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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81 호
단기 4340. 10. 19 (음력 9. 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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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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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 마이클럽 '제1회 네티즌 작가 서바이벌' 행사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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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이 책과 TV드라마로 만들어진다!”
인터넷 포털을 통한 소설가 지망생의 등용문이 활짝 열렸다. 동양그룹의 인터넷 계열 자회사인 동양온라인(대표 오태경)은 ‘선영아, 사랑해’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국내 최대 여성포털 ‘마이클럽’ (www.miclub.com)에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예비 작가들이 실력을 겨루는 ‘제1회 네티즌 작가 서바이벌’ 행사를 17일부터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옥탑방 고양이’ ‘메리대구 공방전’ 등 인기 TV드라마 시리즈의 원작 소설 연재가 시작되고 재능과 끼가 넘치는 작가들을 배출한 마이클럽의 ‘나도 소설가’ 게시판을 ‘작가공방’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기획된 것이다. 누구나 마음껏 인터넷에 소설을 올려 네티즌과 전문가의 엄정한 평가를 받아 우승작을 가리는 것이다.
제1회 행사는 마이클럽 회원이면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소설 응모 기간은 다음달 14일까지다. 1차 예선을 거쳐 엄선된 예비 작가들이 출품작을 놓고 다음 달 26일부터 본격적인 서바 이벌이 펼쳐지고 그 과정이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된다. 마지막 승부와 심사를 거쳐 최종 당선작은 오는 12월 21일 결정될 예정이다. 네티즌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300만원이, 평가단상은 출판의 영예가 주어진다. 또한 마이클럽은 ‘로비스트’ ‘주몽’ ‘거침없이 하이킥’을 제작한 초록뱀미디어, UCC전문업체 A9미디어 등 제휴업체와 손잡고 수상작들을 별도 심사해 선정된 소설을 TV드라마나 영화로도 제작을 검토할 계획이다.
행사에 참가를 원하는 사람은 출품작의 전체 줄거리(시놉시스)와 1회분을 마이클럽 사이트 내에 ‘작가공방’을 통해 ‘작가 서바이벌’ 코너에 등록하면 된다. 네티즌 투표를 통해 다수의 지지를 얻은 소설 응모작은 출판사와 드라마제작사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평가단의 심사를 거쳐 본격적인 서바이벌 단계로 들어간다. 서바이벌은 작가가 한 주에 한 회 분량의 소설을 인터넷에 공개하면 네티즌이 읽고 마음에 드는 출품작에 투표하는 형식으로 총 3주 동안 진행된다.
이번 행사는 기존의 소설 공모전과는 달리 응모작의 처음부터 네티즌에게 공개되고 단계별로 평가를 받아 최종 당선작이 결정된다. 마치 ‘도전, 수퍼모델’, ‘아메리칸 아이돌’, ‘도전 FAT 제로’ 등 방송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방식과 비슷하다. 당선작의 완결편은 게시판에 게재하지 않고 책으로 출판해 결말을 공개할 방침이다.
동양온라인 허정임 기획팀장은 “네티즌과 대중 문화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것”이라며 “지속적인 ‘네티즌 작가 서바이벌’ 행사를 통해 책과 드라마, 영화로 상품화될 수 있는 우수 소설과 개성 넘치는 작가를 발굴해 나가겠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마이클럽을 통해 드라마 ‘메리대구 공방전’의 원작 소설을 연재했던 신성진 작가는 “마이클럽은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다양한 소재의 수준 있는 글을 즐길 수 있게 해준 곳”이라며 “이 행사를 통해 우수한 소설과 좋은 작가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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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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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만한 것은 사랑하고 미워해야 할 것은 미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인간. 그리고 그 차이를분간하는 데 쓰는 것은 두뇌./ 로버트 프로스트(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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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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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선악의 모든 것
주자의 말에 '비록 높은 지혜를 자긴 사람이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다'하였으니, 성인도 역시 인심이 있는데 어찌 다 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본다면 칠정이란 곧 인심과 도덕심, 선악의 모든 것이라 하겠다. 맹자는 칠정 중에서 착한 일면만 끄집어내 '사단'이라고 이름지었으니, 사단은 곧 도덕심과 인심의 착한 부분인 것이다. 사단에서 '신'을 말하지 않은 것을 정자가 해설하였으되 '성심으로 사단이 되고 보면 벌써 믿음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하였다. 칠정 이외는 다른 정이 없는데, 만일 칠정을 인심만으로 돌린다면 이는 반만 취하고 반은 버리는 것이 된다. 이것은 너무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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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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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10. 현대한국철학 논쟁
1. 유물론과 관념론 - 한국 철학사 서술에 나타난 시각의 대립
남한의 한국 철학사 서술의 주된 관점
남한의 관점은 북한에 비하여 다양하다. 그러나 그 주류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관념 체계를 철학의 대상으로 보는 관념론에 서 있다. 물론 남한에는 북한과 달리 별다른 도식이 없다. 오직 한국 철학사의 대상이 되는 철학 또는 철학자들이 제시한 관념 체계와 이론을 그대로 답습하려 한다. 따라서 북한처럼 왜곡이 많지는 않지만 대부분 주자학이나 불교의 관념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 체계 안에서만 뱅뱅 돌 뿐이다. 그런 이론이 나오게 된 배경과 그 이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따지지 않는다. 그 결과 그 이론을 왜 연구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어떻게 해서 남한의 철학사가 이렇게 되어 버렸는가? 그 까닭은 철학이란 형이상학적 관념 체계를 다루는 것으로 봄으로써 그런 관념 체계를 제시한 사람과 그런 글만이 연구 대상이기 때문이다. 본래 철학의 본령인 형이상학은 세계관이다.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반성하고 재조직하여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하지만 추상적 개념과 그 개념들을 사용한 이론 체계들은 일반인에게 낯설고 난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이해를 위해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개념들을 일상적 체험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구나 그 대상이 과거의 철학이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오늘날의 체험에 근거하지 않으므로 더욱더 낯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철학사란 일차적으로 그런 노력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남한의 철학사 기술에는 그런 노력이 없다. 그들은 일종의 실재론적 입장을 취한다. 과거 철학의 개념들은 불변이며 지금도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과거 철학자들에게 그 개념들이 이해된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도 당연히 이해되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역사가 바뀌면 사람들의 의식도 바뀌며, 따라서 과거의 개념들도 지금 우리들에게 이해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철학사 연구는 관념 계산으로 나타난다.
관념 계산: 그들은 대상 철학자들이 남긴 관념 체계를 다루면서, 그 관념과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주로 따진다. 리와 기, 태극과 무극, 사단과 칠정 등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것이 앞서는가 뒤에 있는가 등등을 밝힌다. 그것은 마치 산수에서 더하고 빼거나 곱하고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 개념들이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식의 계산은 공허하게 마련이다. 그들은 나아가 여러 사상가들의 관념 체계와 논리를 시간적 순서로 배열하면서 설명한다. 그래서 그 사상가들의 관념 체계 사이의 관계,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런 관념 체계가 어떻게 변천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밝히려고 한다. 이는 관념을 실증하려는 관념 실증주의라 할 수 있다. 물론 한 사상 체계 안에 있는 개념들의 관계와 그 내적 논리, 사상 체계들 사이의 관계 및 변천을 따지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 것이 없으면 사상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 관념과 개념들이 담고 있는 의미를 현재의 언어로 해석하기보다는 개념들 사이의 관계만을 산술적으로 따진다. 그 결과 '태극 리기'같은 개념들의 포함 관계를 따지는, 즉 유개념과 종차 사이의 포섭 관계를 주로 따지는 사전적 설명만 하게 된다.
'본체 -> 현상'의 연역적 설명: 이러한 설명은 연역적 설명이다. 형이상학은 세계 전체를 설명하려 한다. 바람직한 것은 하나의 원리로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역적 방법이 형이상학의 주된 구조를 이룬다. 주자학도 우주론/리기론, 인간론/심성론, 수양론/윤리설, 사회 정치론의 순서로 설명하는 연역적 틀이 주를 이룬다. 물론 이 가운데 몇 가지가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원리의 설명은 빠지지 않는다. 그것이 없으면 철학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전통 철학자들의 서술방식과 같다. 물론 그들의 설명 방식에 따라 그들의 사상을 설명하는 것은 객관적인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런 방식을 따르는 것은 객관적 효과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철학에 그대로 파묻히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많다.
관념 변천의 역사: 남한의 철학사는 대개 관념/개념을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실증주의가 주류이다. 즉 자기 철학으로 철학사를 보기보다는 철학사 안에 있는 관념/개념들을 뒤지는 일이 주가 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입장이 아닌 강단 철학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만처럼 형이상학적 관념들이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확신도 없고, 풍우란처럼 관념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이 시대마다 어떤 형식으로 드러난다고 보는 관념사의 입장에 서지도 못한다. 풍우란은 철학사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관념들의 변화이며, 지식인들은 그 관념을 파악해서 그 시대를 이끈다고 보았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관념들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었으며, 결국 관념 체계의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입장에 서려면 철학사에 나오는 관념 체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이 어떻게 발전해 갔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러나 남한은 철학사의 발전을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발전해 갔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설명을 위해서는 철학사에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관념 체계를 우리의 주관으로 명쾌하게 파악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파악이 안 되는 까닭은 한편으로는 언어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이성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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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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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순
본뜻 : '순서' 또는 '과정'을 가리키는 일본어다.
바뀐 뜻 : 언론 매체에서 많이 쓰고 있는 이 단어는 뜻이 바뀐 것이 아니다. 단 '수순'이라는 말이 일본어에서 온 한자어이며, 그 말을 대치할 수 있는 우리말이 있으므로 되도록 '절차'나 '차례'라는 우리말로 바꿔 쓰는 것이 옳다.
"보기글" -이번에 일련의 북핵 처리 과정은 정해진 수순을 밟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미리 예정되었던 차례를 밟은 것) -이 대통령의 김 대법원장 경질은 사안의 진행으로 볼 때 정해진 수순을 밟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루
눈물과 관련된 낱말로 사전에 오른 한자말들이 서른 가지가 넘는다. 이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이유나 종류와 관련된 말로 ‘감루(感淚), 별루(別淚), 이루(離淚), 수루(愁淚), 열루(熱淚), 원루(寃淚), 자루(慈淚), 체루(涕淚), 향루(鄕淚), 혈루(血淚), 회루(悔淚) 따위가 있다. 이런 갖가지 낱말 가운데 감루, 혈루 또는 피눈물, 체루 정도만 문헌에서 그 쓰임이 확인될 뿐 나머지 낱말들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두루 버려도 될 말들이다.
한편, 눈물과 관련된 낱말로, 자주 쓰이면서도 아직 국어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말로 ‘분루’(忿淚·憤淚)가 있다. “9회 2사 만루의 역전 기회를 살리지 못해 분루를 삼켰다.”(<한겨레>) “뚝발이가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 분루를 흘리는 꽃순일 휘어잡고는 … 바닥에 내리꽂았다.”(박하기, <완전한 만남>) “나는 그가 탄핵의 분루를 마시면서 하는 일이 왜 하필이면 대처일까 생각했다.”(민지네)
여기서 분루는 ‘분하여 흘리는 눈물’이란 뜻인데, 주로 ‘분루를 삼키다, 분루를 마시다, 분루를 흘리다’ 식으로 쓰인다. 이처럼 쓰임이 널리 확인되는 말은 출처나 조어 방식에 큰 문제가 없다면 적절히 대접할 필요가 있겠다.
월드컵 축구가 한창이다. 경기엔 승패가 있기 마련이다. 굳이 얽매일 일은 아니나, 땀 흘린 선수들이나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 두루 이기고 짐에 따라 눈물을 삼키기도, 흘리기도 할 것이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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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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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5. 천하가 붙잡아도 나의 길을 가련다(노중련, 추양)
2) 여자는 질투받기 쉽고 선비는 모함받기 마련이다(추양)
추양은 제나라 사람으로 위나라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승이라는 사람이 추양을 시기하여 위나라 효왕에게 모함했다. 그러자 효왕은 노하여 추양을 잡아넣고 죽이려 했다. 추양은 자기 한몸 죽는 것은 그렇다치고 남의 중상을 받아 죽은 후 까지도 오명을 쓰게 될 것이 두려워 옥중에서 왕에게 편지를 올렸다.
진실이 의심받는다
"'충성된 자는 보답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고, 진실한 자는 의심을 받는 일이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껏 저는 이 말이 진리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이것은 헛된 말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옛날 형가는 연나라 태자 단의 신의를 흠모하여 단을 위해 진나라에 들어가 시황제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태자 단은 형가가 진나라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했습니다. 옛날 변화는 초나라 왕에게 보물 구슬을 바쳤지만 그것이 돌이라 하여 오히려 발을 잘리었고, 이사는 충성을 다했으나 호해 때문에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기자가 미치광이를 가장하고 접여가 세상을 피한 것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변화, 이사의 마음을 살피시고 초왕이나 호해와 같이 참언을 받아들이지 마셔서, 제가 기자, 접여와 같은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또한 비간이 가슴을 찢기우고 자서가 말가죽 자루에 그 시체가 싸여져 장강에 버려진 일도 그때에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들의 진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조금이라도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자는 질투받기 쉽고 선비는 모함받기 마련이다
속담에 '백발이 되도록 사귀어도 처음 만나는 것처럼 차디찬 교제가 있는가 하면, 거리의 수레 그늘에서 한 마디 나누었건만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교제도 있다'고 했습니다. 무릇 교제의 깊이는 세월의 길고 짧음에 관계치 아니하고 상대방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번어기는 진나라를 피해 연나라로 가서 연나라 태자 단을 위해 자기 목을 형가에게 주어 진나라로 가지고 가라고 할 정도로 정성을 다했습니다. 제나라를 버리고 위나라로 갔던 왕사는 자기를 잡으려고 달려온 제나라 군사의 면전에서 성에 올라가 스스로 목을 찔러 위나라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했습니다. 왕사와 번어기는 원래 고국인 제나라와 진나라를 싫어했고 연나라나 위나라를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고국을 떠나서 남의 나라 임금을 위해 죽은 것은, 그 두 임금의 처사가 각각 두 사람의 뜻에 맞아서 그의 외로움을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했기 때문입니다. 또 소진은 가는 곳마다 신임을 받지 못했었지만 오직 연나라에서만은 미생과 같이 신의를 지켰고, 백규는 중산국의 장수로서 여섯 성을 잃고 도망한 다음 위나라를 위해 중산국을 무찔렀습니다. 이런 일들은 오직 군주와 신하 사이에 서로 이해가 깊었기 때문입니다. 소진이 연나라 재상이 되었을 때, 소진을 왕에게 모함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왕은 칼을 만지며 그 모함하는 자를 혼냈고, 소진에게는 준마를 잡아서 크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또 백규가 중산국을 친 공으로 위나라에서 벼슬 자리에 나아갔을 때 위나라 문후에게 모함을 하는 중산국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후는 이 모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백규에게 야광벽을 내렸습니다. 이런 일들은 두 임금, 두 신하가 각각 흉금을 터놓고 서로가 믿고 있었기 때문이니, 어떻게 뜬 말에 마음이 흔들릴 리 있겠습니까. 여자는 미인이건 추한 여자건 궁중에 들어가면 질투를 당하게 마련이고, 선비도 어질건 어리석건 조정에 들어가면 시기를 받게 마련입니다. 옛날 사마회는 송나라에서 다리를 잘렸는데 마침내는 중산국의 재상이 되었으며, 범수는 위나라에서 늑골을 꺾이고 이가 뽑혔지만 마침내는 응후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언젠가는 누명이 벗겨지고 자기의 뜻을 펼 날이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홀로 몸을 세워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질투심이 많은 자들의 미움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은나라의 충신 신도적은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고, 서연은 돌을 지고 바다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세상에서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임금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백리해 거리에서 걸식을 하고 있었건만 진나라의 목공은 그에게 정사를 맡겼고, 영척은 수레 밑에서 소를 기르고 있었지만 제나라 환공은 그에게 국정을 맡겼습니다.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서 주위의 칭송을 받아 목공이나 환공에게 발탁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마음이 통하고 행동이 일치되면 아교나 옻칠보다도 더 굳게 맺어져, 형제간이라 할지라도 그 사이를 갈라 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뭇 사람들의 말에 현혹이 될 리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한 쪽 말만 들으면 간계가 생기게 되고 한 사람에게만 정사를 맡기게 되면 반란을 불러 오게 되는 것입니다. 뭇 사람의 말은 쇠라도 녹이고, 쌓이는 욕은 뼈라도 녹일 수 있습니다. 진나라는 서융인 유여를 써서 중국의 패자가 되었고 제나라가 월나라 사람 몽을 써서 위왕, 선왕을 강하게 한 것은, 이 두 나라가 속습에 얽매이지 않고 세정에 이끌리지 않았으며 아첨과 편파적인 말에 흔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의견을 공정하게 듣고 모두의 마음에 따라 그 이름을 당세에 떨치려면, 오랑캐나 월나라 사람이라도 마음만 맞으면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여나 몽이 그 좋은 예입니다. 뜻이 맞니 않는다면 골육이더라도 멀리하고 쓰지 않습니다. 임금된 사람이 참으로 도리에 맞는 방법을 쓰면서 편벽된 방법을 물리친다면, 오패나 삼왕에 맞먹는 큰 공을 세우는 것도 쉬운 일입니다. 주 무왕은 가슴을 찢긴 가슴을 찢긴 충신 비간의 아들을 등용하고 배를 찢긴 임산부의 무덤을 가꾸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공적은 천하를 뒤덮었는데, 임금이 선을 구하되 억압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나라의 환공은 원수였던 관중을 등용하여 천하를 바로잡았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인자했고 충심으로 그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반말로써 일시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진나라는 상앙의 법을 써서 동쪽의 한, 위나라를 약하게 만들고 천하의 강국을 만들었는데도 끝내는 상앙을 거열형에 처했습니다. 월나라는 대부 종의 계략을 써서 오나라 왕 부차를 포로로 잡아서 중국의 패자가 되었건만 마침내 종을 주살했습니다. 그러므로 손숙오는 세 번 재상의 자리를 얻었어도 기뻐하지 아니했고, 세 번 그 자리를 물러나도 후회하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임금이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보답할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신하와 곤궁영달을 함께 하며 선비에게 관작봉록을 아낌없이 준다면, 폭군 걸왕의 개라 하더라도 성왕 요에게 짖을 수가 있고, 더척의 자객일 지라도 허유를 척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성왕의 명령이라면 누가 응하지 않겠습니까. 형가가 자신의 죄에 연좌되어 칠족을 죽게 한 일이라든가, 요리가 자신의 희생으로 자기 처자를 불타 죽게 한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겠습니다.
참된 인재를 구하려면
'명월주라든가 야광벽도 어두운 길을 걷는 사람에게 던지면 칼을 잡고 노려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데 눈 앞에 날아왔기 때문이다. 마구 꼬인 나무뿌리가 너무 굽어 있어 아무 소용 없을 것 같지만, 군주 그릇이 되는 것은 좌우에 있는 사람이 우선 그 뿌리를 조각하고 장식을 하여 군주에게 바쳤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인연도 없는데 눈 앞에 날아오면 야광벽일지라도 원한을 살 뿐, 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누군가가 먼저 소개를 해 주면 마른 나무나 석은 등걸을 바치더라도 공로가 있다 하여 잊혀지지 않는 법입니다. 오늘날 포의 곤궁한 선비로서 그 신분이 빈천한 사람은 비록 요, 순의 도를 안고, 비간의 뜻을 가지고 당시의 임금에게 충성을 다 하려고 해도, 마음과 생각을 다하여 임금의 통치를 보필하려고 해도 임금은 칼을 잡고 노려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포의의 선비를 마른 나무나 썩은 등걸만도 못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군이 세상을 거느리고 풍속을 바로잡을 때는 뜻대로 세상을 교화시키고, 비천하고 혼탁한 말에 이끌리거나 근거없는 참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나라의 시황은 몽가의 말에 현혹되어 형가의 말만 믿다가 몰래 감춰 둔 비수에 찔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주나라의 문왕은 경수, 위수가에서 사냥을 하다가 강태공을 수레에 태우고 돌아와서 그의 도움으로 천하의 왕이 되었습니다. 진시황은 좌우에 있는 사람을 믿다가 죽을 변을 당할 뻔했고, 문왕은 새가 우연히 나무에 날아들 듯이 우연하게도 만난 사람을 써서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문왕이 자신을 견제하는 말에 초연하고 특이한 포부를 세우며, 공명정대한 관점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임금이 된 사람들은 아첨하는 소리에 빠지고 신첩에게 견제되며, 마치 하늘에라도 뛰어오를 수 있는 것 같은 인재들을 소나 말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포초가 세상을 원망한 나머지 부귀의 팽개친 이유입니다. '정장을 하고 조정에 입궐하는 사람은 사사로운 이욕으로 도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고, 명예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사욕 때문에 행실을 해치지 않는다'란 말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현의 이름이 승모란 이유 한 가지 때문에 효자인 증자는 그 땅을 밟지 아니했고, 읍의 이름을 조가라 한다 해서 음악을 싫어하던 묵자는 수레를 되돌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임금들은 천하의 식견과 기량이 다 같이 위대한 선비들을 권력 앞에 무릎을 끓게 하여, 세력에 눌려 짐짓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행실을 더럽혀 가면서까지 아첨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섬기게 하며,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친하고 가깝게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래가지고는 뜻있는 선비는 험악한 바윗굴 속에 엎드려서 죽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충과 신을 다하여 조정으로 향하려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편지가 위나라의 효왕에게 바쳐지자, 효왕은 사람을 보내어 추양을 옥에서 데려다가 마침내 상객으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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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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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 21장. X선, 방사선 그리고 핵분열.
뢴트겐의 X선 발견.
1895년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콘라드 뢴트겐은 우연히 X선을 발견했다. 뢴트겐은 어느 정도 진공상태인 유리관 속에서 공기나 다른 기체를 통해 고전압의 전기를 방전시키는 다른 물리학자들이 했던 실험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이 방전하는 동안 유리관의 기벽에 푸른빛의 인광이 생기는 것은 이미 1858년에 발견되었다. 1878년 윌리엄 크룩스 경은 이 인광을 일으키는 음극선을 튕겨나오는 분자의 흐름이라고 했으나, 현재 우리들은 음극선이 실제로 음극에서 발사되는 전자의 흐름이며 이들 전자가 유리관 벽에 충돌함으로써 인광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온사인이나 텔레비전 또는 형광등 따위는 이러한 실험에서 발전한 것이다. 형광등 안에는 형광물질이 칠해져 있으며 여러 가지 색과 짙고 옅은 빛을 발한다. 1892년 하인리히 헬츠는 음극선이 얇은 금속 은박지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2년 후에는 필립 레너드가 얇은 알루미늄 창이 있는 방전관을 만들었다. 이 창으로부터 음극선이 관 밖으로 나오게 되고, 인광물질로 형성된 스크린 위에서 발생하는 빛에 의해 검출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스크린은 자외선 검출에도 사용되었으나, 음극선인 경우 진공관 밖의 일반적인 대기압의 공기에는 2-3cm밖에 투과하지 못했다. 뢴트겐은 이 기술에 익숙해지기 위해 몇 가지 실험을 되풀이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크룩스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전체가 유리이며 알루미늄 창이 없는 진공관으로부터 음극선이 나오는지의 여부를 조사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건에서는 아무도 음극선을 검출하지 못할 것이다. 뢴트겐은 검출할 수 없었던 원안으로 음극선관의 강한 인광이 검출 스크린의 약한 형광을 흐르게 하고 있기 떄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확인하려고 그는 검고 두터운 종이로 음극선 관을 덮었다. 이 보호막의 효과를 조사하기 위해 방안을 어둡게 하고 나서 진공관의 고전압 토일에 전압을 넣었다. 검은 보호막이 실제로 진공관을 덮고 있으며 인광이 새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 형광 스크린을 진공관 가까이의 멀고 가까운 여러 거리의 위치에 두기 위해 코일을 끊고 방안의 전 등을 키려고 하던 마침 그때였다. 그때 그는 암실 속의 진공관에서 1m쯤 떨어진 곳에서 약한 빛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 그는 진공관의 둘레를 덮고 있는 검은 마스크에서 역시 빛이 새어, 방안의 거울에서 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안에는 거울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음극선 관에 전압을 넣어 보았더니 또다시 같은 장소에서 빛이 보였다. 그 빛은 희미한 녹색의 구름 같았으며, 음극선 관의 진동하는 방전에 맞추어 흔들거리는 것이었다. 급히 성냥을 켜서 보니 놀랍게도 수수께끼의 빛의 근원은 작은 형광 스크린이었다. 그것은 검출기였으며, 보호막을 한 음극선 관으로부터 1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뢴트겐은 그 즉시 자신이 전혀 새로운 현상에 직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진공관에서 1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형광 스크린에서 빛을 나오게 하는 음극선이란 있을 수 없다. 그 후, 수주일 동안 뢴트겐은 마치 열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오로지 이 새로운 형태의 방사 현상을 해명하기 의해 고심하였다. 그는 이 발견을 1895년 12월 28일 뷔르츠부르크 발행의 '새로운 종류의 방사선에 관한 속보' 라는 표제의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새로운 방사선의 성질 중, 기본적인 것은 거의 모두 정확하게 기술하였으나, 그 자신이 아직 그것들을 완전하게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여 X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때로는 뢴트겐선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뢴트겐은 이 새로운 X선이 음극선과는 달리 자석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했다. 음극선이 공기 중에서 미치는 거리는 불과 5∼8cm에 지나지 않지만 X선은 1m 이상이나 관통할 뿐만 아니라 그의 논문을 인용하면, 정도는 제각기 다르지만, 모든 물체는 이 X선에 대해서 투명하다... 종이는 투명 바로 그 자체이다. 약 1,000 페이지나 되는 책 뒷편에서 형광 스크린은 선명하게 빛났다... 두 벌의 카드 뭉치 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두꺼운 나무조각도 마찬가지로 투명했으며, 2∼3cm의 소나무 판자는 아주 미약하게 빛을 흡수하였다. 약 15mm의 알루미늄판조차 매우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형광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 방전관과 스크린 사이에 손을 넣으면 손 자체의 희미한 영상 속에 뼈가 짙게 보였다. 그는 이 골격의 영상을 사진 필름에 기록할 수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X선의 이러한 특성은 즉각 의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놀라울 정도의 짧은 기간에 X선은 전세계의 병원에서 일상적인 진찰에 사용하게 되었다. 과학 역사상 뢴트겐의 발견만큼 강력한 영향을 준 것은 매우 드물었다. 그의 맨 처음 논문이 발표된지 1년도 지나지 않아 X선에 관한 49가지의 책과 1,000권이 넘는 논문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X선 그 자체의 성질에 관해서 뢴트겐이 조사한 그 이상의 지식을 얻게 된 것은 20년쯤 후의 일이었다. 1901년 스웨덴 과학아카데미가 최초의 노벨상을 수여하였을 때 물리학상에 선발된 사람은 뢴트겐이었다. 최초의 수상에 이토록 저명한 업적을 이룬 사람을 선발할 수 있어서 아카데미는 퍽 만족스러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 빌헬름 콘라드 뢴트겐은 1845년 프로이센의 렌넵에서 태어났다. 뢴트겐이 3세 때 가족은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그래서 초등교육은 네덜란드에서 받았다. 유트레히트의 공업학교와 대학에서 조금 공부한 후 취리히에 있는 공과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기계 기능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공학보다도 기초 과학에 흥미를 갖게되어 수학과 물리학의 공부를 시작했다. 오거스트 쿤트한테서 배운후, 「기체의 연구」라는 학위논문으로 1869년 취리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음해 쿤트와 함께 뷔르츠부르크대학으로 옮기고 그 후 슈트라스부르크대학에서 처음 강사직을 얻었다. 1888년에는 뷔르츠부르크대학 물리학 교수 및 물리학 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이 지위에는 12년간 머물렀고 그동안에 X선을 발견했다. 1900년에는 바바리아(바이에른) 정부로 불려가서 뮌헨의 물리학 연구소 소장이 되고 그 후 사망할 때까지 이 지위에 있었다. 1923년, 뢴트겐은 73세로 사망했다. 만일 뢴트겐이 실험하는 동안 계속하여 보호막 없이 X선을 쬐어왔었다면 자기가 발견한 이 방사선 때문에 수명이 훨씬 짧아졌을 것이다. 다행이도 그는 실험실 안에 칸막이를 했었는데 그것은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주간에 사진 현상의 편이성을 위한 것이었다. 뢴트겐의 시대에는 X선을 많이 쬐게 되면 치명적인 영향이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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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3. 왕도정치의 시작
작서의 변에 옥사가 공평치 못하다며 위관을 나무란 미관 말직의 허굉
허굉(1471-1529)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굉지, 호는 징와이다. 진주의 별장에서 출생했는데, 어떤 중이 지나다가 들러 말하였다.
"내일 이 집에 반드시 귀한 아들이 태어나고 장차 명신이 될 것입니다"
이튿날 과연 허굉이 출생하였다. 백부인 충정공 허종이 매우 중히 여기며 말하였다.
"나의 뒤를 이어 훌륭히 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성종 23년(149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10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보임되고 중종반정(1506) 때에는 사인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이우, 윤장, 조계형이 승지로 있었는데 반정하던 날 정원에 입직하고 있다가 개구멍으로 도망쳐 나와서 공신에 기록되기를 요구하니,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겼다. 허굉이 곧 항론하여 훈권을 빼앗아 버리니 모두들 다시 논의를 통쾌하게 여겼다. 쥐를 잡아 불로 지져서 세자(인종)를 저주한 적서의 변(1527)에허굉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근일 옥사가 공평하게 판결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송질이 나서서 항변했다. "신이 위관(재판관)인데, 무슨 일이 공평하게 판결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임금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하였다. 송질이 허굉을 자기 집에 불러 꾸짖었다. "옥사를 의논하는 것은 수상의 일인데, 그대가 어찌 미관으로 감히 말하는가" "미관은 수상의 말을 할 수 없단 말입니까?"
허굉이 반문하자 송질이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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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이 죽지 않는다면
예수가 기적을 베풀어 죽음에서 소생시킨 '나사로'의 집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어 예수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밀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하고 말했다. 이 비유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싹 트기 전에 죽는다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사람도 열매 즉, 선과를 맺고자 한다면 자기가 죽어야 한다. 비록 이 세상의 생명을 유지할 망정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며 신앙을 위하여 이 세상의 생명을 버리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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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열다섯번째 이야기 술에 취한 늑대 이야기
아주 많은 양들을 거느린 부자가 있었다. 그에게는 늑대들로부터 양을 지키는 개도 있었다. 하지만 그 부자가 워낙 인색한지라 내는 늘 배를 곯으며 사는 실정이었다. 어느날 늑대가 개에게 와서 말했다.
"너는 왜 그렇게 말랐니?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러는구나? 그래 네 주인이 워낙 구두쇠라고 소문이 났으니 먹을 걸 제대로 줄 리가 없지. 네가 원한다면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들어볼래?" 개가 솔깃해져서 대답했다. "지금 나한테는 네 충고가 굉장히 절실해. 뭐든지 한 번 말해봐. 이젠 말할 힘도 없는 지경이야." "너한테 해줄 수 있는 충고란 바로 이거야. 내가 양떼를 덮쳐서 양 한 마리를 훔쳐 도망가는 척할게. 그러면 그때 네가 나를 따라오는 거야.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네가 힘이 달려 더 이상 나를 쫓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중간에 주저 앉아버리는 거야. 목동들이 그걸 보면 '저 놈을 제대로 먹이기만 했어도 늑대는 충분히 따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말할 거야. 그러면 그 때부터 너를 제대로 잘 먹이지 않겠니?" "그래 네 계획대로 하자."
잠시 후에 늑대가 양 한 마리를 낚아채 도망을 쳤다. 개가 늑대 뒤를 쫓아 열심히 뛰어갔지만 늑대를 잡기도 전에 기운이 달려 쓰러지고 말았다. 목동들과 집안 식구들이 그걸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먹는 걸 제대로 못 먹어서 저러는 거야. 제대로 잘 먹어 건강하기만 했어도 늑대가 어디 감히 나타나기나 했겠어. 아마 양 껍질도 못 가지고 갔을 거야. 충분히 먹질 못해서 그런 거니까 이번 일은 저 놈 잘못이 아니야."
그 말을 들은 주인은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해서 이렇게 말했다.
"저 개에게 먹이를 준 놈이 대체 어떤 놈이야. 망할 녀석 같으니. 내가 배불리 먹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건만 개를 굶어죽일 뻔했잖아."
집 주인은 자기 잘못을 다른 식구들 탓으로 돌리고 앞으로는 개에게 먹을 것을 충분히 주라고 명했다. 그 때부터 개는 고기 국물도 먹고 빵 부스러기도 먹고 해서 조금씩 기운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늑대가 다시 개 앞에 나타나 말했다.
"내가 너에게 좋은 충고를 했다는 걸 인정하겠지?" "그럼 좋다뿐인가. 나한테는 절실한 충고였지." "그럼 더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볼래?" "그래 어디 한 번 말해봐." "그 계획이란 게 말이야. 내가 다시 양을 낚아채 도망가는 거야. 그럼 네가 나를 쫓아와서 내 가슴에 살짝 상처를 입히는 거야. 하지만 곧 기운이 달려 더 이상은 못 쫓아가겠다는 시늉으로 쓰러지는 거지. 그럼 목동들이 '정말 저 놈을 제대로 배불리 먹였으면 확실히 기운을 썼을 텐데. 그랬으면 양도 뺏기지 않았을 테고, 늑대도 저 놈 손에 살아나지 못했을 텐데' 라고 말할 거야." 늑대의 계획을 들은 개가 대답했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는 주인님이 너무 무서워. 하지만 배불리 먹도록 주질 않으니 네가 말한 대로 할 수밖에."
늑대는 양떼에게 다가가 제일 통통하게 살찐 양 한 마리를 낚아채 도망가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한 대로 개가 늑대 뒤를 쫓아 열심히 뛰어가서 늑대의 가슴에 상처까지 입혔지만 기운이 달려 더 이상은 못 하겠다는 듯 땅바닥으로 그냥 쓰러져버렸다. 그 광경을 본 목동들이 말했다.
"저 개를 좀더 배부르게 먹였으면 늑대가 살찐 양을 훔쳐가지도 못했을 테고, 늑대도 살아서 도망가지는 못했을 텐데." 그 말을 들은 주인은 화가 나서 앞으로는 개가 질릴 때까지 배불리 먹이라고 명령했다. 그때부터 개는 푸짐한 고깃덩어리와 빵을 먹을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늑대가 개 앞에 다시 나타났다.
"어때, 내 말대로 됐지?" 고개를 끄덕이며 개가 대답했다. "그래, 모두 다 네 덕이야. 정말 고마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양 한 마리를 훔쳐가도 그냥 못 본 척하고 넘어가 줄래?" "내가 보기에는 그 대가를 이미 받은 걸로 아는데? 벌써 우리 주인님 양을 두 마리나 먹어치웠잖아." "너만 눈 감아주면 돼." "나는 못 본 척할 수가 없어. 네가 만일 무모하게 그런 짓을 한다면 넌 살아서 도망갈 수 없을 거야." 이 말을 듣고 늑대가 말했다. "그러면 난 지금 너무 배가 고파 죽기 일보 직전이니까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봐." 개가 말했다. "마침 빵과 소금에 말린 고기와 포도주를 가득 보관해놓은 식량창고 벽이 어제 허물어졌어. 오늘밤에 그곳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거야." "나를 속이려고 그러는 거지? 내가 집 안에 들어가면 네가 마구 짖어대서 사람들에게 내가 거기에 와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거 아니야?" "맹세할게.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아무 걱정하지마. 안심하고 먹을 거나 챙겨가도록 해."
날이 어두워지자 늑대는 식량창고 안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빵과 고기를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는 포도주를 마시고 얼큰하게 취해서 술주정까지 했다.
"사람들은 빵과 포도주를 배불리 먹고 나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단 말이야. 기분이 이렇게 좋은데 나라고 노래 못 할 거 없지."
늑대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랫소리를 들은 개들이 일제히 짖어댔지만 늑대는 계속해서 더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댔다. 늑대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말했다.
"늑대가 우리 가까이에 와 있다. 늑대 소리가 굉장히 가깝고 크게 들리는 걸. 늑대가 식량창고 안에 있는 게 틀림없어."
사람들은 일제히 식량창고로 가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늑대를 발견하고는 모두 달려들어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말았다.
* 도에 지나친 행동을 하면 결국 큰 화를 입게 된다. 만용을 부리지 말고 무엇이든 적당한 선에서 끝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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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4. 외래사상에 흔들렸던 세 나라 (전통사상을 버리고 수입사상에 의존한 삼국의 집권층)
고구려의 삼론종
삼론종이란 인도 승려인 나가르주나가 지은 "중론"과 "십이문론" 및 나가르주나의 제자인 데바가 지은 "백론"을 주요 경전으로 모아 성립된 종파이다. 이 종파는 중국 남북조시대 말기에 성립되어 수나라 때 크게 번창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 및 일본에도 상당히 퍼져 있었다. 고구려나 백제에서 삼론종이 얼마나 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중국 삼론종의 집대성자가 요동 태생의 고구려 사람 승랑(일명 도랑)이고 삼론종을 일본 승려에게 가르쳐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된 이도 고구려의 혜관이란 사실로 미루어보아 삼론종은 고구려 내부에도 상당히 퍼져 있었을 것이다. 당시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지 않고 외국에 포교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국가의 공인을 받을 정도였으니 상당히 성행하는 종파였다고 볼 수 있는 탓이다. 중국의 경우 512 년에 양무제가 승려 열 명을 선발하여 승랑에게 불법을 배우도록 했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 불교계의 사상적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더구나 양무제가 선발한 승려들 가운데는 이미 승정이라는 최고위 승직에 오른 지적 같은 이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승랑의 비중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본의 경우에도 고구려의 혜관이 건너가 삼론학을 가르친 이래 고구려의 도등 등이 계속 초빙을 받아 삼론학을 강론했다. 그러나 이런 유행은 수나라나 고구려, 백제나 일본 할 것 없이 일정계층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남북조와 그 뒤 수나라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철학은 여전히 유학이었다. 또한 후한 때 만들어진 도가풍의 오두미교를 신봉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구려에서도 불교를 공인한 왕실과 일부 지식인층 및 승려층이 불교계를 이끌고 있었을 뿐이었다. 불교는 아직 신흥종교였으며, 대부분의 지식인과 대중들은 기존의 전통적 사고체계와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다. 불교는 일부 세력의 의도에 휘말려 급격히 수입되었을 따름이다. 종족연맹을 벗어나 더욱 강력한 단일집권체제를 세우려던 고구려의 왕족에게는 새로운 질서를 뒷받침할 철학이 필요했다. 고구려의 왕족이 그런 배경에서 찾아낸 탁월한 사상이 바로 불교였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미 오랜 전통을 자랑하며 인간의 근본 이상과 일치하는 뛰어난 사상을 갖추고 있었지만, 왕족을 비롯한 소수층은 자신들의 권력독점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무언가 다른 사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고구려나 백제에서 불교를 공인한 세력은 주로 왕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왕권 강화의 상징으로서 불교를 공인했다. 그러나 그는 불교를 공인시키기 위해 이차돈을 사형시켜야 할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렇듯 불교의 수입은 왕권 강화라는 측면과 기존 연맹체제의 고수라는 측면의 대립을 상징하는 사상사적 쟁점이었다. 고구려 출신의 탁월한 불교이론가인 승랑이 고구려에서 그 꿈을 펴보지 못하고 중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던 것은 이런 대립이 얼마나 치열했으며 그 속에서 불교가 받은 압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백제의 미륵불교
백제는 고구려와 같은 종족적 계보를 가진 나라였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와 상당히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가 북부여로부터 내려오는 기마종족 고유의 제사장적 전통을 거의 고스란히 물려받은 나라라면, 백제는 상대적으로 그런 전통의 굴레가 약한 나라였다. 백제를 세운 온조나 고구려의 둘째 임금인 태조 유리는 모두 주몽의 배다른(어머니의 종족계보가 서로 다른) 아들이었지만, 그들의 정치적 성격은 상당히 달랐다. 유리는 북부여에서부터 주몽을 찾아와 권력을 이어받음으로써 북부여와의 졸본부여의 제사장적 전통을 모두 이어받아야 했던 반면, 온조는 그런 전통을 상당히 가볍게 여겼던 개척자였기 때문이다. 온조와 열 명의 추종자들 및 그들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고구려와 다른 새로운 사회를 갈망했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백제에서는 전통사상과 불교사이의 갈등이 훨씬 적었으며, 왕권 또한 고구려보다 상당히 강력했다. 백제에도 고구려처럼 부족회의체가 있었다. 그러나 이 부족회의체도 고구려의 그것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고구려의 경우 각 부족들은 왕의 부족과 거의 동등할 만큼 독립적이었으며, 부족들의 연맹에 의해서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처음부터 하나의 부족이 세운 국가였으며, 그 부족이 영토를 넓히면서 부족의 수가 늘어나거나 초기 부족에 의해 정복된 부족이 생겨 그 수가 늘어났다. 그러므로 왕의 위치는 처음부터 고구려보다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러므로 백제 임금의 욕망은 권력독점이 아니라 이미 독점하고 있는 권력을 더 강화하는 것이었다. 즉 백제에는 왕권의 강화를 확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백성들을 대상으로 왕권의 절대성을 확보하는 이념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런 필요성에서 백제의 왕족들이 관심을 기울인 종파는 바로 계율종을 표방한 미륵불교였다.
기마종족 연맹체의 경우 왕권 강화는 여러 종족의 공존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았다. 왕권의 강화될수록 종족 사이의 평등은 파괴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왕권 강화보다 종족 사이의 합의와 공존을 존중하는 기마종족의 전통적 사상은 왕권 강화를 절대적으로 제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의 임금들은 왕권 강화를 위해 전통사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늘의 대리인이기보다 정치경제적 강자이기를 원했다. 그들은 서서히 정치로부터 종교를 분리시키고, 나아가 종교를 정치에서 추방하고자 했다. 그러나 백제의 임금들은 오히려 교정일치의 원칙을 더욱 강화해나갔다. 임금이 곧 하늘의 대리인이라는 등식을 임금이 곧 미륵부처라는 등식으로 바꾼 것을 제외하면 그들은 여전히 교정일치를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등식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하늘의 대리인이라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존중하는 입장으로서 과거의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관점에 서 있지만, 임금이 곧 미륵부처라는 주장은 미륵의 미래지향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과거보다는 미래를 강조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강조함으로써 백성들에 대한 통치력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임금들은 임금이 곧 미륵부처라는 등식을 백성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미륵불교를 널리 알리는 한편 그 권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법왕이 왕흥사를 세우려고 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왕흥사는 결국 법왕의 아들인 무왕 때 완성되는데, 무왕은 완공된 왕흥사를 아예 미륵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틈틈이 미륵사로 행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백제에서는 미륵신앙과 관련된 불교 사찰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곰나루(웅진) 가까운 지역에 남아 있는 사찰들, 예컨대 금산사의 창건만 하더라도 백제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더구나 곰나루가 백제의 제사장적 권위를 상징하는 곰강(오늘날의 금강으로 곰은 신의 겨레말이다)에 있었으므로, 임금이 곧 하늘의 대리인이고 미륵이라는 등식을 강조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륵불교와 백제의 운명
도솔천에 있는 미륵이 이 세상으로 내려와 다시 부처가 될 때, 함께 살던 그 시대 사람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미륵신앙이다. 그러므로 미륵이 세상에 나타날 때 함께 태어나서 그와 함께 부처가 되려는 것이 이 신앙의 초점이다. 즉 미륵신앙은 현실적인 것이라기보다 다음 세상에 그렇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내세구복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백제의 미륵신앙은 내세구복적이라기보다는 현세구복적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미륵은 이미 인간세상에 나타났으며, 도를 얻어 미륵사라는 절에 모셔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세상은 바로 미륵을 믿음으로써 그와 함께 부처가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를 거부함으로써 구원의 기회를 놓칠 것인가 하는 선택의 시기로 묘사되었다. 더구나 이 신화는 미륵사를 임금이 세우고 임금이 먼저 그의 사회적 대리인이 되었으므로 임금에 대한 철저한 믿음만이 구원의 방법이 된다고 말한다. 즉 백제라는 나라는 이제 미륵사를 세움으로써 현실적 구원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백제 미륵불교의 사상적 특징을 정리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미륵신앙과 정치의 일원화라는 측면이다. 즉 왕에 의한 정치는 미륵을 대신하는 구원의 방법이라는 성격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삼국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진 백제의 현실을 합리화시켜주는 측면이기도 하다. 둘째는, 구원의 구체적 방법, 곧 신앙의 구체적 방법은 곧 계율의 준수라는 등식이다. 즉 미륵과 그 대리자인 임금에 의해 구원받기 위해서는 임금이 밝혀준 미륵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백제의 불교가 계율을 중시하는 미륵신앙임을 보여주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측면은 바로 백제사회의 정체성과 폐쇄성을 상징한다. 이미 구원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는 백제의 현세구복적 미륵신앙은 진보에 대한 더 이상의 갈망이 사라진 것을 뜻하며, 정치와 신앙의 일치라는 강력한 등식은 미륵신앙 이외의 사상적 측면을 배타시하는 폐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마종족 계열의 문화와 예술 작품은 강건하고 패기가 넘친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그것은 진보와 개척정신을 상징하는 강렬한 이미지로 평가된다. 그런데 같은 기마종족 계열의 나라였던 백제의 문화적 특성은 화려함과 세련됨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특성은 백제 후기의 것이며, 미륵신앙에 의해 사회가 폐쇄적인 완성도를 보이고 더 이상 진보를 갈망하지 않는 단계에서 나타난 것이다. 백제는 미륵신앙 이후 기마종족 고유의 사고체계로부터 상당히 이탈해버린 셈이다.
세력 사이의 철저한 조화라는 원칙은 미륵의 대리자인 임금의 독단으로 대체되어버렸고, 경험의 중시와 끊임없는 개척정신은 현실 안주적인 의식으로 대체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백제는 삼국 가운데서 가장 짜임새 있는 나라가 되기도 했지만, 더 이상 진보를 기약할 수 없는 경직된 나라로 바뀌고 말았다. 백제에는 더 이상 통합과 개척의 가능성이 없었다. 정신적으로 폐쇄되고 독단화 되어버린 문화는 백제의 흥망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백제는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의 타락과 신하들의 무능 때문에 멸망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표면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한층 더 중요한 것은 백제 사회가 왜 그토록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어째서 그런 타락이 교정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요컨대 백제가 멸망한 것은 바로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사상을 버리고 외래사상에 전적으로 의존하려 했던 일부 지배층의 지나친 욕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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