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천황
본뜻 : 천황이란 천지가 아직 열리지 않을 때의 혼돈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파천황은 혼돈 상태를 깨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뜻이다.
바뀐 뜻 : 전에는 아무도 한 적이 없는 큰 일을 처음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는 미증유, 전대미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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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에너지를 이용해서 전기를 일으킨다는 것은 파천황의 일이다 -그가 시작한 새로운 통일 운동은 가히 파천황의 일이다
파투
본뜻 : 화투 놀이에서 패가 맞지 않거나 그 밖의 다른 이유로 판이 깨지는 것을 '파투났다'고 한다. '파투'는 글자 그대로 화투판이 깨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파토났다' '파토쳤다'고 하는 것은 틀린 표현이며, '파투내다' '파투났다'고 해야 한다.
바뀐 뜻 : 화투칠 때 화투의 장수가 부족하거나 차례가 어긋나서 그 판이 무효가 되는 일을 가리킨다.
"보기글"
-한 장이 담요 밑으로 빠지는 바람에 파투가 나 버렸네 -패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고 고의로 파투 내면 안돼
‘경우’ 덜쓰기/최인호
경우(境遇), 경위(涇渭)는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사리나 도리 또는 그것을 가리는 힘’을 일컬을 때 그렇다. 경위(經緯)는 ‘날줄·씨줄’에다 ‘일의 앞뒤 됨됨이’를 가리킨다. ‘경우가 밝은 사람’ ‘경우에 어긋나는 행동’ ‘그런 경우가 어딨냐’에서 ‘경우’는 ‘경위’(逕渭)로도 쓸 수 있다. ‘경위서·경위를 밝히다’에서는 경위(經緯)가 된다. 전통 국어사전에서는 ‘경우’와 ‘경위’가 섞갈려 쓰이면서 ‘경우’에 ‘이치·도리’란 뜻이 덧붙어 쓰이는 것으로 보는데, <표준국어대사전>은 ‘경우’의 첫째 뜻으로 ‘사리나 도리’라 풀고 있다.
요즘은 이런 쓰임조차 잘 보이잖고 “그 경우, -의 경우, -ㄴ(-은·-는) 경우, -ㄹ 경우”로 써댄다. “만일의 경우, 최악의 경우, 대개의 경우, 이런 경우, 비가 올 경우 …” 들이 그렇다. 그 까닭은 뭔가? 우스개로 한상범 님(헌법학) 말을 한마디 딴다. “민사소송법의 대가로 통했고 대학 교수와 대법원장을 역임한 이아무개는 동경대학 교수 가네코 하지매의 책을 번역하면서, 우리말로 ‘경우’라는 뜻의 일본말인 ‘장합’(場合)을 그대로 한자 ‘장합’(場合)이라 옮겨 수험생들이 ‘장합’이란 법률용어가 무엇인지 몰라 쩔쩔매게 했다.”(내가 겪은 격동 60년)
일본말 ‘-の 場合’을 ‘-의 경우’로 번역하면서 ‘-ㄴ 경우, -ㄹ 경우’ 들로 급속히 번져 쓰게 됐으며, 이는 또 영어(case, in case, an occasion, time, circumstances, conditions, situation, an instance)를 마냥 ‘경우’나 ‘-의 경우’ 로 공부한 까닭에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쓴다. 사실 ‘-의 경우’가 아예 필요 없거나(만일의 경우, 대개의 경우 → 만일, 대개), 이음끝으로 쓰거나(비가 올 경우, 실패할 경우 → 비가 오면, 실패하면), 주격토 ‘은·는’으로 바꿔(전자의 경우 → 전자는·앞은) 쓰면 자연스럽다. ‘경우’를 ‘때’로 바꾸는 것도 좋은 방식이다.(최악의 경우, 저런 경우 → 최악일 때, 저런 때)
△ 조정규정 제3조 제1항에 의거하여 도메인이름 분쟁조정 신청서를 제출하는 경우에는 별지 1호의 서식을 따라야 한다. 법인의 경우에는 법인등기등본과 대표자 주민등록등본, 개인인 경우에는 주민등록등본 등 → 조정규정 제3조 1항을 근거로 도메인 이름 분쟁조정 신청서를 낼 때는 별지 ~. 법인이면 법인등기등본과 ~, 개인은 주민등록등본 등.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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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20세기가 남긴 비극의 땅, 유고슬라비아
옛날에 `한` 나라가 있었네
50년 남짓 사이에 국가가 세 번 무너져 내린 발칸 반도의 현대사를 그린 영화가 <언더그라운드>이다. 유고의 사라예보 출신인 에밀 쿠스투리차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1995년 칸 영화제의 그랑프리를 수상한 화제작이다. 영화 <언더그라운드>는 1941년에서 1991년까지의 유고슬라비아가 배경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설명한 독일의 침공부터 사회주의 유고 연방의 해체와 내전의 발발까지를 앵글에 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두 남자이다. 블래키는 만화적인 캐릭터의 인물로서 매사를 거침없는 저돌성으로 돌파한다. 1941년 독일 폭격기가 유고를 폭격하는데, 그 아비규환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아랑곳없이 식사를 끝마칠 정도이고, 폭격에 전등이 떨어지면 감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전깃줄을 이빨로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리는 `터프 가이`이다. 또한 만삭인 아내의 만류를 사뿐히 뚫고 정부 안젤리나에게 가 사랑을 전하는 로맨틱한 `플레이 보이`이다. 사회 법규도 그를 제어하지는 못한다. 독일군의 군수 물자를 털어 돈을 벌어들이는데 이런 무법자의 모습을 사람들이 오해한다. 즉 블래키가 매일 밤 독일군을 무찌르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위대한 독립 영웅인 줄만 안다. 블래키의 절친한 친구 마르코가 영화 <언더그라운드>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항상 블래키와 단짝이던 그는 곧 화해할 수 없는 경쟁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먼저 친구 블래키의 정부인 안젤리나를 가로챈다. 그리고 블래키를 비롯한 수십 명의 사람들을 지하실에 몰아넣고 침략자 독일을 물리치는 데 쓰일 군수 물자를 만들라고 종용한다. 자신은 그 물자를 빨치산에게 전달하는 책임을 맡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 투쟁과는 무관하고 어디까지나 마르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계략이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유고의 대독일 전쟁은 몇 년 후 종결되며 1946년에는 티토가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 독립 영웅으로 알려진 마르코는 티토정권에서 높은 관직을 얻고 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블래키도 전쟁 영웅으로 추앙되지만, 사람들은 그가 독립 투쟁 과정에서 숨졌다고 여기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블래키는 여전히 지하에 숨어 있었다. 그곳에서 군수 물자를 만들며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가 공습 사이렌소리와 폭격음을 규칙적으로 들려 주고, 마르코와 안젤리나가 가끔씩 내려와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서 방금 독일군의 고문을 받았노라고 연기하는 바람에 지하실의 사람들은 감쪽같이 속았다. 이런 속임수는 20년간 지속되고 마르코는 지하의 사람들이 만든 군수 물자를 암거래하면서 개인적 부를 쌓는다. 그런데 1961년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지하에 숨어 있던 무리 중 블래키와 그의 아들이 빠져나온 것이다. 그들은 독일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싶어 안달이 난 인물들이다. 우연히 그들은 대독일 독립 투쟁을 그리는 영화 촬영 현장에 당도하게 되고, 수많은 독일군을 발견하고는 신나게 살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껏해야 엑스트라들을 살해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곧 블래키의 아들은 블래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익사하여 강물에 떠내려가 버린다. 이제 블래키는 아들을 찾아 유고 영토를 수십 년간 휘젓고 다니기 시작한다. 블래키 부자와 함께 원숭이 한 마리도 지하에서 빠져나왔는데, 그 원숭이를 찾기 위해 마르코의 동생 이반도 지상의 세계로 나온다. 이반은 사랑하는 원숭이를 찾아서 유럽 대륙을 뒤지게 된다. 영화는 순식간에 1961년에서 1991년으로 시간 이동을 한다. 블래키는 여전히 아들을 찾아 헤매고 있지만 아들이 죽었으니 찾을 방도가 전혀없는 것은 당연하다. 당시 유고의 상황은 사회주의 유고 연방이 해체되고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블래키는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본능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그는 죽은 아들을 찾으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반면, 천신만고 끝에 원숭이를 찾아 낸 이반은 모든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들이 지하에서 무기를 만들어 내는 동안 조국은 벌써 사회주의 체제로 재건되었음을 알아 낸다. 그리고 자신이 현재 목격하고 있는 아비규환의 전쟁은 대독일 독립 투쟁이 아니라, 한 국가를 이루었던 민족간의 싸움이라는 것도 확인한다. 이반을 절망하게 만든 것은 형 마르코와 안젤리나의 죄악상이다. 마르코가 모든 진실을 은폐했으며 지하의 사람들은 마르코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당했음을 알았을 때 이반은 무너져 내린다. 주요 등장 인물들이 모두 사망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보스니아 내전의 현장에서 마르코와 안젤리나를 만난 이반은 그들을 질책하고 저주하다가 교회의 종에 목을 매달고 자살한다. 그리고 군인들이 마르코와 안젤리나를 총살하고 그들의 몸에 불을 지른다. 마지막으로 블래키는 아들의 환영이 비친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죽음을 맞는다.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을 기대했다면, 관객들은다소 의아해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언더그라운드>가 어색한 코미디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가 나면 머리로 술병을 박살내는 마르코, 그리고 너무나 자주 목을 매다는 이반, 전기 고문에 머리칼이 곤두선 블래키의 모습 등이 그것이다. 우스꽝스런 상황과 연기에 관객들은 자주 실소하게 되고, 그래서 이 영화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있는지 또는 유고 역사를 아프게 느끼고나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영화의 소재와 형식이 어긋나는 것만 같아 품게 될 그런 의구심을 해소하게 하는 설명(강영희, <씨네21> 제37호)이 그래서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글은 우선 과장되고 우스꽝스런 연기가 관객의 감정적 몰입을 막는다고 설명한다. 영화 <언더그라운드>의 관객은 주인공의 엉뚱한 모습을 동일시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들을 동정하기도 힘들다. 감독은 관객과 영화의 동일시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관객들이 발칸인들의 불합리하고 부질없는 욕구를 한발짝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도록 의도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기조가 코미디의 형식을 취한 것도 그와 유사한 의미가 있다는 게 이 글의 설명이다. 우리는 비극적 상황을 묘사하는 영화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 영화에서 감독은 등장 인물을 비난하고 고발하는 태도를 취하기 쉽다. 그럴 때 감독은 영화 속의 비극에 아무런 책임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만일 에밀 쿠스투리차 감독이 <언더그라운드>에서 발칸인들을 비난하고 나섰다면 감독은 무의식 중에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더그라운드>의 감독은 영화 속의 참상에 어떤 비난도 퍼붓지 않았다. 따라서 자기 변호를 철저히 배제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감독 자신이 유고의 비극을 초래한 공모자 중 하나라고 고해하고 있다는 게 이 글의 해석이다. 이런 설명은 까다롭기는 하지만, 좀체 파악하기 힘든 연출 의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와 도움을 준다. 하지만 유고 역사, 특히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설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언더그라운드>가 여전히 미진한 것은 사실이다. 사전 지식없이 <언더그라운드>를 관람하는 경우라면 도대체 유고에서의 전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 전쟁의 비극성은 어떤 것인지 실감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1991년의 내전 발발 즈음에서 멈추기 때문에, 특히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지식은 독학을 통해 얻어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독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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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2부 취재수첩에 묻어둔 광주의 진실
12. 금남로 아리랑
1980년 5월 17일 오후 4시경. 토요일 오후였지만 정국은 초긴장 상태였고 그래서 사회부 기자들은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나는 이화여대 학생회관에서 열린 전국대학총학생회장회의를 취재 중이었다. 학생들의 시위자제 결정에도 불구, 이날 계엄령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돌연 확대되자 전국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은 그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계엄확대 발표는 군부의 저의를 드러낸 조처였던 만큼 여기에 대응하는 학생대표들의 강온 양론은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이화여대 주변엔 이미 회의 참가자들을 전원 체포하려는 군경 포위망이 좁혀들고 있었다. 학교 안팎에서 진행되는 이같은 팽팽한 위기의식을 감지한 당시 정의숙 이화여대 총장은 계엄사와 보안사를 오가며 중재에 나섰지만 군부의 전원검거 방침이 워낙 강경해 낙심에 찬 모습이었다. 곧 닥칠 검거조의 회의장 진입을 예상한 정 총장은 자신의 중재 노력이 역부족임을 자인하며 입술을 떨었다. 동시에 정 총장의 표정에선 군부의 속셈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덫 속에 갇혀 논의만 계속하는 학생들의 미련함을 원망하는 빛도 엿보이는 듯했다.
"방법이 없다. 그들(군부)은 요지부동,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다."
보안사에서 막 돌아온 정 총장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본사로부터 무전연락이 왔다. 이상하 사회부장이었다.
"광주가 심상찮다. 곧바로 광주로 가라."
나는 전국대학총학생회장회의 취재를 다른 기자들에게 맡기고 그 길로 광주로 향했다. 내가 광주에 도착한 것은 밤 9시를 조금 넘은 시각. 시내 전역엔 이미 야간통행금지가 실시 중이었다. 곳곳의 검문 바리케이드를 가까스로 통과, 전남도경 정보과로 뛰어올라갔을 때 정보과 형사들은 책상에 둘러서거나 위에 올라앉아 깡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미 끝났다. (군부의)속셈이 뻔하지 않은가." "3김씨도, 학생들도 왜 이럴 줄 진작 몰랐을까." "알고 대처한다고 될 일이야? 처음부터 정해진 코스대로 가는 건데..." "내일 오전 10시 금남로에 모이자는 얘기가 시내에 쫙 퍼졌는데 이를 어쩌면 좋아?" "왜 하필이면 광주냐?"
그들은 전남대 안팎에서 벌어졌던 시위대에 대한 과잉폭력진압등 이날 낮의 광주 상황과 돌아가는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 육감적으로 뭔가 파국이 닥쳐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눈치였다. 정보과 직원들의 주기 어린 대화 속엔 자조, 한탄, 원망, 울분, 절망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도청 근처 식당 풍경은 더욱 긴장돼 있었다. 기자일행(사진기자, 취재차 운전사)이 동아일보 서울 본사에서 출장나온 취재진이라는 것을 안 식당 안 분위기는 금방 시국성토장으로 변했다.
"데모가 진정국면에 들어갔는데 계엄은 왜 확대해?" "학교로 돌아가는 전남대 시위대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팰 수 있는 거냐?" "이럴 줄 알았다면 부마사태 때 우리도 일어났어야 해. 길 닦아 놓으면 뭐 지나간다고 유신독재 자빠지니까 군인이 총칼 들고 나오다니... 전두환이 이 참에 정권을 먹으려는 게 뻔하지 않은가?"
식당 주인, 손님, 옆가게 아저씨, 길 가던 행인 등 금세 20여 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팔을 걷고 '오전 10시 금남로'를 기다렸다. '광주가 심상찮다'는 취재명령의 의미가 확연해지는 순간들이었다.
18일 오전 10시. 일요일인데도 금남로엔 시민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으며 비장한 눈빛들로 긴장감이 팽배했다. 어느 길모퉁이에선가 '계엄철폐' 구호가 외쳐지자 길가 건물 가게 골목에서 시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연행자 석방, 정치일정 공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전날 발생한 전남대생들에 대한 폭거의 책임 규명 및 사과를 요구했다. 광주 도심에서의 시위는 이렇게 시작돼 처음 한동안은 진압경찰과 시위대가 금남로와 충장로를 쫓고 쫓기는 형태로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날 점심시간을 전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직장인, 시민 들이 대규모로 시위에 가담하면서 시위 양상은 달라졌다. 진압경찰이 시위대에 수적으로 크게 밀리면서 금남로는 아예 시위의 거리로 변해버렸고 시민들은 노상에 연좌농성 자세로 돌입했다. 바로 그 즈음 시민들이 운집한 금남로의 양끝 쪽에 공수대원으로 구성된 계엄군을 실은 군 트럭들이 속속 집결, 곧 시위대 중심부를 향해 포위공격에 돌입했다. 군인들은 방망이로 시위대의 머리와 어깨를 무차별 가격했고 남녀 구분 없이 군홧발로 짓이겨 금남로 일대는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시위대 중에서도 계엄군으로부터 뜻밖의 무차별 공격을 당하자 돌멩이나 화염병으로 반격을 가하는 맹렬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끝까지 추격당해 소총 개머리판이나 군홧발에 짓뭉개져 널브러졌다. 계엄확대와 전남대 시위 과잉진압에 항의하려던 시민들의 순진한 생각은 너무나 엄청난 폭력 앞에 박살나 버린 것이다. 광주시민들은 이날의 일을 '군의 시민에 대한 적대공격행위'로 간주했으며 저마다의 가슴속엔 "국군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라는 분노로 들끓었다.광주항쟁을 취재하면서 내 자신이 기자로서 갖추어야 할 표현력의 부족을 얼마나 한탄했는지 모른다. 글이나 말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사실도 그때 뼈저리게 체험했다. 시민에 대한 군의 백주도발이 자행된 후 광주시위는 매일 군과 시민이 맞부딪쳐 살육전과 같은 형태로 전개됐다. 이 과정에서 취재기자가 시내 곳곳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시위진압이란 데모군중에게 제한된 공격을 가하거나 위협을 느끼게 함으로써 운집한 군중을 해산하는 형태였던 데 반해 광주의 상황은 전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계엄군이 금남로에 나타나 시위시민과 맞부닥뜨리면 우선 시민과 계엄군 간의 경계선이 없어졌다.
즉, 계엄군은 콩을 땅바닥에 뿌렸을 때 사방으로 튀는 것같이 각개 약진으로 시민 속에 침투, 남녀노소 닥치는 대로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특히, 젊은 여성이나 양복이라도 반반히 입은 청년들에 대한 계엄군의 폭행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 청년이 계엄군에 발각되면 일단 워커발로 짓이기고 몽둥이 찜질을 한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청년이 달아나면 끝까지 추적, 그 청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더 이상 운신을 못할 때까지 갖은 폭력을 행사했다. 내가 목격한 장면 중 한 청년은 금남로 중간에서 계엄군에게 붙들려 얻어맞다 옆 골목으로 도주해 무등고시학원으로 도피했는데, 뒤쫓던 계엄군은 고시학원 계단 위를 무장한 채 따라가기에는 거추장스러워지자 소총에 장착된 대검을 뽑아 청년의 등뒤에 던졌다. 이어 합류한 한 무리의 병력은 학원 안에서 공부하고 있던 수험생들을 무자비하게 내갈겼다. 젊은 여성들의 경우 계엄군은 다짜고짜 블라우스 등을 찢어 걷어내거나 대검으로 바지와 치맛자락을 찢어 여자를 거의 나체 상태로 만든 다음 폭행을 가했는데, 방망이나 구둣발길이 날아가는 신체의 부위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시위군중 속에서도 이처럼 젊은 여자, 청년, 또는 돌멩이 등으로 반격을 가하는 시민에 대해서는 계엄군이 군중 속은 물론 길을 건너고 골목을 돌아 지하실이나 가게 안, 심지어 가정집 안방까지 추적하며 끝까지 초주검을 만들었다. 기자로서는 이같은 행위를 적절히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만행, 폭거, 무차별 공격 등의 단어는 너무 밋밋해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단어는 '인간사냥'이었다(이 용어는 당시 계엄사의 언론검열로 신문에 활자화되지는 않았으나 광주사태의 참상을 전하는 표현 중에 널리 이용되고 있음을 그후 쭉 보아왔다). 또 젊은 여자, 그것도 옷맵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들에 집중되었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등의 표현들이 얼핏 떠올랐으나 그것 역시 광주 상황을 전하기엔 적절치 못하였다.
내가 기자로서 표현력의 한계를 느낀 것은 본사 이상하 부장에게 매일 상황보고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광주 전역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상황을 기자 혼자로는 다 커버할 수가 없었고, 또 당시 경찰은 시내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보고체계도 갖춰놓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일단 내가 바삐 그리고 열심히 여러 곳을 움직이면서 직접 본 상황만을 중심으로 기사작성을 하기로 작성했다. 하지만 당시 광주의 상황은 나로서는(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미증유의 일들이었기 때문에 시시각각 너무나 처절하게 그리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본사 데스크에 전화로 전달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상하 부장과 통화할 때 광주의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3.15 마산의거 당시를 100분위의 지진계로 말한다면 40도다(본인은 경남 출신이다). 사북사태는 45도며, 부마사태는 60도선이다. 그러나 지금 광주는 그 지진계의 바늘이 100도를 때려 부러진 상태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시위의 성격을 가장 적나라하게 대변하는 노래는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이었다. 이것은 광주시위가 일부의식화된 대학생이나 사회단체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각계각층 남녀노소 모두가 봉기한 것임을 가장 잘 나타냈다. 광주시위가 연일 격화되면서 시위군중들은 온갖 구호를 외치고 자유성토를 했지만 그래도 하나의 목적으로 움직이는 군중의 형태였던 만큼 뜻을 집결하고 추스를 수 있는 노래가 필요한 듯했다. 이때 일부 대학생들이 당시 대학가에서 불려지던 데모가들을 선창했지만 시위대의 호응은 시원찮았다. 그래서 계엄군과 시민이 격돌하기 시작한 이후 초기에 가장 많이 등장한 노래는 애국가였다. 시위대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거나 연좌농성을 벌이다 다시 가두시위에 나설 때의 결의를 재충전하는 의미 겸 각자의 맹세를 다짐하는 의미로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애국가 하나만으론 연일 그리고 밤낮 24시간 계속되는 시위에는 부족함이 많아 여러 국민가요나 민요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모든 시위군중이 가장 손쉽게 그리고 입을 모아 부를 수 있는 노래로는 단연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이었다. 이 노래만은 넥타이군, 시장상인, 노동자, 농민, 학생, 부녀자 할 것 없이 광주시내에 모인 모든 사람이 누구나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는 대표적 민요 아리랑이 갖는 그토록 피끓는 전율을 광주에서 처음 느꼈다. 단전단수로 광주 전역이 암흑천지로 변하고 방송국, 파출소 등이 불타 시내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가운데 광주 외곽으로부터 도청 앞 광장으로 손에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드는 군중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을 깜깜한 도청 옥상에서 혼자 들으며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내 피 속에 무엇인가 격렬히 움직이는 전율을 느끼며 얼마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리랑은 애잔한 음률이 전하는 서정보다 더 강렬한 욕구와 울분, 그리고 불타는 전의를 함축하고 있음을 처음 느꼈다. 나는 그래서 광주민주항쟁의 성격을 대변하는 상징물이 있다면 당시 광주시민들이 밤낮 불러 외쳤던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이라는 두 노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던 각계각층 남녀노소 일상의 광주시민이 군의 상상 밖 도발로 함께 어우러졌다는 시위구성체의 특징을 말해준다. 또 광주항쟁이 특정 정권이나 정파 또는 색깔이나 깃발에 항거하거나 따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민초들이 국가란 무엇이며 국군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단순한 물음에서 출발한 봉기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광주항쟁 당시 시위대를 이끄는 사람을 여럿 만났으나 이 사람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전옥주씨다. 이미 전씨의 당시 행적과 활동은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철저하던 시위현장에서 내가 만난 전씨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는 단호했고 논리정연했으며 격정적이었고 선동적이었다. 시위 도중 나는 그를 늘 보았지만 세 번에 걸쳐 시위 현장에서 즉흥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시위대와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는 격돌의 현장에서 그를 만난 취재기자는 아마 나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금남로에서 한바탕의 시가혈전이 끝난 다음 시위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 그에게 인터뷰를 신청하자 그는 처음 나를 경계했다. 당시 세태가 그러했듯 기자, 특히 지방 주재기자에 대한 현지인들의 불신은 대단했다. 더구나 외부와의 정보통신 및 언론보도가 완전 차단되어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당시 광주에서는 기자 불신이 더욱 심했다. 특히 나는 시위대는 물론 계엄군과 경찰병력 사이를 오가며 취재하던 중이었고, 유독 나 혼자 '동아일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하이버와 취재완장, 방독마스크까지 착용한 '취재 중무장' 차림이었다. 내가 신분을 밝히며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서울 본사 기자임을 입증하는 신분증과 취재수첩의 제시를 요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인터뷰가 시작되자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조선대 무용과를 나와 현재 경남 마산에서 무용학원을 하고 있다. 애인과 함께 장성호에 낚시를 왔다가 군인들이 광주시민을 죽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나는 정치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그러나 국군이 양민을 이렇게 개 패듯 패고 죽일 수 있는가. 군과 시민 사이에 불신과 적대감이 있다면 나라는 끝장이다. 지금이라도 책임질 위치에 있는 사람이 군의 광주시민에 대한 도발에 대해 사과를 한다면 나는 바로 마산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터뷰가 무르익어 가면서 나는 그가 지극히 나약한 한 여자이자 엄청난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시위대 속에 어떤 군 첩자가 들어와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시민 대열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이탈하면 저격당하거나 끌려갈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시민 속에서 먹고 자고 용변도 옷을 입은 채 본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멜빵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자기의 엉덩이께 바지춤을 직접 만져보라고 내밀었다. 내가 바지춤을 쥐었을 때 실제 옷은 눅눅히 젖어 있었고 배설물이 반고체 상태로 엉켜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과 머리에서는 며칠째 양치질과 세수도 못한 탓에 악취가 풍겼다. 나는 전씨가 그후 고정간첩으로 계엄당국에 체포되었다가 고초를 겪은 뒤 풀려난 것 등 신문, 잡지를 통해 간간이 그의 근황을 접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녀에 대해 아는 바도, 또 이후에 더 알게 된 바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 기억되는 전옥주씨는 처음부터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광주시위에 뛰어든 사람이 아니라 시민이면 누구나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없는 그런 열정으로 앞장서게 된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그런 시민은 있게 마련이다. 또 그런 사람의 작은 손과 목소리에 의해 역사가 이끌어지고 창조될 수 도 있다고 생각한다. 광주항쟁을 취재하면서 나는 가장 오랜 시간 배고픔을 참아야했고 또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리고 허기와 죽음 같은 극한 상황은 사람을 때로 당돌하고 용감하게도 만들지만 때로는 초월적 해탈의 경지에도 이르게 함을 절감했다. 내가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계엄군의 고장난 탱크를 에워싸고 시민들이 포위 대치하고 있는 현장을 취재할 때 내가 탄 취재차가 시민들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당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탱크 위에서 LMG기관총으로 정조준을 하고 있는 육군 중위의 접근명령을 받고 어쩔 수 없이 탱크 앞에 다가갔다. 중위는 "상무대 앞 본부에 탱크 고장사실을 전해달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런 다음 내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시민들은 나를 계엄군의 첩자 내지 조력자로 오인,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취재차가 화염에 휩싸이자 운전사는 당황한 나머지 오른쪽 시장골목에 운집해 있는 군중 속으로 핸들을 꺾었다. 순간 만약 우리 취재차에 시민 한 사람이라도 다치면 나와 운전사의 생명은 물론이거니와 취재기자로서의 마지막 죽음이 '계엄군의 첩자'로 각인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화염에 싸인 차속에서 필사적으로 핸들을 반대편으로 꺾었고 바로 그때 지옥처럼 우리 앞에 나타난 철제 바리케이드를 군중 속의 한 고교생이 튀어나와 열어주었다. 우리는 불길에 싸여 가까스로 빠져나왔으나 뒤편에서 찢어지는 총격음과 함께 그 고교생은 길바닥에 피를 튀기며 나뒹굴었다. 마음이야 어떠했든 중립적 방관자이거나 기껏 현장 목격자일 뿐 당시 광주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기자 일생을 위해 그 고교생은 죽어간 것이다(이 고교생은 당시 조대부고 3년 김영찬군으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중상을 입었다가 회복되었음-편집자). 도청 앞 심야시위 중 함평경찰서 소속 진압경찰관 4명이 시위군 중 한 명이 몰고 돌진하는 버스에 치여 죽음을 당할 당시에도 죽음은 간발의 차로 나를 비켜갔다.
격렬한 시위 공방전 끝에 시위대도 진압경찰도 기진맥진하여 모두 길바닥에 드러누워 소강상태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진압경찰대 맨 앞에서 네 번째 열에 하이버를 땅바닥에 놓고 그 위에 올라앉은 채 졸고 있었다. 비몽사몽간 잠에 빠졌는데 하이버에 맞닿은 엉덩이 꼬리뼈가 너무 아파 잠에 취한 상태로 뒷걸음질쳐 막 인도 턱에 엉덩이를 내려 놓는 순간 타이어 펑크 소리와 같은 폭발음이 진동했다. 내가 앉아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버스가 돌진해 있었고 이미 여러 명의 경찰이 깔려 눈 깜박할 사이에 숨진 것이다. 산 상태로 사람의 내장이 터질 때의 폭발음이 바로 타이어 펑크 소리와 같았던 것이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전남도청 정문 입구에는 방공호가 있었다. 하루는 밤늦게까지 쫄쫄 굶고 시위현장을 취재한 뒤 지쳐 기진맥진한 나머지 새벽녘에 방공호 속에 들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양 무릎과 어깨 위에 얼음장을 갖다 댄 것 같은 냉기가 느껴져 어슴푸레 눈을 떴다. 방공호의 포구멍에는 어스름한 먼동이 비쳐들었다. 내 어깨와 무릎에 기대진 싸늘한 물체는 얼굴이 짓이겨져 숨진 남자 등 2구의 시체였다. 방공호 속에 기자가 잠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시위 중 맞아 숨지니 시체를 그 속에 갖다 버린 것이다. 그 순간 희미한 의식으로는 옴싹하는 무서움을 느꼈지만 몸은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기가 싫었다. 나는 시체를 밀어내고 그대로 또 한동안 잠이 들었다. 시위가 연일 격렬해지는 만큼 기자의 취재도 그만큼 힘겨워졌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전남도청 앞 방공호에서 군인들에게 짓이겨진 시민시체 2구와 함께 하룻밤을 잔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광주항쟁 당시 나는 이미 사내외 기자들 사이에서 '사태기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부마사태, 사북사태, 10.26, 12.12사태등 그 당시 많기도 했던 역사의 현장에 단골로 투입된 취재기자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상하 부장이 나를 광주항쟁 전야에 서둘러 광주로 보낸 것은 내가 부마사태를 취재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부장은 내가 부마사태를 취재했고 또 영남 출신이기에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런 나의 관점에서 볼 때 광주항쟁은 여타 다른 사태와 명확히 구분되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 부마사태의 경우 위수군이 위협적이고 또 거칠긴 했지만 그런 모든 행동이 시위를 진압, 해산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당시는 유신정권이 건재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권력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판을 엎는 것이 아니라 판을 방어 보호해서 유지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부마사태때 군의 시위진압은 도심의 주요 길목을 차단 확보해서 군중 진압을 저지하거나 모인 군중을 향해 위협을 가해 내쫓는 해산의 형태였다. 그러나 광주는 전혀 달랐다. 계엄군이 나타나면 도청 앞에서 일단 정렬한 뒤 바로 앞 금남로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에는 아랑곳없이 오와 열을 제대로 갖춘 다음 한동안 우렁찬 구호로 총검술 훈련을 했다. 그런 다음 군인들은 한팔 또는 양팔 간격으로 대열을 지어 질서 정연하게 군가를 부르며 시위대를 향해 행진했다. 시위대가 돌을 던지거나 화염병을 던져 소매에 불이 붙었는데도 전혀 대오는 흐트러짐이 없이 군중 속으로 행진했다. 시위대는 자연스레 길 가운데를 비켜주게 되고, 군인들은 금남로 한복판 시위대의 중앙으로 전진했으며 군인들이 행진해 간 빈자리는 다시 시위대가 에워싸는 형태가 되었다. 바로 그때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면 군인들은 일제히 대오를 풀고 사방을 에워싼 시위군중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가 인육 살상과 같은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이는 군중들을 한쪽으로 밀어붙여 외곽으로 해산시키거나 더 이상 군중이 집결하는 것을 차단하는 형태의 진압방식이 아니었다.
또 한 가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당시 광주에 투입된 군인들의 복장이다. 부마사태 때는 투입된 육군과 해병대가 모두 개인무장과 군장을 갖추고 소속부대가 분명했다. 그러나 광주시위 때는 투입 군인들은 계급장을 제외한 명찰, 군부대 마크 등 개개 병사의 신상이나 소속을 식별할 수 있는 군장에 흰 테이프를 붙여 가린 상태였다. 말하자면 계급만 있고 어느 부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군인 복장의 괴한'과 같은 모습이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돌멩이와 화염병이 날아 다니는 시위대 속을 군인들이 행진해 들어갈 때 대오의 맨 앞 선두는 모두 중위급 장교였으며 또 대오의 맨 뒷줄은 헌병 완장을 찬 군인이 저격용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그 총구는 바로 자신들의 대열을 향했다는 점이다. 장교가 각 열의 진두에서 지휘하고, 만약 이탈자가 있다면 배후의 헌병이 처단하겠다는 그런 의사표시가 담긴 대오였던 것이다. 박 대통령이 시해되고 권력의 중심이 모호해졌으며 당시 정권의 향방이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때 광주에서의 계엄군이 보인 형태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시 말해 군부의 저의가 무엇이었는가를 역설적으로 대변했다고 생각한다. 1980년 5월 21일(수요일) 오후 2시, 나는 오른쪽으로 도청 앞 광장, 왼쪽으로는 금남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건물의 3층에 서 있었다. 하기식을 알리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금남로를 메운 시위군중들도 주섬주섬 기립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 시위대 맨 앞쪽 사람들이 등 뒤쪽으로 피를 뿜으며 길바닥에 꼬꾸라졌다. 그런 다음 귀를 찢는 총성들이 들렸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렸을 때 도청 앞 광장에 정렬해 있던 군인들은 맨 앞열이 무릎쏴, 다음 열이 서서쏴 자세로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두 열의 총격이 끝나면 무릎쏴 자세의 대열이 후미로 빠져 트럭을 타고 빠져나가는 그런 교대형태로 광주의 공식적인 집단 발포령은 집행되었다. 당시 내가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았다면 애국가가 집단 발포명령의 신호가 되는 참담한 비극을 증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총알이 총성보다 빠르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그때 금남로 거리에 가로 걸린 '봉축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석탄일 축하 아치와 그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인간 살육이 빚어내는 극과 극 사이의 대조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5월 24일 본사와 연락할 통신수단을 확보할 수 없어 철수를 시작했다. 마닐라 주재 중 투입됐다는 교토통신 사진특파원과 자전거 두 대를 빌려 타고 광주를 빠져나왔다. 우리가 탄 자전거가 전장의 폐허로 변해버린 광주시를 막 벗어나 송정리 쪽으로 들어설 때였다. 길가 가게 앞에 모여 있던 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붙들고 뭐 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내가 두 사람의 신분을 소개하자 그들은 내 팔과 옷소매를 거머쥐고 "서울에 있는 윗사람들은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고 있는가? 신문, 방송사는 도대체 알고 있는 건가, 모르고 있는 건가?"며 울부짖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경상도 사투리가 심하다. 그중 한 아낙네는 "경상도 기자양반이 와서 보기를 잘했소. 서울 가거든 군인들이 광주 사람 다 죽인다고 좀 알려주시오"라고 통곡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광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찻길이 어디쯤에서 끊어졌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가려면 먹을 것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며 삶은 계란, 빵, 사이다 등 먹을 것을 한 보따리나 싸서 자전거 뒤에 매달아 주었다. 바로 그때 머리 위에서는 군용 헬기가 고공비행을 하며 녹음방송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대통령인 최규하올시다. 불과 얼마 전 식수난을 겪고 있는 광주시민을 위해 취수장 기공식에 참석했었는데 오늘 여러분이 이런 불행을 당하고 있다 하니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최규하'... 나는 이런 개념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며 과연 의미가 있는 것들인가 하는 물음을 얼마나 많이 되씹었는지 모른다. 나는 1996년 1월 10일 3년여간의 동아일보 북경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 4.11총선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다. 내가 나선 서울 광진을구는 서울에서 호남 출신 유권자가 가장 많은 곳이다. 2월 초 선거사무실을 차리고 지역구 내 유지급 인사 30여 명을 첫 대면 하였다. 밥자리가 무르익고 이런저런 선거훈수 이야기가 흘러갈 때였다.
"김 위원장, 지금 전, 노 두 대통령 잡아넣어서 재판하는 모습도 득표에 도움이 안 돼요. 특히 이곳엔 호남유권자가 많은데 그들의 표는 한 표도 기대하면 안 됩니다. 사무실과 운동원 중에 그쪽 사람들을 써서도 안 됩니다. 큰일납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호남 사람들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광주사태 때 군인들이 사람을 죽였겠어요. 부마사태 때는 그러지 않았잖아요."
나는 더 이상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내가 몸으로 겪고 직접 본 역사의 현장이 어쩌면 이렇게 왜곡되다 못해 참담하게 훼손되어 있는가 하는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선거를 눈앞에 두고 생소한 곳에 뛰어든 후보의 입장으로서는 대충대충 기분이나 맞추고 호의만 사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한 가지만 간단히 말씀드리겠다. 나는 부마사태 때도 광주항쟁 때도 현장에서 뒹굴며 취재한 기자였다. 부마사태 때는 군인들이 기존의 박 대통령 유신체제를 보호, 유지하기 위해 동원됐던 거라면, 광주사태 때는 주인(대통령)이 없는 정권을 먹기 위해 못된 장군들이 군을 풀어 살상극을 일부러 만든 것이다. 그래야만 그것을 빌미로 하여 정권을 가로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부산, 마산에서는 군인이 데모시민들을 밀어서 내쫓았는데 광주에서는 데모시민들을 도발하고 죽임으로써 집권 시나리오를 위한 계기극을 일부러 만든 것이다. 여러분들이 저를 도와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역사의 비극인 이 점만은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때 광주시민을 죽임으로써 정권을 빼앗은 장본인들인 전, 노씨를 법의 심판대에 세운 개혁작업에 힘을 보태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다."
내가 이렇게 말할 때 방문이 열리면서 조금 전까지 좌석에 합석했다가 먼저 자리를 떴던 50대 중년 한 분이 손을 내저으며 방 안으로 도로 들어왔다. 그도 우리 지역구 내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유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바쁜 선약이 있어 자리를 좀 먼저 뜨려다 도로 들어왔다. 나는 그 동안 광주사태 얘기만 나오면 어느 자리에서건 오늘 같은 분위기 때문에 불편했는데 김 위원장처럼 당시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나는 전남 나주 사람이고 김 위원장은 현장취재기자였다지 않는가. 광주의 진실이 비록 이 작은 자리에서나마 바로 알려져 너무나 통쾌하다."
그는 몇 번이나 나의 손을 잡고 흔들려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의 안경 밑으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광주항쟁 17년이 지났는데도 광주의 진실이 정확히 인식돼 있지 않음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 출신인 나로서는 그런 엄청난 역사의 현실도 왜곡되거나 오염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총선 투표일을 이틀 앞둔 4월 9일 나는 서울 동자초등학교에서 마지막 정당연설을 열었다. 이미 선거 판세는 기울어져 패색이 짙은 때였다. 나는 선거의 승패를 떠나 내 지역구 안의 호남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렇게 외쳤다.
"호남 출신 유권자 여러분! 광주의 한, 호남의 응어리를 정치가 풀어주리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정치인이 해결한다고 믿지 마십시오. 정치와 정치인에 의지하면 여러분의 한과 응어리는 더 굳어질 것이고 80년 광주의 혼불은 오염돼 마침내 퇴색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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