지각을 형성하는 원소가 화산의 강력한 열과 뒤이어 일어난 급냉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서 그 구성이나 색 그리고 형태 등이 변한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아득한 옛날의 일이었다. 최초의 합성유리의 기원은 고대의 전설을 더듬어 가야 한다. 퍽 유명한 전설의 하나는 A.D. 1세기에 살고 있었던 플리니우스에 의해서 쓰여져 있다. 로마의 학자이자 역사가이기도 했던 플리니우스는 「박물지」 37권을 저작했다. 그는 서기 79년 베수비어스 화산이 분화할 때 위험이 닥쳐오는 지역의 주민을 구출하기 위해 로마함대를 지휘하여 폼페이 근처의 해안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때 화산재에 묻혀서 사망했다. 플리니우스는 페니키아의 상인들이 바닷가 모래밭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을 때 우연히 유리를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리용의 냄비를 천연 소다석(아마도 이집트에서 가지고 온 탄산나트륨의 광석) 위에 놓고 이를 데우려고 밤새껏 불을 땠다고 한다. 아침에 보니 놀랍게도 천연 소다 덩어리와 모래의 실리카(이산화규소)가 불에 녹아서 생긴 유리가 여기저기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 우연한 발견과 그 연대(기원전 40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를 증명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기원전 1500년에는 이집트인이 유리로 만든 병을 사용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후 오랫동안 우여곡절을 겪고나서 로마인들이 창문에 유리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속의 고정된 장소에서는 유리를 청동으로 된 작은 창틀 속에 넣어 사용하였으며, 더욱이 마차와 같은 운송 수단의 자그마한 창에도 사용되었다. 그것은 원래 깨지기 쉬운 것이기는 해도 위험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자동차의 출현으로 프론트유리와 같은 창 유리가 부상의 원인이 될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1903년 에드워드 베네딕투스라는 이름의 프랑스 화학자가 단단한 바닥 위에 유리 플라스크를 떨어뜨렸다. 플라스크는 깨졌지만 놀랍게도 유리파편이 흩어져 튀지 않고 금만 간 상태였다. 자세히 조사해 본즉 플라스크의 안쪽에 필름이 있어서 유리의 파편이 그것에 붙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필름은 플라스크에 넣어 두었던 콜로디온(면과 질산으로 만든 질산셀룰로오스)의 용액이 증발하여 생긴 것이 었다(콜로디온과 관련된 세렌디피티에 관해서는 제15장 및 제16장에서도 설명되어 있다). 플라스크에 마개를 덮지 않고 두었던 때문에 용매가 증발하고 폴로디온의 필름이 플라스크의 안쪽에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베네딕투스는 플라스크에 붙어 있는 라벨에 이 사실을 메모했는데, 그때는 그 이상의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이 일이 있은 후 베네딕투스는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로 한 소녀가 깨진 유리 때문에 중상을 입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 몇 주일 후 또다시 비슷한 사고에 의한 다른 피해 기사를 읽은 그는 실험실에서 유리 플라스크를 떨어뜨린 일이 갑자기 떠올랐으며, 문제가 해결될지 모린다고 생각했다. 몹시 서둘러 실험실로 가서 라벨이 붙어있는 플라스크를 찾은 그는 어떤 방법으로 유리를 안전하게 할 수 있을까를 줄곧 생각하면서 그날 밤을 실험실에서 보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인쇄기를 이용해서 그 이튿날에는 벌써 한 장의 안전유리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안전유리는 그 소재의 디자인과 관련하여 3중이라는 뜻을 가진 '트리플랙스(triplex)'라고 이름지었다. 이것은 두 장의 유리 사이에 한 장의 질산셀룰로오스를 끼의넣어 합계 '3매'의 투명한 판을 열로 밀착시키는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험실에서 공장생산까지의 과정에는 수년이 소요되었다. 그 때문에 베네딕투스가 새로운 안전유리에 관한 최초의 특허를 얻은 것은 1909년이었다. 베네딕투스가 안전유리를 발명한 것은 자동차의 프론트유리로부터 부상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 새로운 얇은 층으로 이루워진 유리가 최초에 실용된 것은 다른 용도였는데 그것은 제1차세계대전 때의 가스마스크의 렌즈였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동차의 수와 그 스피드가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되자 유리로 인한 부상이 문제가 되어 안전유리가 미국 자동차의 표준이 되었다.
- 독자 중에는 옛날 자동차의 프론트유리가 오래되면 누렇게 변색하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원래 안전유리용의 유리를 샌드위치하는 데에 사용한 플라스틱이 질산셀룰로오스로서 이것이 햇볓을 받고 오래되면 노랗게 변색하기 때문이다. 1933년 접착제는 질산셀룰로오스에서 초산셀룰로오스로 바뀌었으나 그것의 경우 햇볓에 의해서는 잘 변색되지 않았으나 넓은 온도 변화에서의 저항력이 낮았으며 잘 흐려졌다. 질산셀루로오스와 초산셀룰로오스는 모두 셀룰로오스로 만들어지며 그 원료는 목재나 기타의 천연재료였다. 플라스틱 재료를 더욱더 찾는 과정에서 완전한 합성고분자인 폴리비닐부티랄수지가 초산셀룰로오스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알았다. 1939년부터는 이것이 자동차, 항공기 기타 강하고 투명한 재료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겹유리의 표준이 되었다. 안전유리의 다른 형태로는 가운데 플라스틱을 끼워 얇은 층을 이룬 형태가 아닌 강화유리가 있다. 이것은 깨질 때 잘 다치지 않는 파편이 되는 것으로 자동차의 옆과 뒤의 창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기타 몇 나라에서 자동차 앞 유리는 겹유리를 상용하게 되어있다. 항공기의 창에는 온도나 압력의 양 극단을 견딜 수 있는 큰 강도와 고속의 상태에서 새와 충돌해도 이상이 없는 탄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요구에 대응하여 여러 층의 유리와 플라스틱을 겹친 복합체로 된 아주 특별한 유리창이 실용화되고 있다. 최근에는 자동차의 프론트유리가 깨졌을 때에 중심의 플라스틱에 붙어있는 파편에 의해 생기는 피부의 열상을 방지하기 위해 일반 3층 유리의 안쪽에 제2의 플라스틱층을 사용하게 되었다. 1987년에는 특정한 차에 시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결과는 만족스러운 편이다. 정면 충돌사건으로 안측에 열상 방어용 플라스틱 코팅을 한 프론트유리에 부인이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가 있었으나 타박상과 충격이 있었을 뿐으로 얼굴이나 머리에 열상은 없었다. 강화유리를 제외한 이들 모든 안전유리의 원리는 베네딕투스가 1903년에 세렌디피티적으로 발견한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유리의 파편을 플라스틱의 필름으로 흩날리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
|
|
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빈궁하게 40살, 영달하게 40살 산 조원기
조원기(1457-1533)의 본관은 한양이고, 자는 이지, 호는 돈후재이다. 미천할 때에 시문에 능하고 음양학에 밝은 허암 정희량과 교분이 깊었다. 허암이 예문관 검열이었을 때 하루는 조원기가 그를 찾아가 함께 잤다. 이튿날 높은 소리로 불러 대며 길을 메우고 찾아오는 명관달사가 매우 많았다. 손들이 떠나간 뒤 정희량이 물었다.
"명사의 무리들이 부러운가?" "빈한함이 이와 같으니, 관문을 지키는 낮은 벼슬도 나보다는 나은데, 하물며 저 금마문 옥당의 선비이겠는가" "그대는 부러워하지 말게. 저들은 다만 아침 이슬처럼 잠시일 뿐이네. 그대 같은 사람은 빈궁하게 40살 살고 영달하게 40살 살 것이니, 장수는 그 속에 있네"
정희량과 만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조원기가 한강을 건너는데, 배가 부서져서 물밑으로 가라앉는 것이었다. 조원기는 문득 "빈궁하게 40살, 영달하게 40살 산다"는 정희량의 말을 떠올렸다.
"정희량군이 어찌 나에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는 그대로 산발한 채 눈을 감고 엉금엉금 기어서 언덕에 도달하였으나, 그것이 육지인 줄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길가는 사람이 괴이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저 손발로 기어다니는 사람이 누구지?"
조원기가 드디어 눈을 떠서 살펴보니 이미 한강 모래톱을 건너온 것이었다. 조원기는 40살이 되어 문과에 처음 급제하여 벼슬은 찬성에 이르고, 나이도 80을 넘겼다. 시호는 문절이다.
|
|
|
글터 → 이글저글
|
황금의 사과
흥겨운 잔치 마당에 던져진 한 개의 사과가 10년에 걸친 '트로야' 전쟁을 몰고 왔다. 즉 영웅 '아킬레스'의 아버지 '페레우스'는 주신 '제우스'의 중매로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 결혼 축하의 자리에는 수 많은 신들이 초대를 받았는데 다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은 예외였다. 경사스런 잔치에 싸움의 신을 부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로되 당사자로서는 약이 오를 수 밖에. 그래서 '애리스'는 황금의 사과 한 개를 잔치상의 위에 던져 넣었다.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 제 잘난 맛에 살기란 신이나 사람이나 매 한가지인 듯 서로 사과를 갖겠다고 아우성을 친 끝에 '제우스'의 아내인 '헬라'와 군신 '아데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세 여신이 끝까지 경합을 했다. '제우스'신도 골치가 아파서 그 심판을 '이다'산에서 양을 치는 소년 '파리스'에게 떠맡기고 말았다. '파리스'는 난데없이 나타난 세 여신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까닭을 듣자 권력과 재산을 주겠다는 '헬라'나 '아테나'의 유혹을 물리치고 세계 제일의 미인을 아내로 삼아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주고 말았다. 그 결과 '파리스'는 세계 제일의 미녀인 희랍의 왕비 '헬렌'과 사랑에 빠져 그녀와 함께 자기 나라인 '트로야'로 도망쳤으며 이에 분격하여 쳐들어온 희랍군과 10년에 걸쳐 혈투를 벌이게 되는 것이다.
|
|
|
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
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열 아홉번째 이야기 우물에 갇힌 늑대
여러 마리의 소를 가진 농부가 있었다. 그런데 이 소들이 워낙 말을 듣지 않아 농부는 땅을 갈려면 무진 애를 먹어야 했다. 그때마다 농부는 화가 난 나머지 소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똑바로 가지 않고 삐딱하게 가려고만 하니, 늑대들한테나 잡아먹으라고 줘야겠다."
이 말을 들은 늑대를 농부가 자기한테 소를 줄 거라고 믿고는 하루종일 기다렸다. 그런데 농부는 소들의 쟁기를 풀더니 그냥 자기 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늑대는 농부에게 달려가 말했다.
"당신이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나한테 소를 주겠다고 약속해놓고는 그냥 가면 어떡합니까? 당신이 약속한 거니까 지키세요. 나도 급하다고요." 그러자 농부가 대답했다. "그냥 해본 소리 가지고 약속을 지키라니 그건 말도 안돼. 맹세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당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갈 줄 알아."
늑대와 농부가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공정한 재판관을 찾아가기로 했다. 길을 떠나려던 차에 그들은 그 옆을 지나가던 여우를 만났다. 여우가 그들에게 물었다.
"안녕, 친구들.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 겁니까?"
늑대와 농부가 여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여우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것 때문이라면 다른 재판관을 찾아갈 필요가 없어요. 내가 두 분들을 위해 공정한 재판을 해드리죠. 나야 두 분 사정을 훤하게 알고 있으니까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거예요. 우선 한 분씩 따로 이야기를 하고 싶군요. 내가 내린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 가서 다른 재판관들을 찾아도 늦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여우가 농부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이 나와 저 늑대에게 닭 두 마리만 주세요. 그러면 내가 당신 소들이 안전하도록 조치를 취하겠어요. 그렇게 되면 당신이 한 말에 책임을 안 져도 돼요."
농부가 여우의 말을 따르기로 하자. 이번에는 늑대를 따로 불러 말했다.
"친구야, 내 말 잘 들어. 요즘들어 내가 너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괘씸하지만, 그래도 너를 위해서 농부와 합의를 했다. 네가 소들을 가지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너한테 좋은 치즈 한 덩어리를 주도록 했어. 그러니까 농부 말을 들어."
늑대도 여우의 제안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여우는 농부에게 소들을 데리고 가라고 하고는, 늑대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너는 나랑 같이 맛있는 치즈가 있는 곳으로 가자."
여우는 늑대를 데리고 이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달이 떠오르자 우물가로 데리고 갔다. 여우는 우물에 비친 달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친구야, 잘 봐. 저기 큼지막하고 맛있게 생긴 치즈가 있지? 네가 밑으로 내려가서 그걸 가지고 올라오는 거야." 늑대가 대답했다. "이봐, 치즈는 네가 직접 나한테 건네줘야지. 네가 가져와. 하지만 만일 너 혼자 올라올 수 없으면 그때가서 내가 도와줄게."
여우가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그렇게 하겠다고 선뜻 응했다. 그 우물에는 물을 퍼내기 위한 물통 두 개가 도르래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물통 한 개가 내려가면 다른 물통이 올라오게 되어 있었다. 여우는 우물 아래로 내려가서 한참을 꼼짝 않고 있었다. 그러자 늑대가 물었다.
"이봐, 왜 그렇게 한참 걸리지? 치즈는 어떻게 된 거야?"
늑대는 여우가 혼자서 치즈를 다 먹어치우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때 여우가 말했다.
"치즈가 너무 커서 혼자서는 꺼낼 수가 없어. 얼른 다른 물통을 타고 내려와서 날 좀 도와줘."
늑대가 다른 물통을 타고 우물 밑으로 내려가자 여우가 타고 있던 물통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우는 우물 입구가 보이자 신이 나서 깡충 뛰어나갔고 늑대는 그만 우물 밑에 갇혀버렸다.
* 감언이설에 넘어가 불확실한 것을 위해 확실한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
|
|
글터 → 국사
|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5. 통일 아닌 통일, 삼국통일 - (우리 역사가 한반도로 한정된 결정적 사건 #1)
고구려와 천리장성
백제와 달리 고구려는 육상지배권을 키워온 고조선의 정통 후계자였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중심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북부여족이 이끄는 나라로서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여러 기마종족의 연명체였다. 고구려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고조선의 영역을 회복하는데 주력하였으며, 광개토왕은 그 가운데 뚜렷한 업적을 남긴 지도자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기마종족 전사들이 대륙을 누빌 무렵,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격하게 뒤바뀌고 있었다. 고조선이 무너질 때까지 동아시아의 주도권은 분명 기마종족에게 있었지만, 고조선의 붕괴와 더불어 그 주도권이 중국 한족의 손으로 넘어가버렸던 것이다. 한번 넘어간 주도권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으며, 고구려가 처음 세워질 때만 하더라도 내부분열에 시달리던 기마종족이 주도권을 회복한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 왕성한 정복력으로 끊임없이 고조선의 영역을 회복하고 분열된 여러 기마종족을 어느 정도 통합함으로써, 잃어버린 주도권이 고구려의 손아귀로 상당히 되돌아오기는 했다. 그렇지만 광개토왕 이후에도 주도권 싸움은 계속되었으며, 삼국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내부경쟁(삼국 사이의 경쟁)까지 치러야 했던 고구려가 주도권을 완전히 되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대륙에 대한 공세보다 수세를 중심으로 주도권 경쟁에 나섰다. 삼국 사이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7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경향은 한층 뚜렷해졌다. 고구려 말기에 완성된 천리장성은 이런 경향이 국가적 정책으로 공식화되었음을 상징하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7세기 이전까지 고구려는 요동성,백암성,안시성,비사성 등을 주요 거점으로 삼고, 그 거점들을 중심으로 방어 위주의 대륙진출을 시도했다. 즉 이 거점들을 중심으로 방어에 치중하면서 기회가 생기면 때로 공격에서 나서기도 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대륙 통치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수나라나 당나라도 이 거점을 파괴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해 국력을 쏟아 부으면서 이 거점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거점들은 부분적으로 무너졌을 뿐이었다. 예컨대 당나라가 침공했을 때도 요동성과 백암성만 함락시켰을 뿐 안시성을 무너뜨리지 못함으로써, 결국 더 이상 공격을 감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의 침공을 받은 뒤 고구려는 거점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거점과 거점 사이에 성을 쌓아 거대한 방어선을 만들려 했으며, 마침내 20여 년의 대공사 끝에 천리장성이 탄생하게 되었다. 비록 고조선이 누렸던 주도권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을지라도 고구려는 분명 고조선의 정통 후계세력이었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육상세력을 중심으로 고조선의 부활을 꿈꾼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적 비극을 초래한 신라의 선택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는 나,당 연합세력의 손에 나란히 무너지고 말았다. 물론 백제의 경우 부흥세력이 곳곳에서 저항을 계속하며 백제의 부활을 시도했지만, 결국 그들은 투항을 하거나 일본 열도로 물러나 새로운 나라를 세웠을 따름이다. 중국 대륙의 해안 근거지를 잃어버린 백제의 잔여세력이 그 거대했던 해양왕국을 다시 세우기란 결코 쉽지 않았던 탓이다. 더구나 부여족의 지나친 권력독점으로 말미암아 다른 종족들의 호응을 쉽게 얻을 수 없었으니, 백제연맹체의 부활은 현실성 없는 꿈에 지나지 않았다. 고구려의 유민들도 저항을 계속했고, 그들은 나름대로 고구려를 부활하는 데 성공했다.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와 북부여족의 지도자 대조영이 손을 잡았으며, 말갈족과 돌궐족도 후원세력이 되어 대진(발해)을 세웠다. 고구려가 부활한 셈이었다. 해상세력과 달리 육상세력은 쉽게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는 점과 고구려 귀족의 권력독점이 아직 지나치지 않았던 탓으로 고구려는 이름을 바꾸어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진은 고조선이 누렸던 주도권은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가 누렸던 주도권조차 제대로 되찾지 못했다. 그런데 대진이 세워진 뒤 한족의 정치세력도 분열되기 시작했고, 대진은 이 기회를 틈타 잃어버린 주도권을 차츰차츰 되찾아가고 있었다. 어쨌든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은 기마종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고조선의 부활을 머나먼 꿈으로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우리 역사가 한반도의 역사로 한정되었듯, 다른 기마종족들 또한 한반도와 관계없는 자신들만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결정적 사건이기도 했다. 거란족은 거란족대로, 말갈족은 말갈족대로, 돌궐족은 또 그들대로 독립적인 역사를 만들어가야 했던 종족분화의 중요한 계기가 바로 삼국시대의 종언과 남조신라의 등장이었다.
우리가 진정 고조선의 후계자를 자처한다면 우리 역사는 마땅히 동아시아 기마종족 전체의 역사여야 한다. 즉 우리는 '자랑스럽지 못한 단일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조화를 추구하는' 여러 민족의 공존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당연함마저 잊혀지고 그런 주장은 헛소리로 치부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고구려,백제의 멸망이 진정 얼마나 엄청난사건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이 엄청난 사건은 김춘추라는 인물의 선택과 결정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선택을 쉽게 비난할 수 없다. 그가 힘없는 신라의 지도자였던 만큼 그에게는 그리 다양한 선택이 있을 수 없었던 탓이다. 신라도 백제나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부활을 꿈꾸는 경쟁자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과 통합을 하거나 그들을 정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나 백제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신라의 감싸안을 만큼 높은 문화적 수준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힘없는 신라가 더 뛰어난 정신문화를 누리고 있었으며, 그 정신문화는 고조선의 문화를 이어받은 것이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삼국시대의 비극이었다. 거대한 해양국가였던 백제, 줄기찬 정복사업으로 드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 영토도 좁고 대외진출로마저 봉쇄당했으나 높은 정신문화를 누리던 신라, 이들의 균형이 결국 우리 역사에서 비극을 불러왔던 것이다. 강건한 기풍으로 평가되는 고구려의 문화, 섬세하고 화려한 기풍으로 평가되는 백제의 문화는 결국 조화와 경건함을 중시하는 신라의 문화에 비해 현실적으로 허약함을 드러낸 셈이다. 강건하지만 조화롭지 못하며, 화려하지만 소박하지 못했던 문화 대신에, 고구려나 백제가 신라 같은 문화를 누렸더라면,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의 부활시기가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단일민족의 유구한 역사가 아니라 기마종족의 조화로운 역사를 갖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분열이란 언젠가 통합을 낳게 마련이다. 지루했던 삼국시대도 결국 통합의 물길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정신문화라는 측면에서 신라가 통합세력으로 등장한 일도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 있었다. 그러나 물리적 힘이 약했던 신라가 그 통합을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비극이 생겼고, 마침내 우리 역사가 작아지게 된 것이다. 신라는 약한 물리력(특히 군사력)을 보완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마침내 선택하지 말아야 할 상대와 손을 잡았고, 그 상대를 자신의 영역에서 제대로 추방하지 못했다. 그 결과 삼국시대는 끝이 났지만 종족의 통합은 더욱 멀어졌으며, 고구려의 계승자인 대진이 고구려의 영역을 회복하고 신라와 맞섬으로써 두 나라는 다시 경쟁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즉 삼국시대 대신에 남의 신라와 북의 대진이라는 남북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의 신라를 편의상 남조신라라고 부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