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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76 호
단기 4340. 10. 13 (음력 9. 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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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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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현윤경 기자 = 자기계발서 '시크릿'이 6주째 선두를 굳게 지켰다.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이라는 부제 하에 호주의 전직 TV 제작자가 돈, 건강, 인간관계, 행복 등 인생 전반에서 성공하는 법을 제시했다.
장편소설 '포르토벨로의 마녀'는 출간하자마자 단숨에 7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연금술사' 등으로 국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브라질 출신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신작. 중세였다면 틀림없이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을 기이한 사고와 능력을 지닌 한 여성의 삶을 다뤘다.
전반적으로 외국 소설과 재테크 서적이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오랫동안 20위권안에 머물던 김훈의 '남한산성'이 순위 밖으로 밀리는 등 국내 문학 작품은 판매가 주춤하고 있다.
다음은 한국출판인회의가 지난 5일부터 11일까지 교보문고, YES24 등 전국 온ㆍ오프라인 서점 11곳의 도서판매 부수를 근거로 집계한 10월 둘째주 종합베스트셀러 순위.
1.시크릿(론다 번ㆍ살림 BIZ) 2.파피용(베르나르 베르베르ㆍ열린책들) 3.바리데기(황석영ㆍ창비) 4.이기는 습관(전옥표ㆍ쌤앤파커스) 5.고슴도치의 우아함(뮈리엘 바르베리ㆍ아르테) 6.돈은 아름다운 꽃이다(박현주ㆍ김영사) 7.포르토벨로의 마녀(파울로 코엘료ㆍ문학동네) 8.무지개원리(차동엽ㆍ동이) 9.코믹메이플스토리-오프라인RPG23(송도수ㆍ서울문화사) 10.이코노믹 씽킹(로버트 프랭크ㆍ웅진지식하우스) 11.금융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진실(송승용ㆍ웅진윙스) 12.멘토(스펜서 존슨ㆍ비즈니스북스) 13.대한민국2030 재테크 독하게 하라(김민수ㆍ미르북스) 14.샘에게 보내는 편지(대니얼 고틀립ㆍ문학동네) 15.신도 버린 사람들(나렌드라 자다브ㆍ김영사) 16.폼페이(로버트 해리스ㆍ랜덤하우스코리아) 17.배려-마음을 움직이는 힘(한상복ㆍ위즈덤하우스) 18.경청-마음을 얻는 지혜(조신영ㆍ위즈덤하우스) 19.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정철진ㆍ한스미디어) 20.공중 그네(오쿠다히데오ㆍ은행나무)
ykhyun14@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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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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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릴 적에 보여 준 재주대로 자란다면 이세상에 천재가 못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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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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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마음은 몸의 주인
내가 생각하건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을 성(사람과 사물에 있어서의 본성이나 본바탕, 본체)이라 이르고, 성과 기를 합하여 한 몸의 주인이 된 것을 마음이라고 이르며, 마음이 사물에 응하여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정이라 이른다. 성은 마음의 몸체요, 정은 마음의 쓰임새이며, 마음은 감정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난 것의 모든 것이므로 마음은 성과 정을 모두 다스린다고 한다. 성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인 의 예 지 신'-즉, 어질고 정의롭고 예의 바르며 많이 알고 믿음이 그것이요, 정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희 노 애 구 애 오 욕'-즉, 즐겁고 화나고 슬프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 내는 것이 그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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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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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9. 돈점 논쟁
1. 돈점 논쟁의 발단과 대립 논점들
1981년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성철 스님은 "선문정로"를 세상에 냄으로써 이른바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논쟁'은 사실상 시작됐다.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를 두고 성철 스님은 "몹쓸 나무가 뜰안에 났으니 베어 버리지 않을 수 없다"고 준엄하게 단죄하였던 것이다. 이 비판의 반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한국 불교를 거슬러 올라가면 지눌에 의해 그 가닥이 제대로 잡혀졌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지눌 사상의 골간인 돈오점수가 선문에서 바른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역기능을 했다고 하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이론과 이론의 대결이라는 성격을 넘어 전승된 한국 불교가 바로 되었는가 아니면 잘못되었으니 이제라도 다시 제대로 세워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 문제의 성격까지 띠게 되었다. 지눌의 돈오점수는 전승된 한국 불교의 정맥으로 수용되고 있었고, 현재 한국 불교의 탁월한 지도자로 추앙받는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는 지금의 지도 노선이니 이 논쟁에는 섣부른 논리로 쉽게 개입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이지 "선문정로"가 나온 지 10년이 되는 1990년에 가서야 비로소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문제는 학술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이 주제에 대해서 불교계 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관심과 논의가 이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드러난 입장은 대개 세 갈래로 나눠지고 있다. 그 첫 번째로 성철 스님의 돈오점수 비판을 다시 비판하면서 돈오점수설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보조사상연구원측 입장이 있다. 두 번째로는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해인총림측 수행승들의 입장이 있다. 세 번째로 양자의 입장이 가진 근본 취지를 최대한 받아들인 박성배교수의 이른바 '돈오돈수적 점수'설이 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전개된 돈점 논쟁의 전체적 양상은 처음 성철 스님의 돈오점수 비판에서 시작하여 성철 스님에 대한 반비판으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돈오점수설과 돈오돈수적 점수설 사이의 논의 형태로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눌에 대한 성철 스님의 비판으로 야기된 이 돈점 논쟁에서 궁극적인 대립 논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성철 스님이 지눌의 돈오점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근저에는 돈오점수의 돈오가 참된 깨달음이 아니라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에 대해 돈오점수의 입장은 그것이 비록 불완전한 깨달음이라 하더라도 그 기능을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주장한다. 깨달음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의 차이는 깨달음의 체험과 인간관, 그리고 주어진 역사적 조건들에 의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깨달음은 적어도 체험적인 전환의 과정이 수반된다. 이것이 바로 닦음의 문제이다. 따라서 돈점 논쟁의 또 다른 대립 논점은 닦음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깨달음 그 자체가 전인격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과 관련해서 닦음의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즉 완전한 깨달음이라면 닦음이 필요 없다는 주장과 불완전한 깨달음과 그 보완으로서 닦음이 필요하다는 주장과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깨달음과 닦음 그리고 양장의 관계에 대한 견해차가 돈오점수설과 돈오돈수설의 논쟁을 야기시키는 근본적인 대립항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더욱 복잡한 주변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지눌이 살았던 당시 고려 불교의 과제와 성철 스님이 산 현재 한국 불교의 과제를 배제하고, 돈오점수설과 돈오돈수설 그 자체만을 단순 비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돈오점수가 수행의 효과적 지침으로 적용될 수 있는 사람과 돈오돈수가 더 효과적 지침으로 적용되는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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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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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부지
본뜻 : 일본어에서 온 말인 줄 모르고 쓰는 말 중에서 '부지'와 같은 말이 꽤 많다. 얼핏 보기엔 한자말처럼 보이는 이 말은 빈땅을 가리키는 일본 한자 '부지'를 차용하여 쓰고 있는 말이다. 순서를 뜻하는 '수순' 등이 이런 종류에 속한다.
바뀐 뜻 : 건물을 세우거나 시설을 들여놓기 위한 땅, 빈터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말 '터'로 바꾸어 쓸 수 있다.
"보기글" -장애자 복지시설 건물 부지를 매입하는데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복지시설건물 터를 매입하는데) -공원 부지로 마련된 땅에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건 말도 안돼요(공원 터로 마련된 땅에)
‘우거지붙이’ 말
‘푸성귀를 다듬을 때에 골라 놓은 겉대’를 ‘우거지’라고 한다. 먹을 게 넘치는 요즘은 무나 배추의 우거지를 버리기도 하지만, 먹을거리가 모자라던 시절에는 더없이 좋은 식료품이었다.
“긴 긴 겨울,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우거지국으로 가까스로 연명을 해 온 그들이었다.”(문순태, 〈타오르는 강〉) “어느 곳이나 식량 사정은 딱해. 우리 절에서도 쌀 몇 알을 넣은 우거지죽을 끓여 먹는 형편이니까.”(이병주, 〈지리산〉) “우거지찌개하고 신김치만 있으면 밥이 마냥 꿀맛 같은 대식가였고 ….”(박완서,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이 ‘우거지’가 ‘국·찌개’를 끓이거나 ‘죽’을 쑤는 재료로 쓰이면서 ‘우거짓국’, ‘우거지찌개’, ‘우거지탕’, ‘우거지죽’이란 이름이 생겼는데, 국어사전에는 ‘우거지김치’ 정도만 올랐고 다른 음식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음식 재료는 대개 ‘국·탕·찌개·볶음’ 등의 재료가 되므로 관련된 말을 죄다 챙겨서 올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스파게티’나 ‘비프스테이크’ 같은 여러 외래 음식도 국어사전에 올리는 판에 ‘우거짓국, 우거지탕, 우거지죽, 우거지찌개, 우거지부침’ 같은 우리 일상 생활과 관련이 깊고, 많이 쓰이는 낱말들을 사전에 챙겨 올리지 않는 것은 문제다. 비슷한 말인 ‘시래기’의 경우, ‘시래깃국, 시래기나물, 시래기떡, 시래기죽, 시래기지짐이, 시래기찌개’들이 사전에 수록돼 있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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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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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2. 변경의 실력자(진나라 목공)
목공이 중원에 진출하지 못한 이유
목공은 재위 39년 만에 사망하여 옹땅에 매장되었다. 그러자 목공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고 순사(왕이 승하하면 이를 따라 그를 모시던 신하들이 함께 자살하는 것)한 사람이 1백 77명에 달했다. 모두 목공의 유언에 의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황조의 시"를 지어 읊으며 그들의 순사를 슬퍼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목공을 이렇게 평가했다. '진나라 목공은 영토를 넓혀 나라를 번영시켰다. 동쪽으로는 강국 진을 제압했고 서쪽으로는 융족을 지배했다. 그만한 업적을 이루었으면서도 그는 제후들의 맹주가 되지는 못했다. 그것은 당연한 노릇이라고 하겠다. 자기가 죽으면서 후사를 세우기를 잊고, 또한 신하들을 순사시킨 것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역대의 성왕들은 서거할 때에도 또한 후세를 위하여 은덕을 베풀어서 그 본을 보였다. 하물며 백성들이 애석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유능한 신하들을 순사시키지는 않았다. 목공이 중원에 진출하지 못했던 것은 그러한 결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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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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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20장. 우연한 의학적 발명.발견.
필(경구 피임약).
약 상자 속이나 약국의 선반에 많은 종류의 환약이 있는데 보통 필(pill)이 라고 말했을 때는 먹는 피임약을 일컫는다. 1960년대에 널리 퍼진 경구 피임약은 우리의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성혁명이나 여성해방, 서방 세계에서의 카톨릭 교회의 세속화 등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필의 기원은 세렌디피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고 좀 복잡하지만 세렌디피티가 사연의 일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기업가 럿셀 E.마커로부터 시작된다. 마커가 펜실바니아 주립대학 화학 교수진의 일원이었던 1930년경 그는 사포게닌(sapogenin)이라는 아주 흔한 형태의 스테로이드류에서 여성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progesterone)을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프로게스테론은 생리불순의 치료나 유산 예방 등에 효과가 있었으며 당시 유럽의 제약회사에서만 어렵고 힘이 드는 합성법으로 만들고 있어서 매우 고가였다. 마커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필요한 형태의 사포게닌이 멕시코에서 야생하는 어떤 종류의 참마에 많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커는 멕시코까지 원정해서 이 참마를 채취하여 그 참마에서 독자적인 방법으로 프로게스테론 합성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재정적 지원을 그의 대학에서도 그리고 미국에 있는 어느 제약회사에서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펜실바니아 주립대학을 사직하였으며, 멕시코로 가서 오두막을 하나 빌렸다. 그리고 노새를 타고 바로 멕시코 남부의 정글지대로 향했다. 그는 10톤의 참마를 채취하여 멕시코 시내에서 빌린 실험실에서 그가 원했던 사포게닌인 디오스게닌(diosgenin)을 분리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마커는 친구의 연구실에서 자신의 방법으로 2,000그램의 프로게스테론을 합성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가격으로 16만 달러였다. 마커는 멕시코 시로 다시 돌아가서 전화번호부를 보고 작은 연구소 하나를 찾아내었으며, 두 사람의 소유자를 설득해서 프로게스테론을 생산하는 모험적인 일에 협력할 것을 납득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회사를 신텍스라고 이름지었다. 마터는 동료들과 크게 다투는 바람에 2년도 못 되어 손을 떼고 말았지만 신텍스 사에 남아있는 멕시코 공동 경영자들은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은 조지 로젠크랑츠를 쿠바에서 데리고 왔다. 로젠크랑츠는 계속하여 프로게스테론을 합성하는 일에 몰두하였을 뿐만 아니라 같은 멕시코의 참마에서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신텍스 사는 유럽의 카르텔(cartel ; 기업연합. 특히 독일에서 발달한 자본 독점 형태)제도를 깸으로써 호르몬의 가격은 1그램당 80달러에서 약 1달러로 떨어졌다. 1949년 칼 제러시는 신텍스 사 연구그룹의 지도자로부터 수년 전 E.C.켄달이 발견한 당시 마법의 약이라고 여겼던 별도의 스테로이드인 코리손(cortisone)을 제조하도록 요청받았다. 제러시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갔으며, 19세에 케년대학을 졸업한후 22세 때에 위스콘신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뉴저지 주 시바 제약회사의 연구자 시절에는 멕시코로 가서 신텍스 사의 스테로이드 연구를 지도해 줄 것을 권유받았다. 제러시가 신텍스로 갔을 때 "경구 피임약을 계획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주요한 목적은 코디손이었으나 또 다른 연구목표는 여성 호르몬의 하나로 사춘기나 폐경기에 있기 쉬운 어떤 생리불순을 치료하는 에스트라디올(estradiol)이었다. 에스트라디올과 같은 생리 작용을 갖는 분자를 합성하고 있는 도중에 제러시와 신텍스 사의 화학자들은 우연히 프로게스테론과 흡사한 스테로이드를 만들게 되었다. 이 화합물은 19-노르프로게스테론이라고 하며 프로게스테론보다 탄소 원자가 한 개가 적은 분자였다. 이 화합물은 천연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보다도 효과가 강했으며 혈관으로 직접 주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프로게스테론의 작용 중 하나가 임신 중에 배란을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연 피임약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신텍스 사 화학자들의 다음 목표는 프로게스테론형 화합물인 19-노프로게스테론을 개량하여 주사가 아닌 경구 투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12년쯤 전에 독일의 화학자 한스 인호픈이 발표한 연구에서 힌트를 얻어 약간의 화학적 변형으로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개량 화합물 노르에신드론(norethindrone)은 목적했던 대로 강력한 프로게스테론형 활성을 가지고 있으며, 위 속에서 안전하기 때문에 입으로 섭취할 수 있었다. 이렇게 최초의 경구 피임약은 탄생했다. 이것은 마커에 의해서 사포게닌을 성 호르몬으로 변환시키는 새로운 방법의 발견과 멕시코의 야생 참마에서 사포게닌을 얻기 위해 열대 정글에서의 그의 위험한 모험, 그리고 아주 작고 새로 생긴 연구소가 유럽의 카르텔 지배에 도전하는 모험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칼 제러시의 프로게스테론과 유사한 합성 피임약의 우연한 제조, 그리고 입으로 쉽게 섭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개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의 가능성이 알려짐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도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되었으며, 지금은 여러 종류의 경구 피임약이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피임약의 거의 절반은 자그마한 멕시코의 제약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합성한 화합물, 노르에신드론을 그 유효성분으로 하고 있다.
럿셀 마커는 신텍스 사를 사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학도 그만두었다. 그가 47세가 된 1949년 이후에는 화학의 연구와 제조에도 관계하지 않았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매우 자존심이 강했다. 예를 들면, 메릴렌드대학에서 화학의 학의를 취득하기 위한 필수과목인 자연계 화학의 학점을 취득할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는 평생 학위를 갖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주요 대학에서 연구직의 지위를 얻었고, 인생의 젊은 한때에 이미 화학 역사에 남는 과업을 성취하였던 것이다. 칼 제러시는 멕시코에서 3년을 보낸 후 웨인 주립대학에 직을 얻어 부교수에서 1959년 정교수가 되기까지 그곳에 있었다. 그는 신텍스사와 그리고 나중에는 제이콘 사와 연구에 관한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1959년에는 스탠포드대학의 화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항히스타민제 및 경구피임약 등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로 인하여 여러 명예학위와 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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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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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유기장이의 딸을 정부인으로 삼은 이장곤
이장곤(1474-?)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희강, 호는 금재이다. 연산군 원년(1495)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연산군 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교리 때에 왕의 비위를 거슬려 거제에 귀양갔다. 연산군은 이장곤이 일을 도모할까 의심하여 다시 포교를 보내어 잡아오게 하였다. 이장곤은 죄를 더 받을까 두려워하여 함흥으로 도망을 갔는데, 도중에 목이 몹시 말랐다. 마침물을 긷는 처녀가 있어 물 한 바가지만 주기를 청했더니, 그 처녀는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주는 것이었다. 이장곤이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처녀가 말했다.
"목이 몹시 말라 급히 마시면 체할까 염려되어 천천히 마시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장곤이 그 지혜로움에 놀라 다시 물었다. "너는 누구의 딸이냐?" 알고 보니 건너편 유기장 집 딸이었다. 그는 곧 처녀의 집으로 따라가서 사위가 되어 몸을 의탁하였다. 이장곤 같은 서울의 귀한 손이 어찌 유기(고리) 짜는 것을 알겠는가. 그는 날마다 낮잠만 자고 지냈다. "내가 사위를 맞이한 것은 유기 만드는 일을 돕게 하기 위해서인데, 오직 밥만 먹고 밤낮 잠만 잘 뿐이니, 이는 곧 하나의 밥통이로다" 유기장 부부가 노하여 아침, 저녁의 밥을 반으로 줄여 버렸다. 그의 아내가 그를 불쌍히 여겨 매양 솥바닥의 누룽지를 긁어 더 먹여 주었다. 이렇게 지낸 지 수년이 되었는데, 중종이 반정하고 조정이 일신되어 연산군 때에 죄를 얻은 사람을 모두 사면하였다. 이장곤의 관직도 도로 주어 팔도에 명령하여 찾게 하니,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장곤이 풍문에 그 소문을 듣고 장인에게 말하였다.
"관가에 매달 바치는 이번 유기는 내가 져다가 바치겠소" "자네 같은 잠꾸러기가 동서의 방향도 모르는데, 어찌 관가에 상납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직접 바치더라도 번번이 퇴짜맞기 일쑤이다. 당치 않은 말은 아예 하지 마라" 곁에 있던 그의 아내가 말하였다. "시험삼아 한번 보내 보도록 하시지요" 그러자 장인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이장곤은 등에 유기를 짊어지고 관아의 뜰로 바로 들어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 데 사는 유기장이 유기를 바치기 위해 와서 기다립니다" 마침 그때 함흥부윤은 이장곤과 친했던 무관이었다. 그 무관이 이장곤의 얼굴을 보고 크게 놀라 섬돌을 내려와서 손을 잡고 자리에 올랐다. "공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런 모양으로 나타나셨소? 조정에서 찾은 지 오래되었소" 이어서 술과 음식과 옷과 갓을 챙겨 주었다.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이 유기장의 집에 몸을 의탁하여 구차스럽게 목숨을 연명하다가 뜻밖에 다시 밝은 세상을 보게 되었소" 함흥부윤이 순찰사영에 급히 보고하여 곧 역마를 내어 상경하도록 재촉하였다. "유기장의 집에 3년 동안 주객의 처지로 있었으므로 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겸하여 조강지처의 의리가 있소. 지금 가서 작별을 고할 것이니, 그대는 내일 아침에 나를 찾아와 주시오" 이장곤이 이렇게 말하고 유기장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 달 유기를 무사히 갖다 바쳤습니다" 장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였다. "이상하다. 옛말에 '올빼미가 천년 묵으면 꿩 한 마리는 잡는다' 하더니, 그것이 헛말이 아니다. 오늘 저녁밥은 조금 넉넉히 차려 주어라"
이튿날 아침에 이장곤이 일찍 일어나서 뜰을 청소하니, 장인이 좋아했다. "우리 사위가 어제 유기를 잘 바치더니, 오늘 아침에 집 뜰을 청소하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도다" 이장곤이 뜰에 짚자리를 까니, 장인이 의아해 하였다. "어찌하여 자리를 까는고?" "오늘 사또가 행차하실 것입니다" 장인이 비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잠꼬대 같은 소리 하지 말게. 사또가 어찌 우리 집에 행차하겠는가. 이제 와서 생각하니 어제 유기를 잘 바쳤다는 것도 필시 길에 버리고 집에 돌아와서 허세를 부려 큰소리친 것이로구나" 그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함흥부의 아전이 채색 자리를 가지고 헐레벌떡 와서 방안에 깔았다. "사또의 행차가 곧 당도하십니다" 유기장 부부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사색이 되어 울타리 사이에 피해 숨어 있었다. 조금 뒤에 수령의 앞길을 인도하는 전도 소리가 문 앞에 들리고 본관 사또가 당도하여 인사를 한 다음, 이어서 물었다. "아주머니는 어디에 계시오? 청컨대 상견례를 행하겠습니다" 이장곤이 아내를 불러내어 절하게 하였는데, 의복은 비록 남루하나 의용이 매우 안온하고 예절이 발라 천한 상민 여자의 촌스런 태도가 없었다. 본관 사또가 경의를 다하여 말하였다. "이 학사(이장곤을 말함)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적에 아주머니의 힘으로 오늘이 있게 되었으니, 비록 의기의 남자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소" 또 사또가 유기장을 불러 술을 권하고 따뜻한 말로 위로하였다. 이웃 고을 수령이 잇달아 오고 감사도 막료를 보내어 전갈하니, 유기장의 집 문밖이 사람과 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장곤이 본관 사또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비록 천한 상민이나, 내가 이미 아내로 삼았으니 버리는 것은 불가하오. 원컨대 가마 한 채를 빌려주어 같이 가게 해주시오" 본관 사또가 그 말대로 들어주었다. 이장곤이 상경하여 임금에게 사은하니, 임금이 그에게 떠돌아 다니던 전말을 물으므로 이장곤이 그 사실을 갖추어 아뢰었다.
"이러한 여자를 천첩으로 대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임금은 새삼 감탄하며 특별히 후부인으로 올려 주었다. 이장곤은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이장곤은 갑자사화 때 망명한 지 수개월 만에 한번 집에 와서 본부인을 보고 떠나갔는데, 하루는 집에 이르니 마침 먼동이 트고 있었다.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대숲에 숨어 있었다. 부인은 1년이 지나도 남편이 오지 않자, 죽었을까 의심하여 무당을 불러 점을 쳐보았다. 무당의 답이 "죽지 않고 그림자가 뜰 가운데 있다" 하였다. 이장곤이 그 말을 듣고 그 뒤로부터 감히 다시 집에 오지 못하였다. 이장곤은 만년에 항상 "무당의 말도 헛말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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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최후의 날
기원 79년 8월말 이태리의 '나폴리'만 부근에 있는 '베스비우스'화산이 대 분화를 일으켜 그 기슭에 있던 로마인의 별장지 '폼페이', '헬라클레네움', '스타비아에' 등의 도시가 화산재에 뒤덮인 채 멸망하고 말았다. 이것은 전설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였으나 1748년 봄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우연히 이 도시의 유적을 파냄으로써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으며 지금 거리의 대부분이 드러나서 이태리 유수의 관광지로 되어 있다. '폼페이'가 멸망한 것은 '로마'의 전성시기였으므로 발굴의 결과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상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특히 주민의 일부분까지도 화석화하여 남아 있어 '폼페이'의 폐허가 지니는 의의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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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열번째 이야기 당나귀를 팔러 간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팔러 장에 가고 있었다. 그들은 당나귀에 아무 것도 싣지 않은 채였다. 길을 가다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말했다.
"당신들 제정신이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당나귀를 써먹지도 않을 거면 먹이는 왜 준 거요? 그걸 타고 가면 몸도 덜 피곤하고 신발도 덜 닳지 않겠소? 당나귀야 튼튼하고 건강하니 그 위에 탄다고 해서 뭐가 문제요? 그게 당나귀가 해야 할 일이 아니오. 워낙 일할 팔자를 타고 태어난 놈 아니냔 말이오?"
사람들의 말을 그럴듯하게 여긴 아버지는 당나귀 위에 아들을 태우고 자기를 걸어서 갔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아무리 세상이 말세라고 해도 그렇지. 아버지는 늙어서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는데 그냥 걸어서 가고, 사냥개보다 더 잘 뛸 수 있을 것 같은 젊은 녀석은 당나귀를 타고 와? 자식을 잘못 키워도 영 잘못 키웠어. 자식 교육은 그렇게 시키는 게 아닌데. 그렇게 키워봐야 게으르고 철없는 한량밖에 더 되겠나?"
그들의 충고가 제법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늙은 아버지는 아들을 내려오게 하고, 자기가 당나귀를 타고 갔다. 그렇게 아버지는 당나귀를 타고, 아들은 뒤에서 걸어가다가 또다른 나그네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보자마자 나무라기 시작했다.
"원 세상에, 무슨 아버지가 저리도 매정하담. 둘 다 태워도 끄떡없을 것 같은 당나귀인데 자기 혼자만 타고 가다니. 아들보다 당나귀를 더 귀하게 여기는 모양이군. 이 더위에 저렇게 걸어가다니 아들이 무슨 고생이야. 저러다가 더위라도 먹어 일사병에 걸리면 몸도 탈날 텐데. 다리라도 다쳐봐. 병신되기 딱 십상이지. 젊어서 고생하면 늙어서 병원신세나 지고 골골할 텐데."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이 측은해져서 아들도 당나귀에 함께 태웠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타고 가다가,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전에 보았던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아버지와 아들을 나무랐다.
"세상에 별꼴을 다 보겠네. 당나귀 한 마리 위에 장정 둘이 타고 가다니. 당나귀 한 마리 위에 당나귀 두 마리가 올라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 저 가련한 것이 힘이 들어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잖나. 인정사정도 없는 사람들 같으니. 차라리 그 당나귀를 타고 언덕길을 올라가지 그래. 당나귀가 배가 터져 죽어야 직성이 풀릴 사람들이야."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구나. 당나귀가 지쳐서 죽으면 안 되잖니. 다리를 묶어서 막대기에 걸쳐 성까지 들고 가자꾸나. 그렇게 하면 힘도 덜 들고, 또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인정 많다고 칭찬도 할 것 아니겠니? 당나귀도 푹 쉬고 나면 팔 때 돈도 더 많이 쳐서 받을 수 있을 테고."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당나귀의 네 발을 묶어 언덕길을 올라갔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이런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보고는 마구 비웃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경우도 있나? 이 당나귀가 똑똑하기는 똑똑한가 보군. 두 멍청한 인간들이 자기를 메고 언덕길을 오르게 하니 말이야. 저 당나귀라면 두 사람을 태우고 거기다가 짐까지 실을 수도 있을 텐데, 거꾸로 당나귀가 사람들한테 실려가다니.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러 태어난 짐승인데 저리 신주단지처럼 모셔서야 되겠나. 괘씸한 짐승이로군. 저런 놈은 가죽을 벗겨서 세상 사람들한테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해."
아버지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당나귀가 괘씸해지면서 화가 났다. 그는 당나귀를 메고 가던 막대기를 꺼내들고는 당나귀 머리를 냅다 내리쳤다. 당나귀가 그 자리에서 죽어 고꾸라지자 아버지는 당나귀 껍질을 벗기면서 말했다.
"온종일 이 놈의 당나귀 때문에 수도 없이 욕만 먹었군. 이제 이 놈 껍데기를 벗겨버리면 욕 먹을 일도 없겠지."
아버지는 당나귀 껍질을 어깨에 들쳐메고 장으로 갔다. 착한 일보다는 나쁜 일에 더 눈독을 들이는 동네 개구장이들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개구장이들은 늙은 노인네가 피범벅이 된 당나귀 껍질을 팔려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 껍질을 뺏아 여기저기로 던지다가 진흙탕 속에 빠뜨렸다. 그 덕에 노인의 얼굴은 진흙범벅이 되고 말았다. 진흙과 피투성이로 온몸이 엉망이 된 그는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려다가 결국에는 재산을 잃고 망신만 당한 꼴이 되었다.
*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다. 모든 사람을 한결같이 만족시킬 수는 없으므로 자기 소신을 가지고 일을 추진해야 한다. 남의 말에 이리저리 휩쓸리다 보면 죽도 밥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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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3. 너무나 길었던 삼국시대 (700 년 동안의 분열이 가져다준 역사적 상처)
영고,동맹 등에서 확인되는 제사의식과 하늘사상
복잡한 계보에도 불구하고 삼국은 모두 고조선의 후예들이 세운 국가였다. 또 그들 국가는 모두 고조선과 같은 거대한 연맹을 주도적으로 세우기 위해 치열한 경쟁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삼국은 나름대로 역량을 키우는 데 주력했고, 그 결과 문화적,사상적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여 통합의 역량을 키우려고 했다. 불교나 도교 및 유학을 받아들인 것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 각 나라가 가장 먼저 발전시켜내려고 한 것은 오로지 한 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삼국의 뿌리가 되는 고조선의 하늘사상과 하늘숭배 문화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일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국사기"에도 그런 내용의 기록이 자주 보이며, 중국 역사서에도 비슷한 기록이 자주 보이며, 중국 역사서에도 비슷한 기록이 나타난다. "고구려와 신라에는 도리에 맞지 않게 세운 사당이 있다"고 서술한 기록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기마종족과 계보가 달랐던 한족의 역사가들은 오만방자하게도 하늘사상에 뿌리를 둔 우리 겨레의 문화적,사회적 전통을 천박하고 무식한 행위로 평가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책임편찬자인 김부식도 그런 기록을 그대로 인용했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편에 보이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북사"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늘 10월달(우리 겨레는 원래 봄을 계절의 출발로 삼지 않고 겨울을 출발로 삼았기에 10월이 첫달이었으며, 12월은 세 번째 달이라는 뜻에서 섣달이라 불렀다)에 제사를 지내는데 도리에 맞지 않는 귀신집이 많다. 신을 모시는 두 개의 사당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 하여 나무로 조각한 여인네의 우상을 받들었고, 다른 하나는 고등신이라 하여 시조 부여신의 아들을 받들었다. 이 두 곳에 모두 관청을 설치하고 관원을 보내어 지킨다'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제사의례에 대한 기록이 서너 대목 더 있지만, 그 내용에는 큰 차이점이 없다. 차이점이 있다면 백제의 조상신 이름이 구태로서 신 이름이 다를 따름이다. 김부식이 부정적으로 평가한 기마종족의 하늘숭배는 이처럼 조상신에 대한 숭배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자신들의 조상신을 받듦으로써 삼국 공통의 전통을 존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상들이 모시던 하늘님도 여전히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이 또한 동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 등에서 확인이 된다. 신라의 경우에도 그런 의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하늘과 조상신에 대한 숭배의식뿐만 아니라 삼국은 사상적으로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기자계 이후 형성된 오행사상을 중시했다. 즉 삼국은 제사의식을 비롯한 사상적 측면에서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경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오행사상이란 기자의 홍범사상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모든 사물을 물과 불과 나무와 쇠와 흙의 다섯 가지 요소로 설명하는 사상이다. 오행사상은 기본요소설로부터 시작하는 이론이지만 다른 분야에도 적용이 되었는데, 방위를 나타낼 경우 동서남북과 함께 중앙을 포함하여 '오방'이라 했다. 또 색깔을 나타낼 경우 풀색, 노을색, 붉은색, 흰색, 검은색을 들어 '오색'이라 했고, 소리에서는 궁상각치우의 '오음'을 내놓았으며, 맛에서는 시고 쓰고 달고 맵고 짠맛을 들어 '오미'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별을 관찰할 경우에도 각 요소에 부합하는 수성, 화성, 목성, 금성, 토성을 기본 행성으로 설정했다. 삼국에 이런 오행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음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삼국사기" '잡지' '관직'편에서는 "북사"를 인용해서 백제의 관직을 설명하는데, "서울에는 방을 두고 방마다 오부로 나누었으며 이를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라 했다. 또 부에는 다섯 개의 항이 있어서 평민들이 살았으며, 부는 군사 500 명을 거느렸다"고 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모든 지방조직은 다섯이라는 숫자에 따라 틀이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다섯 부족 연맹체계나 5부 욕살체계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런 조직체계는 고구려나 백제가 오행사상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북사"의 다른 기록에서 "백제에는 오행사상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한 부분이나, "삼국지" '위지' '종회전'에서 왕필이 "주역"을 해석하면서 고구려 역학자들의 오행사상을 인용하였다고 한 부분도 모두 오행사상이 백제나 고구려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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