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279 호
단기 4340. 10. 17 (음력 9. 7)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발행지가 길어질 경우 하단부분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문학소식
|
|
|
글터 → 명언 / 격언
|
사랑처럼 외면과 무관심을 제외한 어떠한 공격에도살아 남을 수 있다. / P.S.
|
|
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마음 가운데에는 애초에 두 마음이 없었다. 다만 마음이 생기는 곳에 두 가닥이 있기 때문에 도덕심을 나타내는 것이 기이지만 생명이 아니면 도덕심이 생겨나지 못하고, 인심에 근원 되는 것도 이이지만 겉모양과 기운이 아니면 인심이 생겨나지 못한다. 도덕심은 순수한 하늘 뜻이므로 선은 있되 악이 없으며, 인심을 천리도 있고 욕심도 있으므로 선도 있고 악도 있다. 예를 들면, 마땅히 먹을 경우에는 먹고, 입을 경우에 입는 것은 공자나 부처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은 천리요, 오직 먹고 색정의 생각으로만 흘러 악이 된다면 이것은 욕심이다. |
|
|
글터 → 철학 / 사상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9. 돈점 논쟁
4. 지눌 사상의 체계와 돈오돈수적 점수설
"선문정로"에 나타난 문제를 하나 더 지적한다면, 지눌이 만년에 돈오점수를 버리고 경절문(간화선을 말함)을 열어 돈오돈수를 설하였다는 주장이다. 요컨대 미숙했던 돈오돈수설을 버리고 만년에 돈오돈수설을 취하게 되는 사상적 전환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눌의 체계 문제로서 "절요" 가운데 있는 '경절문서설'에 관한 해석에서 비롯된다. 먼저 "선문정로"에서는 이 부분이 돈오점수보다 경절문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눌이 만년에 돈오돈수로 사상적 전환을 했다는 근거로 삼는다. 여기에 대해 김호성 교수는 "선문정로"가 문장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김호성 교수는 지눌이 결코 사상적 전환을 한 것도 아니고, 돈오점수설을 버린 것도 아니라고 하며 경절문은 지눌 사상 체계에서 보완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호성 교수가 이해하고 있는 지눌 사상 체계는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를 그 내용으로 하는 성적등지문이 중심이 되고, 원돈신해문과 경절문은 성적등지문의 보완으로서 정혜쌍수의 전개와 확산을 위한 것이라고 본다. 지눌의 성적등지문은 육조가 말한 자성정혜 사상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원돈신해문은 화엄의 사사무애관과 같으며, 경절문은 임제의 간화선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지눌이 말한 삼종문은 이와 같은 관계이므로 성적등지문에서 원돈신해문으로, 원돈신해문에서 경절문으로 계차적인 발전을 한 것으로 보는 "선문정로"의 입장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한편 박성배 교수는 성철 스님의 해석도 잘못되었지만 그것을 비판하는 김호성 교수의 해석도 매우 잘못된 것이라 다시 비판한다. 박성배 교수에 이하면 '경절문서설'은 그 앞부분까지 돈오점수설을 이야기해 오다가 여기에서부터 방향을 바꾸어 경절문을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앞뒤를 회통시키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무엇의 회통인가? 돈오점수와 간화선의 회통이요, 그의 표현으로 간변 사상과 전신 사상의 회통을 말한다. 앞의 것은 언설의 차원이고 위의 것은 친증의 차원이다. 요컨대 경론의 언설로 얻은 지해적인 깨달음을 바탕으로 닦아 나아가다가 마침내 온몸으로 부딪쳐 여전히 남아 있는 지해적인 속박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변 사상과 전신 사상은 성철 스님의 해석처럼 계차적인 발전 관계도 아니고, 김호성 교수의 해석처럼 계층적인 주종 관계도 아니라고 한다. 아마 일체적인 상보 관계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박성배 교수는 왜 돈오돈수적 점수설을 주장하며 그 취지는 무엇인가? 우선 돈오점수의 돈오와 돈오돈수의 돈오의 차이를 먼저 밝혀야만 그의 입장이 이해된다. 이것을 위해 그는 깨침 그 자체와 깨침이라는 사건을 구별한다. 깨침의 내용은 리이지만, 미혹한 현실적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일 때 그것은 사인 것이다. 그런데 리로서의 깨침과 사로서의 깨침은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그 사는 필연적으로 닦음과 관계된다. 그래서 이 닦음의 구조는 매우 미묘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깨침을 사로 다루면서 리적 깨침에 얼마나 충실한가를 검토하는 일이라 하였다. 그는 돈오점수의 돈오가 보편적 본질로서의 깨침이라면, 돈오돈수의 돈오는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깨침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전자가 추구하는 것이 깨침과 닦음의 관계를 밝히는 것인 반면, 후자가 겨냥하는 것은 어떤 수행자의 깨침이 진짜이냐 가짜이냐를 밝히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돈오점수는 깨침이라는 사건이 인간의 일로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일반적 과정을 예상한 수행 이론이라면, 돈오돈수는 한 인간에게 일어나는 깨침의 진위를 어떻게 점검해야 하는가 하는 수도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5. 논쟁의 의의와 과제
성철 스님의 "선문정로"의 논지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오늘날 한국 불교인들에게 스스로를 반성하고 점검하는 기준을 뚜렷이 제시하면서 앞으로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를 안겨 주었다는 점에서 한국 선 사상의 역사에서 길이 기억될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또 "선문정로"로부터 시작된 돈점 논쟁도 현시점에서 한국 불교의 과제를 그 원점에서부터 다시 쌓아 가려는 진지하고도 생기 있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앞으로 이 논의는 더욱 활성화되어 한국 불교 중흥의 초석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국의 역사 발전에도 기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돈점 논쟁의 양상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우려도 여전히 남아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오를 막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체의 교단적 권위나 종파적 선입견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몇 가지의 과제를 진솔하게 받아들이고 풀어 나갈 때, 돈점 논쟁의 결실은 기대 이상으로 맺어질 것이다.
첫째, 이 논쟁의 기본 목적을 늘 기억해야 할 일이다. 즉 돈오점수가 옳으냐 돈오돈수가 옳으냐의 판가름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 실천에 종속되어야 한다. 지눌의 돈오점수설이나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이 의미있게 되는 것은 철저한 자신의 체험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논쟁에서는 가능한 한 수행적 체험이 밑받침이 되거나 아니면 그것을 충분히 예상하는 논의가 되어야 불교 본래의 목적에 기여할 것이다. 둘째, 수도의 길을 걷는 스님들도 자신들의 수행 체험을 자기 점검의 일환으로 혹은 대중 교화의 차원에서 진솔하게 고백한다는 태도로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 선종에서 언설을 경계하는 것은 언설에 빠지기 쉬운 사람의 마음을 문제삼은 것이지 언설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다. 또 언설은 부정한다고 부정되지도 않는다. 수도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경계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수도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언설에 개입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수도하는 마음을 얼마나 튼튼하게 가지느냐에 있다. 셋째, 지금 우리의 현실에 맞는 수행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지눌의 돈오점수설도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도 결코 초시대적 보편 이론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수행론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은 시대적 과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성의를 다해 해결하고자 하는 그들의 보리심과 자비심일 것이다. 산업 사회 구조를 도외시하고서 그들을 구제할 수행론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지눌이 살았던 불교 사회도 아니며 성철 스님이 수도했던 수도원 교육을 일반화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이 시대의 요구를 정확히 읽고 불교가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미리 묻지 않고 돈점 논쟁을 대하면 그야말로 논쟁 자체에 매몰되고 말 것이다. 넷째, 기왕 거론된 돈점 논쟁을 불교 중흥의 발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특히 박성배 교수의 돈오돈수적 점수설은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절충설이거나 어설픈 회통설이 아니다. 양자의 장점과 단점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그리고 매우 신중하게 취사선택한 현수준의 결론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선언적 의미로서 혹은 진지한 수도적 태도로서 수용할 수는 있어도 그 내용과 체계를 드러내지 못하는 결점이 있다. 또 그 이론에 걸맞는 숱한 수행 체험이 밑받침되고 있지도 못하다. 이러한 것들은 그 혼자만의 과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 더 읽어 보아야 할 책들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대정 7년) 성철, "선문정로" (불광출판사, 1981) 보조사상연구원, "보조전서" (불일출판사, 1989) 유전성산, "선의 사상과 역사", 안영길 외 옮김 (민족사, 1989) 성철, "한국불교의 법맥" (장경각, 증보 1990) 성철, "돈황본육조단경" (장경각, 1990) 박성배 외, "깨달음, 돈오점수인가 돈오돈수인가" (민족사, 1992)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단수 정리
본뜻 : 계산 끝에 끝수나 우수리를 정리해서 끝수를 일정하게 하는 것을 '단수 정리'라고 한다.
바뀐 뜻 : 보통은 끝에 세 자리 수 정도를 반올림 하거나 아예 깎아 내리거나 해서 끝수가 자투리 없이 말끔하게 정리되게끔 하는 것이다. 흔히 돈 계산할 때 서로간의 편리를 위해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끝수 정리' '우수리 정리' 등의 우리말로 바꿔 쓰는 것이 좋겠다.
"보기글" -모든 청구서는 단수 정리를 해서 보내도록 하세요(우수리 정리를 해서) -이번에 조사한 통계자료도 단수 정리를 좀 하지 그래?(끝수 정리를 좀 하지)
청소년의 새말
20여 년 전만 해도 유행어를 만들어 내는 이들은 주로 대학생들이었다. ‘바보’(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 덩어리) 등의 재미있는 말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유행했다. 인터넷이 의사소통과 문화 확산의 주된 매체로 자리잡으면서 새말을 만들어 쓰는 이들의 나이대가 낮아지고 전파 속도도 빨라졌다. 이들이 새말을 만들어 쓰는 이유로는, 크게 시간 제약, 공간 제약, 집단의식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빨리 글을 쓰려고 이어 적고(머시따), 줄여 적고(셤), 단어나 음절을 숫자로 대신한다(쪽8리다). 짧은 글에 감정을 나타내고자 자음·모음 등을 교체하고(그리구), 문장부호를 겹쳐 쓰며(!!!), 그림말을 사용한다(^^;). 이런 말들은 또래끼리 소통하는 곁말(은어)로 자리잡았다.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문화가 다른 것이 자연스러운데도 새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소통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직접적인 대화보다는 인터넷이나 이동통신을 통한 의사소통을 선호하고, 기성세대는 이들과 대화할 여유가 없으므로 세대 단절이 깊어진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새말 만들기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발한 새말을 통해 청소년들의 창의적인 사고를 엿볼 수 있다. 무조건 쓰지 말라고 청소년들을 다그칠 것이 아니라 학습 공간, 공적인 장소, 어른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바른 말을 쓸 수 있는 분별력을 기르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
|
|
글터 → 세계사
|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4. 장한 그 이름을 어찌 빛내지 않으리오(섭정)
섭정은 전국 시대 한나라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집안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어머니, 누나와 함께 몸을 피해 백정 노릇을 하며 살았다. 한편 당시에 엄중자라는 대신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재상인 겹루와 사이가 좋지 않아 항상 불안해 하였다. 그리고는 몇 번이나 그에게 죽음을 당할 뻔했다. 그러자 엄중자는 그 원수를 갚기 위해 협객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어느 동네에 가자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 동네에 섭정이라는 용감한 선비가 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몸을 피해 백정일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사람이 매우 현명하고 의리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엄중자는 그의 집으로 찾아가 인사하고, 그 후에도 몇 번 찾아가 사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중자는 섭정을 찾아가 술자리를 만들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그는 황금 백 냥을 받들고 섭정의 어머니 앞으로 나아가 오래 사시길 빌었다. 그러자 섭정은 너무나 많은 선물에 깜짝 놀라면서 거듭 사양했다.
"저는 집이 가난해 객지로 떠돌면서 백정 노릇을 합니다만, 아침 저녁으로 부드러운 음식을 얻어 늙으신 어머님을 봉양하고 있습니다. 어머님께 봉양할 음식은 넉넉히 마련했으니, 당신께서 주시는 선물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엄중자가 주위 사람들을 잠시 옆방으로 보낸 다음 이렇게 말했다.
"제게 피 맺힌 원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수를 갚아 줄 사람을 찾아 천하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이 곳에 와서 당신의 용기가 매우 높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드린 것은 단지 어머니 봉양에 보태 쓰시라는 뜻에 불과합니다. 서로 친교를 더하자는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러자 섭정은, "제가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면서 시장바닥에서 백정 노릇이나 하는 까닭은 오직 연로하신 어머님을 봉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님이 계시니 아직 제 몸을 남에게 허락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엄중자가 한사코 주려는 선물을 끝내 받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섭정의 어머니가 죽었다. 섭정은 정례를 마치고 상복도 벗은 후 이렇게 탄식하는 것이었다.
"아! 나는 시장 바닥에서 칼을 휘둘러 개, 돼지나 잡는 백정일 뿐이다. 그런데 엄중자 그 분은 높은 신분으로 천리길도 마다 않고 찾아와 나를 만났다. 나는 아무것도 그에게 해준 일이 없는데도, 그는 황금 백 냥을 받들어 어머님의 장수를 빌었다. 비록 내가 받지는 않았지만, 그는 진정으로 나를 알아준 분이다. 어찌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전에 그 분이 부탁했을 때는 나는 어머님이 계셨기 때문에 사양했었다. 이제 어머님께서 천수를 다 누리고 돌아가셨으니, 나는 지금부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이 목숨 아끼지 않겠다." 그리고는 곧장 길을 떠나 엄중자를 만났다. "전에 제가 당신의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은 어머님이 살아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머님께서 천수를 다 누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당신께서 원수를 갚으려는 자는 누구입니까? 제게 알려 주십시오." 이에 엄중자가 자세히 대답했다. "저의 원수는 이 나라의 재상인 겹루입니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사람을 시켜 그 자를 죽이려 했으나 워낙 경비가 심해 매번 실패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다행히도 나를 버리지 않았으니, 당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수레와 말, 그리고 장정들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섭정이 말했다. "이런 일에는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실패합니다. 또 사람이 많으면 반드시 생포되는 경우도 있어 비밀이 누설되고 맙니다."
그러면서 엄중자가 주는 모든 것을 사양하고 혼자 떠났다. 섭정은 칼을 지팡이 삼아 겹루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의 집에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섭정은 단숨에 담을 뛰어 넘어 집에 있던 겹루를 단칼에 찔러 죽였다. 그러자 주위에서 호위병들이 몰려 들었는데, 섭정은 큰 소리로 꾸짖으며 수십 명이나 쳐죽였다. 이렇게 되니 나라에서도 이 시체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체를 시장 바닥에 가져다 놓고는 현상금까지 걸었다.
"재상 겹루를 죽인 이 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에겐 천 금을 주겠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천리길을 달려와 나란히 이름을 빛내다
한편 섭정의 누나인 섭영이 이 소문을 들었다. 예전부터 동생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섭영은 '동생이 분명하다.' 생각하고는 그 즉시 길을 떠났다. 섭영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시체가 있는 시장 거리로 갔다. 가서보니 과연 동생 섭정이었다. 섭영은 동생의 시체 위에 엎드려 슬픔에 겨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이 사람은 내 동생 섭정입니다." 그러자 모여든 사람들이 말했다. "이 사람은 재상을 죽인 자로써 나라에서 천 금의 현상금을 거고 그 이름을 알려 하고 있소. 부인은 그 죄가 얼마나 큰 지 알면서 이자의 이름을 밝히는 거요?" 이에 섭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원래 섭정이 온갖 모욕을 무릅쓰고 백정 노릇을 하며 산 것은 늙으신 어머님이 살아 계시고, 내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엄중자는 동생을 알아보고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건만 개의치 않고 사귀었습니다. 선비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법입니다. 이제 동생은 누나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자기 몸을 몰라보게 해쳐서 내가 연루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어찌 내 한 몸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동생의 의로운 이름을 그냥 없어지도록 하겠습니까!"
이 말에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 세 번, 마침내 섭정의 곁에서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섭정은 의로운 사람인데, 그 누나 섭영 또한 장한 여인이다. 만약 섭정이 자기 누나가 반드시 천 리 험한 길을 달려와서 이름을 나란히 하여 누나와 동생이 시장 바닥에서 함께 죽게 될 줄 알았다면, 그는 엄중자의 부탁을 들어 주지 못했을 것이다. 엄중자 또한 인물을 잘 알아보고 뛰어난 사람을 얻었다."
|
|
|
글터 → 과학/예술/교육
|
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20장. 우연한 의학적 발명.발견.
빛과 신생아 황달.
닐스 핀젠은 '강력한 광선에 의한 치료, 특히 심상성 낭창(피부 결핵의 일종)의 치료법에 관한 공헌'이 인정되어 190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뼈의 병인 구루병 예방에서 햇빛의 중요성은 1919년부터 알려져 왔다. 빛은 체내의 비타민D 전구체를 활성 비타민으로 바꾸고, 이것이 뼈의 석회화를 조절하는 것이다. 최근에도 몇 가지 빛의 유익한 효과가 제기되었으며, 그 중에는 우연에 의해 발견된 것도 있다. 그리고 자연광이건 인조광이건 제기된 빛의 효능 중의 몇 가지는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중 의사들이 인정하고 있으며, 이용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신생아 황달에 대한 햇빛의 효과이다. 이 발견은 세렌디피티였다. 갓 태어난 신생아의 피부가 노래지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것을 신생아 황달이라고 한다. 노랗게 되는 원인은 다른 황달과 같이 담즙 색소인 빌리루빈(bilirubin)이 비정상적으로 고농도로 생성되어 피부나 눈의 흰자(안구 결막)부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빌리루빈은 헤모글로빈의 분해 생성물이며, 그것이 비정상으로 고농도로 존재한다는 것은 간장이나 비장, 또는 담낭의 기능이 좋지 않다는 위험 신호인 것이다. 신생아 황달인 경우, 신생아의 미성숙한 간장이 빌리루빈을 제거하는 속도가 늦기 때문에 뇌가 손상되고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1950년대 말, 영국의 어느 병원에서 눈치가 빠른 간호원은 햇빛이 드는 육아실의 창가에 눕혀 놓았던 신생아가 황달기운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간호원의 이러한 관찰의 보고를 받은 후에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 유아의 전신 피부에 자외선 성분의 일광욕을 하면 빌리루빈을 배설 가능한 형태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아냈다. 신생아의 자외선 치료는 현재 황달을 예방하고 또는 치료하기 위한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
|
|
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남곤을 구부러진 매화 등걸에 빗대어 시를 지은 남추
남추의 본관은 고성이고, 자는 계응, 호는 서계, 또는 선은이다. 중종 9년(151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전한을 지냈다. 문장에 능하고 풍채가 선풍도골처럼 뛰어났다. '촉영부'를 지어 온 세상에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남곤에게 미움을 받아 영광의 삼계로 물러가 살았다. 그때 나이 28세 였다. 남곤이 남추를 가까이 할 생각으로 그를 초청하였다.
"내가 듣건대, 그대의 문장이 남보다 뛰어나다 하니 시 한 수를 보여 주게" 남곤이 화분에 심은 매화를 가리키며 시를 읊으라고 하자 남추가 즉시 응하여 시를 지었다.
한 그루 분에 심은 줄기 약하지만 천추에 눈처럼 깨끗한 자태 씩씩하구나 구부러진 네 몸을 뉘 능히 펴 주어 높이 낀 저녁 구름 곧바로 헤치랴
남곤이 그 시의 뜻이 자기를 풍자함을 알고 크게 노하여 드디어 그를 끊어 버렸다. 남추의 누이가 또한 시에 능하였는데 한번은 남추가 그에게 눈을 소재로 시를 짓게 하되 녹자와 홍자를 운으로 부르니, 그 누이가 즉시 응하였다.
땅에 떨어지니 소리는 누에가 푸른 뽕잎 먹는 것처럼 바스락거리고 공중에 흩날리니 모양은 나비가 붉은 꽃을 엿보는 것 같다
남추가 소싯적에 학업을 닦지 않고도 세상일에 능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글읽기를 권하면, 남추는 번번이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글을 읽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루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가 조금 뒤에 안개가 갠 뒤에 보니 남추가 점잖은 어른들과 함께 바위 위에 앉아 강독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여겼다. 한번은 그가 손수 편지를 써서 집 하인에게 주며 말하였다.
"지리산 청학동에 가면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을 터이니, 너는 모름지기 회답을 받아 오너라" 하인이 남추의 말대로 그곳에 가서 보니 과연 화각 두세 칸이 바위 골짜기에 가로 걸쳐 있는데 깨끗하고 고운 것이 비할 데가 없고, 한 도인이 노승과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하인이 그 편지를 올리니 도인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이미 네가 올 것을 알았다" 바둑을 다 두고 나자, 편지 한 통과 청옥으로 만든 바둑알을 주어 보냈다. 하인이 청학동에 올 때는 9월 무렵이어서 낙엽이 길에 흩날리고 가는 눈발이 공중에 뿌렸는데, 하직하고 돌아올 때에 배가 고픈 것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신발 밑에는 묵은 풀이 싹트려 하는 것이 보여 의아하게 여겼다. 청학동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따뜻하고 초목이 싱그럽게 자라나서곧 인간 세상의 3월이었다. 남추가 죽은 뒤에는 바둑알조차 잃어버렸다 한다.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도인은 바로 최고운이고 노승은 바로 금단선사이며 남추 또한 신선 중의 한 사람이다"
|
|
|
글터 → 이글저글
|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다
대학의 학생회장을 선출하는데 돈이 든다고 한다. 술을 받아주고 돈을 집어주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두들겨 패고, 부정 선거를 규탄하여 대모를 벌인 학생들이 이 모양이니 한심한 노릇이다. 아낙네들까지도 술에 곤드레가 되어 길가에 쓰러지고 마타도아다 사꾸라다하여 흑색 선전이 난무하고 그래도 피아노 표니하는 것은 사라질 줄 모르고. 이런 판국에 아무리 한 표의 권리를 호소하고 공명선거를 외쳐도 그야말로 말짱 헛것이다. 피리를 불고 징을 쳐도 귀 기울일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일찍이 예수님은 우매한 백성들이 예언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려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여 말씀하셨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않았다." (마태복음 11장 16절)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옳은 소리를 받아들이기에 인색하기 마련인 모양이다.
|
|
|
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
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열세번째 이야기 진정한 친구
아라비아의 한 현자가 아들에게 말했다. "개미가 너보다 더 현명하다는 사실을 묵과하면 안 된다. 여름에 아끼고 열심히 일하는 자만이 겨울에 편하게 사는 것이다. 닭이 너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도 안 된다. 닭은 꼭두새벽에 일어나는데 너는 잠만 자는구나. 아홉 여자를 거느리는 남자가 너보다 더 강해서도 안 된다. 너도 원한다면 한 여자는 거느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개가 너보다 더 의리가 있어서도 안 된다. 개는 항상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데 너는 그렇지 못하구나. 아무리 하찮은 적이라도 무시해서는 안 되며 많은 친구들을 가진 것처럼 허세를 부려서도 안 된다."
죽음에 임박하여 아라비아의 현자가 다시 아들을 불렀다. 현자는 아들에게 얼마나 많은 친구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제 생각에 백 명은 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 너에게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내가 너보다 더 오래 살았지만 나는 아직 반쪽 친구도 얻지 못했다. 그것도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아느냐. 그런데 네가 그 많은 친구들을 가졌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구나. 그러면 너는 네 친구들 중 누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느냐." 현자의 말에 아들은 도리어 물었다. "아버지, 어떤 친구를 진정한 친구라고 합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모두가 등을 돌릴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한 철학자의 말을 들려주었다.
아들이 다시 현자에게 질문을 했다. "혹시라도 진정한 친구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버지가 그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본 적은 없다고 대답했다. 아들은 나중에라도 그런 친구를 가질지 모르는 일이니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현자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상인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이집트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바그다드인이었는데 그들은 심부름꾼과 편지 그리고 남들의 이야기로만 서로를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장사를 하면서 거래차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바그다드 상인이 이집트에 갈 일이 생겼다. 친구가 온다는 전갈을 받은 이집트인은 너무나도 반갑게 그를 맞이하며 자기 집에 묵게 했다. 그는 일 주일 동안 친구에게 후한 대접을 하고, 자기의 은밀한 비밀까지도 전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바그다드에서 온 친구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이집트 상인은 친구의 병을 고치기 위해 그 지방에서 유명하다고 소문난 의사들 중에서도 제일 이름난 의사 몇 명을 골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친구의 맥을 짚어본 의사들은 그가 아프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면 하나같이 의아해했다. 그가 마음이 병들었거나, 귀신에 홀렸거나, 사랑에 빠졌거나, 욕심이 많아서 아픈게 아니라면 아프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집트 상인은 친구에게 자기한테만은 숨김없이 말해보라고 사정했다. 혹시 자기 집에 마음에 둔 여자가 있는지, 그래서 그 여자 때문에 마음의 병이 생긴 건지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
"자네 집에 있는 여자들을 전부 보여주게나. 만일 그 여자들 중에서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면 사실대로 말하겠네."
그래서 이집트 상인은 자기 집에 있는 모든 하녀들을 불러모았다. 하지만 친구가 찾는 여자는 거기에 없었다. 이집트 상인의 딸들 중에도 그가 찾는 여자는 없었다. 이집트 상인은 마지막으로 오래 전부터 자기의 아내로 삼으려고 마음먹었던 여자를 데려오게 했다. 그 여자를 본 친구는 바로 저 여자한테 자기 목숨이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집트 상인은 아름답고 우아한 그 처녀를 그 자리에서 지참금까지 줘서 친구와 결혼을 시켰다. 그러자 그 친구는 곧 병이 나았고, 사업차 왔던 일이 끝나자 그 여자를 데리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세월이 한참 흘렀고 이집트 상인은 우여곡절 끝에 전 재산을 다 잃게 되었다. 그는 바그다드에 있는 친구에게 갈까 생각했다. 그 친구가 자기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의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남루한 옷차림으로, 배고픔을 참으며 친구를 찾아갔다. 그는 밤이 되어서야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하지만 자기의 형편없는 몰골이 창피해서 친구 집으로 찾아간다는 게 두려웠다. 더군다나 야심한 시간에 찾아간다는 것도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사원 안에서 밤을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사원 안에 드러누워 이런 저런 생각에 몸을 뒤척거리던 그는 자기가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화도 삭이고 바람도 좀 쐴 겸 걸어다니려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거리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한 남자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싸움소리를 듣고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은 죽어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자 살인자를 잡겠다며 거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남루한 행색의 이집트인을 보자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집트 상인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어차피 이렇게 빈털털이가 된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자기가 그 남자를 죽였다고 말해버렸다. 이렇게 해서 그 이집트 상인은 그날 밤 당장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음날 재판관 앞으로 끌려간 이집트 상인은 교수형을 받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교수형당하는 광경을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는데, 마침 이집트 상인을 찾아왔던 그 바그다드 상인도 구경꾼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는 친구를 알아보고는, 믿기지 않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사형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의 이집트 친구, 자기를 극진히 대접했고 사랑하는 여자까지 양보했던 바로 그 친구였던 것이다. 그는 남자라면 은혜에 보답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죽고 나면 은혜를 갚을 길이 영영 없어진다고 생각한 그는 친구를 대신해서 죽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 나쁜 재판관 놈들아. 왜 죄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거냐. 너희들이 아무리 그 사람을 죽여봐야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바로 나니까. 내가 그 남자를 죽였다. 내가 살인자란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재판관들은 그를 붙잡아들인 후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원래 사형에 처하려고 했던 이집트 상인은 풀어주었다. 이 모든 걸 보고 듣고 있던 진짜 살인범은 자기가 지은 죄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서로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두 친구의 우정과 믿음을 보게 된 것이다. 벌을 받을 사람이 있다면 자기인데, 아무 죄도 없는 그들이 죽는다면 그건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 살인범은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재판관님들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사실 신들이야말로 공평한 재판관님이십니다. 신들은 무고한 사람이 처벌당하도록, 또 죄인이 벌을 받지 않고 무사하도록 내 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저 세상에서 더 엄하고 처참한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그 남자를 죽인 진짜 살인범이라는 걸 자백합니다. 내가 지은 죄값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죄없는 그 사람은 풀어주시고 죄인인 나를 벌해주십시오!"
깜짝 놀란 재판관들은 그 남자를 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뭔가 더 자세히 조사해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 사건에 대한 경위서와 함께 세 사람을 포승에 묶어서 왕에게 보냈다. 왕도 그 사건이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그 살인사건이 정당방위였음이 드러났고, 세 사람은 모든 의원들과 현자들의 동의를 얻어 무죄를 인정받고 석방되었다. 그리고 애 세 사람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외쳤는지 그 진짜 이유도 밝혀지게 되었다. 바그다드 상인은 이집트 친구가 가난해진 것을 보고는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말했다.
"자네가 내 집에 머무르는 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자네 것이야. 우리 둘이 같이 공유하는 거지. 그게 싫다면 내 재산을 둘로 똑같이 나눠서 반반씩 갖도록 하세. 나는 아무래도 좋아." 그리하여 이집트 상인은 친구가 나눠준 재산을 가지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들이 현자에게 말했다. "아버지. 그런 친구는 옛날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습니다."
*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친구는 많이 있지만 어려울 때 자신을 던져 도움을 주는 친구는 많지 않다. 그런 친구가 바로 진정한 친구이다.
|
|
|
글터 → 국사
|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3. 너무나 길었던 삼국시대 (700 년 동안의 분열이 가져다준 역사적 상처)
문화 수입을 위한 두 가지 관점
삼국시대는 사상적으로 제사장적인 전통과 지식인적인 요소를 공존,통합시킨 시대이면서 분열이 안정적으로 정착된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삼국 각 나라는 좀더 유리한 입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문화적 역량을 축적하는 데도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삼국 각 나라는 천여 년간 독자적으로 발전해온 중국의 사고체계를 받아들였으며, 기마종족적 사고체계와는 상당한 이질감이 있던 불교까지 받아들여 활용하려 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유교나 불교 및 도교 등을 도입한 사실에 대해서 사대주의적 해석을 내놓는다. 즉 중국이나 인도의 높은 문명이 비로소 도입될 정도로 삼국시대의 문화는 아직 미성숙한 상태였으며, 문화적 주체성도 허약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삼국시대 이전의 겨레 문화가 주로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 등 원시적인 신앙체계였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의 뒤편에는 편견으로 무장한 사회이론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문화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는 일면적인 논리로서, 높은 문화가 낮은 문화를 흡수하기도 한다는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 물론 삼국시대의 문화 도입이 이 가운데 어느 것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문화가 흘러들어온 듯한 측면도 있고, 삼국이 중국 문화를 흡수한 듯한 측면도 있는 탓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기마종족의 정치,군사적 실력이나 문화적 발전도가 결코 중국 한족보다 낮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두 개 이상의 문화가 만날 때 그들 문화는 서로 닮아가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오로지 한 측면만이 역사에 부각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경멸감 때문이다. 이런 자기 경멸감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점차 역사적 편견으로 굳어져간 것이다.
첫째 요인은 삼국 이전의 우리 문화를 파헤치는 작업이 예로부터 오늘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 시대를 제대로 연구한 기록을 보지 못했다. 삼국 이전의 시대에 관심을 기울인 작업들도 영토 문제에만 집착하기 일쑤였다. 그런 것은 심리적 위안감이나 민족패권주의만 부추길 뿐, 겨레의 진정한 역량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요인은 중국 한족의 농간과 거기에 빌붙은 눈먼 사대주의자들의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중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대주의자들은 자신의 전통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비록 일시적 필요성 때문이라 할지라도) 정치적 강자이니 중국 한족과 결탁함으로써, 자신의 겨레를 오랑캐라는 작은 울타리에 가두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더 더욱 중요한 점은 삼국시대가 고조선 이후의 분열기였다는 데 있다. 당시 중국 한족은 오랜 분열 끝에 통일을 이루었고 기마종족은 거꾸로 연맹이 해체되어 분열됨으로써, 동아시아의 현실적인 강자가 뒤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분열된 뒤 재통합을 추구하던 삼국은 치열한 내부경쟁을 벌여야만 했고, 이 과정에서 각각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나름대로 현실적 강자와 결탁해야만 했다. 사대주의는 바로 이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분열의 시대는 길었다. 무려 7백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분열은 끝나지 않았다. 즉 사대주의의 처음은 정치적 임시방편이었으나 결국 너무나도 오랜 분열이 계속됨에 따라 그 임시방편이 결국 자신을 작게 만드는 굴레로 뒤바뀌게 된 것이다. 바로 그 과정에서 문화적 주체성이 상실되거나 변질되었다. 요컨대 삼국시대라고 하는 오랜 안정적인 분열기가 결국 작은 겨레를 만든 주요한 요인이 된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국시대라는 긴 분열기에서 분열과 통합의 시간적 함수관계를 읽어냄으로써, 민족분단의 장기화라는 우리 겨레의 현실적 처지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세월의 흐름이 빠른 것을 고려한다면, 700년과 50 년 가운데 어느 것이 길다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는가. 분열의 끝이 빠를수록 역사적 상처는 적다. 분열의 일차적 끝은 한반도의 통합이겠지만, 그 다음에도 통합의 과제는 여전히 남는다. 삼국시대 이후 잃어버린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대통합'이라는 과제를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로 부활시켜낼 현실적 가능성이 이런 각도에서 충분히 타진되어야 할 터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