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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72 호
단기 4340. 10. 09 (음력 8. 2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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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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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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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침묵시켰다고 해서 그의 마음을 변화시킨것은 아니다. / 존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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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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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덕을 쌓는 일
열네 번째는 공경심을 갖고 덕을 쌓는 일이다. 배우는 학생이 덕으로 천성의 잘못을 닦는 것은 오직 남에 대한 공경심을 잘 지키는데 있으니, 공경하지 않으면 다만 빈말이 될 뿐이다. 모름지기 겉과 속이 한결같고 그것이 조금도 그침이 없어야 한다. 말에는 가르침이 있고 움직임에는 법도가 있으며, 낮에는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밤에는 그 일의 결과가 있어야 한다. 눈 한 번 깜짝하는 동안에도 얻을 것이 있고, 숨 한 번 쉬는 동안에도 키우는 것이 있어야 한다. 공부를 오랫동안 계속했는데 효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날마다 쉬지 않고 힘쓰라. 공부는 모름지기 죽은 뒤에나 그만 두라. 그것이 실학이다. 만일 이런 데 힘쓰지 않은 채 오직 많이 아는 것만 따지고 이야기를 꾸며서 이름을 빛내려는 자는 학문하는 사람의 적이 되나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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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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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8. 심설 논쟁
1. 심설 논쟁에 담긴 문제 의식
주자학의 이론 구조에서 볼 때 심설 논의가 갖는 중요성은, 주자학이 단순히 존재론적 논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것은 심에 관한 논의가 현실의 윤리적 삶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러한 심설의 정립과 함께 '거경궁리'라는 주자학의 학문 방법론이 완성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희에게서 심이 발하지 않았을 때의 공부, 즉 거경은 심이 발했을 때의 공부, 즉 궁리의 전제이며, 그것은 쇄소, 응대, 진퇴와 같은 외재적 규율을 따름으로써 주체 의식을 확보한다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일상적 예 규범은 심설 논의를 통해 그 형이상학적 이론 근거를 갖게 되고 그 당위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런데 주희에게서 심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되고 있다. 첫째는 기로서의 심이다. 둘째는 심과 정을 통합하는 것으로서의 심이다. 이 경우 두 측면은 논의의 각도를 달리해서 설명될 수밖에 없다. 이는 윤리의 존재론화라고 하는 주자학의 특성 때문으로, 이러한 특성은 주자학의 이중적 논의 구조(리 일원론을 지향하면서도 리기 이원론의 논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거나 가치의 문제를 존재론화시키는 것 등)를 이루는 주된 요소이다. 주자학의 이중적 논의 구조에 따른 심설의 논리적 모순성은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논의에 대한 이해의 심화에 따라 이황과 이이 이후 조선 주자학에서 주된 논쟁점을 이루게 되었다. 주자학적 논의 구조의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이황은 기에 대한 리의 주재 및 통제 작용이라는 리의 능동적 원인성(이때 리는 기의 동인으로서 초월적 성격이 강조된다)을 긍정하면서 심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주희의 본래 의도와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이는 리의 능동적 원인성을 부정하면서 심을 질적으로 규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주자학자들에게서 성리설 논의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황과 이이에 의해 제기되었던 바로 이러한 문제 의식이었다. 조선 후기의 심설 논쟁에서 주된 이론 근거는 크게 세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심을 리와 기의 합으로 보는 입장이고, 둘째는 심을 리로 보는 입장이며, 셋째는 심을 기로 보는 입장이다. 조선 후기의 심설 논쟁은 이러한 입장에서 학파간에 혹은 같은 학파라 하더라도 입장을 달리하는 인물들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화서 학파의 경우 화서 이항로의 문인인 유중교가 이항로의 심설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역시 이항로의 문인인 김평묵과 벌인 논쟁이 대표적이다. 이 후 이항로의 문인은 두 입장으로 나누어져 6여 년 동안 논쟁을 벌였으며, 전우는 화서 학파로부터 절교를 당한 후 여러 편의 글을 통해 이항로의 심설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전우가 한주 이진상의 심설을 양명학과 비교하여 비판하자, 이진상의 제자 곽종석은 이진상의 심설을 옹호하면서 전우의 심설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문인들에게도 이어졌지만, 크게 볼 때 그 입장은 앞에서 이야기한 세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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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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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하
본뜻 : 본래는 장수를 알리는 대장의 깃발 아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늘날에도 각 군대마다 각기 다른 깃발이 있듯이 옛날에도 각각의 장수마다 각기 다른 깃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 깃발 아래 모이는 것은 곧 그 장수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표시였다.
바뀐 뜻 : 어떤 장수의 지휘 아래 소속되어 있는 것, 또는 그의 지휘 아래 딸린 병사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는 군사 용어였는데 오늘날에는 일반 조직체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보기글" -만주로 건너간 김 군이 김좌진 장군 휘하에 있었다네 -회장님 휘하에 인재가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소리/쓴소리
아무래도 ‘고언’(苦言)을 하기보다는 ‘감언’(甘言)을 하기가 쉽고, ‘고언’을 듣기보다는 ‘감언’ 듣는 것이 좋다. 뜻으로는 ‘감언’이 좋을 듯하나 쓰임을 보면 ‘감언에 넘어가다’, ‘감언에 이끌리다’, ‘감언으로 꾀다’처럼 부정적으로 쓰이는 반면, ‘고언’은 그 반대다.
“앞으로 동학이 어디로 나갈 것인가. … 그게 중요하기 때문에 소승 감히 고언(苦言)을 드리는 바이오.”(박경리, 〈토지〉)
이를 달리는 ‘단소리’ ‘쓴소리’로 쓴다. 여기서 ‘단소리’는 감언을 다듬은 말 같은데 〈표준국어대사전〉에 ‘단소리’는 오르지 않았고, ‘쓴소리’는 올랐으나 ‘고언의 북한어’로 풀이돼 있다. 그런데 최근 문헌이나 방송 쪽 자료를 보면 ‘감언’이나 ‘고언’보다 ‘단소리’와 ‘쓴소리’가 훨씬 자주 쓰이는 편이다.
“… 단소리만 받아들이고 쓴소리는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모양이라고 ‘일침’을 놓은 뒤 ….”(〈한겨레〉) “… 시장은 단소리만 좋아하고 쓴소리 하는 의원들에겐 미운털을 박아놓고 저런답니다.”(명쾌한 외, 〈단소리 쓴소리〉)
‘단소리’와 ‘쓴소리’를 이처럼 자주 쓴다면 옹근 자격을 줘야 할 것이다. 파생어 ‘단소리하다’와 ‘쓴소리하다’도 마찬가지다.
‘듣기 좋게 꾸며 하는 말’인 ‘단소리’보다 ‘듣기에는 거슬리나 도움이 되는 말’인 ‘쓴소리’에 귀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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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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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2. 변경의 실력자(진나라 목공)
소 열두 마리로 나라를 구한 현고
목공 32년 겨울에 문공이 죽었다. 그런데 정나라 백성 중에 자기 나라를 진나라 목공에게 팔아 넘기려는 자가 나타났다.
"정나라 도읍의 성문은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손만 쓴다면 쳐들어가는 것은 간단합니다," 목공은 곧 건숙과 백리해, 두 신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나라에 가려면 다른 나라 영토를 여러 곳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먼 나라에 쳐들어 가서 승리를 거둔 예는 없습니다. 게다가 정나라에 그런 매국노가 있는 이상, 우리 나라에도 그런 자와 닮은 자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만 두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하며 반대 의견을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공은 초조하게 서둘렀다. "그것은 모르는 소리요. 나는 이미 결심했소."
이렇게 말한 목공은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와 건숙의 아들 서걸술을 곧 원정군의 장수로 임명했다. 마침내 출진하는 날, 백리해와 건숙은 통곡했다. 그러자 목공이 화를 버럭 내며 비난했다.
"이제 출진을 하는 마당에 울다니 웬일이오? 아들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오?" 이에 두 신하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결코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성상의 부르심에 따라 저희 자식들이 출진을 하게 되었으나, 소신들은 이미 늙은 몸이라 원정기간이 길어진다면 이 세상에서 다시 그 애들을 만나 볼 기회는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어전에서 물러서서 자식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만약 패한다고 하면, 반드시 그곳은 효산 골짜기일 것이다."
목공 33년 봄, 진나라는 드디어 정벌에 나섰다. 애당초의 예정을 바꿔 진나라 영토 안을 통과하지 않고 주나라 도읍의 북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제후의 군대가 천자가 다스리는 주나라를 지날 때는 갑옷을 벗고 무기도 거둬 한데 묶어야 했다. 그러나 진나라 군대는 이를 전혀 지키지 않았으며, 줄도 맞지 않고 기율도 엉망이었다. 이 모습을 본 주나라의 대신 왕손만이 이렇게 말했다.
"천자가 계시는 성의 문을 그대로 지나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이다. 더구나 경솔하기까지 하다. 경솔하면 생각이 얕고, 예의가 없으면 기율이 없는 법이다. 그래 가지고는 싸움에 이길 수 없을 것이 분명한 일이로다."
이윽고 진나라 군대는 약소국인 활나라에 닿게 되었다. 이때 우연히 현고라는 정나라 상인이 소 12마리를 끌고 주나라로 팔러 가던 도중에 진군을 만났다. 그런데 자세히 알아보니 자기 나라를 치러 간다는 것이 아닌가! 즉시 그는 사람을 왕에게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대비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꾀를 냈다. 현고는 자기의 열두 마리 소를 끌고 진나라 장군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가 정나라를 치러 온다는 말을 듣고 정나라 군주는 조심스럽게 방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 12마리를 바치는 것은 원정중인 군사를 위로하게 하라는 정나라 군주의 분부이십니다." 그 말을 듣자 두 장군은 이마를 맞대고 의논했다.
"아무래도 정나라가 우리의 계획을 알아차린 모양이오. 지금 공격을 해봤자 실패할 것 같소."
그래서 부리나케 방침을 바꿔 정나라 대신 진나라의 속국이었던 소국, 활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말았다. 꿩 대신 닭을 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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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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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19장. 천문학에서의 세렌디피티.
빅 뱅. 1964년 미국 뉴저지 주 홀름델에 있는 벨연구소의 과학자 아르노펜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은 초기의 통신위성으로부터 신호를 수신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던 전파용 안테나의 개량에 여념이 없었다. 그 목적은 대기권 밖으로부터 오는 전파신호에 관하여 조사한다는 약간 단조로운 연구에 이 안테나를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준비를 위해 지구상으로부터 발신되는 보이지 않는 전파신호를 모두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나팔형 안테나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던 한 쌍의 비둘기를 쫓아내고 고상한 과학용어인 소위 '백색 유전 물질'을 제거했다. 그리고 온갖 주의를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라디오의 공전에 필적하는 잔류 방사선인'노이즈(noise)'가 남는 것을 그들은 발견했다. 이미 천문학자 사이에는 우주는 150억년 전에 지극히 농축된 물질의 어마어마한 대 폭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빅뱅(Big Bang)설이 있었다. 이 폭발로 인해 막대한 방사성 에너지가 생성되었고 그 이후 이 에너지는 계속 감소되어 가는 추세이다. 프린스톤 대학의 제임스 피블스는 1965년 초에 존스 홉킨즈 대학에서 있었던 과학되에서 이 이론에 관한 발표를 했다. 어떤 경로를 통해(몇 가지 설이 있다) 프린스톤대하과 벨연구소의 양 그룹은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벨연구소의 전파 안테나에 검출된 '노이즈'가 빅뱅으로부터 남아있는 방사선으로 보이는 것과 똑같은 양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우리는 우주의 탄생을 보고 있었는지 아니면 천체 물리학의 설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비둘기를 보고 있었는지 구분이 안간다"라고 감탄하였다. 노벨재단은 보다 과학적인 이 이론을 받아들였으며 펜지어스와 윌슨은 1978년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펄 사. 조슬린 벨과 안토니 후이쉬는 펄사(pulsa ; 규칙적인 주기로 펄스 전파를 발하는 별)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런 발견을 예측할 수도 없었다. 중성자 별들이 무선 주파수의 펄스(전압.전류의 급격한 변동의 반복) 신호를 방사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67년 여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벨과 후이쉬는 무선전파가 혹성 간의 매체를 통과할 때에 이 무선전파가 깜박거리는가 어떤가를 조사함으로써 그 크기를 측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벨은 케임브리지대학의 망원경이 일주일마다 기록하는 긴 기록지에 이상한 현상이 있는 것을 알았다. 기록에 의하면 매일 한밤중에 폭발적인 방사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9월 말까지는 이 신호가 지구상의 어떤 종류의 노이즈일 가능성은 없다고 확인하였다. 그리고 폭발은 매일 그 전날 밤보다도 이른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별에서 오는 것과 일치했다. 11월에 들어서면서 그 신호가 아주 강해졌을 때는 단기간의 매우 규칙적인 간격의 펄스(pulse)를 검출할 수 있었다. 벨은 다시 많은 기록지를 조사하여 그와 같은 펄사를 세 개나 더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이 발표되고 그 해석을 구하였을 때 몇 가지 회답이 왔는데 그 중에는 "우주의 '리틀 그린맨'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것에서부터 진지하게 "우주의 어떤 물체가 펄스를 발생하는 법"까지 가지각색이었다. 게자리 성운의 중심에서 펄사를 발견한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 주 그린뱅크의 국립전파천문대의 스텔린과 레이펜스테인이 그 해답을 가져왔다. 그 결과 펄사는 초신성 폭발의 잔해인 중성자 별인 것으로 단정되었다.
명왕성의 달. 1978년 미국 해군관측소의 제임스 크리스티는 기계가 고장나는 덕택에 천문학상의 중요한 발견을 했다. 크리스티는 명왕성 특유의 궤도를 관측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왕성의 사진이 찍혀있는 감광판을 스타 스캔(star scan)이라는 장치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그가 그렇게 하고 보니 명왕성의 상이 길게 늘어나 보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확장된 것이 잘못된 것으로 생각되어 사진을 버리려고했다. 그런데 이 순간 기계가 고장이 났다(결과적으로 보아 이 고장이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크리스티는 전자공학의 기사를 불러서 기계의 수리를 의뢰했다. 기사는 수리하는 동안에 혹시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니 곁에 있어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수리하는 동안에 크리스티는 그 사진을 좀더 자세히 조사해 볼 생각으로 명왕성을 찍은 그 이전 사진 기록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그가 본 첫 번째 사진에는 '명왕성 이미지, 길게 늘어나 있음, 감광판 불량, 폐기'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흥미를 느낀 크리스티가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니 1965년에서 1970년 사이에 찍은 6매의 사진이 처음 것과 똑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좀더 연구를 계속한 결과 이 길게 늘어진 것이 명왕성의 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그때 스타 스캔 기계가 고장나지 않았다면 크리스티는 이 새로운 달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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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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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사필은 아무나 잡는 게 아니라고 항변한 채세영
채세영(1490-?)의 본관은 평강이고, 자는 영지, 호는 임진당이다. 중종 2년(151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동왕 1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보임되고 사관을 겸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채세영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조광조 등 당인들을 죄주는 전지를 쓸 적에, 채세영이 조광조 등의 처벌이 부당함을 극력 간하려 하자, 승지 김근사가 채세영이 쥐고있는 붓을 빼앗아 멋대로 쓰려고 하였다. 채세영은 그를 몸으로 막으며 큰소리로 항언하였다.
"이것은 역사를 기술하는 붓이오. 다른 사람이 함부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채세영의 말과 기운이 곧아서, 좌우가 있는 조신들이 숙연하였다. 벼슬을 좌참찬에 이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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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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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타로스의 갈증
희랍신화의 지옥 '타루타로스'에서 '시지푸스'와 더불어 이름난 것이 '탄타로스'이다. 그는 무릎까지 잠기는 물 속에 서 있는데 먹음직스런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탄타로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허리를 굽히면 물은 금새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또 과실을 따 먹으려고 손을 뻗치면 나뭇가지는 바람에 날려서 높이 올라가고 만다. 그리하여 '탄타로스'는 과실과 물을 눈 앞에 보면서도 영원히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려야만 한다.
'탄타로스'는 본래 '제우스'의 아들로 '프류기아'의 왕이었는데 신의 사랑을 독차지하자 차츰 오만해서 하루는 신을 자기 집에 초대한 다음 자기 아들 '페로푸스'를 죽여 그 고기로 신들을 대접하여 시험하려 했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노여움을 받아 그와같이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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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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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여섯번째 이야기 거지가 된 오만한 왕
어느 나라에 젊고 부유하고 강한 권력을 지닌 왕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오만하여 신의 노여움을 사는 큰 죄를 범하게 되었다. "우리의 주이신 신께서 권세 강한 자를 연약케 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셨도다."라는 찬미가의 구절을 듣게 된 왕은 화가 났다. 자신의 권력을 비웃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왕은 왕국 전체에 이 구절을 지우고 대신 이렇게 쓰라는 명령을 내렸다. "신께서 강한 자를 권좌에 앉히시고 비천한 자를 저승으로 데려가시니라." 왕이 고친 이 구절을 들은 신은 무척 노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왕이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목욕을 하러 강가로 갔을 때였다. 왕이 옷을 벗어두고 목욕을 하는 동안 신이 보낸 천사가 왕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벗어둔 왕의 옷을 입고 수행원들을 거느린 채 왕궁으로 돌아가버렸다. 왕의 옷이 있던 자리에는 성문 밖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의 누더기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목욕을 끝낸 왕은 시종과 수행원들을 불렀으나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몹시 노하여 모두 참수형에 처하겠노라고 으르릉거렸다. 시종들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믿은 왕은 벌거벗은 채 누군가를 찾았으나 아무도 없는 것을 보자 그만 할말을 잃어버렸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왕은 구석에 놓인 넝마를 보자 저것으로라도 대충 몸을 가리고 왕궁으로 돌아가 모두에게 참혹한 벌을 내리리라 마음먹었다. 왕이 사람들 눈을 피해가며 성으로 돌아왔을 때 성문 앞에는 낯익은 수문장이 버티고 있었다. 왕은 나지막한 소리로 그를 불러 누군가 이 광경을 보기 전에 냉큼 문을 열라고 말했다. 허리에는 기다란 칼을 차고 손에는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있던 수문장은 '네 놈이 대체 누구인데 그런 말을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왕은 노하여 소리쳤다.
"이런 발칙한 것! 너희들이 친 장난이 모자라 이제는 주인을 알아보지도 못하다니. 냉큼 문을 열지 못하겠느냐!" 그러자 수문장이 대답했다. "정신나간 녀석, 어서 썩 물러가라. 그리고 계속 허튼 소리를 하고 다니면 큰코 다칠 줄 알거라. 왕께서 돌아오신 지가 언제인데 그런 말을 하느냐. 지금 쉬고 계시니 깨지 않으시도록 어서 꺼지거라."
이 말을 들은 왕은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 수문장에게 달려들었으나 몽둥이 세례를 당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왕임을 주장하다 봉변만 당한 왕은 이제 마지막으로 왕비궁으로 향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몰라봐도 아내만은 자신을 알아보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비 앞에 이르러 자신이 왕이라고 말하자, 쉬고 있는 천사를 남편으로 믿고 있던 그녀는 그에게 욕을 퍼부으며 쫓아내고 말았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왕은 이제 거지가 되어 세상을 떠돌 뿐이었다. 구걸을 하며 허기를 면하고 변변한 잠자리가 없어 길에서 밤을 지새야 했다. 그러는 사이 왕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오만함으로 신을 모욕했음을,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왕은 그제서야 큰 소리로 울며 용서를 구했다. 왕국을 돌려받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 하고 그저 영혼을 구해달라고 기도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왕과 똑같은 모습을 지닌 천사가 수문장을 불러 물었다.
"어느 광인이 이 땅의 왕이라고 소리치며 다니는 해괴한 일이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천사는 수문장에게서 그간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들은 후 그를 잡아 대령시키라고 명했다. 광인이 옥좌 아래 꿇어앉자 왕은 일어나 그에게 가까이 가며 말했다.
"이보게, 자네가 몹쓸 불행으로 왕국을 잃은 왕이라는데 그게 사실인가? 내 절대 해치지 않을 테니 어디 그 사연을 말해보게나."
이 말을 들은 불쌍한 왕은 무어라 대답할 바를 몰랐다. 이제 죽게 되었다며 절망한 그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왕이시여, 제 어찌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제겐 삶과 죽음이 다름이 없고 이 모든 것을 신께서 아시니 무엇을 숨기오리까. 왕이시여, 저는 광인임이 분명하고 세상의 모든 이들이 그리 여겨온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만함으로 왕국을 잃은 왕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는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한 태도로 자기의 죄를 고백했다. 천사를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친구여, 당신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방금 고백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주께서 천사인 나를 보내어 당신의 왕좌를 빼앗게 한 것입니다. 끝없는 자비를 지니신 신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셨으니 이제 다시는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같은 죄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 것과 진심으로 참회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범하기 쉬운 오만함은 신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가 신의 권능에 대적할 뿐 아니라 영혼을 파멸시키기 때문이지요. 어떤 혈통도, 지위도, 인품도, 모두 다 덧없이 소멸할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왕은 통곡하며 천사의 발치에 몸을 던졌다. 그리하여 회개한 왕은 용서를 받고 잃은 명예까지 되찾게 되었다. 이후로 그는 신과 백성을 섬기는 겸손한 왕이 되어 치적을 남기고 명성을 얻었다.
* 신의 은총과 세상의 명성을 얻으려면 모든 일에 겸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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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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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2. 도둑맞은 역사와 기자 (기자증후군은 소중화, 사대주의에 눈먼 역사적 실수)
문화,사상의 선각자, 기자
이런 중요한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자신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후대에 전달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기록을 남겼는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그의 저작물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주나라 무왕에게 '홍범구주'를 가르쳤다는 기록만이 "상서"등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기자의 사상은 홍범구주의 내용을 가지고 알아낼 도리밖에 없다. 널리 알려진 대로 홍범은 오행이론의 문헌적 효시가 되는 사상이다. 물과 불과 나무와 쇠와 흙을 기본 요소로 하는 이 사상은 각 기본 요소들의 상호작용이란 관점에서 우주만물을 설명한다. 이 이론은 순수한 다원론이라기보다 다원적 일원론에 가까운데, 그것은 이 다섯 요소의 상호작용이라는 불가분의 총체적 덩어리가 곧 우주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손가락은 다섯이라도 결국 하나의 팔에 소속된 것이라는 입장이다. 홍범구주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도 다섯 요소를 본떠 '다섯 가지의 일'로 판단하는데, '외모와 말과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밖에도 홍범구주에는 오행을 기초로 하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비 오고 맑고 따뜻하고 춥고 바람 부는' 다섯 가지 요소로서 하늘의 기운을 파악하는 '서징'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 가운데 또 하나의 흥미로운 요소는 '세 가지 진리스러움'이라는 부분이다. '정직과 강함과 부드러움'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은 상황에 따라 선택되는 덕목이다. 일의 종류에 따라 이런 덕목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면 재앙이 미치는 것으로 보는데, 이 재앙의 집행자는 바로 하늘이거나 하늘의 대리인이다. 이 부분은 기마종족 특유의 하늘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즉 거기에는 인간을 주체적인 행위자로 설정하고 하늘을 그 행위의 근거로 삼는 관점이 담겨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주체성이란 부분이 좀더 구체적으로 이론화된 점은 왕검시대의 신앙적 관점과 선명하게 구분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자의 사상은 왕검의 사상보다 훨씬 구체적,체계적으로 사물과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함으로써, 신앙적 사상에서 과학적 사상으로 한걸음 다가섰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홍범의 사상은 단군계의 제사장적 전통을 보충할 수 있는 이론이었으며 아울러 제사장의 '신성한' 권위에 도전하는 '불순한' 이론이기도 했다.
인간의 지위를 설명하는 내용 가운데서, 홍범은 기존의 제사장적 권위를 상당히 축소시키고 인간들 사이의 합의를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홍범에 보이는 대동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대동이란 임금에게 큰 의문이 있을 경우, 먼저 자신의 마음에 물어보고 원로나 관리들에게 물어보며 백성에게도 물어보고 점치는 이에게도 물어보아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대동에서는 제사장적 기능이 벌써 임금과 점치는 사람으로 구분될 뿐 아니라, 원로 및 백성들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홍범의 대동사상은 제사장적 권위를 절대적으로 보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서로 일치하지 않을 경우, 왕이나 원로보다는 점치는 이의 견해가 중요하다고 했으므로, 제사장의 기능이 정치로부터 완전히 추방된 것은 아니었다. 홍범은 기자의 사상이 이미 신앙적인 권위로부터 상당히 벗어나 비신앙적인 사유체계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기자의 사상은 제사장의 신성한 권위에 따라 사회가 운영되던 고조선에 거대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기자의 사상이 제사장적 전통에 안주하던 고조선을 뒤흔드는 순간, 제사장적 전통과 기자(계)의 전통은 한편 갈등하고 다른 한편 타협,융합하는 오랜 과정을 밟아야 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기마종족적인 또는 조선적인 문명'이 태동의 단계를 넘어 성장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기자는 겨레 역사의 '알'을 한걸음 키워낸 사상적 공헌자로 재부각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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