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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83 호
단기 4340. 10. 21 (음력 9. 1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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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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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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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안다는 것과 크게다르다. / 찰스 케터링(미 실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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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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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뿌리를 박아라
정의 착한 것은 청명한 기를 타고서 자연을 따라 곧바로 나가 그 중심을 잃지 않고 인 의 예 지의 뿌리가 됨을 볼 수 있으므로 사단이라 이름한다. 정이 착하지 않은 것은 비록 뜻에서 비롯되었으나 일단 더러운 힘이 가로막아 그 본체를 잃는다. 그래서 혹 지나치기도 하고 미치지 못하기도 하여 어진 것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도리어 어진 것을 해치는 것이다. 옳은 것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 도리어 정의를 해치며, 예의 도덕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 도리어 예의 도덕을 해치고, 지식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 도리어 지식을 해치므로 단(도덕심과 인심을 말함)이라 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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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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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1장 인식론
진리란 무엇인가
한전숙 :
믿는다고 해서 진리인 것은 아니다. 감각적으로 입증할 수 없거나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진리로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도대체 어떤 객관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믿는 것이 반드시 진리인가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진리'라는 말을 많이 쓴다. 진리라고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네 말이 맞다." 또는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이다."하는 표현을 쓴다. 이렇게 우리가 일상 생활, 특히 학문적 활동에서 직접, 간접으로 추구하고 있는 진리란 어떤 것인가? 우선 믿음이 가는 것, 확신이 가는 것을 진리라고 하는 생각이 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말이 있다. 원시 기독교 시대에, 신생 기독교가 다른 여러 종교들 속에서 제 자리를 잡아 나가려는 어려운 노력들을 하던 시절, 경건한 신앙 생활보다는 교리의 철학적 해석에만 골몰하는 일파를 보다못해 외친 소리다. 더 정확히는, "...하나님의 아들은 죽었다. 이것은 불합리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는 죽은 후에 부활하였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확실하다."라고 이어진다. '합리적'이란 이성에 합당하고 논리에 합당한 것, 즉 이치에 맞고 논리적인 것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이치에 맞는 것이라야 믿는다. 사실 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한다. 이것은 종교란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귀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요, 이때 믿음이란 인간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설명을 초월한 세계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종교적인 믿음 말고 우리의 일상적인 믿음 즉 확신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 '해는 아침에 동쪽에서 솟아올라 낮에는 중천으로 올라가고 저녁이면 서쪽으로 진다'고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믿어 왔다. 이것은 매일매일 거듭되는 나의 경험을 토대로 한 믿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해가 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보일 뿐이요, 사실은 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지구가 그 주위를 빙빙 도는 것이라고 배워 알고 있다. 또, 나는 어렸을 적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굴뚝을 타고 내려와서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신다."든가 또는 "뱀은 몇십 년 몇백 년 묵으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굳게 믿고 있었다. 이것은 부모님이나 친구들의 말, 결국 남의 말을 토대로 한 믿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나면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나 용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게 되었다. 내 눈으로 똑바로 본 것도 믿을 수 없고 내가 믿는 다른 사람들의 말도 믿을 수 없다. 그러면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믿음이란 주관적인 확신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고 경우에 따라서 다르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견해이지만 엄연히 진리인 것도 있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을 때 그 당시의 사람들은 다들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진리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겠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지식은 어떤 조건, 어떤 객관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대응설, 정합설, 실용설의 세 가지 학설이 있어 왔다.
대응설 : "백문이 불여일견"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네가 직접 가 보렴." 여기서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을 하느니 현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면 내 말이 옳은지 그른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직접 가 보아서 사실과 들어맞으면 내 말이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른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생각이나 판단이 사실이나 대상에 들어맞을 때 진리라고 한다. '들어맞는다'는 말 대신 '일치한다' 또는 '대응한다'는 말도 쓴다. 그런데 판단과 사실은 하나는 관념적. 추상적 존재이고, 또 하나는 감각적, 구체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두 삼각형이 합동이라고 할 때와 같은 경우라면 모르되 이렇게 존재 방식을 달리하는 경우에는 '들어맞는다'든가 '일치한다'는 말보다는 '대응한다'는 말이 좀더 적합할 것이다. 이렇듯 '판단이 사실에 일치, 대응할 때 진리'라고 하는 견해를 대응설이라고 한다. 대응설은 일상적으로는 모사설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특별한 장애가 없는 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파악한다고 믿고 있다. 가령 앞에 있는 책상이 모나고 노란 색깔이라고 할 때 우리의 시각으로 파악된 표상 또는 관념(모나다, 노랗다)은 앞에 있는 대상(책상)이 사실상 지니고 있는 성질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그 책상은 우리가 지금 시각을 통해서 알고 있는 그대로의 모양(모남)과 색깔(노랑)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그 책상을 모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책상이 실제로 모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시각이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아서 밖에 있는 대상이 조금도 왜곡됨이 없이 그대로 비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식 능력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주장을 모사설이라고 한다. 우리가 마음에 가지는 표상이나 관념은 바깥 대상의 모사라는 것이요, 이런 의미에서 대상은 우리의 관념과 일치, 대응한다는 주장이다.
비판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정말 거울과 같이 대상을 언제나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일까?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너무도 무비판적으로 감각적 모사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금만 반성해 보아도 우리의 감각이 늘 거울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물론 대상을 인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하에서라는 단서야 붙겠지만, 그러나 내 감각 기관의 생리적 상태, 조명, 대상의 위치 등등 모든 것이 아무리 정상적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인간의 감각 기관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자외선이나 적외선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인간은 냄새 맡는 데 있어서 개에 비해 뒤떨어진다. 소리를 듣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현미경이나 망원경, 보청기 등 여러 보조 기구를 사용할 수는 있다. 그래도 우리 감각의 파악 기능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우리의 감각은 바깥에 있는 사물을 사실 그대로 모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사설 또는 대응설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사설의 성립 여부는 인간의 감각 기관의 능력 여하에 달려 있고, 감각 기관의 능력의 한계 내에서는 모사설이 성립한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모사설은 순수 이론적으로도 성립할 수 없다. 모사설이 올바른 주장이려면 관념과 대상의 일치 내지 대응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관념과 대상의 일치 여부를 알려면 이 둘이 서로 비교되어야 할 텐데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책상이 노랗다는 나의 관념이 사실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려면 나는 그 책상을 다시 한 번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나는 그 책상에 관한 또 하나의 관념을 가질 뿐이요, 책상 자체에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처음에 가졌던 '모나다'는 관념과 지금 다시 한 번 직접 보면서 가지는 '모나다'는 새 관념뿐이다. 나는 아까의 '모나다'와 지금의 '모나다'는 두 관념을 비교할 수 있을 뿐, 관념과 대상 자체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감각적 모사설이 원칙상 성립하지 못함을 밝혀 준다. 우리의 감각은 마치 거울과도 같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므로 관념은 대상과 일치, 대응한다는 모사설의 주장은 이 양자의 일치 여부를 확인할 도리가 없으므로 철학적 이설로 성립하기에는 너무도 소박한 견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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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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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
본뜻 : 검찰조사나 사회적, 법률적 사건 등에 종종 등장하는 말이다. 일본식 한자어인 '신병'은 사람의 몸이나 신분, 또는 사람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몸의 병을 얻어서 건네 받았다는 뜻으로 들리기 쉬우며, 새로운 신참 병사를 가리키는 말로 들리기 쉬우니 쓰지 않도록 한다.
바뀐 뜻 : 우리말로 바꿔 쓴다면 '신병 인도'는 '사람 건네주기'로 '신병 확보'는 '신분 확보' '보호 감시' 등으로 쓸 수 있다.
"보기글" -검찰은 박 의원 측에 이 선생이 신병을 인도했다(이 선생을 건네주었다) -검찰은 전기협 대표들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농성 장에 경찰을 투입했다(전기협 대표들을 보호 감시하기 위해)
경제성
오래도록 전라 방언을 써 온 나이 든 분들은 ‘집에서’를 [집이서]로, ‘논에서’를 [논으서]로 소리 낸다. 또한 ‘하고’를 [허고]로, ‘하려면’을 [헐라먼, 힐라먼]으로 소리 낸다. 여기서 전라 사투리에서는 모음 [에] 대신 [으, 이]로, [아] 대신 [어]로 소리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음은 높은 음으로 혀 앞에서 발음하고, [으] 모음은 높은 음으로 혀 가운데서 소리를 낸다. [어] 모음은 약간 높은 음으로 혀 가운데서 발음하기 때문에 낮은 음이면서 혀 가운데서 발음하는 [아] 모음보다 훨씬 소리 내기가 쉽다. 같은 환경에서 [으]를 가장 짧게 발음하고, [애, 아]를 가장 길게 소리 낸다. 높은 음인 [이, 우, 으]는 다른 모음들보다 소리가 짧다. 이처럼 토씨에 쓰이는 모음은 대체로 짧게 발음하는 모음을 사용하면서 발음을 짧게 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를 [핵교]라 하고, ‘고기’를 [괴기]라고 소리 내는 것도 역시 발음을 쉽게 하고자 하는 방편이다. ‘형’을 [성]이라 하고, ‘기름’을 [지름]이라고 하는 것도 발음을 쉽게 하려고 바꾸어내는 발음이다. 자음 [ㅎ]은 목에서 나는 파열음인데, 이 소리를 마찰음 [ㅅ]으로 바꾸어 소리내기를 쉽게 하고 있다.
사투리에서 사용하는 발음을 해당 지역의 말투로 간단히 처리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방언의 독특한 발음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고 경제적으로 변화한 언어 현상인 까닭이다.
이태영/전북대교수·국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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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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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6. 고목나무가 꽃을 피우다(춘신군)
죽고자 하는 이는 산다
황헐이 진나라왕의 약속을 받고 초나라로 돌아왔다. 이에 초나라는 황헐과 태자 완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진나라는 이들을 여러 해 동안 억류하였다. 그 뒤 초나라의 경양왕이 병이 들었는데도 태자가 귀국을 할 수가 없었다. 원래 태자는 승상인 응후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황헐이 응후를 찾아가 설득하였다.
"승상께서는 정말 태자와 친하십니까?" 응후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황헐은 말을 이었다. "지금 초나라 왕은 병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으니 태자를 귀국시키는 것이 가장 나을 것입니다. 이 태자가 초나라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진나라를 정성스럽게 섬길 것이며, 승상께 대해서도 무궁한 은혜를 베풀 것입니다. 이것은 동맹국과 친교를 두텁게 하는 거이며 신임을 얻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이 태자가 귀국하지 못한다면 그는 다만 함양에 사는 평범한 선비에 불과할 뿐이니, 초나라는 다른 태자를 세우고는 이 진나라를 섬기지 아니할 것이 분명합니다. 동맹국을 잃어버리고 대국과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잘못된 계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승상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응후는 이러한 뜻을 진나라 왕에게 말했다. 그러자 왕은 이렇게 말했다.
"태자의 스승으로 하여금 먼저 포나라에 가서 왕의 병이 어떤 상태인가를 알아보고, 그가 돌아온 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도록 합시다." 이에 황헐은 태자에게 말하였다. "진나라가 태자를 붙잡아 두는 까닭은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태자께서는 그들을 이롭게 할 만한 힘이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몹시 걱정하는 일입니다. 지금 국내에는 양문군의 두 아들이 있는데 대왕께서 만일에 돌아가신다면 태자께서 초나라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양문군의 아들이 반드시 왕의 자리를 물려받고 태자께서는 종묘에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조속히 서두르시어 사신으로 온 사람과 함께 진나라에서 도망하여 국경을 벗어나십시오. 신은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죽음을 무릅쓰고 뒷일을 맡겠습니다."
그리하여 태자는 의복을 바꾸어 입고 사자의 마부로 변장하여 진나라의 관문을 벗어났다. 이때 황헐은 집을 지키고 병을 핑계로 손님을 거절한 채 며칠을 보냈다. 태자가 이미 멀리 도망하여 진나라가 추격할 수가 없다고 판단되자 그는 스스로 진나라 소왕에게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초나라의 태자는 이미 귀국을 하여 국경선을 멀리 벗어났습니다. 제가 그 책임을 지고 죽어 마땅하오니 죽음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소왕은 크게 노하여 그를 죽게 하려고 하였다. 이때 응후가 이렇게 말했다.
"황헐이 신하된 의리로써 자신을 내던져 군주를 위하여 죽고자 하였으니 태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반드시 황헐을 기용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죄를 주지 마시고 그대로 귀국을 시키시어 초나라와 친교를 맺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황헐을 귀국시켰다. 황헐이 귀국한 지 3개월 뒤에 경양왕이 죽고 태자 완이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고열왕이다. 고열왕 원년에 황헐을 재상으로 삼고, 그를 춘신군에 봉하여 회북의 12현을 하사하였다. 그 뒤 15년이 지나서 황헐은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회북의 땅은 제나라와 국경을 접한 곳이므로 정치적으로 긴요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군으로 만드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회북의 12현을 헌납하고 강동에 임명해 주기를 청하였다. 고열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춘신군은 그 후 오나라의 옛 폐허에 성을 쌓고 자신의 도읍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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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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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 21장. X선, 방사선 그리고 핵분열.
인공 방사능과 핵분열.
베크렐에 의한 천연 방사능의 발견은 새로운 시대, 즉 원자력 시대 또는 핵 시대를 맞이하게 한 셈이지만 그것은 그 당시 곧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천연 방사능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베크렐과 퀴리부부가 발견한 방사능의 성질과 원인을 추리하여 그것들이 원자핵으로부터 방출되는 입자(알파 입자와 베타 입자)나 이 방출과 함께하는 고 에너지 전자파의 방사에 의한다는 것을 제창하기에 이르기까지는 러더포드와 소디를 비롯한 기타 많은 사람들의 연구와 통찰력이 필요했다. 원자 질량의 거의(99.9% 이상)가 그 중심에 모여 있으며 양성입자인 양자와 중성입자인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은 주로 러더포드였다. 그 후 거대한 핵 에너지를 해명하는 비밀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34년경이었다. 1934년 퀴리부부의 딸 이렌 퀴리와 그녀의 남편 프리데릭 졸리오는 인공방사능을 발견했다. 그들은 러더포드 경에 의해서 확인된 알파 입자가 천연 방사성 원소로부터 방출되는 원자핵의 일부이며, 이 알파 입자가 천연 방사사어 원소로부터 방출되는 원자핵의 일부이며, 이 알파 입자를 사용하여 비 방사성 원소에 충격을 주면 이들 원소가 방사성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앨런 라이트만 교수는 'Science 84'라는 책에서 이 소립자 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영구히 죽은 듯 가만히 있을 요량이던 안정된 어떤 원자핵이라도 소립자를 가하면 분명히 불안정하게 된다. 이 억지로 쑤셔넣어진 원자핵은 활성화 상태에 있으며 천연 방사성 원소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산산이 작은 조각으로 내뿜기 시작한다."
당시 로마에 있었던 엔리코 페르미는 안정된 원소에 충격을 줌에 있어서 알파 입자 대신에 중성자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거대한 비방사성 안정 동위체의 우라늄 원자핵을 이 방법으로 실험하였다. 다분히 중성자 충격애 의해서 우라늄과 비슷한 무게를 가진 원소의 원자핵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었다. 그러나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오토 한과 프릿츠 슈트라스만은 우라늄의 중성자 충격에 의한 생성물 속에 크기가 우라늄의 절반 정도 되는 원소인 바륨 원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실험에 사용한 재료에 바륨이 전혀 함유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우라늄 핵의 일부가 분명히 둘로 쪼개진 것이다. 1938년 12월 한은 이 예상 밖의 결과를 리이저 마이트너에게 편지로 알렸다. 마이트너는 30년에 걸친 한의 유능한 공동연구자였으나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5개월 정도 전에 나치 독일군을 피해 스웨덴으로 갔었다. 그녀의 조카인, 역시 물리학자인 오토 R. 프리시(코펜하겐에서 네덜란드의 위대한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공동연구자가 되어 있었다)가 크리스마스에 마이트너를 방문했을 때 한의 편지에 관해서 의논했다. 그들은 눈 속을 생각에 잠겨 걸어가다가 보어의 이론을 생각해냈다. 1936년 보어는 원자핵 중의 입자군은 한 집단으로서 행동하므로 중성자와 같은 작은 입자가 충돌하면 그 구의 형태가 뒤틀릴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었다. 만일 핵내의 반발력이 끌어당지는 힘을 능가하면 핵은 둘로 나누어지면서, 고도의 속도로 튕겨져 나가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될 것이라는 것이다. 보어는 불안정한 무거운 원자핵과 흩어지는 물방울과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프리시는 며칠 후 코펜하겐으로 돌아와 때마침 스웨덴과 미국간의 정기운항선인 드로트닝흘름호로 뉴욕을 향해 출발하려던 보어를 간신히 붙들어서 이야기를 했다. 보어는 한에 의해서 관찰된 핵분열(프리시가 생물학에 있어서의 세포분열과의 유사성 때문에 명명한 말이다) 실험과 그것에 관한 그 자신의 물방울 모형을 포함한 마이트너와 프리시의 설명의 중요성을 바로 알았다. 그는 마침 출석하기로 되어 있던 워싱턴 DC에서의 이론 물리학회에서 마이트너와 프리시의 설명에 관해서 보고했다. 이어서 보어는 'Physical Review'지에 간단한 글로 핵분열의 물방울 모형 이론에 관한 요점을 발표했다. 핵분열은 그 후 바로 콜롬비아 대학의 레오 실라드에 의해 '연쇄 반응' 으로 확인되었다. 그때 프린스톤대학에 있었던 보어는 연쇄 반응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천연 우라늄 중에 약 1%정도 밖에 존재하지 않는 희귀한 U-235라는 동위 원소뿐이라는 것을 산출하였다. 연쇄 반응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U-235를 농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미국 정부가 U-235의 농축에 채용한 두 가지의 과정 중 하나인 테플론의 사용에 대한 이야기는 27장에서 설명한다). 다행한 것은 이 농축은 독일보다도 미국에서 먼저 성공시켰다는 사실이다.
- 1939년 8월 2일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페르미와 스질라드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극히 가까운 장래에 우라늄 원소가 새로운 중요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 그 결과 무섭도록 강력한 신형폭탄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라고 경고했다. 원자력시대의 그동안의 행보는 잘 알려져 있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원자폭탄이 제조되어 이를 실제로 사용했다. 그리고 보다 강력한 형의 핵에너지인 핵융합이 발견되어 발전했다. 원자력이 평화적 이용인 발전소가 건설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에서는 당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핵페기물의 처리가 심각한 문제로 나타났기 때문에 석탄과 석유가 20세기의 주요한 에너지원의 위치를 확보해왔다. 핵에너지가 극적으로 또한 물가피한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은 전쟁 때문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무기가 등장할 때마다 옛 무기는 진부한 것이 되어왔다. 로마의 투석기, 영국의 장궁, 스위스의 쇠뇌, 화약, 니트로글리셀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단계적 발전은 보다 근대적인 통상의 병기에 핵폭탄이나 핵미사일로의 큰 폭의 변화에 비하면 마치 소인국에서의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중 원자푝탄에 관계한 과학자들의 모임인 원자력과 학자협화는 그 후 아메리카과학협회(FAS)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나 핵병기가 전쟁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했다는 신념에서 핵군축을 그 주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다. 베르타 폰 수트너와 그녀의 평화주의자회의에 대해서 알프레드 노벨이 "당신네들의 회의보다 나의 공장이 전쟁을 빨리 끝나게 할지도 모릅니다"라고 한 말이 상기된다(제15장 참조). 노벨과 그 후계자들에 비해서 우리 세대의 핵에너지 운용이 전쟁을 추방하는 데 보다 큰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기원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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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문과 급제한 뒤에 손을 펴니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간 양연
양연(?-1542)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거원, 호는 설옹이다. 문양공 성지의 손자로 중종 19년(152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동왕 32년(1537)에 대사헌으로 있을 적에 참판 윤안인의 말을 듣고 하루 세 번 임금에게 아뢰어 김안로, 채무탁, 허항의 간사함을 배척하여 김안로 등이 사사되었다. 영상 윤은보가 "종묘사직이 위태로울 뻔하다가 다시 편안하게 되었으니, 치하해야 합니다"라고 청하자, 논상하여 자급을 올려 주었으며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렀다. 양연이 젊을 때에 천성이 뛰어나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마흔 살에 처음으로 글을 배울 적에 분발하여 결심했다. 그는 왼손을 꽉 움켜쥐고 "문장가가 되지 않으면 맹세코 손을 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했다.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가서 글을 읽었는데 한 해 남짓하여 문리가 관통하고 시격이 청고하였다. 그는 장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부쳤다.
글방에는 둥불빛이 어둡고 연지에는 물빛이 맑도다 붓은 내가 원하는 바이고 종이도 겸해 바라노라
이 시는 문방사우를 청하는 뜻이다. 그의 장인이 그 만학이 빨리 성취된 것을 아름답게 여겨 장난 삼아 답하였다.
"양충의(충의는 양연의 애칭)가 마흔 살에 산사의 당에서 글을 읽으니 아! 너무 늦도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미담으로 전하였다. 뒤에 과거에 급제하던 날 비로소 손을 열어 보니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영조가 '양충의가 마흔 살에 산사의 당에서 글을 읽으니 아 늦도다'라는 글을 호당에 써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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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우인
영국왕 '제임스' 1세 (1566-1625)는 책 읽기를 좋아하여 상당한 박식이었으나 그의 행동에는 전통적인 제도와 습관을 무시하고 독재적으로 나가는 점이 많았다. 그는 몇몇 논문에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고 국민 가운데서 자유로운 것은 오직 왕 한 사람 뿐이며 국민은 왕이 신으로부터 물려받는 절대적 권리에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그로 말미암아 의회파와의 충돌이 잦았으며 어떤 의원은 왕을 가리켜 '기독교 세계에서 으뜸가는 현명한 우인'이라고 평했다. 즉 이론이나 서적에서 얻은 지식은 경험을 쌓아서 얻은 지식에 비하여 쓸모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뜻이다. 왕은 '식자우환'의 적절한 본보기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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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열일곱번째 이야기 영혼을 구원받지 못한 집사
카르카손에 살고 있던 한 집사가 병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수도원장과 주교를 모시고 오게 했다. 집사는 그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유언으로 남기면서 자기가 죽고 나거든 당부해둔 대로 일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것은 그가 원하던 대로 이루어졌다. 집사는 죽기 전에 사제들에게 많은 보상을 한 터라, 사제들은 그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 한여자가 그 마을에 나타났다. 그 여자는 여러 가지 놀라운 말들을 하고 다녔는데, 들리는 말로는 그 여자에게 신이 내려서 그 마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했다. 집사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해달라고 부탁을 받은 사제들은 그 여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놀라운 사실들을 말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그 여자를 만나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집사는 영혼에 대해서 뭔가 아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신들린 여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여자는 왜 자기를 찾아왔는지 알고 있다면서 그들이 궁금해하는 그 영혼은 얼마 전에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제들은 이 말을 듣고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으려 했다. 그 집사는 너무나 진실하게 고해성사를 했고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성사를 다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제들은 만약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이 참된 것이라면 그 여자의 말은 사실일 리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신들린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당신들이 믿는 신앙이 진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집사가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죽고 나서야 행했다는 것은 옳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사람의 의도가 선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자기가 죽거든 이러이러하게 하라는 말은 만약 죽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게다가 그 집사는 자기의 명성이 세상에 남기를 원했기에 선행을 행한 것이랍니다."
* 신은 선행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선의에 상을 주신다. 선행을 했더라도 그 의도가 선한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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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5. 통일 아닌 통일, 삼국통일 - (우리 역사가 한반도로 한정된 결정적 사건 #1)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
사람들은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이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때때로 영웅을 들먹이면서 그가 역사의 방향을 틀어놓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영웅으로 칭송되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조차 자신의 자전적 수필 속에서 자신이 역사적으로 너무 왜소하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서로 모순되는 듯한 두 명제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 것이며, 어느 것이 틀린 것인가? 개인의 역할은 반드시 사회 전체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들의 거대한 역할도 그 시대와 떼놓고 평가할 수 없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영웅의 전기를 쓰지 않고 시대사를 쓰며, 개인을 연구하는 경우에도 그의 역사적 행위를 사회와 함수관계 속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개인과 사회의 함수관계는 과연 어떤 것인가? 수많은 역사가들이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아직 그 함수관계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리고 그것을 법칙적으로 정리해내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설령 우리가 개인과 사회의 함수관계를 법칙적으로 정립할 수 있더라도, 미래 역사는 아마 그 법칙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란 찰나찰나 이루어지는 수많은 선택들의 상호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에 어떤 법칙이 있더라도 사람은 이미 그 법칙 자체를 선택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법칙을 창조하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법칙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삶과 죽음의 세계를 모두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삶과 관련된 분야만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역사에는 법칙이 없으며, 선택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인과관계들이 있을 따름이다. 역사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선택은 늘 뒷사람들의 공부거리가 된다. 역사에서 이루어진 그런 선택이 그 미래를 너무나 다르게 만들었다고 보는 탓이다. 사람들의 이런 관심은 '역사적으로 만약 그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를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이론적,해석적 역사가를 매우 당황하게 만든다.
삼국시대 말기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선택들이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선택들 가운데 대부분은 잊혀졌으며, 일부는 충분히 역사적 사실로서 평가받아 여러 가지 해석의 소재가 되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는 그의 강한 의지 때문에 이루어진 선택도 있지만, 때로는 그의 의지와 그다지 관련없이 이루어진 선택도 있다. 또 그 가운데는 자신의 의도와 관련없이 자신과 그가 속한 집단의 종말을 불러온 경우도 없지 않다. 또 일시적으로 영광을 불러왔지만, 뒷날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천추의 한을 남긴 경우도 적지 않다.
김춘추의 선택
김춘추라는 인물도 삼국의 흥망과 관련하여 깊은 관심을 끄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의 선택은 삼국시대에 마침표를 찍었고, 이 마침표의 색깔이 뒷사람들에게 중요한 올가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춘추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 임금이 되었으며, 그의 선택에 따라 한족이 세운 당나라와 연합했고, 그의 선택에 따라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사람이다. 그는 협조자로서 김유신이라는 인물을 선택했으며, 그 선택을 통해 자신의 선택에 힘을 얻게 되었다. 그 복잡한 관계를 일일이 정리하자면 끝이 없겠기에, 이제 그의 개인적 선택이 우리 겨레의 뒷날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김춘추에게는 사랑스런 딸이 있었고 그 딸은 화랑 출신의 품석이라는 젊은이이게 시집을 갔다. 품석이라는 사람은 재능을 갖춘 훌륭한 지도자 재목이었지만 오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김춘추는 그를 더 큰 재목으로 다듬어 자신의 기반으로 삼기 위해 국경지대인 대야성(오늘날의 합천)의 성주로 발령을 내린다. 그러나 오만한 품석은 자신이 작은 성의 성주가 된 데 불만을 품고 주색잡기에 빠져 맡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제 장군 윤충은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먼저 대야성을 대상으로 선택했다. 이제 대야성은 대대라는 비장한 애국자를 탄생시킬 조건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군 내부에서 협조자까지 얻은 윤충은 642 년 기습공격을 해서 대야성을 철저하게 함락시키고, 품석 부부를 죽임과 아울러 끈질기게 저항하며 투항을 거부하는 대대마저 죽인 다음, 1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김춘추의 역사적 선택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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