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280 호
단기 4340. 10. 18 (음력 9. 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발행지가 길어질 경우 하단부분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문학소식
|
|
|
글터 → 명언 / 격언
|
사랑하고 일하며, 때로는 쉬면서 별을 바라볼 수있는 기회를 주는 인생, 그 인생에 감사하자. / 헨리 밴 다이크 (미 교역자-작가)
|
|
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어떤 욕망인들 못 막으랴
도덕심은 능히 지킬 수 있되 인심은 욕심에 흐르기 쉬우므로 비록 착하나 역시 위태롭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한 마음으로 도덕심인 줄 알면 확충시키고, 인심인 줄 알면 정확하게 살펴서 반드시 도덕심으로써 절제하라. 인심이 항상 도덕심의 명령을 듣게 될 때 인심도 도덕심이 될 것이다. 어느 뜻인들 간직하지 못할 것이며 어떤 욕망인들 막지 못하랴. 진서산(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이름은 진덕수)이 하늘의 섭리와 욕심의 문제를 분명하게 논하여 학자로서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잘 밝혀 주었으므로 매우 유익하나, 다만 인심을 욕심으로만 돌려 해석해서 한결같이 '극기'만 하라고 하였으므로 무리한 데가 있다. |
|
|
글터 → 철학 / 사상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10. 현대한국철학 논쟁
한국 철학이란 무엇이며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그 동안 드러난 경향을 몇 가지 쟁점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한국 철학사를 보는 남한의 관념론과 북한의 유물론의 대립이고, 둘째는 '한국'철학은 특수한 것인가, 아니면 보편을 지향해야 하는 것인가를 따지는 문제이다.
1. 유물론과 관념론 - 한국 철학사 서술에 나타난 시각의 대립
근대 한국이 당면했던 문제는 식민 통치로부터 벗어나 근대 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남쪽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선택했고, 북쪽은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이 같은 국가관이 철학사 서술에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보자.
북한의 조선 철학사 서술의 관점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관점에서 철학사를 "유물론--관념론, 변증법-형이상학의 투쟁의 역사"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철학사는 유물론과 변증법의 승리의 역사"라고 한다. 이것은 중국의 관점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러한 도식이 중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서양 철학사에 적용되었던 것처럼 중국 철학사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상이 유물론이고 유심론(관념론)인지를 따졌다. 그들이 보기에 불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세계를 잘못 파악한 유심론이었다. 그리고 주자학은 유물론-유심론의 도식을 적용하기에 가장 알맞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유심론-유물론의 도식으로 주자학의 리와 기를 나누었다. 기를 주장하는 사람은 유물론자, 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유심론자라는 것이다. 이 같은 도식은 한국 철학사에 어떻게 적용되었는가? 북한은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의 지배적 사상인 불교를 현실의 계급 억압에서 오는 고통을 환상으로 보고 종교적인 정신 수양으로 그 고통을 벗어나라고 함으로써, 계급 투쟁을 중지하고 현존 질서를 받아들이게 한 이론이라고 본다. 그리고 여기에 맞서는 유물론으로, 있었는지조차 불명확한 고조선 시기의 유물론과 신라 및 고려의 유학과 도교를 든다. 이러한 태도는 억지로 도식에 맞추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그들이 조선 철학사에서 주목하는 것은 조선 시대의 지배 사상인 주자학이다. 먼저 주자학에 대한 견해를 중심으로 유물론과 변증법의 적용에 따른 문제를 보자. 북한 철학사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변증법적 유물론을 변증법과 유물론으로 나눈다. (2) 관념론--유물론은 리--기의 도식으로, 변증법은 음양 대대의 논리로 이해한다. (3) 변증법과 유물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를 따지는 목적론적 발전사관에 서 있다. (4) 따라서 지주 자본가와 소작인 노동자의 성분을 분석하듯, 철학자와 철학에 유물론과 변증법의 성분이 얼마나 있는지 검사한다. 그 결과 그들의 이론은 유물론에도 변증법에도 문제가 생긴다.
유물론의 문제:
철학사가 "유물론과 유심론의 투쟁의 역사"라면, 무엇이 유물론이고 무엇이 유심론인가? 유물론이란 물질이 정신(관념)보다 일차적이며 물질이 정신을 규정한다고 보는 세계관이고, 관념론은 그 반대이다. 따라서 유물론과 유심론을 가르는 기준은 물질과 정신이다. 이 이론을 적용하면서 그들은 리는 관념이고 기는 물질이라고 단정하였다. 따라서 리를 강조한 이황은 유심주의자가 되었고, 기를 강조한 서경덕은 유물론자가 되었다. 그 결과로 주자학 개념을 안에서 리=기 관계의 추적에만 힘쓰게 됨으로서 오히려 전통 주자학의 형이상학에 그대로 매몰되었다. 그들은 유물론과 변증법에서 출발했지만 주자학이라는 관념론을 그대로 수용한 셈이다. 마르크스는 사라지고 주자학만 남은 이런 비극은 그들이 리-기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아울러 물질과 관념(정신)의 개념을 엄밀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와 기:
신유학의 기본 범주는 리와 기이다. 리는 현상 사물의 본체인 원리 원칙 등을 의미하며, 연구자들은 대체로 그것을 '관념'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문제는 기이다. 원래 기는 만물을 이루는 재료이다. 그런데 만물, 특히 인간은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기는 물질이며 동시에 정신인 것, 즉 생명력을 의미한다. 이처럼 기는 포괄적인 범위가 넓어서, 기의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면 극단적 관념론이 되고, 물질적 측면을 중시하면 극단적 유물론이 된다. 그런데 단순히 '기=물질'이라고 단정한 결과 기 이론을 유물론이라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기를 강조한 장재 같은 사람을 유물론자, 주희처럼 리기이원론에 선 사람을 객관적 관념론자, 마음을 중시했던 양명학 계열을 주관적 관념론자로 규정한 중국의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기를 중심으로 이론을 세운 서경덕, 임성주, 최한기는 대표적 유물론자가 된다. 그리고 사회 제도와 물자 유통을 중시했던 실학자들도 이들보다 격이 떨어지지만 유물론자이다. 또한 윤휴, 박세당 등은 주자학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진보적인 사상가가 된다. 그런 반면 이황, 이이, 송시열, 한원진, 기정진 등은 객관적 관념론자이다. 이들 유물론자와 객관적 관념론자가 각 시기마다 맞서 있었으며, 유물론이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발전했고 관념론은 붕괴했다고 본다. 이런 설명 방식에는 문제가 많다. 대표적 유물론자인 서경덕의 경우 자연을 설명할 때는 유물론자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을 설명할 때는 전형적인 관념론자이며, 사회에 대한 견해는 정통 주자학자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도가적 은둔자였지 "착취받는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한" 사회 개혁가는 아니었다. 또한 그들의 설명은 조선조 중후기의 정치 변동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이 계열은 서인으로서 노론의 송시열 등으로 연결되면서 정통 주자학의 입장에 선다. 반면 이황과 서경덕의 제자들은 동인을 이루며 서인과 맞선다. 어떻게 철학적으로 같은 입장에 선 이황과 이이의 후예가 정치적으로 대립하며, 철학적으로 반대 입장에 선 이황과 서경덕의 제자들이 같은 동인이 될 수 있는가? 또한 이황 이후 윤휴, 이익, 정약용 등으로 이어지는 동인 및 남인 계열은 실학의 경세치용 학파로 연결된다. 어떻게 "봉건적 질서를 이론적으로 안받침하는 데 급급한 완고한 관념론자인 이황"의 후예들이 "유물론적 전통을 계승하여" 진보적인 실학으로 나아가는가? 정통 주자학자들은 노론에 속하며 노론과 같은 정치적 입장을 가진 임성주가 어떻게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유물론자가 되며, 노론에서 나온 북학파들은 진보적인 실학자가 되는가? 이 모든 문제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주자학으로 바꾸어 버린 데서 나온다. 즉 그들은 마르크스의 물질 개념을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 서서 자연 사물에서의 물질로 보았을 뿐, 역사적 유물론 입장에 서서 사회적 생산관계에서의 물질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마르크스가 말한 물질은 사회, 역사의 경우 한 시대의 토대를 이루는 생산력과 생산 관계이다. 예컨대 조선시대에는 농업이라는 생산력과 지주--소작인의 생산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 생산은 소작인의 노동으로 유지된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 개념에서 노동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다만 주자학의 기 개념이 물질 개념이 된다. 따라서 소작인 노동의 잉여 가치에 존립 근거를 두었던 지주 계층의 입장을 반영하는 주자학 안에서 물질과 정신을 따진다. 리나 기를 말하는 자는 아무리 특이한 이론을 내세워도 결국은 지주 계층 이념을 반영하며, 나아가 대표적인 사상가들이 대부분 지주 출신이기 때문에 지주 지식인 관료의 지배를 옹호하는 이론이 되고 만다. 이런 점을 배제하고 주자학의 이론틀에서 유물론과 유심론을 따지는 것은 공허할 뿐이다. 자연을 기 개념으로 설명하는 자는 유물론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사회를 기로 설명하는 사람을 유물론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들은 기론자들의 자연 설명이 유물론적이므로 인간 사회 설명도 유물론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인간 사회를 기로 설명하는 것은 유물론일 수도 있고 극단적인 관념론일 수도 있다. 사실 장재나 서경덕뿐만 아니라 주희나 이황 같은 학자들도 모두 기로 자연을 설명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연, 사회, 인간에 대한 기 이론의 불연속을 간과하고 기 이론가를 모두 유물론자로 본다. 인간 사회의 설명에서는 서경덕이 기를 말하고 이황이 리를 말해도 결국 그들은 관념론적 입장에 불과하다. 오히려 왕안석이나 정약용처럼 인간 사회를 물질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스스로 기론자로 자처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주자학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리나 기 어느 하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리--기로 보는 도식 자체를 거부했던 것이다.
변증법의 문제:
조선 철학사 서술에서 변증법에 대한 언급은 매우 적다. 주로 음양의 논리나 "하나 속에 둘이 있고, 둘 속에 하나가 있다"는 논리와 관련 지어 언급할 뿐이다. 그 까닭은 그들이 역사적 유물론보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변증법이란 단지 어떤 사상안에서의 모순 대립에 대한 이론일 뿐이다. '유물론'이란 말처럼 '변증법'도 기존 주자학의 성분을 분석하는 시약이나 표찰에 불과하다. 무(허공의 기)사이의 상호 작용으로 설명한 것을 '심오한 변증법적 고찰'이라 한다. 이것은 변증법이 한 사회의 갈등 도는 역사적 변화 과정을 분석하는 논리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대합실
본뜻 : 정거장이나 병원 같은 곳에 손님이 앉아서 기다리도록 마련해 놓은 방을 가리킨다. 일본어에서 빌어 온 한자말이다.
바뀐 뜻 : 대기실, 기다림방 등으로 바꿔 쓸 수 있다.
"보기글" -새벽에 청량리역 대합실에 가면 긴 의자에 행려병자들이 누워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청량리역 대기실에 가면) -시외 버스 대합실에서 무심코 담배를 피워 물다가 벌금을 물었다(시외 버스 대기실에서)
우리
대화 상황에는 반드시 사람이 등장한다. 이들을 문법에서는 인칭이라 한다. 말하는 이가 1인칭, 듣는 이가 2인칭, 이야기에 언급되는 이가 3인칭이다. 인칭이 대명사로 실현되면 인칭대명사다. 우리말의 1인칭 대명사는 ‘나’(단수)와 ‘우리’(복수)가 있다. 상대를 대접해서 말할 때는 ‘저’와 ‘저희’라는 낱말을 쓴다.
1인칭 복수 ‘우리’라는 말은 따져 보면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인다. “우리는 전철 타고 갈 테니, 너희들은 버스로 가거라”라는 문장의 ‘우리’에는 말을 듣는 상대방인 ‘너희’는 제외돼 있다. 그러나 “그러지 말고 우리 함께 전철로 갑시다”의 ‘우리’에는 말을 듣는 상대방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라는 대명사는 말하는 사람 쪽만 가리키기도 하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상대편까지 모두 포함하여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언어에 따라서는 이런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여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내기도 한다. 알타이언어 가운데 그런 언어가 흔히 있다. 만주말을 보면 1인칭 복수대명사가 [be]와 [muse] 둘이 있다. [be]는 말하는 사람 쪽만 가리키고, [muse]는 말을 듣는 상대편까지 포함하여 가리킨다. “meni gurun”은 상대편 나라에 대하여 “우리 나라”라는 뜻이고, “musei gurun”은 “우리 두 나라 함께”라는 뜻이다. 몽골 옛말에도 ‘ba’와 ‘bida’의 구분이 있었다. 이러한 알타이언어의 특징이 우리말에는 없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
|
|
글터 → 세계사
|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5. 천하가 붙잡아도 나의 길을 가련다(노중련, 추양)
1) 지혜로운 자는 때를 잃지 않는다(노중련)
동해에 빠져죽을지언정 굴복할 수는 없다
노중련은 제나라 사람으로 특이하고 탁월한 계획을 짜기 좋아했으나, 벼슬에는 도대체 뜻이 없었다. 당시 조나라는 진나라 백기의 공격을 받아 장평에서 군사가 전멸하여 40여만 명이나 죽었다. 그러고도 진나라는 다시 한단을 포위했기 때문에 조나라 왕은 공포에 질렸다. 그런데도 제후의 원군들은 진나라를 구하려고 했으나, 진나라가 두려워서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장군인 신원연을 한단에 잠입시켜, 조나라의 평원군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진나라는 전에 제나라의 민왕과 세력을 다투며 제왕이라 칭했고, 그 우에 이 칭호를 서로 안 쓰기로 했는데, 이제 제나라 왕은 그 세력이 약해지고 진나라만이 천하에서 옹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나라가 갑자기 조나라 도읍을 포위한 것은 꼭 한단을 손에 넣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시 한번 제왕의 칭호를 쓰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므로 사신을 파견해서 진나라왕을 받들고 제왕의 칭호를 써 주게 되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기뻐하며 포위를 풀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평원군은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포위하고 있는데, 위나라 왕이 진나라 왕을 제왕이라 칭하라고 권유한다는 말을 듣자, 노중련은 평원군을 만나서 물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에 평원군이 대답했다. "내가 뭐라고 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앞서 40만의 대군을 나라 밖에서 잃고 지금 또 나라 안에서 한단을 포위당했건만 격퇴시킬 수조차 없습니다. 위나라는 신원연을 파견하여 진나라 왕을 제왕이라 칭하라고 권하는데, 나로서 뭐라고 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노중련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나으리를 천하의 현공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천하의 현공자가 아니심을 알았습니다. 위나라의 신원연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나으리를 위해 그 사람을 만나서 책망하고 쫓아버릴까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소개하여 선생과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평원군은 바로 신원연을 만나서 말했다. "조중련이란 사람이 지금 이 곳에 와 있습니다. 내가 소개하여 장군과 만나시게 하고 싶습니다." 이에 신원연이 말했다. "노중련 선생은 제나라의 높은 선비라고 들었는데, 저는 남의 신하로서 사명을 띠고 있는 몸입니다. 직분이 있는 몸인지라 노중련 선생과 만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평원군은 계속 고집했다. "나는 이미 선생과 약속을 해 두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원연은 하는 수 없이 만나겠다고 승낙했다. 그런데 노중련은 신원연을 만나고도 입을 열지 아니했다. 신원연이 먼저 노중련에게 말했다.
"내가 이 포위된 성 안에 있는 사람을 보아하니, 모두 평원군에게 의지하려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의 풍모를 뵈오니, 선생께서는 조금도 평원군에게 의지하려는 사람 같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이 포위된 성 안에 머무르시는 겁니까?" 그러자 노중련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세상에서는 포초( 주나라의 선비로 세상을 한탄하며 나무를 안은 채 말라죽었다)를 보고 너그럽지 못하고 성질이 까다로워서 죽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모르고 그저 한 몸을 위해 죽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예의를 돌보지 아니하고 적의 목을 많이 베는 것만을 능사로 아는 나라로서, 권모술수로 군사를 부리고, 노예처럼 백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진나라가 소원대로 제왕이 되어 천하의 정치를 그릇되이 하려고 한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그 백성이 되는 것을 참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장군과 만나자고 한 것도 그러한 진나라를 누르고 조나라를 도와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이에 신원연이 물었다. "선생께서 도우시겠다니, 대체 어떤 방법으로 도우시겠단 말씀입니까?" "나는 위나라와 연나라로 하여금 조나라를 도와주도록 하고 싶습니다. 물론 제나라와 초나라로 틀림없이 도울 것입니다."(물론 이 말은 실현성은 약하지만 절대 진나라에 무릎 꿇을 수 없다는, 일종의 호기로운 선언이었다) 그러자 신원연이 다시 물었다. "연나라는 그렇다치고 위나라 일이라면 저도 위나라 사람이니 조금은 그 사정을 알고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위나라를 설득하여 조나라를 도우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노중련이 이 말을 받았다. "위나라는 진나라가 제왕의 칭호를 쓰게 되면 어떤 해독이 있는가를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이 해독을 위나라에 알려 주면 반드시 조나라를 도울 것입니다." "선생, 저 하인들을 보십시오. 열 병의 하인이 한 사람의 주인을 따르는 것은 힘으로 이길 수 없어서가 아니고, 지혜가 미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주인이 무서워서입니다." 그러자 노중련이, "아아! 위나라는 진나라와 비교할 때 하인과 같다는 말씀이오?" 라고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라고 신원연이 대답했다. 그러자 노중련이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진나라 왕에게 위나라 왕을 삶아서 젓을 담그라고 해야겠소이다." 신원연은 불유쾌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의 말씀은 좀 지나치십니다. 선생이 무슨 방법으로 진나라 왕에게 위나라 왕을 삶아서 젓을 담그게끔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노중련이 말을 이었다.
천하 제1의 현사
"노여워하실 것이 아니라 들어 보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 말을 하려고 했었소. 옛날 구후, 악후, 서백창은 주왕을 섬기던 삼공의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오. 그런데 구후에게 미모의 딸이 있어 주왕에게 바쳤던 바, 주왕은 그 딸이 추녀라며 구후를 죽여 젓을 담갔었소. 악후가 이것을 보고 굳이 말리며 간하자, 주왕은 악후도 죽여서 건포를 만들었소. 문왕(서백창)은 이 말을 듣고 탄식했기 때문에 유리 지방에 백 일이나 유폐되었다가 죽을 뻔했었소. 위나라 왕은 지금 똑같은 왕의 처지이면서 무슨 까닭에 갑자기 젓이나 건포가 되려고 하는 것인가요? 지금 진나라가 천하의 대국이면 위나라 역시 대국이오. 똑같이 대국으로서 다같이 왕이라고 부르는데, 한 번 싸워서 진나라가 이겼다하여 진나라 왕을 제왕이라고 부른다면 삼진의 대신들을 종이나 첩만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오. 더구나 진나라의 소망이 이루어져서 제왕의 칭호를 받게 되면, 그 즉시로 제후의 대신들을 갈아치울 것이오. 진나라가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의 관직을 빼앗고 진나라에게 잘 보인 사람에게 관직을 줄 것이며, 미운 자의 관직도 빼앗아 아기는 자에게 줄 것이오. 또 자기들의 자녀 또는 천첩을 제후들에게 아내로 삼으라고 하여 위나라 궁중에도 들여 보낼 것인즉, 이렇게 되면 위나라 왕인들 어찌 평안하게 지낼 수 있겠소. 그리고 장군도 어찌 총애를 계속 받을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신원연은 일어나서 재배하고
"선생을 보통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이제야 선생께서 천하의 현사이심을 알았습니다. 저는 이곳을 떠나면 두 번 다시 진나라 왕을 제왕이라 말하지 않겠습니다." 라며 사과했다.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전해 듣자 두려워하여 50리쯤 군사를 후퇴시켰다. 또 때마침 신릉군이 조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서 진나라 군사를 공격했기 때문에, 진나라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철수하였다. 그 후 평원군은 노중련에게 벼슬을 내리려 했으나, 노중련은 거듭 사양하여 사자가 세 번씩이나 왕래했건만 끝내 받지 아니했다. 그래서 평원군은 잔치를 베풀고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서 노중련의 건강을 축하하면서 천금을 바쳤다. 그러자 노중련은 웃으며 말했다.
"천하의 선비된 자가 귀한 까닭은 남을 위하여 걱정을 덜어주고 어려움을 없애주며,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고도 보상을 받는 일이 없기 때문이오. 보상을 받는 것은 장사꾼이나 할 일이지,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노중련은 평원군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난 다음, 평생에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한 장의 편지로 성을 함락시키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 연나라의 장군이 제나라를 쳐서 요성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요성 사람 중 한 사람이 그 장군을 연나라 왕에게 모함했다. 이에 장군은 문책받을 것이 두려워 요성을 지키고 본국에 귀국하지 않았다. 그 뒤 제나라의 전단이 요성을 쳤는데, 1년여 동안 수많은 전사자만 내고 요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노중련이 나서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화살에 매달아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거역하여 불리한 처지에 빠지지 아니하며, 용감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고, 충성스런 사람은 제 몸만을 생각하여 임금을 저버리지 아니한다'란 말이 있습니다. 지금 장군은 모함을 당한 한때의 노여움 때문에 연나라 왕을 배신하고 임금 밑에 믿을 만한 신하가 없음을 알면서도 조국을 돌보지 않았고 있는데, 그래서는 충신이라 할 수 없소. 또 목숨을 걸고 요성을 함락시켰으면서도 제나라에 그 세력을 뻗치지 못하다면, 용사라고 할 수는 없소. 그리고 명성을 허물어뜨리게 되면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 것이니, 지혜로운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소. 이와 같은 사람은 세상 임금들이 신하로 삼지 아니하며, 유세객들도 입에 올리지 않는 법이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잃는 일이 없고, 용감한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법이오. 장군에게는 지금이야말로 생사영욕, 귀천존비의 분수령이니,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도록 하시오. 장군에게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여 세상의 속인들과 행동을 똑같이 하지 않도록 하시오. 지금 장군이 피폐한 요성의 백성을 가지고 제나라의 전군을 막는 것은 마치 묵적의 수비와 비슷하고, 인육을 먹고 인골로 불을 때면서도 병졸들이 두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은 손빈의 군사와 똑같아서 장군의 재능은 천하에 드높으오. 그러나 내가 장군을 위해 생각해 볼 때, 아직 거마와 무기가 완전 할 때 이대로 귀국하여 연나라 왕을 위하여 힘을 다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오. 거미와 무기를 온전히 갖추어서 연나라로 돌아가면 연나라 왕은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오. 병사들을 무사하게 데리고 돌아가면 백성들은 귀공을 부모와 같이 볼 것이며, 친구들은 팔을 걷어 붙이고 업적을 밝힐 것이오. 그래서 위로는 고립되어 있는 임금을 도와 뭇 신하를 제어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고 유세객을 도와 국정을 바르게 하며 풍속을 고쳐나가면 공명은 자연히 이룩될 것이오. 만약 귀국할 뜻이 없어 연나라와 세상을 버리고 등쪽의 제나라에서 지내려 한다면, 제나라는 장군에게 땅을 떼어 주고 봉지를 정해 줄 것이니, 자손은 제후가 자칭할 것이고 제나라와 함께 오래도록 존속 할 수 있을 것이오. 이것 또한 한 가지 계책이 될 것이오. 이 두 가지 계책은 이름을 드러내고 실속을 채우는 일이오. 바라건대 공은 스스로 깊이 생각하여 그 중 한 가지를 택하시오. 나는 '조그마한 절개를 꾀하는 사람은 큰 이름을 드러낼 수가 없고, 조그마한 부끄러움을 마다하는 사람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다'는 말을 들었소. 옛날 관중이 환공을 활로 쏘아서 띠의 정면에 붙어 있는 장식을 맞춘 일은 실로 반역 행위였고, 자기가 받들던 공자 규를 버리고 함께 죽지 아니했던 것은 비겁한 일이며, 잡힌 몸이 되어 수갑과 차꼬를 차게 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소. 대개 이러한 세 가지 행실이 있는 자는 세상의 군주가 신하로 삼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향리의 사람들도 사귀기를 싫어할 것이오. 그러나 당시에 만약 관중이 유폐되어 다시 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옥사해서 제나라에 돌아오지 못했더라면, 치욕에 가득찬 오명을 뒤집어 써서 노비들도 그 이름을 함께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을 것이오. 그러니 세속인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런데 관중은 옥중에 있는 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천하를 바로 잡지 못함을 부끄러워 했으며, 공자 구를 위해 죽지 않았음을 부끄럽게 생각지 아니하고 위세가 제후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소. 그러기에 관중은 세 가지 행실의 과오를 겸했으면서도, 환공을 도와서 오패의 으뜸으로 만들었고, 그 이름은 천하에 높아졌으며, 그 위광은 이웃 나라까지 비쳤던 것이오. 조말은 노나라의 장군이 되어 세 번 싸워서 세 번 패하고 땅을 잃기 5백 리에 이르렀었소. 당시에 만약 조말이 뒷일을 생각지 않고 결심한 대로 목을 찔러 죽었다면 패군지장이 되어 그 오명은 영원히 씻을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조말은 세 번 패한 것을 개의치 아니하고 노나라 임금과 계략을 꾸미어, 환공이 천하의 제후를 모아 회합할 때 단지 칼 한 자루를 손에 쥐고 단상에 올라가서 환공의 가슴을 겨누며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 한 마디 헛되이 하지 않고 끝내는 세 번 싸움에서 잃었던 치욕을 하루 아침에 회복했소. 이 두 사람이 조그마한 부끄러움을 모르고 조그마한 절개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아니오. 그들은 다만 자기 몸을 죽이고 집안과 자손의 뒤를 끊고 공명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취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러므로 울분의 원한을 버리고 일생 동안 공명을 세웠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버림으로써 여러 대에 걸친 공을 이룩했던 것이오. 바라건대 장군은 그 중 한 가지를 골라서 실행하시오."
연나라 장군은 노중련의 편지를 읽고 사흘 동안이나 울었다. 그리고 이모저모로 궁리하면서 자신의 나아갈 바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연나라로 돌아가자니 이미 왕과는 불화한 사이가 되었으므로 죽음을 당할 지도 모르겠고, 제나라에 항복을 하자니 이미 제나라 군사를 수 없이 죽였으므로 욕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탄식하며,
"남의 칼에 죽느니 차라리 내 칼로 죽자."고 하더니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성 안이 혼란해졌고 전단은 마침내 요성을 함락시켰다. 전단은 돌아와서 왕에게 노중련에 관한 일을 보고하고 벼슬을 주려고 했지만, 노중련은 몸을 피하여 바닷가에 숨어 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귀한 몸이 되어 주인에게 눌려 살기보다는, 오히려 빈천한 몸으로 세상을 가볍게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
|
|
글터 → 과학/예술/교육
|
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20장. 우연한 의학적 발명.발견.
콜레스테롤 수용체.
혈관에 콜레스테롤이 가라앉아서 생기는 심장 발작은 건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에게 일대 관심사이다. 달라스에 있는 텍사스대학 보건과학센터의 마이켈 S. 브라운 박사와 조셉 L. 골드스테인 박사는 혈액 중의 콜레스테롤을 감소시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콜레스테롤 수용체를 발견하여 1985년에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 연구는 우수하고 숙련된 연구에 의해 신중하게 계획된 기초과학적인 연구임에 틀림없지만, 또한 세렌디피티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브라운 박사는 회고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 우리는 잘못된 가설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가족성 과콜레스테롤 혈증'(FH)이라는 어린이의 혈액 중 콜레스테롤 농도가 매우 높아지는 병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어떤 효소가 비정상적으로 콜레스테롤을 과잉 생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효소에는 문제가 없으며, 실제는 세포가 유지방 단백질로부터 콜레스테롤을 받는다(그리고 혈액 속에서 그것을 운반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곳에 수용체와 같은 것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전세계 과학자들 중에서 단 한사람도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브라운과 골드스테인은 FH 환자의 피부 배양 세포를 이용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그런 환자의 간장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후, 덴버 의사로부터 FH환자의 이식 수술시 떼어낸 간장이 있다고 전화로 알려와서 연구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기회였으나, 피부세포를 이용한 연구가 이미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브라운은 그 환자로부터 간장 대신에 피부를 조금 얻었다. 이 피부 세포를 사용하여 연구한 결과 브라운과 골드스테인은 FH 환자에게 혈액 중의 콜레스테롤을 체내의 세포로 운반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 '저밀도 유지방 단백질'(LDL)을 돕는 기능적인 세포표면 수용체가 결여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이들 댈러스의 연구자들이 LDL수용체의 결여와 그 결과로 생기는 혈액 중의 LDL과잉이 심장 질환을 초래하는 이유를 해명하려던 1973년에 마침 일본에서는 한 수의사가 LDL수용체의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되는 세렌디피티적 발견을 했다. 코오베대학의 와타나베 요시오는 혈액 중 콜레스테롤 농도가 정상치의 10배나 높은 집토끼 한 마리를 반견했다. 와다나베는 이 토끼를 잘 번식시켜 혈액 중 높은 콜레스테롤 농도의 혈통을 지닌 집토끼들을 생산하였으나, 이들 집토끼는 모두 인간과 마찬가지로 기능적인 LDL수용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FH증세는 관상 동맥성 심장병 중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도이며, 아직까지 알 수 없는 것은 FH증세도 아니고 또 대량의 콜레스테롤을 섭취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높은 농도의 콜레스테롤치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이러한 장애를 갖기 쉽다는 사실에는 유전적 인자가 관계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인간이나 집토끼의 세포 수용체에 관한 연구에 의해서 이 문제의 해답을 지금까지 어느 정도 얻었으며 장래의 전망은 더욱 밝다. 원래 혈액 중의 높은 콜레스테롤 농도는 두 개의 요인에서 유래되고 있는데 그 하나는 간장의 콜레스테롤 과잉생산이며 또 하나는 간장과 부신(콜레스테롤로부터 매우 중요한 스테로이드 호르몬을 만든다)의 콜레스테롤의 소비 부족인 것이다. 다행히도 현재는 이 불균형을 시정하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콜레스티라민이라는 약이 LDL수용체의 수를 늘린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간장에서의 콜레스테롤 합성을 억제하는 새로운 약도 곰팡이로부터 추출되었다. 후자는 메비놀린(또는 로바스타틴)이라고 하며 상쿄의 엔도 아끼라 제약회사(현재 동경 농공대학)와 머크와 사프 그리고 돔 사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발견되었다. 머크 사는 이것을 메바코르(Mevacor)라고 이름지어 판매하였으며, 상쿄에서는 이보다 전에 개발되었던 유연물질인 프라바스타틴을 상품명 메바로틴으로 판매하고 있다. 브라운과 골드스테인은 위험할 정도로 높은 콜레스테롤 농도를 가진 사람들이 농도를 내리기 위하여 두 약을 동시에 사용하는 법을 시도해 봄직도 하다고 제안하였다. |
|
|
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이항복에게 귀신으로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한 복성군
복성군 미(?-1533)는 중종의 아들인데, 경빈 박씨의 소생이다. 중종 27년(1532)에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 근처에 쥐를 불태우고 흉악한 물건을 묻어 저주하는 변고가 있고 또 세자(인종)의 가상을 만들어서 나무패를 걸고 거기에 부도덕한 말을 써 놓은 사건이 있었다. 의심할 만한 사람을 잡아 국문할 적에, 경빈이 한 일이라 지목되어, 경빈을 폐하고 서인으로 삼고 모자를 함께 국문 하였는데, 얼마 뒤에 모두 사사되었다. 백사 이항복이 소싯적에 친구의 집에 가서 학업을 닦고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젊은 여자가 날마다 자기가 묵고 있는 집에 출입하며, 자기를 쳐다보곤 했다. 하루는 공부하던 친구들이 모두 외출 하였는데, 때마침 큰비가 내렸다. 이항복이 혼자 앉아 있는데, 그 여자가 또 찾아와서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항복이 그를 불러 앞에 나오게 하여 물었다.
"네가 날마다 와서 나만 유심히 쳐다보는데, 무슨 까닭인가?" 그 여인이 꿇어앉아서 말하였다. "저는 본래 무당입니다. 저에게 의지한 신이 있는데 낭군(이항복의 지칭)을 뵙고자 하므로, 먼저 허락 얻기를 바랐으나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와 함께 오너라" "감히 낮에는 뵐 수가 없습니다" 밤이 되어 비는 그치고 달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항복이 등불을 켜 놓고 기다렸더니 여인이 와서 말하였다. "귀신이 왔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소년의 외모는 옥설처럼 깨끗하고, 미목이 그림 같았으며, 남색 도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항복이 관복을 입고 나가 맞이하여 읍을 하고 인도해 들어와서 좌정한 뒤에 물었다. "저승과 이승은 길이 다른데, 어찌하여 서로 만나려 하오?" 이 말을 듣자 귀신이 크게 탄식하였다. "나는 왕자 복성군입니다. 참혹한 화를 만나 집이 멸망하고 구천에서 원통함을 삭이지 못해 인간 세상의 공의가 어떠한지 들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기백이 나약하여귀신인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공은 비록 나이가 젊으나 뒷날 반드시 크게 귀히 될 것이요, 기백이 능히 서로 접근할 수 있으며, 그 말이 또한 믿을 수 있으므로 한마디 가르침의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원통함을 푼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듣지 못하였습니까?" "제사의 고함으로 인하여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히 친족을 친애하는 은의에서 나왔을 뿐입니다. 듣고 싶은 것은 공의입니다" 이항복이, 세상 사람들이 그의 지극히 원통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갖추어 말하니, 귀신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였다. "참으로 그렇다면 비록 아홉 번 죽음을 겪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복성군이 무당을 시켜 과일 몇 가지로 예를 올리게 한 다음, 하직하고 떠났다. 이항복이 나가서 그를 전송하였는데 몇 걸음을 가다가 곧 사라졌다. 이항복이 허망한 일에 가깝다 하여 종신토록 말하지 않았는데, 만년에 북청으로 유배 갔을 적에 비로소 동악 이안눌에게 이 말을 전하였다.
|
|
|
글터 → 이글저글
|
학문에 왕도가 없다
기하학은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강이 해마다 범람하여 그후에 전답을 측량하고 경계를 정할 필요에서 생겨났다고 하는데 이것을 학문적 체계로 정리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유클리드'였다. 그의 업적은 13권으로 된 '기하학 원본'에 담겨져 있는데 이는 당시의 권위있는 교과서였다. '유클리드'는 당시의 이집트 왕 '프토레마이오스' 1세에 초빙되어 기하학을 강의했는데 왕은 그 방대한 내용에 질려서 "좀 더 손쉽게 배울 방법은 없겠느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유클리드'는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권위를 말해주는 에피소드로 여기서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나 오늘날 완벽한 교육시설 속에서 유능한 교사로부터 받은 교육과 불충분한 시설 속에서 무능한 교사로부터 받는 교육은 그 효과에 있어 현저한 차이가 있으며 그런 뜻에서는 '학문에는 왕도가 있다'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
|
|
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
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열네번째 이야기 억울한 누명
한남자가 아무 재산도 없이 집 한채만 덩그라니 아들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막노동을 해서라도 먹고 살려고 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 배를 곯는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집을 파느니, 무슨 일이 있어도 꾹 참고 견디려 했다. 그런데 한도 끝도 없이 욕심이 많은 옆집의 부자가 그 집을 탐내기 시작했다. 그는 청년이 집을 팔게 만드려고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청년은 옆집 남자가 얼마나 음흉하고 교활한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속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자가 그에게 다가가 달콤한 말로 속삭였다.
"자네가 집을 팔지 않는다고 원망할 노릇은 아니지. 그러면 그 집의 일부분이라도 세를 놓을 수 없겠나? 거기에 올리브 기름 열 통을 갖다놓을 테니 자네가 그걸 보관해주게나. 수고비와 방세도 톡톡히 쳐주겠네. 그럼 자네한테 득이 되면 되었지 해는 안 될 걸세."
이 말에 솔깃해진 청년이 자기 집의 방 한 칸을 세주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속임수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청년은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에 부자는 기름이 잔뜩 든 다섯 개의 통을 방에 들여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통에는 기름을 반만 채우게 했다. 청년이 돌아오자 부자는 그에게 방 열쇠와 기름통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나는 자네만 믿고 기름을 맡겨놓는거야. 자네가 잘 지켜야 해."
청년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보관하게 될 기름 열 통이 다 꽉 차 있는 걸로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기름값이 많이 오르게 되자 부자는 기름을 팔아야겠다고 청년에게 말했다. 청년은 부자와 기름을 사러 온 상인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다섯 통에만 기름이 가득 들어 있고, 나머지 다섯 통에는 반만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속이 시커먼 부자가 이걸 보고는 청년에게 말했다.
"기름 좀 보관해달라고 그랬더니 자네가 나를 속인게로군. 이럴 수가 있나? 당장 모자라는 기름 양을 채워놓도록 하게."
청년은 자기가 속인 게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결국 죄인이 되어 재판관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청년은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제가 기름 열 통을 보관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름을 빼돌리지는 않았어요. 너무 억울합니다."
그는 재판관에게 자기의 무죄를 입증할 시간을 달라고 청했다. 단 하루의 여유를 얻은 청년은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해주기로 소문난 철학자를 찾아갔다. 청년은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고는 겸손하게 그의 충고와 도움을 청했다. 청년이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철학자는 그를 가엾게 여겼다.
"여보게, 마음을 단단히 먹게나. 내가 자네를 도와주겠네. 거짓이 진실을 이겨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다음날 청년은 철학자와 함께 재판정에 나갔다. 그날은 마침 의회가 열린 날이라 왕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양쪽의 주장을 다 들은 왕이 철학자에게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이 사건을 맡기려 하네. 자네 같으면 어떤 기준으로 이 사건을 공정하게 판결하겠나?" 철학자가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 부자는 평판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할 사람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 청년도 지금까지 죄를 지은 적도 없고, 못 믿을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선 기름이 가득 들어 있는 다섯 통과 그 안에 들어 있는 기름 찌꺼기의 양을 한 통씩 재보도록 해야 합니다. 기름이 반만 들어있는 다섯 개의 통도 같은 방법으로 재봐야 합니다. 찌꺼기의 양이 똑같다면 이 청년이 기름을 훔친 게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기름이 반밖에 안 들어 있는 기름통의 찌꺼기가 기름으로 가득 찬 통에서 나온 찌꺼기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면 이 청년은 무죄로 석방되어야 합니다."
철학자의 말대로 기름 찌꺼기를 재어보자 기름이 가득 들어 있는 통의 기름 찌꺼기가 반만 들어 있는 기름통 찌꺼기의 두 배임이 밝혀졌다. 결국 청년은 무죄로 판명되었고, 아버지가 물려준 자기의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 남의 것을 탐내 잔꾀를 부려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그 속성을 간파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
|
|
글터 → 국사
|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4. 외래사상에 흔들렸던 세 나라 (전통사상을 버리고 수입사상에 의존한 삼국의 집권층)
외래문화의 수입
서양 문명이 해일처럼 밀려올 때, 아시아인들은 깊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들에게는 분명 자기 고유의 문화가 있었지만, 새로 밀려온 서양문명은 그 고유 문화를 파괴하려 들었다. 그렇다고 서양 문명을 배척만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의 문화를 바탕으로 서양 문명의 실용적인 측면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즉 중국인들은 "중국적인 뿌리에 서양의 쓰임새를 결합하자"고 했고, 일본인들은 "일본의 혼과 서양의 재능을 결합시키자"고 했으며, 조선인들은 "동양적 원리에 서양문화의 기능을 결합시키자"고 주장했다. 이런 태도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때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루한 삼국시대에서 각 나라가 유학과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보여준 입장도 아마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불교를 수입할 때, 그런 특징은 더욱 두드러졌을 것이다. 유학에 비해 불교는 전통문화와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은 기마종족의 한 갈래인 은나라 유민들이 주도한 사상이었지만, 불교의 경우 그것을 탄생시킨 문화적 배경은 우리 겨레의 것과 상당히 달랐다. 물론 유학도 중국 한족이 세운 주나라의 문화를 배경으로 발전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기마종족 고유의 문화적 특징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즉 유학은 여전히 기마종족 문화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으며, 기마종족 문화의 제사장적 측면을 줄이고 지식인적 기능을 늘린 것이었다. 우리 겨레는 유학은 전통문화와 특별히 이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한자도 원래부터 동아시아의 공용어였다. 따라서 우리 겨레는 외래문화라는 의식조차 없이 유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불교는 유학과 다른 조건에서 우리 겨레와 만나게 되었다. 설령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불교의 창시자들도 우리 겨레와 가까운 혈연관계를 맺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불교의 사상적 내용성은 기마종족의 문화적 취향과 크게 다른 것이었고, 그것을 표현하는 문자 또한 색다른 것이었다. 비록 중국이 먼저 불교를 받아들이고 그 경전을 한자로 옮겼으며, 삼국 각 나라는 한자로 된 경전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그것이 문화적 이질감을 줄이는 데 근본적인 기여를 하지는 못했다. 코끼리를 만져본 장님들이 그것을 일러 어떤 이는 큰 밧줄이라 하고 다른 이는 큰 기둥이라 하며 또 어떤 이는 큰 부채 같다고 했듯이,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다루는 큰 사상은 현상적으로 다르게 표현될 뿐 근본적으로 일맥상통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것이 있다면 문화적 배경에 따라 표현의 방법과 양식 및 그 깊이가 달라, 그 깊은 곳에 이르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그 차이를 둘러싸고 부질없는 싸움을 벌이기까지 한다. 기마종족의 전통문화와 불교사상도 어쩌면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의 공인과 도입
한반도에서 불교가 처음 공인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 년인 372년이었다.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를 보내어 불상과 경문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이보다 12 년 뒤인 침류왕 원년에는 백제에서도 불교가 공인되었다. 동진으로부터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들어오자, 임금이 그를 궁궐 안에 모시고 성심껏 경배하였으며, 마침내 불교를 인정했던 것이다. 신라에서는 그 뒤 150여 년이나 지나서야 불교가 공인되었다. 법흥왕 14 년인 527 년 이차돈이 순교를 함으로써 비로소 불교가 국가적인 종교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삼국은 모두 공인 이전에 이미 불교를 알고 있었다. 366 년에 죽은 진나라의 승려 지둔과 고구려의 도인이 편지를 주고받은 사실이 "양고승전"이나 "해동고승전"에 함께 기록되어 있으므로, 고구려에서는 공인수십 년 전에 이미 불교가 전파되고 있었던 셈이다. 백제나 신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아도와 같은 인물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이처럼 불교는 공인되기 훨씬 이전에 삼국에 전파되었지만, 각 나라의 사정 때문에 공인이 되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백제나 고구려의 경우 침류왕과 소수림왕 초기에 각각 불교가 공인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새로운 임금이 등장하면서 나름대로 혁신적인 정치를 하기 위해 불교를 공인하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경우에는 불교가 공인되는 데 보다 어려운 여건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가 삼국에 전파됨으로써 그 시대의 지성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고, 또 외래적인 신앙인 불교의 사고체계가 기마종족의 사고체계와 어떻게 갈등했으며, 마침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기마종족 고유의 사상이 가지는 특성을 보여주는 실마리이기도 하며, 우리 문화사에서 거대한 흐름을 보여주는 갈랫길이기도 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