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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67 호
단기 4340. 9. 28 (음력 8. 1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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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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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하나여성 글 마을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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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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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겐 친구와 고독이 아울러 필요하다. 여름과겨울, 낮과 밤, 운동과 휴식이 필요하듯. / 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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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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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집안의 웃음소리
아홉째는 참된 가정 생활이다. 배우는 자가 심신을 닦으려 한다면 반드시 가정에서 윤리를 다하여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하여 한 몸 같이 보라. 남편은 온화하고 아내는 양순하여 예의를 잃지 말 것이며, 올바른 방법으로 자녀를 교육하되 맹목적인 사랑만 가지고 참된 교육을 현혹시키지 말 것이다. 가정을 통솔하는 데는 엄숙함을 주로 하되 너그러운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굶주림과 추위에 대한 사정을 헤아려 생각하고, 위아래가 정연한 질서 의식으로 안팎의 구별이 분명하여야 한다. 한집안 일의 처리는 극진한 합리성과 바른 도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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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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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6. 인물성동이 논쟁
3. 논쟁 이후의 인물성동이론
이들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은 10여 년을 거치며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승복하거나 다른 한쪽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 다를 수 있는 관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중에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관점을 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뒤에 이들의 논쟁을 계승하여 양측에 각각 동조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생겨났지만 이론적 깊이는 더해 갈지라도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다. 얼마간 세월이 흘러 논쟁을 좀더 객관적으로 불 수 있게 되면서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포괄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였던 이항로, 기정진, 이진상 등에게서 그러한 시도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논점의 장단점을 인정하고 제삼자의 입장에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들이 인물성론에 관심을 기울인 것 역시 자연 과학적인 관심에서라기보다는, 조선 말기의 현실 문제에 대한 고민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도 가치론적 선택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항로는 인성물성의 동이 문제를 대동소이, 분이합동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집단적 존재와 개별적 존재의 사이에 내재하는 무수한 층차와 그들간의 다양성도 인정하는 한편, 결국은 근원적인 보편의 원리인 하나의 리로 귀결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점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만물은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분화되어 나온다는 리 중심적 입장을 취하는 그로서는 역시 대동, 합동에 치중하게 되었다. 기정진은 유리론이라고 불릴 만큼 철저한 리 위주의 체계, 즉 리일분수의 체계로 우주만물의 생성, 변화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만물 가운데서 리의 동일성을 보고, 하나의 이치 가운데서 다양한 만물의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동론과 이론의 논리를 모두 비판하였다. 그러나 유일한 원리로서의 이를 강조하는 그로서는 동론으로 기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진상은 성의 본체적인 면을 유성, 현상적인 면을 위성으로 구분하고, 동론과 이론은 각각 유성과 위성의 한쪽에만 매달린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구분은 이간의 일원, 이체의 설, 한원진의 성삼품설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이진상은 유성과 위성 모두를 리만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정진의 논리 구조와 유사한 셈이다. 현상계에서 성의 차이도 성이 본래 가지고 있는 다양성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 역시 리일의 통일성, 동일성에 비중을 두는 까닭에 동론 쪽으로 기울었다.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세 학자에게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리의 강화에 의해 외세에 대처하며 주리학적 이상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기를 바랐던 이 사람들은 인물성동이 논쟁의 성과와 이에 대한 평가를 통해 자신들의 이론을 정립시켜 갔으며, 또한 동론이나 이론의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한 차원 높은 이론으로 포용하려 하였다. 이들은 인물성동이 논쟁에 대한 검토를 거쳐 조선 주자학의 이론을 한층 더 심화시켜 갔다. 기정진은 인물성 동이론이 대한 치밀한 분석과 비판을 통하여 그의 리일분수론 체계를 형성하였고, 이항로와 이진상은 인성, 물성에 대한 논의를 거쳐 성이 발현되는 곳으로서의 '심'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켜 조선 시대 마지막 주자학 논쟁이라 할 수 있는 심설 논쟁을 이끌어 냈다.
4. 논쟁의 의의
인성과 물성의 동이 문제는 18세기 초에 시작된 후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거의 모든 지식인이 관심을 기울였던 문제였다. 당시로서는 최대의 논쟁거리로서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추구했던 이 논쟁의 의의는 아마도 관련 학문 분야의 좀더 체계적인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 대로 지금까지의 연구를 토대로 논쟁의 의의를 정리해 보면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성 개념의 다의성, 특히 주희가 사용하는 성 개념의 혼란을 정리한 것이다. 사단칠정 논쟁을 거치면서 조선 주자학의 이론적 깊이는 이미 중국을 능가하였다. 우주와의 관련 속에서 인간의 심, 성, 정에 대한 정밀한 탐구를 해 왔던 이들은 성 개념의 다의성에 주의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인간 심성의 긍정적 능력을 고양하여 주자학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선 주자학자들에게는 필연적인 과제였다. 그리하여 인성과 물성에 대해 논구하면서 주희의 개념 사용에 대한 검토 작업이 요구되었고, 그 과정에서 "주자언론동이고"라는 부산물도 낳을 수 있었다. 둘째는, 중국 이외의 새로이 등장하는 세력에 대한 대처 문제와 관련된 논의라는 것이다. 병자호란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맛본 후, '가장 사람다운 사람의 문화'로서의 중화 문화를 추구하며 소중화를 자부했던 조선이 짐승에 가깝다고 여기며 천시했던 오랑캐의 강대한 세력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이 논쟁을 화이론적인 문화적 우월성에 입각하여 거론되었던 북벌론의 논의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다. 또한 같은 논의의 차원에서 정반대의 입장으로 북학파의 인물성론에 주목하는 시도도 있다. 북학파, 특히 홍대용과 박지원은 사람을 포함한 만물이 모두 똑같이 기로 구성되고 공통된 생명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만물은 균등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사람의 입장에서만 세계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사물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객관적, 상대적 관점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의 상대화, 객관화는 중세 사회의 계층적 질서를 부정하고 근대적인 사회 질서를 만들어 가는 데 중요한 사고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화이론에 기초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세계의 시각에서 재검토하는 사고의 전환을 이루는 데 인물성동이 문제의 탐구가 중요한 이론적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조선의 마지막 주자학 논쟁이라 할 수 있는 심설 논쟁의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리가 기와 결합되어 성을 이룬다고 할 때 그러한 리기의 작용과 발현의 실질적인 핵심은 심에 있다. 심을 통해 인간의 성정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인물성동이 논쟁에서도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미발 심체의 문제는 그 성이 현실 속에서 발현되기 직전의 모습을 논의한 것이었다. 이는 리와 성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 것이었지만, 성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이제는 급박한 조선 말기의 현실 속에서 실질적으로 심의 성에 해당하는 명덕의 문제였다. 이에 이항로, 이진상 등은 인물성동이 논쟁을 거쳐 명덕 주리, 주기 논쟁 또는 심설 논쟁이라 불리는 새로운 문제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 더 읽어 보아야 할 책들 윤사순, "한국유학사상론" (열음사, 1986) 민족과사상연구회, "사단칠정론" (서광사, 1992) 한국사상사연구회, "인성물성론" (한길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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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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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
본뜻 : 글자 그대로 범의 아가리라는 뜻이지만, 그보다는 바둑 용어로 널리 쓰인다. 바둑에서 얘기하는 호구란 상대편 바둑 석 점이 이미 포위하고 있는 형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속에 바둑돌을 놓으면 영락없이 먹히고 말기 때문에 그곳이 꼭 범의 아가리 같다고 하여 호구라 한 것이다.
바뀐 뜻 : 오늘날에 와서 일 말은 먹이감이나 이용감이 된다는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남성적인 용어라서 그런지 여성들은 잘 쓰지 않는다.
"보기글" -내가 니 호구인 줄 아니? 너 사람 단단히 잘못 봤다 -김 대리야말로 완전히 이 과장 호구지 뭐
상일꾼·큰머슴
요즘 지방자치 단체장과 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운동이 한창이다. 저마다 그 고을 살림을 맡을 일꾼 곧 머슴을 뽑아야 할 중요한 선거다. 일꾼 중에도 일을 능숙하게 잘하는 일꾼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일꾼이 있다. 예부터 일을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여 새경이나 품삯을 달리 주었다.
“일꾼 중에선 힘으로도 상일꾼이구 사람됨도 젤 진국이에요.”(박완서, <미망>) 여기서 ‘상일꾼’[상:닐:꾼]은 ‘일꾼 가운데 특별한 기술이 있거나 일을 아주 잘하는 일꾼’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상’(上)은 전날 머슴이나 일꾼을 ‘상·(중)·하’로 구분하던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말로는 ‘상머슴’이 있다.
현행 국어사전에는 이런 뜻의 ‘상일꾼’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표기가 같고 뜻이 다른(동음이의어) ‘상일꾼’[상닐:꾼]이 수록돼 있는데, 그 뜻은 ‘별로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막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먹고 자고 꿍꿍 일하고, 자식새끼 만들고 할 줄밖에는 모르는 상일꾼(농부)였었다.”(채만식 <미스터 방>) 이 ‘상일꾼’의 ‘상’은 ‘상’(常)이어서 앞서 살펴본 ‘상일꾼’과는 다르다. 이와 같은 말은 ‘막일꾼·막노동꾼’이다.
실상은 어떨지 모르나 “일꾼 중의 상일꾼 ○○○”, “상일꾼·큰머슴 ○○○” 등을 적은 선거 벽보나 펼침막들을 보면 그래도 반가워진다. ‘큰머슴’ 역시 사전에는 없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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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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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 오직 천명에 따를 뿐이다(강태공)
천명에 따를 뿐이다
그 후 서백창은 대업을 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무왕이 즉위했는데, 그 역시 강태공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무왕이 즉위한 지 9년 되던 해, 무왕은 서백창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동쪽으로 원정을 나갔다. 출정할 때 강태공이 전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출정하도록 하라. 늦는 자는 목을 베리라." 그러자 전군은 일사분란하게 대오를 갖췄다. 군대가 막 황하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무왕이 탄 배에 흰 고기가 뛰어 올랐다. 무왕은 이 고기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냈다. 이윽고 무왕이 강을 건너자, 이번에는 강 상류쪽에서 불길이 일어나더니 쏜살같이 내려왔다. 그러더니 무왕 앞에서 붉은 까마귀로 변했다. 당시에 은나라의 상징색은 흰 색이었고 주나라는 붉은 색을 상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흰 고기가 무왕에 잡힌 것은 은나라가 무왕에게 멸망당함을 의미했고, 붉은 까마귀가 날아든 것은 주나라가 천하를 잡으리라는 징조였던 셈이다. 더구나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방에서 제후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그 수가 무려 8백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입을 모아, "지금 당장 은나라를 쳐버립시다." 하고 요청했다. 그러나 무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아직 천명이 은나라를 떠나지 않았소." 그리고는 군대를 되돌렸다.
2년 후 드디어 무왕은 전국에 포고문을 발표했다.
"백성들에게 고한다. 옛말에 암탉아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은나라 주왕은 달기의 말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하늘을 공경할 줄 모르고 포악한 정치를 일삼아 백성들은 도탄에 허덕이고 있다. 나는 이제 천명을 받들어 은나라를 토벌하려 한다. 지금 토벌하지 않으면 천하가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다.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싸워라. 도망하는 적은 죽이지 말고 우리 나라 일꾼으로 만들라. 모두 일어서라!"
그리하여 주나라의 10만 병력은 은나라 공격에 나섰다. 총사령관은 강태공이었다. 강태공은 군대를 이끌고 은나라 서울 근교에 있는 목야에 진을 쳤다. 이 소식을 들은 주왕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제까짓 놈들이 나를 친다고!" 그러면서 70만 대군을 이끌고 목야로 나갔다. 그런데 주왕의 군대는 주로 노예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싸울 의사가 없었고, 오히려 주나라가 이기면 자기들도 자유롭게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병사들이 많았다. 강태공은 정예병 백 만으로 선제 공격을 했다. 그러면서 사기를 높인 후 일제히 쳐들어갔다. 이에 은나라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거꾸로 메고 나가 오히려 주나라 군대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순식간에 승패는 결정되었다. 주왕은 간신히 도망쳐 궁궐에서 달기와 함께 스스로 불에 뛰어 들어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하여 은나라는 망하고 폭군 주왕도 죽었다. 무왕은 주왕이 죽은 곳으로 가서 먼저 그 시체에 화살 3개를 쏘고 다시 칼로 친 다음 황금으로 만든 도끼로 목을 잘라 흰색 깃대에 걸었다. 그리고 나서 구후, 악후, 비간의 무덤에 제사를 모셨으며 무참하게 죽은 임산부도 잘 거두어 묘소를 만들어 주었다. 또 기자의 아들을 찾아내 벼슬을 주었다. 은나라 백성들은 이러한 무왕의 처사에 크게 감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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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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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14장. 꿈에 의해 탄생한 분자의 구조식.
18세기 초 무렵 런던에서는 극장이나 공공장소의 조명은 경유(고래기름)에서 얻은 가스를 사용했었다. 배달하기 위해 이 가스를 탱크에 압축하면 휘발성이면서 향기가 좋은 액체가 분리된다. 유명한 화학자 마이켈 패러데이는 이 액체를 조사해 보고, 1825년경 이것이 거의 같은 비율의 탄소와 수소로만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한참 후에야 벤젠이라고 이름 지어진 이 액체가 코크스를 만들 때에 석탄에서 증류되는 타르의 한 성분이라는 것을 후에야 알게 되었다. 관련된 방향족 화학물은 여러 천연자원에서 발견되었다. 벤젠의 이 특이한 성질 때문에 화학자들 사이에는 이론상의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탄소원자에 대한 수소원자의 비율이 낮은 탄소와 수소만으로 구성된 대부분의 화합물은 대체로 벤젠하고는 성질이 달랐다(벤젠의 경우 분자식은 C6H6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비율은 1대1이다). 이와 같은 화합물을 수소에 관해서 불포화라고 한다. 즉, 이와 같은 화합물에는 수소의 몇 분자가 부가되기 쉬운데 벤젠은 부가가 잘 되지 않는다. 벤젠에는 이 외에도 기묘한 성질이 있어서 1865년까지 아무도 벤젠의 적당한 구조식을 고안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을 고안한 사람이 프리드리히 A. 케클레였다. 케클레는 1829년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건축을 배울 생각으로 기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기센대학에서 유스투스 폰리비히의 정열적인 강의에 크게 영향을 받아 일생을 화학에 바칠 것을 결심했다. 그는 기센대학에서 파리대학으로 옮겨 안드레 듀마와 부르츠에게 배운 후 영국으로 건너가서 당시 최고이던 영국인 화학자들과 함께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독일로 돌아와서 처음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교단에 섰고, 이어서 1858년 벨기에의 겐트대학의 화학과 교수가 되었다. 겐트대학에는 1865년까지 있었으나 그 해 본대학에서 불러 A.W. 호프만의 후임교수가 되었다. 그는 1896년에 사망할 때까지 본대학에 있었다. 그 해는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한 해이기도 했으나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다섯 사람 중 세 사람(1901년 환트 호프, 1902년 에밀 피셔 및 1905년의 아돌프 폰 바이엘)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케클레는 19세기의 대단히 뛰어난 화학 교육자로도 알려져 있다.
교육자로서의 명성은 차치하고라도 화학자 사이에서 케클레를 아주 유명하게 한 것은 유기 화합물의 분자구조에 관한 그의 이론이다. 1858년 이전의 유기 화학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암흑 속에서 연구를 했었다. 즉 설령 무언가 획기적인 일을 해내려해도 연구대상의 물질이 어떤 것인가에 관해서 분자의 모양을 마음속에 그려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828년 프리드리히 뵐러는 요소와 시안화암모늄이 모두 탄소, 수소, 산소, 질소를 1:4:1:2의 비율로 함유하고 있는데도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밝혔다(제 9장 참조). 이것들을 오늘날 이성체라고 하는데 같은 수의 같은 원자로 연결되어 있는데도 어떻게 다른지 그 당시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865년 케클레에 의해 벤젠에 관한, 납득할 수 있는 구조식이 제안된 것은 학계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 식이 발표된 후 25주년이 되는 1890년에 베를린의 시청에서 성대한 축제가 개최된 것은 결코 이상할 것이 없다. 독일에서의 합성염료 공업의 발전과 19세기 후반의 유기화학의 눈부신 개화는 케클레와 그의 제자, 동료들에 의해서 발전된 구조론에 의한 바가 크다. 축제에서 케클레의 강연은 독일의 저명한 화학잡지에 발표되었다. 다음 인용문은 그때 케클레가 말한 화학구조의 일반이론으로서 이 이론의 발견 100주년을 맞이한 1958년에 출판되었다.
여러분께서는 벤젠 이론의 탄생 기념축제를 축하해 주고 계시지만 먼저 제가 말씀드려야 할 것은 저에게 벤젠이론은 단순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자의 원자가와 그 결합의 본질은 제가 만들어 낸 사고방식의 매우 명백한 결과인 것입니다. 사용되고 있지 않은 원자가는 달리 어떻게 처분 되었을까요? 런던에 있을 때 저는 클레이 팜 로드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종종 친구인 휴고 뮬러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대부분 제가 좋아하는 화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기분 좋은 여름날 밤 제가 타고 온 막차인 버스는 인적이 끊긴 거리를 달렸으며 저는 언제나처럼 위층자리(런던의 이층버스)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몽상에 빠졌으며 원자들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그 아주 작은 생물들이 나의 꿈속에 나타날 때는 언제나 똑같은 몸짓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그것들의 움직임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작은 것 두 개가 짝을 짓기도 하고, 큰 것이 적은 것 두 개를 끌어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좀더 큰 것은 작은 것을 세 개 또는 네 개를 붙들면서 전체는 눈이 돌 정도로 격렬한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 몇 번이고 보였습니다. 큰 곳이 사슬을 만들고 작은 것은 사슬의 끄트머리를 끌고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차장의 안내 방송이 저를 꿈에서 깨어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은 이 꿈의 윤곽을 종이에 스케치하면서 보냈습니다. 이것이 구조론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벤젠이론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겐트대학에 있을 때 저는 한길가의 조촐한 독신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으며 저의 서재는 햇빛이 닿지 않는 좁은 골목길에 접해 있었습니다... 저는 앉아서 교과서에 필요한 것을 써넣고 있었는데 작업이 지지부진 했습니다. 다른 일에 신경이 쓰였던 것이었습니다. 의자를 난로쪽으로 향하게 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또 제 눈앞에서 원자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또 제 눈앞에서 원자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는 작은 것들이 뒤쪽에 얌전히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가끔 있었기 때문에 제 마음의 눈도 예민해져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큰 구조까지 식별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따금 길다란 열이 마치 뱀처럼 얽히고 설키면서 찰싹 달라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뱀 한 마리가 자신의 꼬리를 물로 마치 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습니다. 마치 번갯불이 번쩍 하듯이 눈을 떴습니다. 그날 밤도 저는 이 가설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에 관해 생각하며 보냈습니다.
런던에서의 버스 안과 겐트대학시절 난로 앞에서의 케클레의 꿈은 유기분자의 구조에 관한 심원한 이론으로 진전되어 과학의 진보에 매우 값진 것이 되었다. 첫 번째 꿈에서 원자가 '사슬을 만들고', '큰 것이 작은 것을 두 개 끌어안기도 하고', '좀더 큰 것은 작은 것을 서너 개 붙들고' 있는 것을 보고 케클레는 탄소원자가 수소원자나 기타 원자와 결합하면 서로서로 사슬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제안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메탄올이나 에탄올의 분자식은 간단히 CH4O와 C2H6O로 알려져 있으나 이들 구조식은 그림 14-1과 14-2처럼 표시된다. 마찬가지로 요소의 구조식은 그림 14-3처럼 그려지며 한편 시안화암모늄은 그림 14-4와 같이 된다.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던 두 번째 꿈에서 케클레는 6개의 탄소가 한 고리를 만들고 있는 벤젠의 환상구조를 제안했다. 그림 14-1에서 14-4까지 탄소는 다른 원자와 4개의 선으로 맺어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산소(O)나 질소(N)등의 원자와 2개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처음 꿈의 결과 '탄소가 모든 화합물 속에서 4가이다'라는 케클레의 제안을 뜻한다. 제각기 한 개의 수소원자와 결합한 6개의 탄소원자가 한 고리를 만들고 있는 벤젠의 식으로는 각각의 탄소원자로부터 양측의 탄소원자와 1개의 수소원자로 구성된 합계 3개의 선(원자가)밖에 나와있지 않으므로 그림 14-5에 표시한 바와 같이 어딘가에 이중결합을 할 필요가 있다. 케클레가 그의 분자식으로 '사용되지 않는 원자가'를 처리한 것도 이 방법이었다. 많은 화학자가 이 환상구조식을 받아들여 높이 평가했으나 이 식에는 결점이 있지 않겠는냐고 지적한 사람도 있다. 만약에 두 개의 이웃한 수소원자를 다른 원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 두 개의 원자를 결합하고 있는 탄소가 이중결합으로 맺어졌는가 또는 단일결합으로 맺어졌는가에 따라서 두 개의 이성체가 생기게 된다. 케클레는 이와 같은 이성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환상구조에 관한 그의 개념을 수정하여 환상구조는 환을 구성하는 탄소원자 사이에서 이중결합과 단일결합이 빠른 속도로 교환되고 있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따라서 이성체는 서로 바뀌고 있어서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1865년부터 1890년 동안에 그 외에도 벤젠에 대한 그럴듯한 구조식이 제안되었으나 실험적인 증명으로 버티어 나온 것은 케클레의 식뿐이었다. 벤젠의 구조와 기타 수천 가지 종류의 방향족 화합물의 구조에 관한 케클레의 관점은(전자의 발견이 케클레의 구조식 25주년 기념식이 있었던 수년 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자간의 전자적 결합이라는 양자역학 개념에 근거를 둔 현대의 관점과 일치한다.
케클레의 꿈이야기와 그 꿈이 그의 분자구조론에 대한 역할에 관해서는 많은 비판도 있었고 의문을 품은 사람도 있었다. 케클레는 1860년대의 그의 논문에서 꿈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당시 많은 과학자들이 공식적인 논문에서 자기의 아이디어가 어디서 왔는지 일일이 쓰지 않았으며 실제로 있었던 일과는 거의 역순으로 자료를 제시하기도 했었다. 우연, 상상 또는 꿈이라는 것은 이따금 위대한 발견의 중요한 요소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발견의 단서에 지나지 않는다. 케클레가 초기의 논문에서는 그의 분자구조설이 꿈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숨기고 기념축제의 강연을 통해 비로소 이를 인정했다고 해서 조금도 놀라거나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 강연 중에서 위대한 과학자이자 몽상가이기도 했던 케클레의 특징이 나타난 대목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여러분 꿈꾸기를 배웁시다. 꿈을 꿈으로 해서 우리는 아마도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이성으로 잘 살펴볼 수 있을 때까지 그 꿈을 발표하는 것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노벨상이 시작된 것은 케클레가 사망한 후였으므로 그는 수상하지 못했으나 그야말로 노벨이 기대했던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노벨을 사망하기 수개월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달성하기 어려운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염료의 개발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설파제나 아스피린과 같은 의약, 고 옥탄가 가솔린, 합성세제, 플라스틱, 그리고 폴리에스텔섬유등 이러한 모든 것들은 케클레가 벤젠의 구조식에 의해 기초를 구축한 방향족 화학의 성과인 것이다.
(해설) 1921년 생리학자 옷토 레뷔는 화학물질에 의한 신경자극의 액성전달을 발견했다. U.바이스와 R.A. 브라운에 따르면 이 아이디어는 레뷔가 잠을 자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일어난 꿈에서 얻었다고 한다. 처음 꿈을 꿨을 때는 깨어났다가 금방 다시 잠이 들었기 때문에 아침에 눈떴을 때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두 번째 꿈을 꾼 레뷔는 깨어나자 마자 그대로 실험실로 가서 꿈속에서 생각했던 간단하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실험을 했다. 케클레와 마찬가지로 레뷔도 그의 연구기초가 된 아이디어의 기원에 관해서 곧바로 공표하지 않았으나 케클레와 달라서 그는 친구와 가족에게는 바로 설명했으므로 이 일에 관해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레뷔의 딸은 부친이 꿈에서 비롯된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을 것이라고 렐뷔의 동료가 예언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의 예언대로 레뷔는 H.H. 데일과 함께 1936년도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수상 강연에서는 꿈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바이스와 브라운은 "레뷔가 발견하게 된 배경에는 케클레가 말한 바와 같이 과학연구에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가 꿈속에서 실제로 얻을 수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또 19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이며 생리학자이기도 한 헤름홀츠가 성과가 좋은 아이디어는 "아침에 잠에서 깼을 무렵에 머리에 떠오르는 일이 많았다"고 말한 사실도 지적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상상력과 기억력은 꿈이나 또는 이에 가까운 상태(백일몽?)인 때에 가장 활발하다. 대학의 내 연구실에서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중요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한 아이디어는 헤름홀츠가 말한 바와 같이 아침시간이나 비행기, 버스안, 아니면 산보를 하거나 무심코 터벅터벅 걸을 때, 또는 샤워를 하거나 음악을 즐기고 있을 때에 문뜩 떠오르는 것이었다. 식물에 의한 광합성을 설명하여 1961년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멜빈 칼빈은 이 문제의 열쇠를 생각해 냈을 때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이산화탄소의 광합성 순환에 대한 기본적인 양상의 하나를 깨달았을 때를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아주 기묘하게도 그야말로 순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의 아내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안 나는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전에 알고 있었던 모든 사실과 모순되는 어떤 기본적인 정보를 연구실에서 얻어서 몇 개월 동안 그대로 있었습니다. 주차금지구역에 세워두었던 승용차 핸들 앞에 앉아 있었을 때 미처 생각 못했던 화합물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아주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몇 초 동안에 탄소의 경로가 순환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것은 30초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스피레인션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다만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1964년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찰스 H. 타운즈는 "레이저는 어느 아름다운 봄날 아침 워싱톤 DC의 공원벤치에서 탄생했습니다. 프랭클린 공원에서 진달래를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분자에서 매우 순수한 형의 전자파를 끌어내는 실용적인 방법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입니다"라고 술회한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이자 1891년도 노벨생리학상 수상자인 신경 생물학자 로저 스페리는 간질병 환자의 뇌 양쪽 반구를 수술로 분리하여 연구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이 장에서 밝힌 바와 같은 상황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인스피레인션은 뇌의 우측에서 오는 것이며 또한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 우뇌의 사고는 의식적으로 육성되기도 하고 훈련되기도 한다고 한다. 꿈이나 백일몽이 제아무리 귀중하다고 해도 케클레의 인용문에 있는 바와 같이 꿈이란 내려 쪼이는 햇볕 아래에서 음미되어 테스트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틀림없다. 밤이건 낮이건 한순간의 섬광과 같이 떠오른 아이디어도 몇 날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어렵게 노력한 결과 비로소 참다운 결실을 맺는 것이다. 이와 같이 꿈에서 시작된 발견은 세렌디피티에 포함시킨 것은 이것들이 통상 같은 부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꿈이나 인스피레이션이 우연인지 어떤지에 관해서는 의논이 분분하기도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꿈에 의해서 행동하고 케클레나 레뷔, 칼빈, 타운즈 등과 같이 훌륭한 발견을 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행운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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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산골짜기 노파와 농부들까지도 우러러보았던 조광조
조광조(1482-1519)의 본관은 한양이고, 자는 효직, 호는 정암이다. 17세에 아버지 원강이 어천 찰방이 되었는데, 이때 한훤당 김굉필이 희천에 귀양와 있었다. 조광조가 그를 좇아 노닐면서 학문하는 큰 방법을 터득하였다. 김굉필이 햇볕에 꿩을 말려 제사에 쓰려고 뜰에 두었는데, 지키던 자의 부주의로 고양이에게 도둑을 맞고 말았다. 김굉필이 몹시 화를 내며 지키던 자를 꾸짖자 옆에 있던 조광조가 말하였다. "조상을 받드는 성의는 비록 간절하시나, 군자는 말씨와 기색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김굉필이 조광조의 손을 잡고 사과하였다. "나도 몹시 성을 내고는 곧바로 뉘우쳤는데, 네 말이 또 이러하니 나도 모르게 부끄럽고 감복되는구나. 그리고 네가 나의 스승이요 내가 네 스승이 아니다" 그 뒤 중종 5년(1510)에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종 14년에 대사헌이 되어 반열에 나아가는데 백관들이 그 위의와 풍채를 바라보고는 모두 감탄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대사헌에 임명된 지 사흘 만에 사람들이 예법을 지켜 남자와 여자가 길을 달리하여 다니었으니, 온 세상이 그를 우러르고 복종함이 이와 같았다. 그해 10월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능주에 유배되고 12월 20일에 사사되었다. 그가 38세로 목숨이 끊어질 때에 절명시를 지었다.
나라 근심을 내 집처럼 근심하고 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했네 하늘의 해가 이 충심을 비추어 환하게 아래의 땅 굽어보리
정암이 사사될 적에 그의 아우 숭조가 급히 달려가서 길옆에서 우는데 어떤 노파가 산골짜기로부터 슬피 울며 와서 물었다.
"대인은 어찌하여 우십니까?" "나는 형님을 잃었으므로 울지만 노파는 어찌하여 우는고" "조정에서 조광조를 죽였다 하니, 현인이 죽었으므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웁니다"
황해도 강령군에서 세 사람이 들에서 같이 김을 매다가, 한 사람이 말했다.
"가뭄이 심하여 금년에는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을 것이다. 근년에 조광조가 아주 청렴 간명하여 각도의 주군이 소환 당하는 편지가 전해졌는데, 이 때문에 고을에 고함치고 호통치는 아전이 아주 없어졌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조광조가 유배되었다가 이미 죽었다 하니, 가뭄이 드는 이 천재는 아마도 조광조 같은 현인이 죽은 연유에서 생기는 듯하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서울에 올라와서 이 말을 전하니, 곧바로 그 사람을 잡아와서 극형을 가해 죽였다. 같이 김매던 사람은 '고발하지 않은 죄'를 받았으며, 고발한 사람에게는 무명을 상으로 내렸다. 영상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이며 문묘에 종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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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의 저주
'이브'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죄로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아야만 했는데 먼저 '카인'을 낳고 이어 '아벨'을 낳았다. '카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양을 쳤다. 한 번은 두 형제가 제각기 수확한 것을 하나님에게 바쳤는데 하나님은 '아벨'이 바친 것을 보고 좋아한 반면 '카인'의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화가 치민 '카인'은 '아벨'과 둘이서 들에 일하러 나갔을 때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그 결과 '아벨'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나게 되었다. '카인'도 자기가 저지른 죄의 엄청난 것을 깨닫고 하나님에게 말했다. "저의 죄는 너무나 무거워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뿐더러 오늘 이 땅을 쫓겨나서 방랑자가 되면 도중에서 만나는 자가 저를 죽이고 말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럴 염려는 없다. 카인을 죽인 자는 7배의 벌을 받게 될 것이다."하며 만나는 사람이 그를 죽이지 않도록 그에게 표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카인'은 '에덴'의 동쪽 노도의 땅에 가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장가를 들어 '이녹'을 낳았다. 결국 '카인의 저주'란 인류 최초의 살인자, 형제를 죽인 자가 받는 저주인 것이다. 이상은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만들고 그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으며 '아담'과 '이브'가 '카인'과 '아벨'을 낳았다. 그런데 '아벨'이 죽었으니 이 지상에는 '아담' '이브' '카인'의 세 사람밖에 없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방랑자가 된 '카인'을 누가 죽인단 말인가. 또 '카인'이 아내로 맞이한 여자는 어디서 생겨났는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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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첫번째 이야기 보상금을 찾아 준 철학자
어느 가난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천 플로린이 들어 있는 돈주머니는 주웠다. 그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아내는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일단 나한테 들어오면 절대로 그냥 나갈 수가 없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재물을 내리신 거니 둘이서 끝까지 지켜야 해요."
하지만 다음날, 천 플로린을 잃어버린 부자가 사방에 방을 붙여놓았다. 돈을 찾아주는 사람에게는 보상금으로 백 플로린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돈을 주웠던 가난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 이 돈을 돌려줍시다. 그리고 양심의 거리낌없이 마음 편하게 보상금이나 받읍시다.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천하를 얻는 것보다 떳떳하게 사는 게 더 값어치 있지 않겠소?"
아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편을 말리고 싶었지만, 남편은 아내의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주인에게 돈을 돌려주고 보상금으로 백 플로린을 요구했다. 하지만 부자는 돈이 자기 수중으로 돌아오자 마음이 변해 가난한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은 주운 돈을 나에게 돌려주었소. 하지만 사백 플로린이나 모자라오. 당신이 나머지를 마저 가져온다면 그 때 가서 백 플로린을 주겠소."
가난한 사람은 천 플로린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한게 없었다고 말했지만 부자는 믿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말다툼이 싸움으로까지 번지자 그들은 왕을 찾아가 천 플로린을 왕에게 맡기고는 누가 옳은지 재판을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왕이 어느 철학자에게 이 사건을 상세히 조사해서 공정한 판결을 내리라고 명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라고 불리는 철학자에게 이 사건을 재판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재판관이 가난한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이 아직도 이 부자의 돈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전부 돌려주었는지 나에게만은 사실대로 말해주시오." 가난한 사람이 말했다. "하늘에 맹세컨대 제가 주운 것은 모두 돌려주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부자가 말했다. "제가 천사백 플로린을 잃어버렸다는 건 하늘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의 말을 모두 들은 철학자가 왕에게 말했다. "고귀하신 전하께 청하옵건데, 다음과 같은 판정이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 플로린은 전하께서 보관해두시고, 일단 백 플로린을 이 가난한 사람에게 보상해주십시오. 천사백 플로린을 잃어버렸다고 맹세까지 했으니, 천 플로린은 이 정직한 부자의 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가 잃어버린 돈은 다른 사람이 보관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나중에라도 운이 좋아 이 부자가 잃어버린 천사백 플로린을 주운 사람이 나오면, 그 때 가서 되돌려주면 될 것입니다."
왕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철학자의 판결이 현명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부자는 자기의 꾀에 자기가 넘어갔음을 알고는 왕에게 자비를 내려달라고 간곡히 사정했다.
"전하,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제가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있사옵니다. 여기 있는 천 플로린은 제가 잃어버렸던 돈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에게 약속했던 보상금을 안 주려고 꾀를 낸 것이었습니다."
너그러운 왕은 자비를 베풀었다. 왕은 부자에게 천 플로린을 돌려주도록 하고 돈을 주운 가난한 사람에게도 제 몫을 돌려주도록 했다. 그래서 그 가난한 사람은 공정하고 현명한 재판관 덕택에 부자가 뒤집어씌운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 모든 일에는 순리가 있는 법이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가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마저 잃을 수 있음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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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 출발점을 잃어버린 역사 - (우리 겨레가 작아지게 된 첫 출발점)
'알'을 잃으면 커질 수 없다
유라시아 대륙의 드넓은 초원과 거친 사막지대를 중심으로 특별한 지역적 경계조차 없이 살아가던 기마종족들이 청동기문화(한반도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서기전 10세기부터 청동기시대가 되었다는 주장은 교통혁명의 위력을 무시한 매우 어리석은 견해이다)의 형성과 함께 더욱 활발한 내부경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종족들 사이의 계통적 분화가 이루어졌다. 앞에서 살펴본 황제계와 치우계의 전쟁은 그런 분화의 상징이었으며, 그 이후 아시아 기마종족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 두 갈래 속에서도 다양한 작은 갈래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들도 꾸준히 분화되어갔다. 옛 시대를 서술하고 있는 기록에서 종종 보이는 다양한 종족의 명칭도 그런 분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두 갈래로 나누어 진 후에도 기마종족들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이 남아 있었으며, 문명권이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치우 이후 4백여 년이 채 지나지 못한 단군 왕검의 시대도 문명권의 분화가초보적으로 이루어진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발굴된 유물을 관찰해보면 단군계는 기마종족의 주류로서 황하의 중상류 유역에 묶여버린 중국계보다 여전히 발전된 문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중국계의 역사와 달리 우리들의 역사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중국이 역사를 자랑할 때 우리는 겨우 신화를 들먹거려야 했고, 중국이 호화로운 문화적 성과를 내세울 때 우리는 경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을 읊조려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된 데는 외부종족인 한족이나 경쟁종족인 일본인의 탓도 적지 않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까닭은 우리의 조상들과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역사를 제대로 누릴 줄 몰랐던 것이다. 중국이 자신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길 때, 우리는 자신의 역사를 숨겨왔던 것이다. 중국이 우리 역사를 짓밟고 왜곡시킬 때, 우리는 중국 역사를 우리 역사인 양 앵무새 짓을 하면서 겨레의 영웅들을 무식한 원시 괴물로 만들었던 탓이다. 그래서 치우는 자기 후손들에 의해 액막이 귀신 노릇이나 도맡았고, 왕검은 '전설의 고향'에 등장하는 단골배우 정도로 잊혀져갔던 것이다. 자신의 후손들이 '요순시절'이나 들먹이며 자신을 야만인 대접할 때, 그 역사가 어찌 온전한 것이랴! 탄생기와 성장기가 없는 생명체가 어디 있으며, 배꼽 없는 역사를 가진 겨레가 어찌 제대로 커갈 수 있단 말인가!
그 결과 우리는 겨레 역사의 '알'(모든 사물의 원초적 뿌리)을 키워내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작아져왔다. 그것은 뿌리를 잃어버린 겨레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역사적 뿌리와 문화적 알을 상실하면 겨레의 힘도 그만큼 줄어들고, 마침내 나라땅마저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어 버린 겨레의 초기 역사가 바로 오늘날의 작은 한반도를 상징하는 첫 출발점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보통 한울님 또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의 합성어이다. 우리말에서 원래 남성은 임(님)이라 했으며, 여성은 뉘(누이, 누리, 눌)라고 했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가 님이라 하는 말은 남성을 가리키며, 누이라고 하는 말은 여성을 가리킨다. 그런 구분마저 불분명해진 것은 오늘날의 형편이다. 우리 조상들에게서 하늘은 남성의 상징이고 땅은 여성의 상징이었다. 즉 하늘은 큰 남성이고 땅은 큰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늘은 한임 또는 한님이라 했으며, 땅은 한눌(한뉘, 한누리)이라 했다. 우주를 가리킬 때에는 이 둘을 합쳐서 한눌님이라 불렀고, 남성적 하늘을 가리킬 때는 한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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