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5. 인심도심 논쟁
3. 인심도심 논쟁의 전개
이언적과 조식 및 이황과 노수신 등의 논쟁
조선 중기 인심도심에 관한 논쟁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이언적이 그의 아들 이전인과 문답한 내용을 적은 '관서문답' 가운데 인심도심에 관한 내용에 대해, 조식이 '해관서문답'에서 반박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조식은 "이언적이 귀, 눈, 입, 코의 욕망을 사욕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귀, 눈, 입, 코의 욕망이 생겨나는 것은 성인이라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으니, 이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천리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착하지 못한 쪽으로 기울고 난 뒤에라야 비로소 욕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심과 도심의 구별이 있는 것은 다만 형기와 의리의 차이로 인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욕이라 하지 않고 인심이라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나타난 이언적의 논의는 주희의 학설을 답습한 것으로 이 후 이황과 성혼의 입장으로 이어지는 반면, 조식의 논의는 나흠순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이 후 노수신과 이이 그리고 윤휴의 입장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은 인심도심에 관한 논의를 펴면서 주희의 "어떤 경우에는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원래 타고날 때 받은 천성의 올바름에서 근원하기도 한다"는 주장에 영향을 받아, "나누어 말한다면 인심은 진실로 형기에서 발생하고 도심은 진실로 천성의 올바름에서 근원한다. 합해서 말한다면 도심은 인심 사이에서 섞여 나오는 것이니, 실상은 서로 발하는 것으로서 판연하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황은 다른 글에서는 인심과 도심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즉 "인심은 칠정이 되고, 도심은 사단이 된다. '중용장구'의 주희설과 허동양의 설을 가지고 본다면, 인심과 도심이 두 가지로서 칠정과 사단이 됨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황이 인심도심을 사단칠정과 연결시키면서 자신의 이원적인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 또한 주희가 리와 기를 두 가지로 보려 한 태도에 따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희는 리와 기를 리기론에서는 한 가지의 것으로, 심성론에서는 두 가지의 것으로 논의했다고 말해진다. 조선에서 권근과 이황을 위시하여 리를 중시하는 후기의 주자학자들까지 리기심성론의 논의 구조는 대체로 이와 대동소이하였다. 아무튼 인심도심에 관한 이황의 불분명한 논의는 비록 부분적으로 다른 점은 있어도 바로 주희와 허동양 그리고 정이의 논의를 답습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황의 인심도심설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한 가지이냐 두 가지이냐 하는 논리적 일관성과 이론적인 치밀성보다는, 그가 이 논의를 통해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고자 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윤리적인 측면에서 그가 인심을 인욕과 구별하여 인심을 인욕보다 앞에 둔 점과, 인심과 도심을 구별하여 도심과 사단을 인심과 칠정보다 우위에 놓은 점, 그리하여 마침내는 도심을 천리의 보존이라는 경지로까지 높이고자 한 점이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주희의 논의 구조를 답습하고 도덕적 실천을 강조한 이황의 인심도심설에 맞서, 노수신은 나흠순의 "곤지기"에 나타난 논의 구조에 따라 이황과는 다른 인심도심설을 피력하였다. 노수신은 '곤지기발'에서 "내가 만년에 "곤지기"를 얻어 보니 그 말이 정대하고 정미하였다. 이는 대부분 앞사람이 드러내지 못한 것을 밝혀 정주학에 크게 공이 있었다"고 하여 스스로 나흠순의 논의를 참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노수신이 나흠순의 견해에 동조하여 인심도심 논의를 편 데 대해 이황, 이항, 김인후 등이 계속 비판을 가함으로써 조선 주자학계에 인심도심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이황은 "'그 광령을 모으고 그 생각들을 끊어 버린다'는 말은 선학적 폐단이 있으니 제거하기를 바란다"고 하여 노수신의 입장을 반박하였다. 그런가 하면 김인후는 "'신령함을 모으고 생각을 그친다'는 말은 곧 주희가 말하는 '경'이라는 것이니, 뜻과 생각을 정하여 정신을 통섭하는 것이 바로 근원을 함양하는 도이다. 다만 뒤의 현인들이 말을 끌어 옴에 단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은 선학에 떨어질까 염려해서이다"라고 하여 노수신의 인심도심 논의에 불교의 선학적 요소가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 같은 반박에 대하여 노수신은 "인심이 인욕이라면 도심은 이미 발한 것이라고 해야 옳지만, 인심이 선악을 겸했다고 한다면 도심은 아직 발한 것이 아니라고 해야 옳다"고 하고, 또 "인심은 선악을 겸했다는 주장에서 본다면 반드시 도심이 체가 됨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이와 성혼의 논쟁
조선에서 인심도심과 관련하여 각기 다른 입장에서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논쟁을 벌였던 사람은 이이와 성혼이다. 먼저 이이의 기본 입장을 보자. 이이는 사단을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서 도심은 천리로서의 사단이었다. 그러나 이이는 인심도심이 곧바로 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사단칠정은 모두 정이라 할 수 있지만, 인심도심은 심의 비교, 측량 기능으로서의 의가 더해진 것이기 때문에 정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사단칠정은 성과 정의 합으로 이루어진 구조이지만, 인심도심은 여기에 의가 더해진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이황이나 이황의 논의를 지지한 성혼은 사단을 도심에 그리고 칠정을 인심에 분속시키면서도 도심을 사단과 완전히 같다고 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사단은 천리가 드러난 단서만을 가리키는 것이나, 도심은 마음의 시종과 유무를 관통해서 가리키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이는 리기론에서 "기가 리를 포함한다"거나, "기가 발동하여 리가 그것을 타는 것이다"라고 하여 리는 기의 법칙이라는 설을 제시하였으며, 이로부터 "기질이 본성을 포함한다"거나,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논리를 이끌어 내었다.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이는 이황의 리기론과 사단칠정론을 반박하였던 것이다. 이이의 인심도심설은 리기론과 마찬가지로 훨씬 더 논리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이이는 이렇듯이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설 및 사람의 마음은 리기가 혼륜되어 있는 것이라는 설을 근거로 심은 곧 기라고 주장하였다. 심 가운데 이치가 곧 성이며, 심, 성, 정, 의는 한 가지 길이라는 것이 그의 종지였다. 이이에 따르면 심이 아직 발동하지 않으면 성이고, 이미 발동했다면 정이 되며, 발동한 뒤에 헤아리는 것은 의가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심이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을 때는 성의 경계에, 감응하여 따라 통할 때는 정의 경계에, 그리고 감응한 바로 말미암아 실마리를 풀고 헤아리는 것은 의의 경계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이와 성혼의 인심도심 논쟁은 선조 5년(1572)부터 아홉 차례에 걸쳐 서신 왕래를 통해 전개되었다. 성혼은 이황과 주희의 '중용장구서'에 입각하여 자신의 논지를 펴는데 반해, 이이는 스스로는 밝히지 않았지만 대체로 노수신의 인심도심설과 나흠순의 "곤지기"에 바탕을 두고, 혹은 적어도 이들의 이론을 참고로 하여 논의를 펴 나갔다. 물론 이이와 성혼의 논의가 선배들의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또 리기론에 대한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이 상호 보충하는 모습을 보이고 결론에서도 어느 정도 합일된 방향으로 나아간 것과는 달리, 이이와 성혼의 논쟁은 서로의 입장을 끝내 합일되지 않은 채 매듭을 지었다.
논쟁은 먼저 성혼이 이이에게 리기론에 대한 문제를 묻는 데서 출발하여 인심도심 논쟁으로 번져 나갔다. 성혼은 이황의 주장, 즉 "사단은 리가 발동하여 기기 그것을 따르는 것이므로 본래부터 순수한 선이요 악이 없고, 반드시 리의 발동이 완수되지 못해서 기에 가려진 연후에 흘러 선하지 않게 된다. 칠정은 기가 발동하여 리가 그 위에 타는 것으로 사단과 마찬가지로 선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의 발동이 절도에 맞지 않아 리를 없애 버리게 되면 방탕해서 악이 된다"고 한 것을 두고, "리기의 발동이 처음에는 선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기가 절도에 맞지 않게 된 뒤에야 마침내 악으로 흐르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해석하였다. 이어서 그는 "인심도심설이 저처럼 구분되어 있고 리기의 발동을 예부터 성현이 모두 그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이황의 논의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대한 이이의 제1차 답변은 "성현의 말씀도 혹 횡설수설이 있고 그 본뜻은 잃어버리기도 한다"는 전제 위에서 "마음은 하나이지만 도심이다 인심이다 일컫는 것은 성명과 형기의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정도 하나이지만 혹은 사단이다 혹은 칠정이다 하는 것은 오직 리를 말할 때와 기를 겸하여 말할 때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심과 도심은 능히 서로 겸할 수는 없어도 서로 시작과 끝이 될 수는 있으며, 사단은 칠정을 겸할 수 없으나 칠정은 사단을 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이는 인심과 도심이 서로 상대적으로 관여하여 처음에 사의로서 형기가 작용한 것은 인심이지만, 그것을 제대로 잘 살펴 바른 이치대로 나아가면 도심의 명령을 받아 도심으로 바뀐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성명의 바른 마음에서 곧바로 나온 것은 도심이지만, 그것에 따라 완수하지 못하고 사의를 섞는다면 인심이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바로 인심과 도심을 상대적으로 파악하며, 처음에 인심이었던 것이 도심으로 될 수도 있고 도심으로 시작하였더라도 인심으로 끝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이이는 성혼에게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내었다. "인심과 도심이 서로 처음과 끝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지금 사람의 마음이 성명의 마음에서 바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혹시 그것을 능히 따르고 완수하지 못하여 사의로 한가하게 느긋해진다면, 이는 처음은 도심이다가 끝에 가서는 인심이 되는 것이다. 혹 형기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바른 이치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곧 진실로 도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혹 바른 이치에 거슬려도 그 잘못을 알아서 억제하고 눌러서 그 욕심을 좇지 아니하면 이것은 처음에 인심이다가 끝에 가서는 도심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이의 인심도심설이 성혼의 인심도심설과 달라지는 곳이다. 즉 이이는 인심도심이란 서로 발단하는 것은 다르나 그 과정에서 상호 관련에 따라 처음과 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심도심 자체는 본래 다른 방향으로 지향하려는 양면적인 심인 만큼 서로 내포할 수 없는 상대적 개념이다. 이와 달리 사단과 칠정의 경우는 사단은 칠정을 포함할 수 없으나 칠정은 능히 사단을 포함한다고 하여 서로 상대적으로 대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이의 논지였다.
성혼과 처음 인심도심 논쟁이 시작된 지 10년 후인 선조 15년(1582)에 왕에게 지어 올린 '인심도심도설'에서 이이는 자신의 학설을 정리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천리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성이라 하고, 성과 기를 발동하는 것을 정이라 하는데, 이 때 성은 심의 체가 되고 정은 심의 용이 되며 심은 미발과 이발을 합하여 말하는 것이므로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한다"고 하여 심, 성, 정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구분하였다. 즉 심이 한 몸의 주재가 되고, 체용의 기미가 되며, 미발과 이발을 포섭하는 개념, 다시 말해 성과 정을 통섭하는 개념이라고 한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은 이이의 독창설이 아니라 주희나 이황 등 주자학자 일반이 주장하는 바와 다름이 없으나, 단지 논리적인 구조에서 심의 정의를 찾고 있다는데 특색이 있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인심과 도심을 두 가지 다른 작용으로 설명하였다. 즉 도심은 도의를 위해 발하는 것이고, 인심은 구체를 위해 발한다는 것이다. 심의 체인 성은 미발의 상태로 한결같지만, 심의 용인 정은 기가 발한 것으로 도심과 인심의 두 가지 작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이는 인심도심을 선악 문제와 연결시켜, 칠정은 인심도심의 선악을 합하여 말한 것이고, 사단은 도심과 인심 가운데 선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부분이 이황과 다른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황은 단순히 인심은 칠정이고 도심은 사단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이이는 주희가 '중용장구서'에서 말한 "도심은 천리이기 때문에 선만 있고 악이 없다고 하고, 성현도 음식이나 남녀문제 따위에서 인욕이 있기 때문에 인심은 선도 있고 악도 있으며, 어리석은 사람도 도심이 없을 수 없다"고 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본성이 선하므로 누구나 다 요순같이 될 수 있다는 데 그 근거를 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에서 우리는 이이가 인심도심설에서 일심을 바탕으로 하면서 나흠순의 사상, 더 나아가서는 양명학파의 현성양지나 불교의 선학적 요소까지도 받아들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이 스스로는 이황과 성혼의 리기심성론에 대해서는 비판의 칼날과 논리를 번득이면서도, 주희의 이론에 대해서는 이이 자신의 논리를 위해 인용하거나 유보 조항으로 남겨 놓는 데서 머무르고 말았다. 이이의 제자와 후예들의 리기심성론도 이이의 논리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희를 존숭한 이이의 태도에 따라 마침내는 "주자언론동이고"와 같은 책을 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이가 인심도심설과 아울러 리기심성론과 같은 뛰어난 이론을 펴고도 조선 후기 오랫동안 번쇄하고 지리멸렬한 리기심성 논쟁을 유발한 것은 이와 같은 그의 한계와 상관된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의 리기심성 논쟁에 비록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것도 없는 바가 아니지만, 끝내 주희 학문의 문턱에서만 맴돌고 만 데에는 이이 자신에게 일말의 책임이 남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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