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2부 취재수첩에 묻어둔 광주의 진실
15. 아아, 광주여! 어두운 역사의 통곡이여
'탕' '탕' '탕' 고막을 찢는 총성이 금남로를 뒤흔들었다. 데모를 하던 수천 명의 시민들이 골목과 빌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불과 600여 미터 거리밖에 안 떨어진 조선일보 광주지사에 있던 나는 도청 쪽에서 발포한 군인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총소리를 제외하고는 시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는 완전히 지사에 갇히게 되었다. 시간이 흘렀다... 사무실 캐비닛에 기대어 도청 쪽을 바라보았다. 일단의 군인들이 분수대 앞에 횡으로 앉아 금남로 쪽을 향해 거총 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그 순간 고막을 찢는 총성과 함께 장갑차에 탔던 청년이 총탄에 맞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총성은 끊어졌다 이어졌다 반복됐다. 한동안 우리는 무서움에 꼼짝을 못했다. 넋이 나갔을지도 모른다. 군인들이 데모군중을 향해 대낮에 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내가 목격한 9박 10일의 광주는 이렇게 시작됐다. 벌써 광주민중항쟁 17주기를 맞았다. 광주시민연대로부터 5.18 현장취재기 원고 청탁을 받고, 묵었던 원고를 꺼내어 보니 감회가 새롭다. 30대 일선 취재기자로 1980년 5월 광주의 현장을 목격했던 나도 지금은 50대의 중년이 되어버렸다. 그 동안 역사의 뒤편에서 그늘지워져 있었던 5.18의 진실 규명을 위한 작업도 다각적으로 모색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조선일보 취재반장으로 5.18의 현장을 취재했던 나는 당시 계엄하의 검열을 염두에 두고 취재기를 쓴 바 있었으나, 그때는 빛을 보지 못하였고 몇 해 뒤인 1985년 7월 월간조선에서 채자되었던 적이 있었다. 처음 취재기를 쓸 때도 그랬지만 눈으로 본 것보다도 가슴으로 느낀 것들이 더 많았던 9박 10일간의 기억들을 글로 옮기기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더욱이 5.18항쟁의 진실은 광주현장에서의 참혹한 상황만으로는 그 본질을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우리현대사의 쓰라린 한 단면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이 취재기는 현장에서 내가 직접 보고 겪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광주항쟁의 객관적 역사를 조금이나마 기록해둔다는 마음으로 당시의 현장상황을 다시 정리해보려 한다.
내가 사진기자 이형(이영배 기자, 1996년 작고)과 광주항쟁을 취재하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떠난 것은 1980년 5월 19일(월요일) 오후 4시였다. 반포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이미 광주행 버스는 현지의 통금연장조치에 따라 운행이 중단된 뒤였다. 하는 수 없이 5시 전주행 버스를 탔다. 안타까움 속에 전주에서 1박한 뒤 20일 오전 8시 전주에서 다시 광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9시 20분쯤 광주에 도착했을 때 고속버스는 터미널까지 채 가지 못하고 시내 진입로에서 승객들을 모두 하차시켰다. 전날 오후부터 내리던 가랑비는 20일 광주에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내가 탄 택시의 운전기사는 20대 정도로 보였는데 그는 19일 학생들의 데모로 수십 명이 죽었다고 했다. '택시 운전기사만도 4명이 죽었고, 수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어 갔다'고도 했다. 금남로에 들어서자 상가는 3분의 2쯤 철시되어 있었고, 여기저기 건물 유리창이 깨어진 곳이 눈에 띄었다. 그 중에서도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건물의 유리창은 한 장도 성한 것이 없었다. 금남로 2가 조선일보 광주지사 건물 앞에서 택시를 내리자 눈이 매웠고, 3층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는 한층 더 고통스러웠다. 18~19일 양일간의 학생시위를 진압하려고 터뜨렸던 최루탄 내음이 아직도 빠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먼저 광주 현지 기자들과 함께 취재계획을 세웠다. 우선 입에서 입으로 크게 번지고 있는 사상자 수를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파손된 동산파출소와 불에 탄 계림파출소 등을 돌아 광주공원을 거쳐 전남의대 부속병원에 도착했다. 취재는 극히 어려웠다. 병원당국에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실무자는 책임자에게 답변을 미루었으며, 책임자는 "몇 명이 안 되는 것 같다. 보고를 받지 않았다"는 게 고작이었다. 겨우 8층에 입원 중인 김영찬군(당시 나이 19세, 조대부고 3년)을 만날 수 있었다. 김군은 19일 오후 4시쯤 계림파출소 앞에서 오른쪽 손목과 오른쪽 허리에 관통상을 당해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극히 중태였다. 의식을 잃은 채 산소호흡기를 꽂고 있었다. 김군의 아버지 김형관씨(51세)에 따르면 김군은 이날 수업을 끝낸 뒤 친구들과 귀가하던 중 계림동에서 군인 장갑차를 에워싼 1백여 명의 시위대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 군중들과 군인들 사이의 실랑이가 있은 후, 시위군중들이 군인을 장갑차에서 끌어내리려 하자 군인이 발포했고 그 총탄에 김군이 쓰러졌던 것이다. 다른 병원으로 갔다. 그곳도 역시 취재는 어려웠다. 우리가 오전에 확인할 수 있었던 사상자는 눈에 보이는 몇 명에 불과했고, 이미 군인들이 데려가 버렸거나 없애버렸다고 하는 사망자들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병원과 파손되거나 불에 탄 파출소를 돌아보며 18~19일 양일간의 시위가 격렬했음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광주에 들어간 것이 20일 아침이었기 때문에 18~19일에 어떻게 해서 광주항쟁이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광주 주재기자들의 설명과 보충취재를 통해서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 부분은 현장을 직접 살펴본 다른 분들의 기록에 맡기기로 하겠다.
이날 광주에 도착한 나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오전에는 거리와 병원을 둘러보고 오후 1시쯤 금남로에 다시 나왔다. 금남로 1가에서 4가까지 삼삼오오 모여든 시민들은 전날의 사태에 매우 흥분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민들은 인도로 더 몰려 나오기 시작했다. 오후 3시 40분쯤 금남로 3가에 모였던 시민, 학생들이 '계엄철폐' '연행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전날에 이어 다시 농성을 시작했다. 오후 5시쯤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며 밀고 내려오자 3백여 미터쯤 후퇴, 금남로 4가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서 2천여 명이 군과 대치했다. 이때부터 금남로는 다시 가스로 가득했고 군중들은 철책, 드럼통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구축했다. 저녁 6시 40분쯤 광주시내 2백여 명의 택시운전사들이 무등경기장에 모여 동료가 사상된 데 항의, 광진교통 소속 전남 5나 3706호 시외버스 등 5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라이트를 켠 채 금남로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광주관광호텔 앞까지 밀린 군, 경은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터뜨리며 최후저지선을 확보했다. 도청 앞 광장과 도청 청사까지 가스가 가득했고 시위가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일단의 시위대들이 대인동 광주소방서를 점령, 소방차 3대를 끌어내 사이렌을 울리며 시내를 질주했고, 일부는 광주시청에 돌입했다. 밤 8시경부터는 도청과 도경이 3면에서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금남로를 따라 도청에서 4백여 미터 떨어진 광주관광호텔 앞에는 택시와 버스를 앞세운 데모대가 있었고, 도청에서 오른쪽으로 1백여 미터 떨어진 노동청 앞과 왼쪽으로 1백여 미터쯤 떨어진 충장로 입구에 각각 시위대가 포진해 있었다. 이때부터 금남로, 중앙로, 충장로를 비롯, 외곽지대에서는 차량탈취, 방화가 잇달았다. 그리고 낮에는 없던 스피커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첫 음성은 여자였다. MBC 쪽의 시위대는 이 여자의 지휘에 따라 움직였다. 전 시가지가 온통 시위대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학동파출소와 오토바이 2대, 택시 한 대가 불에 탔다. 밤 9시 40분쯤에는 MBC 건물에서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새벽까지 불길은 그치지 않았다. 노동청 앞에서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함평경찰서 소속 강정용 순경 등 경찰관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도 이때쯤 일어났다. 비극이었다. 성난 시위대들은 통제가 되지 않았다. 노동청 앞 시위에서만도 버스 2대와 택시 등 모두 12대의 차량이 불에 탔다. 시위는 격렬했다. 밤 10시쯤 도청에 남아 있던 간부급과 일부 직원들은 피신할 움직임을 보였다. 도청 뒷담이 시위대에 의해서 헐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위대 틈으로 경찰저지망을 통해 도청으로 잠입하기는 쉽지만 시위대 쪽으로 빠져나가기란 그리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자칫 시위대로부터 오인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취재팀은 어떻든 빠져나가기로 했다. 도청 우측의 도지사 관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시위대가 바로 지나쳤다. 10여 분간 머뭇거리는 사이 시위대가 훨씬 많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무조건 길 건너 주택가 쪽으로 뛰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팀은 본사에의 기사 송고장소를 도교육위원회로 옮길 수 있었다. 이때가 밤 10시 30분. 피로가 몰려왔다. 그제야 끼니도 거른 채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본사에 기사를 송고하고 있을 때 광주역 쪽에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10시 55분쯤이었다. 수백 발의 총성이 계속 났다. 밖에 뛰쳐나가 보니, 빨간 불덩이가 쉴새없이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20일 자정을 넘어서도 시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오히려 전날보다 더 심각한 양상으로 가열되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마이크 소리를 따라 불타는 MBC 쪽으로 다시 취재에 나섰다. 거리는 온통 수라장이었다. 깨진 유리조각, 돌멩이, 파출소 등에서 끄집어낸 부서진 집기 등 마치 전쟁을 치르고 난 뒤의 모습 같았다. 시위대는 마이크를 잡은 여자의 지휘에 따라 노동청 앞 쪽으로 밀려갔다가 다시 MBC 쪽을 거쳐 광주역 쪽으로 반복하여 움직였다. 밤을 넘어선 시위대는 낮, 쇠파이프, 몽둥이, 곡괭이, 화염병 등으로 무장한 10대에서 2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거리 군데군데 여학생 차림의 학생들이 다친 청소년들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MBC와 노동청 앞 시내 곳곳에는 불길이 계속됐다. 1시쯤에는 도청 뒤 서석동 광주세무서 본관과 별관이 불타기 시작했으며 이어 노동청 앞 도청 차고가 방화됐다. 차량 3대가 함께 탔다. 이때 시위대가 처음으로 광주세무서 예비군 무기창고에서 카빈 17정을 탈취했다. 군, 경의 발포 이후 시위대의 무장이 총기휴대로 이어진 것이었다. 다시 도교위 숙직실로 돌아와 본사에 마감 송고를 거의 끝낼 때 전화가 별안간 끊겼다. 시외전화가 완전히 불통된 것이다. 새벽 2시 20분쯤이었다. 시위는 새벽 내내 계속됐다. 동이 트면서 마이크를 잡은 여자는 "광주시민들은 오늘 아침 도청에 집결하자"고 외쳤다. 광주역 쪽에 다시 불길이 보였다. 시민들은 KBS가 틀림없다고 했다(새벽 5시 30분경).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미 KBS는 불길이 온 건물에 번져 있었다. 불타기 30분 전쯤 광주역에서 끝까지 남아 있던 군인들이 철수한 후 대합실에서 3구의 청년시체가 발견됐고 시체를 본 시위대들이 광주역 기물과 유리창을 부수고 KBS에 몰려가 방화했다고 한다. 오전 6시쯤 MBC 쪽에서 밤새워 시위한 1천여 군중들은 다시 금남로 4가 네거리 쪽에서 농성에 들어갔으며, 일부는 밤 사이 빼앗은 차량으로 시가를 질주하고 다녔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시위대는 리어카에 시체 2구를 싣고 다녔다. 오전 7시부터 시민들이 다시 데모대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소 분위기가 가라앉는 듯했으며, 이 사이 일단의 시위대들은 트럭으로 빵을 날라 시위대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오전 8시쯤 전옥주(32세)로 알려진 여자 리더가 시민들에게 시체를 향해 묵념을 올리게 했고 시위의 정당성을 시민에게 호소했으며 광주시장과의 면담을 제의했다. 이날부터 각 기관은 문을 닫고 상가는 완전히 철시했다. 중고교는 물론 국민학교(초등학교)도 자동 휴교상태에 들어갔다. 전날일보, 전남매일신문도 신문제작이 중단됐고 지방방송도 모두 끊겼다. 광주관광호텔의 외국손님들도 대피했다. 9시부터 더 많은 군중이 금남로 4가로 집결했다. 이들은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사과하도록 요구했고 현정부 지도자들을 규탄했다.
10시부터 광주공단의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구한 장갑차와 군납품용 지프트럭 등이 시내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 장갑차를 이용, 군 저지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페퍼포그와 최루탄에도 아랑곳없이 가톨릭센터 건물 앞까지 진출했다. 10시 30분부터는 전날과 똑같이 도청을 3면에서 죄어 들어갔다. 사태가 위급한 것을 느낀 도청과 도경은 이때부터 기밀문서를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10시 50분, 도지사와 시장이 헬리콥터를 타고 "병력을 철수시키겠습니다. 시민 여러분, 질서를 지켜 광주를 살립시다"고 호소했으나 시민의 호응은 없었다. 다시 도청은 전날과 같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낮 12시 도청점령설이 퍼졌다. 때를 같이하여 가톨릭센터 앞에 포진했던 시위대들이 다시 장갑차와 트럭을 앞세우고 2백여 미터쯤 돌진, 광주관광호텔 앞에서 군인과 10여 미터 간격을 두고 대치했다. 도청 직원들이 뒷담을 넘어 하나 둘씩 피하기 시작했다. 우리 취재팀도 도청 앞 광주관광호텔 길 건너 맞은편 광주지사 사무실로 피했다. 낮 11시 30분부터 '전남지역 학생총연맹' 이름으로 '오후 2시 도청 앞에서 도민궐기대회를 갖자'는 전단이 시내에 뿌려져 도청점령설을 뒷받침했다. 시내는 예측을 불허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같은 상황은 광주 동구청 건물 3층에 있는 우리 지사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순식간에 일어났다. 12시 30분, 광주관광호텔 앞에서 10미터 간격으로 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 중 장갑차를 몰던 청년이 2,3겹으로 포진하고 있던 군인들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군인 4~5명이 쓰러졌다. 수없이 최루탄이 터졌다. 시위대가 다시 멈칫했으며 군인들은 도청 앞 광장 분수대로 퇴각했다. 도청은 금세 점령당할 기세였다. 한마디로 살벌했다. 군인들은 분수대 앞에서 횡대로 도열했다. '탕' '탕' '탕'.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21일 12시 55분경부터 계엄군의 본격적인 발포가 시작되었다. 아직 무장하지 못한 시위대는 순식간에 골목과 빌딩으로 몸을 숨겼다. 장갑차에 탔던 청년이 쓰러진 뒤, 지사에 남아 있던 나를 포함한 취재팀 5명은 사무실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지사 뒷골목으로 빠져 1백 50미터쯤 떨어진 광주경찰서로 달려갔다. 당시 사상자가 얼마였는지는 취재가 불가능했다. 광주경찰서에서 경비전화를 통해 서울로 겨우 상황을 알렸다. 3시 40분경부터는 거의 전쟁상태였다. 총기를 입수한 일부 시위대들이 군인들을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사실상 시가전 상태였다. 4시에는 화순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들이 트럭을 타고 광주시내로 재진입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4시 5분, 지원동 탄약고에서 다이너마이트 1백 개와 폭약 4상자를 탈취해 갔다는 전화 등이 광주서 잇달아 걸려왔다. 뒤에 알려졌지만 시위대들은 이때 이미 장성, 나주, 화순, 담양 등지에서 무기를 구해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광주경찰서에서는 윤형용 서장이 간부들과 대책회의를 가졌으니 전날 군에서 도경 및 광주시내 경찰서, 지서, 파출소의 무기를 회수해간 상태이기 때문에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과 '군 병력을 요청하자' 는 주장이 엇갈려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 경찰간부가 우리 취재팀에게 "신변을 보호할 수 없으니 피신해달라"고 일러줬다. 총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경찰서에서 외곽으로 빠져나오자 또 다른 상황이 전개됐다. 지프차와 트럭에 카빈 등으로 완전 무장한 청년들이 거리와 골목을 누볐다. 오후부터 시민군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점차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전남의대 옥상에서 도청 쪽으로 LMG사격이 시작됐고, 광주교도소를 습격하던 시위대원 6명이 숨졌다고도 했다. 도청에 있던 군인과 경찰 들은 5시 30분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7시 50분부터 잠시 시내는 적막이 흘렀다. 오후 8시경 도청은 시민군에 의해서 완전히 접수됐다. 우리는 일단 동명동의 D여관으로 피했다. 여관방에 들어온 것은 8시쯤이었다. 10분쯤 지나자 여관방 전깃불이 꺼졌다. 주인이 '큰 건물은 위험하다'며 스위치를 내려버린 것이다. 이날 자정까지 시위대들이 타고 질주하는 차량의 소음과 사이렌 소리가 계속됐다. 광주의 밤거리는 무섭도록 어두웠고 총소리도 계속 울려왔다. 1980년 5월 21일의 밤은 공포 속에서 그렇게 저물어갔다.
오전 5시 20분, 새벽부터 스피커를 장치한 지프차와 무장한 시위대가 탄 버스, 트럭 등은 '7시 도청 앞 궐기대회'를 알리며 주택가를 누볐다. 또 '광주시민의 민중봉기의 함성은 각지에서 메아리쳐 장성, 화순, 나주에서 다수의 무기가 반입되었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투사회보'라는 전단이 뿌려졌다. 시민들은 7시쯤부터 도청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8시에는 도청은 수천 명의 인파로 붐볐다. 시내는 마치 격렬한 전쟁이 치러진 폐허 같았다. 곳곳에 불에 탄 트럭, 버스, 택시 들이 뼈대만 앙상한 채 뒹굴고 있었고 도로는 유리조각, 깨어진 거리미화용 화분대, 불타거나 쓰러진 가로수, 부서진 전화 부스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특히 금남로 2.5킬로미터에 이르는 인도 곳곳에는 피가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고, 우리 지사 뒷문 앞에는 아직도 시멘트 위에 피가 흥건히 괸 채, 파리 떼가 윙윙거렸다. 건물 유리창 곳곳에는 총탄 흔적이 보였고 주인 없는 신발 짝이 흩어져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런 혼돈의 와중에도 강, 절도와 같은 범법행위는 없었다. 금은방과 같은 고가품 상점은 전혀 손상이 없었다. 광주시민들의 높은 시민의식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온 시가지는 계속해서 무장한 시위대가 탄 각종 차량이 무질서하게 질주했으며, 일부 시위대는 도청 앞 건물 옥상에서 사주경계에 임하기도 했다. 총기를 소지하지 않은 시위대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전남일보와 전일방송이 들어 있는 전일빌딩 정문은 트럭이 셔터를 들이받아 4분의 1쯤 부서져 있었다. 무장한 시위대들이 그곳에 서 있었다. 도청과 전일빌딩에 설치한 스피커에서는 '계엄철폐' 등 구호가 수없이 반복됐고 광주시민들 사이에서는 '몇백 명의 시민들이 죽었다' '서울서 2천 명의 학생이 내려왔다'는 등의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학생들은 상자를 들고 다니며 환자치료비 모금을 했고, 일부는 시민들에게 헌혈을 호소했다. 많은 외신기자들이 취재에 열을 올렸다. 9시쯤 전남대 의대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도 시위대들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통행은 자유로웠다. 영안실 앞은 울음바다였다. 시체는 모두 18구였다. 이 가운데 신원이 확인되니 시체는 모두 10구였다. 그리고 8구의 시체는 광목으로 얼굴을 가려놓아 신원확인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행여 내 가족이...' 하는 시민들이 광목을 들춰 얼굴을 확인하다가 자기 가족이 아니면 안도의 숨을 토했고, 자기 아들임을 확인한 50대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기도 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아들 이름을 부르며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마치 6.25 때 학살당한 가족을 찾는 모습 그대로였다. 오전에 확인된 병원안치 사망자의 수는 전대병원 18명, 기독교병원 14명, 적십자병원 21명, 성 요한 병원 2명, 시내의원에 3명, 조대부속병원 4명 등 모두 62명이었고 부상자는 1백 50명이었다. 실로 엄청난 사상자였다. 낮 12시쯤, 도청을 중심으로 금남로는 수만 명의 시민들로 꽉 들어찼다. 10시 50분쯤, 도청 앞 광장에서 한 차례 궐기대회를 끝냈는데도 시민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정오가 조금 지나 정문을 지키고 있던 한 대학생의 호의로 도청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1층 서무과에 임의로 마련된 시위대 상황실에서 도청 출입증을 받았다. 흰 백자에 도장이 찍힌 간단한 이 통행증을 소지한 후부터는 도청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시위대는 도청 정문뿐 아니라 현관에서도 총을 메고 지키고 있었다. 크게 어질러진 도청 상황은 철수가 얼마나 황급했던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한편 도청 부지사실에서는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열렸다. 15명의 각계 인사가 모여 이종기 변호사를 위원장, 김창길(25세, 전대 3년) 군을 학생수습위원장으로 선출하였으나, 수습위는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난상토론 끝에 '계엄군의 시가진입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8개 항의 합의사항을 도출, 오후 2시쯤 계엄분소장을 찾아가 혐상을 벌였다. 그리고 5시부터 도청 분수대에 마련된 단상에 8개항의 합의사항을 알렸다. 시민들은 합의사항이 발표될 때마다 박수를 치고 환영을 표했으나 전반적으로 젊은 층에서는 이 합의사항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5시 55분에는 연행되었다가 풀려나오는 학생 79명을 계엄군으로 오인해 한바탕 소란도 있었다. 일단의 시위대들은 지프차와 반트럭 등 차량 5대에 전남대병원에서 시체 18구를 싣고 도청 앞 광장으로 나왔다. 군중을 비집고 도청 분수대를 한 바퀴 선회한 시위대들은 도청 분수대 잔디에 시체를 옮겼다. 유족들은 관마다 향을 피우고 울부짖었다. 이어 6시 30분부터 추도식을 거행했다. 한동안 광장이 숙연해졌다. 그러나 시체를 본 청년들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죽음의 참뜻을 실현하자"고 절규하듯 외쳤다. 날이 어두워가는 7시부터 시민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진입한다는 소문에 밤만 되면 시민들은 금남로를 빠져나갔다. 발길을 돌리는 시민들의 걸음은 무겁고 많은 죽음을 목도하였기에 분노한 표정이었다. 8시가 되자 도청 앞 광장엔 시민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분수대에 있던 시체는 도청 앞뜰로 옮겨졌고 일부 유가족들이 시체를 지켰다. 거리는 다시 시위대들이 장악했다. 차량은 꼬리를 물고 시내를 질주했다. 이날 밤부터 시외로 빠져나가는 화정동 공업단지 입구와 고속버스 진입로, 목포로 빠져나가는 백운동, 화순으로 향하는 길목인 지원동, 무등중학교 앞 교도소입구 등 5개 지역에서 군인과 시위대 들이 5백~6백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대치에 들어갔다. 밤 9시 이후 광주 전 시내는 사람의 통행이 거의 없었다. 시가지 중심에서 시위대들이 통행인을 검문했다. 이날 밤 산발적으로 총성이 울렸지만 비교적 평온을 되찾은 밤이었다. 거리의 질서가 조금은 회복되기 시작했다.
새벽에 농성동과 상무동 일대에는 기관총과 소총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렸지만 시위대는 오전 5시부터 시민들에게 거리청소를 호소하고 다녔다. 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거리청소에 앞장섰다. 난장판이었던 거리가 말끔히 치워졌다. 시민들은 군인들이 진입하기 전까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오전 7시면 으레 도청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날부터는 차량통행도 학생들이 발행한 통행증이 있어야 가능했고 무기가 본격적으로 회수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대는 조직적으로 사태를 정리해나갔다. 회수된 무기들은 도청 지하실에 보관됐다. 이날 처음으로 전일빌딩 앞에 4개항의 '민주시민강령'을 공고하면서 시민군이라는 말이 등장했고,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10시 30분에는 남녀 고교생 1백여 명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벌였다. 오전 11시 30분쯤에는 전남대 뒷산에서 숨진 광주상고 2년 이성귀군(16세)의 시체가 도청으로 옮겨지면서 한때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수습위원회는 22일의 8개항의 결의사항 외에는 총기반납을 거부하는 강경파의 반대에 부딪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 4시에는 대규모 궐기대회를 가졌으나, 5시쯤에는 계엄분소장의 명의로 된 경고문이 비행기에서 뿌려졌다. 이날도 계엄군이 진입한다는 루머가 퍼져 시민들은 귀가를 서둘렀고 8시부터는 무서운 적막이 온 시가를 뒤덮었다. 그러나 이날 밤은 총성도 멎었고 차량 질주의 소음도 변두리 주택가에서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조용한 밤을 보냈다. 하지만 시민들의 실망이 조금씩 불안으로 이어져가는 날이기도 했다. 23일부터 내리던 비가 더욱 거세지면서 오전 10시까지 뿌렸다. 비가 내린 뒤의 광주시는 한결 청결해 보였다. 전날 오후 6시 개통된 광주 KBS 방송을 통해 계엄분소장의 특별담화가 발표됐다. '무기 소지자 중 광주시내 거주자는 국군통합병원에 반납토록 하고 기타 지역은 군부대와 경찰서에 반납하라'는 내용이었다. 비가 걷히자 이날도 많은 시민들이 도청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시내 중심가는 상가가 다시 문을 열고 파손된 차량들을 치우는 등 복구작업이 시작됐다. 시민들도 겉으로는 한층 밝아 보였다. 그러나 변두리에서는 5백~6백 미터 거리를 두고 시민군과 계엄군이 자못 살벌하게 대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화정동 공업단지 입구의 경우, 시위대는 옮겨온 1백 50여 개의 대형 원목과 불탄 버스, 지프차, 파손된 트럭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통합병원 쪽 군인과 계속 대치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시민들은 이곳을 '제2의 판문점'이라 했다. 대치지역 시위대들은 인근 주민들의 호의로 식사해결을 할 수 있었는데 이 일은 주로 삼익아파트 주민들이 맡았다. 한편 시내 각 병원은 이날부터 산소와 의약품이 달리기 사작했으며 전남의사회에서는 대한의학협회와 적십자사에 이를 요청했다. 광주항쟁 기간 중 취재기자들이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기사 송고의 문제였다. 21일 새벽에 시외전화가 끊긴 이후 본사에 기사 송고를 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짜내야만 했다. 이날 오후 1시, 우리 취재팀은 서울 본사에 송고를 하기 위해 도경국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비상전화로 서울시경에 숨가쁘게 기사를 부르고 있는데 문을 반쯤 밀치고 총을 겨눈 20대 시위대 두 명이 "누구냐"고 소리쳤다. 광주 주재 조광흠 기자가 "나도 광주시민이오"라는 말과 함께 프레스 카드와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서야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당시 그 청년들의 눈빛은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나 우리는 그 청년들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광주시민이든 아니든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오후 3시쯤 우리 취재팀은 국군통합병원에서 서울서 내려온 김대중 사회부장을 만날 수 있었다. 김 부장은 국방부 주선으로 서울의 각 신문사, 방송 사회부장과 함께 비행기 편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나는 서울서 내려온 지 일주일 만이었지만 왠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의 만남은 병원 정문 옆 잔디에서 겨우 20분간이었다. 김 부장과 헤어져 철조망 바리케이드를 넘어 다시 시내로 들어와야 했다. 한편 이날은 수습대책위원회의 장우석 목사 등이 대치장소를 찾아다니며 시위대를 설득, 군과 대치를 풀게 했다. 이때부터 시위대는 야간에 군과 대치했던 장소를 순회했을 뿐 밤새워 대치하는 상황은 없어졌다. 오후 4시부터 도청 앞에서 열렸던 대규모 궐기대회는 7시쯤에야 끝이 났다. 이날 밤 9시 최규하 대통령의 담화가 KBS를 통해 발표됐고, 시민들은 일부나마 수습의 전기를 맞이한 것이 아닌가 안도하기도 했다. 또 신원이 파악된 시체들을 도청 앞 상무관으로 옮긴 후 많은 시민들이 분향을 했다. 이날은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전 일찍부터 도청 앞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도청 시위대들의 분위기는 경직됐다. 출입증을 가진 기자나 여타 관계자들도 도청 출입을 막았다. 광주항쟁 기간 중 고도의 교란작전으로 알려진 소위 '독침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수습대책위는 독침에 찔려 입원했다는 장계범(21세, 광주시 황금동)과 같이 중독됐다는 정한규(23세, 전남 함평군)를 첩자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러한 연유 때문에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군 등이 이날 오후 3시 무기반납식을 도청 앞 광장에서 갖기로 했던 계획은 백지화됐으며, 수습은 다시 강경파 시위대에 위해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후 4시에는 제 3차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가 도청 앞 광장에서 열렸고, 선두를 따라 시민들은 금남로 -> 광주역 -> MBC -> 도청 앞 광장에 이르는 6킬로미터의 시내를 시위했다. 수습대책위원들도 허탈해 했으며, 학생수습위원자아 김군은 기자들에게 사퇴의 뜻을 표했다. 수습위원회는 늦도록 대책을 협의했으나 밤 9시에는 '끝까지 투쟁하자'며 강경파 시위대들이 수십 발의 공포를 쏘아댔다. 2~3일간 그쳤던 총소리와 차량질주 소음이 이날 밤 다시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새벽 5시, 계엄군이 시내 쪽으로 진입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시민들은 벌집을 쑤신 것처럼 발칵 뒤집혔다. 장우석 목사 등 4~5명의 수습위원들이 현장까지 달려가 "우리 손으로 곧 사태를 수습하겠으니 계엄군을 다시 먼저 대치장소로 철수시켜달라"고 계엄분소에 요청했다. 계엄분소는 "외곽 통로를 트기 위한 조처였지 진입은 아니다"며 오전 8시에 먼저 위치로 돌아갔다. 광주항쟁 기간 중 시민수습위원회는 결과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들 옆에서 취재했던 우리는 이들의 노고에 찬사를 아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우석 목사 등은 시위대와 함께 밤을 새우며 강경파들을 설득했고, 어떤 때는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인내로 수습에 임했다. 또 이날 오후 3시부터는 유족대표 8명과 부지사, 사회국장 등이 부지사실에서 장례절차를 논의, 28일 장례를 시민장으로 치르기로 대체로 합의를 보았다. 25, 26일 상황으로 미뤄, 사태는 장기화될 전망이었다. 우리 취재팀도 본사에 '사태수습 전망 흐림'이란 기사를 송고했다. 시민들도 퍽 지친 듯했다. 안타까울 뿐이었다. 밤거리는 의외로 조용했다. 시민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탕' '탕' 새벽에 울리는 총소리는 왠지 다른 날의 총성과는 예감이 달랐다. 잠이 달아났다. 담배를 집어들었다. 불을 그어대는 순간 카랑카랑한 20대 여자의 마이크 소리가 새벽 광주시내를 찢는다. "계엄군이 들어온다" "총기를 나누어주고 있다" "시민들은 도청으로"... 마이크를 잡은 여자의 음성은 10여 분간 계속됐다. 그것도 잠시-. 총소리가 시내에 진입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해가 적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동시에 여러 가지 기억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수습위원장 김군, 헌혈을 호소하던 청년, 총을 들고 도청 정문에 섰던 고교생차림의 청소년 등등... 총소리는 계속됐다.
새벽 4시-. 광주 KBS방송은 군이 시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투항권유 방송을 되풀이했다. 간간이 행진곡도 들려줬다. '돌아온 병사'와 '콰이강의 다리'였다. 총소리는 5시 12분 일단 끊어졌다. 방송은 계속됐다. 5시 25분에는 계엄분소장의 첫 담화가 발표됐다. "군은 지난 21일 철수한 후 일주일간을 인내하며 기다렸다. 그 동안 군이 진입하지 않기로 시민대표들과 약속했으나 성과가 없었으며, 불량배, 깡패, 전과자 등이 시민군을 조직, 이적행위를 해 어쩔 수 없이 진입했다. ...(중략)... 군은 성공리에 작전을 끝냈다. 시민은 질서회복에 앞장서 달라"는 내용이었다. 6시에 작전 전황이 발표됐다.
"사망 2명, 체포 2백7명, 민간인 피해는 없다..."
6시 10분쯤, 계단을 오르는 군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더니만 우리가 묵고 있던 여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M16을 든 군인 2명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내가 프레스 카드와 주민등록증을 내밀었으나 우리는 여관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9시 30분쯤, 공무원을 가장해 출근했던 박래명, 위정철 두 주재기자의 도움으로 겨우 도청 앞으로 나올 수 있었다. 시가는 전날과는 판이했다. 군인들이 요소요소를 지키고 있었다. 용케 빠져나온 다소의 시민을 제외하고는 거리는 허전했다. 하루종일 젊은이들에 대한 검거와 연행이 이어졌다. 도청 출입은 일체 통제됐다. 우리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도청 앞 인도에 주저앉았다. 오후 3시쯤, 비행기 편으로 서울서 내려온 각 신문사의 국방부 출입기자와 사진기자들이 헌병 선도차의 호위를 받으며 도착하고서야 그들과 함께 도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신원이 확실치 않아 도청 옆뜰에 안치되어 있던 10여 구의 시체 옆에 어제까지도 살아있던 젊은이들이 15구의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날 본사에서 내려온 조연흥 차장 등 다른 팀과 교대를 하고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광주에 온 지 꼭 9일 만의 일이었다. 우리 취재팀은 허탈감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총칼에 맞서 일어난 민주항쟁은 총칼에 짓밟힌 채 그렇게 무참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그 무참한 것을 보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눈물밖에 흘릴 수 없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민주주의는 진정 피를 먹고 자라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수많은 시민이 죽고 부상당한 광주민중항쟁은 엄청난 피해만 남긴채 열흘 만이 끝을 맺었다. 그러나 혼란의 와중에서도 끝까지 슬기롭게 대처한 광주시민의 높은 시민의식에 끝없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총소리, 어지러웠던 시가지, 유가족의 통곡, 함성과 불길...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맺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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