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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56 호
단기 4340. 9. 8 (음력 7. 27)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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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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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살고 싶은 국토” 논문 및 에세이』 공모
공모주제 : “살고 싶은 국토”를 만들기 위한 “문화”와 “재생”
공모분야 : 논문: 상기주제로 작성하되 정책제안 및 사례를 포함할 것 에세이: 상기주제로 작성함
응모자격 : 논문: 대학생 및 대학원생(도시공학과, 지역개발(계획)학과, 지리학과, 환경계획학과 등 관련 분야 재학 중) 에세이: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가능하며 제약이 없음
시상내역 : 대 상(1명) 상장 및 시상금 300만원 우수상(2명) 상장 및 시상금 50만원
※ 응모작의 수와 논문수준에 따라 시상등급·인원은 다소 조정될 수 있음
접수기간 : 9월 1일 - 11월 5일
작성방법 : 첨부된 논문작성요령, 응모자 유의사항을 참고하여 작성
접수방법 : E-mail,우편(마감일 소인분까지 유효) 또는 직접 방문 (근무시간에 한함) ※ 접수처 : E-mail geography77@hanmail.net 주소 : (우)151-836 서울시 관악구 봉천4동 869-10 관악센츄리 타워 1102호
문 의 처 : 대한지리학회 사무실 (☎02-875-1463)
국토연구원, 농업기반공사 농어촌연구원, 주택공사 주택도시연구원, 토지공사 토지연구원,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철도기술연구원, 강원발전연구원, 대구경북발전연구원,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대한지리학회, 한국농촌계획학회, 한국지역학회, 한국환경정책학회,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환경정의, 녹색교통운동, 녹색연합, 환경운동연합 시민환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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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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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국회의원을 뽑고 싶다고 하면서도 결국 뛰어난 정상배에게 표를 찍고 만다. /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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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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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잠을 내쫓으라
밤잠을 몹시 설쳤어도 몸이 아프지 않은 다음에는 결코 쓰러져 눕지 말라.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서도 안 된다. 비록 한밤중일지라도 아직 졸립다는 생각이 없으면 더 공부에 매달려야 한다. 낮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잠을 자서는 곤란하다. 졸음이 오면 찬물로 세수하여 잠을 쫓고, 그래도 눈꺼풀이 감길 만큼 졸음이 덤벼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적당한 운동으로 그 잠을 쫓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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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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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4. 사칠 논쟁
1. 사칠 논쟁을 다시 보는 이유
모든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대답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아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제자의 질문에 "사람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라고 대답했던 공자나,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소크라테스도 스스로에게 먼저 이 질문을 던졌던 철학자들이다. 아마도 우리가 열거할 수 있는 철학자들의 수만큼이나 대답의 종류도 다양할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물음은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철학적 과제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물음에 따라 철학자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규정했다. 고대 중국의 경우처럼 인간을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규정한 맹자의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그 반대라고 주장했던 순자의 경우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욕망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고 그 욕망을 어떻게 조절하고 통제하느냐가 이들의 주된 관심거리였던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가치론적 규정이 옳으냐 그르냐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규정에 따라 인간의 행동 양식을 어떤 식으로 이끌어 갔느냐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한 규정의 필요성은 사회 현실을 더욱 적절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조선 시대 주자학자들이 '사단'과 '칠정'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통해 인간의 심리 현상을 분석한 것은 나름대로 충분한 자기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더욱이 이러한 분석이 개인의 주관적인 독단에 그치지 않고 타자와의 논쟁을 통해 객관화된 사고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논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 시대 주자학자들의 인간관을 고찰해 보는 것은 오늘날의 인간관을 재고해 보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욕구는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더라도 기본적 성격이 달라졌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극도로 기능화된 모습으로 비치는 오늘날 인간의 모습을 이상적이라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상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 논쟁의 가치는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의 한국적 발전을 주도했던 심성론과 리기론의 결합이 처음으로 시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요 개념인 사단칠정에 관한 제규정이 이 논쟁에 이르러 비로소 개념적 명확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쟁의 주인공들 중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따지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이미 주자학적 사유의 틀이 통용되지 않는 오늘날 그러한 작업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의의 중심은 자연히 그들이 주자학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조선 중기 이 논쟁의 주역이라 할 이황과 기대승이 각각 어떤 방식으로 주자학을 이해하였고, 그 내용이 무엇이며, 왜 그렇게 이해했는가를 알아보는 데 대부분의 지면이 할애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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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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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본뜻 : 팔자란 사람이 태어난 후 달 날 시를 간지로 계산한 여덟 글자다. 한 사람이 타고난 연월일시를 사주라 하고, 이 사주를 각각 간과 지로 표기하면 여덟 글자가 되는데 그것을 팔자라 한다. 예를 들어 '갑자년 을축월 병인일 정묘시'일 경우 사주를 이루고 있는 간지가 갑자, 을축, 병이, 정묘의 8자가 된다 이 여덟 개의 간지 조합을 역학에 의거해 해석한 것을 그 사람의 타고난 운명이라 얘기한다.
바뀐 뜻 : 팔자란 한 사람이 타고난 일평생의 운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그 사람은 팔자가 어찌나 드센지 단 하루도 집에서 쉴 날이 없어요 -팔자 타령 하지 마 세상 모든 일은 다 자기 하기 나름이지 팔자는 무슨 팔자?
관해/대하여/최인호 ‘-에 관(關)해, -에 대(對)하여’ 따위가 들어가지 않으면 말글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20세기 이전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그 후반 들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연유를 대충 알조다. 말이 안 되는 지경이란, 그만큼 많이 쓰기도 하고, 이를 쓴 문장을 손질할 때 피를 봐야 할 정도로 들러붙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들어가 말을 어지럽히고 군더더기를 만드는데도 아무데나 쓸데없이 많이 쓰는 게 문제다. 이 두 가지는 뜻차이 없이 서로 넘나들며 쓴다.
이 말이 많이 쓰이게 된 연유는 두어 가지다. 먼저 일본말(-に 關して, -に 對して) 영향이다. 특히 일제 행정·법률 문서를 그대로 베껴 쓰면서 쉬를 슬기 시작했다. 여기에 광복 뒤 줄곧 영어 영향이 더한다. 곧 갖가지 꼴의 영어(for, as regards, as to, as for, in regard to(of), with regard to, in respect of, with respect to, as respects, about, concerning, regarding …)를 마냥 ‘-에 관해, -에 대해, -에 관해서는, -에 대해서는” 따위로 가르쳐 버릇하고 배우며, 이를 번역문 아닌 보통 말글에서도 써댄 결과다. 요즘은 ‘-에 관한’보다 ‘-에 대한’ 쪽이 더 잦은 편이다.
예컨대 “다음 물음에 관해 답하시오. 평화에 대해 갈망하다,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 누구누구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다”가 아니라 “다음 물음에 답하시오. 평화를 갈망하다, 원-달러 환율, 누구누구의 구속영장을 청구하다”면 될 터이다.
△이 물건이 쓸모가 있는지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 이 물건이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 논의하고 있다. △이 이슈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할말이 없다 → 이 이슈를 두고는 아무 할말이 없다 △무엇에 대해 알고 싶은가 → 무엇을 알고싶은가 △아시아 다른 나라들의 미사일방어 계획에 대한 태도에 대해선 ~ → 미사일 방어계획을 다루는 아시아 다른 나라 쪽 태도 분석에서 △하원 인권 코커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시죠 → 하원 인권위원회를 간단히 소개해주시죠 △최근 들어 많이 다루는 주제는 북한 난민들에 관한 것입니다 → ~ 북한난민 얘기입니다 △이에 대해 → 이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관하여 토론하도록 하겠습니다 →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주제로 토론하겠습니다
문장을 손질할 때 스스로 마음만 먹으면 상당수 군더더기들을 털어낼 수 있다. 최선은 글을 쓸 때부터 아예 이런 말을 쓰지 않는 것이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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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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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20세기가 남긴 비극의 땅, 유고슬라비아
`한` 나라의 해체에서 인종 청소까지
밀코 만체브스키 감독의 <비포 더 레인>은 몇 가지 사건을 통해 보스니아 내전이 얼마만큼 비합리적인 증오에 기반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영화가 소개하는 한 가지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영국 런던 시내의 레스토랑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한 여인이 남편에게 이혼을 제의하려고 만남을 갖고 있다. 여인은 임신을 했으며 현재 남편의 아이라고 말한다. 남편은 최근 소원해진 부부 사이가 염려되던 차에 너무나 반갑고 기쁘기만 하다. 축하를 위해 샴페인을 주문하고 이제부터 더욱 충만한 동반 관계를 이루자고 말하는 그는 크게 들떠 있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 여인은 임신 사실과는 무관하게 이혼을 원하고 있지만 남편은 여인의 의중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레스토랑은 그런 사담을 나누며 행복해하거나 우울해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한 사내가 웨이터와 시비가 붙었다. 웨이터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억울하기만 한데, 레스토랑의 주인은 손님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웨이터에게는 해고를 통지한다. 더욱 원통해진 웨이터는 망연자실하고 뭐라고 떠들던 사내는 레스토랑을 나선다. 작은 충돌 때문에 어수선했던 레스토랑은 곧 차분해진다. 그런데 잠시 후 웨이터와 싸웠던 그 사내가 돌아와 분노에 찬 모습으로 레스토랑의 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한다. 어린이도 여인의 남편도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고꾸라지고 만다. <비포 더 레인>이 주장하는 바는 아마도 이런 것인 듯하다. 우리가 상대에게 가하는 폭력은 대부분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인데, 앞의 상황에서처럼 그 증오심은 극히 불합리하며 따라서 폭력에 의한 상처는 참으로 허망하다는 것이다. 영화는 런던뿐 아니라 보스니아에서도 그와 같은 비합리적이며 무분별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음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옛 유고 연방(이 영화의 정확한 배경은 유고 연방의 한 지역이던 마케도니아이다)의 땅에서 벌어지는 살상과 폭력과 증오도 같은 맥락임을 보여준다.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명성을 얻은 사진 작가 알렉산더가 고향으로 돌아온다. 16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폭력과 증오심이 일상화된 땅이다. 10대 초반의 아이들도 기관총을 들고 행인 알렉산더에게 어느 편이냐고 위협적으로 질문하니 말이다. 알렉산더는 옛 연인 한나에게서 치명적인 정보를 얻는다. 알렉산더의 사촌을 죽인 소녀 자미라가 한나의 딸이라는 것이다. 알렉산더의 고향 마을은 그리스 정교를 믿는 지역이며 한나와 그의 딸 자미라는 근처 이슬람 마을 사람이다. 두 종교 집단은 극렬히 맞서 있는데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미라를 달아나게 하지만, 적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고향 마을 사람에게 살해된다. 한편, 자미라는 그리스 정교 수도원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젊은 수도사 카릴을 만난다. 카릴은 신의 집에 숨어든 이교도 자미라를 수용하고 보호한다. 그 사실을 폭로할 경우, 수도원 주위를 감시하는 주민들의 손에 자미라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곧 카릴의 행위는 수도원에 의해 발각되고 수도사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 채 쫓겨난다. 이쯤에서 상황이 멈추었다면 그다지 심각한 비극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미라와 카릴은 이슬람 지역으로 안전하게 들어섰지만, 문제는 자미라가 이미 카릴에게 연정을 품은 상태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미라는 카릴을 따라나서려 했고, 이번에는 이교도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미라의 동족이 그녀를 사살하고 만다. 알렉산더와 자미라의 죽음을 통해 영화 <비포 더 레인>은, 옛 유고 연방의 땅에서는 민족적, 종교적 갈등이 가장 추잡하고 잔인한 모습으로 군림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마치 런던의 평화로운 레스토랑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던 그 정신병자처럼, 유고 연방의 사람들은 갑작스레 동족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로 타인을 증오하고 거리낌없이 살상했던 것이다.
옛 유고 연방에서의 내전, 특히 보스니아 내전은 민족애가 얼마나 허망한 결과를 낳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한 국가 울타리 안에서 살던 사람들이 상대에게 무서운 증오심을 품고 끔찍한 폭력을 자행했던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앞에서 보았던 몇몇 국가들의 독립 선포였다. 옛 유고 연방은 3개의 언어, 3개의 종교 그리고 6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였다. 여러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수백 년간 지속된 민족, 종교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포하자 세르비아 공화국 주도의 유고 연방군이 침공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유고 내전 초기에는 세르비아 공화국과 나머지 공화국의 전쟁이었지만, 곧 사정이 달라진다. 각 공화국 내의 세르비아계가 독립에 반대하고 나서면서 문자 그대로의 내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독립을 선언한 대부분의 공화국은 내부로부터의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포하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가 무장 투쟁을 벌이면서 내전 발발 1년 만에 보스니아 지역의 70%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한다. 보스니아에서의 내전은 민족 갈등뿐 아니라 종교 갈등의 측면도 강하다. 이 지역의 인구 분포를 보면 그리스 정교를 믿는 크로아티아계가 18% 정도이다. 각 분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그리고 민족 이익을 앞세워 극렬하게 맞부닥치게 된다. 군사력이 우세한 세르비아계는 군인은 물론이고 민간인까지 다른 민족이라는 이유로 무차별 살상했다. 그 증거로서 종전 후 수없이 많은 민간인 학살 장소와 매장지가 발굴되고 공개되었다. 그리고 국외의 인도주의적 원조의 통로를 끊음으로써 다른 민족들을 고립 봉쇄시켰다. 또한 강제 추방이 잇달았다. 그러나 이런 만행은 비교적 점잖은 편에 속한다. 세르비아계는 단순히 정치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다른 민족과 종교 세력을 완전히 없애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인종 청소와 조직적 강간을 주저없이 자행한다. 1996년 헤이그의 유엔 전범 재판소는 보스니아 내전 기간 동안 세르비아계 군인들이 회교도 부녀자들을 집단적으로 강간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강간의 목적은 다름 아니라 인종 청소, 즉 회교도를 조직적으로 줄이려는 음모였고 상부의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자행되었다는 점도 밝혀졌다. 강간당한 부녀자들은 `강간 수용소`에 수용하여 낙태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낙태가 불가능한 시기가 되어서야 석방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계의 전쟁 영웅 라트코 믈라디치 같은 인물도 보스니아의 백정이라 불리며 전범 재판정에 세워진 이유도 그런 만행을 지휘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내전은 4년 가까이 진행되어 27만 명이 사망했으며 2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고 500개의 마을이 불타고 57개 도시가 반파되었다. 경제적 피해는 약 500억 달러에 이른다. 무엇보다 인종 청소 그리고 집단 강간 등에 의한 정신적 공황 상태와 증오심은 보스니아 내전의 씻을 수 없는 상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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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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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3장 말라리아에 걸린 인디언과 킨키나나무.
키니네(quinine)의 기원은 매우 애매하여 전설인지 사실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유럽에 널리 알려져 있는 바에 의하면 스페인령의 페루 총독의 처 친천(Chinchon)백작부인이 페루산 나무의 껍질 엑스(추출물)로 치료를 했다고 한다. 이 효능에 놀란 부인은 1638년 이 나무껍질을 스페인으로 가지고 돌아와서 키니네의 효용을 유럽에 널리 보급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1942년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는 이 약용나무껍질을 채취한 나무를 '킨키나나무(cinchona)'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이 나무의 이름에 관해서는 두 가지 잘못된 것이 있다. 그 하나는 린네로 친천 백작부인과 관련지어 이름을 붙였다고 했는데 철자를 잘못 알아 처음의 h를 빠뜨린 채 표기했던 것이다. 또 하나, 백작부인은 전혀 말라리아에 걸려있지 않았으며 킨나무의 껍질을 스페인으로 가져오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녀는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콜럼버스의 카르타헤나에서 사망했다. 키니네가 말라리아의 치료에 사용된 최초의 확실한 기록은 1630년경 리마에서 예수회의 선교사에서 사용된 것으로써 그 때문에 린네보다 100년이나 전에 이 약용 나무껍질에는 '예수회 선교사의 나무 껍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 예수회 선교사들이 말라리아에 대한 이 나무껍질의 효능을 인디언에게 배웠는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하기가 불가능하지만 킨키나나무 껍질의 약효가 우연히 발견된 것에 관한 옛 전설은 그럴사하게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열병으로 몸을 휘청거리며 안데스 고지의 정글에서 길을 읽은 한 인디언이 그 주인공이다. 콜롬비아에서 볼리비아에 걸쳐 해발 1,500미터 이상의 온난하고 습도 높은 경사면에는 인디언들이 '키나키나'라고 부르는 여러 종류의 킨키나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 나무 사이를 휘청거리면서 걷던 인디언이 물웅덩이를 발견하여 그 물을 마셨다. 한 모금 마신 물은 입에 몹시 썼는데 그것은 그 물이 겉에 있는 독성분을 가진 킨키나나무의 껍질로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고 목이 타는 듯한 갈증과 열을 다스리는 일이 더 급했다. 그래서 그는 단숨에 물을 마셔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생명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그뿐이 아니라 오히려 열이 내리고 원기가 회복되어 제대로 길을 찾아서 자기네 마을로 돌아갔다. 그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이 기적적으로 회복된 이야기를 했다. 그 후, 인디언들은 심한 열병을 앓으면 킨키나나무의 껍질에서 얻은 추출물을 사용했다. 바로 이 열병이 말라리아이며, 나무껍질에 함유된 화학물질은 키니네였던 것이다. 이 발견 소식은 널리 퍼지고 17세기 초에는 예수회 선교사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원시사회에서도 통찰력만 있으면 우연한 발견이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값진 발견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셈이다.
이 전설의 신빙성을 증명할 수는 없으나 비슷한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결과는 이 전설처럼 운이 좋은 경우도 있었지만 약리작용이 있는 천연의 물질에 처음 접한 사람이 죽거나 해를 입는 그런 경우도 많았던 모양이다. (해설)키니네에 의한 말라리아의 치료는 전염병에 대하여 화학물질을 사용하여 최초로 성공한 예이다(유럽에 키니네를 약으로 소개한 역사와 남미에서 동남아시아로 킨키나나무를 이식한 역사에 관해서는 이책 부록에 나와있는 실버만의 저서를 볼 것). 킨키나나무 껍질 속에 있는 항말라리아 활성물질인 키니네가 프랑스의 화학자 펠르티에와 카벤토에 의해서 분리된 것은 1820년의 일이었으며, 화학구조가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1908년, 그리고 실험실에서 합성된 것은 1944년 이었다(1856년에 키니네 합성의 소박한 시도로부터 시작되는 세렌디피티적 발견 이야기는 제 13장의 윌리엄 퍼킨과 모브의 이야기를 참조할 것). 말라리아는 근년에 선진국에서 살충제에 의한 모기의 발생을 억제하면서 근절시켰는데, 세계적으로 불 때 아직도 넓은 지역에 걸쳐 치명적인 병이다(말라리아 원충은 환자에 감염된 혈액에 있다가 어떤 종류의 모기를 매개로 해서 다른 사람에게 옮겨간다). 역사상에 기록된 모든 정쟁에 의한 사망자의 수보다도 말라리아에 의한 사랑자수가 더 많으며 이 무서운 병을 억제하는 약이나 살충제의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새나 기타 동물에 미치는 살충제의 해가 최근에 강조되고 있으나 살충제를 사용함으로써 구원받은 몇 만이라는 인명을 견주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특히 초기의 것처럼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는 새로운 살충제를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키니네는 국제정치에서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남미산 킨키나나무의 입수난 때문에 세계의 다른 지역, 특히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등에 나무가 이식되었다. 제 1차세계대전 중 키니네의 공급이 중단된 독일은 합성대체품 제조에 전력을 다했다. 그 중에서 성공한 것의 하나가 아테브린(일명, 키나크린)이었다. 제 2차세계대전 중 미국은 북아프리카나 남태평양에 있는 섬들의 정글 등, 말라리아를 매개로 하는 모기의 번식지에서 싸우고 있었으나 킨키나나무 재배지는 일본군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유효한 합성 항 말라리아제를 개발해야 할 필요에 쫓기게 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미국측의 포로가 된 이탈리아 병사가 항말라리아제로 여겨지는 환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환약은 흰색으로 아테브린의 고운 노랑색이 아니었다. 입수된 환약은 미국으로 보내져서 신중하게 분석되었다. 그 결과 그것은 아테브린을 개발한 독일의 같은 연구소에서 만들어졌고 같은 독일의 특허에 의해 감추어진 클로로킨이라는 다른 항말라리아제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약효 실험에서 클로로킨은 키나크린과 같은 양으로도 그 효력은 10배이며 부작용도 적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클로로킨은 흰색이다. 태평양지역의 미군은 당시 키나크린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 약을 개발한 독일 회사의 미국 제휴회사인 윈스롭 사에서 아테브린이라는 상품명으로 납품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 병사는 키나크린이라는 환약을 언제나 복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명한 일본의 라디오 선전원 '도쿄 로즈'가 키나크린은 피부색을 누렇게 할 뿐만 아니라 성불능이 된다고 말하여 이를 믿게 만들었다. 전자는 옳은 말이지만 후자는 틀린 말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이 환약을 복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 때문에 미군이 뉴기니아에 상륙했던 2주일 동안에 전 병력의 95%가 말라리아를 앓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일리노이 대학의 의약연구위원회에서 정부의 항 말라리아 계획에 참가했던 우리는 이 계획의 중요성을 확고하게 인식시키기 의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군사적 의미로 말라리아에 걸린 1,000명의 해병대원은 1,000명의 전사한 해병대원보다도 간호하는 데에 인력이 더 많이 들기 때문에 더 안 좋은 것이라고 들었다. 클로로킨이 아케브린보다도 복용량 당의 효과가 높으며 황달에 걸린 것 같은 현상도 안생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때가 마침 그 무렵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탈리아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아테브린이 아닌 클로로킨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유로는 독일의 약리 테스트 결과 클로로킨 쪽이 효과가 낮았기 때문에 독일군은 추축 연합군인 이탈리아에게는 클로로킨을 제공하고 아테브린은 자신들을 위해서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독일인은 화학자로서는 우수했으나 약리학자로서는 미흡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의 약리 테스트는 클로로킨이 우수한 약이라는 것을 밝혀냈으므로 클로로킨의 개발이 우리의 항말라리아 계획에 우선과제가 되었다. 학위를 취득하고 바로 계획에 참가했던 나는 클로로킨의 새로운 합성법을 개발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독일에서 하는 방법으로는 순수한 클로로킨을 얻기가 어려웠으며, 독일이 클로로킨보다 아테브린을 좋아한 또 하나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지금도 결정적인 실험에서 클로로킨 합성의 중간체인 아름다운 흰색 결정이 비등용액에서 석출되었을 때에 느낀 흥분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클로로킨을 아직 1그램도 합성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나의 연구책임자이던 찰스 C. 프라이스 교수와 나는 열차로 버팔로에 갔다. 거기서 우리는 군대 공급용 약의 대량생산을 목표로 우리의 합성법을 rvah화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생산공장 담당의 화학자와 상담했다. 이 합성법은 대성공을 거두어 프라이스 교수와 나는 미국정부의 이름으로 특허를 취득하여 제 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수 톤의 클로로킨을 이 방법으로 제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때는 병원에서 진행 중인 임상실험에 충분한 양의 약을 공급하기 이해 프라이스 교수 외에 박사급 연구원과 대학원까지 합해서 10여 명이던 항 말라리아 연구그룹 전원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대로 일했다. 금요일 오후 늦게 뉴욕에서 걸려 온 전화에서 약효시험 중인 환자를 위한 약의 재고가 거의 바닥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월요일까지 임시 대용기구로 우리의 할당분을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 땀이 난다. 클로로킨은 제 2차세계대전 중에 합성되어 테스트한 수천 가지에 이르는 신규화합물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클로로킨이나 또 다른 몇 가지의 합성 항말라리아제는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이런 약은 수년간 사용하면 약효가 떨어진다. 이는 말라리아를 전염시키는 모기 중에 이런 약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종류가 출현하기 때문이다. 키니네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내성이 출현하지 않기 때문에 이 천연의 약은 말라리아에 대한 투쟁에서 그 중요성을 읽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소 재미있는 해설을 한 가지 덧붙일까 한다. 영국이 인도를 정치적으로 그토록 오랬동안 지배한 것은 영국인이 진토닉을 매일같이 마신다는 습관이 그 이유라고 한다. 토닉이란 키니네 성분으로서 그 덕분에 영국인은 말라리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한편 통치를 당하는 인도인의 대부분은 이 영국의 음료를 싫어해 말라리아의 열과 쇠약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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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영의정의 청을 거절한 올곧은 부사 정붕
정붕(1469-1512)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운정,호는 신당이다. 성종 17년(1486)에 진사가 되고 성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사인과 사간원 사간을 역임하였다.
무령군 유자광이 간교하고 탐욕한 짓을 하여 방자하였는데, 정붕이 고종사촌간이라 문안하는 예절만은 폐하지 않았으나, 여종을 그 집에 보낼 적에는 반드시 감노끈으로 그 팔을 단단히 묶어서 표시를 하여 보냈다가 돌아오면 그것을 풀어 주었다. 그것은 여종이 아픔을 느껴 급히 갔다가 빨리 돌아와서 그 집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에 곤장을 맞고 영덕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후 교리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아가다가 중도에 병을 핑계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누차 나라의 부름이 있어도 나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사뭇 마음을 놀라게 하는 무서운 일이 있으니, 나의 고향 마을에 물러 나와서 내 마음을 안정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교리로 대궐로 나아가는데, 서각대를 띤 재상이 앞에 있었는데, 그는 기묘사화 주모자의 한 사람인 홍경주였다. 내가 갑자기 마음이 섬뜩해서 몸을 빼 물러 나왔다"
영의정 성희안이 임금에게 아뢰어 정송부사에 제수 하였다. 성희안이 젊은 시절에 정붕과 서로 사이좋게 지냈으므로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이어서 잣과 꿀을 요구하자, 정붕이 회답하였다.
"잣은 높은 산봉우리 맨 꼭대기에 있고 꿀은 민간의 벌통 안에 있으니, 수령된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구하겠습니까"
성희안이 부끄럽게 여기고 사과하였다. 연산군 초기에 정붕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문묘에 있는 신주의 위판이 절로 옮겨지는 꿈을 꾸었다"
이 말대로 연산군이 황음하고 난잡하여 성균관을 잔치하는 장소로 삼고 신주의 위패를 깊은 산중의 절로 옮겨 놓아 제사가 오랫동안 끊겼다. 강혼과 심순문이 모두 가까이하는 기생이 있었는데 정붕이 두 사람에게 경계하였다.
"어서 그들을 멀리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강혼은 그 기생을 버렸고 심순문은 정붕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뒤에 두 기생이 궁중에 선발되어 들어갔는데, 심순문은 마침내 비명에 죽었다. 사람들이 그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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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해마다 이른 봄의 졸업시즌이 되면 신문의 삼면에 오르내리는 것이 '좁은 문'이란 낱말. 까만 가운데 사각모를 쓰고 친지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수많은 학사들이 교문을 나서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직도 좁기만 한 취직의 문. 그래서 훤한 것은 고생문뿐이다. 또한 숱한 말썽을 몰고 오던 중학 진학의 좁은 문은 무시험 진학으로 활짝 열려서 전국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지만 대신 고등학교의 문은 더욱 좁아질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좁은 문'은 성서 '마태복음' 7장 13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가게 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 길로 가는 사람이 많으나 생명에 이르는 문은 작고 그 길이 좁아 그 길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데서 비롯된 것. 즉 신앙에 의하여 참 생명을 찾는 길을 말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안락한 길보다 노력을 요하는 고난의 길이야말로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뜻에서 널리 쓰인다. '앙드레 지드'의 아름다운 작품 '좁은 문'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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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4장 완전한 기쁨을 주는 인생 수업
속 편한 알렉산더 대왕
원정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전전하던 알렉산더 대왕이 국운을 걸고 전 병력을 집결시킨 페르시아의 대군과 가우가멜라에서 맞서게 되었다. 날은 이미 저물었으므로 알렉산더 대왕은 다음날 일전을 치르기로 하고 숙영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적진의 형세를 지켜보던 대왕의 막료 파르메니온 장군이 파랗게 질려 대왕의 막사로 들어왔다.
"큰일났습니다. 적의 병력은 시시각각 증가하고 있습니다. 적진은 마치 불야성 같습니다."
과연 페르시아 진영에는 지원군이 속속 도착하는 중이었다. 적진일대에 타오르는 횃불이 어두운 밤하늘을 새빨갛게 불태웠다. 그러나 막사를 나온 대왕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파르메니온은 참다못해 말했다.
"대왕님, 이 상태로 라면 내일 싸움은 도저히 승산이 없습니다. 당장 야습을 하여 적진을 단숨에 분쇄합시다. 승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자 젊은 대왕은 밝은 얼굴로 돌아다보며 말했다.
"파르메이온. 나는 승리를 도둑질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 허영도 아니고 허세도 아니다. 진정한 페르시아 정복은 페르시아 왕에게 투지를 버리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야습을 하여 이긴다 해도 그는 낮이라면 질 성싶은가 하고 더욱 이를 악물고 달려들 것이다. 그래서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다. 때문에 이 싸움은 밝은 대낮에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가려야 한다. 그러니 그렇게 초조해 하지 말고 내일을 기다리자."
알렉산더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막사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곧 잠든 모양인지 조용한 숨소리가 밖으로 새나왔다. 알렉산더가 고르게 내쉬는 숨소리에서 태산과도 같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가. 사태가 아무리 급변해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대응하는 경지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다. 사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만 확인하면 허둥거릴 이유가 조금도 없다. 돌아다보면 우리의 생활은 너무나 어리석은 허둥거림과 낭패로 가득 차 있다. 아니, 그렇게 가볍게 처신하는 자신을 끈질기게 변호하려는 집념이 뿌리깊이 도사리고 있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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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열번째 이야기 서로 먼저 종을 치겠다고 싸운 성직자와 수도사
어느날 루까노르 백작이 빠뜨로니오에게 이야기했다. "빠뜨로니오, 내 친구와 나는 우리 둘의 명예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오. 나는 혼자서도 그 일을 할 수가 있지만 그가 도착할 때까지 차마 그 일을 할 엄두가 나지 않소.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현명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소." 그래서 빠뜨로니오는 대교회의 성직자들과 파리의 수도사들 사이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교회의 성직자들은 교회의 우두머리인 그들이 새벽 종을 쳐야 한다고 날이면 날마다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들은 교회 성직자들은 공부도 해야 하고 새벽기도도 드려야 하므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지만, 자신들은 그런 일들을 할 필요가 없으므로 자기들이 새벽 종을 쳐야 한다고 반박하였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놓고 큰 소송이 일어났고 이 소송을 위해 양측은 변호사에게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 소송이 오랜 시간 계속되자 교황은 한 추기경에게 어떤 식으로든 이 사건을 해결하라며 모든 문제를 위임했습니다. 추기경은 그간의 소송서류를 가져오도록 시켰습니다. 엄청난 양의 서류를 보고 추기경은 양측에게 그 다음날 판결을 하겠으니 참석을 하라는 통지를 보냈습니다. 이윽고 다음날 양측이 모인 자리에서 추기경은 모든 서류를 태워버리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 소송은 너무나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당신들 모두 많은 돈을 낭비했고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이 소송을 끌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먼저 일어난 사람이 종을 치도록 하십시오."
이야기가 끝나자 빠뜨로니오는 이렇게 얘기했다. "루까노르 백작님, 그 일이 백작님과 친구분, 두 분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지만 우선 백작님께서 해결하실 수 있는 일이라면 친구분을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일을 처리하십시오. 왜냐면 때때로 잘 마무리 될 수 있는 일이 미적거리다 정작 그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땐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 자신에게 크게 유익한 일이면 지체하지 말고 그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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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2부 취재수첩에 묻어둔 광주의 진실
13. 아직도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1980년 5월 21일 새벽 6시, 국제신문 광주사태 특별취재반은 부산시 중구 대교동 본사를 출발해 광주로 떠났다. 취재반은 당시 편집국 이철호 국장(전 상무)의 지시에 따라 편집국 사회2부 기자로 경남도경 출입기자였던 김양우 기자(필자)를 취재반장으로해 사회1부 소속 엄철민 기자(현 삼성그룹 이사), 하동 주재 강용범 기자(현 부산일보 하동 주재기자, 차장), 사진부 김탁돈 기자(현 국제신문 사진부장) 등 모두 4명으로 구성했다. 운전기사 이모가 신문사 취재전용이던 포니 승용차를 몰았다. 취재반은 실은 포니는 남해고속도로를 따라가다 섬진강 다리 위에서 군인들에게 저지당했다. 하동으로 돌아가 하동-구례-곡성을 잇는 18,19번 국도를 따라 광주교도소 부근 고속도로 입구까지 들어갔다. 전남 담양군 창평면 창평리 입구였다. 포니차는 그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바리케이드를 친 군인들은 31사단 산하 5개 예비군교육대대 중 하나인 8004부대였다. 그때 시각이 오후 5시. 새벽 6시에 부산을 떠나 광주 외곽까지 들어오는 데만 무려 11시간이 걸렸다. 광주로 들어갈 구멍은 전혀 없었다. 군경이 광주를 완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이리저리 궁리를 하는 중에 8004부대를 인솔하고 있던 중대장 김모 대위가 다가와 내일 아침 군 작전 도로를 따라 광주시내로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줄 테니 오늘 밤은 창평서 하룻밤 묵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독신인 김 대위는 창평리 민가에 셋방 하나를 얻어 밥은 부대 안에서 먹고 잠은 셋방에서 자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두워지는 판에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 대위 셋방으로 들어가 21일 밤을 보냈다. 김 대위는 광주시내에 있는 31사단 사령부 뒤편인 8005교육대대 대대장 정모 소령과는 절친한 사이니 미리 연락을 해놓으면 군 작전도로를 이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창평서 31사단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30킬로미터라고 했다. 포니 승용차로는 슬슬 쉬면서 달려도 1시간이면 너끈하다고 했다. 검문소 몇 개를 통과해야 하는데 정 소령만 들먹이면 통과되도록 조치를 해 놓겠단다. 당시의 우리 처지로는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김 대위는 같은 부산 출신으로 부산서 온 신문기자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 소령도 부산 사람이었다. 하룻밤 묵은 김 대위 하숙집을 나서다가 우리는 처음으로 광주 희생자의 시체가 담긴 나무관 2개를 보았다. 남자 두 사람이 나무관을 각각 하나씩 실은 리어카를 혼자서 끌고 산으로 올라가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김 대위와 함께 리어카를 산 입구까지 밀어주었다. 나무관에는 하얀 찔레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죽은 사람은 창평리 주민이라고 했다. 행여 보복을 당할까봐 동네사람들은 아무도 나와보지도 않는다고 김 대위가 설명했다. 김 대위가 가르쳐준 대로 군 작전도로를 따라 31사단 후문 쪽 8005부대에 도착하니 미리 연락을 받은 정 소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포니 취재차를 이 부대에 맡겨두고 걸어서 9킬로미터 떨어진 전남도청 앞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시민군 검거 5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루 한 차례씩 도청 앞 광장에서 열렸던 광주 시민궐기대회가 이날 처음 열리고 있었다.
도청 앞 광장까지 9킬로미터를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광주 바깥에서 나돌던 온갖 유언비어들이 모조리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부산 사람이나 부산 경남 번호판을 단 자동차는 보는 대로 박살을 낸다'느니 '부산 경남 사람들이 전라도에 들어갔다가는 맞아 죽는다'느니 '경상도 공수부대 군인들이 데모하던 여학생의 젖가슴을 도려내는 등 만행을 저지르는 통에 사태가 더 악화되었다'느니 '섬진강 다리를 넘어선 전라도 버스가 경상도 사람들에 의해 몽탕 불탔다'느니 하는 소문들은 광주사태의 본질을 흐리려는 의도가 담긴 악의적인 내용이었다. 광주 주위엔 삐라가 하얗게 깔려 있었고 주변 벽에는 대자보들이 어수선하게 나붙어 있었다. 22일 도청 앞 광장에 모인 군중은 약 1만 명 가량 돼 보였다. 시민군 지휘부의 선창에 따라 1만 군중이 외쳐대는 구호가 온 광장을 꽉 메웠다.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가 주된 구호였다. 오후 6시쯤 1차 광주시민궐기대회가 끝났다. 1만 군중은 가랑비를 맞으면서 금남로를 따라 광주역 방향으로 시위행진을 시작했다. 시위군중들이 치켜든 플래카드에는 '살인마 전두환을...'뿐이었다. 우리는 우선 급한 대로 숙소부터 찾았으나 쉽지 않았다. 광주관광호텔은 이미 며칠 전 문을 닫았고 웬만한 여관들도 사태가 악화된 20일을 전후해서 모조리 휴업 중이었다. 한참 헤매다가 겨우 세종장여관을 찾아냈으나 주인 이모씨는 종업원이 없다면서 거절했다. 주인에게 사정사정해서 3층 방 하나를 겨우 얻었다. 식사는 우리가 알아서 해결하고 방만 빌려 잠만 잔다는 조건이었다. 이 방이 22일 밤부터 25일 밤까지 4박 5일을 묵었던 광주도심 숙소였다. 말하자면 세종장여관 305호실이 국제신문 광주사태 특별취재반의 취재본부였던 셈이다. 여관 종업원들은 데모 통에 모두 도망을 가버리고 없었다. 첫 날과 둘째 날을 빼고는 쌀밥을 먹지 못했다. 라면 등 우리가 손닿는대로 해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 여관은 도청 앞 광장서 직선거리로 채 1킬로미터가 안 되는 도심 한복판에 있었다.
23일 아침 광장에 나가 보고서야 우리는 깜짝 놀랐다. 취재기자라고는 일본의 신문, 방송 기자 몇 명과 미국 방송기자 서넛뿐이었다. 내신기자라고는 우리뿐이었다. 광주시내 신문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의 어떤 신문사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시민군 천하 5일동안 광주를 취재한 내신기자는 부산서 온 국제신문 기자뿐이었다. 매일 낮 12시만 되면 시민군이 주최하는 광주시민궐기대회에 1만~1만 5천 명 가량의 광주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외치는 구호 중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는 내용이 가장 섬뜩했다. 광주시민들은 광주사태의 책임자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민군 지휘부는 분수대 위에서 마이크로 하루종일 방송을 했다. 피해상황을 설명하면서 '군인들의 학살만행으로 광주시민 2천 명이 죽고 1천 명이 다쳤으며 2천여 명이 행방불명 상태'라고 방송했다. 또 '2천 명 사망자 중 확인된 시체 1백 구가 상무관에 안치돼 있으니 가족들은 신원을 확인해보라'고 했고 '어디에 묻혔는지 모르는 시체를 발굴하기 위해 시민 여러분들의 제보를 바란다'고도 했다. 시민군 지휘부는 '시민군 중에는 총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으니 군대 경험이 있는 예비군 아저씨들이 자진해서 나와 총기 다루는 법을 가르쳐달라'고도 했다. 우리는 상무관 안에 안치된 1백여 시체를 일일이 확인했다. 급조된 나무관 위에 태극기를 둘렀고 관마다 하얀 찔레꽃을 꽂아둔 것이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이 시체들은 27일 아침까지 근 일주일 동안 상무관에 안치돼 있었다. 시민군 천하 5일 동안 날씨는 유난히도 변덕스러웠다. 어느 날은 한여름 날씨같이 무더워 땀을 뻘뻘 흘리는가 하면 어떤 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면서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게 했다. 이 바람에 26일쯤 되었을 때 시체가 상하는 냄새가 온 광장에 넘쳐 나와 코를 싸매기도 했다. 시민군들은 탈취한 군용트럭, 지프차 들에 흰 페인트로 숫자를 써넣어 용도를 구별했다. 44번 트럭은 시체운반용, 119는 긴급사항 연락용, 48은 부식 등 식품 운반용 등으로 일일이 그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저녁 6시부터 이튿날 새벽 6시까지가 시민군들이 정해놓은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는 뻘건 페인트를 칠한 112번 지프차를 탄 17,8세 가량의 소년 시민군들이 왼팔에 '순찰'이라고 쓴 뻘건 완장을 두르고 소총으로 무장한 채 온 시가를 돌았다. 시민군의 5일 천하 동안 시내는 차량통행이 일절 끊어졌다. 시민군의 트럭이나 지프차 외는 시내버스나 승용차의 통행이 완전히 끊겼다. 자전거, 리어카, 소달구지 따위가 운반수단이었다. 23일 우리는 부산 본사로 기사와 사진을 송고했다. 군부대에 맡겨둔 포니 취재차를 타고 취재반장이 남원까지 나가 본사와 전화통화를 했다. 팀장은 군부대로 다시 돌아와 광주시내로 들어오고 운전사 혼자 포니를 몰고 원고뭉치와 사진 1백 20여 컷을 품에 넣은채 부산으로 향했다. 운전사는 곡성 검문소에서 보안사 요원들에게 잡혔다. 사진 필름은 모조리 압수당했다. 원고는 복사를 한 뒤 되돌려 받았다. 운전사는 본사 편집국장에게 중간에 발각된 사실은 감춘 채 검열이 끝난 원고만 갖다 주었다. 편집국장은 중간에 보안사 요원들이 복사까지 해간 원고를 광주 현지서 곧장 보낸 생생한 기사인 줄 알고 읽었다. 신문검열을 받던 때라 광주서 보낸 기사는 단 한 줄도 기사화 되지는 못했다. 운전사는 본사에서 취가취재비를 수령해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차는 군부대에 맡긴 채 광주시내로 걸어 들어와 우리와 합류했다. 그러나 운전사는 중간서 필름을 압수당한 사실을 끝까지 숨겼다. 압수 사실은 몇 년 뒤에야 알았다. 운전사는 보안사 직원들이 얼마나 겁난 엄포를 놓던지 도무지 입을 열지 못하겠더라고 했다.
유혈충돌로 광주시내의 텔레비전 방송이 끊어지고 없었는데 난데없이 25일 밤 8시 최규하 대통령의 특별담화문 발표가 나왔다. 대통령 담화는 시민군들을 광주를 검거한 폭도로 규정하면서 총을 버리고 자수를 하면 정상을 참작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시민군들에 대한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방송은 30분 가량 계속되었다. 대통령은 시종 원고를 내려다보면서 읽어나갔다. 30분 방송 동안 서너 차례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쳐다보았을 뿐 고개를 수그린 상태였다. 뒤에 알고 보니 최 대통령이 광주 외곽의 계엄사령부 숙소에 머물면서 광주시민만을 위해 특별히 내보낸 방송이었다고 한다. 서울 일간지 기자들도 대통령과 함께 계엄사령부 안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25일 밤의 대통령 특별담화를 보고 26일 밤 안으로 계엄군이 광주시내로 쳐들어올 것으로 판단했다. 전남도청을 검거하고 있는 시민군 핵심 멤버는 약 3백 명이었다. 총으로 무장한, 말하자면 총을 쏠 수 있는 병력이라고는 약 1백 명에 불과했다. 이 정도 '폭도'를 상대로 계엄군은 탱크, 장갑차, 비행기 등 중무기를 동원한, '충정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 탈환작전을 전개했다. 어떻게 보면 모기 잡는 데 장검을 빼든 격이었다. 우스꽝스러웠다. 우리는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세종장여관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26일 오후 3시께 우리는 세종장여관을 떠났다. 31사단 사단사령부 앞 여인숙에 숙소를 정해 26일 밤을 보냈다. 이날 밤도 밤새도록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26일 밤 10시께 시작된 탈환작전은 밤새도록 광주의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조명탄이 터지고 헬리콥터가 뜨고 탱크와 장갑차의 으르렁거리는 소음이 밤새도록 울렸다. 27일 새벽 5시쯤이 돼서야 잠잠해졌다. 우리는 서둘러 여인숙을 나섰다. 전남도청의 현장을 보아야 했다. 9킬로미터를 떠 걸어서 들어갔다. 아직도 작전 중인지 여기저기서 총성이 울렸다. 하늘에는 대형 헬리콥터 5대가 고성능 스피커로 방송을 해대고 있었다.
"광주시민 여러분! 이제는 안심하십시오! 폭도들은 섬멸되었습니다. 공무원 여러분들은 이 방송을 듣는 즉시 직장으로 돌아가십시오!"
골목골목을 돌아 전남도청에 도착한 것이 7시. 거의 2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도청 앞은 계엄군 수천 명이 이미 진주(?)해 있었다. 총성이 멎은 뒤 시내 전체가 숨을 죽인 채 조용한데 스피커의 왕왕거리는 금속성 선무방송과 하얀 삐라가 계엄군의 '개선 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었다. 동족끼리의 살육이 어느새 계엄군의 '혁혁한 전공'으로 둔갑해 있었다. 도청 안마당은 계엄군 병사들이 시민군 시체를 치우느라 한창이었다. 병사 두 명이 한 조가 돼 시체 한 구씩을 끌어다 정문 앞에 대기 중인 4톤 트럭에 던져 올리는 작업이었다. 두 명이 시체의 다리 한 짝씩만 잡아끌고 나오니 머리통이 시멘트 바닥에 닻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바닥을 굴렀다. 어떤 시체는 숨 떨어진 지가 얼마 안 됐는지 피가 연방 철철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카메라를 갖다 대는 걸 저만치 서 본 중위 한 사람이 고함을 벼락같이 질렀다.
"야! 누가 그렇게 운반하라고 그랬어? 한 사람 더 붙어! 머리통을 받쳐들어!" 그래 놓고는 우릴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들은 누구요? 뭘 하는 사람들인데 작전 중인 이곳까지 들어왔소?" 아예 처음부터 반말이었다. 기자인 줄 번연히 알면서 배알이 꼴려 한번 걸어보는 수작인 것 같았다. 갑자기 단말마 같은 고함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야! 이놈들아, 우릴 빨리 죽여라! 이 비겁한 군인 놈들아! 포로를 묶어놓고 때려 죽이는 더러운 놈들아! 전쟁터에서도 포로는 못죽이는 것 아니냐! 이놈들아!" 포승에 묶인 젊은이들 중 한 명이었다. 도청 정문 안 시멘트 바닥에는 방치가 돼 있어 시체거니 하고 눈여겨보지도 않았던 사람 6명이 있었다. 사람을 엎어 전깃줄로 두 팔을 뒤로 돌려 묶고 발목을 이 줄로 함께 묶은 뒤 다시 목까지 칭칭 동여매 두었다. 얼마나 세게 잡아당겨 조였던지 얼굴과 두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몸이 마치 활처럼 뒤쪽으로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네 사람을 전깃줄 하나로 동여매었다. 흡사 굴비를 엮어놓은 형상이었다. 한 줄에 묶인 넷 중 양쪽 끝 둘은 이미 숨이 끊어져 머리가 푹 꺾인 채 시멘트 바닥으로 처박혀 있었다. 바로 그 옆에는 따로 두 사람이 묶인 채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6명 모두 긴 팔 노타이에 여름용 긴 바지를 입고 있었다. 모두 손목시계를 찼던 흔적만 남아있었다. 시계는 중간에 없어진 것 같았다. 대부분 신발을 신지 않았다. 어떤 시체는 양말을 벗은 맨발이었고 한쪽만 걸친 시체도 있었다. 계엄군의 도청 진압에 대항해 총을 들고 싸우다 생포돼 전깃줄로 묶인 뒤 얻어맞아 숨이 떨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건장한 체격들이었다. 넷 모두 키가 180센티미터 이상이었다. 가운데 둘 중 한 명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지 꿈틀꿈틀했다. 다 죽어가는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말도 하지 않았다. 고함을 친 사람은 스무 살쯤 됐을까. 얼핏 봐도 대학생인 듯싶은 젊은이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묶인 채 당하는 고통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그처럼 맑고 순진한 눈빛을 이후에도 본 일이 없다. 지금도 어쩌다 꿈속에서 나타나곤 하는 그 젊은이의 눈빛이 눈에 선하다. 그의 말대로라면 포로로 잡은 시민군을 계엄군들이 묶은 채로 죽였다는 얘기가 된다. 하사관 한 명과 병사 두 명이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버럭 고함을 쳤다.
"야! 이 새끼, 아직 숨이 붙어 있었구나. 까불지 말고 가만있어. 죽여줄 테니까." 구둣발로 짓이기고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두들기는데 금방 피투성이가 돼 얼굴이 푹 꼬꾸라졌다. 그나마 가장 멀쩡한 사람을 짓밟아 죽이려 드는 것이었다. 보다 못해 우리가 옆에서 한마디했다. "이보시오, 군인양반들. 살아 있는 사람이게 그럴 수가 있소? 너무 심하지 않소?" 하사관이 힐끗 돌아보더니 꽥하고 고함을 쳤다. "야, 누가 민간인들을 여기 들여보냈어? 어느 놈이야? 들여보낸 놈이... 야! 빨리 끌어내지 못해?"
우리는 억지로 밀려나왔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총대로 밀어붙이는 걸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 젊은이들은 그 뒤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십중팔구 죽었을 것이다. 이름도 성도 모르니 확인할 길조차 없다.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젊은이가 갑자기 소리를 친 것은 우리 일행이 군인 같지는 않아 구조를 바랐던 것이리라. 포로를 죽이느냐면서 마지막 악을 썼던 게 아닌가 싶다. 이름이고 뭐고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총대에 밀려 튕겨나와 버렸으니 그는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 요행히 그때 죽지 않고 살아 남았더라도 우릴 얼마나 원망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죽어가는 젊은이를 구하기는커녕 항변조차 변변히 할 수 없었던 무기력함이 이때처럼 가슴을 저리게 한 적이 없었다. 인간이 인간을 굴비 엮듯 엮어,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짓이겨 죽이다니... 그 장면이 목격하면서도 총부리에 떠밀려나다니... 16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글로 쓰다니... 인간의 나약함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두 번 다시 기억하기 조차 무서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도청 정문 밖에는 경찰 닭장차가 서너 대 서 있고 포로로 잡힌 시민군 수십 명이 머리에 두 손을 얹은 채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차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트럭에는 나무관이 수십 개 실려 있었다. 상무관 안에 지난 닷새동안 방치해 놓았던 관들을 꺼내 어디론가 옮기려 하는 것 같았다.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통에 실린 관이 몇 개나 되는지, 도청 진입 작전 때 죽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헬리콥터 2대가 도청 앞 광장 한복판에 내려앉았다. 시체를 치우던 군인들이랑 40여 명의 장교와 병사들이 도열해 첫 헬리콥터에서 내리는 사람에게 일제히 거수경례를 붙였다. 전투복 차림의 국방장관이었다. 장관을 수행한 장군들은 별 2개짜리가 1명, 별 1개짜리가 2명으로 별만 4개였다. 두 번째 헬리콥터에서도 별 2개짜리가 1명, 별 1개짜리는 1명으로 별이 3개였다. 도청 앞 광장에는 순식간에 하늘에서 내려앉은 별이 7개나 번쩍거렸다. 대령이 시체 처리 상황 등을 장관에게 차렷자세로 보고하는 동안 장군들의 얼굴 표정은 개선장군의 바로 그것이었다. 두 팔을 양허리에 턱 걸친 채 싱긋이 웃으면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이 자랑스런 장면을 소리쳐 널리 알리지 못해 안달이 나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장관은 지휘봉을 들어 도청 정문 경비실 앞에 쭉 늘어선 도청 직원과 도경 소속 경찰 간부들을 가리켰다.
"저기 줄서 있는 사람들은 뭐야?" 대령이 대답했다. "예, 도청과 도경 직원들입니다." "그래? 지금 뭣 하고 있는 거야?" "10분 전부터 직장복귀 명령에 따라 모인 사람들입니다. 신분증대조를 거쳐 들여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장관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장관을 수행한 장군 한 사람이 경비실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모두들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이게 무슨 꼴들이야. 직장은 사수해야 하는 것 아냐? 죄다 도망가 몇날 며칠을 숨어 있다가 우리 군대가 목숨을 걸고 탈환하고 나니 이제서야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단 말이지. 그래서 되겠어? 다같이 국록을 받아먹는 주제에 한쪽은 피흘려 싸우고 다른 쪽은 집구석에 드러누워 편히들 쉬시다가 나오다니... 이래도 되겠어?"
50~60명 가량의 사람들에게 들으랍시고 퍼붓는 욕설이나 진배없었다. 어느 한 사람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죽을 죄라도 지은 듯 모두들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아무리 계엄령 아래라고는 해도 국방장관 일행이 공무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문자 그대로 안하무인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싶어 옆에서 보고 있던 우리들이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그 장군은 눈을 부릅뜨고 계속 지껄여댔다.
"도경이면 도경국장이 있을 것이고 도청엔 도지사가 나와야 할 것 아냐? 그 사람들은 도착했어?"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 친구들 형편없구먼. 그따위로 놀고 있으니 도청을 폭도 몇 명에게 뺏기는 거 아니겠어?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나면 한번 데리고 와봐. 꼴이라도 한번 봐야겠어." 줄 맨 끝에 서 있던 키 큰 사람이 슬그머니 앞으로 나서 다가왔다. "제가 도경국장입니다. 잘 좀 부탁합니다." 쭈뼛거리면서 두리번거렸다. 도경국장이었다. 다른 한 장군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잠시 노려봤다. "아! 당신이 도경국장이요? 어쩌다 이 지경이 됐소? 도경을 통째로 뺏기다니... 그래 그 동안 어디 있었소?" 서슴없이 반말이었다. 도경국장은 두 손바닥을 비볐다. "이거, 미안합니다. 워낙 데모대가 거세다 보니 경찰력으론 어쩔수가 없었지요. 이만하기 정말 다행입니다." "경찰이 못 막으니 우리가 나선 것 아니오? 됐소! 이젠 들어가 보시오!" 문으로 다가가는 도경국장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 덧붙였다. "야! 도경국장 들어가신다. 신문증이나 잘 챙겨!"
별들의 거드름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제야 광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시민들을 향해 고함을 쳤다.
"야! 저 사람들 광장 쪽으로 모이게 하지 마! 광장 쪽으로 들어오는 길은 모조리 차단해!"
장갑차와 탱크들이 이미 광장 한쪽을 막고 섰다. 트럭 여남은 대가 광장으로 기세 좋게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도경국장은 머리에 기름을 발라 잘 빗어 넘긴 차림이었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이었다. 장군들 앞에서 겸연쩍은 표정으로 굽실거리는 것이 눈에 좀 거슬렸다. 전체적인 인상은 매너도 좋고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는 그런 타입이었다. 비상시국에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귀공자 풍이었다. 노타이 양복 차림에 머리 기름까지 발랐으니 깔끔한 편이었다. 도경국장이 도청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광장에서 빤히 바라보였다. 별 2개짜리 장군이 옆에 선 헌병 대령을 손짓해 불렀다. 무언가 대령에게 지시를 했다. 헌병 대령은 도청 정문 쪽으로 다가가더니 헌병 중위 1명을 불러 뭐라고 지시를 하는 것 같았다. 이럭저럭 10분쯤 지났을까. 활짝 열려져 있던 도청 정문 안에서 헌병 지프차 한 대가 쏜살같이 광장 쪽 바깥으로 달려나왔다. 지프차 뒷자리엔 양쪽으로 헌병 두 사람이 버티고 앉았는데 가운데 앉은 사람은 바로 도경국장이었다. 깜짝 놀라 옆에 선 중위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저 양반은 조금 전에 들어간 도경국장 아닙니까?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중위는 못 들은 척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해서 한 번 더 물었다. "도대체 어찌 된 겁니까?" 그때서야 중위는 마지못해 한마디했다. "보시고도 모르겠습니까? 헌병들이 연행해 가는 것입니다." "헌병들이 왜 도경국장을 연행한다는 겁니까? 무슨 죄를 지었단 말입니까?" 중위는 귀찮은 표정을 잔뜩 지었다. 저만치 다른 곳으로 걸어가면서 한마디했다. "그것까지는 저희들이 잘 모릅니다. 저기 서 계신 장군님께 여쭤보시죠!" 그러나 장군들에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보좌관으로 보이는 젊은 장교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희들끼리 뭔가를 주고받으면서 껄껄 웃고 야단들이었다. 그 판에 기자가 다가가 뭐라고 말을 걸다가는 대답은커녕 총대에 밀려 쫓겨 나오기 십상이었다. 15미터쯤 떨어진 거리인데도 큰 소리로 물어보았다. "장군님! 저희들은 기자들인데요. 헌병들이 왜 도경국장을 잡아갑니까? 무슨 혐의로 연행하는 겁니까?" 헌병 대령을 불러 지시를 했던 육군 소장은 딴전을 부렸다. "아! 그것 말이죠? 그것은 말할 수 없어요! 나중에 공보관을 통해서 일괄 발표를 할 겁니다. 그때 들으면 되지 않겠어요?" 그리고는 이쪽 반응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어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 보안이 허술해서야 어디 쓰겠어! 뭣들 하는 거야?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고 뭣 해!"
장교랑 사병들이 우리를 밀어내려고 우르르 몰려왔다. 우리는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군인들이 다가오기 전에 광장을 벗어나 버렸다. 더 있어본들 마음만 괴로울 뿐이었다. 시민군들의 시체 치우는 장면이나 포승줄에 묶여 개 끌려가듯이 끌려가는 모습밖에 더 볼 것이 없었다. 우리는 광주로 들어갈 때와 똑같은 코스로 부산으로 되돌아왔다. 걸어서 31사단 사령부 앞을 지나 8005부대, 거기서 포니를 타고 군 작전도로를 따라 창평-곡성-구례-하동 코스였다. 광주 들어가기 전 담양군 창평서 하룻밤, 세종장여관서 나흘밤, 31사단 사령부 앞 여인숙서 하룻밤 등 6박 7일을 광주서, 돌아올 때 하동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래서 우리의 광주취재는 모두 7박 8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느낀 시간은 80일이나 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모두들 가면 죽는 줄 알고 겁을 내던 광주행을 그런 식으로 해냈다는 것이 꿈만 같다. 그때는 무슨 호기가 그렇게 대단했던지 겁없이 밀어붙인 배짱이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우리의 광주행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 출신의 장교 두 사람이 우리를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의 광주취재는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후일담도 몇 건 있다.
아무리 계엄령 상태라고는 하지만 광주취재 경험이 너무 아까워 만용을 부렸다가 혼이 났다. 5월 말 국제신문에 방담기사를 쓰고 그것도 모자라 당시 35만 부를 찍던 주간국제에 다시 이 방담기를 전재하는 통에 계엄사가 발칵 뒤집혔다. 기어이 편집국장, 취재반장, 취재기자들이 줄줄이 불려가 이른바 경위서라는 것을 쓰는 곤욕을 치렀다. 두 번째는 광주사태 발생 16년이 지난 1996년 7월 말 팀장이 주축이 돼 하동 강 차장, 사진부 김 부장 등으로 승용차를 타고 1박 2일간 똑같은 코스를 둘러본 뒤 팀장인 김양우 이름으로 '시민군 계엄군'이라는 260페이지 단행본을 1996년 12월 20일자로 발간했다는 점이다. 이 단행본은 서울의 종로서적이 저자에게 5%의 인세를 주기로 하고 초판 2천 부를 찍은 이후 1997년 2월 15일까지 초판 4쇄째를 인쇄했다. 광주 지역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동아, 한겨례 등 전국 40여 일간지, 한경비지니스 등 10여 주간지, WIN 등 4개 월간지, 부산금정구보 등 10여 지역신문, 부산대학보 등 10여 대학신문등에서 서평을 실어 '경상도 기자가 쓴 체험적 광주항쟁의 진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단행본을 아주 좋게 소개해주었다.
광주항쟁은 아직도 미완이다. 단행본 '시민군 계엄군'에도 마지막 장에 별도로 '아직도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는 부분이 들어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씌워진 멍에다. 광주를 체험했던 세대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 '미완의 광주항쟁'을 우리 세대가 끝나기 전에 어떻게 '완성된 광주항쟁'으로 승화시켜 나가느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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