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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54 호
단기 4340. 9. 1 (음력 7. 2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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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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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만 원 고료, 테마수필 제2회 독후감 공모전
자식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시대
지난해 ‘상처’를 주제로 한 첫 테마수필집 「3도 화상」에 대한 독후감 공모전을 시행하여 독자들의 적잖은 성원을 받았던 수필드림팀이, 해드림출판사의 후원 아래 두 번째 테마수필집 「비손」(해드림출판사)도 독후감 공모전을 시행한다. 다만 지난해와는 달리 중고등부와 대학생 이상 일반부로 대상을 구분하여 응모작을 받는다.
테마수필의 독후감 공모전은, 독자의 수필문학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침체된 독서열기와 수필문학 부흥을 꾀하고 인간의 따스한 정서를 추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수필드림팀의 테마수필집은 매회 인간미 넘치는 테마를 주제로 하여 참여 수필가들이 정성을 다하여 쓴 정서적인 양서이다.
독자가 외면하거나 독자가 없는 문학은 의미가 퇴색할 수 있다. 이번 두 번째 테마수필집 「비손」의 말미에는 독자와 더불어 테마수필을 가꾼다는 취지를 살려 김선경?송원석?김세진?윤지영씨 등 일반 독자의 제1회 테마수필집(「3도 화상」) 독후감 당선작 네 편을 실었다.
이번 테마는 ‘어머니’이다 비손이라는 말은 우리 민속어로써 치유나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신에게 두 손으로 비는 일.을 뜻한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는 비손 그 자체이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는 자식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가.
요즘 자식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패륜 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나 충격을 주고 있다. 근래에만 세 건의 유사사건이 신문에 오르내렸다. 수원에서 보험금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한 사건, 자신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살해하고 주검을 암매장한 일산 사건 그리고 지난 6월 노모와 부인을 살해한 보령 사건 등이 그것이다. 이 사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무덤덤하다면 정서상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유의 가치관이 혼탁해질수록 본향을 되돌아 봐야 한다. 공모전이 아니라 해도, 시대의 메마른 정서를 단비처럼 적셔줄 「비손」 그 자체는 어머니와 자식의 천륜을 다시 한 번 새겨봄으로써 청소년뿐만 아니라 중장년층에게도 어머니의 존재가치를 새롭게 인식시킬 것으로 보인다.
1. 응모요령 가. 모집마감 : 2007년 12월 10일 나. 응모대상 : 중고등부/대학생 이상 일반부 다. 접수방법 : 수필드림팀의 테마수필 홈페이지에 회원 가입(연락처기재) 후 테마수필방에 올리면 된다.(부문-중고등부/일반부 표기) 테마수필 홈페이지: http://www.sdt.or.kr/ 라. 분 량 : 원고 12매 내외
2. 심 사 : 테마수필 필진 전원의 점수 누계로 선정
3. 입상자 발표 : 2007년 12월 20일 수필드림팀의 테마수필 홈페이지 게시판
4. 시 상 : 1. 중고등부 대상 400,000원 및 상패 금상 300,000원 및 상패 은상 200,000원 및 상패 동상 100,000원 및 상패
2. 대학생 이상 일반부
대상 1,000,000원 및 상패
(응모작이 적을 경우 수상내역이 변경될 수 있으며, 일반부의 대상이 중고등학생으로 밝혀질 때는 이를 취소하고 다시 선정한다.)
5. 문의 기타
문의전화: 1644-7154 , 기타 테마수필 홈페이지 참조 대상과 금상작은 다음 테마수필 제3집에 특집으로 게재하며 수상자에게 우송함 「비손」은 교보문고와 인터넷 서점인 알라딘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정가는 8천원이다.
후원: 해드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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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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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남을 증오하는 데 왜 그렇게도 고집스럽게 집착하는가? 증오를 떨쳐버릴 경우 그 들은 고통과 씨름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 제임스 볼드윈(미 흑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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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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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무슨 일이든 화끈하게
공부나 일을 할 때에는 화끈하게 성실을 다하여야 한다. 싫증을 내거나 억지로 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 안 된다. 어떤 불행이 내 앞에 닥쳐오면 그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여 스스로 반성하고 잘못을 깨우쳐야 한다. 그럼으로써 밝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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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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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3. 태극 논쟁
4. 태극 논쟁의 사회, 역사적 의의
리를 중시하는 이언적의 철학은 그 리가 창조적이며 능동적 힘을 가진 도덕 근원임을 강조함으로써 도덕을 중시하면서 이 도덕적 이상을 사회에 실현한다는 생각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이언적의 사상을 당시의 사회, 역사적 상황과 연관하여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먼저 긍정적인 면을 보자. 첫째 이언적의 철학은 당시 조정의 권력을 틀어쥐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훈구 세력들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었다. 15-16세기는 조선 왕조 중기에 해당하며 이미 많은 부분에서 사회내의 구조적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때이다. 그러한 문제들은 무오사화부터 을사사화까지 이어진 기성 관료와 사림 사이의 대립이었던 4대 사화로 나타난다. 물론 훗날 을사사화 때 나타난 이언적의 처신에 문제가 있다는 이이의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이언적은 훈구 세력이었던 김안로를 탄핵하다 파직당하기도 했고, 을사사화의 연장이었던 정미사화 때 강계에 유배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상황을 근거로 볼 때 이언적 철학의 중심축인 도덕성 강조는 사림들의 정당성에 대한 근거를 밝혔다는 의미가 있다. 둘째, 그러한 도덕성을 봉건 왕조의 특성과 관련 지어 보면 임금을 바로 잡아 그 임금의 바른 통치를 통해 사회 국가의 도덕성을 회복하려 한 노력이었다. 이언적은 도덕의 현실적 실천자로 임금을 설정하였으며, 따라서 임금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격군론으로 나아갔다. 또한 이 같은 생각은 임금 한 사람의 도덕적 수양만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으며, 실천의 현실적 수혜자를 백성으로 삼음으로써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민본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언적의 사상을 부정적 측면에서 본다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는 기보다 리를 우위에 두는 사고를 바탕으로 개인의 수양을 통한 도덕적 완성을 강조함으로써 관념 지향적 경향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당시 점점 심화되어 가던 사회적 모순들에 대한 대안이 되기에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언적은 인간의 마음을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았다. 리는 바로 그 마음속에 들어 있는 도덕적 능력이었다. 따라서 마음이 모든 가치를 만들어 내는 근본이며 개이이나 사회의 실천 근거라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사회적 문제들을 대할 때에도 그 원인을 구조적인 부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토대를 무시한 채 마음이 절대적 도덕 근원을 깨달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따지는 문제로 나타났다. 따라서 경을 중심으로 수양을 강조하는 논리로 이어졌으며, 임금을 바로잡겠다는 생각도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것으로 귀결하였다. 마음속에서 사사로운 욕심을 제거하기 위한 양심과 존심의 강조는 도덕 지향이라는 점에 있어 이미 관념적 해결이라는 한계를 그 안에 담고 있는 셈이다. 둘째는, 이언적이 강조한 근원적인 도덕을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해 본다면 보수적이며 체계 유지적인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본래 유학의 근원적 도덕률은 현실에서의 강상 윤리이다. 강상 윤리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 친구 사이의 관계 규정이었다. 이것은 유학 사상의 발생 토대였던 종법적 질서가 반영된 것이며, 당시 사회가 봉건적 전제 군주 시대였다는 점에서 지배 논리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논의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이언적의 사상 속에서 중세적 체제를 변화시킬 주장을 찾는 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상은 사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간다. 비록 이언적의 사상 속에 앞에서 살핀 것과 같은 부정적 요소들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사상과 사화의 발전 과정에서 본다면 이러한 도덕의 강조와 그 실천으로서 백성을 수혜자로 두는 것이 전제 왕조와 관료들에 대한 견제 역할을 함으로써 양심적 지식인들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반영해 낸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제한된 조건에서나마 대다수 피지배 민중들의 이익을 보장하려 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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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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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경
본뜻 : 파경은 글자 그대로만 보자면 거울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이 말을 부부가 좋지 않은일로 결별하거나 이혼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본래는 헤어진 부부가 다시 합칠 것을 기약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옛날 중국 진나라가 수나라한테 망할 즈음의 일이다 진나라의 관리였던 서덕언이란 자가 자기 아내에게 두 쪽으로 깨뜨린 거울의 한 쪽을 주며 말했다
"수나라가 쳐들어오면 우린 필시 헤어지게 될 터이니 우리 서로 이 깨진 거울을 증표로 가집시다. 내년 정월 대보름에 장안의 길거리에 내다 팔면 기필코 내가 그대를 만나러 가리다"
이듬해 정월 대보름날 서덕언은 장안에서 어떤 노파가 깨진 거울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서덕언이 품에 품고 있는 자기 거울 반쪽을 맞춰 보니 딱 들어맞았다. 그는 깨진 거울의 뒷면에 자기 심경을 쓴 시를 적어 그 노파 편에 보냈다. 그의 아내는 수나라의 노예가 되어 성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애틋한 소식을 들은 수나라의 귀족이 그녀를 풀어 주어 두 사람은 드디어 재결합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파경은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언약하는 언약의 징표였던 것이다.
바뀐 뜻 : 오늘날에 와서는 본뜻과는 정반대로 부부의 금실이 좋지 않아 이별하게 되는 일, 즉 이혼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보기글" -그 부부는 신혼 초부터 싸우더니 급기야는 이혼이라는 파경을 맞게 되었다 -파경까지 가기 전에 미리 막을 수 있으면 막아야지
파국
본뜻 : 연극에서 쓰는 용어로서 비극적인 종말을 이루는 부분을 '파국'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바뀐 뜻 : 일이 좋지 않게 끝났을 때나 일이 결판나는 판국을 가리킨다.
"보기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였던 그 여자와 그 남자는 끝내 파국을 맞이했다고 하더군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녀가 자살함으로써 그 오래되고 애잔한 삼각 관계는 파국을 맞게 되었지
불구하고?/최인호
말을 이어갈 때는 이음씨끝을 붙여 이음마디를 만들고서 뒷마디를 따라붙이는 게 보통 방식이다. 이음씨끝 가운데 ‘-지만·-언만, -은데도/-는데도/-ㅁ에도, -으나, -기로, -거늘 …’ 들은 앞마디에서 어떤 조건을 들추고 그것이 마땅히 사실로 인정되는데도 뒷마디에서는 이를 뒤집고 다른 사실을 들추는 구실을 한다. 입말에서는 물이 덜 들었으나, 연설문·신문글을 비롯한 실용글에서는 군더더기를 끼워 호흡과 말의 자릿수를 늘리는 현상이 뚜렷하다. 뜻을 드세게 하고자 ‘간에·불구하고’를 넣어 쓰는 현상이 그렇다. 주로 ‘-에도 불구하고, -ㄴ데도 불구하고’ 따위로만 쓰이는데, 전날에는 ‘물구(勿拘)하고’도 썼으나 이는 앞에 목적어를 둔 쓰임이었다.(부인 동포들은 다소를 물구하고 혈심의연하와 …)
예삿소리 대신 된소리·거센소리가 들어가 쓰이는 경우, ‘대다·먹다·제끼다·젖히다’ 따위 도움풀이씨, 뒤집는 구실을 하는 이음씨끝들을 힘줌말로 본다. 아울러 ‘-에도 불구하고’처럼 쓰는 이은말들도 힘줌말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자릿수만 늘릴 뿐 강조나 호흡조절 효과를 찾기가 어렵다. 그나마 ‘불구(不拘)하고’를 놓을 자리는 ‘돌보지 않고, 매이지 않고’처럼 타동사로 쓰일 때이다.(염치를 불구하고, 교사 신분임을 불구하고 …)
오늘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 따위가 두드러지게 쓰이는 까닭은 일본말 영향에 더하여 영어(in spite of, for all, though, although, despite of, disregarding, nomatter, for all that, with all, never the less, none the less) 이은말·낱말이 든 문장을 상투적으로 ‘-에도 불구하고’로 박아 써 버릇한 탓으로 본다. 많이 굳어진 까닭에 쓰지 않으면 허전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마땅히 적절한 이음씨끝으로 써야 말이 가지런해지고 품위가 선다는 말이 나온다.
△수출 호조에도 불구하고 기업투자는 여전히 정체돼 있다 → 수출은 잘되지만 ~. △정부의 강력한 보급확대 정책에도 불구하고 → 정부에서 보급 확대 정책을 강력히 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안 맞고, 자기 중심적이다 → 그런데도 사람들은 ~. △국제 팔라듐 가격이 기록적인 상승폭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팔라듐 생산을 증산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 팔라듐값이 기록적인 상승폭을 보이는데도 러시아는 ~.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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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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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20세기가 남긴 비극의 땅, 유고슬라비아
스페인 내전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강렬한 희망과 그 좌절을 보여 주는 전쟁이었다면, 보스니아 내전은 20세기 후반을 사는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안겨 준 전쟁이다. 한 국가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호전성으로 상대를 학살하고 추방하는 모습에 전세계는 경악했다. 세계 모든 국가들은 평화안을 제시하여 분쟁을 가라앉히려 노력했고 때로는 무력으로 이 전쟁에 개입하기도 했다. 지구 반대편에 살며 과거 사회주의권에 대해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던 우리로선 그 전쟁의 발생 원인이나 그 참혹함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게다가 시간적으로 너무 가깝게 벌어진 전쟁인지라 그에 대한 권위 있는 평가나 전체적인 조망을 기다리기에도 이를지 모른다. 여기서는 우선, 보스니아 내전을 있게 한 유고슬라비아의 현대사를 살펴보고, 역사가들이 입을 열기 전에 동시대인의 시각에서 보스니아 내전에 과감히 메스를 들이댄 영화들을 검토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이 전쟁이 동시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고슬라비아라고 불리는 국가는 세 번 있었고, 보스니아 내전은 두번째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과정에서 빚어진 비극이다. 1차 대전 후 발칸 반도에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슬로베니아가 결합된 국가가 생겨난다. 이 국가에서는 의회와 군주가 경쟁했으며, 지역 자치 욕구와 중앙 집권 의지가 충돌하였다. 중심 세력인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실질적 자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그 지역의 의회도 탐탐잖게 여겼다. 수년간의 정쟁 끝에 1929년에 세르비아의 알렉산더 왕은 의회와 모든 정당을 해체하고 왕권 독재를 선포했는데, 이 왕국이 첫 번째 유고슬라비아이다. 1939년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첫 번째의 유고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독일이 유고에 동맹을 요구하였지만 유고가 중립을 고집하자 1941년 4월 독일군이 침략해 들어왔다. 이때 유고는 뚜렷한 저항 한번 없이 항복한다. 곧 군주 페타르와 정부는 피난을 떠났고 수만 명의 군대는 독일군에 속속 투항했다. 독일이 세르비아 전체와 슬로베니아 일부 지역을 점령했고 나머지 지역도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에 의해 갈가리 찢어짐으로써 왕국 유고는 붕괴된다. 이 즈음 유고의 독립 영웅이 등장한다. 공산당원 티토(1892~1980)는 처음에는 몇몇의 남녀로 구성된 빨치산을 조직하면서 독립 투쟁을 시작한다. 그의 게릴라 조직은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하고 전국적인 정치력을 획득하게 된다. 티토는 독일을 비롯한 파시스트 국가들과 맞대결하였고 이탈리아의 지원으로 세워진 크로아티아의 괴뢰 정부도 그의 적이었다. 또한 페타르의 망명 정부도 타국에서 자신의 권력을 주장하였기에 티토의 경쟁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안팎의 적들을 티토는 뛰어난 전략 전술로 손쉽게 제압하였다. 마침내 1942년 티토의 빨치산은 보스니아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고 임시 정부인 민족해방회의를 세운다. 이미 10만 명 이상의 군대가 티토를 따르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 등은 티토를 유고의 유력한 정치 세력으로 인정하고 연합을 제의할 정도로 티토는 확실한 정치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1944년 말에는 연합군과 티토의 군대가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 내고 유고슬라비아의 해방을 쟁취하기에 이른다. 서방 국가는 물론이고 스탈린의 옛 소련과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권력을 키워 나간 결과, 티토는 1946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세우게된다. 이것이 두 번째의 유고슬라비아이다. 티토의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는 이전의 유고 지역과 전쟁 중 이탈리아 등에서 얻은 지역을 포함한 국가였다. 즉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명목상 동등한 6개의 공화국이 결합된 국가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경제, 정치에서 고도로 중앙 집권화되었으며, 그 핵은 당연히 티토의 공산당이었다. 유고의 독립과 두 번째 유고를 건설하는 데 결정적 수훈을 세웠던 영웅 티토는 1980년 사망한다. 아마도 그는 10년 후의 비극을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지휘 아래 민중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가 참혹한 해체 과정을 겪게 될 사실을 전혀 예견하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은 어쩌면 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티토 사망 후 유고슬라비아는 경제적으로 위기를 맞는다. 숱한 경제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고 외채는 150억 달러에 이르게 되어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해를 거듭할수록 계속 하락한다. 게다가 수백 년 이상 잠복해 있던 민족간 갈등이 터져나오면서 두 번째의 유고슬라비아도 급속도로 해체 과정을 겪게 된다. 공식적으로는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마케도니아가 유고 연방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 사회주의 유고 연방은 해체되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1992년 새로운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세우기는 했지만 이미 많은 영토를 잃은 상태였다. 이처럼 두 번째 유고가 해체되고 세 번째 유고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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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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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 1장 사상최초의 스트리킹
희랍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3세기 시라큐스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지레 즉,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양수기(이것은 지금도 이집트에서 나일강의 물을 관계용으로 양수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의 발명과 그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라고 이름 지어진 유체정역학의 법칙 등을 발견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공중목욕탕에서 알몸으로 뛰어나와, 시라큐스의 거리를 "유레카! 유레카!(알았다! 알았다!)"라고 외치면서 대낮에 거리로 달려나갔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아르키메데스는 무엇을 발견했는가? 너무 급하게 뛰어나가느라고 옷을 입는 것조차 잊게 할 정도로 그를 흥분시킨 것은 무엇이었던가? 이 질문의 대답에는 아르키메데스가 그날 목욕탕에 들어갈 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시라큐스의 왕이면서 아르키메데스의 가까운 친구이자 아마도 친척이었을 히에로 왕은 금 세공사에게 순금 왕관을 만들도록 의뢰했었다. 완성된 왕관을 받아든 왕은 금 세공사가 순금을 전부 왕관에 사용했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금 세공사가 순금 대신에 은이나 동같은 그다지 귀중하지 않은 금속을 썩어 쓰고 그 여분의 황금을 횡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금에 은이나 동을 섞는 방법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와 같은 혼합물, 즉 합금은 제법 많은 양의 다른 금속이 섞여 있어도 순금과 다름없이 호화로운 황금색을 발한다. 순금은 24K라고도 한다. 장식으로 흔히 사용되는 것은 14K로서, 순금 58%와 다른 금속 42%를 썩어 만든 합금인데 거의 식별할 수가 없다고 한다. 히에로 왕은 당시 유명한 수학자이자 친구인 아르키메데스를 불러서 이 왕관이 진짜 황금인지, 그래서 금 세공사에게 건네준 귀중한 황금이 전량 사용되었는지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기원전 3세기 무렵에 화학분석법은 수학만큼 발달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유능한 수학자이자 기술자였던 아르키메데스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이전에 구나 원주 같이 규칙적인 입체의 부피를 구하는 계산식을 풀이했었다. 그는 히에로 왕의 왕관 부피만 알 수 있다면 왕관 전체가 순금인지 다른 금속하고 합금된 것인지를 판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물속에 발을 넣는 순간, 욕조 가장자리에서 넘치는 물을 보게 죄자 넘치는 물의 부피는 자기 몸 중에서 물속에 들어간 부분의 부피와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발이나 왕관처럼 불규칙한 물체의 부피를 계산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물을 가득 채운 용기 속에 왕관을 넣고 넘친 물의 양을 계측해 보았다. 넘친 물의 양은 왕관의 부피와 똑같았다. 히에로가 금 세공사에게 5파운드(2.27키로그램)의 순금을 주었다고 치자. 이 입방체의 한 변은 4.9센치미터, 부피는 118세제곱센치미터 이다. 만일에 금 세공사가 이 황금을 전량 사용하고 다른 금속을 섞지 않았다면 왕관의 무게는 2.27키로그램이 되어야 하며, 그 부피는 형태가 다르더라도 본래 입방체와 같은 118세제곱센치미터이어야 한다. 만일 금 세공사가 금을 절반만 사용하고 나머지 1.135키로그램을 같은 무게의 은으로 대용했다면 합금인 왕관의 무게가 2.27키로그램이 되더라고 그 부피는 달라지는 것이다. 은의 밀도는 순금의 절반 정도니까 만일 왕관의 부피를 계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118세제곱센치미터보다 커야 옳을 것이다. 밀도라는 것은 물질의 단위부피당 무게(정확하게는 질량)로, 금의 밀도는 금속 중에서 가장 크다. 금의 밀도는 1세제곱센치미터당 19.3그램, 은은 10.5그램, 동은 더 작아서 1세제곱센치미터당 8.9그램이다. 그러무로 금 50%와 은 50%로 된 2.27키로그램의 왕관의 부피는 167세제곱센치미터가 되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공중 목욕탕에서 우연한 발견을 한 후, 히에로 왕의 새 왕관 부피를 재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왕관을 물속에 넣어서 용기 밖으로 배출되는 물의 부피를 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결국 왕관의 부피가 순금으로 되었을 경우보다 훨씬 부피가 큰 것을 알아차린 왕은 그 부정직한 금 세공사를 재판에 걸어 처형했다. 아르키메데스에게는 행운의 발견(세렌디피티)이었으나 금 세공사에게는 행운이 아닌 불행이었던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옷도 입지 않고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뛰쳐나갈 정도로 흥분한 원인은 어디에 있던가? 그것은 바로 어떤 형태의 고체라도 그 부피를 잴 수 있다는 획기적인 방법을 세렌디피적으로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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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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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자라 여덟 마리를 살려주고 아들 여덟을 얻은 이원의 아버지
이원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낭옹, 호는 재사당이다. 성종 20년(1689)에 진사가 되고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좌랑이 되었다. 사람됨이 당당하여 절의를 위해 죽을 만큼 지조가 있고,나이 어린 임금도 맡겨 부탁할 만한 사람이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점필재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으로 하자고 의논했다 하여 곤장을 맞고 원지로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에 처형 당했다. 추강 남효온이 늘 그를 칭찬하였다.
"익재(이제현의 호)의 후손이고 취금헌(박팽년의 호)의 외손자로 두 집의 어짊이 이 한 사람에게 모였다"
아버지 현감 공린이 박팽년의 딸에게 장가들어 혼례를 거행하던 날 밤 꿈에, 늙은 첨지가 나타나 말하였다.
"내 자식 여덟이 바야흐로 삶겨 죽으려 하니, 원컨대 풀어 주어 삶기지 않게 해주소서"
공린이 꿈에서 깨어나서 이상하게 여겨 그 아내에게 묻자, 아내가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라 여덟 마리를 주기에 내일 아침에 국을 끓이려 합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자라를 강물에 놓아주었다. 그 뒤에 과연 아들 여덟을 낳았는데, 별, 귀, 오, 타, 원, 경, 곤, 용으로 모두 재명이 있었다. 오는 진사가 되었고 귀는 원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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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절개
골반이 작거나 또는 정상적인 분만이 불가능할 경우에서 자궁벽을 절개하여 그 속에 든 태아를 꺼낸다. 이러한 방법, 즉 제왕절개술은 요즘 일반화하여 조금도 신기할 것이 없고 위험도 거의 없어 여러 차례 이 방법으로 아기를 낳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 있어서는 이 방법은 곧 산모의 죽음을 뜻했고 의술이 발달한 20세기에 들어와서도 ' 페니실린'이라는 획기적 화농방지제가 발명되기 전에는 상당히 위험한 수술에 속했으며 사망률도 높았다. 제왕절개 수술이란 라틴어의 '섹티오 카에사레아'를 번역한 것인데 '카에사르' (시저)가 이러한 방법에 의해 출생했기 때문에 이 말이 생겼다는 통설이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카에스라' 벤다 라는 말에서 나온 술어인데 발음이 비슷하여 '시저'를 잘못 인용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생각만해도 끔찍한 이 분만법이 고대에도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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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4장 완전한 기쁨을 주는 인생 수업
느낌이라는 미덕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 등의 명작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프랑스의 대조각가 로서 인정받게 된 것은 쉰 살이 다 되어서였다. 그때까지는 지겹도록 밑바닥 생활이 계속되었지만 이를 악물고 그것을 참았다. 마흔 살 가까운 나이에 벨기에의 네에라고 하는 병사를 모델로 저 유명한 '청동시대'라는 작품을 조각하여 전람회에 출품했는데, 그 작품이 너무 훌륭해서 오히려 심사 위원들의 의심을 샀다.
"이것은 틀림없이 살아 있는 모델에서 바로 형을 떠서 만든 사기 조각이다."
이렇듯 어이없는 이유로 낙선시키려는 것을 한 심사 위원이 만류했다.
"비록 사기 조각이라 해도 그 사기가 실로 절묘하지 않습니까."
그는 다른 심사 위원들을 설득해서 로댕의 작품을 입선시켰다. 그런데 신문과 잡지를 비롯하여 일반인들은 로댕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하고 공격했다. 그후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로댕이 결백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로댕의 작품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말해 준다. 역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발자크 상'을 만든 것은 쉰 여덟 살 때였다. 이 작품이 나왔을 때도 온갖 악평을 퍼붓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로댕은 그런 말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제 다들 알게 될 것이라며 부지런히 노력했다.
"느리다는 것은 일종의 미덕이라네."
이렇게 그는 미소짓는 얼굴로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술 작품을 접하고 비판적인 평을 퍼붓는 것만큼 부당한 일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반드시 명백한 오해로 끝날 뿐입니다."
릴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그렇게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걸핏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어하지만."
릴케는 잘 알려졌듯이 젊은 날에 로댕 밑에서 그 예술적인 영향을 받으며 훌륭한 시인으로서의 자세를 닦았다. 그런 만큼 비평을 불신하는 릴케의 말은 로댕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여느 예술가가 사기 조각 사건이라는 당치도 않은 오해로 여론의 총공격을 가혹하게 받았다면 도저히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필시 순식간에 자신감을 상실하고 영락해 버렸을 것이다. 물론 로댕도 사기라는 주장과는 단호하게 끝까지 싸워서 결국 결백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원래 자신의 작품에 대한 문제의 초검이 빗나가 있었던 만큼, 쉰 여덟 살이 된 뒤에도 집요한 악평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의 의연한 태도를 통해 예술가로서 보기 드문 넓은 도량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초점이 어떻게 빗나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릴케가 같은 책에서 잘 대변했다.
"당신이 쓰지 않을 수 없는 근거를 찾아 주십시오. 그것이 당신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어떤지 검토해 주십시오. 만약 당신이 쓰는 것을 중단한다면 죽어야만 하는지 어떤지 스스로에게 고백해 주십시오."
이렇듯 로댕 자신의 작품에 대한 문제는 천박한 곳에 뿌리박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검토하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죽음을 건 검토라는 것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느리다는 것은 일종의 미덕이라네."
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는 이 말에는 역설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본디 말로 다할 수 없는 비밀로 가득찬 존재이다. 예술 작품의 생명은 덧없는 우리의 생명을 뛰어넘어 영원히 계속된다. 하루아침에 이루어낸 잔재주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로댕의 예술에 대한 의연한 태도는 단순히 예술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세평의 꼭두각시가 된 양 가련하게 조종당하면서 실로 경박하게 일희일비하는 우리 생활의 모든 면을 날카로운 바늘처럼 거침없이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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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여덟번째 이야기 수탉과 여우
언젠가 한번은 루까노르 백작과 빠뜨로니오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빠뜨로니오. 내 지배하에 있는 땅이 넓다는 것을 그대도 알고 있소. 그러나 그런 만큼 걱정거리도 많다오. 짜임새 있게 요새화된 곳이 있는가 하면 허술한 지역도 있고, 어떤 곳은 미처 내 권력이 미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나보다 우세한 자들과 맞서야 할 때면 스스로 내 친구라거나 고문임을 자청하는 자들이 내게 겁을 준다오. 내 관할지역 안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멀리 떨어진 곳에는 가지 말고 나의 힘이 미치고 안전한 곳에만 머루르라고 말이오. 내 그대의 충성심과 박식함을 알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어찌해야 하는지 알려주기 바라오." 빠뜨로니오는 말했다. "루까노르 백작님,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확실한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나쁘다고 판단했던 것이 좋아지는 경우가 있으며 그 반대로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 때로는 나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래를 점칠 수 없는 일에 관해 충고할 때면 심히 괴롭습니다. 그 충고가 적절했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므로 굳이 감사의 말을 들을 까닭이 없으나, 올바른 충고를 하지 못하면 그 화가 조언을 한 사람에게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충고를 원하시는 상황은 불투명하고 위험하므로 제 의견을 접어두었으면 합니다만, 백작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회피할 길이 없군요. 그러나 충고를 드리기에 앞서 수탉과 여우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골 농장에 많은 암탉과 수탉을 기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수탉 중 한 마리가 집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아무 겁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지요. 그때 여우 한 마리가 이 수탉을 보고는 잡아먹을 시기를 노리며 몰래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수탉은 이를 눈치채고 농장 한 가운데에 외로이 서 있는 나무 위로 날아올랐지요. 수탉이 달아나자 여우는 진작 덮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어떻게 하면 그 닭을 잡을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잠시 후 나무 밑으로 가서는 수탉에게 달콤한 목소리로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내려와 가던 길을 계속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탉은 여우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지요. 듣지 좋은 말로는 닭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여우는 자기를 믿지 않은 대가로 큰 화를 입을 것이라며 협박을 했습니다. 그러나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수탉은 여우가 보호해 주겠다고 하든지, 협박을 하든지 아랑곳하지 않았답니다. 말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여우는 나무 밑동을 갉아먹으며 꼬리로 세차게 후려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불쌍한 수탉은 지레 공포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여우의 행동은 단지 겁을 주기 위한 것이며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은 못했던 거지요. 무조건 겁에 질린 수탉은 다른 나무로 옮기는 것이 더 안전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는 겨우겨우 날아 옆에 있는 나무로 갔습니다. 수탉이 겁을 집어먹은 것을 눈치챈 여우는 집요하게 따라가 닭이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계속 옮겨다니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공포 때문에 정신을 잃은 닭은 나무에서 떨어졌고 여우에게 잡아먹혀버렸습니다.
"루까노르 백작님, 그 누구의 협박이나 거짓된 충고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이유 없이 놀라지 마시고 위험이 있을 법한 일은 신중히 행하십시오. 멀리 떨어져 있는 땅 한 치라도 지키기 위해 항상 싸우셔야 하며,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충분한 물자를 지니셨으니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 든든하지 않다고 두려워 마십시오. 근거 없는 두려움 때문에 변방을 버려두신다면 그 땅들로부터 시작하여 야금야금 당신이 설 땅을 모두 잃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변방을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을 적이 보면 그것을 빼앗으려 더욱더 날뛸 것이기 때문이지요. 백작님은 그들이 설치는 것을 보시면 더욱 겁에 질리게 될 것이고 소유한 것을 몽땅 빼앗길 때까지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처음부터 백작님 것을 지키신다면 안심하고 편히 지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수탉이 처음에 자리잡았던 나무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화를 면할 수 있었을 것처럼 말입니다. 그 예는 요새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유용하다고 봅니다. 요새를 포위하려고 나무로 집이나 성을 올리는 것을 보고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까요. 이런 짓은 포위된 사람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실 수 있도록 한 말씀 더 드리지요. 벽을 타고 넘거나 땅을 파지 않고는 그 어떤 요새로 점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높다면 사다리가 그 꼭대기까지 닿지 않을 것이며 땅을 파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요새가 함락되는 것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공포에, 특히 이유 없이 공포에 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백작님처럼 세력 있는 사람이든 백작님보다는 못한 사람이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상황을 잘 관찰하고 난 후 확고한 태도로 밀고나가야 합니다. 일단 일을 시작했으면 쉽게 놀라거나 이유 없이 겁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위험이 닥쳤을 때 살아남는 자는 도망하는 자가 아니라 싸우는 자입니다. 늑대의 공격을 받은 작은 강아지가 버티고 서서 으르렁거리면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큰 개일지라도 도망치면 늑대가 따라가 죽여버릴 것입니다."
* 근거 없는 두려움에 떨지 말고 당당하게 자신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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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2부 취재수첩에 묻어둔 광주의 진실
11. 오월 광주의 회상
오월이 오면 그날의 피어린 절규가 들려오는 것 같다. 처절한 항쟁의 무대 금남로가 떠오르고 피투성이 시신들이 즐비했던 참혹한 현장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광주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혀온다. 민주화를 외치고, 무도한 폭력에 항거하다 공수부대의 곤봉에 난자당해 쓰러진 학생, 젊은이들. 제 땅에서 평화롭게 살다 총칼의 난무에 무참하게 희생당한 양민들. 졸지에 사랑스런 자식을 잃고 실성해버린 부모들의 피울음. 그 처절한 환영들이 머릿속에 다시 파고들어오면 금방 숨이 가빠진다. 다시 이 봄에 전장보다 더했던 불지옥의 금남로를 생각한다. 고막을 찢는 어지러운 총성, 자지러진 경적, 헬기의 날카로운 금속음, 비명과 통곡. 그리고 이 모든 소리를 다 합한 것보다 더컸던 분노의 함성이 들려온다. 그 환영과 함성 속에 죽은 자들의 모습이 교차되고 사자가 산 자가되어 일어서 달려오는 영상을 본다. 광주에 관한 다큐멘터리성 기록은 상당히 많다. 옛 취재수첩을 뒤져 그때 상황을 뒤늦게 재현한다는 것은 어쩐지 송구스럽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당시의 실상이 세세하게 세상에 밝혀졌고, 서울서 간 기자의 한쪽 기록이 광주 현지기자들의 생생한 고통의 기록에 비하면 부끄러운 편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늦게나마 사장된 수첩에서 당시 상황의 판 페이지를 다시 살려보는 것은 아픈 역사의 의미를 일깨우고 잃어버린 '나'의 한 부분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1980년 5월 광주에 가 항쟁의 일선에서 지금은 역사의 장이 된 생생한 장면들을 지켜보았다. 광주에 간 것은 첫 사태가 있은 다음날인 19일 하오. 그때부터 공수부대가 도청에 진입한 27일 다음날까지 10일간 현장에서 광주와 함께 살았다. 당시 광주의 학생들과 시위대들은 항쟁의 시발이 된 5월 18일을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렀고, 금남로의 대공방과 대유혈극이 빚어졌던 5월 21일을 '피의 초파일', 항쟁 마지막 날인 27일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렀다. 최대의 희생자를 낸 21일은 가장 처절한 항쟁의 날이었고 가장 뜨겁고 긴 날이었다. 이날을 중심으로 그때의 일지를 더듬어본다.
광주항쟁 4일째의 날이 밝았다. 새벽부터 하늘에선 군 헬기의 공중정찰 소리가 요란하다. 시민들은 도청 쪽으로 집결해오고 있었다. 시민, 학생들은 밤새도록 금남로, 광주역(신역), 충장로, 제봉로, 계림동 등 곳곳에서 공수부대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역앞에서 총격을 받고 1명이 숨지는 등 간밤에 10여 명이 희생당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분노의 함성은 점점 더 커져갔다. 비로소 위기를 느낀 공수부대는 산발 전개했던 병력을 밤 사이 도청 쪽으로 집결시켰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21일 새벽 6시 20분께. 금남로에 사체 2구를 실은 리어카가 나타났다. 트럭이 리어카를 끌고 있었다. 사체 위엔 태극기가 덮여 있고 그 아래로 피묻은 맨발이 보였다. 전날 밤 공수부대와의 공방전에서 희생당한 시민이라고 했다. 시민들은 사체가 실린 리어카를 앞세우고 역앞-양림교-광주공원 앞-금남로 2가로 분노의 행진을 했다. 이를 본 군중들 사이에서 거센 절규가 터져 나왔다.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 '광주시민의 피를 보상하라' '죽음으로 광주를 사수하자'... 함성의 메아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군중들은 계속 불어났다. 아침 일찍부터 시내엔 시위대들이 '징발'한 고속버스, 시내버스, 트럭, 승용차 등 각종 차량들이 시가를 질주하고 있었다. 차량엔 도끼, 몽둥이, 낫 등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시 외곽에서는 주민들을 태운 차량들이 연이어 중심가로 모여들었다. 오전 8시쯤 됐을까. 가톨릭센터 앞에 있던 청년 일부가 "아세아 자동차에 가서 차를 끌고 나오자. 차량을 동원해 무장을 갖추자"라고 외쳤다. 일단의 청년들이 차를 타고 사라지더니 얼마 안 돼 버스 7,8대를 몰고 금남로에 등장했다. 군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모여라, 모여라"하는 외침과 함께 순식간에 많은 청년들이 모여 들더니 버스를 타고 가 다수의 버스, 군용트럭에다 수대의 장갑차까지 몰고 나타났다.
도청 앞 공수부대는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시위대가 장갑차를 앞세운 채 방어선을 더욱 조이고 있었다. 시가엔 공포의 그림자가 휩싸이면서 유혈사태를 예고하고 있었다. 오전 9시께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쪽엔 이미 10만을 넘는 군중이 금남로를 가득 메우고 공수여단 병력과 대치, 18~20일의 공수부대 만행을 규탄하는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10시 전 중심지대엔 20만을 넘는 시민들이 운집했다. 금남로 주변 도로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최루탄을 퍼부어대는 공수병력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낮 12시 30분께 시위대 선두가 30~40여 미터 거리에 있던 도청 앞 공수부대를 향해 전진하자 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에 나섰다. 이때부터 공수부대는 점차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공중을 선회하는 경찰 헬기에선 "시민 여러분, 광주를 살립시다..."며 자제와 해산을 종용하는 도지사와 시장의 호소방송이 들려왔다. 성난 시위대의 귀에는 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미 오전 10시쯤부터 전남도청은 시위대의 점령에 대비해 중요서류를 헬기로 탈출시키고 있었다. 뭔가 은밀한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낮 12시 50분이 갓 지났을 때였다. 돌연 장갑차 한 대가 공수부대 군 저지선을 향해 돌진했다. 웃옷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머리에 하얀 띠를 두른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면 '광주 만세'를 외쳤다. 순간 도청 쪽에서 총성이 터지면서 청년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계엄군 2명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얼마 뒤 들렸다.) 시위대의 트럭과 버스 등 차량들이 뒤따라 질주했고 군 저지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노동청, YMCA 인근에서도 시위대의 트럭이 돌진해 들어가다 유혈사태가 났다는 말이 퍼졌다. 시시각각 급보가 잇달았다. 장갑차가 뛰어든 지 10분 가량 지났을까. 요란한 총성이 하늘을 찢었다. 도청 앞 공수대원들이 발포했다, 주변 건물에서 매복조가 저격했다는 등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이 시간 이후 전남매일신문, 노동청, YMCA 등 곳곳에서 사상자가 속출해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말이 숨가쁘게 들려왔다. 전남대 방면에서도 충돌 끝에 유혈사태가 벌어졌다는 소문이었다. 이날 오후 기독병원등 시내 병원은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온 사상자들로 초비상 상태였다.
금남로 2가 상업은행 부근에서 시위대 물결 속에 휩쓸려 있을 때였다. 오후 2시 10분께 총성이 울리는가 했더니 옆에 있던 한 시민이 어깨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가슴이 멎는 느낌이었다. (총 맞은 사람은 확인 결과 김후식이라고 하는 39세의 산수2동 주민이었다.) 나도 죽을 수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상황은 점점 위급해지는 것 같았다. 광주에 데리고 갔던 후배 견습기자를 황급히 찾았다. 광주가 완전 고립되기 전 그간의 상황일지를 챙겨 탈출시키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일지를 보물처럼 안겨주고는 빨리 광주를 벗어나 서울 본사로 가도록 했다. 이미 21일 새벽부터는 기사 송고나 연락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시외전화는 이날 새벽 2시 40분부터 불통됐다. 전날 밤 광주역이 마비된 데 이어 이날 오전 중엔 고속버스 길도 끊겨 광주는 고립 상태로 치달았다. 각 관청들은 문을 닫고 상가는 완전 철시했다. 학생들이 없는 각 학교는 자동휴교로 들어갔다. 파출소는 텅텅 비고 경찰들은 잠적해버렸다. 도청 안에 있던 기자들에게도 오후 2시 전에 피신하라는 급보가 내려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후 2시와 2시 30분께, 시위대가 모든 경찰화학차가 소총 탄약, 다이너마이트 등 무기를 싣고 금남로 3가에 도착해 군중들에게 총기를 나눠줬다. 나중에 온 차엔 기관단총도 있었다. 무기차량이 잇달아 진입했다. (시위대들이 화순, 나주 등 일대의 경찰관서 예비군 무기고와 탄광 등지에서 빼내 온 것으로 밝혀졌다.) 거리 한편에서는 휘발유를 넣어 수백, 수천 개의 화염병을 만들어 나눠주고 있었다. 무장한 청년들이 세종장 등 주변 건물로 올라갔다. 숨막히는 상황이 계속 전개되고 있었다.
오후 2시 40분께 금남로의 시위대들이 대형 드럼통에 불을 붙여 군 저지선으로 굴리고 트럭을 후진시켜 몰아넣었다. 공수부대가 발포를 하고 쌍방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총소리와 비명,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뒤섞이면서 금남로는 아비규환의 상태에 빠졌다. 수일간 광주를 피투성이로 만든 공수부대에 맞서 항쟁하는 무장시위대. 광주시민들은 이들을 '시민군'이라고 불렀다. 총탄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지옥 속에 사방으로 흩어졌던 사람들은 다시 모여들어 도청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오후 4시 40분께. 시위대가 트럭에 불을 붙여 밀어 넣었다. 밀리면서도 도청 쪽에 철벽같이 붙어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서둘러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도청은 사람과 서류를 소개시킨 뒤였다. (공수부대는 시위대의 무서운 공격에 밀려 후퇴를 했지만 실상 이날 오후 4시에 후퇴명령을 받고 있었다.)
시위대들은 도청에 진입했다. 오후 5시 반이었다. 시민들은 환호했고 무장시위대가 차량을 몰고 거리를 질주하며 하늘을 향해 총을 쐈다. 길에 엎드려 통곡하는 사람, 만세를 외치는 사람 등 거리는 온통 아우성이었다. 시민의 항쟁으로 만행을 저지른 공수부대를 물리쳤다는 '승리'의 함성이었다.
21일은 초파일. 거룩한 석가모니 탄생일인 이날 광주는 아비와 규환의 지옥이 되어 피바람의 난리를 치르고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사상자 파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이날 저녁 전언에 의하면, 이날의 사망자는 최소한 60~70여 명에 이르고 부상자는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휴유증으로 인한 경우까지 합하면 21일 사태로 인한 사망자는 70명 선에 이르는 것으로 훗날 잠정 집계됐다.)
19일부터 광주시내 병원은 밀려들어오는 사상자들로 정신을 못차릴 지경에 빠졌다. 곳곳에서 시위대와 군 간의 충돌과 군의 발포등으로 희생자는 연일 늘어갔다. 22일에는 비상책으로 전남도청 구내 건물 및 통로에 임시영안소가 마련돼 사체 46구가 안치됐다. 학생들은 호주머니를 털어 값싼 널빤지 관을 마련하고 신원미상 사체의 관 위에 인상착의를 일일이 적고 있었다. 또 부패를 막기 위해 소독약을 구해 관을 뜯고 하나하나 투입했다. 병원들은 사체를 안치할 곳이 없는 데다 부상자들에게 수혈할 피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었다. 사체가 들어 있는 각 병원에는 가족, 친지를 찾는 시민들이 몰려들어 대소동이 벌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아 헤매며 애를 태웠다. 전남대부속병원의 경우 22일 오후 영안실과 앞마당엔 시민들이 떼지어 몰려와 사체를 덮은 천을 제치고 가족의 사체인지 확인하느라 야단이었다. 영안실 주변과 병원 뒤뜰은 사체의 신원을 확인한 가족들의 비통한 울부짖음으로 진동했다. 병원 안에선 통곡 소리와 관에 못 박는 소리가 밤늦도록 울려 퍼졌다. 이날 무장시위대 트럭을 타고 온 20대 청년은 전남대병원 앞마당 시체 더미에서 동료의 신원을 확인하고는 "나 혼자 못살아. 시민 여러분 같이 갑시다"라고 외치며 총을 마구 휘둘러대 유족들과 주변 사람들은 혼비백산케 했다. 같은 날 13구의 사체가 안치된 기독병원의 영안실은 시신에서 흘러내린 피가 영안실 가운데로 모여 서로 섞이면서 도랑을 이루고 있었다. 10대 학생인 듯한 한 사체는 얼굴의 형체 절반이 없어졌다. 당시 이 병원 서무과장 최평웅씨(41세)는 "어떻게 이 땅에 이런 끔찍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며 몸서리를 쳤다. 광주의 참상은 끝이 없었다.
시위대가 도청에 진입하던 날 저녁, 취재 중 금남로에서 만난 한 대학생이 나를 붙들고 '기자들도 적'이라며 눈을 부릅떴다. 광주의 진상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신군부의 날조된 주장을 실어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데 대한 규탄이었다. 그러더니 그 학생은 수일간의 과정을 입에 거품을 뿜으며 토해냈다. 군부독재 종식 비상계엄 해제 등 신군부에 대한 잇단 민주화 요구시위, 이어 계엄확대 발표 후 심야에 공수부대가 대학을 점령해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학교 앞에서 시위하던 학생들을 잡아 피투성이가 되도록 짓이겨놓은 18일의 상황, 이에 항의하는 다수의 학생, 시민들을 진압봉 등으로 처참하게 뭉개고 린치를 가한 19일의 만행과 시민들의 저항, 수만 시민이 떨쳐 일어난 20일의 대규모 항쟁과 사상자가 속출한 유혈사태 등... 그 학생이 분노를 토로한 다음날인 5월 22일자 신문들은 광주사태 이후 처음으로 나온 계엄사 발표문을 1면에 이렇게 싣고 있었다.
이번 소요사태는 최초 전남대생 6백여 명이 거리에 나와 비상계엄 해제 등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으나 20일에는 지역감정 자극하는 터무니없는 각종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가세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 21일 오전 7시 현재 피해상황을 보면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했고...
황당한 진실의 왜곡, 민간인 1명 사망... 기가 막힐 일이었다. 이후 신문지면엔 폭도, 폭동, 약탈, 유언비어 난무 등 '적대적 용어'들이 수시로 등장했다. 다행히 이같은 내용을 보도한 신문은 광주에 거의 배달되지 않아 현지 취재기자들은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서울서 급파된 기자들을 본사에 '제발 신문을 보내지 말아달라'고 호소해야만 했다. 부끄러운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언론에 대한 불신은 뿌리깊었다. 거의 증오에 가까웠다. 신안동 광주 KBS의 경우 5얼 19일 밤에 시위대 1백여 명의 공격으로 유리창이 대파됐다.20일 밤과 21일 새벽엔 MBC, KBS 방송국이 잇달아 불탔다. 시민들은 앞서 두 방송국에 몰려가 뉴스 시간에 광주시민의 피해상황과 사망자 신원 등을 정확히 보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방송이 안 나오거나 정규방송 없이 음악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금남로변의 CBS는 19일 군중들의 투석세례를 받았다. J 일보 등 일부 신문사 사무실 유리창이 파괴되고 지사 차량을 빼앗기는 등 신문도 수난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서울서 간 상당수 기자들은 시위현장에 나타나 일선 취재 하기를 꺼리고 도청 안에서 맴도는 일이 많았다. 언론 불신은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또 다른 비극이었다.
광주항쟁은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도청점령작전으로 막을 내렸다. 이날 도청 앞에는 기자들이 계엄군이 내준 보도완장을 차고 활보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시민군'에 출입비표를 내보이고 들어갔던 도청이었다. 도청 안에는 어제 봤을 시위대 사람들이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숨져 있었다. 그중 한 학생의 죽음이 아직도 취재수첩의 마지막 장에 검은 부음처럼 붙어 있다. 지난 1995년 5월 광주항쟁 15주년 때, 그죽음의 환영이 자꾸만 떠올라 소회의 일단을 한국일보 칼럼 '메아리'에 이렇게 썼다.
오월 이맘때가 되면 광주의 그날들이 머릿속 가득 밀려온다. 15년 전 5.18사건이 일어난 직후 광주에 가 있었던 10일간의 체험은 슬픈 추억의 단편으로 잠재해 있다가 그때가 돌아오면 함성처럼 되살아난다. 군과 시위군중과의 숨막히는 가두공방, 총성과 피로 물든 전남도청 앞 광장, 통곡과 비명으로 아수라장을 이룬 병원 시체실, 마지막 날 도청 안의 철저한 장면, 금남로에서 농성동에서 총알이 머리 결을 스쳐갔던 위기의 순간 등... 불현 듯 당시의 일지가 생각나 빛바랜 취재수첩을 꺼내본다. 그때의 기록은 한 학생의 죽음의 현장에서 끝나 있었다.
1980년 5월 27일 상오, 전남도청 안 도경 종합상황실 뒤편. 꽃이 모두 떨어진 화단 옆에 한 청년이 복부에서 피를 흘린 채 하늘을 보며 숨져 있었다. 군복 상의에 갈색 바지, 뒷주머니엔 조그만 수첩이 하나 꽂혀 있었다. 발밑엔 흰 운동화와 탄피가 흩어져 있고 머리 앞쪽에는 철모와 총알이 뚫고 간 둥근 쟁반이 뒹굴고 있었다. 서울 동국대 전자계산원 1년 박병규(1960년생)군으로 확인된 이 학생은 총성을 듣고 뛰쳐나오다 총탄을 과일쟁반으로 막으려 했던 것 같다. 무엇이 이 젊은이를 이곳에 와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 그의 죽음은 유난히 슬픈 환영이 되어 오랜 세월 뇌리에 파고들었다. '광주사태' 당시 신군부에 의해 '폭도'로 불렸던 이 젊은이는 죽어서 이제는 '열사'가 되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옛날의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 광주민중항쟁으로 불리고 신군부세력이 지칭했던 '폭동'은 '시민항쟁'으로, '폭도'는 '시민군'으로 바뀌었다. 죽어 묻힌 자는 망월동 묘역의 열사로 승화했다...
옛 광주의 일을 생각하면 수많은 희생에 대한 한의 상념과 그들의 희생이 역사발전의 기념비로 승화했을 것이라는 긍정적 상념이 교차한다. 슬픔은 짧고 역사는 무궁하다고 했던가. 광주항쟁은 비극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다. 그 봄의 항쟁은 1980년대 큰 투쟁을 낳는 밑거름이 됐고 민주화를 쟁취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희생자들은 망월동에 묻혔지만 그들의 희생은 역사발전의 밀알이 되어 새로운 싹을 틔웠고 계속 새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5.18 17주년의 봄에 어느 시인이 읊은 '오월의 노래'를 불러본다.
저기 오는구나 그 사람 오월 피묻어도 가슴째 일어서는 사람 눈부시게 번뜩이는 얼굴로 오는구나...
(중략)
보아라 다시 온다 저기 저 사람들 한숨일랑 광주천에 흘러내리고 들판 잡초야 어깨에 어깨하고 금남로 충장로 아스팔트도 눈뜨며 태어날 때 당당한 그대 꽃얼굴 아프도록 새롭게 다가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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