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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63 호
단기 4340. 9. 21 (음력 8. 1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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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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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서울여성백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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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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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직관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규칙을 만든다. / K.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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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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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세상은 마음먹기 나름
다섯째는 마음속에 잘 간직하는 일이다. 배우는 학생이 행동거지를 닦으려면 반드시 마음을 바로 추스려서 바깥 세상의 유혹을 받지 말아야 여러 가지 사악함이 물러나고 바야흐로 충실한 덕을 쌓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배우는 학생은 먼저 마땅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앉아서 마음속에 잘 간직하며 조용한 가운데에 흐트러짐 없이 사리에 맞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라. 만약에 어떤 상념이 생길 때에는 반드시 선악의 기미를 살펴, 그것이 착한 것일 때에는 그 뜻과 도리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이 악한 것일 때에는 그 싹을 잘라 마음을 다스리고 보살피는 노력을 끊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살아가는 데 있어 의리와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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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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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5. 인심도심 논쟁
4. 논쟁 이후의 인심도심설
앞서 살핀 선배 학자들의 인심도심설은 크게 보아 주희와 나흠순의 논의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 그들 특유의 논점이 부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러한 논의 범주와는 달리 인간의 마음과 도덕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실천을 주장한 학자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학자는 무엇보다도 후대에 실학 사상의 이론적 모태를 제공하거나 실학을 실천한 사람들 가운데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인물들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 인물로서 허균과 윤휴를 들 수 있다. 이들과는 달리 이황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우로서 또한 이현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허균
허균은 이른바 양명 좌파라 불리는 태주 학파의 후기 학자들, 구체적으로 이지의 '동심설'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지는 현성양지의 입장에서 동심이 진심이라고 말하며, 명교와 같은 주자학적인 도덕주의 이론을 거짓 도학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지는 주희를 비롯한 수만은 주자학자들이 내린 도심에 관한 해석들이 실제로는 허식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동심에 장해가 되는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뿐 아니라 동심 속에서 이른바 이단 사상들까지 포괄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허균의 학문은 이와 같은 이지의 사상에서 적잖이 영향을 받았으며, 삶의 궤적 또한 이지와 비슷하게 벼슬을 버리고 장삼가사를 걸친 채 유랑하면서 인간의 욕구 그대로를 실천하고자 할 뿐 그런 욕구의 '바름'에 구애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에 그의 사상은 간접적으로 전하는 언설을 통해 살펴볼 수밖에 없다. 안정복과 심재 등은 "허균은 총명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나 행동하는 데는 검속함이 전연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품부한 것)이고 남녀의 분별의 윤리 기강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보다 높은즉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감히 하늘이 품부한 본성을 어길 수 없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사사로운 욕심으로서의 인심이나 하늘의 이치라는 도심도 모두 대상에 감응하는 데 근원하여 생겨나는 것이라면, 성인도 육체가 있는 이상 인심이 없을 수 없고,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천품이 있는 이상 도심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굳이 주자학자들이 리기심성을 논하며 형식적인 도덕률과 예학을 강조, 이를 이간의 자연적 감정보다 우위에 두면서 인간 일반을 구속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허위적인 모습을 허균은 폭로하고, 나아가 인간성의 해방을 통해 실학 정신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윤휴
윤휴는 조선 시대 박세당과 함께 반대당인 송시열과 그 후예들에 의해 이른바 '사문난적'으로 배척되었던 사람이다. 더구나 당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서인이 학문적으로도 대체로 노론은 이이의 계통을 잇고 소론은 성혼의 계열을 계승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근기 남인 계열의 학자인 윤휴의 인심도심설을 이들이 추종하던 이이와 성혼의 학설과 비교하는 것은 의의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윤휴는 학문적으로 남인인 이원익과 허목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는 하였지만, 이와는 별도로 부친 윤효전이 서경덕의 제자인 민순한테 배웠던 관계로 해서, 남인 계열의 리 중심 철학과 함께 기철학적인 영향을 받았음도 무시할 수 없다. 윤휴는 처음에는 주희의 학설을 따라 인심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도심은 성명의 바름에서 근거하므로 지각하는 바가 달라 차이가 날 뿐, 처음부터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이이가 "이미 도심이라고 하면 인심이 아니고, 인심이라고 하면 도심이 아니다"라고 하여 인심과 도심의 개념을 다르게 본 것에 대해, 그렇게 하면 도심과 인심을 리와 기에 분속시켜 결국 인심도심을 이원적으로 여기게 된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윤휴는 다른 한편으로 나흠순의 인심도심설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즉 윤휴는 '제순인심도심지도' 등에서는 인심도심을 기발이요 유행이라 하여 주희의 학설과 별로 다르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인심도심도'의 중도에서는 도심을 미발로 보고 인심을 기발로 보아 나흠순에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인심도심을 정자는 천리와 인욕이라 하고, 주자는 인심은 형기에서 나오고 도심은 성명에서 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흠순에 이르러서는 기발과 미발로 생각하였으니 대개 각각 지적한 바가 있었다"고 하여 절충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자학 일변도였던 당시의 학문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절충안은 실은 주자학설보다는 나흠순의 학설을 지지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윤휴의 인심도심설은 비록 이이의 인심도심설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한편, 이황의 리기 이원적 입장도 지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윤휴의 인심도심설은 오히려 노수신이나 중국의 나흠순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현일
이현일은 영남의 퇴계 학파 적전으로서 이이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인심도심설을 피력하였다. 그는 "심의 허령지각은 두 가지 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지각이 의리에 따르는 것을 도심이라 하고, 혈기에서 작용하는 것을 인심이라 한다. 지각은 하나이지만 그 기원한 것에 각각 주된 바가 있으니 한 마음으로서 두 가지 양태가 있다 해도 해로울 것이 없다. 이제 이이가 '리기는 혼륜하여 나눌 수 없는 까닭에 인심도 도심의 발동이 하나의 길 위에 있을 뿐'이라 한 것은 천리와 인욕을 통틀어 하나로 삼게 되고 성과 기라는 두 글자를 판별하지 못하는 병통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이현일이 이이의 인심도심설을 "근원은 하나이지만 그것이 흘러 두 가지로 된다는 학설"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것은 "두 가지 근원을 가지고 두 가지 양태로 나타나는 학설"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이현일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이의 인심도심설은 나흠순의 "도심은 체요, 인심은 용"이라는 일원적인 경향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보고, 이이가 비록 겉으로는 나흠순의 인심도심체용설을 비판하지만 속마음은 이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과감하게 지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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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각
본뜻 : 행각이란 불교 용어로서 수행 승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수행하는 것을 일컫는다. 불교 용어 중에 운수 행각이란 말이 있는데, 구름처럼 물처럼 정한 곳 없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바뀐 뜻 : 오늘날에 와서는 주로 좋지 않은 목적을 가지고 여기저기 다니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여색을 탐하는 엽색 행각에서부터 사기 행각, 도피 행각 등에 주로 쓰인다.
"보기글" -그 두 사람은 양가 부모의 반대를 피해 애정의 도피 행각을 벌였다 -현대판 카사노바 김 아무개의 엽색 행각은 당시로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일대 사건이었다
아사리판
‘속’과 ‘안’은 본디 다른 말인데, 요즘은 헷갈려 뒤죽박죽 쓴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속’은 “거죽이나 껍질로 싸인 물체의 안쪽 부분” “일정하게 둘러싸인 것의 안쪽으로 들어간 부분”이라 하고, ‘안’은 “어떤 물체나 공간의 둘러싸인 가에서 가운데로 향한 쪽, 또는 그런 곳이나 부분”이라 해놨다. 어떻게 다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 밖에도 여러 풀이를 덧붙였으나 그건 죄다 위에 풀이한 뜻에서 번져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본디뜻을 또렷하게 밝혀놓으면 번지고 퍼져나간 뜻은 절로 졸가리가 서서 쉽게 알아들을 수가 있다. 그러나 본디뜻을 흐릿하게 해놓으니까 그런 여러 풀이가 사람을 더욱 헷갈리게 만들 뿐이다.
‘속’은 ‘겉’과 짝을 이뤄 평면이나 덩이를 뜻하고, ‘안’은 ‘밖’과 짝을 이뤄 텅빈 공간을 뜻한다. ‘속’은 ‘겉’과 하나가 돼 붙어 있지만, ‘안’은 ‘밖’과 둘로 나뉘어 있다. 그러니까 국어사전이 보기로 내놓은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까 말까 한 좁은 골목 ‘속’에 쓰러져 가는 판잣집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서 있었다” “지갑 ‘안’에서 돈을 꺼내다” 이런 것들은 잘못 쓴 보기로 내세워야 마땅한 것들이다. 골목에는 ‘속’이 없고 ‘안’이 있을 뿐이고, 지갑에는 ‘안’이 없고 ‘속’이 있을 뿐이다. 우리 속담 “독 안에 든 쥐” 또는 “보선이라 속을 뒤집어 보이겠나!” 같은 쓰임새를 눈여겨 살피면 깨달을 수 있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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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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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인물로 본 변방의 역사 - 딜라이 라마, 간디, 에바 페론
페로니즘과 1940년대 아르헨티나
1940년대 초반 전세계는 사회주의자와 자본주의 그리고 파시스트 3개국의 격전장이었다. 이런 세계적인 대결 구도의 영향을 받았던 아르헨티나의 정치사도 숱한 쿠데타와 정치적 격변의 연속이었다. 1940년 집권한 군 출신 카스틸로 대통령은 파시스트 국가와의 외교 단절을 거부함으로써, 아르헨티나는 칠레와 함께 반파시스트 연합에 참여하지 않은 남아메리카 국가로 남게 되었다. 1943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라미레즈의 군사 정권도 공개적으로 독일을 옹호하는 등 파시스트에 우호적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권력 유지를 위해 경쟁정파와 언론을 탄압하는 데 주저함이 없던 폭력적인 독재 정권이었다. 라미레즈 정권은 미국의 압력과 국내의 반대파에 맞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국민 대중의 지원이라고 판단한다. 특히 농민과 도시 노동자를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진력하는데, 이 분야의 정책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후안 페론(1859~1974)이다. 라미레즈 정권에서 노동부 장관직을 맡게 된 페론에게는 사실 특기할 만한 경력은 없었다. 군 역사를 강의하거나 칠레와 이탈리아에 파견된 대사의 군무 수행원으로 일했을 뿐이다. 그러나 노동부 장관이 된 후, 그는 좌파의 영향력을 차단하면서 토지와 높은 임금과 사회 보장을 약속함으로써 노동자 등 하층민을 유인한다. 그는 절망에 빠져 있던 하층민의 절대적 영웅이 되었고 마침내 1946년에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후안 페론에게는 그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이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눈빛만은 영민했던 미모의 여배우 에바 페론이 있었다. 그녀는 1919년 5월 7일 아르헨티나의 로스톨로스에서 가난한 소실의 딸로 출생했다. 15세의 나이에 가출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겨온 에바는 싸구려 잡지의 모델로 일하다가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을 뿐이었다. 그 누구도 이 여인이 아르헨티나 민중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퍼스트 레이디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후안 페론이 에바와 만난 것은 그가 막 정치에 입문하여 승승장구할 즈음이었는데, 그 만남은 처음부터 수난을 불러왔다. 나이 어린 여배우 또는 젊은 `딴따라`와 놀아나는 셈이었으니 주위의 비난은 당연했다. 군대에서도 후안의 연애 행각이 군인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비난이 일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1945년 10초에 또 다른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후안 페론 등을 체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것은 그에게 중대한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위기는 곧 에바의 위기였다. 그러나 에바는 이때부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에바는 후안 페론의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그의 지지 세력, 특히 도시 노동자들을 규합한다. 영화 <에비타>에서도 이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데, 에바는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나 역시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하층민 출신이다. 우리들 하층민과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후안 페론뿐이다.” 그녀에게 끊임없는 상처를 입히고 삶의 기회를 박탈해 왔던 바로 그 출신 성분을 도리어 강력한 무기로 활용한 전술은 주효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후안 페론의 석방을 요구하는 노조의 시위가 연일 잇달았는데, 시위 주동자는 바로 에바였다. 결국 당시 집권층은 보름도 되지 않아 후안 페론을 풀어 줄 수밖에 없었다. 출감한 날 그는 약 30만 명의 군중 앞에서 연설했는데 그 연설 내용은 라디오를 타고 전국에 방송되었다. 그리고 연인이자 든든한 정치적 조력자인 에바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난 뒤 후안 페론은 1946년에 5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은 페로니즘을 모토로 삼아 강하고 공정한 사회 건설을 약속했다. 페로니즘의 기본 정책은 모든 계급과 계층들의 타협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페론 정부는 우선 사회 각 집단들을 개별 조직으로 묶었다. 페론 집권 기간 동안 노동자 조직이 생겨났고 기업가는 물론 교수나 대학의 조직들, 심지어는 전국의 고등학생을 포괄하는 조직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정부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들 조직의 화해를 위한 중재자로 나섰다. 후안 페론은 또한 국내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급속 성장을 위해 국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정책을 편다. 철도 등 국가 기간 시설은 국유화되었고 국가 경제 구조는 일사분란한 조직으로 묶이기 시작했다. 한편, 국제 관계에서 후안 페론은 다분히 공격성을 보인다. 1947년 60여 개의 독일 회사 자본을 몰수하는 등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를 장악했던 외국 자본의 입지에 치명타를 가함으로써 국내 산업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외교적으로는 제3의 입장,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길을 선택한다. 페로니즘의 성격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다.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 단계라는 평가도 있고, 개발 독재라는 평가도 받았다. 페로니즘은 후안 페론 개인의 권력 유지를 위한 강압적인 정치 행태라는 설명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페로니즘의 성격을 규정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이념이 아르헨티나를 사로잡았다는 점이다. 1946년에서 1976년까지 있었던 자유 선거에서 페로니즘 정당이 패배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새로운 아르헨티나를 향해 국민을 지휘하던 후안 페론의 곁에는 항상 에바 페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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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10장. 영상기록의 시작.
독자 여러분께서는 조지 워싱톤의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까? 또 에이브라함 링컨의 사진은 얼마나 보았습니까? 성공적인 첫 사진술이 L.J.M. 다게르에 의해 발명된 것은 1835년으로 위싱톤이 사망한 후이고,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다. 이것이 발명되기 전에는 유명인의 초상도 화가의 수고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게르가 최초의 사진을 촬영하는 데 사용한 것은 '암상장치(camera obscura)'이었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상자의 한쪽 끝에 렌즈가 있고 상이 초점을 맺는 위치에 간유리판을 장치한 것이었다. 암상장치는 수세기 전에 발명된 것으로서 레오나르드 다 빈치가 1519년 이전에 기술하고 있으며, 1573년에는 E. 단티가 렌즈 뒤에 거울을 놓고 반전된 상을 다시 되돌리도록 고안하였다. 다게르 시절에는 유리판 위에 얇은 종이를 깔고 물체나 풍경을 추적하는 데 암상장치가 사용되고 있었다. 암상의 상을 고정시키려고 한 초기의 한 사람은 프랑스 사람 J.N. 니엡스였다. 그가 사용한 것은 아스팔트[유태역청]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빛에 노출되면 어떤 종류의 용매에도 잘 녹지 않게 된다. 이 방법으로 1822년경에 그는 암상장치를 사용해서 일단 내구성이 있는 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세계 최초의 사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품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했으며, 방법 역시 실용적이지 못했다. 한편 다게르는 빛에 분해되기 쉬운 것으로 알려져 있던 은염으로 실험했다. 니엡스가 하고 있는 일을 알게 된 다게르는 그를 만나 공동으로 일을 하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니엡스가 곧 사망(1833)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 아이시도르와 금융상의 언급은 있었지만 일은 혼자서 진행하게 되었다. 다게르는 은으로 도금한 동판을 번쩍번쩍 닦아내고는 요오드의 증기에 갖다대어 표면에 요오드화은의 얇은 층을 만들었다. 암상장치를 사용해서 이 판을 노광시키자 희미한 형상이 생겼다. 이 상을 짙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어느날 그는 다시 한번 사용할 목적으로 희미하게 형상이 나타나 있는, 노광이 끝난 판을 씻어서 약품이 들어있는 선반에 넣어 두었다. 며칠 후 다시 그 판을 꺼내보니 놀랍게도 진한 형상이 나타나 있었다. 이것은 지극히 우연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발견된 것은 다게르에게 '통찰력'과 '마음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반 속의 약품 중에서 어느 것인가가 형상을 진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선반에다가 노광한 요오드화은의 판을 놓아둔 채 약품을 하나씩 꺼냈다. 그런데 약품을 전부 꺼냈는데도 상이 진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선반을 조사해보니 거기에 깨진 온도계에서 흘러나온 수은이 몇 방울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다게르는 수은의 증기가 상을 짙게 한 원인이라고 추정하여 그 즉시 실험하여 확인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은판사진'인 것이다. 그 후, 사진가들은 섭씨 75도 정도로 가열한 수은이 들어있는 컵 위에 노광한 판을 놓고 '잠상'을 현상하게 되었다. 다게르는 자신의 수은에 의한 발견에 관하여 "이미 수은화합물 실험을 하고 있었으므로 금속수은의 증기는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행운은 내가 그것을 잡을 수 있도록 인도했다"고 설명했다(한편 불행하게도 지금 잘 알려져 있는 수은증기의 높은 독성 때문에 은판사진을 취급하는 많은 사진사가 심한 병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일찍 사망했다). 은판사진은 양화사진이었다. 요오드화은에 빛이 닿게 되면 그 부분이 광화학적 현상을 일으켜 변질되며, 원소상의 은과 수은이 결합하게 되면 밝은 아말감(amalgam)이 생성된다. 광선이 닿지 않은 부분의 요오드화은은 다음 과정에서 씻겨 없어진다. 은-수은 아말감 부분은 은도금 판인 거울 속에서 어두운 배경을 반사시켜서 밝은 상을 만든다(만일 창공이나 광선 아래에서와 같은 밝은 배경에서 은판사진을 보면 상은 어둡게 되고 배경이 밝게 된다). 변화 안된 요오드화은을 제거하는 방법은, 처음에는 단순히 일반 소금(염화나트륨) 물로 씻었으나 티오황산나트륨(소위 하이포)이 휠씬 좋은 정착액이라는 것이 알려져 바로 개량되았다. 은판사진은 금새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것은 주로 몇 사람의 저명한 파리 과학자들의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 중의 한사람이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사무국장인 프랑소와 장 아라고이다. 그는 1839년 8월 19일 아카데미회합에서 이 발명을 소개하고 다게르와 니엡스에게 상을 수여하도록 의회에 제안했다. 상은 실제로 수여되었으며, 이것은 국가의 자랑임과 동시에 이 방법이 다른 나라로 건너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상 덕분으로 이 새로운 사진술은 한층 널리 알려져 곧이어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에서도 인기절정에 다달했다. 실제로 프랑스 정부가 염려했던 대로 그 이용과 발전은 주로 미국에서 진행되었다. 다게르의 선구적인 업적이 있은 후, 사진술은 많이 개량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음화-양화법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일반대중의 은판사진에 대한 매료는 19세기 중렵의 사진술에 엄청난 자극을 주었다. 은판사진과 그 발명가를 출범시칸 발견은 세렌디피티에 의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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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꿈을 빙자하여 형의 재산을 빼앗은 심의
심의(1475-?)는 좌상 심정의 아우이다. 자는 의지이고 호는 대관재이며, 문장에 능하였다. 중종 2년(150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벼슬은 이조 좌랑에 그쳤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바보로 자처하며 자기 재능을 숨기고 삶으로써 화를 면하였다. 한번은 형 심정의 집에 이르러 쥐구멍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형에게 말하였다.
"형이 훗날 이 쥐구멍으로 나가려 하여도 잘 안 될 것이니, 오늘 시험삼아 나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심정이 대답하지 않았다. 뒤에 심정이 복성군 옥사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자, 심의가 와서 울며 말하였다.
"쥐구멍이 저기 있는데 형은 어디로 갔습니까"
심정이 비록 남을 시기하고 해치기는 했으나, 형제간의 우애는 천성으로 지극하였다. 심정이 한번은 남곤과 조그마한 정자에서 무슨 일을 상의하고 있는데, 심의가 창문을 밀어젖히며 말하였다.
"두 소인이로다"
남곤이 크게 노하여 얼굴빛이 변하였으나 심정은 태연히 말하였다.
"내 아우가 본디 천치이니, 공은 용서하시오"
심의는 형이 지위가 높고 권세가 성대하여 전지와 동산을 많이 지닌 것을 보고 마음으로 매우 좋지 않게 여겨 꾀를 내어 속임수로 뺏으려 하였다. 하루는 심의가 새벽에 일어나서 울며 말하였다.
"꿈에 부모님을 뵈었는데,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작은 아들이어서 아무 데에 있는 전지와 아무 종을 너에게 주려 하였는데 미처 조치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 일이 가슴에 맺혔구나' 하시므로 제가 돌아가신 아버님 때문에 슬피 웁니다" "부모님이 너를 생각함이 지극하셨는데, 내가 어찌 이 재산들을 아껴 지하의 부모님 영혼을 위로하지 않겠느냐"
심정이 크게 감동하여 즉석에서 문서를 만들어 심의에게 주었다. 심정이 뒤에 심의에게 속임을 당한 것을 알고 심의의 뜻을 시험하고자 하여 또한 새벽에 일어나서 거짓 슬퍼하는 체하면서 말하였다.
"꿈에 아버님께서 말씀하기를 '전지와 집, 노비를 너에게 모두 부쳐 주려 하였는데, 미처 조치하지 못하고 세상을 마쳤다' 하시니, 내가 이 때문에 슬피 운다" "봄꿈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심의가 말하자 심정은 크게 웃을 따름이었다. 심의가 서경덕, 성세창과 벗이 되었는데, 성세창은 그의 이웃에 살고 있었다. 심의가 그의 정원에서 세 필의 명주를 볕에 바래는 것을 보고 몰래 가져가자, 성세창의 여종이 소리를 쳤다.
"심 좌랑이 명주를 다 가져갔습니다"
성세창의 부인이 재빨리 다른 명주 세 필을 보내면서 말하였다.
"그것은 웃옷을 만들려 하던 것이니, 이것으로 바꿉시다" "이미 웃옷감을 얻고 또 속옷감마저 얻었으니, 부인이 내 마음을 압니다"
심의가 짐짓 사례하고, 대여섯 몫으로 갈라 길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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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재상
독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 (1815-1898)는 '프로이센'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뷜헬름' 1세 밑에서 수상을 지냈다. 그 당시 독일은 아직 민족적으로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다. '뷜헬름' 1세는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통일하려 했으나 의회는 국왕의 군국주의에 반대하여 적잖은 지장을 받았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의회에 나가 "독일이 당면한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철과 피로써만이 해결될 수 있다."하고 외쳤다. 그리고 의회를 정지시킨 채 소신껏 일을 밀고 나가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격파한 다음 독일의 통일을 완수했다. 앞의 연설로해서 '비스마르크'는 철혈재상의 별명을 듣게 되었지만, 철혈은 곧 독일이 그 공업력을 기반으로하여 강력한 군비를 갖춤으로써 세계에 도전하려는 권력에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두 차례의 패전을 겪은 독일의 비극은 권력에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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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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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열일곱번째 이야기 개미가 살아가는 방법
한번은 루까노르 백작이 빠뜨로니오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빠뜨로니오, 사람들 말이 내가 이만하면 충분히 부자인 셈이니 걱정하지 말고 이젠 좀 즐기고, 먹고, 마시고, 쉬기도 하라는 거요. 이미 내겐 여생 동안 쓰고도 자식들에게 유산을 남겨줄 충분한 재산이 있지 않느냐고 말이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당신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젠 내가 그만 일하고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 말을 듣고 빠뜨로니오는 물론 쉬고 즐기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개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느냐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개미는 미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먹고 살기 위해 그리 많은 준비를 해둘 필요는 없을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개미들은 매년 추수 때면 집에서 나와 탈곡장으로 가서 힘닿는 데까지 낟알을 모아들이고 자기들의 곡식창고에 넣어둡니다. 그러다가 비가 오면 그것을 밖으로 꺼냅니다. 이 때 사람들은 그들이 곡식을 말리려고 그런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미들이 곡식을 집 밖으로 꺼낼 때는, 비가 오기 시작하고 겨울이 다가오는 때입니다. 비가 올 때마다 말리기 위해 곡식을 내놓아야 한다면, 개미들의 노고가 엄청날 뿐만 아니라 일한 보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겨울엔 해가 뜨는 일이 별로 없고 따라서 젖은 곡식을 말리기가 무척 힘드니까요. 사실 첫비가 올 때 곡식을 꺼내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개미들은 자기들 집에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 곡식을 채워넣습니다. 그것을 모두 합쳐보고는 자기들에게 일년 동안 필요한 양식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런데 비가 오면 곡식은 젖어 싹이 트기 시작합니다. 개미들은 만약 곡식이 자기들 집안에서 싹이 튼다면 먹고 살기 위해서 모아둔 양식이 자기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그래서 그들은 곡식마다 싹이 터 나오게 되는 가운데 씨를 빼내고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그 나머지를 버립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비가 와도 더 이상 싹이 트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개미들은 일 년 내내 양식을 보관합니다. 게다가 먹고 살기에 필요한 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씨가 좋을 때면 집에서 나와 눈에 띄는 대로 나뭇잎 조각들을 집으로 가지고 갑니다. 개미들은 혹시라도 식량이 모자랄 경우를 대비해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을 한 순간도 헛되이 흘려버리지 않고 아주 잘 활용한답니다.
"그러니 백작님, 미물에 불과한 개미도 매일같이 식량을 찾아 그렇게 열심히 지혜롭게 일하는데, 이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가장 위대하며 만물을 통치하고 있는 인간이 이미 벌어놓은 것에만 의지해 살아간다면 될법한 일입니까? 새로 집어넣는 것은 없고 매일같이 꺼내기만 하는 주머니는 얼마 안가 텅 비게 됩니다. 성격이 무르고 통이 작은 것은 게으른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제게 조언을 구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하지 않고 먹기를 원하는 자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가 지속되고 있는 동안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또 많은 돈을 벌어서 보람있게 쓰고 싶어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보람된 곳에 써서 명예를 드높일 기회도 없는 것입니다.
* 벌은 것을 탕진하지 않고 보람있게 쓴다면 죽어서 명예를 남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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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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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 출발점을 잃어버린 역사 - (우리 겨레가 작아지게 된 첫 출발점)
우리 역사의 시작은 누구부터인가
중국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와 공자가 엮은 "춘추" 및 "상서"이다. 그 가운데 역사서로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사기"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지으면서 가장 어려워한 주제는 중국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실제로 그는 "사기"의 첫 부분에서 그런 고민의 결론부터 밝히면서 '황제시대'를 중국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오늘날까지 중국 역사는 이 시기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 이전 시대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유적이나 문헌이 발견되지 않았고, 전해지는 사실 또한 믿을 수 없다고 보았던 탓이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점은 우리가 "사기"의 이 부분을 통해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기"의 첫 부분인 "오제본기"의 첫 문단은 황제의 내력을 밝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소전'의 후예로서 성은 공손이고 이름은 헌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황하 중상류의 한 갈래인 희수 근처에서 자랐기 때문에 뒷날 성을 희(제비라는 뜻)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황제의 내력을 밝힌 뒤 사마천의 붓끝은 황제가 황하 유역의 통치자가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가운데 결정적인 사건은 탁록이란 벌판에서 벌어진 치우와의 전쟁에서 황제가 승리를 거둔 일이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수십 번의 패배 끝에 외부세력("사기"에서는 신적인 힘으로 표현되고 있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황제뿐만 아니라 치우란 인물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주를 달아놓았는데, "사기"에 붙어 있는 그 주들의 내용을 종합,정리해보면, 치우는 '하늘의 아들'이었으며, 풍백과 우사 등을 거느렸던 인물이다. 이것은 마치 "삼국유사"의 단군사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내용이다. 심지어 공안국은 "치우란 구려(동아시아 기마종족의 옛이름)의 임금 이름이었다"고 단정짓기도 했다. 그러면 뒷날까지 동아시아의 전쟁신으로 받들어진 치우가 활동했던 중심무대는 어디였을까? 치우의 무덤이 있는 위치를 안다면 그의 활동무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군주들은 대부분 그 세력중심지에 묻히기 때문이다.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치우의 무덤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안에 있는데, 높이가 7척으로 진나라와 한나라의 주민들은 매년 시월 상달에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기록이 타당하다면 치우의 세력중심지는 산동성 근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치우는 과연 어떤 종족에 속하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사기"의 주에서 치우를 '하늘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여러 문헌을 살펴볼 때, 당시 '하늘의 후예'를 자처했던 것은 동아시아 기마종족만의 문화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구려'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원래 우리 겨레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기마종족을 표현하는 이름이며, 실제로 한나라 사람은 여러 기마종족의 연맹체였던 고구려를 곧잘 구려라고 불렀다.
계연수가 엮은 "환단고기" 또한 치우를 단군시대 이전에 살았던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군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삼성기'에는 치우가 배달나라의 14대 환웅인 자오지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치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겨레의 구전이나 설화 및 신화 등 이곳저곳에 상당히 많은 편이다. 심지어 그의 초상을 본뜬 귀신 얼굴은 오랫동안 일종의 액막이 부적처럼 기와에 새겨지기도 했다. 그러면 치우는 과연 어느 시대의 인물이었을까? 은허(은의 유적지)의 발굴로 유명한 둥쭤빈이 "갑골문단대연구례"에서 밝힌 연표에 따르면 황제인 공손헌원은 서기전 2692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전쟁을 벌였던 치우도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환단고기"의 '삼성기'에서는 치우가 서기전 2707년에 환웅이 되었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연도까지 밝히고 있다. 하지만 위서 시비에 휘말려 있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고, 그것을 믿는 대신 다른 것을 의심할 따름이다. '이때 이미 그런 강력한 세력을 이루어 대륙의 패권을 다투었던 동아시아 기마종족들이 어떻게 그 뒤 4백여 년이 지나서야 겨우 가상의 신화적인 단군시대를 열었단 말인가?' 의심 뒤의 결론은 명백하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치우를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할 때, 왕검 이후 단군의 시대는 이미 치우의 시대보다 훨씬 발전된 문명을 누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치우가 도읍을 신시에서 청구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가리키는 바가 크다. 아울러 "환단고기"가 비록 구전 등을 정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에 상당한 진실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 이겼든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공손헌원계와 지우계는 틀림없이 나누어졌을 것이고, 그 뒤 그들의 세력중심지는 새롭게 설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치우계는 중국 동북부의 기마종족계로 남았고, 공손헌원계는 황하 중서부를 중심으로 세력권을 이루게 되었다. 공손헌원은 중국 북동부의 기마종족계에서 확인되는 고유한 성인 공손씨에서 다시 희씨로 성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희는 황하의 중서부와 관련된 지명으로 그곳이 바로 그의 근거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치우의 무덤이 산동성에 있다는 "한서" '지리지'의 기록은 치우의 근거지가 어디였는가를 말해준다. 물론 근래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더라도 대략 그 시기부터 두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한편 서로 닮았고, 한편 서로 다르다. 본래 치우계나 공손선원계는 모두 기마종족 내부의 세력이었지만, 이들은 기마종족의 발전과정에서 일어난 주도권 경쟁으로 말미암아 자체분화를 하지 않았나 판단된다. 그러기에 이제부터 편의상 공손헌원계와 관련된 세력을 '중국계 기마종족'이라 부르고, 치우계와 관련된 세력을 '동아시아계 기마종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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