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18장. 노력하지 않고 고고학에서 성공한 경우.
고고학자이자 고고학자의 아내인, 그리고 고고학자의 모친이기도 한 메어리 리키는 "고고학의 역사상 계획에 의해서 발견된 경우는 아마도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고고학상 유명한 발견은 대부분 역사적으로 흥미가 있는 것을 발견하려는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렌디피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헤르큘라네움이나 품펴이의 로마제국이나 중국 중부의 서안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초대의 중국 황제 등에 의해서 번영했던 고대문명과 프랑스의 라스코나 오리냑의 동굴 속의 벽화나 지중해의 해저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배 등에서 대표되는 선사시대의 문명, 그리고 또 덴마크의 톨론드인, 독일의 네안데르탈인, 남아프리카의 타웅 차일드 등 고대 또는 선사시대의 인류와 사해문서에 의해서 빛을 보게 된 종교의 역사나 자료, 이것들은 모두 세렌디피티적 발견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다.
뜻밖에 얻은 보물.
헤르큘라네움과 폼페이 : 서기 79년 이탈리아 서남부에 있는 베수비어스 화산이 분화하여 헤르큘라네움과 폼페이의 도시가 묻혀버렸다. 용암과 화산재가 너무 빠른 속도로 대량으로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화산 가까이에 있던 도시의 주민과 건물은 그대로 생매장 되었던 것이다. 1709년 헤르큘라네움 유적지 위에 해당되는 농지에서 우물을 파던 한 농부가 대리석 조각의 파편 하나를 캐냈다. 이것을 알게 된 이탈리아의 왕자가 이 토지를 사들여 일꾼을 보내서 종갱(수직으로 파고 들어가는 굴)을 연장시켜 판 다음 수평으로 파게 했다. 그 결과 손상하나 없는 여성상을 몇 구 발견하였으며, 종갱은 헤르큘라네움 극장을 관통했다. 매몰되었던 도시의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하자 찰스 3세는 스페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발굴하게 하였으며, 모든 재보를 자신을 위해서 만든 개인 박물관으로 옮기게 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시에 프랑스 정부가 실시했던 조심성 없는 발굴도 그 이전에 이탈리아인들의 발굴에지지 않을 만큼 철저했다. 프레스코 벽화나 조각품들은 사원에서 가지고 가버렸으며 건물은 상할 대로 상한 채 방치되었다. 1860년 빅토리오 엠마뉴엘 2세가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하자 로마의 위대한 과거의 환상에 사로잡힌 그는 폼베이의 역사에 조예가 깊은 쥬세피 피오렐리 교수의 지휘하에 조심스런 폼페이 발굴을 원조하고 나섰다. 피오넬리는 용암에 에워싸인 희생자의 시체가 수세기 동안에 부식해서 생긴, 속이 비어있는 빈 껍질로 석고모형을 만드는 독창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껍질에 석고를 흘려넣고 석고가 굳은 후에 경석(화산의 용암이 갑자기 식어서 된 가벼운 돌)과 재로 된 주형을 조심스럽게 부셔내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희생자의 모습이 죽음을 맞이했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폼페이의 4분의 3이 발굴 정리되어 그 중에는 두 개의 극장과 광장이 포함되어 있다. 도시의 나머지 부분은 현재 이탈리아 도시의 집이나 뜰 밑에서 잠자고 있는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베수비어스 산은 현재도 이따금씩 연기를 내뿜고 있으며 마지막 대규모 분출은 1944년에 있었다.
중국 진 시황제 무덤 : 1974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우물을 파는 공사 중에 또 다른 고대문명이 발굴되었다. 농민들이 캐낸 것은 초벌구이를 한 실물 크기의 인물상의 일부였다. 그것은 기원 전 221년에 통일 중국의 초대 황제라고 스스로 선언한 진나라의 시황제 능 가까이에서 발견되었다. 진 시황제는 자신이 구축한 제국의 북쪽 국경을 몽고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축조하게 한 인물이다. 우물 주변 발굴을 계속해 보니 일련의 지하 건조물이 나타나 이것들은 고고학상 매우 훌륭한 발견 중의 하나가 되었다. 4에이커(16,000평방미터)정도의 제 1갱에는 실제 인물 크기로 초벌구이를 한 6,000명의 병사들과 사두마차 6대가 11열로 놓여져 있었다. 2년후에 발견된 제 2갱은 10,000평방미터의 넓이로 그곳에서는 인간과 말이 1,400채 있었다. 거의 같은 무렵에 제 3갱인 작은 갱이 발굴되었는데 그곳에서는 말을 탄 장군들과 그들을 호위하는 73명의 병사들이 발견되었다. 이들 도자기로 된 병사들은 조립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제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서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병사들의 다양한 체구로 보아 진 제국의 여러 지방의 소수 민족들로 구성된 징집병들로 군대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복장이나 무기도 당시의 전쟁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다. 가장 큰 갱위를 덮고 그 위에 박물관을 세워, 견학자들이 난간을 사이에 두고 지하 6미터의 갱속에서 갑옷 모습으로 정렬한 2,200년 전의 전사들을 내려다 볼수 있도록 하였다. 병사나 말의 대부분은 병마용이 놓여지고 난 후 천장이 허물어져 떨어지는 바람에 파손되었으며, 지금도 수리 수복이 계속되고 있다.
타웅 차일드(Taung Child) : 1924년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 근처 타웅 동굴에서 석회를 채굴하던 한 노동자가 석회암 사이에 작은 뇌의 주형같은 것을 발견하여 그것을 광산 사무소로 가지고 갔다. 사무소는 이 사실을 위트와테르스란트대학의 해부학 교실의 주임인 레이몬드 더트 교수에게 알렸다. 곧이어 더트는 타웅 동굴에서 발견된 석회석 주형 속에서 거의 완벽한 어린이의 두개골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발견을 영국의 과학잡지 'Nature'에 발표했다. 이 어린이는 그 당시에는 가장 오래된(백만년 이상) 인류의 조상이었다[1985년 11월호 'National Geographic'지의 표지에 이 타웅 차일드의 화려한 홀로그램(hologram)이 재현되어 있다]. 타웅차일드의 두개골을 더트가 입수한 것에 관해서 그 유물(?)이 임자를 잘못 만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아직 31세로 젊었으며 경험도 적고 학문적으로는 이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우연한 발견을 중요한 과학적 발견으로 바꾸는 데에 더트야말로 최적의 인물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는 거의 직감적인 예민성으로 이 고대의 어린이가 우리 인류의 조상과 유인원과의 사이를 메우는 소위 '잃어버린 연결 고리'(missing link)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두개골의 기본 형태에서 추정된 머리의 각도를 증거로 하여 더트는 타웅 차일드가 직립보행을 했었다고 주장했다. 더트의 착상은 일대 논쟁을 불로일으켰다. 논쟁 가운데는 이 고대의 화석이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그 자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아프리카가 가장 오래된 인류의 조상이 태어난 곳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리키부부나 도날드 요한슨 등을 비롯한 우수한 고고학자들의 아프리카 연구에 의해서 더트의 설은 대부분 입증되었다.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 Man) : 1857년 독일의 네안데르탈에서 가까운 동굴에서 채석부가 문제의 '인간'을 발견했다. 네안데르탈인은 원래 두개골을 포함한 갈색 뼈의 집합체였다. 그 직후에 다윈이 '종의 기원'(1859년)을 출판하였고, 토마스 헉슬리는 자연도태에 의한 발생이 인류 초기 역사의 이론적 뼈대가 된다고 주장했다. 과학자 중에는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헉슬리는 그 두개골이 유인원과 비슷한 특징이 있으며 인류와 유인원 사이의 연결 고리가 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네안데르탈인이 초기의 인류를 대표한다는 생각은 1886년에 벨기에의 스피 동굴에서 이와 비슷한 뼈를 깎아 만든 석기와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북극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던 동물의 뼈가 함께 발견됨으로써 실증되었다. 현재는 네안데르탈인이 10만년 이상 전의 인류라는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톨론드인(Tollond Man) : 1950년 덴마크의 톨랜드 늡지대에서 토탄을 채광하던 두 남자가 보존상태가 양호한 남자 시체를 캐냈다. 이 남자 시체는 가죽 모자와 벨트만을 걸치고 있었으며 목에는 가죽 로프가 단단히 감겨져 있었으나 얼굴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아마도 종교상의 이유로 처형되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후 그 남자는 톨론드인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고고학자와 해부학자 그리고 식물학자들은 그의 모자에서부터 최후의 식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분석했다. 그 시체는 토탄 속에서 잘 보존되어 있어서 두 발도 제대로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턱수염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토탄의 늡지는 방부제로서의 효력이 있는 타닌산을 함유하고 있으며, 토탄은 그 밑에 있는 물체를 덮어서 산소를 차단하기 때문에 부패를 방지했다). 그 남자는 30세 정도로 약 2,200년 쯤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린도우인(Lindow Man) : 1984년 8월, 영국의 맨체스터 공항 가까이에서 상업용 토탄을 캐던 광부가 한 덩어리의 토탄을 분쇄기에 투입하려고 할 때 토탄에 붙어 있던 이끼가 떨어지면서 사람의 발이 나타났다. 고고학자들이 회수하여 감정한 결과 이 고대인의 인체는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매우 보존상태가 좋은 것이었다. 린도우인이라 불려진 이 남성은 켈트족이며 드루이드라고 불리우는 지배 계급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톨론드인과 마찬가지로 이 남성 역시 2,200년 전의 제비뽑기의 결과 종교 의식에 의해서 처형되었을 것이다. 물에 처박아 밀어넣고, 인후를 자르고 숨통을 가죽끈으로 조이고, 머리를 치는 그런 잔인한 처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얼굴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가 원해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남성의 위와 장의 내용물을 분석한 결과, 일부는 심하게 탄 케이크 조각이 나왔다. 켈트족의 역사를 전문으로 하는 고고학자인 앤 로스 박사는 이 탄 케이크야말로 린도우인이 뽑은 '제비'이며 그 결과 드루이드의 신에게 바쳐진 희생물로 그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또 로스 박사는 이 탄 케이크가 드루이드의 의식에서 사용되는 보리가루로 만든 얇고 납작한 케이크의 태운 조각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의식의 사제가 케이크를 조각내어 가죽 푸대에 넣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돌리면 참가자들이 한 조각씩 꺼내는데 운이 나빠서 탄 조각을 꺼낸 자가 희생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고고학자들은 이 잉글랜드의 켈트인 발견이 유럽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것이라고 시사했다. 그들이 믿는 바에 의하면 유럽에서 켈트족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실제로는 더 많은 지역을 지배했으며, 기원전 2세기부터 3세기 무렵 스칸디나비아를 지배한 것은 게르만족이 아니고 켈트족이었다고 한다.
멕시코 시의 아즈텍 원반 : 1978년 멕시코 시에 있는 전기회사의 작업원이 케이블 설치용 도랑을 파다가 커다란 돌 원반에 막다르게 되었다. 적업원들이 살펴보니 원반에는 수족이 절단된 아즈텍의 달의 여신이 새겨져 있었고, 전설에 의하면 여신은 그녀의 형제인 전쟁의 신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이 와서 발굴을 시작했는데 이쯤 되고 보니 전력 케이블 설치는 문제 밖이 되고 말았다. 아즈텍의 고을은 멕시코의 지하에서 4세기 동안이나 묻혀 있었다고 한다. 위칠로포치틀리 사원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서는 재물용 칼과 공물을 포함하여 100여점 이상의 의식을 위한 봉헌물이 있었고, 돌로 둘러싼 구덩이 속에서는 비의 신 틀라로크에게 희생으로 바쳐진 생후 3개월에서 8세까지의 34명의 어린이 두개골도 발견되었다.
블랙 힐즈의 맘모스 : 1974년 미국 남 다코타 주의 블랙 힐즈에서 가까운 고을, 핫스프링스의 교외에서 불도저 운전수 조지 한슨이 지면으로부터 약 6미터쯤 되는 곳에 묻혀있는 어떤 뼈를 캐냈다. 한슨의 아들이 이 발견을 자기의 은사 랠리 에이젠브로드 교수에게 알렸으며, 그는 이 뼈가 콜롬비아 맘모스 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맘모스는 26,000년 전에 구덩이로 빠진 것으로 추축되며, 지금은 이 지점 바로 위에 빌딩을 세워 견학자들이 이 선사시대의 거대한 동물이 죽은 채로 그 자리에서 화석이 된 뼈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발굴은 지금도 그 장소에서 1년에 한 달씩 계속되고 있다.
오스틴의 마스토돈 : 1985년 1월,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의 22층 건물 오피스 빌딩의 건설 현장을 파고 있던 굴삭기 운전수가 보존상태가 양호한 상아를 캐냈다. 굴삭 기간 중 건설 작업자로 고용되어 현장에 있었던 고고학자(고고학상의 유물이 공사장에서 더러 발견되기 때문에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았다)인 알톤 브릭스는 이 상아처럼 생긴 거대한 뼈가 맘모스와 같은, 코끼리와 관련된 선사시대의 동물인 마스토돈(mastodon)의 것이라고 감정했다. 마스토돈의 화석은 맘모스의 것보다 드물었기 때문에 그동안 맘모스는 3,000두나 불굴되었는데 마스토돈은 수백 두 정도밖에 발견되지 않았다. 3두의 마스토돈의 엄니(상아와 같은), 늑골, 좌상악골과 상처가 없는 커다란 치아 2개, 등 뼈, 다리 뼈 등이 발견되었다. 2개의 치아 중 한 개는 보존상태가 대단히 양호하며 잘 닦았더니 반짝거릴 정도였다. 뼈가 발굴된 후 브릭스와 함께 조사한 텍사스 대학의 고생물학자 어네스트 룬델리우는 이 발견이 진귀한 것이라면서 "이토록 많은 마스토돈의 뼈가 이와 같이 어디서 왔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상태로 발견되기란 좀체로 없을 것이다. 마스토돈의 뼈는 하류로 흘러내려 가다가 더 내려가지 못한 곳의 강바닥에서 발견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말했다. 이 발견 장소는 오스틴을 가로질러 흐르는 콜로라도가의 옛 범람지역 근처의 못 바닥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하면 마스토돈의 뼈가 묻혀있는 지층은 약 15,000년 전의 것으로 나타난다.
아크밈의 왕비상 : 1982년 강연 여행 중에, 저자는 이집트의 나일강가의 도시 아크밈에서 파라오 람세스 3세(기원전 1304~1237년)가 사랑했던 아내의 아름다운 조각상을 볼 수가 있었다. 새 빌딩의 기초 공사를 하고 있던 작업원이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3,200년 동안 이름도 모르는 사원의 폐허 속에 묻혀 있었으며, 매끄러운 대리석 위의 입술의 붉은색과 아이샤도우의 청색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말라버린 호수.
비스쿠핀 마을 : 1933년 폴란드에서 학생과 함께 소풍을 나왔던 교장 선생님이 나무 기둥이 같은 간격으로 호수 위로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의 조사에 의해서 2,300년도 더 전에 호수의 한복판에 있었던, 섬 위에 건설되었던 마을 비스쿠핀이 빛을 보게 되었다. 마을 주민이 수확이 적고 적들의 침략이 빈번하여 마을을 버리고 떠나자 그 후 호수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서서히 수몰되어 버렸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강을 준설하는 바람에 호수의 수위가 내려가고 섬과 고대의 마을이 다시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1934년에 시작된 발굴로 인해 통나무로 된 벽과 제방으로 둘러싸인 24,000평방미터 정도의 세심하게 설계된 마을이 나타났다. 무기와 도구, 도자기 등 유물의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고고학자들은 말을의 상당 부분을 재현시킬 수 있었다. 거기에는 한 지붕으로 된 연립 가옥도 있었다. 호수 위로 조금만 나와 있었던 마을의 유적이 교장 선생의 예민한 관찰력에 의해 발견되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문명 연구에 공헌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타이터스빌의 두개골 : 1985년 미국 플로리다 주의 타이터스빌에서 계획적으로 연못의 물을 뺏더니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되었다. 못 바닥의 토탄 속에서 7,000년 전의 인류의 두개골이 몇 개 발견되었는데 그 중의 두 개는 보존상태가 좋은 뇌가 들어 있었다. 과학자는 그 뇌의 하나에서 DNA를 추출했다. 이 DNA연구에 의해서 유전자 구조의 진화론적 변화가 더욱 잘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자연히 나타난 유물.
고대 유물 중에는 다소나마 우연히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며, 민첩한 관찰자가 이것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오리냑 동굴 : 1852년, 프랑스 피레네 산록에 있는 오리냑 마을의 가까운 곳에서 도로 공사인이 토끼 굴에서 사람의 뼈를 꺼냈다. 호기심 많은 공사인이 구멍을 넓히자 동굴이 발견되었고, 그 속에서 17구의 사람 뼈와 구멍이 난 둥근 조개껍데기 그리고 포유동물의 치아들이 있었다. 공사 감독은 고생물학의 연구를 위해 그것들 중의 몇 가지를 모았다. 이것이 뼈의 화석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변호사 에드워드 라르테의 눈에 띄었다. 라르테는 수년 후에 오리냑을 방문하여 동굴 주위를 더 파보았다. 그러자 부싯돌과 사슴의 뿔로 만든 도구, 절멸된 포유류의 뼈 등이 나왔다. 이러한 것들의 발견과 금속의 유물이 전혀 없는 것이로 미루어 볼 때 오리냑 사람들은 구석기 시대에 살고 있었다고 결론지어졌다. 반창의 유물 : 1966년 태국에서 사회학의 조사를 하고 있던 스테반 영이 반창 마을의 무덤 옆길을 지나가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지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항아리 하나를 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길 양옆에는 많은 항아리가 있었다. 유약처리가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퍽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지방 사람들이 그 근방을 심하게 약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펜실바니아대학의 고고학자 체스터 고만이 수년 후에 찾아와서 가까운 마을의 도로 한복판을 파보았을 때 무려 18톤이나 되는 고고학 자료가 나왔다. 청동제의 장신구와 창날 등은 그 연대가 오래 된 기원전 2000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래서 그는 동남 아시아에서 선사시대에 관한 새로운 학설을 제안했다. 그때까지의 설에 따르면 야금술은 근동에서 발달하였으며, 그 후 동남아시아에는 기원전 500년경에 전파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풀삼의 인디언 유적 : 1908년 가을, 조지 맥준킨이라는 카우보이가 뉴멕시코 주 풀삼 마을 가까이에 있는 골짜기를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골짜기의 비탈 부분의 땅에서 뼈가 삐져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뽑아내 보니 상당히 큰 뼈였으며 그가 잘 알고 있는 소나 버팔로(물소)의 뼈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로부터 훨씬 후에 폴삼을 방문한 콜로라도 박물관의 제시 피킨스는 그 뼈가 빙하기 말엽에 절멸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바이슨(들소)의 일종인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뼈와 함께 금속제의 창날이 발견되었는데 그 몇 개인가는 동물의 뼈에 꽂혀져 있었다. 스미스소니언연구소의 프랭크 로버츠 Jr.은 이 유물들을 조사하여 약 1만년 전인 빙하기 말엽에 아메리카의 이 지방에 인류가 살고 있었다는 피킨스의 설을 뒷받침했다. 이것은 바이슨의 뼈가 발견되기 전에 생각하였던 것보다도 5,000년이나 더 오래된 옛날이었다.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 뜻하지 않게 출현한 유물 중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은 아마도 고대 이집트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된 로제타 스톤일 것이다. 나폴레옹 군대의 한 병사가 나일강 서쪽의 한 지류의 기슭에 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동서쪽에서 약 8키로미터 떨어진, 해안으로부터 수마일 떨어진 삼각주 지역에 위치한 로제타 마을 근처인 성 쥴리언 요새를 수리할 때 이 돌을 발견하게 되었다. 현재 이 돌을 소장하고 있는 영국 박물관의 캐롤 앤드루스는 이 발견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799년 7월 중순, 이것을 발견하게 된 배경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그냥 땅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좀더 믿을 만한 견해에 의하면, 후에 쥴리언 요새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이 요새를 증축하면서 기초 공사용의 도로를 만들기 위해서 프랑스 군대가 부셔버리도록 명령받았던 매우 오래된 벽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돌의 3비문, 즉 한 문장이 세 가지 종류의 다른 문자로 쓰여져 있다는 중요성을 곧바로 알아차린 공적은 파괴 명령을 받은 부대 책임장교인 피에르 프랑소와 부차드 대위와 동료 장교들에게 있다. 비문의 세 번째 서채는 그리스어로 쓰여 있으므로 맨 처음 서체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열쇠로 사용할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8월 중순에 그 돌이 카이로에 도착하자마자 나폴레옹을 따라서 이집트까지 와있던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대 이집트의 언어를 새기는 데에 상형문자가 최후로 사용된 것은 서기 394년 8월 24일, 이집트 남쪽 국경에 있는 필레섬에서였던 것같다. 고대 이집트인이 사용한 세 가지 문자 중 문자와 문자사이를 떼지 않은, 쓰기가 가장 어려운 서체이던 민중문자(demotic)가 최후로 새겨진 것은 그 후 60년도 지나지 않은 서기 452년이었다. 그 후 1,370년 동안, 고대 이집트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자료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는 침묵해 버렸다. 이집트에 범람하고 있는 유적 중 무수한 상형문자의 비문이나 파피루스(papyrus;이집트의 나일강변에 자생하는 파피루스풀로 만든 종이와 같은 것)나 돌 또는 도기 파편에 꽉차있는 신관문자(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풀어서 쓴 행서체 문자)나 민중문자의 원전을 풀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상형문자의 해독에는 많은 사람이 참가했으나 로제타 스톤의 연구에 의해서 비로소 현재의 고대 이집트 언어에 관한 지식의 기초를 만들어낸 것은 장 프랑소와 샴폴리온이었다. 로제타 스톤의 상형문자가 해독됨으로써 비문에 숨겨진 많은 사실이 밝혀지고, 수세기에 걸쳐서 나일강 유역에 발달한 문명에 관해서 완전하고도 훌륭한 묘사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자연도 때로는 돕는다.
머피의 법칙을 바꾸어 말하면 '자연은 원래 짖궂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자연도 때로는 우리 인류에게 도움을 주고 고고학자에게 과거의 역사를 엿보게 해준다. 다음에 설명하는 루시의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것은 그녀와 같은 인간을 찾던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유사 세렌디피티의 예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자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남아프리카의 타웅 차일드의 두개골 발견은, 석회암 채굴인에게는 화석을 찾는다는 것은 전혀 엄두도 못냈던 것이었으니 만큼 완전히 세렌디피티적이었다).
루시(Lucy) : 1974년 11월, 인류학자 도날드 요한슨과 대학원생 톰그레이는 이디오피아 중북부에서 고대인의 화석을 찾고 있었으나 발견되는 것은 동물의 뼈뿐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골짜기를 지나가는데 그들이 있는 위쪽의 침식된 경사면에서 뼈가 불거져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수천년 동안의 퇴적물과 화산회의 두꺼운 층 밑에 묻혀 있었던 것인데, 최근의 집중 호우로 토사가 깎여내려 뼈를 노출 시킨 것이었다. 처음에 발견된 것은 팔 뼈 한 개 뿐이었지만 요한슨과 그의 공동 연구자가 3주일 동안 열심히 발굴한 결과 발견된 뼈는 수백 개에 이르렀다. 이 뼈들은 사람의 몸체였으며, 신장이 겨우 112센치미터인 성인 여성은 발굴 당시 유행했던 비틀즈의 곡 이름에서 착안해 루시라고 이름지었다. 루시는 당시 알려졌던 선사시대 인류의 조상 중 가장 오래되고 또한 가장 완벽한 것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방사성탄소에 의한 연대 결정에 의해서 연령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만년전으로 판정되었다. 또 그 여성의 골반을 조사한 결과 루시는 타웅 차일드보다 100내지 200만년 전에 직립보행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오제트 인디언 유적 : 오제트 마을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묻혀 있던 유물이 유사 세렌디피티적으로 출현하는 데에 자연히 도와준 또하나의 예이다. 브리언 페건은 이 발견의 경위를 '고고학의 모험'(1985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워싱톤 주립대학의 인류학자 리차드 도허티는 워싱톤 주 북서단의 작은 해안에 있는 폐촌 오제트에서 유적을 발굴했을 때 참고가 될 만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반세기 전까지 오제트에 살고 있었던 마카하 인디언의 역사를 이어 맞추기 위해 도허티는 현존하는 그들 자손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아주 옛날에 거대한 진흙 산이 마을을 메웠다는 크나큰 재해에 관한 전설이었다. 도허티는 어쩌면 이 전설이 사실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1970년 추운 겨울, 매우 강한 폭풍으로 높은 파도가 오제트의 넓은 해안에 밀어닥칠 때 그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둑의 일부가 유실되면서 대량의 유물[카누의 노, 나무 또는 뼈로 만든 낚시 바늘, 상감세공된 상자의 일부, 작살 자루, 모자 등]이 나타났다. 연대는 모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당시의 것으로 수세기 동안 진흙층 밑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마카하족 평의회는 유물을 거두어 보관하기 위해 박물관을 세웠다. 마카하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오제트의 진흙에서 나온 것이 우리의 유산인 것에 대해 특별한 자부심을 가진다." 폭탄도 도움을 준다. 제 2차세계대전 말기, 유럽의 대도시 중에서도 런던, 베를린, 로테르담, 함부르크 등은 공습에 의해서 폐허가 되었다. 그것은 매우 큰 비극이지만 이 황폐한 상태는 고고학에 약간의 독특한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런던의 폐허 속에서 신설된 '로마시대 및 중세 런던 발굴 평의회'는 서기 43년경 로마인에 의해 발견된, 주위의 마을인 런디늄의 흔적을 탐색했다. 로마의 병사들에 의해 번졌던 신앙의 주 대상이던 미트라(Mithra)신에 바쳐진 사원이 발견되었다. 오피스 빌딩을 건설하기 위해 건축업자가 사원을 파괴하려고 하자 여론이 정부를 움직여 결국은 로마사원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놓게 하였던 것이다. 이곳은 현재도 그 도시의 역사에 흥미를 가진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다.
소년과 동굴. 동굴을 반견한 소년들의 호기심이 고고학상의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 경우가 두 번이나 있었다.
라스코(Lascaux)동굴 : 1940년, 4명의 소년이 프랑스 남서부의 몬티냑 마을 가까이에 있는 숲을 탐험할 때 지면에 작은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년들은 호기심으로 그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구멍을 넓혀 보았더니 좁은 통로가 나타났으며 그것은 커다란 지하동굴로 이어져 있었다. 소년들이 가지고 있던 램프 불빛에 의해 동굴의 벽과 천장의 하얀 석회암 위에 색상도 선명한 동물 그림이 나타나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소년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을 이전의 교장선생님에게 보고하였고 교장선생은 선사시대 미술 전문가 아베 헨리 브루일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브루일은 동굴로 와서 그곳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고 이것은 분명 고대의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발견이 일반에게 알려지자 고고학자, 언론인, 구경꾼들이 동굴로 모여들었으나 견학은 몇몇 사람에게만 조심스런 통제하에 허락되었다. 전쟁 후에 프랑스 정부와 토지 소유자는 좀더 튼튼한 입구를 만들어 벽화를 보다 안전하게 관리하기로 했다. 그 후 수 천이라는 관광객이 라스코 동굴로 찾아 들었으나 지금은 귀중한 진짜 벽화가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본래의 동굴 옆에 설치한 정교한 복제 동굴을 견학할 수 있게 했다.
사해문서 : 1947년, 베두인(Bedouin : 아랍계의 유목인)족의 소년이 사해의 북서안에 접한 황무지의 절벽에서 미아가 된 산양을 찾고 있었다. 절벽의 한곳에 구멍이 나있는 것을 발견한 소년이 그곳에 돌을 던져보았더니 그 속에서 도기가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겁을 먹고 소년은 일단 도망쳐 왔다. 그 후 한 친구를 데려고 와서 그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큰 도제 항아리가 많이 있었고 그 중의 몇 개는 아마포로 싸인 오래 된 양피지의 두루마리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년들은 그 두루마리를 자기네 부족의 야영지로 가지고 갔다. 그 후 몇 개는 21키로미터 서쪽에 사는 예루살렘의 시리아인 대주교에게 팔아 넘겼다. 대주교는 그것을 예루살렘의 아메리카 오리엔트 사 연구소로 보냈다. 연구소의 존 C. 트레버 박사와 윌리엄 브라운리 박사는 두루마리의 글씨가 옛 형태인 헤브라이어인 것으로 보아 이 문헌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두루마리 중의 하나(구약성서의 이사야서의 사본)중에서 여러 부분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그것을 존스 홉킨즈대학의 헤브라이 고분서학의 전문가 윌리엄 F. 알브라이트 박사에게로 보냈다. 알브라이트 박사는 이 사본이 거의 기원전 100년경의 것으로 곧 판정하였으며, 이 두루마리를 '믿기 어려운 발견'이라고 했다. 이것들은 다른 대부분의 구약성서 사본의 단편에 비하면 거의 10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아랍인과 유태인 간의 군사적 적대관계 때문에 고고학자에 의한 그 후의 연구는 늦어졌으며, 1949년부터 겨우 시작된 여러 종류의 두루마리 찾기와 그 두루마리에 관여했던 사람들에 관한 정보 수집은 처음에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지방의 가난한 베두인들은 이것에 대한 새로운 수입원의 가능성을 간파했다(그들은 처음 발견한 두루마리를 이미 예루살렘의 학자들에게 팔아 넘겼다). 그들은 사해 가까이에 있는 유대인 불모지로 버려진 황무지의 갈라진 틈을 사방팔방으로 찾아 헤맸다. 1952년 그들은 크므랑(Qumran) 유적 근처인 베두인족의 소년에 의해 최초로 발견된 제 1동굴에서 2키로미터도 채 못되는 곳에서 귀중한 것을 캐냈다. 그 후, 베두인족과 고고학자의 열성적인 작업에 의해서 금욕적인 유태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Essene)파의 고대 수도원 유적이 밝혀지게 되었다. 로마인의 박해가 끝난 후에 되찾을 요량으로 이와 같은 두루마리를 만들어 숨긴 것은 아마도 에세네파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400권 가까이의 두루마리가 수천의 단편이 되어 발견되었으며, 구약성서의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두루마리의 중요성을 완전히 평가하는 데는 아직도 수십년 걸리겠지만, 이미 우리에게 성서에 관해서 미흡했던 중요한 지식을 주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던 당시의 종교적 분위기에 관해서 새롭게 이해되었으며, 신비적인 에세네파의 입장이 비로소 명백해졌다.
해면 채취 잠수부에 의한 발견.
수세기 전에 난파한 배는 그것이 항해하던 시대의 기록을 보존하고 있다. 아주 최근에 자력계나 수중음파 탐지기, 또는 리모콘으로 조절되는 비디오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에 지중해의 해면 채취 잠수부들이 해양에서의 가장 유력한 정보원이었다. 그들이 깊이가 30미터 이상이나 되는 해저에서 스펀지를 채취해 올 때에 난파선이나 그 흔적을 발견한 일이 몇 번인가 있었다. 난파선 탐험가 중의 한 사람인 조지 바스는 1987년 12월호의 'National Geographic'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랜 경험으로 고대의 난파선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정보원은 터키의 해면 채취선의 잠수부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최신의 수중음파 탐지기나 자력계보다도 훨씬 도움이 된다. 한여름 동안만에 25척의 배에서 일하는 다이버들이 총 2만 여 시간이나 해면을 찾아서 해저를 뒤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해면 채취 잠수부들로부터 얻은 정보에 의해 고고학적 조사를 하는데 그 결과를 얻게 한 발견을 세렌디피티라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해면 채취 잠수부들에 의한 최초의 발견 역시, 고대의 난파선을 찾아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으며, 오직 해면을 찾는 데만 그들의 관심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세렌디피티인 것이다. 터키 앞바다의 청동기시대의 배 : 해저 탐험가 피터 스록모톤은 지중해 해저에서 고대의 동상과 도기 항아리를 얻었다는 해면 채취선의 건장한 터키인 선장을 만났다. 선장은 미국인 해저 탐험가 그룹이 사용하는 근대적인 스쿠버 다이빙 장비를 경멸하였다. 이런 장비는 관광객이나 쓰는 것이지 진짜 다이버의 것은 못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곧 터키인 다이버들도 미국인이나 그들의 장비에 경의를 품게 되었다. 사실상, 젊은 다이버들은 그들의 케케묵은 금속성이나 다이빙 헬멧보다도 스쿠버 다이빙 장비의 사용법을 배우게 되었다. 1958년의 여름은 별다른 발견도 없이 끝났으나 한 해면 채취 잠수부가 동물의 가죽과 같은 모양을 한 청동으로 된 덩어리를 보았다고 해서 스록모톤과 그 동료들은 다음 해 여름에도 그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해 청동기시대의 배의 잔해가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그들은 배 그 자체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청동의 덩어리, 창날, 도끼, 조잡한 도기류 등을 다수 회수했다. 기후가 악화되었기 때문에 배에 대한 조사는 다음 해인 1960년 여름까지 연기하기로 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선체의 파편과 회수한 유물을 통해 그 배의 마지막 항해를 거의 기원전 1200년경으로 추정하였다. 그들은 그 배의 화물칸에서 발견된 1톤 이상의 청동과 동제품을 터키의 보드럼(Bodrum)박물관에 기증했다.
키프로스 앞바다의 그리스 선박 : 기원전 4세기 키프로스(Cyprus)의 앞바다에서 침몰되었던 그리스 선박이 회수되었다. 이때도 발견의 주역은 한 해면 채취 잠수부였다. 그가 발견한 것은 암포라(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달걀꼴의 대형 항아리)로 당시 와인을 담는데 사용되었으며 지중해를 항해하는 상선의 중요한 뱃짐이었다. 1970년 6월 호의 'National Geographic'지에서 미켈 카체프는 이 키프로스의 다이버가 과연 어떻게 해서 항아리를 발견했는지 또 그것들을 다시 발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면을 찾아서 잠수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 배의 닻이 끌려가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닻을 쫓아갔더니 닻이 그 항아리 무더기 위를 지나가고 있었죠. 그러나 해면으로 나와보니 그것은 강풍 한복판이라 도저히 위치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3년 동안이나 나는 다시 그 항아리를 발견해 보려고 노력했었습니다...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발견한 것이 수 주일 전이었으니까. 이것은 이제 당신 것입니다.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고고학자 뿐이죠. 당신네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고장의 명예를 위해서 나는 비밀을 지켜왔던 겁니다. 이것은 키레니아(Kyrenia)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소. 목조인 선체는 22세기 동안이나 그것을 덮어왔던 모래로 보호되어 왔다는 것과 원래 배 좀벌레로부터 목재를 지키기 위해 사용된 납으로 피복한 덕분에 거의 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배에 함께 탄 사람들은 이 납의 피복을 너무 믿었던 것 같으며, 고고학자가 조사해 보니 배 좀벌레는 납으로 피복된 바로 안쪽의 목재를 많이 해쳤으며 그 때문에 구멍이 나서 이 배가 침몰했는지도 모른다고 추정하였다.
울루 부룬의 청동기시대의 배 : 1973년 조지 F. 배스는 텍사스 A&Meogkr에 해양 고고학 연구소(INA)를 설립하여 현재도 그곳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INA는 아메리카 지리학회, 아메리카 과학 재단, 아메리카 인문학 기금 마련회, 에게해 선사시대 연구소등과 함께 울루 부룬에서의 난파선 발굴에 자금을 제공했다. 이 울루 부룬(Ulu Burun)에서의 난파선에 관한 최초의 정보는 1982년 여름에 얻었다. 한 젊은 해면 채취 잠수부가 선장에게 자신이 해면 밑 46미터 지점에서 일하고 있을 때 해저에 신기하게 생긴 '손잡이가 있는 금속제의 도자기가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 INA가 해면 채취선의 선주들에게 나누어 준 그림에서 선장은 다이버가 말한 것이 청동기시대의 동으로 만든 주괴(ingot : 녹인 금속을 주형에 부어서 굳힌 것)라는 것을 알았다. 선장은 이 정보를 INA에 전했다. 예비 조사는 1983년 여름에 실시되었으며 그 사진과 스케치를 보고 배스 박사는 "고고학자에게는 마치 이상을 확인하는 것 같다!"라고 외쳤다. 수천 개의 유물이 난파선에서 회수되었으나 그것들은 청동기시대 후기, 즉 이집트에서는 투탄카멘(Tutankhaman ;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제 18왕조)의 통치시대와 트로이 함락시대에 동 지중해에서 번영했던 일곱 문명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이들 유물 중에는 수백 개의 동과 주석의 주괴(이것은 동을 섞어서 청동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네페르티티 여왕의 이름을 새긴 작은 황금의 스카라베(scarab ;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신 케페라를 상징하는 황금충의 일종을 본따 만든 장식을 겸한 부적), 투탄카멘의 분묘에 사용된 것과 같은 모양의 아프리카산 흑단재, 발트해의 호박구슬, 그리고 아마도 가나안에서 만들어진 코발트 블루의 유리 주괴, 향료로 사용된 방향성 수지가 들어있는 암포라와 티리안 퍼플(왕가의 색인 보라색 염료)을 채취하기 위한 수백개의 조개껍질, 그리고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적으로 보이는, 상아의 경첩으로 철한 나무로 만든 책의 일부 등이 있었다. 목재인 책의 각 페이지에는 원래 왁스가 칠해져 있어서 철필로 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왁스는 남아 있지 않았으나 잔해의 봉해진 한 암포라 속에서 왁스의 성분이 검출되었다. 선체의 목재는 서로 장부 구멍을 파서 맞추어졌으며 이것은 호머가 오디세우스 왕의 배의 건조법으로서 설명했던 것과 같았다. 계속되는 고고학적 조사에서 INA의 연구원들은 이 배가 매우 특별한 배로서 아마도 왕족에게 보내는 짐을 싣고 있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 배가 난파한 것은 기원전 14세기경으로 많은 지배자들에게 대단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이 난파선이 세렌디피티적으로 발견된 덕택으로 이와 같이 고대 시대에 관한 막대한 양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해설) 기타 많은 고고학적 발견이 '순수한 노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편에서는 데릭 바톤 경이 말했듯이(35장 참조) 슬기로운 계획이나 훌륭한 착상에 의한 것도 많다. 인용될 수 있는 많은 예 중에서 타이타닉호 발견의 예를 들수 있다. 이 위업은 서구 세계의 주목을 모았으며, 다수인에 의한 훌륭한 계획과 새로운 과학기기 이용의 견본으로 그 중에는 이 계획을 위해 특별히 설계된 것도 있었다. 그 내력은 'National Geographic'지의 1985년과 1986년 12월 호의 두 기사 및 로버트 D. 발라드의 책 '타이타닉호의 발견'(1987년)에 잘 묘사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