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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57 호
단기 4340. 9. 9 (음력 7. 2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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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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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마해송문학상 공모
(주)문학과지성사는 우리 창작 동화의 첫 길을 연 고 마해송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국내 아동문학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마해송문학상'을 제정하였습니다. 이 상이 역량있는 동화 작가들을 발굴하고 격려하여 우리 아동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 모집 부문
장편 동화 및 단편집(미발표 창작물)
◆ 원고분량 단행본 1권 분량의 완성된 원고 (같은 원고를 타사 공모에 중복 투고하였을 경우 심사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 응모자격 기성 및 신인 작가
◆ 시상 내용 당선작 1편, 상패 및 상금 1천만원 (상금은 선인세로 지급하며, 당선작은 당선 발표 연도에 출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 응모 마감 및 발표 *제4회부터 응모 마감이 앞당겨졌으니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응모마감: 2007년 9월 30일(일) 수상자 발표:2007년 12월, (주)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 및 『문학과사회』2008년 봄호
◆ 응모 방법 원고는 우편으로만 받으며 겉봉에 '마해송문학상 응모작'임을 명기 (이름,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를 기입해 주세요,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 보낼곳 121-840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95-2 (주)문학과지성사 마해송문학상 담당자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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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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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비밀을 알려주기는 꺼리지만, 교환하자면선뜻 응한다. / 「선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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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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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죽은 뒤에나 끝날 일
공부에는 끝이 없다. 그러므로 너무 급하거나 느리게 하지 말고 아주 꾸준히, 죽은 뒤에나 이 공부가 끝나리라는 생각으로 정진하여야 한다. 만약 그 효과가 빨리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부질없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공부에는 욕심을 부리되 그것으로 얻어지는 영화는 바라지 말라. 만약 헛된 욕심으로 공부에 매달린다면 이는 부모에게 큰 부끄러움을 안겨 드리는 꼴이니 곧 사람의 아들이라 할 수 없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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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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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4. 사칠 논쟁
2. 논쟁의 철학사적 의의
조선 초기의 주자학은 단순히 사상계만을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국가통치의 기본 이념으로서의 역할까지 담당함으로써 명실 공히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이념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주자학은 엄밀한 학문적 체계나 독자적인 성격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일종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데 그쳤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들은 주자학적 세계관이나 인간관을 전개시키기보다는 주로 국가 통치의 방법으로서의 정치 이론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초기 주자학의 자기 한계성은 이언적과 서경덕에 이르러 점차 해소되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주로 리기론을 중심으로 자신의 학문적 체계를 수립했고, 조선조 주자학의 본격적인 논란거리였던 심성론의 체계를 수립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곧 세계관과 인간관이 일관성을 지니는 논리적 정합성을 획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중기 주자학의 역사적 성격을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철학적 전환은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일어났던 사칠리기 논쟁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단칠정 논쟁은 본격적으로 주자학이 수입되어 연구된 결과 주자학 자체가 지니고 있던 문제점이 노출되어 재정리하는 입장에서 논쟁을 전개한 것이므로, 이를 통해 조선 주자학의 전개 양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논쟁은 왜 일어났는가
사단이라는 개념은 원래 맹자가 성선설의 근거로 제시한 인간 심리 현상 중의 일부를 말한다.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을 각각 인, 의, 예, 지의 단서로 설명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또 칠정은 본래 "예기"에서 인간의 감정을 통칭하여 '희, 노, 애, 구, 애, 오, 욕'으로 지칭한 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주자학자들이 문제삼는 것은 대체로 "중용"에서 언급한 희, 노, 애, 락의 네 가지 감정을 의미한다. 물론 양자간에 개념적인 차이는 없다. 네 가지로 나누든 일곱 가지로 나누든 인간의 감정 일반을 통칭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각기 의도하는 바가 다른 이 둘을 어떤 관계로 파악하느냐에서 시작된다. 주희는 인간의 심리 현상을 성과 정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는 성이 정의 근거가 되고 성이 움직이면 그것이 정으로 바뀐다고 규정하면서, 맹자가 말한 사단은 정이고 사덕은 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주희는 다시 희, 노, 애, 락, 곧 칠정은 정이고,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을 성이라고도 했다. 성을 인, 의, 예, 지로 보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사단과 칠정이 다 같이 정임에도 동일 개념으로 보지는 않은 것이다. 사단은 맹자가 성선설의 근거로 제시한 것인 만큼 순선무악한 것이고, 칠정은 발동하여 중절한 경우는 선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악이므로 유선유악하다고 본 것이다. 이 경우 인간의 선한 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무제가 없다. 사단 곧 선한 정은 순선무악한 성에 의해서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의 논의는 주희의 심성론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칠정 중의 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문제가 다르다. 단순하게 보면 칠정은 정이고 정의 근거는 성이므로, 칠정도 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칠정 중의 악도 순선무악한 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주희는 "사단에도 부중절이 있다"고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사단의 경우도 반드시 순선무악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하게 된다. 이 경우 앞서의 전제와 어긋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선한 심리 현상마저도 일관성 있는 설명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사단칠정 논쟁은 이처럼 주자학의 심성론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의 논지는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서 갈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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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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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본뜻 : 궁전으로 오르는 섬돌 층계의 아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말은 천자나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현대의 호칭들이 대부분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인데반해, 옛날의 호칭들은 부르는 사람 자신을 낮추어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바뀐 뜻 : 황제나 황후, 또는 황태후에 대한 공대말이다.
"보기글" -주상 폐하 아니되옵니다!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하시면 아니되옵니다 -폐하! 통촉하시옵소서
위하여/최인호
‘위하다’는 예부터 써 왔다. 사람·사물을 받들거나 이롭게 하고자 할 때 썼다. 그런데, 요즘 자주 쓰는 ‘위(爲)하다’는 말·글에서 ‘위하는’ 구실보다 ‘해롭히는’ 구실을 할 때가 많다. 보통 ‘-하기 위하여, -를 위하여, -를 위한’ 꼴로 쓰이는데, 그 쓰임을 살펴보자.
“특수목적 회사는 유동화증권 발행을 위해 만든 서류상 회사다.”
여기서 목적어를 ‘유동화증권 발행’으로 잡았는데, 이보다는 ‘유동화증권’이어야 자연스럽다. 손질하면 “특수목적 회사는 유동화증권을 발행하기 위해 만든 서류상 회사다”가 된다. ‘발행하기’는 ‘발행하다’를 명사화한 쓰임인데, 좀 나아졌지만 아직 ‘위해’를 달고 있다. 대체로 ‘-기 위해’는 의지를 가진 씨끝 ‘-고자, -하려고, -하도록’을 쓰면 간단해진다. 그래서 “특수목적 회사는 유동화증권을 발행하고자 만든 서류상 회사다”가 된다. ‘위하다’는 전통적인 말법을 빼면 제목·법·단체 이름 등 말을 극히 줄여 쓸 때나 쓸모가 있을 뿐, 보통 글에서는 ‘부림마디, 매김마디, 어찌마디’를 길고 복잡하게 두는 폐단이 있다. 또한 한자말을 여럿 잇대어 붙이기도 하고, 입말을 글말로 바꾸며, 걸맞고 적확하게 쓰일 풀이말을 사장시키는 구실도 한다.
“환율방어를 위해 달러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풀린 통화량을 조절하기 위한 목적 등으로 통화안정 채권과 외국환 평형기금 채권을 발행한다.” 여기엔 ‘위해·위한’이 두루 보이는데, 이는 월을 둘로 나눠 쓰면 간명해진다. 다른 말에 손을 덜 댄다면 “환율을 방어하려고 달러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과도히 풀린 통화량을 조정할 목적으로 통화안정 채권과 외국환 평형기금 채권을 발행한다” 정도로 다듬을 수 있겠다.
‘위하여’꼴이 많이 쓰이게 된 데는 영어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숱한 영어 익은말(in order to, so as to, with a view to, in the cause of, for the cause of, for the sake of, for the benefit of, for one’s sake, in the interests of …)들을 ‘-하기 위하여, -를 위해, -를 위한’으로 익히고 써버릇한 까닭이다.
△학벌지상주의 극복을 위하여 → 학벌지상주의를 극복하려면 △의뢰자들은 대부분 초·중·고교생 자녀를 조기유학시키기 위해 이민을 신청했는데 → ~ 자녀 조기유학 관계로 이민을 신청했는데 △신자유주의는 더 많은 일자리를 약속하지만 그러한 삶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우리의 삶이 더 망가지게 되어 있다 → ~ 그런 삶의 조건을 갖추자면 ~.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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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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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20세기가 남긴 비극의 땅, 유고슬라비아
보스니아 내전의 잠정적 종결
보스니아 내전 사태는 1997년 현재로서는 안정되었다. 이는 미국 등 서방이 적극적인 중재에 나선 결과이다. 1995년 말 내전 발발 3년 7개월 만에, 미국 오하이오 데이턴에서 보스니아 평화 협정이 조인된다. 협정의 핵심 내용은 보스니아를 단일 국가로 유지하되, 두 체제로 분할한다는 것이다. 즉 세르비아계의 민족 자체 공화국(스르프스카 공화국)을 인정하고 동시에 회교-크로아티아 연방이 또 다른 지방 정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공화국은 영토의 49%와 51%를 통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회교계가 각각의 자체 대통령을 선출하고, 3인의 대통령이 공동으로 연방을 통치하기로 한 것도 평화 협정의 주요 내용이다. 1997년 총선이 치러지고 다소 안정적인 국가 형태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이는 명백히 형식적인 평화일 뿐이다. 이미 심각한 상처를 주고받은 민족들의 불안한 공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칸 영화제의 황금 종려상을 수상했으며 40대 초반의 전도양양한 영화 감독 에밀 쿠스투리차도 보스니아 내전으로 상처를 입었다. 영화 <언더그라운드>를 보면, 쿠스투리차가 조국 유고슬라비아의 분열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유고의 재통합을 호소하는 듯한데, 이런 주장이 보스니아 내전의 악당인 세르비아계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여러 지식인들이 쿠스투리차를 세르비아의 선전자라고 비난했다. 그런 비난에 직면하여 쿠스투리차는 1995년 12월 은퇴를 선언한다. 쿠스투리차의 매니저는 약 반 년 후에 감독이 다시 영화를 제작한다고 발표했으니 이제 사람들은 쿠스투리차 감독의 영화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쿠스투리차도 보스니아 내전의 광기에 간접적으로 상처를 입은 셈이다. 또한 보스니아 내전에서의 증오심은 쿠스투리차를 은퇴로 몰았던 그 숱한 서구인들의 가슴 속에도 비슷한 모양새로 옮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증오심이나 광기는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는 보스니아가 다시 분열되는 그날 또다시 전세계를 휩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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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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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4장. 사과는 왜 수직으로 떨어지는가?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지극히 평범한 일에서 우주의 중요한 법칙을 찾아내는 사람은 그야말로 유례가 드문 비범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아이작 뉴턴 경은 영국 링컨셔의 울소프에서 1642년 크리스마스날에 태어났다. 뉴턴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3세 때 그의 어머니가 재혼하게 되자 그는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으며, 울소프에서 약 10키로미터 떨어진 그랜삼의 학교에 보내졌다. 어머니는 뉴턴이 14세 때 또다시 과부가 되어 울소프의 집으로 돌아왔다. 뉴턴은 지극히 보통 학생으로 학교생활도 평범하게 하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를 집으로 불러들여서 농업에 종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뉴턴은 농삿일보다도 수학이나 여러 가지 기계 따위를 다루는 일에 흥미가 있었다. 다행히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대학 출신인 숙부가 뉴턴의 잠재능력을 인정하여 대학을 들어갈 수 있도록 학교에 다시 보내주었다. 뉴턴은 1661년 18세 때에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3년 동안 수학과 자연과학에서 그의 천재적 재능이 눈을 뜬 것 같다. 같은 무렵 런던에 페스트가 발생하여 이 역병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1665년 여름에 대학은 폐쇄되었다. 그해 초 학사학위를 취득한 뉴턴은 울소프로 돌아와 그곳에서 2년간 연구와 사색의 시간을 보낸 후, 다시 개강한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 광학, 수학, 인력 운동에 관한 물리학 등 각 분야에서 그가 기념비적 연구의 기초를 이미 대학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끝내놓았다는 설은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본 뉴턴이 세렌디피티적인 착상을 한 후 1687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프린시피아'에서 만유인력법칙을 완전한 형태로 주창하게 되기까지는 약 20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그와 같이 늦은 원인에 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이 논쟁의 철저한 고찰에 대해서는 플로리안 카조리의 저서를 참조할 것). 뉴턴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것과 그 관찰결과에 관해서는 몇 가지의 사료에 적혀있다. 예를 들면 마틴 포크스(영국 학사원장), 볼테르(뉴턴의 질녀인 캐서린 바톤에게 들었다고 함), 존 콘뒤트(뉴턴의 친구로 후에 그의 질녀와 결혼), 윌리엄 스턱리(물리학자이면서 뉴턴의 친구)등에 의한 것들이다. 불테르의 일화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스턱리의 '아이작 뉴턴경 생애의 추억'(1752년)에 쓰여진 이야기쪽이 더 신뢰성이 있는 것 같다. 뉴턴의 말년에 스턱리가 그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 쓰여져 있다.
따뜻한 날 저녁식사 후, 우리는 뜰로 나가 몇 그루의 사과나무 아래서 차를 마셨습니다. 뉴턴 경과 나, 단 둘이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하던 중, 그는 옛날에 만유인력에 관해서 생각하게 된 것도 이런 상황 이었다고 회상하였습니다. 명상에 잠겨 앉아있을 때에 사과 한 개가 떨어지는 것을 본 것이 계기였다고 합니다. 왜? 어째서? 사과는 대지를 향해서 언제나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일까? 왜, 옆으로나 위쪽으로 가지 않고 언제나 지구의 중심을 향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질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총 인력은 지구의 중심으로 향하는 것이며 옆으로는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과도 수직으로 즉, 지구의 중심을 향해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물질끼리 서로 끌어당긴다면 그 힘은 물질의 양에 비례할 것입니다. 즉,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과도 지구를 끌어당깁니다. 우리가 지금 중량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것은 힘이기 때문에 그 힘은 우주 전체에 전재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서서히 이 인력이라는 특성을 지구나 전체의 운동에 결부시켜 서로의 크기와 거리, 그리고 규칙적인 공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특성과 최초로 천체에 주어진 진행 운동을 함께 생각함으로써 이들 순환궤도가 완전히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혹성이 떨어지는 일도 없고 전부가 하나의 중심으로 모아지지 않는 이유를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전 유럽을 놀라게 한 훌륭한 발견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발견으로 튼튼한 기초 위에서 자연철학을 수립했던 것입니다. '아이작 뉴턴전'(1934년)에서 L.T. 모어는 사과의 에피소드를 좀 더 창의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거기서 그는 그 사건이 뉴턴의 진리탐구에 대한 '준비된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다고 보고 세렌디피티적인 면을 강조해서 쓰고 있다.
그가 마침 대학을 졸업했을 무렵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소년시절에는 농장에서 그의 관심을 끈 유치한 문제들을 생각하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완전한 성인이 되어서 돌아왔으므로 이전과 같은 생활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머릿속은 심원한 문제로 가득했으며, 그가 생각해 왔던 것은 미래에 있을 모든 사상의 방향을 변경할 정도였다. 여름의 긴 오후에는 옛날부터 있던 오래된 회색돌집 근처의 과수원에서 보냈다. 그 기념할 만한 날, 한 개의 사과가 그의 발 옆에 작은 소리를 내면서 뚝 떨어졌다. 그런 일은 평상시에도 흔히 있는 일이어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 순간, 작은 스위치를 '탁'하고 켜면 커다란 기계가 육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그의 두뇌기능에 시동을 거는 자극이 있었던 것이다. 지구의 신비한 인력의 공간을 통해서 나무의 꼭대기나 산꼭대기, 또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새나 구름에까지 작용하고 있다면 그 인력은 달에까지 미칠 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달은 수평으로 던져진 돌처럼 지구를 향하여 낙하하고 있을 것이며, 그런데도 절대로 지표면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달의 고속운동이 수평선을 넘어서 아득히 먼 것으로 자신을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한 문제다. 그러나 발사체의 운동(추진력) 문제를 풀었던 갈릴레오도 달이 지구로 낙하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고속을 유지하며 움직이고 있는 유일한 발사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또는 원심력과 운동의 법칙을 수식화한 호이겐스(네덜란드 과학자)도 그 비밀을 꿰뚫어보지 못했다. 뉴턴의 재능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인력의 법칙을 고안했을 뿐만 아니라, 달이 그 궤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인력의 법칙이 작용하는가를 계산하는 일까지 스스로 생각해낸 점이다. 데이비드 브루스터 경의 '아이작 뉴턴 경의 생애, 저술 그리고 발견'이라는 전기에도 사과 이야기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다음과 같은 저술이 있다. "나는 1814년에 그 사과나무를 보러갔고 그 나무의 뿌리를 한 조각 가지고 돌아왔다. 그 나무는 너무 썩어 1820년에 벌채하였고, 그 재목은 스토크 로키포드의 터너 씨에 의해 소중하게 보존되었다." 이와 같이 후에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 하나가 된 23세 젊은이의 머릿속에 만유인력의 법칙이 탄생하게 된 데에는 세렌디피티가 단단히 한몫 한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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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평생 김종직을 미워하며 옛 원한을 앙갚음한 유자광
유자광(1441-1468)의 본관은 영광이고, 자는 우복이다. 부윤 유규의 서자이다. 날쌔고 힘이 세며 어려서부터 무뢰한 행동을 잘 하여 유규가 그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근본이 미천한데다가 방종하고 패악스러웠다. 애초부터 갑사 무리에 속해 있었는데, 임금에게 상소를 하여 스스로를 천거하자 세조가 그 기개를 장하게 여겨 그를 발탁하여 병조 정랑으로 삼았다. 세조 14년(1468)에 문과에 장원하고, 또 남이가 역모한다고 고발한 공으로 훈작을 받아 무령군에 봉해져서 1품에 뛰어올랐다. 천성이 음흉하고 잔악하였다. 한명회의 왕성한 활약을 시기하고, 또 성종이 간언 받아들이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소를 올려 한명회가 권세를 휘두르는 정상을 고자질하였는데, 성종이 그것을 죄주지 않았다. 뒤에 임사홍, 박효원 등과 현석규를 모함하려다가 모의가 실패하여 동래로 귀양갔다.
한번은 함양에 놀러 갔다가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나무판에 새겨 걸어 두었다. 그 뒤 김종직이 이 고을의 군수로 와서는 "자광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 시를 판에 새겨 건단 말인가" 하고는 화를 내며 떼내어 불태워 버리니 유자광이 분히 여기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감종직에 대한 임금의 총애가 융숭하던 때라 도리어 교분을 맺었고, 그가 죽자 만사를 지어 애도하면서 당나라 한유와 수나라 왕통에 견주었다. 김일손이 김종직에게 수업했는데, 소를 올려 이극돈을 논박하였다. 사국(사관이 사초를 꾸미는 곳)을 열게 되자, 이극돈이 당상관이 되어 김일손의 사초를 발견하고는 유자광과 함께 노사신, 윤필상을 찾아가 밀고를 기약하고 밤낮으로 죄안을 짜내어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무릇 김종직의 글을 간직한 사람은 모두 자수하게 하여 빈청 앞에서 불태워 버리고, 각 도의 관청에 걸려 있는 현판을 모두 뜯어버리게 함으로써 함양 관청의 옛 원한을 보복하였다. 중종반정 후, 유자광이 훈적에 기록되었다. 얼마 못 가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려 탄핵하니 드디어 귀양을 갔는데, 두 눈이 전부 어두워진 지 수년만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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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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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핀과 치즈
"조세핀, 오늘밤에는 안돼" 이 말은 '나폴레옹'이 그의 아내 '조세핀'에게 한 말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유명하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다음의 일인데 한 번은 외국 사신들을 모아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한창 흥이 무르익는데 주인공인 나폴레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시종들이 조심스레 그의 사실로 가 봤더니 '나폴레옹'은 소파에 파묻혀 곤히 자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깨워야 하나, 흔들어 깨울 수도 없는 노릇, 시종들은 의논 끝에 황제는 치즈를 좋아하시니까 그 냄새를 맡으면 깰 것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큼직한 은쟁반에 치즈를 수북히 담아 앞에 갖다댔더니 '잠결에 손을 저으며 하는 말이 "조세핀, 오늘 밤에는 안돼." 일설에 의하면 '짐은 피곤하오'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치즈의 냄새를 잠결에 '조세핀'의 체취, 즉 바로 그 부분의 냄새로 알았다는 것. 그래서인지 '나폴레옹'은 황제가 된 후로 이 연상의 아내를 차츰 멀리한 끝에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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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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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4장 완전한 기쁨을 주는 인생 수업
훈장을 마다한 퀴리 부부
라듐을 발견하여 세계의 물리학계를 놀라게 한 퀴리 부부에게 노벨상이 주어졌다. 어느 날 부부를 찾아온 한 신문 기자가 수상 소감을 묻다가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프랑스 정부도 당신들에게 레종 드 뇌르 훈장을 수여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기자는 퀴리 부부가 프랑스 최고 영예를 얻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피에르 퀴리는 얼굴을 들고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훈장을 수여하는 일 같은 건 그만두어 주었으면 좋겠는데요"
그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훈장 같은 건 조금도 원하지 않습니다. 과학자가 가슴에 훈장을 달아 봤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사실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훈장보다는 훌륭한 연구소입니다."
그때 마침 예닐곱 살 가량 먹은 금발의 소녀가 달려왔다. 선한 눈에 이마가 넓은 아이였다. 퀴리 부부의 딸 이렌이었다. 피에르는 딸을 껴안고 기쁜 듯이 말했다.
"바람이 하나 더 있다면 이 아이가 내 뒤를 이어 훌륭한 과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곁에 있던 마리 부인도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렌은 아빠의 뒤를 잇는 훌륭한 과학자가 되어야 해."
그녀는 상냥한 눈빛으로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크게 감동을 받은 신문 기자는 이튿날 신문에 그 이야기를 크게 보도했다.
세상의 명성과 이익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의외로 집요하고 강해서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지만 속으로는 온통 욕망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학문마저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실망스러운 모습도 보인다. 물론 실망하면서도 그 모습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아 쉽게 웃지도 못한다. 인간은 욕망의 도가니에 갇혀 살아가는 슬픈 존재일 지도 모른다. 욕망의 도가니 속에서 서로 꿈틀거리기 때문에 훈장이 주는 세속적인 영예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퀴리 부부의 순수한 행동은 큰 감동을 준다. 가련한 거짓 몸짓을 버리고 퀴리 부부를 마음의 거울로 삼자. 게다가 딸을 안고 그 얼굴을 들여다보는 그들의 따뜻한 눈길이 얼마나 순수한 것인지를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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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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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열한번째 이야기 꿀항아리와 함께 깨져버린 꿈
하루는 루까노르 백작이 빠뜨로니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세상의 모든 일들은 쇠사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잘 이용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었소. 만약 그가 내게 말한 대로만 된다면 그것은 내게 큰 이득이 될 것 같소." 그 이야기를 들은 빠뜨로니오는 이렇게 말했다. "루까노르 백작님, 저는 헛된 망상이 아니라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들어왔습니다. 허황된 것에다 기대를 건다면 그 사람에게는 도냐 뚜루아나라는 여인에게 일어났던 일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독히 가난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여인은 머리에 꿀항아리를 이고 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면서 그녀는 그 꿀을 팔면 달걀 한 줄을 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달걀을 부화시키면 닭이 나올 것이고, 그러면 그 닭을 판 돈으로 양을 사고 또 소를 사고 그렇게 계속하면 다른 이웃들보다 훨씬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여인은 상상 속의 재산을 가지고 이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 딸은 어떻게 결혼시킬까? 며느리와 사위들이 두루두루 모여 사는 그 거리를 어떻게 뻐기며 지나다닐까? 그렇게 가난하던 내가 큰 재산을 모았으니 사람들이 그 행운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자신의 밝은 앞날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그녀는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녀는 자신의 이마를 치며 웃었고 그 순간 꿀항아리는 바닥에 떨어져서 박살이 났습니다. 깨져버린 항아리를 본 그녀는 꿀항아리부터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는 너무나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허황된 것에 모든 희망을 다 걸고 있었는데 결국 그녀가 생각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작님, 사람들이 백작님께 하는 말이나 백작님께서 기대하시는 것들이 확실한 것이기를 바라신다면 언제나 그런 일들이 타당한 근거가 있는지 혹시나 허황한 기대는 아닌지 따져보셔야 합니다. 지금 누리는 행운을 잃지 않으시려면, 확실하지 않은 이익을 바래 지금 손안에 있는 것을 거는 모험을 하지 마셔야 합니다."
* 하늘을 나는 두 마리 새보다는 내 손 안의 한 마리 새를 더 소중히 여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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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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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2부 취재수첩에 묻어둔 광주의 진실
14. 경상도 기자의 위기일발
1980년 5월 21일. 그날은 초파일로 기억된다. 취재차로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는 기자의 시야에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온갖 꽃 사이로 수많은 연등이 어른거렸다. 그런가 하면 라디오에서는 무슨 대규모 행사(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의 중계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흥에 겨운 이 방송은 이 나라 어디에서 지금 대규모 유혈참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게 했다. 오월의 싱그러움과 화려한 꽃 그리고 연등, 축제 중계방송... 세상은 온통(?) 흥겹고 화려한데 혼자서 사지로 향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착잡한 마음 금할 수 없었다. 5.18 직후부터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풍문은 여러 채널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지만 당시의 중앙지나 통신 방송은 아무런 현지 소식도 전해주지 않았다. 이에 따라 회사에서는 여러차례 회의를 거듭한 끝에 광주에 기자를 보내기로 했다. 당시 부산에서 광주에 기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현지의 지역감정이 격화돼 있다는 소식이 '경상도 기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또 광주가 철저히 고립돼 있는 게 분명해 기자가 '잠입'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설사 잠입한다 해도 기사를 송고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나아가 당시 신문은 엄격한 검열을 받고 있었으므로 현지에서 기사가 송고돼 온다 하더라도 보도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대한 사실에 접근하는 보도를 위해, 그리고 역사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기자를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1차로 탐색에 목적을 두고 우선 기자 1명만 보내기로 했는데 당시 사회부 기자이던 내가 특파기자로 선발됐다. 취재차는 진주에서 나를 내려주고 돌아가 버렸다. 경상도 차는 보이는 대로 불태워 버린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진주 주재기자의 협조로 전라도 번호판의 승용차를 빌려 타고 전라남도에 진입했다. 그러나 거의 자동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리의 적막이 엄습했다. 광주 근교 어느 파출소에 들러 부산에서 취재차 왔다며 길을 물었다. 파출소장은 "죽으러 왔소?" 하며 겁을 주었다. 그때 청년들을 가득 태운 트럭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 본 데모대였다. 광주시내를 눈앞에 둔 곳에서 계엄군의 저지를 받았다. 통나무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총부리로 행인을 위협하며 일체의 통행을 막았다. 여기서 차를 버리고 단신 산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름도 알 수 없고 지리도 모르는 곳을 얼마 가지 못해 계엄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당시 가장 답답한 것은 누가 '적'인지, 누가 '벗'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계엄군은 취재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광주의 시위대는 경상도 사람에게 보복을 한다지 않던가. 결국 계엄군에게 신분이 노출되어 추방당하는 꼴이 됐다. 이렇게 해서 1차 잠입은 실패하고 말았다. 회사에 돌아와 광주의 심각성을 보고했다. 그리고 아예 취재반을 편성하여 재도전하기로 했다. 나를 비롯하여 역시 사회부 소속의 안기호 기자와 사진부 박상륭 기자로 팀을 구성했다.
이 취재반이 23일 다시 부산을 출발했다. 이날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인 섬진강 다리가 군에 의해 차단돼 있었다. 숱한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병력이 다리를 봉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광주에 취재를 간다는 우리를 막지 않았다. 군인들은 우리가 내보인 프레스 카드를 무슨 취재 허가서나 되는 줄 오해한 것 같았다. 순천에서 1박한 뒤 24일 새벽 광주로 향했다. 계엄군의 봉쇄망을 피해 안개 자욱한 하천바닥과 논두렁 길을 곡예하듯 잠입했다. 광주를 지척에 둔 곳에 차를 두고 걸어서 시가지에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광주의 첫인상은 두 가지의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그 참혹함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상무관에 안치돼 있는 주검들, 그리고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시가지. 도청 앞에는 수많은 시민이 모여 집회를 열고 있었다.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 열기는 뜨거웠다. 대부분 가족이나 친척 친지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침착했다. 대학병원에는 부상자들의 비명과 가족들의 오열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앞에는 헌혈 순서를 차분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시가지 어느 곳에서도 혼란이나 무질서는 찾을 수 없었다. 광주는 결코 폭도의 도시가 아니었다. 이것이 두 번째 놀라움이었다. 이날 도청 앞에서 필자는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우리 팀 중 사진부 소속 박 기자는 제법 큼직한 카메라 박스를 메고 다녔다. 알루미늄제여서 유난히 빛이 나고 크기도 커서 누구에게나 눈에 잘 띄었다. 나는 처음부터 거추장스러운 이 박스에 신경이 쓰였다. 도청 앞 시민대회를 취재하면서 이 박스를 팀장이었던 내가 맡고 두 기자는 군중 속에 들어가 취재하도록 했다. 나는 상무관 옆 광장 모서리에서 기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나와 카메라 박스를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나는 몸둘 바를 몰랐다. 이날은 부슬비가 내려 비닐 우산을 쓰고 있었는데 마침 비가 개어 이 우산을 활용하기로 했다. 나는 YMCA회관 벽을 뒤로하고 카메라 박스를 깔고 앉아 우산으로 앞부분을 가렸다. 얼마 후 도청 정문에서부터 '홍해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많은 군중이 둘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시민군 2명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내 곁을 지나 인근 상점 앞으로 갔다. 거기서 시민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곁눈질을 해보니 그들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히 내 주변의 시민들이 나를 수상히 여겨 신고한 것이었다. 당시 광주에는 수많은 기관원들이 잠입해 있었고 시민들은 이들에게 커다란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무슨 기관원으로 판단한 것이다. 두 시민군은 즉시 나에게 다가왔다. 카빈 두 자루의 총구가 나를 향했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며 두 손을 들었다. 도청 앞 광장의 수많은 군중이 일시에 나를 향해 돌아서며 완벽한 반원을 그렸다. 그들의 표정에는 적대감이 역력했다. 앞에는 군중, 뒤에는 커다란 건물의 벽, 거기에 나는 '경상도 기자'. 사면초가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사람이 죽음 앞에 이르면 과거사가 주마등처럼 흐르고 가족들의 생각이 난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아, 이렇게 끝나는구나. 너무나 허무하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게 뭐야?" 시민군이 박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카메라 박스입니다." "뭐? 카메라 박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기잡니다." "기자? 어디서 왔어? 어느 신문사 기자야?" "..."
이때처럼 답답한 때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신문 이름이 '부산'일보일까. 경상도에 속해 있는 지역 이름을 밝히지 않고는 내 소속을 알릴 도리가 없었다. 광주 사람들이 경상도 사람만 보면 보복을 한다는데 여기에 들어와 사진을 찍으며 취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부산'이라고 입을 떼는 순간 총탄보다 먼저 수만 군중의 주먹과 발길이 쏟아질 게 뻔했다. 궁하면 통한다던가. 나는 셔츠 호주머니에 프레스 카드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부산'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신분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물론 프레스 카드를 보고 시민군이 "이 새끼, 부산에서 왔어" 한마디만 하면 만사는 끝난다. 그러나 그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나는 호주머니로 손을 뻗어 프레스 카드를 꺼내 시민군들의 눈 앞으로 내밀었다. 그들은 카드를 받아 이를 확인했다. 순간 그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1명이 어이 없게도(?) 나에게 거수 경례를 붙였다.
"아, 기자가 맞군요. 수고하십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본부로 가시죠. 자, 가십시다."
나머지 1명이 맞장구를 쳤다. 나는 카메라 박스를 메고 그들을 따라 나섰다. 다시 '홍해의 기적'이 일어나며 우리를 도청 쪽으로 안내했다. 어떤 시민은 뜻 도를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기자로서는 좀처럼 접근하기 어렵던 시민군 본부인 도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수많은 주검과 긴장속의 지휘부 등을 직접 대면하며 생생한 취재를 할 수 있었다. 그들 두 시민군은 부산에서 여기까지 와 취재해주는 데 대해 감사하며 자기들 못지 않게 목숨을 걸고 나선 기자정신에 감탄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튼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도청안 곳곳을 안내해주었다. 이들은 분명히 대학생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내 운명이 어찌 됐을지 불문가지였다. 그러나 당시 도청에 들어선 나는 취재에 정신을 빼앗겨 이들의 신원을 물어두지 못했다. 그후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그리고 그때 고마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게 지금도 한처럼 남아 있다. 이렇게 목숨을 건 취재를 했지만 기사를 송고할 길은 더욱 막연했다. 보내본들 제대로 보도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송고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전에 주로 시내에서 취재를 하고 오후에는 외곽으로 걸어 나와 주변을 취재하면서 시골 우체국을 찾아 송고하는 방법을 택했다. 실제로 시 외곽을 돌아다니다 보니 시민군과 계엄군의 안팎 경계는 의외로 허술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렇게 어렵게 보낸 기사들은 거의 보도되지 못했다. 당시 부산일보는 21일 '광주 소요 6명 사망'이라는 계엄사의 발표를 처음으로 보도했다. 다음날은 '광주 시위 연5일 인근확산, 수십 명 사망 수백 명 부상'이라는 호외를 내보냈다. 계엄사의 혹독한 검열에 견디다 못한 부산일보는 23일자 1면에 '계엄당국의 조치로 광주사태 보도 못하오니 독자 여러분의 양지 바라오며 일부 지방 신문 늦었음을 양해 바랍니다'라는 이례적 사고를 4단으로 싣고 '아프간 남녀 학생 격렬한 반소 데모'라는 엉뚱한 기사를 톱으로 처리했다. 또 사회면 톱에 '날씨 전반적으로 흐려'라는 기사를 싣는 등 저항을 시작했다. 24일자부터 단편적이나마 현지발 기사를 실었지만 검열에 실제 보도되는 것은 허울뿐이었다.
26일자 사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유혈사태 막아야 한다'며 '광주사태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어찌 광주시민만의 일에 그치겠는가. 광주사태는 우리 한국민 전체의 불행이요, 슬픔이요, 통한이 아닐 수 없다'고 절규했다. 부산일보는 기간 중 유례없이 하루에 두 번 호외를 내는 등 모두 7차례에 걸쳐 호외를 냈다. 아무튼 우리 팀은 금남로 뒷골목 어느 하숙집에 거처를 정하고 매일 취재와 송고를 거듭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광주시민이 우리에게 적대감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토록 모진 상황 아래서도 쌀과 부식을 나누어 먹는 등 생필품 공급이 원활하며, 어느 곳에서도 질서의식을 잃지 않는 등 무정부 속의 평온이 유지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시 광주는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언제 시작될지 알 수 없어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우리는 기약 없이 마냥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26일 일단 부산으로 철수했다. 날을 잘못 잡은 것이었다. 본사에 도착하자마자 분통부터 터졌다. 그토록 어렵게 송고한 기사들이 사실상 단 한 줄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도 그날 밤을 새워 수많은 기사를 작성해놓고 모처럼 귀가했는데 새벽녘에 들리는 소식은 광주에 진압군이 진입했다는 것이었다. 다시 광주로 새벽길을 달렸다. 이날의 광주는 어제의 광주가 아니었다. 계엄당국은 광주가 평온을 되찾았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어느 것이 평온인지 취재반은 혼돈 속을 헤매야 했다. 거리에는 시체를 실은 트럭들이 줄지어 망월동으로 향했다. 장의차가 모자라 덤프트럭까지 동원됐다. 두건을 쓴 유족이 시체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어제까지 상무관에 고이 모셔졌던 사체들은 하루 사이에 천더기가 됐다. 붉은 속살을 드러낸 묘지에서는 시체들이 번호순으로 묻혀갔다. 살벌한 분위기는 유족들의 오열마저 삼키는 듯했다.
"이 나라 모든 액운을 대신하여 소중한 생명을 바쳤으니 이번 사태를 끝으로 이 나라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한다. 어떤 존재가 감히 무너지지 아니하고 견고히 남아 있을손가. 한 생각 쉬고나면 그대들도 생사 이전의 참모습을 보리라."
어느 스님의 뜻 깊은 독경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취재반은 30일까지 광주에 머물며 가슴속에 응어리지는 시민들의 한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31일자 4면 전면에 걸친 취재기자의 방담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취재와 보도를 마무리했다. 너무나 커다란 비극의 현장을 다녀온 취재반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시체 썩는 냄새와 잃어버린 취재 감각으로 스스로를 가누기 어려웠다. 우선 식욕을 잃었다. 상무관과 도청 안에서 따뜻한 봄볕과 가는비 속에 썩어가던 시체에서 풍기는 악취가 세월이 가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 동족끼리 그럴 수 있느냐는 인간에 대한 회의가 나를 얼간이처럼 만들었다. 다시 사건기자로 돌아왔지만 무엇이 기사인지 무엇이 사건인지 구별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상당 기간 기사를 쓰지 못하고 멍청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머릿속에서는 항상 '광주'가 낡은 필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정상을 찾지 못하는 취재반을 더욱 옥죈 것은 광주를 다녀온 기자는 모조리 해직시킨다는 풍문이었다. 실직의 두려움도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5월이면 광주를 생각한다. 그리고 기자는 아직도 광주에 진 많은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에 몸을 떤다. 수많은 광주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역사의 현장을 제대로 취재하지도, 제대로 보도하지도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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