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다섯번째 이야기 아랍의 세왕자 이야기
어느날 루까노르 백작이 빠뜨로니오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빠뜨로니오, 내 집에는 젊은이들이 몇 사람 있는데 그 중 몇 명은 내게 많은 도움이 되는 이들의 자식이고, 몇 명은 이젠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의 자식들이라오. 그런데 그들의 거동을 지켜보자면 과연 그들이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지 걱정이 된다오. 당신은 지혜로운 사람이니 이들 중 내게 쓸모있게 될 자와 그렇지 않을 자를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가르쳐주오." "그런 종류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미래란 불확실한 것인데 백작님의 질문은 바로 그 미래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는 몇 가지 징조를 가지고 짐작해볼 수 있을 뿐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징조로는 외모나 안색, 행동거지 그리고 체격 등이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단지 징후에 불과하며 실제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외적 징후들을 보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짐작해볼 수 있을 뿐입니다. 더 뚜렷한 징후는 얼굴, 특히 눈에 나타납니다. 이것은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생겼지만 인물값을 못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못생겼지만 믿음직한 사람도 있습니다. 균형잡힌 신체는 민첩함과 용기의 징후일 수 있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 징후에 불과합니다. 백작님께서 그 청년들의 가능성을 점쳐보고 싶으시다면 그들 내부의 품성이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가를 잘 살펴보십시오. 참고 삼아 한 아랍 왕이 왕국을 물려줄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해 세 아들을 시험했던 이야기를 해드릴까 합니다."
아랍의 어느 왕에게 아들이 셋 있었습니다. 왕이 노년에 접어들자 셋 중 한 명에게 왕관을 물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어느 아들에게 왕좌를 넘겨줄 건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한 달이 지난 후에 말해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며칠 후 왕은 큰아들에게 다음날 아주 일찍 말을 타러 나가고 싶다며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왕자는 왕에게로 갔지만 왕이 말했던 만큼 이른 시각은 아니었습니다. 왕자가 도착하자 왕은 옷을 입어야 하니 자기 옷을 가져오게 하라고 왕자에게 지시했습니다. 왕자는 시종에게 옷을 가져오라고 했고 시종은 왕께서 무슨 옷을 입으실 거냐고 왕자에게 되물었습니다. 아들은 그것을 묻기 위해 왕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왕은 알후바(아랍인이 입는 소매가 짧고 좁은 외투의 일종)를 입고 싶다고 말했고, 왕자는 시종에게 돌아가 왕이 알후바를 입고 싶어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시종은 어떤 알메히아(역주: 스페인 내의 아랍족이 있었던, 거친 천으로 짠 작은 망토)를 입으실 건지 물었고, 왕자는 다시 왕에게 그것을 물으러 가야만 했지요. 왕자가 이렇게 몇 번이고 왔다갔다한 후에야 왕은 옷을 입고 신을 신을 수 있었습니다. 옷을 입고 신을 신자, 왕은 왕자에게 말을 끌고 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왕자는 왕의 말을 돌보는 사람에게 말 한 마리를 끌고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마구간지기는 어떤 말을 타실 건지 물었고, 왕자는 왕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안장과 재갈과 칼과 박차에 대해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말에 타기 위해 필요한 것 하나하나 때문에 그는 일일이 왕에게 물으러 간 것이지요. 모든 것이 준비된 후, 왕은 왕자에게 자기는 말을 탈 수 없겠으니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잘 보고 와서 자기에게 이야기해달라고 했습니다. 말에 올라탄 왕자는 수많은 신하들을 동반하고 풍악소리를 크게 울리며 행차를 시작했습니다. 얼마간 마을을 돌아다닌 후 왕자가 돌아오자, 왕은 마을에 나가서 보고 온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왕자는 풍악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던 것을 빼고는 모든 게 좋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며칠 뒤에 왕은 둘째아들을 불러 첫째아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시험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둘째아들도 큰 아들과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왕은 막내아들에게 다음날 아침 일찍 자기에게 오라고 했습니다. 막내아들은 아주 일찍 일어나서 왕이 깨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왕이 일어나자, 왕자는 공손하게 절을 하며 들어왔습니다. 왕이 옷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자 왕자는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을 신으실 건지 물었습니다. 그의 태도는 마치 자기 행동이 아버지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면 자신에게 또한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 아버지이므로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드리는 것이 그에게는 당연하고 합당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옷을 입고 신을 신자 왕은 말을 끌고 오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자는 어떤 말에 안장은 어떤 것으로 앉히고 재갈은 또 어떻게 하실 건지, 어떤 칼을 차고 그 외에 말을 타는 데 필요한 것들에 대해 그리고 말을 탈 때 누구를 곁에 세우고 싶으신지까지 물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무엇 하나 반복해 묻는 일이 없이 왕의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을 때, 왕은 말을 타고 싶지 않다면서 왕자에게 말을 타고 나가 둘러보고 나서 이야기해달라고 했습니다. 왕자는 전에 자기 형들과 함께 갔던 사람들을 대동하고 궁궐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왕이 왜 그러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왕자는 말을 타고 나가 모든 마을과 거리, 왕이 보물을 보관해둔 장소들, 사원들 그리고 끝으로는 도시에 있는 큰 건물 하나하나와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보여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을 타고 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자기를 따라오던 모든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왕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군대 묘기를 모두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을의 성벽과 탑과 요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두 다 둘러본 후, 그는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도착한 것은 이미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왕은 그가 본 모든 것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왕자는 만약 왕께서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자기 의견을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왕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한번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자는 아버지께서 아주 훌륭한 왕임에는 틀림없지만 자기가 보기엔 충분한 것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왕자의 질책에 왕은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그리고 약속했던 기일이 되자 신하들에게 막내 아들을 왕으로 삼겠다고 말했습니다. 세 아들 중 누구라도 왕이 될 수 있었지만, 세 형제의 행동이 천지차이임을 확인한 왕은 오직 막내아들이 왕국을 물려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후계자로 공표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청년들 중 누가 가장 나을지 알고 싶으시다면 이 시험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청년들이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될 지 뭔가 짚이는 바가 있으실 겁니다.
* 젊은이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나가는가를 지켜보면 그가 장래에 어떤 사람이 될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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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제1부 신군부의 만행을 전세계로 타전하다
8. 윤상원 그의 눈길에 담긴 체념과 죽음의 결단
나는 지난 25년 동안의 기자생활 중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국의 강청 등 4인방 재판, 그리고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 암살 이후 폭동과 살인사건 등을 취재해왔다. 어떤 사건이 나의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한마디로 '광주'라고 대답한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단 하루밖에 광주에 머물지 않았었지만, 1980년 5월 26일 그날 하루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걸고 폭압에 맞서 투쟁했던 용감한 광주시민들의 모습이 나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5월 26일, 내가 광주에 도착했을 무렵 광주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이미 죽어 있었다. 죽은 친척들은 수많은 시체들의 신원을 확인한 상태였다. 죽은 자식들 관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어머니들의 처절통한 통곡 소리가 도청 앞 상무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청 복도에는 부풀어 보랏빛으로 변해버린 15구 이상의 시체들이 뚜껑이 열린 관 속에 넣어진 채 신원 확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광주희생자들은 오늘날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묻혀 있다. 그들 무덤 앞에는 그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생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사진들이 놓여져 있다. 하지만 생전에 그들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들을 내가 보았던 죽음의 모습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분명히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내 마음의 눈에 그릴 수 있는 단 한 명의 광주 희생자가 있다. 그는 바로 5월 26일 외신기자회견을 열었던 시민군(학생) 대변인이다(윤상원은 당시 학생이 아니었고, 시민군 중 학생은 소수에 불과했으나 필자의 원문 그대로 옮겼다. 이하 같다 - 편집자).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회견실 응접탁자 바로 건너편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그의 두 눈이 나를 향해 다가오자 나는 그 자신 스스로도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흔치 않은 곱슬머리였다. 그의 행동은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무장 동료들의 거의 광란 상태에 이른 것 같은 허둥거림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침착함이 있었다. 그 침착함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그가 죽고 말 것이라는 예감을 뚜렷하게 받았다. 그의 눈길은 부드러웠으나 운명에 대한 체념과 결단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됐다. 그는 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거의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스물 다섯 살 정도에 광대뼈가 나온 지적인 모습이었다.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바로 그날 아침, 광주시 외곽을 포위하고 있던 계엄군은 도시의 중심부를 향해 좀더 접근해 들어왔다. 학생투사들에게는 일단 계엄군이 작전을 개시할 경우, 장기간 저항할 수 있는 화력이 명백히 모자란 상태였다. 학생 대변인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미국이 우방으로서 한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제껏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미국이 전두환 장군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이 광주문제의 중재를 위하여 대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한국 정부당국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최근 사북탄광 광원들의 파업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는 사태의 주동자들이 파업 중단하면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서는 사실상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을 구속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 대변인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학생투사들의 방침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계엄군이 자신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그의 두 눈에서 보았던 미래에 대한 불길한 상념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당시 뉴스에서 밝힌 숫자에 따르면 항쟁기간 중 100명이 넘는 광주시민들이 사망했었다. 그런데 그 학생대변인은 실제 사망 숫자가 약 260여 명이라고 알려줬다. 나는 그때까지 나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누구든지 나 같은 외부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계엄군은 시내로 진격해서 광주를 탈환할 수 있는 압도적인 화력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보잘것없이 무장한 학생 투사들은 저항하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항복할 것인가?" 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의 눈길은 자신의 말을 믿어줄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이 '광주시를 전부 날려버릴' 정도로 충분한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 회견이 끝난 후, 나는 시민군의 바리케이드도 살펴보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하면서 잠시 동안 광주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날 밤 서울로 돌아와서 내가 보았던 일들을 기사로 작성하여 신문사에 보냈다. 하지만 그 기사는 신문에 실리지 못했다. 인쇄되기도 전에 계엄군이 광주시를 탈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처음 발표된 사상자 숫자는 적었다. 학생들 가운데 사망자는 단 두 명뿐이었다. 그보다 많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들은 이상주의자와 자기확신으로 가득 찬 너무도 젊은 청춘들이었다. 얼마 안 있어 나는 좀더 많은 사상자 숫자를 전해 들었다. AP통신의 테리 앤더슨(Terry Anderson) 기자도 당시 기자회견 자리에 참석했었다. 앤더슨이 나에게 자신이 청년 16명의 주검을 직접 세어서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 중에는 학생대변인도 있었는데 그의 주검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만 장례기자회견이 열렸던 도청 건물의 사무실에서 발견되었다고 앤더슨이 전해주었다. 그 대변인의 시신은 도청에서 발생한 화재로 이곳 저곳 불에 탄 채였다고 했다. 그 청년의 삶과 죽음은 나에게 군사통치 아래서 남한이 겪고 있는 비극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그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 나는 당시 내가 속해 있던 신문사인 '볼티모어 선 (The Boltimore Sun)'지에 그에게 초점을 맞춘 기사를 썼다. 광주에서 보고 들은 사실, 그리고 이 글의 앞부분에 쓴 바와 비슷한 내용을 기술했다. 그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 학생의 이름만이라도 알았더라면 여기에 쓸 수 있었을 것이다."
5월 27일 저녁 그 기사를 조선호텔 텔렉스를 통해 송고하자마자 나는 다른 동료 특파원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 어느 때보다 흠뻑 취하고 말았다. 그날 밤 서울시내 중심가를 이곳 저곳 옮겨다니며 마셔댔던 술집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전두환을 비롯한 남한의 새로운 군사통치자들을 저주하면서 고꾸라지는 것을 부축하느라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나와 함께 술을 마셨던 다른 동료들이 전해주었다. 나는 이러한 격렬한 감정은 3년간의 한국 취재기간 동안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나는 '광주'에 대해서 미국인으로서보다는 한 사람의 한국인의 심정으로 반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볼티모어 선'지의 편집진은 나의 기사가 감동적이라고 생각하여 독자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 것으로 믿고 5월 28일자 조간의 제1면 머릿기사로 올려주었다. 분명히 그것은 내가 쓴 가장 열정적인 기사 중의 하나였다. 아마도 나의 잠재의식 속에는 그 열정으로 인하여 나의 뇌리 속에 머물면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젊은 대변인의 영혼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끈질겼다. 나는 과연 그의 삶이 어떻게 그를 최후의 그 순간까지 이끌고 가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궁금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다만 학생투사들의 대변인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심지어 이름조차 모른 채로 10여 년 이상을 살아왔었다. 나는 가끔씩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그 젊은이는 이름이 널리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계엄군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우리들에게 말했었지만 사실상 군인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다른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모르고 있었다. AP통신의 테리 앤더슨은 훗날 다른 사건 즉, 중동사태를 취재하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유명해져 버렸다. 그는 베이루트에서 취재도중 아랍인들에게 납치되어 7년 동안이나 인질로 잡혀 있었다. 석방 직후인 1992년 나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 학생대변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자신도 모른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 학생대변인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광주로 다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나중에 언젠가는 해야 될 일의 목록에 그것을 기록해놓았다. 그런데 1993년 서울에서 책을 발간하기 위한 연구조사를 진행하고 있던 중, 모르는 사람한테서 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자신을 볼티모어와 워싱턴 D.C. 사이에 있는 메릴랜드 주의 칼럼비아에서 온 한국계 미국인 서유진이라고 소개했다. 서유진씨는 나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울외신기자클럽에서 만났는데, 수수한 옷차림에 나와 동갑 (1942년생)인 남자가 미소짓고 있었다. 그는 1980년 '볼티모어 선'지에 실린 광주의 대변인에 관한 나의 기사를 읽은 이래로 나를 만나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씨는 1970년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갔다고 했다. 그후 수년 동안 워싱턴에서 '민주통일운동연합'을 위한 로비활동을 해왔다. 1980년 서씨는 나의 광주기사를 복사하여 워싱턴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게 배포했었다. 또한 그는 그 기사를 번역하여 한국에 보냄으로써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사기를 높여주기도 했다. 그는 항상 나를 만나서 나의 기사가 '광주' 이후의 공포 시절에 민주화운동 세력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 말을 들으니 기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동안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혀 온 질문을 서유진씨에게 할 수 있게 된 것이 더욱 더 기뻤다.
"그 학생대변인은 도대체 누구였습니까?" "아, 윤상원 말씀이시군요." 그가 대답했다. "저도 호남 출신이고 그의 친구들과 가족을 알고 있습니다. 광주에 가서 그들을 만나보시겠습니까?" "물론 그렇고말고요." 내가 대답했다.
며칠 후 서유진씨와 나는 광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광주에 도착하자 '전국민주학생연맹'의 조직에 참여했던 박성현씨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제 양복에 로타리클럽 배지를 단 모습의 박씨는 사업가로 변신하여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렸고, 자신의 가족이 최대 주주인 고려시멘트사의 사장이었다. 1980년 학생운동가였던 그는 관계당국이 서울에서의 활동과 관련하여 자신을 찾고 있던 바람에 항쟁이 일어나기 전에 광주를 떠났었다.
"나는 윤상원 선배를 존경했습니다. 그는 매우 지적이고 위대했으며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박씨가 나에게 말했다. 그는 윤상원은 이미 학생운동가들에게는 단순한 대변인을 훨씬 넘어선 존재였다고 말했다. 항쟁 중반 이후부터 줄곳 윤상원은 실제 광주의 총책임자였으나 다만 그의 핵심적 역할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라고 박씨는 말했다. 박성현씨는 나를 윤상원의 가장 가까운 동지 중의 하나였고 항쟁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전용호씨에게 소개해주었다. 전용호씨도 다른 많은 나이든 운동가들처럼 수년 동안 감옥을 드나든 이후에 조그마한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최근에 그는 광주에서 통신관련 회사를 차렸다. 나는 전씨와 서씨의 안내로 5.18 묘역을 방문하여 윤상원의 묘소에 참배하였다. 묘비 앞에 놓인 사진 아래에 간략한 그의 삶의 궤적이 씌어져 있었다.
'윤상원. 1950년 8월 19일생, 도청투쟁위원회의 대변인. 5월 27일 새벽 도청민원실 2층에서 계엄군의 총격에 의해 사망.'
묘비 앞에 놓인 그 사진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른 학생투사들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고 곱슬머리에 광대뼈가 강직해 보이는 기억 속의 그 윤상원이 거기 있었다. 상석 위에는 누군가가 바친 타다 남은 담배 한 개비가 놓여져 있었다. 그날 저녁 일행은 나를 윤상원의 동지들과 가족들이 모인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윤상원의 부친 윤석동씨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이미 백발이 되어 가장자리 부근에만 조금 남아 있는 머리카락 역시 곱슬머리였다. 나는 나와 한국 그리고 광주와의 인연을 설명했고 윤상원에 대해서 보다 더 많이 알고 싶고 글을 쓰고 싶다는 뜻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나는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광주야말로 나의 기자로서의 경력 중 가장 감동적인 경험을 제공해준 곳이라고 말했다. 그 동안 군사독재 정부가 보여줬던 잔혹성이 너무나 극심해서 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이 재결집하여 군사독재와 맞서려면 많은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었다. 광주항쟁이 끝난 직후인 1980년 8월 인도의 지국개설 발령을 받자 한편으로는 한국 관련 기사를 더 이상 쓰지 않을 것이라는 점 때문에 안도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당시에 나는 미래가 너무나 암담하게 보이는 한국을 다시 취재할 정열이 아직 나에게 남아 있는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198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또다시 반정부시위가 한창이었다. 나는 한국 국민들이 용기를 되찾은 것을 보고 기뻐했다. 노태우씨가 시위대의 요구에 굴복하여 민주화선언을 발표하자 나도 한국인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1989년 중국인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광주학살과 유사한 비극을 겪는 것을 보고 나는 불굴의 투쟁정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중국인들도 한국인들처럼 7년 남짓이 지난 후에는(아마도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벌써 1997년이니까) 폭정에 대해 좀더 조직적으로 저항하여 보다 민주적인 체제의 수립을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날 저녁 이전에 나는 나의 미국 국적 때문에 차가운 대접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예견했었는데 막상 윤상원과 가까웠던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그들 모두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햇빛에 얼굴이 그을린 윤상원의 아버지이자 광주민중항쟁유가족협의회 의장인 윤석동씨는 다음과 같이 고결하고도 감동적인 말을 했다.
"바로 선생님 같은 사람들 때문에 내 아들은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오. 감사합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중에 만났던 다른 사람들, 특히 주간 노동자신문의 발행인이 된 윤상원의 절친한 동지였다는 이태복씨 등과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는 윤상원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한데 묶어보았다. 윤상원은 도로가 포장되기 이전에는 광주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정도 걸리는 임곡마을에서 자랐다. 거기에서 그의 가족은 논 3천평 남짓을 부리고 있었다. 가족들은 장남에게 훌륭한 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다했다. 윤상원은 광주에서 가톨릭계인 사레지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나 종교에 대한 그의 열정은 나중에 시들어져 갔다.) 전남대학교 학생 시절 그는 당시의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그의 전공은 정치학이었다. 연극반 활동도 활발하여 그는 탈춤반에서도 활동했는데 탈춤은 당시 반정부 학생들 사이에 인기를 끌기 시작하고 있었다. 몇 년 후인 1979년 윤상원은 이태복에게 2년간의 대학생활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신을 사회정의를 향한 열정을 갖고 있는 단순하고 순진한 민주주의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1970년대 총 학생들의 구호는 박정희의 영구집권과 그의 절대권력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부정부패로 모아졌다. 대학 2년을 마치고 윤상원은 육군에 징집되었다. 군생활을 마치고 그는 복학했다. 그는 학생운동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단순히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만으로는 부족했다. 학생들은 보다 광범위하고 진보적인 세계관을 추구하고 있었다. 남한 사람들은 당시만 해도 구할 수가 없어서 마르크스 원전들을 읽을 수가 없었지만 폭탄과도 같은 폭발적 위험성을 갖고 있던 원전들을 가장자리 정도에는 접근할 수가 있었다. 윤상원과 몇몇 친구들은 헤겔 철학과 제 3세계의 급진적 저작물 및 서양경제사와 자본주의 발전단계에 관한 서구의 저서들을 탐닉했다. 윤상원은 광천동 빈민촌의 자취방에서 동생들과 함께 살며 빈민가 사람들의 비참한 일상생활을 목도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의 가족이 바라는 대로 월급을 많이 받는 넥타이 맨 봉급쟁이가 되어 동생들을 대학까지 졸업시킬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빈민들 가운데서 사회운동을 조직할까? 윤상원은 자신의 시간과 존재를 당시 진보적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사회과학 서적들이 나타내 보이는 세계와 입사시험준비에 필요한 학과공부 사이에 나누어 썼다. 결국 좋은 성적으로 1977년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시험에도 합격하여 서울에 있는 큰 은행에 입사했다. 그가 서울에서 기거한 곳은 봉천동 빈민촌으로, 그곳은 주로 고향을 등지고 공장일을 찾아 상경한 농촌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보다 나이 어린 동지들은 아직도 학생운동에 열심이었다. 그중 몇몇은 경찰에 쫓겨 그곳으로 윤상원을 찾아오곤 했다. 그들과의 대화는 종종 당시 학생운동가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던 생각 즉, 노동자가 되기 위해 공장으로 들어가자는 쪽으로 옮겨갔다. 윤상원은 나중에 이태복에게 자신은 다만 상징적인 기간만 은행에 다니다가 조직운동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태복에 따르면 서울에서의 윤상원의 경험은 단지 그의 결의를 굳혀주었을 뿐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은행원으로서 6개월이 지난 후 그는 사표를 냈다.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나라를 위한 어떤 일에 전념해볼 결심 때문이라고 사표를 낸 이유를 설명했다. 윤상원은 단지 그의 부친이 자신을 대학 졸업까지 시키느라고 무진 애를 쓴 것 때문에 은행에 취직했을뿐이었다. 그는 은행에 합격함으로써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훌륭한 자식임을 입증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일류 직장의 입사시험에 합격함으로써 최소한 그의 부친이 당신 친구들 앞에서 체면은 구기지 않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내 아들은 강한 성격과 의지를 가진 자식이었소."
윤상원의 아버지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 나와 아들놈은 꽤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소. 나는 녀석이 억압받고 착취당한 사람들에 대한 너무 깊은 동정심을 갖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내가 말했소. '돈을 많이 벌어서 도와주면 되지 않겠냐?' 아들이 대답합디다. '내가 돈을 벌어 도대체 몇 사람이나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다'라고 말이요. 수도 없이 말싸움을 해봤지만, 한 번도 아들놈을 이겨보지 못했소."
그 노인은 언성을 낮춰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은행에 사표를 낸 후 아들놈은 스티로폴 공장에 다녔소. 그 즈음에 그 애의 어머니가 장티푸스에 걸려 할 수 없이 입원하게 되었소. 아들과 친구 한 녀석이 병문안을 왔었지요. 아직 열이 채 가시지 않은 그 애 어머니가 말했소. '너를 대학에 보내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도 알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막노동 일을 하고 있구나.' 아들이 대답했소. '어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어머니를 정말로 모시겠습니다. 지금은 한 사람 대신에 여러 사람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진짜로 어머니를 모실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하더군요."
이태복에 따르면, 그 당시 "윤상원의 이념적, 이론적 바탕은 그리 세련되거나 심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에 의해 움직였지만 그렇게 과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노동자가 되겠다는 소리는 많이 했지만 실제로 공장으로 들어간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태복씨의 말이었다.
광주지역에서 윤상원보다 먼저 공장에 들어간 지식인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도 금방 그만두고 말았었다. 이태복씨는 윤상원이 지식인 노동자로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까 하는 화두를 앞에 두고 몇 달 동안 고심했다고 말했다. 이씨에 따르면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는 그 문제에 대한 세 가지의 사상적 흐름이 있었다. 당시 광주지역 활동가들 사이에서 다수 의견을 이루었던 한 흐름은 노동자가 되는 것 그 자체를 중요시 여기는 관점이었다. 두 번째의 흐름은 노동자, 학생, 화이트칼라 봉급생활자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즉각 지하저항조직을 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관점이었다. 이 그룹의 관점은 농촌지역에 거점을 둔 무장투쟁을 개시하자는 방향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이 흐름의 추종자들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결성했는데, 1979년 10월 활동가들이 대부분 구속되었다. 세 번째의 관점은 노동자, 학생 들의 일반적인 정치의식 수준, 특히 호남지역의 수준이 아직 형성단계에 있으므로 중요한 것은 유연성을 가지고 준비태세를 갖추는 데 있다는 흐름이었다. 윤상원은 세 번째의 관점에 가까운 편이었다. 윤상원은 남한의 산업화 경향이 결정적 변수하고 생각했다. 시대는 농민운동이 아닌 노동운동을 요구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은 무장투쟁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지 노동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단정했다. 일생을 공장노동에 바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덧붙였다.
"윤상원이 은행원직을 포기한 것은 그의 미래의 행로 전반을 결정짓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후 그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보다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당시 그는 이론가나 공산주의자라기 보다는 민중민주주의적 해결방안 이상의 더욱 진지한 해답을 찾아헤맨 민중민주주의자를 넘어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광주 사람들이 나를 임곡에 있는 윤상원의 집에 데리고 갔을 때 그의 장서를 훑어보고는 윤상원에 대한 그러한 평가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윤상원의 가족은 1992년 몸채를 현대식으로 신축했으나 여전히 농가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윤상원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안방에서 병아리 한 마리가 아장아장 걸어다니고 있었다. 윤상원은 아버지를 닮았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더욱 더 닮았음을 알 수 있었다. 마당 건너편에는 윤상원이 자고 공부했던 전형적인 한국의 행랑채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의 방에는 책과 함께 사진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내가 거기에서 보았던 책들은 다음과 같았는데 모두 영문판이었다. 게오르그 리히트하임의 '사회주의의 기원'(해적판), 폴 바란과 폴 스위지의 '독점자본', 사무엘 헌팅턴의 '변화하는 사회주의 정치질서', 잭 그레이와 패트릭 카벤디쉬의 '위기의 중국 공산주의', 존 허츠의 '정치적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모리스 돕의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 게오르그 루카치스의 '역사와 계급의식', '마르크스 변증법 연구', 시드니 버번의 '소집단과 정치적 행동'(이 책은 미문화원 도서관에서 대출받은 책으로 반환하지 않은 것이었다), 알렉산더 워즈의 '전후시기의 러시아', 커류 헌트의 '공산주의의 이론과 실제' 등이었다. 책의 제목들은 공산주의에 관한 주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책들은 선전선동과는 전혀 거리가 먼 진지한 학문적 분석을 담은 저서들이었다. 윤상원의 독서목록을 보니 1960년대 순진했던 시절의 내 자신의 서적목록이 떠올랐다. 당시 학문적 정열과 합리적인 탐구정신을 가진 미국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사회주의적 이상에 대해 흥미를 갖는 것은 정상적인 양상으로 간주되었다. 나는 '자본주의 분석' 등과 같은 과목을 수강하고 헤겔의 변증법과 씨름하면서 윤상원이 1970년대에 들어 성인이 되면서 걸어왔음직한 길과 거의 흡사한 실험적 과정을 밟으면서 지내왔었다.
1978년 윤상원은 야학을 개설하고 노동자들에게 노동법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전용호씨 등이 그를 도와주었다. 1979년 중반 윤상원은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과 그 연대기구인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의 광주지역 조직역할을 맡았다. 이태복씨는 1978년 전민련 중앙조직의 결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었다. 윤상원이 전민련에 가입할 때 그 자격조건을 심사했던 사람이 이태복씨였다. 윤상원과 이태복씨는 양대 조직에 걸친 친밀한 동지였는데, 경찰은 두 조직을 합쳐서 '학림(학문의 숲)'이라고 불렀다. 한국계 미국인 소유였던 YH 섬유회사의 파업을 주동했던 단체는 학림이었다. 회사의 사주는 노동자의 요구가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이라고 매도한 채 직장을 폐쇄하고 해외로 도망쳐 버렸다. 정부가 회사를 구하자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묵살해버리자 그들은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그 농성은 법원이 김영삼 총재의 총재권한정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인 직후에 일어났다. 정부당국은 농성을 김영삼과 노동자 세력의 제휴로 간주하고 이를 강제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여성노동자 김경숙씨가 투신해 숨진 채 발견되었다. YH 사건은 김영삼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이끌어냈고 결국 1979년 10월 부마항쟁을 유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며칠 후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다. 12.12 군사쿠데타에 뒤이은 '서울의 봄'인 1980년 5월 15일 서울에서는 최소한 1만 명의 학생들이 전두환 사임과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학생시위대 사이에는 향후의 행동방침에 관한 상이한 견해들이 존재했다. 이태복씨 그룹은 방송국 등 서울 중심부의 핵심 거점의 점거를 요구했다. 그러나 다수파는 5월 16일의 시위를 중지하고 정부의 조치를 기다려보기로 결정했다.
"윤상원은 이 말을 듣고 서울의 패배를 격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이태복씨가 전해준 말이다. 이태복씨와 윤상원의 조직은 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중요한 사건들에 이렇게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광주항쟁 직전 윤상원을 만났을 때 우리는 둘 다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었습니다." 이씨가 말했다. "우리는 부산, 마산, 그리고 서울 등지에서 열렬한 대중적 저항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광주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대중적 저항이 전개되면 최후까지 투쟁하여 80년대를 이끌어갈 운동역량을 키우자고 다짐했습니다." '최후까지 투쟁하여'라는 표현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5월 17일 전두환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으며 대학을 폐쇄했다. 바로 그 다음날 광주항쟁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강경노선의 시위대는 전두환의 조치에 반대하는 수백 명의 대학생들뿐이었다. 그들의 시위 중 '검은 베레모'의 공수특전단을 포함한 계엄군들이 시위대를 에워싸고 시위대와 구경꾼들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하게 총검으로 찌르고 곤봉으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만행은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망 소식은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20일의 도청앞 시위에는 십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동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단계에서는 사태를 총괄하는 지도자는 없었다. 분개한 윤상원은 5월 18일 밤 광주에서 서울에 있는 이태복에게 전화를 걸어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려주었다.
이태복씨에 따르면 윤상원은 친구와 대학 후배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발행하고 화염병을 만들었다. 윤상원은 초기단계에서는 지도자 중 한 명에 불과했었다. 그때까지는 진정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대략 이십만 명의 시민들이 시위에 가담했던 5월 21일부터 시민들은 경찰서 및 군 무기고로부터 무기들을 탈취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경찰서로 갑시다!'라고 구호를 외치면 모두 다 따라갔습니다." 전용호씨가 회고했다.
전씨에 따르면 윤상원은 무기고 습격을 이끌었으며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의 장갑차와 그 밖의 차량 탈취를 지휘했다. 순식간에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무장을 하게 되었고 계엄군은 광주로부터 퇴각했다. 광주시장은 계엄군과의 협상을 위하여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결국 시민들을 설득하여 모든 무기를 회수해 계엄군측에 반납하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시민수습대책위는 주로 시청 및 도청 관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관리들이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용호씨가 말했다. 시민수습대책위는 시민들의 자제를 호소했다. 하지만 수많은 시민들은 유혈 참극을 목격한 후 아직도 극심한 감정적인 동요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시민들은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부터 윤상원의 역할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용호씨는 말했다.
윤상원은 시민수습대책위의 해결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습대책위는 협조하는 체하면서 보다 진보적인 사람들을 뽑아 수습대책위의 구성원으로 만들었다. 광주시장은 더 이상 내부적으로 분열된 수습대책위를 끌고 갈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윤상원은 계속하여 진보적 인사들을 끌어들여 5월 22일 혹은 23일경에는 수습대책위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제 2단계의 투쟁은 조직화된 투쟁이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우리 그룹 - 전국민주노동자연맹 - 의 관점과 일치했습니다." 이태복씨가 말했다.
윤상원은 청년들을 무장시켜 YMCA에 배치했다고 전용호씨가 말했다. "지원자가 나타나면 윤상원은 몇 분 동안 군사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러고 나서 도청 사수대로 보냈습니다. 박남선이라는 사람이 이미 일반 시민군의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윤상원은 박남선과 함께 항쟁을 끝까지 이끌어 나가려면 더 이상의 무기반납을 중지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항쟁 시작 이후 당시까지 박남선의 두드러진 역할을 감안할 때 계엄당국은 이미 박남선을 표적으로 삼았고, 결국에는 어떻게 하든 그를 죽이고 말 것이라고 윤상원은 박남선을 설득했다. 결국 박남선은 도청에 남아 무장투쟁을 지도하면서 윤상원을 도와주기로 동의했다. 시민집회는 계속되었다. 5월 24일에는 빗속에도 불구하고 5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윤상원은 박남선을 비롯한 무장시민군들을 자신의 뒤에 세워둔 채로 연설을 했다. 그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기도 했고, 몇몇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이기도했다. 윤상원은 수습대책위원회가 모든 무기를 회수하여 반환하기로 결정한 것은 광주시민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도청 앞에 모인 시민들에게 주장했다. 시민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했다. 무기를 무조건 반납하고 나면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 수습위원회는 아무런 해답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윤상원은 자신들의 주장, 즉 계속적인 무장항쟁이 무조건적 항복의 대안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누구든지 새로운 투쟁위원회의 방침을 따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위원회를 떠나라고 주장했다. 몇몇 위원은 떠났고 초기 위원회 위원 중 몇몇은 당분간 윤상원과 뜻을 같이하겠다고 했다. 그런 방법으로 그와 그의 그룹은 투쟁위원회를 장악했다(5월 25일 민주시민투쟁위원회 결성 - 편집자).
윤상원은 투쟁위원회의 공식 조직표의 꼭대기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했던 위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그들 중 두 명을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윤상원은 그러한 명목상의 지도자 밑에서 '대변인'의 직위를 가지고 선전, 기획, 보급 등 모든 운영 기능을 관장했다. 다만 무장투쟁의 책임은 박남선이 맡았다. 윤상원은 홍보부를 이끌었는데 여기에는 가두차량방송반, 유인물제작팀(전용호씨는 여기에 속했다), 모금 및 시민헌혈 그리고 네 번째로 시민집회를 조직하는 팀들이 있었다.
"아마도 윤상원만이 전략적 관점을 갖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전용호씨가 말했다.
전략적 관점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전용호씨를 비롯한 몇 사람이 십여 분 남짓 서둘러 대답을 했고, 박성현씨가 윤상원의 '고립지역 사수'라는 전략을 요약 해석해 주었다. 그 생각은 최후까지 굴복하지 않고 저항함으로써 '군부 통치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를 점차적으로 최대화하는' 전략이었다. 광주항쟁자들은 군부 통치자들을 딜레마에 빠뜨리고자 했다. 즉, "전두환 일당들아, 당신들에게 더 많은 시민들을 사살할 배짱이 없다면 항복하라. 만약, 당신들에게 더 이상의 무모한 만용이 있다면 최후의 일인까지 사실함으로써 스스로의 야만성을 증거하라"였다.
"피억압자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박성현씨가 물었다. 그리하여 윤상원과 몇몇 간부들은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대가는 자신들의 목숨이었다.
"그들은 항쟁을 종결하고 싶었습니다. 항쟁후 최후의 마침표를 찍길 원했던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런 소망과 함께 만약 자신들이 배수진을 치고 버틸 경우 다른 항쟁이 여기저기서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용호씨가 끼어들어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을 인용했다. "주여, 가능하다면 이 잔을 거두어주소서...."
박성현씨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나에게 요약해주면서, 윤상원을 비롯한 핵심 인물들 사이에는 그 마지막 잔이 거두어지지 않을 때 닥쳐올 현실에 대해 체념하고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희망적인 뉴스를 전파했다'고 말했다. 특히 윤상원과 몇몇 사람들은 비록 '마음속으로는 그러리라고 믿고 있지는 않았었지만 미국이 개입하여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아줬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한 것은 핵심 인물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그 절박한 상황을 버티고 이겨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광주가 미래의 혁명가들에게 하나의 상징이자 집결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항복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출신 배경들은 매우 다양했다. 몇몇 목사와 변호사 등은 이미 이름 있는 명망가들이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이름도 모르는 민초들이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계엄군 보안사측에서 항쟁 중에 항쟁지도부 속으로 침투하기가 쉬웠다. 누군가가 집회 도중에 시민들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하여 소리를 높이면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당신 빨갱이지!'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5월 25일 소위 '독침사건'이 있었다. 북한의 남파간첩이 독침을 갖고 다닌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있었다. 항쟁지도부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어떤 사람이 독침에 찔렸다고 소리쳤습니다." 당시에는 학생투사였고 현재는 광주에서 화랑을 경영하고 있는 김윤기씨가 말했다. 주변에 있던 몇 명이 그 '희생자'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었는데 결국 '아무것에도 찔리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김윤기씨는 이러한 종류의 정부의 공작활동이 내가 5월 26일 광주에 도착하여 최초의 정례 외신기자회견 중에 목격한 무장 대원들이 히스테리적으로 허둥지둥했던 주요 원인이었다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김씨는 당시대변인실 통제와 윤상원의 경호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저도 히스테리칼했던 무장시민군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김씨가 말했다. 그의 말은 내가 1980년 당시 광주를 묘사했던 단어를 상기시켜 주었다. 김윤기씨를 보면서 나는 1980년 그날 윤상원의 주위에서 보았던 젊은 청년들 중 한 명의 얼굴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저는 윤상원씨를 매우 예리하고 지적인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의 그러한 성격이 최후의 순간 그에게 그토록 단하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김윤기씨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결단을 함께 나눈 사람은 비교적 적었다. 애초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호소에 따라 탈취했던 대부분의 무기들을 반납한 후 약 200여 명만이 도청에 남았다고 전용호씨가 말했다. 뜨거운 가슴의 혈기로 10분 동안의 군사훈련에 자발적으로 참가했던 많은 수의 젊은이들은 용기를 잃고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도청을 떠났던 청년들 중의 한 명이 마지막 날에 날 다시 도청 건물안으로 찾아왔다. 그 청년은 동료에게 무장투쟁을 포기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며칠 전 계엄군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한 공포심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5월 26일 저녁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 중 한 명의 가족이 항쟁지도부를 찾아와 계엄군이 다음날 아침에 광주로 진격해 들어올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고 전용호씨는 회상했다. 도청 안에는 약 300여 명의 시민군들이 남아 있었다. 윤상원은 그들을 모두 집합시켜 놓고 여자들과 아직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나이 어린 투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결국 약 150여 명만이 도청에 남았다. 그들은 총을 배급받아 방어지점에 배치되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시민군들은 응사하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M1 소총과 칼빈 소총은 도저히 계엄군의 M16 소총의 적수가 될 수 없었고, 그들의 보잘것없는 군사훈련으로는 어림도 없었다고 전용호씨가 말했다. 윤상원과 함께 있던 시민군들은 도청 청사 전면을 향해 배치되었으나 계엄군은 건물 후방으로부터 진격해 들어왔다. 계엄군은 시민군들에게 무기를 복도 쪽으로 버리고 기어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사살하겠다고 명령했다. 몇몇은 명령에 따라 항복했다. 그러나 윤상원은 총을 겨눈 채 복도 쪽으로 나오는 손간 콩팥 부위에 총상을 당했다고 전씨가 말했다. 당시 김영철씨와 이양현씨가 윤상원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시민군의 기획실장과 부실장으로서 윤상원과 함께 일했던 사람이었다. 김영철이 피를 흘리고는 있으나 아직 숨을 쉬고 있던 대변인 지도자를 커튼에 싸서 옮기고 있을 때 수류탄이 터져 커튼에 불이 붙었다. AP통신의 테리 앤더슨 기자가 그의 주검을 목격했을 당시 윤상원의 사체가 불에 탄 이유가 그것으로 해명되었다. 나는 무장항쟁의 계획이 너무나도 형편없었던 것처럼 생각된다고 말했다. 아니면 시각을 바꿔 생각해볼 때, 효과적인 무장항쟁이라는 것은 결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윤상원에게는 본질적으로 상징적인 자살을 위한 계획밖에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전용호씨에게 물어보았다. 전용호씨는 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친 김에 전용호씨가 당시 윤상원의 '고립지대 사수' 전략을 알고 있었느냐고 다그쳐 물어보았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윤상원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용호씨의 대답이었다. 그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나중에야 윤상원의 전략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되었으나 윤상원의 역할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더디기만 했다. 심지어 명백히 정부당국조차 광주에서의 윤상원의 역할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다. 1981년 6월 400여 명에 달하는 윤상원의 학림 동지들이 체포되었다. 당시 이태복씨는 '3개월 동안 매우 엄청난 심문'을 당했다. 수사당국은 그 심문을 통해서야 비로소 광주항쟁 마지막에 사망한 대변인이 사실상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의 광주 조직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수사관들은 더 이상 그문제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다고 당시에 조사를 받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이태복씨는 말했다.
"정보당국은 윤상원의 광주에서의 역할이나 그의 정치적 조직 배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태복씨의 말이었다. 이태복씨의 이론은 당시 정부당국은 광주항쟁의 실질적 책임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에 관한 다른 두 가지의 생각에 너무 몰입해 있던 나머지 마지막 세 번째의 요인에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정부의 첫 번째 생각은, 실제로는 정부 관리들도 믿지 않았었지만 '불순분자들(북한간첩 또는 동조자)'의 책동이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설명은 많은 정부 관리들이 믿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김대중씨와 그의 지지자들이 광주항쟁을 배후조종했다는 설명이었다고 이태복씨는 말했다. 윤상원과 김대중씨는 어떤 관계였을까?
"아무 관계도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본 적도 없었습니다." 이태복씨의 대답이었다. 광주항쟁 직전 윤상원은 김대중씨를 위한 새로운 정당의 창당작업에 참여하자는 초청을 받았지만 그에게 제의된 직책은 아예 만들어지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1980년대 학생들 사이에서 일었던 '평양 열기'를 염두에 둔 채 나는 광주항쟁 배후에 북한의 숨은 손이 개입했다고 하는 정부의 주장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니냐고 다그쳐 물어보았다. 이태복씨는 한마디로 광주항쟁은 '결코 북한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태복씨는 1979년 윤상원의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가입 심사 당시 그의 북한에 대한 입장을 개인적인 면담을 통하여 알아보았다고 대답했다.
"우리가 이야기했던 세 가지의 그룹에 대해 기억을 돌이켜 보십시오. 남조선인민해방전선으로 대표되는 두 번째의 그룹이 친북성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윤상원이 속했던 세 번째 그룹은 시각이 달랐습니다. 윤상원은 북한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첫째는 그는 북한정권이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윤상원은 또한 김일성 개인우상숭배와 김정일에 대한 부자세습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윤상원은 결국 그러나 아직도 서서히 인정되기 시작했다. 그의 오랜 동지들은 힘을 합쳐 남한의 민주화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매년 수여하기 위하여 '윤상원상'을 설립했다. 그의 오랜 동지이자 지금은 환경운동에 열심인 임낙평씨는 윤상원 전기를 저술, 출판했다. 그러나 임씨는 "5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비록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어도 윤상원상 위원회의 활동은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주간 '노동자신문'의 김창중 광주지국장은 1993년 5월 16일 그 신문이 광주에서 '제1회 윤상원 문화축제'를 후원했다고 말했다.
"그 축제를 개최한 배경은 윤상원이야말로 광주항쟁 당시 끝까지 싸우다 죽은 유일한 혁명적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광주지역에서 최초로 과학적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항상 회의적인 언론인 시각에서 김창중씨에게 만일 한국의 노동자들이 1980년대 초에 그들의 자유를 획득했더라도 한국이 1980년대의 신속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다른화제를 들고 나오는 바람에 결국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자, 이제 그러면 우리는 광주에서의 윤상원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비록 그가 항쟁의 최종적 국면에서 지도자였던 것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도,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군부통치에 저항해 들고 일어선 것도 항쟁의 초기 국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어느 국면이 더욱 중요한 것일까?
"그 두 가지의 국면은 서로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이태복씨가 대답했다. 이어 박성현씨가 부연설명을 했다. "두 번째 국면은 어떻게 첫 번째 국면을 완결시키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무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무기를 내려놓는다는 말입니까? 그건 한마디로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저항자들에게 1980년대에 투쟁을 재개할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하고, 궁극적으로 군사정부를 뒤엎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윤상원의 '고립지역 사수' 전략이었다고 믿고 있었다.
"한국 국민들이 그토록 잔혹했던 폭력을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광주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남사회연구소의 이재의 소장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말했다. 결국 역사가들이 전부를 판가름해 줄 것이다. 지금은 다만 윤상원은 그의 짧은 생애를 한국의 변화를 위하여 헌신했고 자신의 생명을 의식적으로 포기했으며 결국 실제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하자. 우리가 윤상원의 집을 떠날 때 나는 옆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경찰차 한 대를 보았다. 수사당국은 나를 초대한 한때의 진보적 대학생이었던 윤상원의 동태를 살피러 왔던 것일까? 전용호씨와 서유진씨는 내 말을 듣고 웃었다.
"지금은 옛날과는 다릅니다." 서유진씨의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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