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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59 호
단기 4340. 9. 12 (음력 8. 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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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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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토지문학제 하동소재 문학작품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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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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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슬픈 일이 닥칠 때마다 "오, 하필이면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하고 질문을 하지만,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 한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없다./ P.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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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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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무엇부터 시작할까
첫째는 입지, 뜻을 세우는 일이다. 배우는 학생은 먼저 뜻을 세워 옳은 일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으라. 옳은 일은 높고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데도 스스로 실천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곧 '나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자만하기 때문이다. 단점 고치는 일을 늦추지도 말고 기다리지도 말라. 단점 고치는 일을 두려워 말고 어렵다고 주저하지도 말라. 지금 곧 세상을 위하여뜻을 세우고 이웃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라. 옛 성인들이 이루어 놓았으되 그 맥이 끊어진 학문을 계승하고, 훗날의 좋은 세상을 열어 주기 위하여 원대한 목표를 세워야 한다. 스스로 목표하는 것에 금을 그어 두라. 자신을 용서하는 버릇은 털끝만큼이라도 가슴속에서 생겨나지 않도록 할 것이며 명예를 손상 당하거나 영욕과 이애, 행복이나 고통 따위에 마음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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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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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4. 사칠 논쟁
5. 이황과 기대승의 입론 근거
이황의 입장에 대한 기대승의 반론은 상당한 설득력을 띠고 있다. 그의 반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거를 지녔다.
첫째, 사단과 칠정의 내포와 외연을 따질 때 사단은 칠정 속에 포함되는 구조이므로 결코 상대적인 개념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주희 심성론의 기본 명제라고 할 수 있는 성과 정의 관계를 기준으로 본다면, 사단이든 칠정이든 다 같은 정임에 틀림없다. 또 칠정은 이간의 감정 전체를 지적한 것인데 비해, 사단은 선한 경향을 지닌 일부분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부분은 당연히 전체 속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대승이 이황의 주장을 반박하는 또 다른 근거는 리와 기의 관계를 이들이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입장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리와 기의 불가분리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성정을 논하게 되면 리의 발동은 설 자리가 없게 된다. 그럼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대승은 리의 발동을 인정할 수 없다는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 않았다. 도리어 "사단은 순수하게 천리가 발한 것"이라고 규정하는가 하면, 이황의 입장을 수정하며서도 "정이 발하는 것은 혹은 리가 움직임에 기가 갖추어지고, 혹은 기가 감응함에 리가 탄다"고 하여 리의 작용성을 분명히 인정하였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기대승이 이와 같이 모순을 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상 "리는 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기가 자연스럽게 발현한 것이 리의 본체와 같다"고 한 제1서의 표현에서, 그가 리기의 불가분리성과 함께 리의 무작용성을 논증하려는 의도를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시종 논의의 중점을 리기 관계를 밝히는 데 두기보다는 사단과 칠정의 범주를 명확히 하는 데 두었다. 아마도 그는 이황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대립되는 주장으로 팽팽히 맞서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기 설의 가능성을 축소시킴으로써 논의의 일치점을 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듯하다. 한편 사단과 칠정을 각각 리와 기에 분속시키는 이황의 입장이 타당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먼저 기대승의 지적처럼 서로 포함되는 관계를 지니는 사단과 칠정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대거할 수 있음을 논증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도 기대승이 제기한 사단과 칠정의 개념적 범주를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단은 순선무악한 것이므로 욕구와는 성질이 다른 반면, 칠정은 유선유악하므로 절제되지 않으면 악으로 흐르게 되는 욕구로 보았다. 순선무악한 사단은 절제의 필요성이 없고 유선유악한 칠정은 절제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완전무결한 본연지성이 그대로 발현되는 사단은 '완전한 것'이고, 형기에 가려져 선이 보장되지 않는 칠정은 '불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완전한 사단과 불완전한 칠정이 동일한 발생 내원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고, 그 때문에 각각을 리와 기에 분속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기대승에게는 사단이 칠정이라는 상위 범주 속에 포함되었던 구조가 이황에게서는 완전과 불완전으로 서로 등치된 것이다. 이는 인간의 도덕성을 결코 욕구 속에 매몰된 미약한 것을 파악하지 않으려는 이황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황의 입론이 타당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선을 더 만족시켜야 한다. 즉 주희가 리의 작용성을 인정했다는 근거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는 논쟁중에 주희가 사단과 칠정을 각각 리발과 기발로 본 것을 직접 인용하여 그 근거를 밝히고는 있지만, 문제는 그와 상반되는 주희의 입장, 즉 리의 작용성을 인정하지 않는 점을 과연 해결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희가 리의 작용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일반적인 분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주희가 리의 작용성을 인정한 듯한 부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주자어류"에서 "리에 동정이 있다"고 한 부분을 보면 주희가 리의 동정을 인정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피할 수 없다. "리에 동정이 있다"는 것이 리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리는 음양에 실려 있으니 마치 사람이 말에 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사람과 말을 각각 리와 기에 비유한 것을 볼 때, 리의 작용성을 완전히 부정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주희는 리가 직접 움직일 수는 없지만 리는 음양이라는 기를 통해서 자신의 움직임을 실현할 수는 있다고 규정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말을 사람에 통제하에 두듯이 기를 리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기에 대한 리의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용성과 주재성의 개념적 차이가 리의 동정에 대한 해석을 결정한다고 할 것이다. 곧 리의 주재성을 강조하는 주희의 입장을 극대화한 것이 리의 작용성을 인정한 이황의 입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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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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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
본뜻 : 조선 시대에 무과에 급제하지 못한 무반의 사람들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그들은 무예를 연마한답시고 산천경개 좋은 데로 창칼이나 활을 들고 다니면서 놀기에 열중하던 사람들이었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하는 일없이 돈 잘 쓰고 놀러 다니기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보기글" -그 사람을 보니 한량이 따로 없더구만 젊은 사람이 일할 생각은 않고 물려받은 재산으로 놀기만 하니 말야 -니가 무슨 한량이라고 그렇게 놀러 다니기만 하냐?
가능·가성능/최인호
아직도 외자로 된 ‘가’(可)가 쓰이기도 하고, ‘가하다, 불가하다’처럼 가지친 말도 적잖다. ‘가능·가능성’은 다듬은말로 ‘할수·될수, 할성·될성’이 나오지만 아쉽게도 잘 쓰이지 않는다. 우리말에서 ‘크다/작다 많다/적다 높다/낮다’는 크기·분량·부피·비율에 따라 적절한 말을 골라 쓴다. 저마다 뜻과 쓰임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서 말을 배우는 시기에도 잘 구별해 쓴다. 그런데도 요즘 들어 ‘크다/많다/높다’의 구분이 흐릿해져가는 현상이 나타난다. 특히 ‘성질’을 나타내는 한자말 ‘성’(性)이 들어가는 말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가능성’이 ‘많은’ 것이나 ‘높은’ 것을 가리지 않고 ‘크다’를 쓰는 이가 많고, 신문·방송 기사에서 특히 자주 보인다. 이는 제목 따위에서 크든 높든 많든 외자 ‘커’로 줄여 써 뭉개는 것과 다른 다른 문제다. ‘-성’자 돌림은 대체로 ‘많다·높다’가 어울린다. ‘가능하다’로 비롯된 쓰임에서 탈을 만드는 보기가 하나 있다.
갈수록 격식을 따지고 조건을 내거는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말이 세련되어 간다(깍쟁이말투)는 징표일까? 그냥 ‘가겠다’면 될 것을 “가능한 한 가도록 노력하겠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 가겠다 …” 식도 그런 말투다.
문제는 ‘가능한 한, 허락하는 한’처럼 말을 한정하는 ‘한’(限)을 제대로 갖추어 쓰는 이가 드물다는 점이다. ‘가능한’이 매김말이어서 뒤에 이름씨가 와야 한다는 문법의식이 철저하지 못한 이들이 많은데다 자주 쓰이는 말도 아니어서 잘못을 마냥 탓할 일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을 다듬어 쓰는 데 게으르다는 반성이 나온다. 대체로 ‘가능한 한, 허락하는 한’은 ‘되도록, 될수록, 되도록이면, 될수록이면, 가능하면, 허락하면 …’으로 바꿔쓰면 탈을 벗어날 수 있다. ‘가능성’은 ‘될성·할성·이룰성’으로 바꿔쓸 수 있다. 이때 ‘성’은 ‘性’도 좋고, ‘될성부른, ~할 성싶다’의 ‘성’이어도 좋다. 이 밖에 ‘가능성’이라면 문장에 따라 ‘여지·소지·실현성·있음직한’ 등 다른 말로 다양하게 바꿔 쓸 수도 있다.
‘가능·가능성’을 지나치게 많이 쓰게 된 데는 일본식 조어와 번역투 영향이 적지 않다. 일부 영어(can, as ~as can, possible, possibility, practicable, feasible, chance, likelihood …) 들이 들어간 말을 ‘가능한, 가능성’으로 뒤쳐 써버릇한 결과임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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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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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인물로 본 변방의 역사 - 딜라이 라마, 간디, 에바 페론
티베트, 달라이 라마의 나라
중국 남서부에 위치한 티베트는 영토가 남한의 12배에 달할 정도로 광대하지만 인구는 200만 명 남짓이다. 장구한 독립국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중국에 편입되어 서장 자치구로 전락했다. 중심 도시인 라싸에서 독립국의 흔적을 엿볼 수는 있지만, 티베트인은 이제 중국 내 55개 소수 민족 중 하나일 뿐이다. 티베트는 평균 기온이 섭씨 1.1도에 불과하고 평균 고도는 4,000미터에 이른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지만, 고지대 특유의 열악한 거주 환경을 감안한다면 그렇게 낭만적으로 생각할 수만은 없다. 식물의 생장 한계선을 넘어선 고지가 대부분인 티베트에서, 풍성한 곡물이 자라는 전답과 드넓은 숲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사실과 함께 티베트가 동쪽을 제외하고는 히말라야 등의 여러 산맥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에서, 고립과 단절은 티베트의 또 다른 지리적 특성이다. 그래서 고유의 물질 문명의 발전을 기대하기도 힘들고 흔하디 흔한 문명의 이기가 유입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티베트인들은 양가죽 옷 추빠를 입고, 가축인 야크의 분뇨까지 연료로 사용한다. 강을 건널 때는 야크 가죽으로 만든 배를 주로 이용하는데, 강을 건너는 동안 배에 스며든 물을 계속 퍼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철도는 찾아볼 수 없고 중심 도시도 1주일에 이틀 정도는 전기 공급이 끊긴다. 한없이 가난하고 고단한 일상이 끝없이 기다리고 있는 곳, 그러나 티베트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신 문명이 크게 발전한 곳이다. 마치 천상의 세계에 속한 듯, 티베트의 모든 땅은 영혼과 정신이 지배한다. 티베트의 정신 문명은 거대한 사원과 궁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캉 사원도 티베트의 상징이지만,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포탈라궁이 단연 대표적인 티베트 건축물로 꼽힌다. 포탈라 궁은 종교와 정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거처로 라싸에 있다. 높이 120미터에 달하는 이 궁전에는 999개의 방이 있고 2만개 이상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포탈라 궁을 지탱하는 기둥은 1만 5,000개나 되는데, 녹인 쇳물을 나무 기둥 속에 부어 지진에 대비했다고 한다. 티베트인들의 소박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고려해 보면 이렇듯 거대한 종교적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그들이 1,000년의 세월 동안 노동력과 물자를 투여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는다. 혹 지독한 정치 세력이라도 있어 그런 착취를 자행했던 것일까. 하지만 1,000년 동안 주민을 설득하는 일이, 어디 정치적 음모만으로 가능한 일이던가. 포탈라 궁의 위용에서 티베트인들의 신실한 믿음과 헌신을 읽어 낸다 한들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의식주를 개선하는 활동 대신 종교적 상징물 건축에 헌신할 만큼 티베트인들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고을 향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티베트인들에게 일상화된 오체투지의 종교적 고행도 놀랍다. 오체투지는 무릎을 꿇고 팔꿈치와 이마를 땅에 붙여 종교적 신심을 표현한다.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트인들의 모습은 유명 사원 앞에서라면 의당 목격하게 되지만, 티베트 전역에서도 어렵지 않게 오체투지의 행렬을 발견할 수 있다. 몇 발짝 걷다가 오체투지를 반복하면서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만큼 오체투지는 티베트인의 일상이다. 국내 한 일간지 기자의 목격담에 따르면, 어떤 청년은 8개월째 오체투지를 계속하며 라싸를 향하고 있었는데, 식기와 침구를 실은 손수레를 밀며 약혼녀가 뒤따르고 있었다. 또, 순례 기간 동안 구걸이 당연시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자기 것 지키기에 혈안이 된 자본주의 시민에게는 구걸이 무능력한 걸인의 모습이지만, 티베트인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교류이다. 불교가 지배하는 티베트는 정신의 세계와 속세가 합치되어 있다. 공덕을 쌓으면 누구나 극락왕생하며 부활한다는 믿음이 강해, 척박한 환경 따위나 현실의 고통스런 고행 정도는 거뜬히 이겨 낼 수 있는 것이다. 80년대 초반 서구 세계에 알려지면서 세상을 경악하게 했고, 티베트인들은 야만 민족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야기한 장례 풍습도 실은 정신이 현실을 지배하는 티베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티베트에서 가장 일반적인 장례 방식은 자토, 즉 조장이다. `문명인`들은 상상만으로도 소스라칠 조장은 시신을 새의 먹이로 제공하는 장례 방식이다. 조장의 전문 장의사는 조자바인데, 며칠 동안 집 안에 안치되었던 시신은 조자바에 의해 조장터로 옮겨진다. 이제 두 가지의 소도구가 필요하다. 먼저 볶은 보리를 뿌린 소나무로 모닥불을 피운다. 다음으로는 라마승이 사람의 뼈로 만든 퉁소를 불어 댄다. 연기와 퉁소 소리로 먼 산의 독수리를 부르는 것이다. 이때 시신은 살갗을 벗기고 뼈와 살을 발라 놓는다. 티베트인들은 독수리가 먹기 좋게 하려고 시신의 살을 잘게 자를수록 좋다고 믿는데, 부유한 사람일수록 더욱 잘게 잘린다. 단 한가지도 그냥 버리는 부분이 없는 게 티베트인들의 시신이다. 내장과 골수 등도 독수리에게 던져진다. 뼛조각마저 부수어 보리에 버무려 독수리에게 준다. 티베트인들은 생활의 편안함은 물론, 육신마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대신 시신으로 배를 채운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면 사람의 영혼도 하늘을 항하며, 조장을 통한 마지막 선행이 망자의 부활을 위한 길이라고 믿는다.
이런 독특한 풍습을 가능하게 한 티베트 특유의 불교 문화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티베트에 불교가 전파된 시기는 7세기경이다. 티베트를 통일한 송첸캄포 왕 (617~641년 재위)은 당나라와 네팔의 왕실에서 왕비를 맞아들였는데, 당나라의 문성 공주가 중국 불교를 티베트에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세기경 불교는 티베트에서 주도적인 종교로 자리잡는다. 그런데 13세기경에 티베트 불교는 위기를 맞게 된다. 정치와 종교를 장악한 사캬파의 부패가 심각해지면서 국가적 위기를 야기한 것이다. 승려들 사이에서 음주나 결혼이 일반화되었으니 종교적 수행은 겉치레에 불과했고 세속적 사리사욕이 그들의 본심이 되었다. 14세기 후반에 총카파가 등장하여 티베트 불교의 개혁을 주도한다. 그가 이끄는 교파를 흔히 황색 교단 또는 황모파라고 부르는데, 주로 노란색의 모자를 썼기 때문이다. 총카파의 황모파가 일군 개혁의 핵심 내용은 세속화한 불교에 금욕주의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음주나 무절제를 비난하고, 종교적 지위가 세습되던 폐해를 막기 위해 결혼을 금지하고 독신의 의무를 부활시킨다. 그리고 엄격한 종교적 수행을 강조한다. 결혼을 금지하고 독신을 의무화한 조치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종교와 정치에서 세습제가 사라진다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이고, 여기서 티베트 불교의 특수한 교리가 유래되었다. 총카파의 개혁으로 티베트 불교에서는 환생 개념이 크게 강화된다. 종교적 지도자는 죽음의 장벽을 넘어 환생함으로써 현실 세계 속에 영원히 현현한다는 것인데, 이는 티베트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일반 불교에서도 환생을 종교의 내적 원리로 설정하지만, 티베트 불교에서처럼 죽음과 환생이 하나의 과정으로 밀착되어 있지는 않다. 지난 500년 동안 티베트인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죽음과 함께 곧바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현실적인 의미에서 죽음이란 곧 새로운 출발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환생의 대표적 주체이자 종교적 지도자가 바로 달라이 라마인데, 제1대 달라이 라마는 총카파의 조카 게둔두프(1391~1475)이다. 달라이는 `바다` 또는 `넓고 깊음`을 뜻하고, 라마는 `위대한 사람`을 뜻한다. 당대의 달라이 라마가 사망하면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쳐 그의 환생자를 찾아 내고,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달라이 라마의 지위를 상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지금의 14대 달라이 라마에까지 이르게 된다. 티베트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달라이 라마는 제5대 달라이 라마(1683~1706)이다. 그는 티베트 전체의 경쟁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세속적 권력까지 완전히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달라이 라마는 이제 명실상부한 정치. 종교 지도자를 상징하게 된 것이다. 제5대 달라이 라마는 또 다른 권력 주체까지 창출한다. 판첸 라마를 지정한 것인데, 티베트의 제2인자 격인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와는 달리 순수하게 정신적인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다.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1인자와 2인자로 또는 정치, 종교의 지도자와 정신적 지도자로 구분되어 설명되지만, 또 다른 구분 방법도 있다. 자비와 관용을 표상하며, 현세에 관계하여 중생들을 고난에서 구하는 존재인 관음 보살이 달라이 라마로 환생한다는 게 티베트의 믿음이다.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환생자로 여겨지는데, 아미타불은 관음 보살과는 달리 현세에 개입하지 않고 서방정토 극락에 살고 있는 부처이다. 지금의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1935년 티베트 동북부 타크셀에서 출생했으며 속명은 텐진 캇초이다. 1933년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가부좌를 튼 채 열반에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이 향해 있던 호수에 몇 가지 글과 그림 등 징표가 나타났다는데, 고승들이 이 징표를 해석하여 한농가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어린 텐진 캇초에게 염주 등 제 13대 달라이 라마의 유품들을 다른 물건과 섞어 내놓았는데, 그 꼬마아이가 정확히 달라이 라마의 유품을 구별해 냈다는 것이다. 이런 심사 과정을 거쳐 텐진 캇초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되었고, 수도 라싸로 옮겨가 13년간의 교육 과정을 거쳐서 1950년 티베트의 절대적 지도자의 위치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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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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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6장. 우유짜는 여인과 천연두 왁친.
수백만이라는 인명이 페니실린이나 설파닐아미드(소염제) 또는 기타 살균력이 있는 약제에 의해서 구제되어 왔다(이러한 사실에 관한 이야기는 제 24장에 있다). 그러나 아마도 더 많은 인명이 왁친 접종에 의한 예방효과에 의해서 구제되어 왔음이 틀림없다. 이 왁친 접종법도 역시 우연한 발견 중의 한 예이다. 19세기까지 천연두는 인류에게 큰 재앙의 하나였다. 사망자의 수로 따지자면 천연두에 필적하는 것은 말라리아와 페스트뿐일 것이다. 키니네아 합성 항 말라리아제에 의한 말라리아의 제압에 관해서는 이미 제 3장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살충제도 이 병을 옮기는 모기를 구제하는 점에서 유효했다. 또한 페스트도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서 만연된다는 것을 알고 부터는 선진국에서 위생설비를 개선함으로써 마침내 제압되었다. E.L. 콤피어는 1957년 논문 '연구, 세렌디피티 및 정형외과 수술'에서 에드워드 젠너를 "수백만이라는 사람을 천연두라는 무서운 병으로부터 구출하고, 많은 사람들을 보기 흉한 용모에서 구제하게 된 왁친을 세상에 선사한 인물이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젠너가 발명한 왁친은 연구실에서 무척 어렵고 힘들게 한 연구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19세 때 그는 우유를 짜던 여인에게서 자신은 우두에 걸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결코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젠너가 의사가 된 후, 거의가 헛수고로 그치고 마는 천연두 치료중 이 말을 상기했던 모양이다. 조사해 보았더니, 우유를 짜는 여인들이 천연두 환자를 간호한 경우에도 거의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그의 머리에서는 치사율이 높은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우두를 접종해 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야말로 세렌디피티였던 것이다. 우두가 천연두에 면역을 준다는 사실은 그의 노력에 의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는 그 가치를 인정하여 그것을 이용하는 뛰어난 판단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젠너는 영국 구교회 목사의 아들로 1749년 글로스터셔의 버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젠너가 6세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형이 그를 길렀다고 한다. 초등교육은 시골 학교에서 받았으나 오히려 거기서 그는 자연과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브리스톨 가까이에 있는 서드베리의 외과의사 다니엘 두들로 밑에서 본격적인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우유짜는 여인에게 우두와 천연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 시기였다. 21세 때에 런던으로 가서 유명한 의사 존 헌터의 집에 기거하면서 2년 동안 공부했다. 이어서 조셉 뱅크스 경에게 고용되어, 1771년 쿡 선장의 첫 항해 때에 뱅크스가 채집한 동물의 표본을 만들거나 정리하는 일을 도왔다. 쿡 선장의 두 번째 항해에서는 탐험대의 박물학자라는 직을 권유받았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버클리에서 또는 첼트넘에서 의술연수를 계속했다. 그는 조류학, 지질학, 음악, 시작 등에도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1792년 까지는 의학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성 안드레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에 왁친 접종법의 아이디어가 점점 성숙해졌던 것 같다. 런던에 있을 때, 우두와 천연두와의 관련에 대해서 헌터에게 이야기 했으나 헌터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775년에 젠너는 우두에 관하여 글로스터셔의 시골 사람들이 믿고 있는 이야기에 관해서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1780년까지 우두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중, 한 형태만이 천연두를 방지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또한 그 유효한 형태의 우두도 병의 특정시기에 접종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천연두를 거의 볼 수 없었으므로 자기 생각을 시험해 볼 기회는 여간해서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우두에 걸린 우유짜는 여인 손의 물질에서 농을 짜내고 그것을 런던으로 가지고 가서 의사들에게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의사들은 젠너가 생각한 아이디어의 중요성을 이해 못했다. 1796년 5월 젠너는 드디어 우유짜는 여인의 손에 걸린 우두의 수포에서 채취한 농[고름]을 제임스 핍스라는 소년에게 접종했다. 그리고 그해 7월, 그 소년에게 천연두의 농을 신중하게 접종했다. 그 결과 젠너가 예상했던 대로 소년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젠너는 어떻게 소년과 그의 부모에게 이 테스트를 받도록 설득했을까? 아마도 그 무렵에 그 지방에서 천연두가 창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대영 백과 사전(1962년판, 12권 116쪽)의 '면역'항에는 이것을 납득할 수 있는 해설문이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1796년의 천연두 왁친이 발명에 앞서 사람들은 이 병을 앓은 환자피부의 발진에서 채취한 것을 접종함으로써 천연두에 대한 면역을 얻고 있었던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은 접종된 사람 중에는 천연두에 걸린 사람도 있었으나 이 병에 대한 공포가 매우 심했기 때문에 치사율이 높은 자연적 천연두에 걸리는 것보다 접종을 받아서 죽음의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려는 사람이 많았다." 핍스 소년에게 접종함으로써 얻은 좋은 결과는 젠너에게 큰 용기를 갖게 했으나 이 성공을 발표하는 것은 두 번째 실험을 기다린 후 하기로 했다. 글로스터셔에서 천연두는 한동안 유행하지 않았으므로 다음 기회는 2년 후가 되었다. 두 번째의 우두 접종도 성공하여 천연두를 예방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젠너는 그의 성공을 발표하는 논문을 완성시키기는 했으나 먼저 런던으로 가서 그 방법을 되풀이 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런던에서 3개월간 머무는 동안 아무에게도 접종을 하게끔 자신있게 설득할 수 없었다. 그 후 젠너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이미 런던의 성 토마스 병원의 유명한 의사 헨리 클라인이 여러 접종에 성공했으며, 천연두에 우두가 효과가 있음을 주위의 전문 의사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다른 두 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젠너의 왁친 접종법은 더디게 받아들여졌다. 그 하나는 저명한 외과의사 J.잉겐하우스가 왁친 접종법을 혹독하게 비난함으로써 한동안 사람들에게 왁친 접종법에 대해서 편견을 갖게 했다. 둘째는 이와는 정반대로 왁친 접종법이 공을 서둘렀던 의사 조지 퍼슨이 충분한 지식과 경험도 없이 불순물로 오염된 접종 왁친을 공급하여 천연두를 닮은 발진이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젠너는 퍼슨의 왁친이 오염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순수한 우두 왁친의 성공을 알리자 그 성공 뉴스는 금방 전세계에 퍼졌다. 최종적으로 젠너에게 바쳐진 영예는 다음에 열거하는 예들로도 알수가 있다. 왁친 접종법을 올바르게 보급하기 위해 1803년 런던에서 왕립 젠너협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옥스퍼드대학은 1813년 젠너에게 명예 의학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독일에서는 제임스 핍스 소년에 대한 최초의 왁친 접종의 성공을 기념하여 그날을 축제일로 정했다. 그리고 영국의 재무대신이 젠너에게 2만 파운드의 찬조금을 보냈으며 인도에서는 그를 위한 모금이 7,383파운드에 이르렀다. 또 그로스타와 런던에 젠너의 조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젠너의 중재로 나폴레옹이 2명의 영국인 포로를 석방시키며 "젠너의 이름으로 어떤 일이라도 거절할 수 없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설)젠너는 '왁친 접종법'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접종' 또는 '배리오레 왁치네'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라틴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소'의 소두창이다. 거의 1세기 동안 젠너의 우두 접종이 유일한 면역요법이었다.
1880년에 루이 파스퇴르는 한 번의 유행으로 프랑스 전국의 닭을 10%나 죽일 정도로 무서운 어떤 종류의 콜레라에 대한 면역요볍을 개발했다. 그는 먼저 이 병의 병원균을 분리시키고 독이 약한 형태로 배양했다. 그리고 이 배양균을 닭에 접종함으로써 이 악성인 병에 걸리지 않도록 면역시켰다. 이것은 원리적으로 젠너의 우두접종과 같은 것으로서 천연두의 바이러스가 소의 몸 속에서 독성이 약해지자 우두라는 형태가 되어서 우유짜는 여인에게 전염되었던 것이다. 다음, 파스퇴르는 소나 양의 병인 탄저병에 맞서서 1881년에 세균을 분리했다. 그는 이 세균을 동물의 체온보다 높은 온도로 배양, 그것을 사용해서 동물을 경미한 탄저병에 걸리게 하고 나중에 진짜 병에 걸렸을 때에 면역성을 갖도록 하는, 접종용 시료를 만들었다. 파스퇴르는 예방접종의 일반법에 대하여 "위대한 영국인 젠너에 의해서 이루어진 공적과 무한한 이익에 경의를 표하며"라면서 '왁친 접종법'이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4년 후에 파스퇴르는 동물에서는 광견병이라고 하고, 인간인 경우에는 공수병이라고 하는 병의 왁친을 개발했다. 파스퇴르의 이 선구적인 업적은 젠너의 세렌디피티적 발견에 기인한 것으로, 면역요법을 매우 실용적인 학문으로 받아들여 전염병을 제어하는 방법을 폭발적으로 발전시키는 단서가 되었다. 인류의 건강에 이토록 큰 영향을 준 공헌은 일찍이 없었으며 굳이 찾아낸다면 항생물질의 개발이 예외일 수 있을 것이다. '근대 면역학의 실험적 기초'(1986)에서 클라크는 '면역요법의 정점이 되는 위업'은 천연두의 근절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금세기 전반에는 매년 2,300만 명의 환자가 보고 되었으나 미국에서 천연두의 최후 증례는 1949년 이었으며, 세계에서 확인된 최종 증례는 1977년 소말리아에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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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연산군에게 극력 간하다가 호랑이 밥이 된 내시 김처선
김처선(?-1505)은 내시이다. 연산군은 그가 간할 적마다 노여웠으나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한번은 궁중에서 연산군이 처용놀이를 하며 음란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김처선이 집안 식구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극력 간하였다.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를 대강 통했지만, 고금을 통해 상감처럼 하신 분은 없습니다"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활을 한껏 당겨 김처선의 갈빗대를 쏘아 맞추자, 김처선은 말하였다.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상감께서 오래도록임금 노릇을 하실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은 화살 하나를 또 김처선에게 쏘아 맞히고 나서 그 다리를 잘라 버리고,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다. 김처선이 연산군을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상감은 다리가 잘려지고서도 다닐 수 있으십니까?"
연산군이 그 혀를 잘라 버리고 친히 그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그 시체를 범에게 먹이로 주었다. 그리고 조정과 민간에 명령을 내려 '처선' 두 글자를 입에 담지 못하게 하였다.
연산군 10년에 갑자정시에 충정공 권벌이 책문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얼마 뒤에 시관이 시권 안에 '처'자가 있음을 깨닫고 아뢰어 삭제해 버렸다. 그후 한 내시가 금강산에 놀러 갔다가 절에서 잤는데, 밤중에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일어서자 한 늙은 내시가 고개를 들고 들어오는데, 자세히 보니 곧 김처선이었다. 놀랍고 두려워서연유를 물었더니, 김처선이 말하였다.
"내가 원통하게 죽은 뒤로부터 혼백이 죽지 아니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이 산에 붙어 노닐고 있다. 갑자사화와 무오사화 때의 제현이 모두 억울함을 풀었으나, 홀로 나에 대해서는 충심을 밝힐 수 없어 아직까지 신설되는 은혜를 입지 못하니, 그대는 이를 어여삐 여겨 주게"
그 내시가 조정에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어 중종 2년(1507)에 정려를 세워 표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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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영국의 작가 '스티븐슨' (1850-1894)의 작품으로 내용은 덕망이 높은 학자 '지킬'박사가 약을 먹으면 추악하고 극악무도한 '하이드'씨로 변한다는 이야기. 거기서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이중인격자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다. 언젠가는 국회위원이 간첩으로 판명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그밖에도 억대의 회사공금을 카지노에 탕진한 모범사원, 강도로 둔갑한 경관, 엽색행각 끝에 칼부림까지 한 목사, 국제금괴 밀수단의 한국 책임자 노릇을 한 무역회사 사장 등 우리들 주변에도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무수히 있다. 정말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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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4장 완전한 기쁨을 주는 인생 수업
미끼를 피해 가는 지혜
제17대 혼인보 슈에이는 자나깨나 바둑만 생각하는 사람으로, 여느 사람들과는 상당히 색달라서 교제하는 폭도 좁았다. 어느 날 거상 한 사람이 아주 유리한 조건으로 슈에이를 초대했다 그러나 슈에이는 초대를 매정하게 거절했다.
"제 솜씨는 보잘것이 없습니다. 사양하겠습니다." 문하생들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저 사람은 현재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큰 부자입니다. 서로 알고 지내시면 돈에 쪼들릴 일 이 없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사정이 좋아질 텐데 왜 거절하십니까?" 그러자 슈에이가 꾸짖었다.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라. 어떤 기예라도 열중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높은 경지에 이를 수가 없어. 한눈을 팔기 시작하면 그것으로 끝장이야. 돈은 한눈을 팔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기 때문에 되도록 멀리 하는 게 좋아. 너희들도 이것을 명심하도록 해라."
바둑의 지도자로서, 견줄 자가 없을 정도의 거상과 유대를 맺으면 아마 문하생들이 말하듯이 돈에 쪼들릴 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개 그런 초대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기고 미끼에 달려드는 물고기처럼 달려든다. 그러나 미끼에 달려든 물고기가 그것을 덥썩 무는 것과 동시에 바늘이 목구멍에 걸려 꼼짝도 할 수 없게 되듯이, '조건 없는' 돈이라 해도 그것을 받아드는 순간에 끝끝내 떨쳐 버리기 힘든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풍족한 생활의 대가는 뼈아픈 제약이다. 돈을 받은 것과 자신의 신념은 별개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아야 허망하고 딱한 허세에 불과하다. '낚시 바늘을 덥썩 물어' 오염된 마음으로는 어떤 기예도 꽃피울 수 없다. 슈에이가 돈이란 한눈을 팔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며 경계하여 이것을 멀리하고 자신의 기예에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리려고 한 것은 역시 명인다운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얼핏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한 가지 재주에 뛰어난 자는 역시 이 정도의 강인한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강인한 정신과 불굴의 노력이 한 가지 기예에 뛰어난 자의 전유물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자기 분야에서 맡은 일만큼은 자신을 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만들겠다는 자세를 취하면 그 일이 그대로 한 가지 재주가 된다. 자기 일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려면 어떤 일에도 한눈을 팔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기 바란다. '낚시바늘에 걸린 미끼'라는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순수성을 유지하고 자기 일리 바로 한 가지 재능이라는 자부심으로 이에 몰입할 때, 비로소 삶의 보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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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열세번째 이야기 다리가 부러져 목숨을 건진 기사
어느날 루까노르 백작이 그의 조언자인 빠뜨로니오에게 조언을 구했다. "빠뜨로니오, 나는 지금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소. 그 내막은 이러하오. 한 이웃과 나는 어떤 별장까지 걸어서 가기로 내기를 했소. 물론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그 집의 임자가 되는 것이오. 실제로 나는 아주 날렵하니 시합에서 이겨 큰 명예와 이득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소. 헌데 갑작스레 몸이 개운치 못하니 지금으로서는 이길 가망이 없어져 버렸다오. 내 비록 많은 것을 걸지는 않았지만 만약 그 집을 잃게 된다면 시합에서 이겨 그것을 얻는 명예보다 시합에 져서 재산을 잃는 불명예가 나를 갑절이나 더 괴롭힐 것이오. 당신을 믿는 터에 어찌하면 좋을지 묻는 것이라오." 빠뜨로니오가 말했다. "루까노르 백작님, 염려하시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럴 경우엔 아주 좋은 방책이 있습니다. 마침 돈 뻬드로 멜렌데스 데 발데스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있으니 그 얘기를 들려드리지요."
레온 왕국의 기사였던 돈 뻬드로 멜렌데스 데 발데스는 난처한 일만 생기면 이렇게 말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신에게 영광 있으라! 신이 하신 일이라면 바로 그것이 최선의 방책일지니!"
그런데 이 돈 뻬드로는 왕의 총애를 받는 대신이었기에 그를 시기하는 숱한 정적들이 있어서 그만 중상모략으로 왕의 미움을 사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돈 뻬드로가 집에 있는데, 왕의 부하가 그를 붙잡아 대령시키라는 칙서를 가지고 도착했습니다. 그의 집에서 반 레구아(역주: 1레구아는 약 5.5km) 떨어진 곳에는 친히 사형을 집행키 위해 행차한 왕과 구경하려는 군중들이 모여 있었지요. 그런데 돈 뻬드로가 왕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말을 타러 나가던 중 그만 현관 계단에서 떨어져 한쪽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왕의 명령을 따를 수 없게 되자 체포하러 왔던 부하와 수행원들은 이를 보고 이렇게 빈정거렸습니다.
"어이, 돈 뻬드로 멜렌데스. 당신은 항상 신이 하신 일이 최선이라고 말하더니만 지금이야말로 그렇게 되었군."
돈 뻬드로는 다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이제 비로소 사람들이 신이 하시는 일이 최선임을 알게 되지 않았느냐고 대꾸했습니다. 형을 집행하러 모여 있던 이들은 죄수가 도착하지 않는 이유를 전해 듣고서 왕에게 명령을 수행할 수 없는 까닭을 아뢰었지요. 그래서 왕은 돈 뻬드로의 다리가 나을 때까지 형 집행을 연기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돈 뻬드로가 다시 말을 탈 수 있을 만큼 회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왕은 중상모략의 내막을 알고서 그를 모함한 이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총애하던 신하를 죽일 뻔한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사과하는 뜻으로 많은 재물과 높은 관직을 하사하는 한편 그가 보는 앞에서 정적들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 후부터 사람들은 신이 무고한 돈 뻬드로를 구했다고 여겨 그가 즐겨 말하던 '신이 하신 일이라면 모든 것이 최선'이라는 말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루까노르 백작님, 그러니 닥친 불운을 한탄하지 마시고 신이 허락하신 일이 최선임을 믿으십시오. 또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조언을 받을 수 있는 때와 어떤 조언도 소용없는 때입니다. 먼저의 경우에는 그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만일 신의 뜻대로, 혹은 우연히 불운이 닥친다면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닥친 일 또한 신의 뜻이니 저로서는 어떠한 충고도 해드릴 수 없군요. 하지만 신이 하신 일이 최선이라면 역시 신께서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 우연히 닥친 불운 앞에서는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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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2부 취재수첩에 묻어둔 광주의 진실
16. 악연으로 만났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광주
1980년 5월 그 '잔인한 달'에 나는 조선일보 사회부장이었다.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은 바로 나의 소관이었다. 나는 1972년부터 1979년 초까지 6년 반 동안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했다. 귀국하자마자 외신부장을 거쳐 1980년 초에 사회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미국에서 보고배우고 느낀 대로 한국의 민주화에 목말라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 내 앞에 전개된 '광주'는 필연적인 역사적 발전으로 내게 다가왔다. 우리 사회부는 5월 내내 학생데모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계엄하인데도 하루도 데모가 없었던 날이 없을 정도였다. 데모는 5월 중순부터 가열되기 시작했다. 사상자도 생겼다. 이제까지 느슨했던 당국의 신문검열이 강화된 것도 이때였다. 신문에 검열 때문에 빠진 문장들이 이빠진 것처럼 곳곳에 보였다. 16일 광주에서 9개 대학 학생 2만여 명이 오후 3시부터 밤 11시까지 데모를 계속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17일에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포고령 10호가 선포돼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계엄당국은 이날 김대중씨 등 26명을 전격 연행했다. 이것을 도화선으로 광주의 데모는 더욱 격화되고 있었다. 희생자가 났다는 박래명 광주 주재기자의 화급한 보고를 받고 나는 당시 사회부 중견기자였던 서청원(현 국회의원)과 사진부 이영배 기자를 광주로 보냈다. 이들이 19일 보내온 첫 기사와 사진은 사회부뿐만 아니라 온 편집국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계엄군의 총부리에 반나체의 청년들이 수십 명씩 전쟁포로처럼 머리에 손을 얹고 꿇어앉아 있는 모습은 젊은 기자들을 분노케 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사와 사진을 보도할 수 없었다. 계엄당국에 의해 '광주'는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신문방송에 관한 한, '광주'는 17일부터 21일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21일에 가서야 우리는 광주에 '소요'가 있다는 계엄사령부의 발표를 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발표는 사실을 기만한 것으로 '사망자는 군경 5명, 민간인 1명'이라는 것과 '유언비어'의 내용을 소개하는 정도였다. 시민군이 광주를 장악하자 계엄당국은 22일 이들을 '폭도' 또는 '난동자'로 모는 선에서 검열을 거쳐 18일부터 22일까지 5일간의 과정을 보도하도록 했다. 조선일보는 1면과 사회면 전부를 할애, '광주'를 실었다. 당시 나는 사회부에 노트 한 권을 따로 마련해 광주의 서 기자 등이 보내오는 어떤 기사나 메모, 전화내용을 일일이 기록하도록 했다. '광주비망록' 같은 것이었다. 그때는 보도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광주의 실상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였다. 진짜 '신문'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나중에 나는 이 자료를 월간조선에 실으려다가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계엄당국은 24일 '광주'의 실상을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각 언론사 사회부장들을 군비행기로 광주에 데려갔다. 우리는 광주CAC사령부(전투병과교육사령부. 보통은 상무대라 부름 - 편집자)에 있는 계엄사령부 분소에서 브리핑을 받은 뒤 시민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진입(?)을 막고 있는 화정동 고갯길에서 망연히 광주를 바라보았다. 바로 근처 통합병원에서 수십여 구의 시신이 담긴 관을 보며 목이 메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얼마나 더 많은 피를 먹어야 자랄 수 있는 것인지', '왜 이렇게 창창한 젊음들이 죽어가야 하나'... 내 마음속에 대답 없는 물음들이 주마등처럼 스처갔다. 내가 오는 것을 미리 연락받은 광주취재팀 서청원, 이영배, 박래명, 조광흠 네 가지가 도청 수습위원회의 '허락'을 받아 바리케이드를 넘어왔다. 그들의 팔에는 '보도'라는 완장이 둘려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만났다. 서울에서 내려간 서, 이 두 기자나 광주에 있는 박, 조 두 기자나 1주일씩 집에도 못 들어가고 잠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초췌한 모습들이었다. 이들은 내게 "오늘의 광주사태가 결코 폭동이 아니라는 것을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 그것을 글로 쓰는 것이 직업인 기자들이 데스크에게 말로 부탁하는 이 광경은 당시 한국 언론상황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서울에서는 이 광주사태를 난동이나 폭동으로 몰아가려고 하고 있다. 자기들의 진압이 정당화하기 위해 매일 우리에게 순 거짓말만 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하는 데까지 해볼 수밖에 없다. 고생스럽지만 서로 노력하자"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얼마의 돈을 털어주었다. 다시 돌아서서 바리케이드를 향해 화정동 고갯길을 내려가는 네 기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소리없이 울었다.
서울에 돌아와 나는 비록 아무 도움도 되지는 않겠지만 이른바 '대치장소'의 분위기라도 전달할 수 있을까 해서 기사를 썼다. 별것도 아닌 스케치 기사를 놓고 검열당국은 '폭도'라는 단어를 쓸 것을 통과의 조건으로 냈다. 승강이 끝에 나는 안 쓰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는 표현으로 고쳐줬다. 나는 지금 이럴 바에야 그 기사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그 기사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올랐었다는 것만은 적어두고 싶다. 결국 기사는, 신문은 그 시대 그 상황의 산물이며 기록일 수밖에 없다는 초라한 자위를 하면서 말이다. 나는 5년 뒤 조선일보 출판국장으로 '광주'와 다시 만난다. 출판국장은 월간조선 등 조선일보의 다른 간행물을 책임지는 자리다. 월간조선 1985년 7월호를 만들면서 나는 사회부장 때 빚진 '광주'를 보상할 마음을 먹었다. 당시 월간조선에 '광주사태' 때 다른 언론기관에 있으면서 광주를 직접 취재했던 오효진, 조갑제 두 기자가 있었던 것도 광주를 재조명해 보려는 내 생각을 더욱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나는 두 기자와 또 더 젊은 기자를 광주에 보내 당시를 취재시키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내가 사회부장 때부터 보관해온 '광주비망록'을 토대로 '금남로의 10일'이라는 제목으로 당시를 재구성하도록 했다.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당시 그런 기사를 써보겠다고 감히(?) 나섰던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당시 정부 요로에 접근해서 이렇게 설득했다.
"이제 5년이 지나 '광주'로 인한 장권의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어가고 있는데 아직도 문제는 광주 희생자가 2천 명이 넘는 것으로 다들 알고 있다는 데 있다. '2천 명의 희생 위에 선 정권'은 이 정권의 영원한 불명예다. 그래서 우리가 취재해보니 실상 희생자로 파악되는 것은 2백~3백 명으로 나오니 이것을 토대로 써주는 대신 광주사태가 일어나게 된, 즉 그것을 촉발시킨 17,18일의 상황을 같이 써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묵시적 승인(?)을 얻은 것으로 치고 우리는 기사를 만들어나갔다. 나의 속셈은 어차피 희생자 수는 누구도 2천 명이라는 것을 거증할 수 없는 상황이니 '사실을 사실과 맞바꾸는' 척하면서 사실을 기록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소박한 계산은 빗나가기 시작했다. 기사가 다 작성돼 인쇄소로 넘겨지고 책이 만들어지는 막판에 기사에 대한 재검토가 떨어졌다. 정부당국의 계획이 치밀했던지, 아니면 우리가 어리석었던지 당국은 마지막 단계에서 회사에 압력을 넣었다. 기사 가운데서 가장 핵심인 최초 진압부대 즉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또는 잔혹행위가 한줄 두줄씩 날아가기 시작했다. 광주시민을 폭발시킨 것은 바로 이들의 무자비하고 잔혹한 행위였다고 믿고 있는 나로서는 그 핵심이 빠진 기사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기사 전체를 드러내겠다고 저항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에 지고 있었다. 그 기사가 다 빠진 경우 그것을 메울 다른 기사가 준비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잡지는 엉망진창이 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책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당시 제 날짜에 책이 나오지 않으면 경쟁사들 때문에 책은 발간하나 마나다. 나는 끝내 지고 말았다. '금남로의 10일'이라는 기사는 핵심 부분이 가위질 당한 상태로, 그리고 애당초 사실과 맞바꿀 요량으로 만든 '희생자 2백여 명' 기사는 고스란히 그대로 햇빛을 보고 만 것이다. 결국 나는 완전히 당한 셈이었다. 물론 눈물을 머금고 붓을 꺾지 못한 데는 훗날 다시 '광주'를 쓸 수 있다는 자위, 또 '한술 밥에 배부르겠느냐, 지금 조금 쓰고 내일 조금 더 쓰고 하는 식으로 나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자기변명이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를 설상가상으로 비참하게 만든 것은 경쟁지인 신동아였다. 나는 당국과는 게임에서만 진 것이 아니라 경쟁지와의 게임에서도 진 것이다. 같은 날 월간조선보다 뒤늦게 나온 신동아에는 '광주를 광주에서 본'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신동아도 월간조선이 '광주'를 취재하는 것을 알고 윤재걸 기자(현 광남일보 논설주간)로 하여금 '광주'의 실상을 쓰도록 했다. 그러나 기사의 내용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것을 마지막 순간에 월간조선이 '광주'를 쓴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앞 뒤 가릴 여유 없이 꺼내서 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동아에는 '생생한 광주'가, 그리고 월간조선에는 '알맹이가 빠진 광주'가 실린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월간조선이 나간 뒤 광주지역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항의가 빗발치듯 요란했다. 신동아가 없었다면 모르겠거니와, 두 기사가 비교가 되는 데다 월간조선은 희생자의 숫자를 '왜곡'한 기사까지 실었으니 항의를 받을 만도 했다. 항의는 항의로 끝나지 않고 조선일보 불매운동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호남지역에서 그런 대로 신장세를 유지해온 조선일보로서는 자매지인 월간조선의 기사 때문에 '공든 탑'이 무너지는 형국이었다. 광주지역 지국장들은 '신문 못 팔아먹겠다'고 아우성치고 광주지국 사무실에는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박래명 당시 광주지사장은 본사에 SOS를 쳤고 문제의 기사를 잘못 처리한 나는 진사사절로, 소방수로 결자해지의 길에 나섰다. 8월인가 9월 초인가 광주에 도착한 나는 박 지사장과 함께 불매운동의 주도체인 전국사회운동협의회(약칭 전사회)에서 오라는 대로 YWCA빌딩 6층의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는 이미 7~8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그들 중 한 사람이 격한 어조로 나에게 "빌러 왔으면 무릎을 꿇라"고 했다. 나는 되도록 차분하게 "사과하고 책임지면 됐지 굳이 신체적으로 굴욕감을 줄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요구를 거절했다. 다행히 화제는 본질문제로 옮겨가 나는 월간조선이 그렇게 나가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판단잘못에 기인한 것인 만큼 나와 월간조선에 책임을 묻고 조선일보 불매운동까지 나가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여럿이서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광주'의 진실이 왜곡되고 광주가 백안시되는 것"이라면서 나를 준엄하게 비판했다. 나는 거듭 의도된 왜곡이 아님을 강조하고 내가 보는 '광주'를 진실된 마음으로 설명했다. 결국 나는 월간조선 기사와 관련해 조선일보를 대표해 사과하는 각서를 쓰기로 했다. 그런데 전사회측에서는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사람은 '사장'이어야지 '김대중'일 수 없다며 사장의 사인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사정하고 상황을 설명한 끝에 '조선일보를 대표해서 출판국장 김대중이...'라는 표현으로 각서를 쓰고 사무실을 나서는 나의 뒷등은 땀으로 젖어 있었으며 다리는 꿇어앉지도 않았는데 후들후들 떨렸다.
나는 광주를 좋아했다. 지금도 그렇다. 나의 본산이 광산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광주에 가면 마음이 편했다. 풍광도 좋고 인심도 좋고 음식도 좋았다. 지난 1971년 야당출입을 할 때 대통령후보 김대중씨를 따라 유세장을 다니면서 광주를 처음 알게 됐지만, 그 후로 선거철이 되면 나는 논설위원이나 주필의 직책으로도 이상하게 호남담당이 되어 광주와 전주를 들락거렸다. 어느 선거 때인가 나는 광주에 가서 조아라 여사와 만나고 그곳 분위기를 쓰면서 이른바 '가해자와 피해자의 논리'를 소개했다. '광주'는 어떻게 보면 영원한 피해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광주는 피해자인데도 사람들은 광주를 '트러블 메이커'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광주에게는 더 큰 아픔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이해한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내가 광주민주화운동을 비교적 실제에 가깝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도 나는 광주와 늘상 악연으로 만나곤 했다. 광주민주화운동 때 사회부장으로, '금남로의 10일' 때 출판국장으로, 그리고 광주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평사태(조선일보와 평민당의 싸움) 때 논설주간으로 광주와 불편한 관계로 만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슴에 남는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제대로 보도하겠다는 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이다. 물론 월간조선은 내가 떠난 뒤인 1988년에 '광주'를 상세히 기록했고 그후 전두환, 노태우 재판과정에서 그 진실이 밝혀졌지만, 신문기자로서 내 손으로 보도 못한 것은 어쩌면 나의 업보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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