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1장 인식론
진리란 무엇인가 - 한전숙
정합설 : "기존의 지식 체계에 들어맞으면 진리"
대응설은 관념과 대상의 일치를 진리라고 하지만 그 일치, 대응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우리는 결국 그전에 가졌던 관념과 지금 가지는 새 관념을 비교할 수 있을 뿐 아닌가? 즉, 관념과 대상의 일치를 노리면서도 실제로는 관념과 관념의 일치를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대응설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대응설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이미 본 바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비판은 우리의 자식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가진다는 것은 새로운 관념, 지식을 갖는다는 것이요, 우리는 언제나 관념들만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결국 관념의 세계를 뚫고 대상, 실제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경험, 새로운 지식을 얻었을 때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어떻게 가려 낼 수 있을까? 대상, 실재에 비추어 볼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체계, 더구나 가능하면 옳다고 판별된 체계에 비추어 볼 수밖에 없다. 즉,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각한다는 것은 카메라로 사진 찍듯이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그 대상을 책상이 아니라 걸상이라고 안다는 것은 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과거의 경험적 지식이 토대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즉, 지금 가지는 지각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과거의 경험의 그물에 비추어서 걸상이면 걸상이라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것이다. 이 과거의 경험의 그물이란 우리가 그 속에서 생활해온, 그래서 이미 통용되어 온 지식의 체계를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새로운 것을 안다, 새로운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그 무엇이 기존의 지식 체계로 설명이 된다, 이 체계와 부합한다, 거기에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새로 가진 지식이 기존의 지식 체계에 모순됨이 없이 들어맞는가 어떤가에 의해서 지식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주장을 정합설이라고 한다. 정합 적이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모순 없이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대응설은 일상 생활이나 대부분의 실증 과학에서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진리론 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식이 사실과 일치할 때 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책상은 모나다'든가 '지금 비가 내린다'든가 하는 경우에서와 같이 지식의 진위를 사실 계에 비추어 보아서 확인할 수 있을 때에만 통용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감각적 실증이 가능한 지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옳다고 믿고 있는 판단이다. 그러나 이 판단은 '이 책상은 모나다'와 같이 감각적 검증이 가능한 판단이 아니다. '모든 사람' 속에는 내 경험이나 내가 믿을 수 있는 다른 어떤 사람의 경험도 미치지 못하는 먼 과거나 먼 미래의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결코 감각적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전칭(모두 전, 일컬을 칭)판단이나 또는 추상에 추상을 거듭한 고차적인 과학적 판단들의 진위는 어떻게 가려 낼 수 있을까? 정합설은 바로 여기에 적합한 이론이다. 더구나 수학이나 논리학같이 감각적 현실계와 아무 상관도 없는 형식(형상 형, 법 식)과학에 있어서는 경험적 관찰에 의한 검증은 생각할 수도 없고 오로지 새 이론이 기존의 이론 체계와 정합 하는가에 따라서 그 진위를 가릴 수 있을 따름이다.
비판
정합설은 감각적 검증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형식 과학에만 적용되고 사실 과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제약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여러 난점이 있다. 우선 판단이 기존의 판단 체계와 적합할 때 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기존의 판단 체계의 진리성은 무엇에 의해서 확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또 그보다 앞선 기존의 판단 체계와 정합 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은 무한히 소급되어 필경은 그 이상 소급할 수 없는 제 일의 판단에 이를 것이다. 그러면 이 제 일의 판단의 진리성은 그 이전의 기존 판단 체계와의 정합에서 구해질 수 없고, 이와는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 그 진리 성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정합설은 그 안에 정합설이 아닌 다른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 된다. 또, 정합이란 두 판단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말하는데, 그러면 정합설은 논리학의 기본 원칙인 모순율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모순율 자체의 진리성은 무엇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을까? 물론 복잡한 과학 이론에서 직접적인 관찰이나 검증이 불가능한 때에는 이미 진리라고 인정되고 있는 기존의 이론 체계와의 정합 여부가 새로운 이론의 진위를 가리는 중요한 기준이 됨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순율 자체의 진위가 문제일 때 이것도 정합 여부로 가름할 것인가? 역시 정합설은 다른 어떤 원리의 토대 위에 있다고 하겠다.
실용설:"소 발자국을 따라가니 인가가 나오더라"
미국의 실용주의는 이제까지의 대응설이나 정합설과는 아주 다른 관점에서 진리를 고찰한다. 실용주의에서는 지식을 그 자체로서 다루지 않고 언제나 생활상의 수단으로 본다. 그리하여 실용설에서는 지식이 실제 생활에 있어서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거나 실제로 유용할 때 참이라고 한다. 원래 실용주의는 물리학이나 생물학과 같은 실험 과학의 방법을 논리적 사고의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시킨 것이다. 실험 과학의 명제는 이론적으로 아무리 하자가 없더라도 실험의 결과에 의해서 실증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즉, 실험이라는 행위와의 관계에서 명제의 진위를 논하는 것이다. 가령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이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 발자국을 따라가면 인가가 나오리라 생각하고 따라갔더니 과연 인가가 나왔다고 하자. 이때 이 사람의 '소 발자국을 따라가면 인가가 나오리라' 하는 생각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져 예상한 결과에 도달함으로써 진리로 되는 것이다. 이렇게 관념, 생각은 그 자체로서는 생각에 그치고, 즉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 행동을 통해서 실제 생활에 적용되어 유용하면 그때 비로소 진리로 되고, 유용하지 못하면 거짓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념의 진위가 실제 행동과의 관련에서 가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진리를 오로지 이론적인 영역 내에서만 논의하고 있는 앞의 두 진리론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시각이라 하겠다. 즉, 실용주의는 진리론을 인간의 행동, 실천과 관련시켜 논의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진리론을 현실 생활계에 밀착시킨다는 아주 바람직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동시에 실용주의 진리관은 각기 일면적이기만 한 대응설과 정합설을 자기 속에서 종합하기도 한다. 위에서 든 소 발자국의 예에서 '소 발자국을 따라가면 인가가 나오리라'는 관념은 실제로 우리를 그 발자국을 따라가는 행동으로 이끌어 간다. 이때 실용주의자들은 관념이 이렇게 행동을 인도해 가는 과정이 아무런 지장이나 모순도 없고 순탄하게 진행되면 그것을 '정합설'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인가가 발견되는 것은 '관념과 실재의 일치 내지 대응'이며, 이 일치가 바로 유용, 유효라고 한다. 이렇게 고전적인 두 진리론은 실용설에서 인간의 행동, 실천과의 관련에서 새로운 해석을 입으면서 종합되고 있다.
비판
실용설이 현실 생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만족스럽다'든가 '실제로 유용하다'든가 하는 개념은 아주 주관적이고 상대적이어서 진위를 가리는 논리적 기준으로서는 매우 불명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동일한 문제 상황에서 서로 상반되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는데 둘 다 성공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상반되는 두 신념이 같이 참이 되는 것이다. 또, 진리가 이렇게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관념의 진위는 행동을 통한 실제적인 결과를 기다려야 비로소 판정된다는 뜻이다. 즉, 구체적으로 실행해 보아야 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 본다(try, test)'는 과정을 밟고서 진위를 판가름낸다는 것은 힘에 여유가 있다든가 또는 성공의 가능성이 아주 높다든가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우리는 언제 어느 때나 또 무엇이나 다 해 볼 수는 없다. 사실 죽어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내 민족이 한번 망해 봐야 한다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해 본다'라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 행동은 시험삼아 한번 해 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확신의 기반 위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응설, 정합설, 실용설의 세 진리론은 이와 같이 각기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문제되는 대상의 성격에 따라 그때 그때 적합한 진리론을 골라야 할 것이다.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낙하 법칙(S=1/2gt제곱, V=gt)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고 있는 세 사람의 대화를 읽으면서, 이들이 진리론의 어떤 입장에 서서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지 생각해 보자.
진실 : 낙하 법칙이 올바른 것은 그 법칙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여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만약 낙하 법칙이 실재 자연에서 일어나는 낙하 현상의 규칙성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법칙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법칙이 될 거야. 석규 : 글쎄, 낙하 법칙이 자연에서 일어나는 낙하 현상을 꼭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갈릴레오가 아무리 수많은 실험을 해서 그 법칙을 만들려 했다 해도 그것은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낙하 현상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고, 또 실험에서 경험된 내용이 꼭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낙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진실 : 낙하 현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우리의 인식이 그것을 올바로 파악한 것이기 때문에 낙하 법칙은 진리인 거야. 석규 : 그건 매우 소박한 사고야. 지식은 우리의 두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적 활동인데, 그러한 지성의 작용을 존재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범주 착오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쉽게 말하자면, 실재 코끼리와 사진 속의 코끼리를 같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진실 : 실재 코끼리와 사진 속의 코끼리는 물론 다르지만, 사진 속에 있는 코끼리가 사진의 모델인 그 코끼리인 건 분명하잖아. 인간의 지식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을 개조하는 데 개입할 수 있다면, 과학적 지식이 객관적 세계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네 주장대로라면 낙하 법칙은 물론 인간의 모든 지식이 믿을 수 없는 게 돼. 네가 이용하고 있는 모든 과학적 혜택도 믿을 수 없고. 석규 : 아냐! 나는 낙하 법칙과 같은 자연 과학적 지식이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야. 내가 주장하는 건, 낙하 법칙이 진리인 것은 그것이 객관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야. 가령 갈릴레오의 낙하 법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한 결과가 아니라 수학적 계산의 결과라 할 수 있어, 사람들은 자연의 법칙이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때문에 진리라고 하지만, 그것은 소박한 생각이야. 오히려 기존의 자연 과학적 지식 체계에서 낙하 법칙이 무모순적으로 정합될 수 있기 때문에 진리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진실 :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만약 하나의 세계관을 독단적으로 상정해서 그것으로부터 인간 지식의 진리 여부를 확인하려 한다면 '독단론'에 빠질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지 않아? 예를 들어, 중세에 신의 존재와 절대성을 자제한 세계관에 부합하는 지식만을 진리라 주장한 것은 독단론의 대표적인 사례야. 너는 아마 수학, 기하학, 논리학과 같이 엄밀한 추론의 지식 체계야말로 진리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말할 테지. 그러나 고대에 말의 이빨 수를 경험적 관찰이 아니라 기하학과 같은 이성적 추리로 알아 내려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창민 : 야! 너희들 갑자기 철학자가 되었냐? 복잡하게 말한다고 해서 유식한 게 아니야. 잘난 척하지 마! 뭐 그리 복잡할 게 있어? 자연 과학적 지식을 자연 현상에 적용해서 유용한 결과가 나타나면 그것이 진리아냐? 좋은 게 좋은 거지! 석규 : 말도 안 되는 소리! 가령, 생체 실험이나 핵 실험은 어떤 사람에게는 유용한 결과를 가져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을 희생해야 하는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어. 그렇다면 진리 여부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아. 진실 : 그만, 창민이까지 끼여드니까 더 복잡해진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 하자.
토론해 봅시다 1. 상식도 일상 생활에 유용한 지식이다. 그러나 진리와는 구별된다. 그렇다면 진리와 상식은 어떤 조건에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자. 2. 대응설과 정합설 중 하나의 입장을 택해 그것을 주변의 예를 들어 정당화해 보고, 상대의 진리론의 한계를 비판해 보자. 3. 실용주의 진리관을 정리해 보고 그것의 한계를 비판해 보자.
주요개념 상식, 진리, 대응설, 모사설, 표상, 관념, 정합설, 대상, 경험, 실재, 지식의 체계, 전칭 판단, 형식 과학, 모순율, 실용주의, 실험과학
참고 문헌 김여수 차인석 한전숙, '철학개론' 제1부 제2장, 양서원, 1988. 소광희 이석윤 김정선, '철학의 제 문제' 제3장 제8장, 지학사 김여수, '진리의 문제', 한국사회과학연구소 편 '사회 과학의 철학', 민음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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