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249 호
단기 4340. 8. 22 (음력 7. 1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발행지가 길어질 경우 하단부분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문학소식
|
"젊은 작가들 난해한 허무주의… 소통에는 무관심" 문학지 , 脫 사회적 경향 비판… 김주연씨 "답답한 골방으로의 유폐에서 탈출을" 쓴소리
|
현실과 동떨어져 지나치게 난해하거나 자기중심적인 문학을 추구하는 작가의 태도가 독자와의 소통 부재를 일으켜 오늘날 '문학의 위기'를 낳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0일 출간된 문학 계간지 <오늘의 문예비평> 가을호는 '한국문학의 소통을 위하여'란 제목의 비평 특집에서 젊은 작가들의 탈사회적, 독아(獨我)적 경향을 비판했다.
평론가 이경수씨는 황병승, 김민정, 이민하씨 등 소위 '미래파' 시인들이 추구하는 난해성을 문제 삼았다. 이씨는 이들의 시가 "현실과 환상, 남성과 여성, 국가와 국가 등 경계를 넘나드는 횡단의 상상력으로 시단의 오랜 침묵을 깨뜨렸다"면서도 "이들의 시적 경향이 지나치게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고 경계했다.
"이들의 실험적 시는 운명적으로 난해성을 동반한다"고 지적한 이씨는 "김수영 시의 난해성이 현실 전복적 불온함에서 비롯했다면, 미래파의 그것은 자신의 세계에 갇혀 독자를 소외시킨다"고 비판했다. 이씨는 허수경, 이기인, 하종오 시인의 작품을 "문제적 현실에 맞서 자기 극복과 소통의 가능성을 여는 시도"라고 평가하며 "최근 우리 시는 허무, 회의를 퍼뜨리는 데 몰두하면서 구체적 삶에서 희망을 찾는 일에 무심하다"고 썼다.
평론가 양진오씨는 한유주씨와 정이현씨의 소설을 대비했다. 한씨의 소설집 <달로>를 "형이상학적 윤리 비판과 기원 탐색을 주제로 삼는 점에서 철저하게 근대문학적"이라며 최근 확산 중인 '근대문학 종언론'을 견제한 양씨는 "한유주 소설의 낯섦은 세계를 무의미하다며 과거로 회귀하려는 퇴행 심리에서 비롯한 자기 진술 과잉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정씨의 <달콤한 나의 도시>는 인물 묘사가 전형성을 벗지 못한 한계가 있지만 "거대 도시의 마성에 포획된 30대 여성의 불안을 그려 특정 세대가 겪는 실존의 리얼리티를 말했다"는 점에서 독자와 소통 가능한 작품이다. 양씨는 "김훈의 <남한산성>은 작가가 자신의 말을 아끼고 다양한 입장의 말을 담아 독자의 주체적 읽기를 유도한다"며 "정이현 방식이든 김훈 방식이든 우리 소설은 독자와의 소통을 모색할 때가 왔다"고 지적했다.
한편 평론가 김주연씨는 계간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기고한 글에서 최근 문학 작품과 비평이 현실을 도외시한다고 성토했다. 김씨는 "품위와 교양은 지배문화라는 이름으로 폄하되고, 범죄와 패륜에 가까운 엽기는 전복과 전위라는 이름으로 옹호된다"며 "전복과 전위는 보다 인간적이고 훌륭한 삶을 성찰하면서 현실과 규범을 재해석할 때 정당성을 갖는다"고 썼다.
중국 작가 위화(余華)의 사회적 소설을 호평한 김씨는 "20여 년의 독재, 권위주의 시대가 우리 소설 속에서 설득력있게 묘파된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어 "당대의 핵심을 그린다는 점에서 이청준, 김주영, 황석영, 김원일, 윤후명, 김훈 등이 한국 소설의 젊은 현역"이라며 "소장 작가들은 답답한 골방으로의 유폐에서 탈출해 문학적 혁명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권고했다.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8/h2007082018255684290.htm
|
|
|
글터 → 명언 / 격언
|
비통에 젖어 본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남을 동정할수 있다. / J.G.
|
|
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말은 곧 생각이다
마음이 굳게 정해진 사람은 말수가 적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결정할 때 역시 말을 적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을 많이 하면 어떤 일도 순탄하게 시작할 수가 없다. 굳이 말을 해야 될 경우라면, 가능한 한 간단명료하게 끊고 맺어야 한다. |
|
|
글터 → 철학 / 사상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2. 유불 논쟁
2. 유불 논쟁의 주요 논점들
유불조화 가능성에 관한 논쟁-유학 독존주의와 유불 조화주의의 대립
정도전은 유학적 기준을 전젤 한 불교 사상의 이단성, 멸인륜성, 비합리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불교의 무용성 혹은 폐해성을 지적하여 유학과 불교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으므로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한 정도전의 현실적인 지향점은 불교를 대체한 유학 독존의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의 현실적 지향점인 '유학의 명교' 혹은 '유학의 도'를 중심으로 한 유학 독존의 정립은 역성 혁명의 전면에 서서 기존의 주도 세력이었던 불교를 배척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이념과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한 경세가로서의 의욕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정도전의 사고에는 맹자와 한유 이래 주자학들의 의식에 깊게 각인된 극단적 유학 정통주의에 근거한 유학 독존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정도전은 이러한 유학 독존의 타당성을 앞서 본 바와 같은 불교 자체에 대한 이론적 변론 외에 중국에서 불교가 전래된 이래 끼친 현실적 폐단들의 예증을 통해 불교의 무용성 또는 폐해성을 드러냄으로써 확보하려고 하였다. 즉 한의 명제가 불교를 들여와 불교 폐해의 시단을 열었고, 양의 무제는 불교를 깊이 신봉하여 결국은 나라를 기울어뜨리고 자신은 죽임을 당했으며, 당의 대종은 불교의 응보설을 믿고 부처를 섬겨 재앙을 막으려고 했으며 또 대신들과 더불어 불사를 논하기만 하였으므로 마침내는 형정이 문란하게 되었다는 지적이 그것이었다. 이는 주로 예법과 형정에 의한 유학의 다스림을 정치의 정도로 전제하고, 무차별적인 자비의 실천이나 보응설 등 종교적 교화의 현실적인 무용성과 폐해를 지적함으로써 불교 배척의 정당성을 역설하려는 것이었다. 유학 독존주의에 맞선 기화의 호교론적 대응은 교화를 주된 수단으로 한 불교의 가르침이 유학 중심의 현실 정치에 보완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유용한 것이며, 따라서 유학과 양립이 가능하다는 유불 조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즉 기화는 하늘에서 사시가 순환하면서 만물을 생성하는 것처럼 성인이 가르침을 세워 세상을 교화하는 것도 서로간에 잇고 보완함으로써 최대의 효과를 가져오므로 유학의 가르침과 불교의 가르침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유학은 상벌에 의한 형정을 위주로 한 현실 정치에 장점을 가지고, 불교는 인과의 업보설을 위주로 한 교화에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유학의 형정의 정치는 백성들을 심복시키기에 부족하므로, 이상적인 정치를 이룩하려면 불교를 통해 이들을 심복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학과 불교는 서로 배척할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기화의 논지였다. 결국 유, 불의 조화 가능성을 둘러 싼 논쟁은 유학자들의 배타적 유학 독존주의와, 불교측의 절충적 유불 조화주의 사이의 대립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지향
본뜻 : 목적, 목표를 가리키는 이 말은 본래 철학 용어로서, 어떤 대상에 대한 지향성이야말로 인간 심리의 본질적 성격이라고 한다.
바뀐 뜻 : 일정한 목표를 둔 방향으로 의지가 쏠리는 것을 말한다. 어떤 단계를 부정하면서더 높은 단계로 올라서는 일을 가리키는 지양이라는 말과 혼동하기 쉽다.
"보기글" -그는 지금 아무런 지향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며 구름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통일을 위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일은 남북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각계의 노력입니다
질곡
본뜻 : 질은 죄인의 발에 채우는 차꼬이고, 곡은 죄인의 손에 채우는 수갑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손과 발이 묶여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자유를 가질 수 없도록 몹시 속박하는 일을 말한다.
"보기글" -해방을 맞은 우리 나라는 일제 통치의 오랜 질곡에서 벗어나 모처럼 자유를 만끽하였다 -가난이라는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 부모님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셨는지 모른다
|
|
|
글터 → 세계사
|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20세기의 숨은 전쟁 - 스페인 내전과 보스니아 내전
먼 나라의 전쟁
` 우리에게 전쟁은 낯설지 않다. 해마다 한두 번은 듣게 되는 먼 나라의 전쟁 소식이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통해서 전쟁은 우리 일상 속에서 익숙한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은 뛰어난 방송 기술 덕택에 생생한 전쟁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듯 먼 나라에서 들려오는 전쟁의 이야기는 그것이 일촉즉발의 위협이든 비극이나 참상, 인류의 죄악이든 안전한 곳에 있는 우리에게 흥미는 줄 수 있을지언정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것이 유가 상승이나 국제 경기 침체 등의 문제조차 야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쟁이 제공해 주는 스펙터클 속에서 그 전쟁의 의미나 배경에 대해 진지하게 따져 묻는 일에 소홀해지기 쉽다. 이번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이 먼 나라의 전쟁들이다. 스페인 내전과 보스니아 내전이 그것들인데, 이 두 내전은 세계 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처럼 상업 영화의 집중 조명을 받을 만큼 장대한 스펙터클을 제공해 주지도 못했고,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큼 주변 국가들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 그래서 이 전쟁들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 볼 기회조차 제공해 주지 못한 전쟁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20세기의 세계를 극적인 방식으로 압축하여 보여 주는 사건들이라는 점에서 한번쯤 진지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전쟁들이다. 스페인 내전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과 그 좌절을 증언하는 20세기 초반의 사건이었다.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 전세계의 노동자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이 스페인으로 모여들었다. 그 행렬에는 우리가 잘 아는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조지 오웰 등도 끼여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파시스트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그들의 투쟁은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반면 보스니아 내전은 20세기 말 냉전의 종식과 이념의 붕괴 뒤에 불거져 나온 참혹한 (그리고 민족주의의 허망함을 보여 주는) 민족 전쟁이었다. 게다가 이 전쟁은 민족간의 증오와 전화의 불씨를 안은 채 아직 완전히 종결되지 않고 있다. 이 두 전쟁 모두 우리로서는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나 그에 대한 진지한 조명을 접하기 힘들다. 전자의 경우는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데다 현재의 시류와 다소 동떨어진 이념 대립이라는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후자의 경우는 정보는 과잉되었지만 시간적으로 너무 가까운 사건이라 전체적인 조망을 얻기는 아직 이르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최근 이 전쟁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영화 몇 편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다. 물론 영화가 허구라는 점에서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전쟁의 속내를 생생하게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그 전쟁에 대한 입장과 평가에서 동시대인들에게 논쟁거리를 제시했다는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영화들을 통해 두 전쟁을 논쟁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단지 역사적 사실들을 정리하는 것을 넘어 이 전쟁들에 대한 동시대인의 논쟁적 시각을 들여다보는 것도 역사 읽기의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
|
|
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7.내일을 위한 건배
자신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당신은 완전주의자인가? 전부가 아니면 전무의 생활방식은 자기 자신에게나 상대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무거운 짐을 지운다. 노력가라면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한다. 조금씩이라도 전진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과제를 이루어 놓고 다음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완전주의자는 단번에 만능의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그래서 하찮은 일로도 금방 자포자기한다. 완전주의자는 언제나 자신을 수준 미달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까지도 불완전한 사람으로 치부하고 그런 불완전한 타인은 완전주의자의 정연한 소우주의 침입자라고 간주한다. 양탄자 위에 올라가지 말아요. 오늘 아침 막 청소했으니까. 생활에 사소한 이상만 생겨도 완전주의자의 퓨즈는 갑자기 끊어진다. 또 자질구레한 일에 지나치게 구애받기 때문에 이것으로 됐어 하고 좀처럼 마음을 놓지 않는다. 자신이 아무래도 사소한 일에 너무 시간을 낭비한다.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되면 깊이 명심하라. 문제없는 부부, 흡족한 인생, 항상 햇빛이 비치는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수 또한 인생의 일부이다. 자기의 잘못도 타인의 잘못도 용서할 수 있다면 불행한 나날은 곧 사라질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사과 파이가 조금 눌은 정도의 일로 스토브가 곧 폭발해 버릴 것처럼 야단법석을 피울 필요는 없다. 완전주의자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사물을 전체와의 균형을 생각해서 바르게 보는 눈이다. |
|
|
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홀아비로 살 적에 기생을 거절한 이자건
이자건(1455-1524)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건지이다. 성종 11년(1480)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왕 1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를 모시던 기생이 있었는데, 이자건이 홀아비가 되자 그의 집에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집에 딸아이가 둘이 있어 기생과 함께 살 수 없다"
이자건은 기생을 물리치며 돈과 물품을 후히 주어 돌려보냈다.
연산군 때 직언을 하다 미움을 받아 선산에 귀양갔는데, 선산부사가 매우 박대하였다. 하루는 의금부의 관리가 온다는 말을 듣고 그 부사는 곧 군사를 거느리고 이자건이 살고 있는 집을 에워싸고 이자건을 불러 뜰 아래에 꿇어 앉혀 놓고 온갖 방법으로 다그치고 욕보였다. 그런데 의금부 관리는 다른 일로 이곳을 지나게 된 것이었다. 의금부 관리가 지나간 뒤에, 부사는 열쩍어 하며 돌아갔다. 뒤에 이자건이 황해 감사가 되었는데 그 수령이 마침 안악군수로 있다가 이를 알고 사직하고 떠나려 하였다. 이자건이 안악군에 당도하여 따뜻한 말로 위로해 타이르니 그 수령이 감읍하였다 한다.
벼슬은 공조,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공간이다.
|
|
|
글터 → 이글저글
|
유토피아
"하루 세 시간씩, 일주일에 사흘 동안만 일하고 나머지는 놀고 지내는 회사는 없을까. 대신 월급은 지금의 열배 쯤 주고 말이야." "얘, 그런 유토피아 같은 소리말아."
유토피아 즉 이상향이다. 유토피아란 아무데도 없는 나라의 뜻. 16세기 영국의 인문주의자 '서 토마스 모아' (1478-1533) 라틴어로 쓴 책 이름에서 비롯된다. 이 유토피아란 나라는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로 가난을 모르며 돈도 없다. 하루 여섯 시간씩 일하며 나머지 시간은 독서와 음악 따위로 즐긴다. 육체의 건강을 중시하고 병을 죄로 여기며 남녀 평등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다. '서 토마스 모아'는 그 당시 전 유럽에 이름을 떨친 인문학자로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헨리' 8세의 종교개혁에 반대했기 때문에 런던탑에 투옥되었고 마침내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
|
|
글터 → 명상/지혜/처세
|
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4장 완전한 기쁨을 주는 인생 수업
목숨보다 소중한 명예
겡헤이 야시마의 싸움에서 헤이가의 대장 가케키요와 모리츠구 등은 어떻게든 미나모토노 구로 요시츠네를 치고 싶어서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어찌된 일인지 요시츠네는 손에 들고 있던 활을 놓쳐 버렸다. 활은 물결을 따라 휩쓸려 내려갔다. 요시츠네는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손이 닿지 않자 물결을 따라 쫓아갔다. 그런데 그 모습을 헤이 가의 사람들이 발견하고 이때다 하고 요시츠네를 향해 배를 저어 왔다. 그들은 갈퀴로 요시츠네의 갑옷을 거머잡고 끌어당겼다. 요시츠네는 칼을 빼어 들고 그것을 막으면서 겨우 활을 주워 위험한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돌아왔다. 혼비백산한 시종들이 그가 무모한 짓을 했다며 탓했다.
"공께 활 하나쯤이 뭐가 중요합니까. 쓸데없는 것 때문에 소중한 목숨을 가볍게 여기시면 안 됩니다." 요시츠네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활이 아까웠던 게 아니야. 이름을 아꼈던 거지. 그 활이 강도가 강한 활이었다면 그대로 흘려 보내도 상관없겠지만 보통 활보다 강도가 약한 활이라 주웠던 것이다. 이 요시츠네가 그렇게 형편없는 활을 가지고 있었다고 후세에까지 전해져 영원히 웃음거리가 되는 걸 견딜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한사코 주우려고 했던 거다."
요컨대 요시츠네는 물결에 휩쓸린 활이 약한 활이었기에 후세에까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두려워 위험을 무릅쓰고 끝끝내 그것을 주웠던 것이다. 이 일화의 초점은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름을 아낀다'라는 것에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미 쉰 살을 넘긴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틀림없이 큰 감동과 함께 이 일화를 가슴 깊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는 세대가 떨어진 젊은이들이 과연 이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이름을 아낀다'고 하는 것이 봉건 사회에서 이른바 무사도의 골격을 이루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봉건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름을 아낀다'는 행위도 귀중한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어리석은 봉건적 잔재로 매도당했다. 그러나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름을 아낀다는 행위가 앞에서 예로든 요시츠네의 일화와 같은 형태를 취할 때는 오히려 그것이 자기 존재에 대한 차원 높은 책임감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시원한 감동을 안겨 준다. 그런 뜻에서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름을 아낀다는 행위는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시대에서나 새로운 생명을 갖는 덕목이 된다. 그런 덕목까지 그릇된 봉건적 잔재와 더불어 한데 몰아 버려서는 안 된다. 특히 세상이 요즘처럼 혼란할 때는 더욱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요즘 세상이 이토록 혼란한 까닭은 그렇게 차원 높은 책임감이 각자의 마음에서 너무나 쉽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래된 것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름을 아낀다'는 신념처럼 언제까지라도 새로운 빛을 발하는 중요한 덕목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
|
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
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세번째 이야기 눈먼 남편을 위해 자신의 눈을 찌른 아내
어느날 루까노르 백작이 조언자 빠뜨로니오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빠뜨로니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많은 전투로 인해 적지 않은 재산을 잃었소. 그런데 부하 중 몇몇은 나의 호의를 그토록 많이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해 곤경에 빠뜨렸다오.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더 이상 예전처럼 사람을 신뢰할 수가 없다오.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니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조언을 좀 해주시오." "백작님, 만약 당신을 곤경에 빠뜨린 사람이 다음 이야기 속에 나오는 세 기사들과 같은 사람이라면, 또 그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더라면 결코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없었을 겁니다."
옛날에 로드리고라는 백작이 살고 있었지요. 그는 훌륭한 아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구실을 들어 아내를 괴롭혔습니다. 남편의 학대에 견디다 못한 아내는 신에게 기도하기를 만약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자신에게 벌을 내리고 그렇지 않으면 남편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했지요. 그러자 신은 기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남편에게 나병이라는 형벌을 내렸고 그 후로 그들은 헤어졌지요. 그 소식을 들은 나바라 왕국의 임금은 사절을 보내어 그녀에게 구혼을 했답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나바라의 왕비가 되었지요. 한편 로드리고 백작은 자신이 나병에서 결코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성지에서 죽기 위해 순례를 떠났답니다. 그에게는 막강한 권력과 훌륭한 부하들이 많이 있었지요. 하지만 막상 성지를 향해 떠나려 하자 세 명의 기사만이 따를 뿐 아무도 그를 계속 섬기려 하지 않았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세 명의 기사만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성지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하게 되자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본국을 떠날 때 가져온 재물도 바닥이 나서 결국에는 백작에게 먹을 것조차 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요. 그래서 세 명의 기사들은 품삯일을 해야 했지만 밤이 되면 그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백작을 목욕시키고 나병의 종기를 씻어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들은 백작의 다리를 씻겨주다가 입에 침이 고이자 그것을 뱉어내었지요. 그러나 백작은 기사들이 자신의 상처 때문에 구역질이 나서 침을 뱉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비탄에 빠져 슬피 울었답니다. 그러자 기사들은 오해를 풀기 위해 백작을 씻기고 난 고름으로 뒤덮힌 물을 한손 가득히 담아 단숨에 마셔보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백작이 죽는 날까지 비참한 생활을 보냈지요. 백작이 죽고 나자, 그들은 주인도 없는데 돌아가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여 본국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백작을 화장시키고 뼈만이라고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지요. 그러나 기사들은 백작이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고 나서도 그의 몸에 손대는 것이 불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장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백작을 땅에 묻고 백작의 몸이 모두 흙으로 변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지요. 세월이 흘러 백작의 몸은 흙으로 변했고, 그들은 백작의 뼈를 상자에 담아 본국을 향해 떠나기로 했답니다. 때로는 상자를 둘러멘 채 구걸을 해가며 여러 나라를 지나가야 했지요.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두었습니다.
그 가련한 기사들이 똘로사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부인을 화형시키겠다며 모여 있었는데, 그 부인은 간통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만약 부인을 위해 싸울 기사가 있다면 그녀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싸울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지요. 이 소식을 들은 충직한 기사 뻬드로는 만약 그녀가 진실로 죄가 없다면 자기가 그녀를 위해 싸우겠다고 동료들에게 말했답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진실을 물어 보았지요. 그러자 그녀는 마음 속으로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했었지만 실제로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기사는 그녀가 마음 속으로나마 죄를 저질렀다는 말에 그리 썩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마음 속으로 지은 죄로 인해 자신에게도 약간의 불상사가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녀가 실제 행동으로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를 위해 싸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고발한 사람들은 기사만이 싸울 자격이 있다며 거부했지요. 그러자 뻬드로 기사는 이제까지 적어둔 그들의 기록을 보여주었답니다. 그 기록을 보자 그들도 별 수가 없었지요. 부인의 부모는 뻬드로 기사에게 말과 무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결투장에 나가기 전에, 신의 가호로 기사는 명예를 그리고 자기 딸은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자기의 딸이 마음 속으로나마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어떤 불행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습니다. 기사는 신의 도움으로 결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쪽 눈을 잃어버렸지요. 염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 일로 기사는 부인과 친척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고, 덕분에 그들은 별 어려움 없이 본국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충직한 기사들의 소식을 전해 들은 본국의 왕은 매우 기뻐하며 자신의 왕국에 그렇게 위대한 기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신에게 충심으로 감사했답니다. 그리고는 사신을 보내 평소의 누추한 복장 그대로 왕국에 들어와 줄 것을 그들에게 요청했지요. 기사들이 왕국에 도착했을 때, 왕은 말도 타지 않은 채 친히 나가 그들을 맞이하며 그들의 충성심을 치하했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큰 상을 내렸지요. 그 상은 워낙 대단한 것이어서 오늘날까지도 계속 후손들에게 상속되고 있답니다. 게다가 기사들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왕과 신하들은 백작의 영지 오수나까지 동행했고, 백작의 유해를 안장하고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 중 다른 한 명의 기사 곤잘레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부인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에 앉았지요. 그런데 갑자기 아내는 앞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는 하늘을 향해 합장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 날을 보게 해주시다니. 신이시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고기와 포도주는 남편이 떠난 이후로 처음입니다."
기사는 이 말은 듣고 무척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아내는 남편이 조국을 떠나면서 했던 말을 상기시켰습니다. 즉 기사는 백작과 함께가 아니라면 절대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 그동안 자기 부인으로서 명예를 잘 지키라고 했던 겁니다. 그리고는 집에 빵과 물은 절대 부족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그 후로 아내는 어려운 생활에도 남에게 아쉬운 부탁을 하지 않았고, 남편에 대한 신의로 식사 때마다 물과 빵만 먹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기사 뻬드로가 집에 도착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의 아내와 친척들은 그가 돌아온 것을 매우 기뻐하며 웃음으로 맞이해 주었지요. 하지만 기사에게는 그들의 웃음이 잃어버린 자기의 눈에 대한 비웃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망또로 얼굴을 가린 채 슬픔과 탄식에 빠져 병져 누웠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뻬드로가 괴로워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남편 모습을 보다 못해 그 이유를 물었지요. 그러자 기사는 남들이 자기의 눈을 비웃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어디선가 바늘을 하나 가지고 와서는 자기의 한쪽 눈을 찔렀습니다. 남편이 놀라 그 이유를 묻자, 자기의 웃음이 남편에 대한 비웃음으로 오해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세 명의 기사들은 신의 도움으로 행복한 여생을 누릴 수 있었답니다.
백작님, 당신께 그런 짓을 한 사람이 앞에서 얘기한 세 명의 기사와 같이 충직한 사람이거나 자신들이 이제껏 누린 호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짓은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백작님을 저버린다고 선행을 중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나쁜 짓은 백작님보다도 그들 자신에게 더 해가 될 테니까요. 그리고 백작님께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백작님을 충심으로 섬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백작님께는 배신보다 충성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아울러 이제까지 잘 대해주었다고 그들이 모두 백작님께 도움을 줄 거라고 기대하셔도 안 됩니다. 그러나 호의를 베풀다보면 언젠가는 그러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 비록 몇몇 사람이 당신을 실망시켜도 호의를 베푸는 것을 멈추지는 말라.
|
|
|
글터 → 국사
|
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제1부 신군부의 만행을 전세계로 타전하다
6. 항쟁지도부 벽에 새겨졌던 '세계평화'
광주라는 단어가 억제할 수 없는 슬픔과 허무를 불러일으킨 지도 어느덧 17년이 지났다. 광주시민들의 분노와 20년 만에 일어난 두 번째 쿠데타에 대한 항거, 그리고 광주에서 자행된 무자비한 살상 이 모든 기억들이 엄청난 공포로 남아 있다. 그 비극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터진 일련의 사건 맥락에서 살펴보면 더욱 정도가 증폭된다.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1979년 10월 26일 직후 약 5개월 동안은 국가적 화합을 달성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18년 독재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은 이제 과거를 묻지 않았다. 박 대통령 지지자들은 정치적 경쟁자들을 감옥에 처넣기보다 협상을 시작했다. 감옥의 문이 열렸고 인권이 회복됐으며 시위관련 학생들과 교수들이 복권되는가 하면 정부에 대한 비판이 허용되었다. 영욕의 한국정치사에서는 이례적으로 기존의 각 당은 국회에서 직선 대통령선거를 통해 민주정부를 탄생시킬 신헌법을 만들 것에 합의했다. 심지어 대통령후보자들도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그 모든 것을 짓뭉개버렸다. 지난 1995년, 1980년 정권찬탈 당시 사회정화를 내세웠던 전두환과 그의 군대 동기 노태우는 연이어 대통령직에 있었으며 6억 달러가 넘는 비자금을 조성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들의 쿠데타에 대한 뻔뻔함은 증폭된다. 한국은 여전히 정화가 숙제로 남아 있고 1980년 5월 17일 직전에 피어났던 국가적 화합은 아직도 요원하다. 더욱이 1987년 '피플 파워'는 단 두 사람의 희생으로 권위주의 통치를 종식시켰고 이는 1980년 광주에서 자행된 살상과 비교할 때 큰 차이를 보여준다.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지난 1980년 광주의 3일간 군대 만행으로 빚은 희생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군대의 만행은 이내 7일간의 광주사태로 치달았다. 수년 동안 많은 남한인과 몇 명의 미국인은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들춰냈다. 미국은 사실상 비난 또는 적어도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광주에서 미국의 군대사용 지지에 대한 잘못된 비난은 숙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 정부는 광주사태 훨씬 전부터 실수를 저질렀다. 지난 1979년 11월 워싱턴은 최규하 정부가 약 20개월간 (1981년 6월까지) 독재로부터 민주적 통치로 이르는 과도기에서 새헌법을 만든다는 계획을 지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워싱턴은 과도정부에 대한 한국민들의 인내가 1년 이상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서울 주재 미국 외교관들의 보고를 무시한 채 최규하 대통령의 계획을 지지했다. 더욱이 그 불필요한 오랜 기간은 무명의 장군 전두환이 정권을 잡을 기반을 쌓는 데 정확히 필요한 시간이었다. 한국은 1980년 5월께 대통령선거 분위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사실인즉 모든 것은 김종필과 김대중, 김영삼의 대결에 초점이 모여졌다. 지난 1987년 대선처럼 여당 후보인 김종필이 갈라선 두 김을 제치고 당선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만일 과도기가 자의적으로 고정된 기간이 아닌 민주정부를 위한 틀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면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킬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전두환에게 고분고분했던 이유로 '추장'이라고 불린 최규하 대통령은 20개월 과도기 계획을 변경하는 것을 반대했다. 전두환은 중장으로 승진한 뒤 최 대통령으로 하여금 자신을 그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직무대리로 임명케 했다. 그때는 대통령 선거 날짜에 대한 결정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같은 해 5월 시위학생들은 선거날짜를 결정할 것과 1979년 10월 27일 선포된 부분적 계엄령을 해제하고 전두환의 중앙정부부장직 사임을 요구했다. 당시 학생들의 주장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워싱턴 미 국무부의 톰 레스톤 대변인은 전두환이 계엄령확대와 모든 정치적 활동 금지령을 내리기 이틀 전에도 20개월 과도기라는 카터 정부의 지지를 되풀이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를 순방하고 있을 때 막후 세력자 전두환은 5월 13일 대규모로 시작된 학생시위를 격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찰은 10~15명으로 짜인 시위학생들의 대열이 서울 거리로 진출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또한지난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집회 이래 가장 많이 모인 시위대의 집회를 허용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국회로 향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비록 학생들은 3일 후 최 대통령이 돌아온 다음날인 5월 17일 밤 '경복궁 쿠데타'를 감행했다.
전두환은 1996년 법정에서 북한의 위협이 정권을 찬탈하도록 강요했다고 진술했다. 사실 전두환이 이끈 정부는 당시 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 DMZ에서 두 번의 총기발사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전두환의 목을 죈 것은 최 대통령이 대통령 직무를 맡은 후 5월 20일 국회가 처음 열린다는 점이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감행하던 그날 밤 신문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끌었던 여당이 야당과 연대하여 부분적인 계엄령 해제를 명령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회의 조치는 전두환이 정치적 힘을 행사할 권한을 빼앗는 것을 의미했다. 최 대통령은 계엄확대 선포 배경을 설명하면서 북한의 '군사이동'과 학생들 시위로 인한 '사회동요'를 제기했다. 하지만 서울의 미군 대변인은 북한의 군대이동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밝혔다. 따라서 외신기자들은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일본의 여당인 자민당이 잠시 두 개로 분열, 야당의 수상에 대한 불신임이 가결되자 필자와 워싱턴포스트 도쿄 총국장은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을 지배해온 정치구조가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을 취재하기 위해 5월 17일 밤 항공기편으로 도쿄로 날아갔다. 그리고 전두환이 계엄령을 확대한 뒤인 5월 18일 밤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며칠 전 서울 거리로 용감히 진출했던 학생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5월 19일부터 28일까지 언론인들의 연좌시위를 제외하곤 서울 어디에도 시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5월 18일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서울에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게다가 광주사태와 군대의 잔인함에 대한 보도는 5월 19일 늦도록 국제적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날 메인 뉴스는 계엄령 법정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내린 사형판결에 대한 대법원의 확정판결이었다. 필자가 송고한 기자 중 광주에 대한 기사는 단지 한 문단뿐이었다. 그 기사는 "서울의 소식통들이 광주에서 적어도 5천 명의 시위 군중이 경찰과 싸우고 있으며 4백여 명이 체포됐다고 전했다"는 내용이었다. 필자는 또 기사에서 시위군중이 김대중씨 체포를 비난하고 있다고 말했다. 5월 20일에 이르러서야 광주의 희생에 대한 첫 공식 보도가 있었다. 2명의 시위자가 살해됐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다음날인 21일 광주는 한국과 전세계의 의식 속에서 폭발되었다. 계엄통제본부는 전면적 보도검열을 끝내고 소위 광주의 '폭동'이 '통제를 벗어났다'고 공식 인정했다. 계엄통제본부는 광주시민 5분의 1 가량인 15만여 명이 무기 3,505개와 탄약 46,400발을 무기고에서 탈취하는 등 '성나 날뛰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또 시민군들이 장갑차 4대와 지프차 89대, 트럭 50대, 레커차 40대, 덤프트럭 10대, 8대의 페퍼포그를 탈취했다고 덧붙였다. 군대는 5명의 군인과 경찰, 그리고 1명의 시민이 살해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보도는 수많은 심니들이 전남도청을 장악한 가운데 군대에 의해 도청 옥상에서 사살된 11명의 시민을 포함, 사망자를 24명으로 집계했다. 그날 보도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로부터 나왔다. 그는 미국 기자들에게 성실히 브리핑을 했다. 그 기자회견은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처음 가진 것이었다. 그는 광주의 시위는 '완전한 폭동'으로 돌변했으며 도청에 진출하는 시민들에 대한 공격은 결국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고 폭동을 일으키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전두환의 계엄령 확대 결정을 '크게 잘못됐다'고 말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남한과 관련, 나중에 미국을 떠올리고 바로잡는 등 괴롭게 만든 그 성명에서 미국은 질서회복을 위해 군대사용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광주보다는 무질서가 남한 전체로 확대될 가능성을 보다 강조했다. 그러나 그 말은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 고위관리가 광주에 초기 군대파견을 승인한 것으로 잘못 해석됐다. 몇 년 후 리차드 L. 워커 대사는 나에게 전두환이 한미연합사령관인 존 A. 위컴 주니어 장군과 만나 광주의 폭동을 막기 위해 두 번째 군대를 보내는 데 대한 의견을 물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워커 대사는 전두환이 말한 군대가 연합군 지휘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위컴 장군이 전두환에게 그 생각에 대해 '잘못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전두환은 그 말을 미국이 폭동진압을 위해 광주에 군대파견을 승인했다고 이용한 것으로, 그 때문에 미국 정부는 광주사태 이후 그 내박에 대한 진상을 알리는 것을 거부했다고 워커 대사는 말했다. 워싱턴은 결국 긴 보고서를 통해 군대파견에 대한 미국이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위컴 장군과 전두환이 만났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러나 광주문제가 폭발하기 전 워싱턴은 명백히 학생시위에 동조하지 않았다. 한 미국 관리는 계엄확대를 '불필요'하다가 비난했지만 미국은 학생들에 초점이 맞춰진 진압에 반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학생들의 요구는 '매우 급진적이고 좌파적이며 선동적'이었다고 인식했다. 어떠한 도움 없이 한국 관련 기사를 써야 하는 나는 광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광주사태에 대한 나의 견해는 항쟁이 끝날 때까지 광주현장이 아닌 서울로부터 나온 것이다.
계엄사령부는 5월 22일 14페이지짜리 서류를 통해 김대중씨를 광주시위의 선동자로 기소했다. 당시 시위는 전라남북도로 확산됐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김대중씨 체포로 촉발됐다. 기소문은 어떤 구체적 증거도 없이 김대중이 좌파 성향을 지녔고 지난 1973년 해외에서 한 연설에서 북한을 도왔다고 밝혔다. 1973년 중앙정보부는 그를 도쿄에서 납치하여 서울로 데려왔다. 나는 반복해서 정부 관리에게 김대중이 어떻게 감옥에서 폭동을 모색했는지 설명해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5월 22일 국무총리 서리로 지명된 박충훈이 헬리콥터로 광주 외곽에 있는 주둔군대를 방문, 계엄사령부가 주장한 성명을 발표했다는 기사를 썼다. 계엄사령부 성명은 폭동이 권위적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이 반정부 세력을 지칭할 때 사용하곤 했던 '불순세력'에 의해 선동됐다고 말했다. 검열을 통한 한국 신문들은 광주소재 (주)한국화약 창고의 다이너마이트 탈취 같은 시위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강조했고 군대의 잔인한 행동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러나 신문들은 김대중씨 고향인 목포에서 열린 10만여 명의 시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이는 전라도 주민들이 마지막 야당 대통령후보인 그들의 영웅을 체포한 데 대해 폭동을 일으켰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5월 22일 기사에서 전라남도 26개 시군 중 16곳에서 시위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그중에는 광주에서 10만여 명의 군중이 군대가 철수한 뒤 도청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던 것도 포함된다. 그 기사는 또 시위자들이 김대중씨의 석방과 전두환의 사퇴를 요구한다고 보도했다. 계엄확대가 실시된 첫 주 동안 다른 곳에서 특별한 시위 없이 막바지에 이르자 광주사태는 전두환 권력찬탈의 방해물로 더 큰 의미를 가졌다. 5월 23일게 관심은 폭동을 평화적으로 끝내려는 노력이 모아졌다. 5월 24일 테리 앤더슨(당시 AP통신 기자)이 광주의 병원들을 취재해 사망자가 적어도 107명으로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크다고 보도했다. 반면 전두환의 계엄사령부는 김재규를 그날 사형집행하는 등 평상시 모습을 보여줬다. 5월 26일 광주의 리더들은 161명의 사망자 이름을 집계하고 고랑과 빈터 등 여러 곳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100구의 시신을 모았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5월 27일 새벽 모든 것이 끝났다. 군대가 새벽 3시 30분 시내로 진입, 도청에서 고등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강경파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보도에 따름녀 학생들은 후배에게 '너희들은 죽기엔 너무 어리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폭동진압에 대한 이야기를 모은 나는 운전사가 딸린 렌터카를 타고 광주로 갔다. 그러나 광주로 들어갈 다른 방도는 없었다. 나는 그때 "말문이 막힌 주민들은 집 앞에 서 있고 가게문은 닫혀 있다. 그들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7일간의 폭동은 끝났다. 광주는 군대의 통제하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광주교도소에 있다"고 보도했다. 나는 또 "적어도 4명씩 M16으로 무장한 군인이 모든 교차로를 지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계엄사령부는 마지막 공격으로 17명의 무장 폭동군과 2명의 군인이 죽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보도들은 사망자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군대가 공격할 당시 적어도 200여 명의 무장 폭도가 도청 안에 있었다고 전했다. 도청을 가로질러 체육관 안에는 61개의 관이 줄지어 있었다. 기위 초반에 희생당한 이들의 시신은 친인척에 의해 이미 신원이 확인되었다. 관에 놓인 사진들은 많은 젊은이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중년 여인과 7살 먹은 아이의 모습도 있었다. 광주시민들은 100개의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가 도청 안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기자들이 도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5월 31일 계엄사령부는 광주의 10일간 시위에서 시민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모두 170명이 사망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또 보고서는 76명의 시민들이 다른 시민들에 의한 사고와 살인으로 죽었다고 주장했다. 최근의 240명이라는 공식 사망자 숫자는 지난 1995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경찰이 조사를 명령, 발표된 것이다. 김 대통령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광주학살 관련 기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27일 광주시민들은 폭동을 점화시킨 공수부대의 잔악상을 폭로했다. 공수부대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레스토랑과 커피숍에서 끌어내 거리에서 개처럼 두들기고 곤봉으로 내리쳤다. 공수부대는 구경꾼들에게도 접근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잔인함은 심지어 경찰이 그들의 직분을 포기한 채 시위자들에게 무기를 주게 만들었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더욱 시민들을 화나게 만든 것은 5월 18일 광주에 온 군인들이 오랫동안 전라도를 차별했던 경상도 출신 공수부대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광주를 떠나던 마지막 날 음식가게만이 문을 열고 있었다. 시내 거리는 여기저기 몇몇 보행자와 자전거, 오토바이가 보일 뿐 버려진 상태였다. 군대 지프차와 레커차가 다 타버린 버스와 승용차, 군대차량을 견인하고 있었고 그 밖의 어떤 자동차도 없었다. 신호등도 작동을 멈추었다. 도청에서는 군인들이 파괴된 자동차를 옮기기에 바빴다. 차량 위에는 '김대중 석방! 전두환 타도!'라고 적혀 있었다. 군대는 날이 저물자 도청 앞 다른 한편에 높게 세운 목재 타워를 철거했다. 슬로건의 일부분이 되었던 모든 말들은 이미 지워졌다. 그럼에도 두 단어는 생생히 남아 있었다. 다름 아닌 '세계 평화'였다.
|
|