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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73 호
단기 4340. 10. 10 (음력 8. 3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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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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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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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공것을 주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관찰하는것. / 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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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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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학교생활에 철저하라
열다섯 번째는 학교생활을 성실히 수행하는 일이다. 배우는 학생이 학교에 있을 때에는 그 행동거지를 어디까지나 학칙에 따라야 한다. 책도 읽고 글도 지으며, 학교에 갈 때에는 미리 목욕하여 정신을 맑게 하고 돌아와서는 숙제를 열심히 끝내야 한다. 여럿이 함께 있을 때에는 반드시 토론으로 서로 실력을 키우고, 예법에 맞는 몸가짐을 가지라. 모든 것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질서를 엄숙히 지켜야 한다. 스승에게는 항상 예의를 다해 섬기며 정중하게 질문하라. 그리고 거리낌없이 그 가르침을 따르라. 무익한 것을 물어서 마음과 힘을 헛되이 써서는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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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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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8. 심설 논쟁
2. 심설 논쟁의 이론적 배경
주자학에서 심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주자학에서 말하는 심이란 주로 지각을 가리키는 것이며, 여기에는 '인간의 지각 능력' 및 '감각과 사유까지도 포함하는 의식 일반'이라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주희가 말하는 '지각'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지각'하고는 상당한 정도로 겹치는 개념이지만, 그것보다도 외연이 조금 넓어서 감각에서 인식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주희에게서는 감각과 사유 활동을 포함한 인간의 심리 활동이 모두 지각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이 심은 의식 활동의 결과로서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고 이해되었다. 도심과 인심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지각할 수 있는 주체는 하나이지만 지각된 내용은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도덕 의식의 지각은 도심이고, 각종 정욕의 지각은 인심이다. 그러나 도심과 인심을 막론하고 모두 심인 점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심의 의미는 지각과 사유의 능력 외에 구체적인 지각과 사유까지도 가리키게 되는 것이다. 심에 대해서는 또 두 가지 측면에서 규정이 내려졌다. 첫째는 구조적 측면의 규정이고, 둘째는 그 본질적 속성 측면의 규정이다. 첫 번째 측면에서 내려지는 규정은 '심통성정'으로 표현되었다. 심통성정이라 할 때 통자에는 겸(포괄한다)과 주재(통솔한다)의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두 번째 측면에서 내려지는 규정은 심은 기라는 것이었다. 주희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존재는 리와 기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심에 대해서도 리나 기로 설명해야 하며, 리도 아니고 기도 아닌 존재일 수는 없다. 물론 심을 단순한 기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심을 규정할 때의 기는 이른바 영묘한 기이며, '텅 비고 밝으며' '텅 비고 영묘함'을 본질로 한다고 설명되었다. 지각이라는 것이 작용성을 갖는 한 주희에게서 그것은 리로 다루어질 수 없었다. 성은 심의 체(제일의적인 것. 이에 대해 용은 제이의적인 것이다)이며, 심은 성을 알맹이처럼 감싸고 있는 것이다. 심이 단순한 기가 아니라 기의 정상(정령)이라고 하는 까닭은 작용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심이 인간의 감각 기관과 신체에 언제나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을 이야기하면서 주희가 언제나 강조하고 있는 점 가운데 하나는 심은 몸의 주재라고 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신체적 활동이 의식에 따른다는 것은 일반적 경험에 의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이 인간의 신체를 주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리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희에게서 심이 리와 동일시될 수 없는 이유는 심이 지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심에는 선악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희에 의하면 심과 리가 일치하는 경우를 상정할 수도 있다. 성현의 단계에 이른 인자의 심은 이미 리와 합일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모든 생각과 행동이 리와 합치한다. 이런 경우에 인자의 심은 곧 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심 일반을 모두 이와 같이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 주희의 생각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희의 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훗날 심설 논쟁 주체들 각각의 입장에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심을 리적 측면에서 강조하는 심주리, 즉 심은 리를 주로 한다는 입장에서는 심이 일신을 주재하고 심이 리와 합일된다는 점이, 심을 기적 측면에서 강조하는 심주기, 즉 심은 기를 주로 한다는 입장에서는 심이 지각이라고 하는 작용성을 갖는다는 점이 주된 근거가 되었다. 그러므로 심설 논쟁은 주자학의 이론 구조에서 볼 때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그것은 주자학이 지향하는 바가 기본적으로는 윤리적 측면에 있지만, 그 윤리적 당위성과 근거를 존재론적 측면에서 마련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황과 이이에게서 심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심에 대한 이황과 이이의 이해차는 후대 조선 주자학의 성리설 분화에 중요한 입각점으로 자리하였다. 이황의 "심은 리와 기가 합해진 것"이라는 주장은 주자학을 수정하는 입장에서 "심이 곧 리이다"라는 명제로 전화되었으며, 이이의 "심은 기이다"는 전통적 입장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황은 주희의 심에 대한 규정에서 구조적 측면에 주목하여 심을 리기의 합으로 보았다. 물론 리와 기가 합해졌다고 하는 말이 리나 기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황 역시 주자학에 기초하고 있는 만큼 모든 존재를 리와 기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황은 심을 기로만 규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심을 리와 기가 합쳐져 있는 것이라고 규정하였을 뿐이다. 심이 리기의 합이라고 하는 점은 이황에게서 리기의 호발을 주장하는 주요한 입각점이었다. 심을 구조적인 측면에서 리와 기의 합이라고 규정할 때 심을 리의 측면에서 볼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이러한 개연성은 이황을 존숭했던 이진상이 심이 곧 리라고 주장하는 점에서나, 심을 리와 기가 합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항로가 심에서의 리의 측면을 보편화시켜 이해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이황의 심을 리로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세기 조선 주자학자 가운데 이황의 설을 존숭하는 주자학 수정의 입장에는, 주희와 이황의 이러한 언급에 나타나는 의식이 주요 근거로 자리한다는 점에서 개연성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황이 심과 태극을 연관시켜 논의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 반면에 이이는 "심은 기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기에 대해 리기론적 규정을 분명히 하였다. 여기서 이이가 심을 기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심에 지각이라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이 역시 심을 단순한 기로 보지는 않았다. 심은 아주 맑고 텅 비고 밝은 것을 본체로 하며, 온갖 리를 전부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이는 심의 허령함은 성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기 자체의 속성이 그런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이에게서도 심이 기라는 명제는 사단칠정에 관한 논의에서 기발만을 인정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이이의 심, 성, 정, 의에 대한 이해는 주희와 다름없이 나타나지만, 그는 이러한 관계 속에 있는 성을 단지 기질지성으로만 이해하는 특징을 보여 준다. 리와 기는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리가 인간에게 내재된 이상 그것은 형질과 결합한 것이므로 성이라고 해야 하고, 그것이 기와 연관을 맺는 한 기질지성이며, 그 가운데 리만을 따로 말하면 본연지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본연지성은 사단과 연결되고 기질지성은 칠정에 연결되어 칠정 안에 사단이 포함된다는 명제가 성립되었다. 이와 같이 심이 기라는 명제는 이이의 사단칠정론에서 '기발리승일도'와 '칠정포사단' 논리의 기점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이황이나 이이 모두 심에 대한 규정은 자신들의 논리적 정합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차이는 위와 같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황과 이이의 이러한 심에 대한 규정은 19세기 조선 주자학자들에 이르러 '심즉리'와 '심시기'로 나누어지면서 더욱 분명한 의미로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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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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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
본뜻 : 들어올릴 휴, 이끌 휴와 들 거가 합쳐진 이 말은 종말론을 주장하는 개신교의 한 종파에서 만들어 낸 신조어다. 들어올림, 이끌어 올림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바뀐 뜻 : 일부 기독교 교단에서 이 '휴거'현상이 세상 종말의 날에 심판의 징조로 나타날 것이라고 선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사회적으로도 큰 물의를 일으켰으나, 후에 이 교리의 허황됨과 삿됨이 널리 알려지면서 휴거 논쟁이 가라앉았다.
"보기글" -1993년 10월의 휴거 선풍은 대단했었지 오죽 했으면 휴거가 일어난다는 날, 텔레비전에서 생중계까지 했겠어? -세상이 살기 어렵고 어수선할수록 휴거 같은 종말론이 기승을 부리는 거 같아
얼과 넋
마음의 속살인 느낌·생각·뜻은 몸에서 나오지만 ‘얼’은 몸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그래서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얼이란 말을 썼으니 그게 있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얼간이·얼뜨기·얼빙이·얼빠졌다’는 말이 있다. 얼간이는 얼이 나가버린 사람이다.(‘얼간+이’ 아닌 ‘얼+간+이’로 풀어야) 얼뜨기는 얼이 떠버린 사람, 얼빙이는 얼이 비어버린 사람이다. 얼빙이나 얼뜨기나 얼간이의 사람됨을 싸잡아 ‘얼빠졌다’ 한다. 얼이란 무엇인가? 우선 ‘알’이다. 뜻의 알, 생각의 알이고, 느낌의 알이며, 곧 마음의 알이다. 마음의 알이면 몸의 알이고 마침내 사람의 알이다. 사람의 알은 다른 온갖 알과는 아주 달라 홀소리를 바꾸어 ‘얼’이라 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 한다. 무엇이 돌아가는가? 몸은 주검으로 누워 있다. 느낌과 생각과 뜻인 마음은 몸에 뿌리박혔으니 주검과 떨어질 수 없다. 돌아가는 것은 다름 아닌 얼이다. 어디로 돌아가는가? 본디 왔던 거기로 돌아갈 수밖에. 그런데 몸을 떠나 돌아가는 얼은 얼이 아니다. 몸을 벗어나면 이미 무엇의 ‘알’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뀐 이름이 ‘넋’이다. 무교의 사제인 무당은 굿판에서 넋건지기·넋걷이·넋굿·넋두리·넋맞이·넋반·넋풀이 같은 말을 자주 쓴다. 산사람에게도 ‘넋 빠진 사람’, ‘넋 나간 사람’, ‘넋을 놓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주검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매우 몰아치는 말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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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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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2. 변경의 실력자(진나라 목공)
들어맞은 예언
이때 진나라는 문공의 상중인데다가 아직 매장도 하지 못한 처지였다. 그런 와중에 진나라의 공격 소식을 듣자 태자 양공은 화를 버럭 냈다.
"그 놈들이 나를 멸시하다니! 상중인 기회를 틈타 내 속국을 공격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는 당장 상복을 검게 물들이고 전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효산 골짜기에 군대를 매복시키고 진군이 나타나자 모조리 쳐부수었다. 무사히 살아 남은 자는 하나도 없다시피 되었고 두 사람의 장군도 생포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미 이야기했듯이 문공의 부인은 진나라의 공주였기 때문에, 생포된 두 장군의 목숨을 구하려고 양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명을 거역하고 활나라를 공격한 이 장군들을 내 아버님께서는 골수에 맺히도록 원망하고 계실 것이오. 그러니 이 자들을 다시 돌려보내서 아버님께서 처벌하게 해주세요."
그러자 양공은 그 말을 받아들여 두 장군을 돌려보냈다.
목공은 상복을 입고 두 장군을 도읍의 교외에까지 나가 마중하며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백리해와 건숙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자손인 그대들에게 수치를 끼치게 되었소. 나에게는 그대들을 처벌할 자격이 없소. 앞으로 수치를 벗어나도록 전념해 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오."
그러면서 두 장군에게 전보다도 더 후한 대접을 해 주었다. 그 후에도 목공은 또다시 맹명시 등 두 사람을 장군에 임명하고 진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또다시 패배한 채 철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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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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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20장. 우연한 의학적 발명.발견.
인슐린. 1889년 독일의 스트라스브르크에서 췌장이 소화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던 요셉 폰 메어링과 오스카 밍코브스키는 개로부터 췌장을 떠어냈다. 이튿날 실험실 조수가 이 개의 오줌에 평상시보다 파리가 많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파리가 왜 이 요에 많이 모이는가를 수상쩍게 여기고 요를 분석해 본 결과 다량의 당이 함유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 속에서 당이 발견된 것은 당료병의 일반적인 증상이다. 폰 메어링과 밍코브스키는 자신들이 실험을 통해 최초로 동물이 당뇨병을 일으킨 증세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개가 췌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 기관과 당뇨병 사이에 관계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 후, 폰 메어링과 밍코브스키는 췌장이 당의 이용을 조절하는 분비물을 만든다는 것과 또 이 분비물이 결핍되면 당의 신진대사에 장해가 발생하여 당뇨병의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분비물을 분리하려는 실험이 자주 실시되었으나 1921년까지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젊은 캐나다인 의사 번팅과 의학생인 베스트는 토론토대학의 맥레오드 교수의 연구실에서 이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개의 췌장으로부터 분비물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췌장을 떼어내서 당뇨병에 걸린 개에게 이 추출물을 다시 주사하자 개의 혈당치는 정상이거나 그 이하로 내려갔으며, 요 속의 당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의 모든 증상도 개선되었다. 맥레오드 교수는 이 연구에 대단한 흥미를 갖게 되어, 이 호르몬을 추출하는 방법을 개량하거나 투약량의 기준을 만들거나 했다. 그는 또 이 분비물에 인슐린(insul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슐린은 췌장에 산재하는 '랑게르한스의 섬'이라고 불리우는 작은 섬과 같은 세포군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으며, 지금은 호르몬 종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년도 채 안되어 정제된 소의 췌장으로부터 추출물을 당뇨병 환자에게 사용한 결과 증상이 개선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최초로 시험된 사람은 중증의 당뇨병에 걸려있던 번팅의 학교 급우였다. 그의 병은 극적으로 개선되었고, 투약량을 규격화하기 위한 그의 역할은 컸다. 인슐린이 처음 임상에서 사용된 1922년 이전에는 식사 요법이 당뇨병의 증상을 완화시켜서 인명에 도움을 주었으나 도저히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당뇨병은 쇄약성 병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죽음에 이르는 불치의 병이었다. 면역성이 떨어져 여러 가지 전염병에 걸리기 쉽고 수술할 때는 장애가 많이 따랐으며, 출산의 경우 산모와 산아 모두 다 위험이 많았다. 인슐린은 대부분의 당뇨병을 조절할 수 있으며, 부수적인 위험을 없애거나 감소시키고 수명을 연장시켜 활동적이고 유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하였다. 번팅과 맥레오드는 1922년 12월 아메리카 생리학회에서 인슐린의 분리와 당뇨병의 임상적 이용에 관해서 강연을 했다. 그 후, 두 사람은 1923년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발견 후 단기간에 수상의 영예를 갖게 된 사실은 임상의학에서 이 발견의 중요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슐린은 단백질의 일종으로서 51개의 아미노산이 특정한 순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두 개의 사슬이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천연 고분자이다. 소의 인슐린 고리속의 아미노산 배열은 1953년 케임브리지대학의 프리데릭 산거에 의해서 결정되어으며, 그는 이 업적으로 195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아미노산의 배열순서는 동물의 종류에 따라서 조금 다르다. 그러나 이 배열의 차이는 사람의 당질대사의 조절효과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예를 들면 말의 인슐린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에게는 돼지의 인슐린을 사용할 수 있다. 최근까지 인간의 당뇨병에 사용하는 인슐린은 모두 말과 돼지의 췌장에서 채취했었다. DNA(디옥시리보 핵산)에 의한 단백질 합성의 조절기구가 해명되어 그 지식에 의한 유전 공학이 진보한 결과, 주요 제약회사는 대장균을 이용한 사람의 인슐린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 방법은 때로는 신뢰할 수 없었던 동물 재료에 의존하지 않고 인슐린의 대량공급을 가능하게 하였다. 폰 메어링과 밍코브스키는 소화에 관한 그들의 업적에 의해서가 아니고, 주로 당뇨병의 원인과 제어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 때문에 기억되고 있다. 이 무서운 병의 치료에 대한 공헌에 번팅과 베스트 쪽이 큰 영예를 얻고 있으나, 병의 원인에 관한 최초의 통찰은 췌장을 적출한 개의 요에 파리가 모여 든 것을 발견한 세렌티피티에 대하여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민하게 대응한 폰 메어링과 밍코브스키에 의한 공적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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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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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잘린 여자 속옷을 항상 옆에 두고 후손을 경계한 박영
박영(1471-1540)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자실, 호는 송당이다. 아버지는 수종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양녕대군의 딸에게 장가들어 박영을 낳았다. 박영은 재주와 도량이 넓고 컸다. 성종 22년(1491)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어느 날 그가 궐내에 들어가 숙직을 하다가 탄식하였다.
"말을 달리고 칼을 시험하는 것은 한 용부의 일일 뿐이다. 사람으로서 학문을 하지 않으면 어찌 군자가 되겠는가"
그는 드디어 결단을 내려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낙동강 가에 집을 짓고 신당 정붕에게 수학하였는데,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고 몸소 실천하며 두문불출한 지 수년이었다. 어느 날 신당이 손을 들어 냉산을 가리키며 박영에게 물었다.
"저 산 밖은 어떠할까?" "외면이 바로 전면이니 저것이나 이것이나 매한가지일 것입니다" 신당이 웃으며 말하였다. "오늘에야 그대가 책을 읽은 공효가 있음을 알겠도다"
그대로 수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부지런히 강구하였다. 한번은 김해부사로 있을 적에 이웃집 여자의 곡소리를 들었다. 급히 형리를 시켜 데려와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우리 남편이 아무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박영이 사람을 시켜 그 남편의 시체를 메어 오게 하고 힘센 군교를 시켜 시체를 반듯하게 누인 다음, 손에 힘을 주어 시체를 가슴에서부터 아랫배까지 누르게 했더니, 드디어 배꼽 속으로부터 손가락 만한 대나무 가지가 뚫고 나왔다. 박영이 그 여자를 결박해 놓고 심문하자 그 여자가 다 실토하였다.
"마을의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같이 살기로 약속하고, 제 남편이 술에 취해 자는 틈을 이용하여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박영이 곧 군사를 풀어 그 사나이를 급히 잡아다 물으니 그 말이 모두 부합되므로 법에 따라 처벌하였다.
하루는 들새가 관아 후원에 날아와서 놀란 소리로 세 번 울고 서남쪽으로 가 버렸다. 박영이 가족들을 불러 급히 행장을 꾸리도록 했는데, 행장을 미처 꾸리기도 전에 금부도사가 와서,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그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심문을 받을 적에 뼈마디가모두 부서질 정도였다. 박영이 큰 소리로 추관에게 물었다.
"누구의 고발이오?" "아무의 고발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과 원한을 맺은 사람으로는 경주부윤 유인숙이 나보다 심하였다. 유인숙도 잡혀 왔다면 무고임이 분명하니 나는 살아날 수 있겠다"
중종이 바야흐로 국정을 베풀고 친히 국문하다가 이 말을 듣고 그 까닭을 물었다.
"그 사람이 문서를 위조하여 남의 전지를 빼앗으려고 김해부에 소송을 했다가 사리가 틀려서 배척을 당했으며, 또 경주부에 소송했더니, 경주부에서는 그 간사한 짓에 분노하여 감사에게 보고해서 형벌을 받았으므로 원한이 나보다 심할 것입니다. 저놈이 내가 반역을 도모한다고 먼저 고발하였으니 경주부윤 유인숙도 그 다음에 고발할 것입니다"
임금이 드디어 유인숙에게 물으니, 유인숙의 진술이 박영의 진술과 같으므로, 고변한 자를 반좌율(무고한 사람에게 무고 입은 사람에게 부과한 죄와 동일하게 부과함)에 적용하여 처단하였다.
박영이 선전관에 임명되었을 적의 일이다. 어느 날 준마를 타고 화려한 옷을 입고 저녁 무렵에 수문동을 지나는데, 동네 어귀에서 꽤 아름다운 여인이 손짓하며 불렀다. 박영이 말에서 내려 종에게 "내일 아침 일찍 오라"고 이르고는 그 여인을 따라가니 사람이 없는 깊숙하고 외진 곳에 집이 있었다. 박영이 그 집에 이르자, 날은 이미 저물어 캄캄하여졌다. 그 여인이 박영을 대하고는,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므로 그 까닭을 물었다. 여인은 곧 손을 들어 말소리가 나지 않도록 중지시키고, 낮은 목소리로 귀에 대고 말하였다. "공의 풍채를 보니 필시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나로 말미암아 비명에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슬퍼합니다" 박영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 묻자 여인이 말하였다. "도적들이 나를 미끼로 삼아 사람을 유인하여 죽이고 그 의복과 타고온 말, 말안장 등을 나누어 가진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내가 날마다 탈출할 것을 생각해 왔으나 그들이 죽일까 두려워 감히 탈출할 계책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은 나를 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박영은 칼을 빼앗아 들고 앉아서 기다렸다. 밤중에 방 위의 다락에서 도적들이 여인에게 큰 밧줄을 내려보내 "그자를 묶어 올려 보내라"고 하였다. 박영은 몸을 솟구쳐 벽을 차 무너뜨리고 급히 여인을 업고 탈출하여 담을 뛰어넘었다. 여인이 가지 말라며 붙잡자 그는 속옷 자락을 잘라 버리고 떠나왔다. 그 이튿날 벼슬을 사직하고 선산으로 돌아와서, 무인 노릇을 버리고 글을 읽어 생각을 바꾸고 세상의 순수한 유학자가 되었다. 평소에 앉은 자리 옆에 항상 잘린 여자 속옷을 두고서 자제들에게 보이면서 경계하였다.
중종 16년 신사옥사에 무고를 당하여 혹독한 형을 받고 얼마 뒤에 방면되었다. 70세에 별세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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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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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의 벽
68년의 중동전쟁으로 '통곡의 벽'이 일약 유명해졌다. 본래는 예루살렘의 신전이었는데 지금은 높이 약 40야드의 벽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신전은 역대 유대인 예배의 중심지였는데 기원 전 천 년경 '솔로몬'왕이 처음으로 건립했다. 기원전 586년에는 '바빌로니아'인이 이를 파괴, 기원전 516년 '조로바벨'이 재흥, 그후 BC. 20년 '헤롯'대왕이 신전 건축에 착공하여 기원 64년에 준공했으나 70년에는 다시 로마군에 의하여 파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벽은 유대인이 기도드리며 지난날의 영화를 회상하여 우는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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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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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일곱번째 이야기 정신병자보다 더 미친 사람
옛날 밀라노에 아주 유명한 의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정신병을 잘 낫게 하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의 집에는 큰 울타리가 쳐져 있고, 그 안으로는 더럽고 깊은 늪이 있었다. 그 늪 가운데에는 기둥이 세워져 있었는데, 의사는 병을 고치러 온 정신병자들을 벌거벗겨 기둥에 묶어놓고 치료를 했다. 늪의 물은 무릎 정도부터 시작해서 미친 정도에 따라 그 깊이가 깊어졌다. 그는 환자의 병에 차도가 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는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고 계속 묶어만두었다. 어느날 한 정신병자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를 찾아왔다. 그는 허벅지까지 오는 진흙탕 속에서 보름을 지냈다. 보름이 지나자 그는 제정신을 차린 것 같다며 제발 꺼내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려 통사정을 했다. 의사는 고문과 다름없는 그 지저분한 늪에서 환자를 꺼내주기는 했지만 울타리 밖으로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간 정신병자가 의사의 말을 듣고 고분고분하게 지내자, 의사는 그에게 울타리 밖으로 나가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 하지만 문 밖으로 나가면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정신병자는 신이 나서 집안을 돌아다녔지만, 항상 의사의 말을 명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신병자는 문가에 기대어 서있다가 말을 탄 기사가 매를 데리고 오는 것을 보았다. 두세 마리의 개도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평생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는 그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그래서 기사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기사가 가까이 오자 정신병자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내 말 좀 들어봐요. 당신이 타고 온 게 뭔지 얘기해줘요. 그리고 그게 뭐에 쓰이는 건지도요." "이건 '말'이오. 사냥을 하기 위한 거라오." 다시 정신병자가 물었다. "그럼 당신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뭐요? 그건 어디에 쓰이는 거요?" "이건 '매'라는 거요. 메추라기나 백로 같은 새들을 사냥하기 위한 거라오." 정신병자가 개에 관해서도 궁금해하자 기사가 말했다. "이건 '개'라는 건데, 사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동물이요. 개가 산토끼, 새, 그밖의 다른 사냥감들을 찾아내기 때문이라오." 그러자 정신병자가 물었다. "그러면 개나 매를 데리고 사냥하면 일 년에 얼마 정도 벌 수 있는 거요?" "정확히 계산할 수는 없지만, 대충 금화 사 리브라에서 오 리브라 정도 벌지 않을까 싶소." "그러면 그 개나 매에 드는 비용은 일 년에 어느 정도 됩니까?" "보통 오십 리브라 정도 든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자 정신병자는 그 기사가 미쳤다고 생각하고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어서 빨리 여기서 도망쳐요. 날 수만 있다면 날아서라도 빨리 도망을 가요. 우리 의사가 당신을 보면 안돼요. 의사가 당신이 얼마나 미쳤는가를 알게 되면 아마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요. 다른 정신병자들처럼 당신도 늪에다가 묶어놓을 거요. 내가 보기엔 당신이 제일 깊숙이 잠기게 될 것 같소. 이곳 환자들 중 당신이 가장 심하게 미쳤으니 말이오."
*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이 결국 망신을 당하게 되는 법이다.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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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2. 도둑맞은 역사와 기자 (기자증후군은 소중화, 사대주의에 눈먼 역사적 실수)
우리 역사에 포함되어야 할 기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기자는 우리 겨레의 문명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중국 한족의 지식인도 아니었지만, 고조선의 단군도 아니었다. 그는 고조선과 계보가 달랐던 중국계 기마종족의 지식인이었으며, 혼혈 한족이 주나라를 세우자 고조선의 영역으로 망명해온 인물이었다. 그의 망명지도 물론 한반도가 아니었다. 그의 망명은 고조선이 다른 계열의 합류, 특히 문화적 합류를 통해 한층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상징하고 있다. 요컨대 기자를 비롯한 중국계 기마종족의 이동,합류로 말미암아 고조선에서는 제사장과 다른 새로운 계층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들이 바로 우리 역사에서 학문의 마당을 닦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는 기자의 혈통이나 기자의 망명지에 대해서만 호기심을 보일 뿐, 기자와 관련된 핵심적인 주제를 놓치고 있다. 그 결과 기자와 관련된 시대도 사실상 잃어버린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자라는 인물을 통해 들여다본 당시의 고대세계는 우리 역사에 포함되어야 할 기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잘 보여준다. 즉 기자가 합류한 이후의 고조선이 바로 우리 역사의 기본 범위로서, 뒷날 이 범위 안에서 일어났던 기마종족 내부의 다양한 분열과 통합은 모두 우리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자와 관련된 역사적 의미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결국 우리 역사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역사를 잃고 나서 오로지 '삼국시대' 이후로부터 우리 역사의 범위를 찾고 있으니, 그 범위가 기껏 영토적으로 만주벌판을 꿈꾸는 데 그칠 따름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영토가 아니라 그 영토 속에서 과연 누가 누구와 더불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인데도 말이다.
그 이전의 역사를 잃어버리고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만을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와 함께 역사를 누려왔고 나아가 앞으로도 함께 역사를 누려야 할지 모르는 우리의 기마종족 형제들을 '외적'으로 돌리기 십상이다. 실제로 우리 역사에서는 외부종족인 중국 한족과 결탁하여 우리의 기마종족 형제들을 외적으로 여기고 그들과 무분별한 싸움을 벌여온 '서글픈 국난극복의 역사'가 자주 눈에 띈다. 송나라와 손잡고 형제종족인 거란족이나 몽고족과 혈전을 치르었으며, 명나라와 손잡기 위해 이웃인 만주족과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바로 이 모두가 역사를 잃어버리고 스스로를 단일민족의 작은 울타리에 가두어온 병폐이며, 한반도(우리 겨레)가 작아지게 된 또 하나의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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