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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69 호
단기 4340. 10. 05 (음력 8. 2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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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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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시인 "팔순의 삶도 괜찮아… 두려움 없이 늙읍시다" |
16번째 시집 '귀중한 오늘' 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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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아픔도 순하게 왔다 갑니다. 노년의 선물이지요. 젊을 땐 애인의 사소한 말에도 밤잠을 설치잖아요.”
올해 팔순을 맞은 김남조(80·사진) 시인은 노년기 삶을 사랑한다. 20년 전 겪은 고관절 골절 후유증으로 절뚝절뚝 걸어도 표정엔 그늘이 없다. 자연의 섭리에 따른 노쇠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펴낸 16번째 시집 ‘귀중한 오늘’(시학)에서 노시인은 인생에 대한 한없는 긍정을 노래한다. 70여편의 시는 대부분 포근한 서정시지만, 감정과잉과 자기도취가 없다. 시집은 지난 8월 만해대상 문학상을 받았다.
“과장 없이 준열하게 시를 씁니다. 남편을 잃었을 때도, 시가 애상으로 흐르려는 걸 막았어요. 독자에게 ‘나 잘 견디니까, 당신도 견뎌보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었지요.”
시집엔 종교적 위안, 인류애, 희망 등 삶의 온기가 담겼다. 절망을 강조하거나 감정 폭발로 끝맺는 시는 찾아볼 수 없다.
“시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위로, 희망이 있어야 해요. 시는 시인에게 깃들였다가 세상으로 나갑니다. 가능하면 내 손으로 따뜻하게 데워서 내보내고 싶어요.”
그가 인생을 조건 없이 긍정하게 된 까닭은 워낙 혹독한 청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1927년에 태어난 그는 20대에 일제 치하와 6·25를 겪었다. 고통의 밑바닥에 발을 딛고 난 후에는 모든 일이 견딜 만했다. 가난, 외로움 등 아픔이 쌓이면서 내성이 생겼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함께 앓는 공동체에 자신의 시를 바친다.
“시는 시대 전체의 정신을 품은 경건한 보고서입니다. 경제적 가난뿐만 아니라 정신적 빈곤도 위로해야 하지요. 재산이 넉넉한 사람도 분명 상처가 있게 마련입니다. 늙어가면서 외롭고 초라한 자아를 발견하기도 하지요.”
그는 노후 걱정에 애태우는 요즘 장·중년에게 위로를 건넨다. “여러분 안심하세요. 이 나이가 되어도 삶은 살 만합니다. 두려움 없이 늙읍시다.”
심재천 기자 jaysh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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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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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돈이나 편견이 개재되지 않는 한 쉽사리 문제의 양면을 볼 수 있다. / C.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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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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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실력 앞에서는 못 당한다
열한 번째는 시험 공부에 나서는 일이다. 과거의 급제는 뜻있는 선비가 애써 구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벼슬로 통하는 길이 되어 있으니, 만일 도덕에 온 마음을 쏟아서 예의를 제일로 치는 이는 과거를 숭상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국가를 위해 일하고 싶을 때면 마땅히 성심으로써 공을 이루어야지 날짜만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 벼슬길에 나아가면 항상 몸을 아끼지 말고 옳은 일을 실천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위해 헌신하라. 구차스레 따뜻하고 배부름만 구할 일이 아니다. 진실로 옳은 일을 지향하여 게으르지 않고, 평상시의 일을 도리대로 따르면 과거 공부도 역시 일상의 일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요즈음의 선비들은 게으르고 방종하며, 글읽기에 힘쓰지 않는다. 순수한 학문만을 사모한다면서 한갓 세월만 보내고, 학문과 과거 공부 중 한 가지도 성취하지 못하는 자가 많으니 진실로 경계할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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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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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7. 서학 논쟁
2. 천주교에 대한 찬반 양론
조선에 서학에 관한 자료가 도입되었다는 기록은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과 유몽인의 '어우야담'(1612)에서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기록은 단지 서양 문물과 천주교에 대한 지적 호기심에서 나온 독서와 비판에 불과했을 뿐 천주교의 본뜻을 이해하려는 데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 서적들이 조선에 계속 유입되었고,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과 서학 서적을 통하여 조선의 지식인들은 점점 더 서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안정복에 따르면 당시에 "서양 서적은 고관이나 학자들 중에 보지 않은 이가 없다"고 할 정도로, 서학에 대한 관심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서학에 대한 인식이 점차 깊어지면서 서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파까지 형성되었으니, 그 거두가 바로 이익이었다. 이익은 한편으로 천주교를 이해하여 조선의 유학을 보완하려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천주교의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아 그 문하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접근이 두드러졌고, 그 사이에서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신서파와, 천주교의 문제점들을 공격하는 공서파로 나누어졌다.
천주와 상제
천주교에서 유일신으로 받들고 있는 천주를 어떻게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는 천주교의 수용 여부에서 핵심을 이루는 문제였다. 조선 지식인들이 초기에 천주교에 접하게 되었던 서적은 "천주실의"였다. "천주실의"는 마테오 리치가 "천주교는 유학을 보완한다"는 입장을 표방하면서 저술한 교리서였다. 그러므로 "천주가 곧 유교의 상제"라는 그의 설명은 조선 유학자들에게도 일단 납득이 가는 것이었다. 이익도 "천주란 곧 유가의 상제"라고 긍정하였다. 그러나 이익을 비롯하여 천주가 곧 상제라고 받아들였던 당시의 유학자들은 순수한 선진 유학자가 아니라, 주자학적 체계로 유학을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인격신으로서의 신앙 대상이나 창조주로서의 존재는 인정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천주실의" 등을 통해 신서파들이 이해한 '천주=상제'의 개념은 분명 신앙 대상으로서의 창조주였다. 정약용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둘째아들이자 당시 천주교 지도자로 큰 영향력을 가졌던 정하상에 의하면, 온갖 만물이 조화롭게 생성되고 유지되는 것은 사람이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집을 짓듯이 어떤 창조주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법칙 원리라는 의미에서 상제의 주재성만 인정할 분 상제의 창조 능력과 인격성을 부정했다. 신후담은 상제를 집 짓는 목수에 비교할 수 없으며, 상제라 도와 기를 합쳐서 이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이헌경은 추상적인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란 들판에 나가 땅을 깨끗이 쓸고 제물로 지극히 공경하는 것일 뿐으로, 그것이 이목구비 등의 형상을 가하는 것은 오히려 상제를 귀신과 같게 하여 모욕을 가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물론 과거 유학자들이 말한 상제가 천주교의 창조주로서의 천주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유론을 표방한 '천주=상제'의 논리는 조선인들에게 천주에 대한 거부감을 상당히 완화시켰던 것이 사실이었고, 그에 대한 이상의 비판과 옹호도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당시의 유교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 현실 속에서 천주 우선의 가치관이 빚어 내는 충돌이었다.
무부, 무군
가정과 국가에서의 계층적 인간 관계를 사회 유지의 기본틀로 여겼던 유교 국가에서 부자 관계나 군신 관계에 대한 변화 요구는 그 사회 체계를 뒤흔드는 커다란 변란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놈'이란 깃발 아래 불교를 배척한 바 있던 유학에서는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천주교에 대해서도 같은 칼을 들이대었다. 그러나 천주교 쪽의 입장에서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정하상은 '상재상서'라는 글에서, 천주교의 십계명에도 효의 가르침이 있으므로 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허황한 우상 숭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군신 관계에 대해서는 임금을 존숭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우주적 차원의 천주를 임금 위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의 초점은 바로 제사를 거부하고 지존의 임금보다 천주를 우위에 놓는 태도에 맞추어졌다. 아무리 효도를 한다고 해도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유교적 가족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여겨졌고, 천주교로 유교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인들의 제의를 천주교식 제의로 대치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이기경 같은 사람은 천주교에서 효도를 부정하지 않을지라도 "그 서학의 십계명 가운데 군왕을 섬기는 것은 없으며, 효도 역시 네 번째에나 있으니 결코 선비가 볼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또 성직자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불교에서 가족을 이탈하는 것과도 비교될 수 있었다. 유교 사회의 전통에서 결혼에 의한 가문의 계승과 효도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수회가 보유론적 입장에서 유교의 제사를 우상 숭배가 아닌 관습으로 인정했던 것과 달리,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유교 의례 금지령이 반포되면서 중국과 조선에서 천주교에 대한 배척이 심해졌다. 이로 인해 신도들, 특히 양반층의 이탈이 많아졌지만, 그래도 천주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제사의 거부를 강행하였다. 이것은 유교의 기반 위에 천주교를 보완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유교 전통을 거부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을 지키려 한 것이었다. 또한 왕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왕보다 더 고차원적인 위치에 천주를 상정하는 것은, 서양 가톨릭 사회의 전통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일지 몰라도 동양 사회의 전통 속에서는 오랜 동안 누려 온 왕의 절대적 위엄을 손상하는 것이었고 왕정 국가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천당, 지옥설
천주교에서 천당지옥설은 천주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을 뒷받침하는 주요한 근거였다. 현세에서의 상벌은 공정하지 못하지만 천주에 의해 죽은 후에 공정성을 회복한다는 것이었고, 이 때 영혼의 불멸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삶과 죽음을 기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보는 유학에서는 영혼의 불멸이라는 것이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유학자들의 비판은 영혼 불멸설의 부당함에 그 초점이 맞추어졌다. 신후담은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음양의 정기가 모여서 물질을 이루는 것이며, 죽는다는 것은 혼이 올라가고 백이 내려가 흩어져 변하는 것이다. 변하면 존재하는 것이 없어진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은 천당이나 지옥으로 가야 할 영혼의 불멸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사후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유교 전통에서 천주교의 천당지옥설은 혹세무민이라는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천당지옥설은 불교의 그것과도 거의 상통하는 것이었으므로, 불교 배척의 맥락에서 쉽게 비판될 수 있었다. 천당지옥설에 의해 사람들을 미혹되게 하는 것은 유교적 수양에 의해 천지의 이치를 체득하여 그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천당에 가려는 이기적 욕구, 즉 이의 추구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라고 비판되었다. 하지만 어느 종교에서나 그러하듯이 사후 세계의 심판이란 것은 현실의 탄압 속에서도 그들의 종교를 유지시켜 주는 버팀돌이 되어 주게 마련이었다. 더욱이 현실의 모순 속에서 실질적인 개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당시의 소외 세력에게 천당지옥설이 갖는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것은 처절한 탄압 속에서도 천주교가 계속 퍼져 나가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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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점
본뜻 : 본래는 푸른 잎 가운데 오직 한 송이 붉은 꽃이 피어 있는 것, 혹은 여럿 속에서 오직 하나 특별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많은 남자들 사이에 끼어 있는 단 한 사람뿐인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고 있다.
"보기글" -김 이숙 양은 경제학과의 홍일점이지 -어떤 단체의 홍일점이 된다는 것은 불편한 점도 많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되는 면이 훨씬 많더군요
고려에 넣어?
우리는 쓸모없는 말을 하면서 아픔을 덤으로 겪는다. “감안하다, 고려하다, 참작하다, 계산하다 …”들은 쓰임이 비슷하다. 말만 많을 뿐 생산성이 없다. ‘감안’(勘案)은 왜식투이니 예부터 쓰던 ‘고려·참작’으로 바꾸라고 한다. 때로는 바꿔 쓴들 뭐가 나아지랴 싶다. 물론 그런 노력에서 좀은 분별심이 생기고 말 갈피가 잡힐 터이다.
그런데, 한걸음 나아가 헤아리면 앞의 말들은 죄다 버려도 될 말이다. ‘헤아리다’면 뜻·쓰임에서 이들을 아우르는 데 모자람이 없고, 쉽고 정확한데다 말맛도 살기 때문이다. ‘살피다·셈하다·생각하다·따지다’ 들도 이에 못지 않다.
“계산에 넣다, 계산에 넣지 않다”란 말을 흔히 쓴다. 영어 익은말(take account of/ take … into account/ taking into … account/ leave out of account /leave out of considertion)을 뒤친 표현들이다.
한자말 ‘산입하다’(算入-)를 ‘셈쳐 넣다, 셈해 넣다, 셈에 넣다’로 다듬어 쓰는데, 실제로는 ‘계산에 넣다’로 많이 쓴다. 이는 한자말과 영어에 두루 가닿는 연원이 복잡한 번역투인 셈이다. 이미 버릇돼 고치기 어려운 지경이지만 ‘계산에 넣다’ 역시 “아우르다, 헤아리다’ 정도로 끝내서 아쉬울 게 없는 말이다.
“고려에 넣다, 고려에 넣지 않다”란 말도 흔히 쓰는데, ‘계산에 넣다’를 다시 뒤친 표현으로서, 무척 부자연스럽다. 이는 그냥 “고려하다, 고려하지 않다”가 낫고, 이 역시 ‘헤아리다·생각하다’로 바꿔 써야 간명하고 쉬워진다.
△환경적, 현실적 요소들을 고려에 넣지 않고 오로지 ‘돈’만을 가지고 따질 경우 → 환경이나 현실적 요소들을 헤아리지 않고 ‘돈’으로만 따진다면. △해외 용병을 수입하는 경우, 반드시 고려에 넣어야만 하는 요소가 있다 → 외국선수를 데려올 때 반드시 짚어봐야 할 점이 있다. △이같은 상관 관계는 비만과 당뇨를 고려에 넣어도 여전히 유의미한 것으로 분석됐다 → 이런 상관 관계는 비만과 당뇨를 고려해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런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을 고려에 넣어 입장을 결정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 모든 것을 헤아려서 태도를 정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1994년 판결은 “사실의 동일성이 갖는 법률적 기능을 염두에 두고, 피고인의 행위와 그 사회적인 사실관계를 기본으로 하되, 그 규범적 요소도 고려에 넣어 판단하여야 할 것”이라고 판시했다 → 1994년 판결은 “사실의 동일성이 갖는 법률적 기능을 헤아리고, 피고인의 행위와 ~, 그 규범적 요소도 아울러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판시했다. △불법복제와 다운로드가 판치는 현실을 고려에 넣는다면, 현재 극장과 영화가 상업적으로 대단히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 불법복제와 내려받기가 판치는 현실을 다시 헤아린다면, ~. △각 학파가 불교의 화엄·선 사상 등과 같은 비유교적인 사상 형태로부터 받은 영향까지 고려에 넣는다면, 차이점은 훨씬 더 커지기 마련이다 → ~ 영향까지 고려한다면 ~. △차 타는 시간을 계산에 넣고 여정을 짜다 → 차 타는 시간도 헤아려 여정을 짜다. △혹 유전되었을 수도 있는 성향까지도 고려에 넣어 살펴보아야 한다 → 혹 유전되었을 수도 있는 성향도 아울러 살펴봐야 한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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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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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2. 변경의 실력자(진나라 목공)
다섯 마리 양과 바꿔온 오고대부 백리해
기원전 654년 진나라 헌공은 우리나라를 멸망시키고 우나라의 대부인 백리해를 사로잡았다. 진나라의 속임수에 말려들어 어리석게도 진나라 군대가 자기 나라 땅을 통과하도록 해준 결과 그만 나라를 빼앗겨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진나라에서는 백리해를 또다른 진나라의 왕 목공에게 시집 보낸 공주의 하인으로 삼아 진나라로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백리해는 도중에서 도망하여 초나라의 완이라는 마을에 은신했으나 그곳에서 그만 억류당하고 말았다. 한편 진의 군주인 목공은 공주의 일행 중에 오기로 한 백리해가 빠져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전부터 백리해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어떻게든 이 인물을 되찾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큰 돈을 써서라도 찾으려 했으나, 그렇게 하면 오히려 완 지방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사자를 시켜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나의 하인 백리해가 당신들 땅에 억류되어 있다고 하는데, 다섯 마리의 검은 양가죽과 그를 바꿔, 돌려보내 줄 것을 바라는 바이오."
그러자 완 지방 사람들은 그 조건을 받아들이고 백리해를 돌려보내 주었다. 그때부터 검은 양 다섯 마리와 교환해서 그를 차지했기 때문에 진나라에서는 백리해를 오고대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백리해가 오자 목공은 그를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해방시킨 다음. 국사를 논의하는 데 기용하고자 했다. 그러자 백리해는 거듭 사양했다.
"저는 망국의 신하로서, 결코 그러한 막중한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목공은, "우나라가 망한 것은 군주가 그대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대의 책임은 아니오." 하고 끝내 마다하는 그를 끈덕지게 설득하며 서로 이야기 나누기를 사흘이나 했다. 그러자 점점 더 그의 사람됨과 능력에 완전히 빠져서 어떻게 하든지 국정을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백리해는 그래도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천거했다.
"정 그러하시다면 저의 친구 중에 건숙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제가 감히 따르지도 못할 능력을 가진 인물입니다마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제나라에 갔을 때 저는 매우 궁핍하여 걸식하는 몸이나 다름없었으나 그는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 후에 제가 제나라 군주를 받들려고 했더니 그가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덕분에 저는 제나라의 내란에 휘말려 들지 않고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주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공자인 퇴가 소를 좋아했으므로 소 치는 품을 팔며 그에게 봉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퇴가 저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그때 건숙이 또다시 반대했습니다. 그 때도 그 덕분에 저는 주나라를 떠나 퇴의 죄에 휘말려 죽는 것을 면했습니다. 우나라 군주를 받들 때에도 그는 말렸습니다. 하지만 벼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저는 벼슬자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까지는 그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에 화를 면했습니다만, 마지막에 가서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은 탓으로 지금 이렇듯 말려들어 수모를 겪고 만 것이옵니다. 이상 말씀 올린 것으로도 그의 사람됨이 어떤지 잘 아셨을 줄로 믿습니다."
이에 목공은 당장 사자를 보내, 후한 선물을 주고 건숙을 불러들여 상대부에 임명했다. 며칠 후 목공이 백리해에게 물었다.
"공의 나이가 몇이신지요?" "벌써 일흔이 되었습니다." 이에 목공은 탄식했다. "내가 진작에 공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자 백리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분명히 너무 늙었지요. 더구나 새를 잡거나 맹수와 싸운다면 쓸모가 없을 정도로 늙었지요. 하지만 지혜로운 계획을 세우는 일이라면 아직 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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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16장. 상아와 견사를 만들다.
셀롤로이드. 합성 플라스틱으로 처음 성공한 것은 셀룰로이드로서 처음에 이것은 당구의 상아공 대용품으로 개발되었다. 1863년에 당구공의 재료로 당시 가장 애용되었던 상아가 아프리카의 야생 코끼리의 감소에 따라 매우 부족되는 사태가 일어났다(오늘날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이미 100년도 더 전에 중요시 되었다는 것은 심히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당구공의 대규모 제조업자가 상아 대용품 발명에 상금을 내걸었다. 미국 뉴저지 주의 인쇄업자 존 훼슬리 하야트와 그의 아우 이사이아는 여러 가지 재료로 실험을 시작했다. 그 하나는 톱밥과 종이의 혼합물을 풀로 굳힌다는 것이었다. 이 실험을 하는 도중에 하야트가 손가락을 다치자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콜로디온을 찾아 선반 앞으로 갔다(콜로디온이라는 것은 니트로 셀룰로오스를 에테르와 알콜에 녹인 것으로서 그 당시 이러한 목적에 흔히 사용되었다. 알프레드 노벨이 이와 비슷한 경험으로 폭탄 젤라틴을 발명한 이야기는 제15장을 참조할 것). 그런데 콜로디온의 병이 쓰러져서 내용물이 흘러나와 있었다. 그리고 용매가 증발했기 때문에 선반 위에는 니트로 셀롤로오스가 굳어서 얇은 판으로 변해있는 것을 보았다. 하야트는 톱밥과 종이의 혼합물을 굳히는 데는 지금 사용하고 있는 풀보다도 콜로디온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험을 시작한 하야트 형제는 니트로 셀룰로오스와 방충제로 쓰이는 장뇌를 알콜에 섞어서 압력을 가하면서 가열하면 당구공으로 적당한 플라스틱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노벨의 경우는 니트로 셀룰로오스와 니트로 글리세린으로 폭약 젤라틴을 만들었다). 장뇌는 니트로 셀룰로오스의 폭발성을 많이 완화시켰음에는 틀림없으나 그래도 셀룰로이드로 만든 당구공은 이따금씩 폭발을 했다. 하야트 형제는 당구공 대용품의 현상금을 받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이 폭발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니트로 셀룰로오스와 장뇌로 만든 자신들의 플라스틱을 '셀룰로이드'라고 이름을 지어서 1870년에 특허를 취득했으며, 이것은 오히려 다른 용도로 인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19세기 말경에는 셀룰로이드는 남성용 와이셔츠 칼라나 소매의 손목 부분에 사용되기도 하고 또 성형 의치를 만드는 틀, 나이프의 자루, 주사위, 단추 또는 만년필등에 사용되었다. 후에 그것들은 대부분이 플라스틱으로 바뀌었으나 그래도 나는 어렸을 때 조그마한 포켓용 달력, 카드 등이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졌던 것을 그 장뇌의 냄새를 통해 기억하고 있다.
레이온. 콜로디온이 병에서 흘러나온 것이 우연히 발견되어 성공을 거둔 것처럼 또 하나의 아이디어로는 최초의 실크 대용품이 있다. 파스퇴르가 심각한 누에의 전염병으로부터 프랑스의 실크공업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무렵, 그의 조수인 이렐 샤르돈네라는 젊은 화학자가 있었다. 이 누에 문제의 경험에서 샤르돈네는 실크의 대용품 개발이 강력하게 요망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878년 그가 암실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콜로디온이 담긴 병이 엎질러졌다. 잠시 후에 그가 닦아내려고 했을 때, 용매는 일부 증발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을 닦아내자 길고 가는 실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이 실이 실크와 비슷하므로 샤르돈네는 콜로디온을 계속 연구하기로 했다. 이 우연한 사건이 있은 후 6년이 지나 샤르돈네는 인조견을 개발했다. 그는 누에의 천연 먹이인 뽕잎에서 채취한 펄프를 에테르와 알콜에 녹여서 콜로디온을 만들어 실로 뽑아내고 더운 공기로 굳게 했다. 이 새로운 합성섬유로 짠 천은 1891년 파리 박람회에 성공적으로 전시되어 그 즉시 재정 지원을 받았다. 이 새로운 섬유는 '인조 견사'라고 명명되었고, 그 후 1924년경 부터는 레이온(rayon)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샤르돈네의 레이온은 발화온도가 매우 낮았다. 나중에 면을 실크 비슷한 잘 타지 않는 섬유로 바꾸는 다른 공정이 개발되어 최초의 레이온인 니트로 셀룰로오스는 더 이상 직물용 섬유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또한 니트로 셀룰로오스는 스틸 사진과 상업 영화 양쪽의 사진용 필름으로 한때 사용되고 있었으나, 그 가연성 때문에 몇 번인가 영화관에서의 비참한 화재의 원인이 되었다. 영사기가 고장나서 강력한 광선의 통로에 필름이 몇 초 동안 멎어 있기만 해도 인화될 정도였다. '안전필름'으로서 수년 전부터 사용하게 된 것은 아세테이트 셀룰로오스이다. 면과 실크의 외견상의 차이는 제각기 짠 실이 달라 면실은 오글오글한 데 비하여 실크실은 누에에서 나온 그대로 매끄럽다. 이 매끄러움이 실크의 독특한 광택이다. 샤르돈네의 레이온이 실크와 비스한 것은 면이나 목재의 셀롤로오스가 에테르와 알콜에 녹아서 화학적으로 다른 형(니트로 셀롤로오스)이 되는데, 이 점도가 높은 용액에서 다시 매끄러운 실로 뽑아내기 때문이다. 새로운 레이온으로 다음에 성공한 것이 크산토겐산 레이온과 아세테이트 레이온이다. 크산토겐산 레이온이라는 이름은 셀롤로오스가 화학적으로 다른 형인 가용성 크산토겐산 셀룰로오스로 바뀌는 과정에서 따왔다. 크산토겐산 셀룰로오스으 점도가 높은 용액이 아주 작은 구멍으로부터 밀려나와 매끄러운 실이 되는 과정에서 화학작용으로 인해 원래의 셀룰로오스로 바뀌는 것이다. 전체로서의 효과는 오글오글한 셀룰로오스 섬유에서 매끄러운 실크와 같은 섬유가 되는 물리학적인 형의 변화이며 이 레이온은 사실상 재생된 셀룰로오스인 것이다. 아세테이트 레이온은 처음에 샤르돈네가 만든 레이온과 비슷하다. 셀룰로오스는 아세테이트 에스테르로 변하며 이것은 질산 에스테르(니트로 셀룰로오스)와 마찬가지로 가용성이며, 매끄러운 실을 뽑아 낼 수 있다. 그러나 니트로 에스테르는 아세테이트 에스테르와 달라서 타지 않는다. 현재 섬유산업에서는 레인온의 주류인 크산토겐산 레이온(비스코스 레이온)과 혼동되지 않도록 아세테이트 레이온을 '아세테이트'라고 통틀어 말한다. 만일 상표에 '레이온'이라고만 쓰여 있으면 그 재료는 대개 크산토겐산 레이온이다.
아세톤과 같은 유기 용매를 사용하는 실험실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여기서 주의를 환기시켜 두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즉 '아세테이트'는 유기 용매에 어느 만큼은 녹기 때문에 그와 같은 용매의 접촉이 가능한 환경에서는 아세테이트로 만든 옷을 입지 않는 것이 좋다. 보통의 '레인온'(크산토겐산 레이온)은 화학적으로는 면과 같기 때문에 유기용매에는 녹지 않는다. 그 후 레이온보다도 훨씬 실크를 닮은 합성섬유가 여러 가지로 개발되었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실크보다 우수했다. 월러스 카로더스와 뒤퐁 사에 속해 있는 그의 그룹이 1930년대에 개발한 나일론은 그런 섬유의 하나이다. 신세대의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테르와 같은 새로운 합성섬유가 개발되어 직물에 많은 용도로 레이온을 대신 하게 되었다(나일론의 발명은 25장을 참조할 것. 테럴린, 테이크론 등 폴리에스테르에 관해서도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천연 실크를 흉내내거나 보다 좋은 것을 만들려고 한 시도는 샤르돈네의 인조견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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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부서진 배에다 선량한 선비를 비유한 최수성
최수성(1487-1521)의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가진, 호는 원정이다. 19세에 속세를 떠나 멀리 유람하며 좋은 산수를 두루 구경하였다. 가는 곳마다 소나무를 켜서 거문고를 만들어 타다가 떠날 때에는 이를 부숴 버렸다. 시풍은 속세를 떠난 높은 격조가 있었으며, 또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으니 참으로 절대기재라 할 수 있다.
김식이 조광조, 김정, 김구와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최수성이 갑자기 밖에서 들어와서 오랫동안 읍을 하더니 서둘러 말했다.
"노천(김식의 자)은 나에게 술 한잔 주게" 김식이 그에게 술을 주었더니 쭉 들이켜고 나서는, "내가 부서진 배를 탔다가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하였네. 가슴이 매우 두근거렸는데 지금 술을 마시고 나니 속이 확 풀리는 듯하군" 하고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괴이하게 여기자, 조광조가 말하였다. "부서진 배의 비유는 우리들을 가리킨 것이네. 다만 자네들이 몰랐던 것뿐이네"
남곤이 산수도 한 폭을 김정에게 보내어 화제를 요청하였다. 최수성이 마침 김정을 방문했다가 그것을 보고 그 산수도 위에 글을 썼다.
지는 해는 서산으로 내려오고 외로운 연기는 먼 나무에서 나오네 은사의 차림 복건 쓴 서너 사람 망천장의 주인은 누구이냐
남곤이 그 화제를 보고 원한을 품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최수성이 시국에 대해 분개하여 시를 지어 숙부 최세절에게 올렸다.
해 저문 창강 위에 날은 차고 물결은 절로 이네 외로운 배 일찌감치 대어야지 밤이 되면 풍랑 응당 높아지리
중종 16년(1521)에 승지 최세절이 동료에게 말했다.
"조카 수성이 나에게 벼슬에서 물러나라고 권하는데 떠나가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최세절이 그 시를 외어 전하였는데, 최수성을 꺼리는 자가 이 사실을 남곤에게 말하였다. 남곤이 안처겸 옥사의 추관이 되어 임금에게 최수성도 아울러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국청에 나온 최수성은 떳떳하게 말했다.
"사림이 불화하여 조정에 화가 생길까 두려웠으므로 숙부에게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남곤이 마침내 극형에 처해졌다. 평소에 친하게 놀던 벗 이달형 등이 발로 최수성의 시체를 거두어 싸서 빈 골짜기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영상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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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부스의 달걀
미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온 '콜럼부스'는 국민들로부터 거족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런가하면 그의 인기를 시샘하여 '신대륙의 발견이라 해서 야단스럽게 떠들 것 없다.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냐"하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연회석상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콜럼부스'는 잠자코 테이블 위에 놓인 달걀을 집어들더니 그것을 세워 보라고 했다. 좌중의 사람들은 저마다 달걀을 세우려 애썼으나 아무도 세우지 못했다. 그것을 본 '콜롬부스'가 달걀의 한 쪽 끝을 테이블에 대고 가볍게 쳐서 평평하게 만드니 쉽사리 섰다. 보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콜럼부스'는 "물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무도 이런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는데 나 혼자만이 생각해 냈소, 신대륙의 발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먼저 생각해 내느냐가 문제지요." 그 후로는 아무도 '콜롬부스'를 비웃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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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세번째 이야기 시인과 꼽추
어느날 현자가 아들에게 말했다. "일을 조금 그르쳤다고 해서 거기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라. 잘못된 줄 알면 빨리 손을 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꼴이 되느니라." 그리고는 아들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옛날에 학문을 아끼는 왕이 살았다. 한 시인이 그 왕의 공적과 업적을 칭송하는 기가 막힌 글들을 써서 세상의 감탄을 자아냈다. 왕은 시인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은 마음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줄 테니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시인은 한 달 동안 성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수문장을 시켜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었다. 성에 들어오는 사람들 중에 신체적 결함에 한 냥씩 벌금을 물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시인의 글에 푹 빠져 있었던 왕은 흔쾌히 승낙을 했다. 시인이 자신의 새 직업에 우쭐해져서 성문을 지키고 있을 때 꼽추 한 명이 망토를 푹 뒤집어쓰고 손에는 지팡이를 든 채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꼽추가 성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시인은 그가 꼽추이기 때문에 돈을 내야 한다면서 그를 가로막았다. 돈을 안 내려는 꼽추와 시인은 실랑이를 벌였다. 그 바람에 꼽추의 망토가 벗겨졌다. 가만 보니 꼽추는 애꾸눈이기도 했다. 그것을 본 시인이 말했다.
"당신은 애꾸눈이기 때문에 두 냥을 내야 하오. 꼽추에 해당하는 한 냥까지 합쳐서 말이오."
하지만 꼽추는 한푼도 못 내겠다며 완강하게 버텼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통에 시인이 꼽추의 모자를 벗기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꼽추는 두창까지 앓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이 말했다.
"이제 세 냥을 내야 하오. 당신이 두창을 앓고 있으니 말이오."
하지만 꼽추는 그 돈도 안 내려고 끝까지 버텼다. 그러자 시인이 완력을 써서라도 돈을 받아내겠다며 덤벼들었다. 꼽추도 질세라 소매를 걷어부치고 싸울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팔목을 걷어올리자 옴에 걸려 사방이 쭈글쭈글한 팔이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인이 네 냥을 내야 한다고 우겼다. 왕의 허락을 받고 요구하는 것이니 돈을 내야 된다는 시인과 자기를 욕보이는 일이니 그럴 수 없다는 꼽추는 결국 주먹질을 하며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꼽추가 땅바닥으로 뒹굴면서 탈장에 걸린 배가 그대로 다 드러나버리고 말았다. 이를 본 시인이 다른 신체적 결함까지 합해서 이제는 다섯 냥을 내야 된다고 우겼다. 결국에는 꼽추가 시인의 요구대로 다섯 냥을 내고서야 싸움은 끝이 났다. 처음에 아무 말 않고 한 냥을 냈으면 일이 그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텐데.
* 무슨 일이든지 처음에 조그만 손해를 보더라도 막을 수 있으면 괜한 고집을 부리지 말라. 일을 크게 확대시키다가 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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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2. 도둑맞은 역사와 기자 (기자증후군은 소중화, 사대주의에 눈먼 역사적 실수)
기자의 무덤
결론부터 밝히자면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이주해왔다는 이야기는 거짓이다. "기자" '송세가'편에 달린 두예의 주에는 현재의 허난 성 지역인 양나라 땅 몽현 박벌성에 은나라 탕임금의 무덤과 함께 기자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자의 무덤 위치와 관련된 기록은 "대청일통지" 172권에도 남아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서화는 지난날 기라는 이름을 가졌던 땅인데 개봉부로부터 90리 서쪽에 있으며, 성인께서 처음에 송나라 기땅을 영지로 삼으셨기 때문에 기자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지금도 읍에는 기자대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두 기록은 모두 기자가 한반도의 평양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서화가 남북조시대에는 양나라 몽현이었기 때문에 두 기록은 서로 일치하고 있다. 기자가 은나라 말기의 이름난 지성인이었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가장 오래된 중국 고전의 하나인 "상서"를 보면, 기자는 감옥에서 풀려나 주나라 무왕에게 '홍범'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회남자"와 "대대례기", "사기", "죽서기년" 등의 귀중한 문헌에서도 기자는 모두 은나라 말기의 최고 지성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기자가 어떤 사고방식을 가진 어느 계통의 종족 지도자였느냐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확인해보기에 앞서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기자는 결코 중국적인 것과 조선적인 것이 뚜렷하게 구분되던 그런 시기의 지성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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