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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78 호
단기 4340. 10. 16 (음력 9. 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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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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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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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두 사람이 놀고 둘이 다 이기는 게임. /에바 가보(여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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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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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마음이 움직이면
우주의 본체와 힘은 한데 섞여서 융화하여 원래 서로 떠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여 정이 되고, 그것이 나타나는 것은 힘이요, 그것이 나타나는 이유는 하늘의 뜻이다. 힘이 아니면 능히 나타나지 못할 거시요, 뜻이 아니면 생겨날 것도 없을 것이니, 어찌 뜻이 나타나는 것과 힘이 나타나는 것이 다름이 있겠는가. 단지 도덕심도 힘에서는 떠나지 못하지만 그 생겨남이 도의를 위한 것이므로 생명에 속하고, 인심도 역시 뜻에서 나왔지만 그 생겨남이 육체를 위한 것이므로 겉모양과 기운에 속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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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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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9. 돈점 논쟁
3.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과 그에 대한 비판
'돈오돈수'란 깨침과 닦음이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시에 완성된다는 말이다. 돈오돈수에서 중요한 것은 돈오에 있다. 이것은 해오가 아니라, 궁극적인 깨달음인 구경각을 뜻한다. 이 궁극적 깨달음을 얻는 데에 최대의 장애는 깨달음이 아닌 것을 깨달음으로 착각하는 일이다. 그런데 돈오점수설은 궁극적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기는커녕 깨달음이 아닌 것을 깨달음으로 착각하게 하여 도리어 궁극적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이 아닌 것을 깨달음으로 오인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어떻게 완전무결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 길은 오로지 공안참구의 방법밖에 없다고 한다. 여기에서 참구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한 마디의 화두에 몸으로 부딪친다는 말이다. 이것은 화두의 뜻을 머리로 되새겨 알려고 하는 참의와는 다르다.
그러나 공안참구의 길을 가더라도 자기의 공부가 구경각에 이르렀는지 어떻게 알 것인가? 성철 스님은 그것을 감정하는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른바 일상일여, 몽각일여, 오매일여라는 삼관의 돌파가 그것이다. '일상일여'는 자기의 공안참구가 일상시에 한결같음을 말하고, '오매일여'는 꿈마저 없는 완전한 숙면 상태에서도 한결같은 경지를 말한다. 돈오돈수의 돈오는 오매일여의 경지를 넘어서 제8아라야식의 미세망념마저 끊어진 경지라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닦을 것이 남아 있다면 그 경지는 결코 돈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돈수라야 돈오요, 돈오면 돈수라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 속에는 조금이라도 거짓된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엄정함이 서려 있다. 만약 한 치의 거짓이라고 허용한다면, 거짓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허용하는 마음이 이미 깨우침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 완전한 깨달음은 한 치의 거짓마저 용납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나 가능하다고 역설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한 성철 스님의 파사현정의 정신이 대상적이 되었을 때, 즉 돈오점수라는 다른 수행 이론을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났을 때 강한 종파주의적인 태도가 있다는 혐의를 면치 못한다. "돈오점수설은 교가의 주장이고 돈오돈수설은 선문의 정설"이라든가 "돈오점수를 주장하면 이단이고, 돈오돈수를 주장하면 정통"이라는 "선문정로"의 논리는 그런 비난을 받을 소지가 충분히 있다.
성철 스님의 "선문정로"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지눌의 돈오점수설에 뒤집어 씌운 죄목이 과연 사실이냐 하는 점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성철 스님은 지눌이 거짓 깨침을 궁극적 깨침으로 위증하고 있다고 고발하고 있는 셈이다. 성철 스님에 의하면 돈오점수의 돈오는 해오를 말함인데 이 해오는 곧 지해이니 교이다. 그러므로 돈오점수는 선이 아니라 교이며, 구체적으로 화엄선의 논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조국사는 돈오점수의 돈오를 결코 궁극적 깨우침이라 주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깨침은 해오에 불과하니 자만하지 말고 계속해서 부지런히 닦으라고 말했을 뿐이다. 흔히 지적받고 있는 것으로 "선문정로"가 가진 또 하나의 문제점은 문헌 취급이 객관적이거나 엄밀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크게는 경전 비평의 부재에서부터 작게는 단장절구식 문장 해석에 이르기까지 매우 주관적으로 다룬 점이 많다. 예컨대 선종의 근본 경전이라 할 수 있는 "육조단경"에 대하여 고본 "단경"이나 돈황본 "단경"과 더불어 그것이 성립사적인 이해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지눌도 이미 "육조단경"이 성리사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하택신회는 지해종사이며 조계의 적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에 적서의 관념을 갖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사상을 평가하고 수용하는 데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에 비하면 성철 스님은 "단경"에 있는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여 하택신회는 지해종사이며 조계 적자가 아니라는 말을 정통과 이단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 박성배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단장절구식 문장 해석의 문제점에 대한 예로는 "선문정로"의 머리말에 지눌의 "법집별행록적요병입사기"(간단히 "절요"라 함)를 인용하면서 지눌의 취지와 다르게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린 경우 등이다.
마지막으로 돈오돈수설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돈오점수나 돈오돈수는 어쨌든 깨달음과 닦음에 관한 수행론이기 때문에, 닦음이 필요하지 않다는 돈오돈수설은 아무래도 현실적 인간의 수행론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돈오돈수설은 깨침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정의를 내리는 것이지, 그러한 깨침을 얻을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의 문제가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받는다.
결국 같은 논리이지만 돈오돈수적 점수설을 주장하는 박성배 교수도 이러한 문제를 체와 용의 관계 혹은 리와 사의 관계로 보고 그러한 입장에서 점수설을 긍정하고 있다고 보인다. 즉 돈오를 근본으로 하는 돈오돈수설이 체외 리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므로 그 용과 사로 나아가는 측면에서 점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박성배 교수는 전범성성의 개념을 통해 이를 매우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깨달음의 측면에서 미에서 오로 가는 길은 돈이지만, 전인격적인 측면에서 범에서 성으로 가는 길은 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두 수행론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돈오점수설이 '깨침의 본질'을 한 인간으로서 인간 사회 속에서 매일매일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닦음의 문제'와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하는 매우 넓은 의미의 종합적인 수행 이론이라면, 돈오돈수설은 이타적 보살행에 대한 관심 표시나 구체적인 언급을 일체 거부하고 오직 깨침 하나만을 위해서 사는 깊은 산 속 수도자들의 용맹정진반 경책과도 같은 매우 좁은 의미의 특수한 이론이라 말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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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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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하다
본뜻 : 남의 말이나 행동 따위를 잘 알아 이해하는 것을 가리키는 일본식 한자어다.
바뀐 뜻 : '이해하다'로 바꿔 쓸 수 있다
"보기글" -난 도무지 그 사람의 행동을 아직까지도 납득할 수가 없단 말이야(이해할 수가) -그 일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을 해보란 말이야(이해할 수 있게)
방언은 모국어다
〈혼불〉을 지은 작가 최명희는 토박이말 또는 고장말을 애써 찾아 쓴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모국어는 우리 삶의 토양에서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품고 길러 정신의 꽃으로 피워주는 씨앗”이라고 말한다. 한국어를 단순히 의사를 소통하는 수단인 언어로 보기보다는 이 땅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씨앗’으로 본 것이다. 모국어라는 언어에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인간과 자연의 모습, 전통, 문화, 예술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은 작가였다. 그리하여 “유구한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 산천초목, 전통적인 생활 습관, 사회 제도, 촌락 구조, 역사, 세시풍속, 관혼상제, 통과의례, 그리고 주거 형태와 복장과 음식이며 가구·그릇·소리·노래·언어·빛깔·몸짓” 들을 제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말하자면 우리 혼이 담긴 토박이말 또는 고장말의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소설을 쓴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전하는 까닭은 “피폐한 현대인들의 떠돌이 정서에 한 점 본질적인 고향의 불빛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떠돌이 정서’는 바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 시대 한국인들이 지닌 불안정한 정서를 일컫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하여 한국인으로서 안정된 정서를 찾게 해 주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모국어란 곧 방언이었고 전통과 자연과 인간을 합일시키는 매체였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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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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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3.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기꺼이 그의 마부가 되겠다(안영)
예의가 없으면 친구도 없다
그런데 그 나라에 월석보라는 품행이 단정하고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 그가 한번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가 감옥으로 끌려 가던 도중에 마침 안영이 나들이 나왔다가 그를 발견했다. 안영이 월석보와 한참 얘기해 보고는 자기가 타고 온 말을 죄값으로 바치고 그를 풀려나게 했다. 그리고는 월석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곧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얼마 뒤 월석보는 안영을 찾아가 절교 선언했다. 이에 안영이 깜짝 놀라 의관을 갖추고 나와 물었다.
"나는 별 것 없는 사람입니다만, 귀하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한 적이 있었는데 왜 나와 절교하겠다는 것인지요?" 그러자 월석보가 대답했다. "군자의 가장 따분한 일이 지기가 없는 것이고, 가장 기쁜 일이 지기를 얻는 것이라 합니다. 전에 내가 잡혔던 것은 그들이 오해했기 때문인데, 당신이 나를 바로 보셔서 구해 주셨으니 당신은 지기입니다. 하지만 나를 예의로써 대하지 않았으니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없소. 차라리 구해주지 않고 그냥 둔 것만 일이오."
안영은 그 말을 듣고 나자, 그를 모셔들여 정중하게 예의로 대접했다.
마부와 아내
하루는 안영이 외출을 하는데, 마부의 아내가 문틈으로 자기 남편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남편이 안영의 말을 모는데, 채찍을 휘두르면서 마치 자기가 재상인 양 의기양양해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저녁 때 남편이 돌아오자, 그녀는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남편이 그 이유를 물으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안영 어른은 키가 6척도 안되건만 재상으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 계신데, 그 분을 보니 생각에 잠겨 겸손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8척이나 되는 몸을 가지고, 기껏 남의 마차나 끄는 처지에 잘난 체는 혼자 다 하고 있으니.... 그래서 헤어지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자 마부가 사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이 옳소. 다시는 안 그럴 것이니 용서하구료."
그 후 마부의 태도는 몰라보게 겸손해졌다. 안영은 마부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마부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게 된 안영은 자기 잘못을 반성해 고칠 줄 아는 점을 높이 평가해 군주에게 그를 추천했다. 그리하여 마부는 대부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안영은 장공이 신하에게 죽음을 당했을 때, 그 시체 앞에 엎드려 곡하고 애도했으나 곧바로 자리를 떠 버리고 모반자를 치지 않았다. 그가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은 비겁자였던가? 그렇지 않다. 그는 임금에게 충간할 적에는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와서는 허물을 고칠 것을 생각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만약 안영이 오늘 살아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마부가 되어도 무방할 만큼 그를 흠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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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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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20장. 우연한 의학적 발명.발견.
파파니콜라우 실험.
"25년 전 자궁암은 미국 여성에게 최대의 적이었다. 미국 암협회에 의하면 현재는 18만명의 여성이 치료 후 5년간 '치유되고 생존하였으며 건강했다'고 했으며, 이것은 주로 도말 표본검사의 덕택이다." 이것은 1962년의 'Medical World News'지에 게재된 조지 니콜라스 파파니콜라우 박사의 사망기사에 쓰여져 있는 글이다. 파파니콜라우 박사는 1923년의 세렌디피티적 관찰로 그의 도말 표본검사를 개발했다. 그는 미시간 주 배틀크리크의 학회에서 '새로운 암 진단법'이라는 표제의 소 논문을 처음으로 발표하였으며, 그 논문은 바로 'Growth'라는 잡지에 게재되었다. 그러나 이 논문은 1940년 코넬대학교 의과대학의 학장이던 힌제이 박사에 의해 주목받게 될 때까지 의사들로부터 거의 무시당했었다. 힌제이 박사는 파파니콜라우 박사에게 코넬대학의 연구실을 자유로이 사용하여 자궁암에 관한 그의 연구를 계속하도록 격려했다. 1943년에 그가 트라우트 박사와 공저로 발표한 논문 '질의 도말 표본 검사에 의한 자궁암의 진단법'은 마침내 의사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1948년에는 미국 암협회의 의학과 과학 이사인 카메론이 보스톤에서 학회를 소집하였으며, 그 후 서서히 파파니콜라우법은 전세계적으로 채택되기 시작했다. 조지 파파니콜라우의 비범한 생애는 1883년 그리스의 작은 고을 코우미에서 시작되었다. 의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아테네대학에서 의사 자격을 얻었다. 가정의로서 개업하지 않고 연구에 일생을 바칠 결심으로 독일로 가서 예나, 프라이부르크, 뮌헨의 각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1910년에는 뮌헨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연구 생활은 발칸전쟁으로 인한 그리스군에서의 복무 때문에 중단되었으나 거기서 그는 그리스계의 미국인을 만나 미국에서는 누구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을 듣고 자기의 장래를 그 나라에서 보내려고 결심했다. 뮌헨에서 공부를 끝내고 그리스로 귀국하여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갔을 때, 그에게는 생물학과 의학의 연구를 위한 자신의 야망을 어떻게 성취시킬 것인가하는 아무런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어떤 날은 뉴욕의 백화점에서 융단 판매원 노릇을 한 적도 있었다. 뮌헨에서 연구를 하다가 알게 되었던 콜롬비아대학의 동물학 교수 토마스 모건 박사의 추천으로 뉴욕의 어느 병원 병리부문에 파트타임으로 직업을 구했는데 이 병원은 코넬대학교 의과대학과 제휴하고 있었다. 그는 곧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실로 옮겨졌으며, 조교수로 승진하였고 나중에는 정교수, 명예교수, 파파니콜라우 연구소 소장, 그리고 파파니콜라우 세포학 연구소의 고문이 되었다. 그의 코넬대학에서의 생활은 반세기 가까이나 되었다. 그는 하루 14시간씩 일주일에 6일하고도 반나절을 대학의 연구실과 집에서 아내를 조수삼아 일을 했다. 그가 휴가를 가진 것은 41년 동안에 단 한번 뿐이었다. 누가 이것을 물었을 때 그는 "일이 매우 즐겁고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파파니콜라우 박사가 성최한 공적과 성공은 그 자신이 "대부분 운이었다"고 말한 관찰에서 시작되었다. 1917년 코넬대학교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실 주임이었던 스톡카드 교수가 파파니콜라우 박사에게 자기의 실험 유전학 연구에 참가할 것을 권했다. 당시는 성 결정에 대한 염색체의 역할에 큰 관심이 모아졌었다. 파파니콜라우는 실험용 동물인 기니피그(guinea pig)를 이용해서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는 기니피그 발정 주기의 여러 상황에 따라 질 조직에 나타나는 세포의 변화를 기술한 것으로, 1817년에 스톡카드 박사하고의 공저 논문이 되었다. 여성의 월경 주기의 특징에도 이와 유사한 질세포 변화가 있는지 어떤지를 조사하기 위해 파파니콜라우는 1923년 질 내용물에 있어 조직적인 세포 생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는 뉴욕 부인과병원의 환자를 대상으로 실행되었다. 한 자궁암 환자에게서 표본은 얻었다. 파파니콜라우 박사의 예민한 관찰력과 뛰어난 판단력으로 질 내용물의 도말표본 중인 암세포가 구조적으로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후에 "자궁 경관의 도말 표본 중인 암세포를 처음 보았을 때 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크게 감격한 일은 나의 연구과정 중에서 처음이었다"라고 말했다. 파파니콜라우 박사는 병균이 침식되기 전의 자궁암에 대한 새로운 시험법을 설명한 후 1928년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 "이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암 문제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되고 더 정확한 분석이 뒤따를 것이다. 또한 다른 기관의 암을 발견하기 위한 유사한 방법이 개발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이 개발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그렇게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예측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그의 방법은 결장, 신장, 방광, 전립선, 폐, 위, 유방, 부비강 그리고 심지어 뇌에까지 적용되었다.
파파니콜라우 박사에게 주어진 수많은 영예는 너무 많아서 여기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중에서 그의 이름을 붙인 암 연구소와 많은 암 학회나 여성 단체로부터의 상, 그리고 3개 대학으로 부터의 명예 학위와 그리스 정부로부터의 2개의 상 등이 포함된다. 병균 침식이 되기 전의 자궁암에 대한 파파니콜라우 염색시험은 구명 의료의 가장 빛나는 개가 중의 하나이다. 1959년 모스코바의 종양학 연구소 소장은 러시아에서 800만명의 여성이 파파니콜라우 염색시험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의학적인 기록이 전세계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나라인 스웨덴은 10년 동안에 20만 7천 4백 55명의 여성이 검사를 받았으며, 그 기록은 컴퓨터에 들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10년 동안에 적어도 1회 이상 도말검사를 받은 여성에게는 자궁암의 발생율이 75%로 감소했다. 우프살라대학의 의사들이 추정한 바에 의하면 여성이 3년마다 파파니콜라우 염색시험을 받는 시스템이 생기면 침균성 자궁암의 발생율은 연간 10만명의 여성에 대해서 1~5명이 될 것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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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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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문장에는 뛰어났으나 일처리 능력이 모자랐던 신광한
신광한(1484-1555)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한지, 호는 기재이다. 영상 신숙주의 손자이다. 문장에는 능했으나 일처리 능력이 부족하였다. 형조 판서로 있을 때에 소임을 빨리 처결하지 못하여 죄수들이 많이 적체되어 옥에 모두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신광한이 옥사를 더 넓게 지어 죄수를 수용하기를 청하였다.
"판서를 바꾸느니만 못하다. 옥사를 어찌 다시 짓는단 말인가" 중종은 허락하지 않고 허자를 대신 임명하였다. 허자가 지체없이 처결을 다하니 옥사가 텅텅 비어 새로 지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문장에는 어릴 때부터 뛰어났다. 고집이 센 종 하나가 신공을 바치지 않자 곧 시를 써서 짐짓 타일렀다.
평해군에 사는 종 막동이가 해마다 신공을 못 들은 척 바치지 않네 관청의 위엄으로 잡아오는 것 어려운 일 아니나 모름지기 내년 2월까지 바쳐야 하리
신광한이 소싯적에 채색 새가 입으로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로부터 재치 있는 생각이 날로 늘었다. 장성하여 문형을 맡게 되자, 또 채색 새가 입으로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이것은 나함이 꿈에 오색 새를 삼킨 것과 같은 유라 하겠다. 중국 사신 장승헌이 왔을 때에 공이 원접사가 되어 주고받은 창화시가 있는데, 장승헌이 크게 칭찬을 하였다. 이듬해에 중국 사신 왕학이 공을 보고 치사하였다.
"'황화집'을 보니 중국 사신 장승헌이 공에게 뒤진 바가 많았습니다"
인종 때에 대제학을 지내고 시호는 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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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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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토닉 러브
'단테'에게 있어서 '베아트리체'는 이상의 여인이었다. 그는 평생을 두고 그녀를 사모했으며 그의 작품 '신곡'에서는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천당으로 인도해 간다. 요즈음과 같은 섹스만능의 풍조에서는 눈을 닦고봐도 없겠지만 아무튼 이와같은 육체를 떠난 사랑. 정신적인 사랑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한다. 이는 '플라톤' (BC 429-347)이 그의 저서 '향연'에서 육체적인 사랑보다도 정신적인 사랑을 찬양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사랑이란 당시 희랍사회의 습관이던 소년 사이의 동성애를 가리킨 것이었는데 어느 새 남녀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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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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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열두번째 이야기 분수를 모르는 씨돼지
조그만 씨돼지가 다른 돼지떼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씨돼지는 자기가 덩치가 작아 우두머리가 되지 못하는 데다 다른 돼지들이 자기를 떠받들지 않자 늘 불만에 차 있었다. 그래서 다른 돼지들에게 어금니를 들이대면서 못살게 굴기도 했지만 자기가 아무리 괴롭혀도 돼지들이 꿈쩍도 하질 않자 제풀에 지쳐 화가 나서 투덜거렸다.
"여기서는 내가 뭘 시켜도 들은 척도 하질 않아. 내가 아무리 화를 내도 무서워하지 않고, 갖은 협박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질 않아."
씨돼지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곳을 떠나서 자기를 알아주는 곳으로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길을 떠난 씨돼지는 양떼들을 만났다. 씨돼지가 양떼 한가운데로 가서는 이를 갈면서 씩씩거리자, 양떼들이 겁에 질려 하나 둘씩 도망가기 시작했다. 씨돼지가 흐뭇해져서 말했다.
"여기서 사는 게 좋겠군. 여기서는 대접을 좀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화를 내면 무서워서 도망가고 겁을 주면 기겁을 하잖아. 여기 있으면 모두에게 존경받을 수 있을 거야."
씨돼지 혼자 기분이 들떠 이렇게 며칠을 보내고 있는데, 굶주린 늑대 한 마리가 나타나 양떼들을 잡아먹으려 했다. 늑대가 오는 것을 본 양들은 가파른 바위가 있는 곳으로 얼른 도망을 쳤지만, 씨돼지는 양들이 자기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고는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씨돼지는 꼼짝없이 늑대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옛날 같이 살던 돼지떼들이 있는 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들을 알아본 씨돼지가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르자 돼지떼들이 달려들어 힘을 합쳐 늑대를 물리치고는, 거의 반쯤 죽다 살아난 동료를 구해주었다. 씨돼지는 온몸이 아프기도 하고 망신스럽기도 해서 울상이 된 얼굴로 자기를 구해준 돼지들에게 말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가족과 함께 해야 한다는 말을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겠어요. 내가 가족 곁을 떠나지만 않았어도 이런 봉변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 자기 자신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은 곳만을 바라보는 거만한 사람은 큰 봉변을 당하기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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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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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3. 너무나 길었던 삼국시대 (700 년 동안의 분열이 가져다준 역사적 상처)
다듬어지는 겨레 문화
삼국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당연히 삼국시대의 임금(임검, 사람을 뜻하는 임과 신을 뜻하는 검의 합성어)일 것이다. 비록 독재적인 권력을 누리지는 않았지만, 임금은 각 국가의 최고권력자임과 아울러 그 국가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의 임금이야말로 앞서 살펴본 제사의식의 최고 책임자이자 여러 제사장들의 대표였다. 그는 하늘을 숭배하는 국가적 의식을 주관함으로써 조상신의 대표 후예임을 분명히 했다. "삼국사기"에서 확인되듯, 그는 오행사상에 따라 정치제도를 만들고 통치를 하는 등 오행사상의 신봉자 또는 집행자이기도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기자계의 이주 이후 형성된 지식인적인 문화와 기존의 제사장적인 문화가 통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삼국시대에 이르러 이 두 갈래의 입장이 통합됨으로써 우리 겨레의 '알'이 문화적으로 한층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정통 후계자들이 마치 종교인과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행사상의 계승자들은 철학자를 닮은 듯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두 관점이 통합되지 않을 때, '정교일치'는 실제로 신앙이 지배하는 정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이 통합될 때, 정교일치는 신앙과 철학적 이론이 함께 지배하는 정치가 된다. 즉 두 관점이 통합되면 정치의 내용이 질적으로 성숙됨과 아울러 사회가 질적으로 발전하며, 문화 또한 질적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셈이다. 중국에서도 정치와 문화가 질적으로 발전하는 데는 제사장적 권위와 맞서는 학문(철학)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기마종족이 남겨놓은 오행사상을 습득한 '유'라고 부르는 계층이 바로 그런 요인을 제공하고 있었다. 예컨대 공자라는 위대한 지성인도 그런 사람으로서, 제사장적인 전통과 지식인적인 요인의 융합을 주장한 위대한 선각자였다. 실제로 그가 남긴 역사서와 철학서는 그런 융합의 입장을 서술한 선구자의 유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행사상은 우리 역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회적 변화를 몰고 왔다. 따라서 오행사상이라는 지식인적 요소와 하늘숭배라는 제사장적 전통이 통합되는 삼국시대는 문화적으로 매우 발전된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경우 경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고, 신라의 경우 화랑이라는 교육조직이 있었는데 이들의 교육내용 또한 그런 통합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시대 초기는 기마종족적 문명이 체계화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삼국시대에 들어서 통합된 기마종족의 정신세계는 제사장적 전통이 오행사상가적 전통을 포용하는 것으로 현실화되었는데, 제사장적 전통은 통합의 정신적 방향이 되었고 오행사상가적 전통은 통합의 실용적 근거가 되었다. 아울러 고대국가라는 보다 폭 넓은 국가체계도 통합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요컨대 고대국가의 임금과 귀족들은 자신의 권위를 보장받기 위해 한편 제사장적 전통을 이용했지만, 더욱 복잡해진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다른 한편 실용적 지식을 활용했던 것이다. 삼국시대는 이 두 부류의 지적 전통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제공한 최초의 시대였던 셈이다. 그러나 문화적 통합과 비례하는 현실적 통합국가는 쉽게 세워지지 않았다. 세 나라의 경쟁관계는 너무나도 균형 잡힌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특별히 앞서가지 못했던 탓이다. 일반적으로 문화가 한 단계 발전하고 문화의 내용이 통합을 추구할 경우 거기에 걸맞은 정치적 실체가 등장하게 마련이지만, 삼국시대는 그런 일반론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은 시대였다. '삼국시대는 세계 역사에서 가장 긴 안정된 분열의 시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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