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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50 호
단기 4340. 8. 23 (음력 7. 1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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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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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코스& 모프, 친구들 시나리오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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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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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들의 말에 신경을 쓰지 마라. 비평가를 찬양하는 동상이 세워진 적은 없다. / 장 시벨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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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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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유혹의 구렁텅이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 마음이 오랫동안 풀어져 있으면 어떠한 일에서도 힘을 얻을 수가 없다. 마음은 곧 살아 움직이는 것이어서 무엇보다도 나쁜 마음이 우러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곧잘 유혹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나쁜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한번 나쁜 길로 빠지게 되면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해도 더욱 어지러운 혼란만을 느껴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진다. 나쁜 마음을 끊을 경우에도, 그 끊었다는 사실 자체가 어지러운 장애물로 가슴속에 가로놓여 새로운 혼란을 또 부채질한다. 정신이 어지러울 땐 모름지기 마음을 하나로 묶어 조용히 다스리며 관조할 뿐, 거기에 더불어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한다. 마음을 잘 다스리면 결국엔 안정을 되찾고 자신이 목적하는 일을 위해 정진할 수가 있다. 이것이 곧 마음을 안정시키는 첫째 단련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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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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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2. 유불 논쟁
3. 유불 논쟁의 평가
정도전의 불교 비판론은 극단적인 불교 배척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적극적으로 유학의 우월성을 역설하면서 유학의 인륜주의와 현세간주의에 입각하여 불교의 반윤리성과 이단성을 지적하고, 유학의 현실적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불교 교리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며, 유학의 현실 경영의 논리에 입각하여 불교의 무용성 또는 폐해성을 지적함으로써 배불의 타당성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도전의 불교 비판에는 철저한 불교 배척을 통해 주자학을 새로운 시대의 이념으로 정착시키려는 고려 말 조선 초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기인하는 극단적 배불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다. 그런 반면 기화의 호교론은 수세적이고 절충적인 조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첫째, 유학과 불교의 유사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인륜의 문제와 관련하여 기화는 불교도 인륜을 긍정하며 단지 그 실천 방법을 달리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둘째, 유학의 현세간 경영에 대한 불교의 보완적인 기능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유학의 형정에 의한 다스림에 대해 불교의 교리가 교화적인 측면을 강화하여 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기화는 불교가 가르침의 내용에서 유학과 유사성을 띨 뿐 아니라 나아가 유학의 미비점을 보완할 수 있기에 결코 무용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유학자들의 불교 배척은 부당하고 유, 불이 조화 속에서 양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겠다. 이러한 양자의 논쟁은 대등한 대립 관계 속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현실적 우위성과 주도성을 바탕으로 한 유학의 극단적인 배척에 대해 불교가 유, 불의 조화라는 소극적인 대응으로 자신의 존립 기반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학은 이미 논점을 선취한 채, 즉 자신의 사상 체계에 대한 타당성을 전제로 불교는 그와 다르므로 배척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 반면 불교는 자신의 사상 체계에 대한 타당성을 전제로 유학의 불교 비판에 정면 대응하지 못하고 주로 유학의 비판 내용에 대해 해명하고 호소하는 소극적인 호교론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기 유불 논쟁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이러한 절충적인 태도는 유학이 전면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고착시켜 가던 상황 아래 자기 보존책에서 나온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즉 부단히 유학적 제 개념들과의 친연성을 제시함으로써 유학적 세계와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고 설득한 결과 나온 것이었다. 불교의 이러한 소극적이고 절충적인 자세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에 수입된 외래 사상인 불교가 중국 불교로 개화한 것은 불교의 이러한 생존 전fir에서 나온 창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유불 논쟁은 주자학이나 불교 모두에게 이론적인 방면에서 창조적인 발전의 결과는 가져다 주지 못했다. 그것은 우선 유불 논쟁에서 양자의 주장이나 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거들이 기본적으로 중국 유불 논쟁의 성과들을 그대로 답습한 데 그 원인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유불논쟁은 적어도 이론적 측면에서는 한국 철학의 독자적 성과나 한국 철학상의 특수 문제로서의 의의를 찾을 수 없다. 단지 유학과 불교간의 갈등에서 드러나는 보편적인 양상을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에서의 유불 논쟁의 의의를 자리 매김할 여지는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 주자학의 특징으로 심성론적 사유의 심화를 지적하는데,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활발했던 윤리의 실천 문제가 중심이 된 유불 논쟁이 그러한 조선 주자학의 특징적 전개에 단서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유불 논쟁의 주된 쟁점이 인륜의 실천 문제라고 할 때 그러한 인륜의 실천 문제에 논리적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이 다름 아닌 심성론 혹은 인성론이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권근의 "입학도설"이 조선 주자학의 심성론적 전개에 내재적 단서를 제공했다면, 유불 논쟁은 외재적 요인으로서 주자학의 심성론적 전개에 하나의 촉매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불 논쟁에 대한 진전된 논의는 이러한 추측을 확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유불 논쟁은 여타의 논쟁과는 달리 동일한 활동 공간 안에서 서로 용납 불가능하거나 절충 불가능한 대립적인 두 이론간의 논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에서 독자적이고 필수적인 존재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사상간의 대립이었다. 그러므로 양자는 이론적 논쟁에서는 얼핏 양립 불가능한 듯한 세계관과 인간관 윤리관의 대립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절충과 양립의 여지가 없지 않았다. 즉 기화의 유불 조화론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유학은 현실의 사회 질서를 정초하는 기능에서는 장점을 지닌 반면, 불교는 현세 부정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는 초월 가능성을 제시하고,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는 종교적 심성을 충족시키는 데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유, 불의 대립이 그러하듯 한국에서의 유, 불의 대립도 결국은 유학이 불교의 자리를 대체하는 과정에서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나타나지만, 일단 유학이 자신의 확고한 영역을 확보한 이후에는 극단적 대립은 사라지고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병립의 상태가 지속된다. 실제로 조선 시대 중기 이후 유학 윤리가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고 나서, 즉 16세기 이후 즉 주자학의 예학화와 향약이 널리 실시된 이후 세간법과 출세간법의 역할 분담에 따른 양립 경향이 두드러지는 점은 그러한 양자의 현실적 기능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현세적 가치 지향의 윤리 체계와 출세적 가치 지향의 종교 체계가 각기 독자적인 영역을 지닌다는 점을 보여 준다. * 더 읽어 보아야 할 책들
도전건차, "주자학과 양명학", 김석근 외 옮김 (까치, 1986) 윤사순, "한국의 성리학과 실학" (열음사, 1987) 삼봉선생기념사업회, "삼봉정도전연구" (삼봉선생기념사업회, 1992) 송석구, "불교와 유교" (역경원, 1993) 주홍성 외, "한국철학사상사", 김문용 외 옮김 (예문서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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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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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 강풍, 폭풍, 태풍
본뜻 : 질풍은 초속 6-10미터로 부는 바람으로서,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흰 물결이 일 만큼부는 바람이다. 강풍은 초속 13.9-17.1미터로 부는 바람으로서, 나무 전체가 흔들리고 바람을 거슬러 걷기가 힘든 바람이다. 폭풍은 초속 10미터 이상의 바람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나, 보통 폭풍 경보가 발효될 때의 폭풍은 초속 21미터 이상이 바람이 3시간 이상 지속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태풍은 북태평양 남서부에서 발생하여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 동부를 강타하는 폭풍우를 동반한 맹렬한 열대성 저기압이다. 태풍은 시속 30-40킬로미터 정도로 부는 바람이지만 1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저기압을 형성하며 몰려오기 때문에 그 위력에 있어선 그 어떠한 바람보다도 무섭다 태풍이 불었다 하면 대개는 나무가 뽑히거나 해일이 일어나고 가옥이 파괴되는 등 엄청난 재난이 일어나곤 한다.
바뀐 뜻 : 뜻이 바뀐 말은 아니나, 각각의 바람이 가지고 있는 정확한 특성을 알리기 위해서 여기에 실었다. 바람의 위력으로 말하자면 태풍-폭풍-강풍-질풍의 순이 된다.
"보기글" -'질풍같이 달려왔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질풍이 도대체 어느 정도 부는 바람이지? -누구에게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폭풍 같은 사랑의 순간이 찾아오게 마련인 것 같다
차례
본뜻 : 우리 나라는 고려 시대까지 차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도 차를 끓여 올렸다. 그런데 이 차문화가 날이 갈수록 너무 사치스럽고 번거로워져서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 등이 이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제사를 차례라고 부르던 습속은 그대로 남아서 오늘날에도 제사를 '차례 지낸다'고 한다. 차례는 이처럼 제사 지낼 때 차를 끓여 올리는 예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바뀐 뜻 : 본래는 제사 지낼 때 차를 끓여 올리는 부분적인 예식이었으나 지금은 제사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고 있다.
"보기글" -이번 추석에 차례 지내러 내려가야 할텐데 교통편 때문에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이젠 차례도 간소하게 지내도록 하는 게 어떻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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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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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20세기의 숨은 전쟁 - 스페인 내전과 보스니아 내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렸나
1937년 스페인. 어두운 밤, 달리던 기차가 폭파되고 두 사내가 근처 산길을 타고 달아난다. 뒤쫓던 군인들의 총격에 폭파범 중 한 사람이 쓰러진다. 상처입은 자가 `로베르토`라 외치자 앞선 사내가 돌아와 부상자의 소망대로 권총을 조준 발사한다. 이 두 사내는 위험에 아랑곳없이 기차를 폭파하고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해서는 서로 죽일 만큼 어떤 비장한 각오로 살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왕년의 스타 게리 쿠퍼가 연기한 로베르토(영어식 발음으로는 로버트, 그러니까 그의 극중 이름은 로버트 조던이다)는 어느 카페에서 한 사내에게 교량을 폭파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이때부터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샘 우드 감독, 1943년)의 본격적 스토리가 시작된다. 지령에 따라 로베르토는 교량 근처의 산악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곳에는 지원을 약속한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있고 그 빨치산 무리 중에는 전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아름다운 여인 마리아(잉그리드 버그먼)가 포함되어 있다. 로베르토는 이 지역에 3일간 머무르고, 그 기간 동안 적의 교량을 폭파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관객이 기억할 것은 그런 군사 작전의 서스펜스가 아니다. 단 3일 만에 불타올랐다가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로베르토와 마리아의 사랑이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주된 테마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대사는 마리아의 다음과 같은 물음이다. “키스할 때 코는 어떡해야 하죠?” 청순하고 순결한 여인 마리아는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스페인의 집권 세력인 공화파 편에 섰던 사람으로 조그만 마을의 시장이었다. 국민파라 불리는 정치 세력들이 이 마을을 접수했을 때 마리아 가족의 비극이 빚어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리아 앞에서 처형당한다. 마리아도 차라리 죽으려고 국민파 군인 앞에서 `공화국 만세`를 외쳤지만, 군인들은 그녀를 죽이는 대신 씻지 못할 수모를 안긴다. 시장의 딸로 확인된 마리아를 삭발시켜 마을을 끌고 다니며 조롱하고 마침내는 수용소로 보낸 것이다. 이송 도중에 빨치산들에게 구출되었지만 그 기억은 참혹한 악몽으로 마리아를 짓누를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토의 이력도 독특하다. 미국의 대학 강사였던 그는 머나먼 타국까지 날아온 사람이다. 쿠데타 세력인 국민파를 꺾겠다는 의지로 안락한 생활을 마다하고 고향을 등진 것이다. 그는 마리아와 사랑을 키워 가면서도, 절대 자신의 군사적 임무를 잊지 않는다. 그는 주도면밀함과 용기로 교량 수비대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교량의 폭파에 성공한다. 그리고 뒤따라온 국민파의 기갑 부대와 기마병에게 총상을 입은 그는 다른 빨치산 동료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3일간의 짧지만 강렬한 마리아와의 사랑을 뒤에 남긴 채 자신은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무엇보다 청순한 잉그리드 버그먼의 모습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는 상당히 낡아 볼품없지만 그녀를 클로즈업하는 순간은 참으로 화면이 아름다워지는 게 사실이다. 이 영화는 또한 로베르토와 마리아의 아름답고 슬픈 러브 스토리로 기억되고 있다. 로베르토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리며 죽어 갔고, 살아남은 마리아도 영원히 로베르토를 기억했을 것이다. 단 3일 만에 기승전결의 과정이 펼쳐지는 슬픈 사랑이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중심 내용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사랑 이야기에 만족하지 않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사람도 있다. 왜 마리아의 부모는 죽임을 당했고 마리아는 악몽의 기억을 지니게 되는가. 또 왜 미국 대학 강사가 스페인에까지 와서 악전고투 끝에 죽음을 맞는가. 우리는 그 답을 흐릿한 수준이나마 제시할 수 있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마리아 개인사에도 상처를 준 것이며, 로베르토는 무도한 파시스트 국민파의 위협에서 공화국을 지키고자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것이다. 이런 대강의 지식이 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스페인 내전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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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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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7.내일을 위한 건배
감정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판단하지 말 것
당신은 혹시 모든 것을 한번에 단정지어 버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기의 기분에 따라 보고 들은 것에 각색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감정에 시달리면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강한 충격을 받거나 기분이 상했을 때, 또는 화가 났을 때 누구와도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러한 사람은 사물을 분석해 보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마음을 안정시킨 후에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파티에서 돌아오는 길에 베티는 남편 아르에게 나에 관한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죠 하고 따지듯이 물었다. 파티에서 아르가 몇 년 만에 만난 옛날 여자 친구와 열중해서 이야기한 것에 화가 났던 것이다. 아르는 가책을 느낄 만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만약 아르가 그 여자 친구를 무시하고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베티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르는 어째서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일까 아마 체면상 모르는 체하고 있는 것일 거야. 만일 베티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사실 그 자체와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기분을 별개로 생각하였다면,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일만 없었다면, 그녀는 자기 입장에서 불만을 느끼거나 남편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자기를 피해자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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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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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병풍에 시를 썼다가 죽음을 당한 임희재
임희재(1472-1504)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경여, 호는 물암이다. 간신 임사홍의 아들이다. 성종 17년(1486)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연산군 4년(1498)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는데, 이 해에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곤장을 맞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텐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나 재앙이 집안에서 일어날 줄 알지 못하고 오랑캐 막으려고 부질없이 만리장성 쌓았구나
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병풍에 씌어 있는 시를 보고 물었다.
"누가 쓴 것인가?" 임사홍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연산군이 성을 내며 말하였다. "경의 아들이 불충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임사홍이 꿇어앉아 말하였다. "이 자식의 성품과 행실이 불순한 것은 상감의 말씀과 같습니다. 신이 바로잡으려 했으나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임희재는 죽음을 당했는데, 그 아비 임사홍은 희재가 사형 당한 그날도 평일과 다름없이 잔치를 베풀어 마음껏 먹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연산군이 그런 사실을 탐문해 알고는 임사홍을 더욱 총애하였다. 임사홍의 맏아들 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에게 장가들었고, 넷째 아들 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에게 장가들었다.
임숭재는 남의 아내와 첩을 빼앗아다가 임금에게 바쳐 총애를 받았다. 임금이 자주 임사홍의 집에 들렀는데, 어느 날 임사홍이 울면서 고해 바쳤다.
"폐비 윤씨가 엄 숙의, 정 숙의의 참소로 인하여 사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엄 숙의와 정 숙의를 죽이고 조정의 선비 백여명을 죽였다. 시인이 시를 지어 임사홍 부자를 비방하였다.
작은 임가 숭재와 큰 임가 사홍은 천고의 간웅 중에 가장 큰 간웅이네 천도가 돌아오면 갚음 응당 있으리니 네 뼈 또한 바람에 흩날려짐을 알겠도다
처사 조광보가, 연산군이 임사홍을 총애하여 그가 권한을 휘둘러서 조정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송당 박영에게 말했다.
"너는 무부인데, 어찌하여 이놈을 죽이지 않느냐. 네가 죽이지 않으면 나는 너를 죽이겠다" "한 적을 목베어 나라의 근심거리를 제거하는 것은 진실로 마음에 달갑게 여기는 바이지만, 후일 역사에 '도적을 죽였다'라고 쓰면 어찌하겠소"
송당이 답변하자, 조광보가 웃으며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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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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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프로타고라스'는 희랍문화의 전성기인 기원전 5세기, '아테나이'에서 명성을 떨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출생지는 '트라키아'의 '아부델라'였으나 생애의 대부분을 '아테나이'에서 보냈으며 웅변과 처세술을 가르쳤다. '소크라테스'보다 열 살 가량 나이가 많았으며 그의 선배인 동시에 적수이기도 했다. 당시의 '아테나이'는 민주정치의 전성기로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 웅변술은 절대적이었으니만치 그의 인기도 대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서 오늘날까지 곧잘 인용되는 것이 바로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것이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지만 요컨데 인간 중심주의, 혹은 판단의 상대성을 나타내는 것. 즉 만물의 척도는 '자연'이라는 도그마에 반대하여 '있는 것'은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하는 인간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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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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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4장 완전한 기쁨을 주는 인생 수업
열 냥과 쉰 냥
호조 도키요리를 섬기며 효조슈가 되어 공정한 재판을 하였기 때문에 좋은 평판을 받았던 아오토 후지츠나가 어느 날 가마쿠라의 나메리카와라는 조그만 강을 건너다가 실수하여 엽전 열 냥을 물 속에 떨어뜨렸다. 후지츠나는 쉰 냥을 주고 횃불을 사고 많은 인부를 고용하여 엽전을 간신히 찾아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뒤에서 비웃으며 수군거렸다.
"겨우 열 냥을 주우려고 쉰 냥으로 횃불과 인부를 사다니 정말 어리석군." 후지츠나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물론 엽전 열 냥은 별 게 아닌 돈이지. 그러나 천하의 보물임에 틀림없다. 그것을 강물에 빠뜨려 잃어버리는 것은 천하의 보물을 잃는 것과 같다. 나는 비록 쉰 냥이나 되는 돈을 썼지만, 내가 쓴 그 돈은 천하에 널리 통용될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나 자신이 좀 손해를 보더라도 천하를 생각하면 한 냥도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얼마 안 되는 엽전이라 하여 포기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지."
자기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단돈 열 냥을 찾으려고 쉰 냥이나 되는 돈을 쓴 아오토 후지츠나의 행동은 산술 계산에 맞지 않아 당연히 비웃음을 살 일이다. 그리고 요즘 세상은 더더구나 아차 하면 그런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라 잠시도 방심도 할 수 없다.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은 그런 비웃음에 시달려 삐꺽대기 일쑤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산술 계산은 낮은 차원에서 자신에게 집착했을 때나 맞아떨어질 뿐이다. 보다 높은 차원에서는 오히려 반대가 된다. 천하를 생각하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때 후지츠나의 행동은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 된다. 이 일화가 그것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높은 차원에 입각한 계산이야말로 우리가 진실로 추구해야 할 길이라는 것을 가슴속 깊이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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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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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네번째 이야기 사냥꾼의 눈물에 속은 메추라기
언젠가 빠뜨로니오와 이야기하던 중 루까노르 백작은 이렇게 말했다. "빠뜨리니오, 때때로 사람들이 내게 고약한 일을 할 때가 있소. 내 재산이나 부하들에게 해를 입히고 난 후에 그 사실에 대해 심히 후회하고 있으며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내 앞에서 변명을 한다오. 이럴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으니 의견을 말해주오." 빠뜨로니오는 말했다. "루까노르 백작님, 백작님이 고민하고 계시는 그 문제는 메추라기 사냥을 하던 한 남자에게 일어난 일과 꽤 유사하군요."
한 남자가 메추라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쳤습니다. 메추라기가 그물에 걸리자 사냥꾼이 다가와 한 마리씩 죽이면서 그물에서 빼내고 있었지요. 마침 세찬 바람이 불어 사냥꾼은 먼지로 인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아직 그물 안에서 목숨을 부지하던 메추라기 한 마리가 다른 메추라기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들, 이것 좀 보시오. 이 남자는 비록 우리의 목숨을 빼앗았지만 마음으로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소."
방금 이렇게 말한 메추라기보다 현명해 사냥꾼의 그물을 피할 수 있었던 다른 메추라기가 그 근처를 날고 있다가 이 얘기를 듣고 이렇게 빈정거렸습니다.
"이것 보시오. 내가 당신 경우라면 나는 그물에 걸리지 않은 것을 신께 감사하겠소. 그리고 앞으로도 나와 내 친구들을 죽이고 해치고 난 후에 마음 아파 우는 사람의 손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빌겠소."
"루까노르 백작님, 당신을 해치면서 그 일로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단, 실제로 악의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소의 태도를 보시고, 그 행동이 불가피했으며 진실로 마음 아파한다고 판단되시면 눈감아주십시오. 그러나 실수하는 일이 자주 있어서 당신께 화를 입히거나 명예를 훼손하면 한 된다는 조건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그 반대로 계속 그런 행동을 하는 자가 있다면 멀리 내쳐서 당신의 재산과 명예를 보존하십시오.
* 짐짓 괴로운 척하며 해를 끼치는 자를 만나게 되면 그를 멀리할 궁리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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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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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제1부 신군부의 만행을 전세계로 타전하다
7. 카메라에 담은 5.18광주 현장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아직도 가슴 깊이 담고 있는 광주시민에게 나는 이 글을 바친다. 내 생애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최초의 엄청난 슬픔과 서러움이었지만,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져야 할 이 역사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을 나 역시 기록할 수밖에 없다. 먼저 나처럼 광주민중항쟁을 가슴 깊이 담고 있을 광주시민과 무고한 피해자들에 대한 나의 심정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자식의 죽음과 시신을 목격했던 가족들을 찍은 사진은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 있으며,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17년 전에 있었던 그 일이 내게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각된다.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던 5월이라는 계절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계절이며, 생명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좋은 계절에 한국 국기인 태극기에 새겨진 원의 상징, 양과 음의 조화는 군부독재에 의해서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단지 한 육군 장성의 권력에 대한 야심 때문에 한국 군인들이 그들의 동족이자 친구를 죽이려 했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 당시 대중매체에서 일했고, 독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사건이 평화와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싸웠던 작은 도시 '광주'의 상징으로서 전세계인에게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모든 영령들게 머리 숙여 경건한 조의를 표한다.
1980년 5월 19일 월요일 아침, 나는 광주를 비롯한 한국의 다른 도시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투쟁에 대해서 들었다. 순간 나는 ARD함부르크 본사 뉴스센터에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내가 취재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센터에 전화했을 때는 불행히도 책임자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허락을 받기 위해 책임자의 집으로 전화를 하였다. 한국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면적인 언론통제를 감행한 후로는 한국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한 뉴스가 급격히 줄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때문에 이 사건은 우리를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나는 한국의 자세한 상황을 알 만한 곳은 전부 전화를 했고, 한국과 직접 연락을 시도하려고 했다. 가능한 한 빨리 한국으로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가는 것 같았다. 이러는 중에 나는 많은 학생들이 군대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함부르크에 있는 본사에 전화를 걸어 새로운 사건과 불안정한 한국의 상황을 알렸다. 일본은 독일보다 8시간이 빠르기 때문에, 함부르크는 여전히 밤이었다. 편집국장은 전화로 취재 허락을 내렸다. 그러나 나는 사건 현장인 광주가 서울과 김포공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마감시간 안에 원고를 전달하기는 힘들거라고 말했다. 복잡한 상황에서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성능 좋은 통신위성도 없었고, 설사 그것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위성을 이용한다면 한국 정부가 독일 언론의 취재 사실을 알아차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어려움을 돌파하고 뭔가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잃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내게 이 사건 취재의 허가가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인 기록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허락이 떨어진 후 나는 필름 편집자, 그리고 음향효과 담당과 함께 최소한의 촬영장비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현금만을 가지고 한국으로 곧장 출발했다. 이날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달리 김포공항에서조차 세관원은 평상시처럼 장비검사로 시간을 끌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마치 언론매체와 TV 방송이 환영을 받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완벽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희한한 대접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한번도 세관원에게 기대할 수 없었던 일들이 그토록 빠르게 통과되었다는 것이 너무 희한했다.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정치적으로 유동적인 상황이어서였을까?
우리를 안내할 차를 운전하기 위해 '김사복'이라는 한국 사람이 우리가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안내로 서울시내 조선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센터에 알렸다. 당장 광주로 향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그날 밤은 조선호텔에 머물기로 하였다. 그때 한국 상황은 그 진행된 속도만큼이나 기묘해서 나는 우리일행의 입국 사실을 정부의 외국인 취급기관 공무원에게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뒤, 엄중한 언론 통제가 한반도 전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그들의 통제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단히 유동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낮 시간에 서울을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경험 많은 노련한 운전사 김사복씨도 역시 우리의 결정에 동의했다. 다음날 5월 20일 화요일 아침 일찍 우리는 서울을 출발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조차 확실할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조선호텔에다 개인물품 몇 가지는 남겨놓고 떠났다. 출발하기 전까지 입수된 최신 정보로는 서울로 오는 길이 모두 통제되고, 계엄군이 광주로 가는 모든 길목을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버스로는 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는 취재를 포기하고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쿄에서 온 또 한사람의 독일인 취재기자가 우리와 동승하였다. 우리는 그에게 광주로 가는 데 기자로서 어떠한 특별대접도 받지 못할 거라고 확인시켜줬다. 고속도로 입구의 '출입통제'라는 표지는 우리에게는 경고와도 같았다. 그러나 김사복씨는 그걸 무시한 채 텅 비어 있는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그 길은 마치 곧 우리 앞길을 누군가 막고 나설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군데군데 우회로 표지가 계속 나타났지만, 김 기사는 광주로 곧장 달렸다. 나는 차 앞자리에 앉아 카메라 촬영준비를 한 상태에서 흥미롭게 차창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우리는 광주에서 75킬로미터 떨어진 북쪽에서 멈추어야 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우리 차를 샅샅이 살피더니 순순히 보내주었다. 계속해서 고속도로를 달리다 광주로부터 30킬로미터 전방에 이르러 터널(호남터널)을 하나 만났다. 이 터널은 중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면서 모든 차량의 출입을 통제했다. 터널 앞에 이르자 군인들이 우리 일행을 멈추라고 했다. 적어도 15대의 탱크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몇 개의 기관총이 우리 차를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군인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달리다 보니 푸른 들판에 둘러싸인 작은 시골마을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광주까지 남은 몇 킬로미터가 가장 어려운 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 곳곳에서 외국 언론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우리는 계엄군의 눈을 피해 광주로 갈 수 있는 샛길을 찾아 헤매야 했다. 가는 데마다 군인들이 좍 깔려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모든 길이 통제된 상태였지만 광주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바로 그때 이 군대가 가로막고 있는 저지선을 뚫고 광주로 들어가기 위해 고민하다 나는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우리 일행의 책임자를 잃고 그를 찾으러 다닌다는 식으로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다. 그후 이 이야기는 일본의 외신기자클럽에서 펴낸 신문(총 12권 중 5권째)의 맨 앞장에 실려 소개되기도 했다. 이 글의 맨 앞에 언급되었던 우리 팀의 책임자는 사실 우리 여행이 준비 중일 때 도쿄 사무실에서 빠져나온 이래로 이 여행을 함께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들렸던지 군인들은 우리가 정말 잃어버린 직장 상사를 찾기 위해 광주로 들어가려 한 것이라고 받아 들였고 우리는 그 어려운 관문을 마침내 통과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우리는 낯선 국도에서 광주로 가는 길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 길은 모래와 돌과 여러 파편들로 부분부분 뒤덮여 있었고 바리케이드도 쳐져 있었다. 아마도 광주시민군이 시위하면서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짐작됐다. 노련한 운전사 김사복씨는 어렵지 않게 이 장애물을 통과해 길을 빠져나갔다. 이곳은 광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이었다. 그때부터 대단히 조심스럽게 운전하기 시작했다. 차창 밖에다는 내가 독일에서 챙겨온 독일 텔레비전 깃발을 꽂았다. 이 깃발이 계엄군의 차량과는 구별되기를 기원했다. 한참 후 부서진 유리창에다 태극기와 덜렁거리는 플래카드를 달고 다니는 시내버스 여러대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우리가 가고 있는 좁은 길 뒤로 다섯 명의 무장한 청년들이 지프차를 타고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또 그 뒤로 젊은 학생들이 머리띠를 하고, 아무 막대기나 들고서 무기도 없이 큰 버스에 가득 탄 채 우리 앞으로 오고 있는 것을 보였다. 우리는 차를 멈췄고 그들 역시 차를 돌렸다. 그들은 우리를 무척 환영하는 눈치였다. 나는 학생들이 가득 탄 트럭으로 옮겨 탔다. 그들과 함께 시내로 들어가면서 동료인 헤닝과 첫 번째 사진 작업을 시도하였다. 트럭의 맨 꼭대기에 탄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다른 버스에 탄 젊은이들은 모두 머리띠를 동여매고, 버스가 움직이는 리듬에 따라서 깃발을 매단 막대기를 마구 흔들고 있었다. 내 느낌으로 그들은 매우 고무돼 있었다. 우리 뒤에는 여전히 완전무장한 시민군의 군용 지프차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광주시내의 어떤 널찍한 장소에 다다랐을 때 수천 명의 군중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그중 어떤 한 사람이 서툰 영어로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는 대단히 비통한 목소리로 어젯밤 많은 자신의 친구들이 사살되었고, 병원은 치료할 만한 공간이 부족할 정도로 부상자들로 가득 찼다고 말했다. 군인들이 야간 조준경을 갖춘 총으로 그들을 겨눌 때 그 앞에서 누구도 군인의 총알을 피할 길이 없었음을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어 갔다. 누구도 그들의 총구 앞에서 숨거나 도망칠 여지가 없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 시내에 있는 종합병원의 뒷마당으로 가면서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을 카메라에 담았다. 내 마음속 한켠에 치밀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 광주시민들을 보면서 감동되었다. 병원 안에 줄줄이 놓여 있던 많은 관을 열어 그들의 사랑하는 친구와 친척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대부분 어린 학생들의 시체였는데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필름에 담았다. 내 생애에서 한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너무 꽉 막혀서 사진 찍는 것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얀색 글씨로 '희망의 80년대로'라고 쓴 길고 파란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깃발들은 건물 한가운데 걸려 있었고 누군가가 영어로 그 의미를 통역해주었다. 이처럼 슬프고 고통스런 순간에 깃발 속의 슬로건은 냉소적인 느낌을 갖게 했다. 그는 또 광주시 전역이 학생들과 시민들의 통제 속에 있다고 흥분조로 말했다. 나는 광주시 전체가 조망되는 높은 건물을 찾다가 완전히 파괴된 광주 MBC TV방송국을 지나치게 되었다. 열린 창문 속으로 큰 불이 난 흔적이 엿보였다. 나는 이러한 항쟁 초기의 생생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광주시 전체가 전망되는 곳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일하는 두 명의 미국인을 만났다. 나는 그들을 취재했다. 그들은 분노로 물들었던 이틀간의 광주 상황을 내게 설명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 그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건물 옥상에서 그들은 군인들에 의해 광주시민들이 무참히 짓밟혔고 이로 인해 항쟁으로 치달았다고 말했다. 그들을 취재한 뒤 시계를 본 나는 당일 서울로 돌아가려면 속히 광주를 떠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나와 동료들은 두 곳을 더 취재하기로 했다. 한 곳은 과일과 고기점이 늘어선 시장이었고, 다른 곳은 멀리 탱크들이 보이는 교차로 근처의 높은 바리케이드 장면이었다. 그러나 나의 긴 렌즈로도 바리케이드 안쪽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주위의 크고 긴 통나무로 만든 바리케이드와 며칠 전 큰 폭동이 있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전소된 군대 트럭을 찍었다. 시장에서의 모습들은 평온했다. 그 어디에도 슬픔과 불안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많은 과일과 음식 들이 있었다. 정말로 온갖 종류의 음식들이 진열돼 있었다. 시장생활은 평상 때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나는 시장에서 잠깐 목을 축인 뒤 방금 찍은 노출된 필름을 조심스럽게 필름캔과 박스에 담았다. 물론 나는 내가 찍은 필름이 안찍은 필름처럼 위장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 전날 찍은 다섯 개의 릴 목솜 티셔츠와 셔츠 속에 숨겼다. 다른 필름들은 압수당하더라도 이것만은 꼭 살리고 싶었다.
우리는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취재를 계속하기 위해 금요일인 23일 광주에 가기로 계획했다. 우리는 곳곳의 바리케이드를 지났고 잠시 후 군대통제 지역과 마주쳤다. 그들은 이번엔 모든 것을 세심히 조사했다. 군인들이 우리를 차에서 내리게 하고 찍히지 않은 필름을 조사했다. 문제점을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은 우리를 이내 보내주었고 다음의 몇 군데 검문소는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예상보다도 훨씬 많은 22시간여가 소모됐다. 그때는 이미 도쿄로 광주에 대한 릴을 빼돌리기에 늦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본항공 소속의 1등석을 예매했다. 이유인즉 1등석 승객이 되면 의심을 받지 않고 내 물건이 손가방처럼 쉽게 통과돼 안전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예상은 적중했다. 나는 필름을 큰 금속캔 속에 포장해 과자더미 속에 숨겼다. 또 필름을 단단한 금속포장과 파란색 리본으로 화려하게 꾸며 선물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내 의도대로 공항관리들의 조사를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 탑승한 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마침내 내 필름릴의 무사함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는 필름릴을 도쿄 주재 동료들에게 넘기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들은 즉시 함부르크의 뉴스센터에 필름을 전달했고, 나중에 알았지만 독일에서 몇 회에 걸쳐 방영했다. 그 필름은 또 유로비전(EUROVISION)과 미국에 제공됐다. 나는 3시간이 지난 5월 22일 오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광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번에 광주시민들의 상황은 더욱 혼란과 불안 속에 놓여 있었다. 학생위원회가 모든 광주시민들에게 무기를 반납하라고 요청했을 때 나에게도 뭔가가 일어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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